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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스님 출가인연 이야기
"본래 출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절집에 들어와 50년 가까이 살아 보니 이것도 운명인 것 같습니다."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스님은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 소설에서부터 위인들의 전기물 등 다양한 책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가 있으면서도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휴가 때 우연히 들른 조계사에서 <반야심경> 법문을 듣고 발심을 했다.
책이나 강의를 통해서 만나지 못했던 감동이 다가왔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독서의 대상은 불교 서적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제대를 하고 꽤 괜찮은 직장에 다녔지만 그리 재미는 없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고 사는데 좋은 직업을 가진 것이 별 의미가 없었어요.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고 해인사의 암자에 잠깐 머물다 출가(出家)가 저의 길이라는 확신이 들어 바로 입산했습니다."
송광사 등 몇몇 큰 사찰을 순례한 뒤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으로 향했다.
당대의 선지식인 경봉스님이 회상을 열었던 당시 전국의 불자들이 극락암으로 모여들었다.
무여스님 역시 경봉스님에게 배우고 싶은 생각이 컸다.
"제가 극락암에 간 날 큰 재가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그랬고요. 사람이 많고 번잡해 '이곳에서는 내가 있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고 깊은 산중에서 수행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경봉스님께 다른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어요. 스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추천서를 써 주셨습니다. 스님께서 '이 편지를 들고 오대산 상원사로 가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경봉스님은 한암스님과 탄허스님, 보문스님 등의 수행 가풍이 살아있는 오대산을 추천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당시 상원사 주지였던 희섭 스님이었다.
"경봉스님께서는 희섭스님에게 저를 거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섭 스님의 제자가 되어 출가를 하게 됐습니다."
무여스님은 10여명의 대중들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스님은 상원사에서의 생활은 오롯이 공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주변의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의심만을 가졌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뭣고?' 화두가 되었다고 한다.
<초발심자경문> 하나만 읽고 7~8년 동안은 일체 책을 보지 않고 참선만 했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출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천수경>을 외우지 못했다고 한다.
"오대산의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나무를 많이 해야 했고 또 겨울엔 하루 종일 불을 아궁이에 넣어야 했습니다. 또 공양주와 채공 소임을 맡다 보니 한가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래도 언제나 화두만을 생각하면서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에 젖곤 했습니다."
행자 시절 은사 희섭스님은 무여스님에게 "부지런히 공부해라. 중노릇 깨끗하게 잘해라. 언제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라"고 늘 당부했다.
한암스님의 손상좌이자 보문스님의 상좌였던 희섭스님은 쌀 한 톨 나물 한 개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알뜰한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
보문스님에 대해 희섭스님은 "그런 스님이 없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스님 없다. 스님의 상좌가 된 것은 한없이 감사한 일일뿐이다"고 무여스님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또 "한암스님, 보문스님을 귀감으로 삼아 수행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방에 다니면서 무여스님도 점차 보문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한번은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인 뒤 성철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며 보문스님의 손상좌라고 얘기했더니 "보문스님은 알짜배기 수좌"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성철스님과 보문스님은 1947년 '봉암사 결사'를 같이 시작한 인연이 있었다.
"보문 노스님은 모범적으로 여법하고 깨끗하게 사신 분입니다. 노스님이 조금만 더 사셨다면 한국불교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노스님은 일 년 내내 누더기 옷만 입고 사셨다고 해요.
또 탁발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대구 보현사에 계실 때는 신도님들이 찾아오면 문을 닫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여법했다고 합니다.
노스님께서는 보현사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당시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노스님께서 은사스님을 부르셨습니다.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다. 죽거든 솜을 준비해 숨이 떨어지자마자 몸의 9개 구멍을 막아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뒤 다비하고 재는 팔공산에 뿌리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하신 뒤 다음날 정말로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다급해진 은사스님이 대구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 신도를 불러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셨어요.
깨어나서 하시는 말씀이 '갈 때 돼서 가는 데 왜 살려냈느냐?'며 호통을 치셨어요.
그래서 그 신도가 머쓱해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보름쯤 뒤에 초파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며 '죽으면 조용히 윗목에 놔두었다가 초파일 끝나고 장례를 치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음력 4월 6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초파일을 앞두고 노스님이 안계시니 신도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할 수 없이 은사스님이 초파일 저녁에 노스님의 입적을 알렸습니다.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이 가시는 시간까지 예언할 정도로 수행을 잘하셨던 분입니다.
조사열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무여스님은 "이외에도 마취도 하지 않고 대수술을 하신 이야기, 김천역에서 봉암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속가 동생을 만나고도 단호하게 물리친 이야기, 대구에서의 탁발 이야기, 선원에서의 갖가지 에피소드 등 보문 노스님과 관련된 일화들이 수없이 전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어떤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 존경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노스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여스님이 노스님인 보문스님을 생각하는 것은 여느 스님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평생을 수좌로 살아오면서 수행한 것 역시 어쩌면 보문스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선(禪)의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있는 무여스님에게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된다면 보문스님을 모실 수 있습니까?"
"노스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금생에 뵙지는 못했지만 저와는 특별한 인연이니까 자연스럽게 가까워지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더 특별한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뵙게 되면 공부에 대해 많이 여쭙고 배우고 싶습니다. 노스님의 경책을 직접 받을 수 있었다면 제가 더 공부를 잘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며칠 후면 노스님 기일입니다. 축서사에서 보문 노스님 추모법회를 올립니다. 일단 보문 노스님 추모법회부터 여법하게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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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 스님은 190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31살 때인 1936년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마하연으로 입산했다.
그 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오대산 적멸보궁, 통도사 극락암, 통도사 내원암 등에서 정진했다.
41살이던 1947년에 성철, 자운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다.
결사 후 보은 법주사 복천암선원,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 합천 해인사 선원, 김천 직지사 천불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1953년에는 대구 팔공산 삼성암에서 수행했으며 1955년부터는 대구 보현사에서 후학들을 제접했다.
1956년 음력 4월 6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열반에 들었다.
많은 제자를 두었던 한암스님은 "내 상좌 가운데 선(禪)에 대한 지견이 투철한 사람은 보문이 뿐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선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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