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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 과연 성경적인가?(上)
김동수 교수(평택대 신학과) l 등록일:2015-03-31 11:50:39 l 수정일:2015-04-02 14:26:18
최근 노우호 목사의 방언 검증론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facebook)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실 공개적으로 책은 발간되지 않았지만(회원에게만 판매 됨), 그의 강의가 유투브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책 요약본이 페이스북에 돌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방언은사 부정론이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반대는 주로 은사중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은사중지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본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을 넘어선다. 방언의 은사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잘 몰라 잠시 착각하여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생각했었으나(고린도전서 12-14장)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린도후서 11장)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최근에 그의 책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를 입수해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방언을 검증하자는 그의 주장과 논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면밀히 분석해 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게다가 논리 또한 허점투성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과연 올바른 성서적 근거에 기인했는지 여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그의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그 사람은 체험이 없어서 엉터리 해석을 하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언은사 부정론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 교회에서 행하지는 방언은 100% 가짜다. 자신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의 은사를 검증해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본래 없었고,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였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해 본 결과 외국어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주장에는 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 왜곡된 지식과 편향된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언이 외국어라고?
노우호 목사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순환논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전제와 똑같다. 그는 자신이 전제하는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선언할 뿐, 바울의 편지글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통해 방언을 검증했다. 노 목사는 ‘방언’을 가리키는 ‘글로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지방어’이기 때문에 방언은 실제 언어인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글로사’의 의미를 일반 용법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헬라어에서 ‘글로사’의 기본 뜻은 ‘혀’다(막 7:33). 영어에서 모국어를 ‘mother tongue’이라고 하여 ‘언어’를 의미하듯이, 헬라어 ‘글로사’도 ‘언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행 2:11). 또 환유에 의해 이것이 ‘공통 언어를 쓰는 나라 혹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다(계 5:9). 바울이 ‘방언을 말하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 ‘글로사’는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10). 바울이 열거한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모두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고전 12:1, 7)을 의미한다. 그런데 학습이 가능한 외국어가 성령의 은사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또 바울이 설명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는 구절에서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님을 암시한다. 아울러 방언이 이성이 아닌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언을 통역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잘 아는 통역사가 아닌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어서 바울은 방언이 공적으로 행해졌을 때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고전 14:6-19), 인간의 언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외국인이 된다고 비유하는데(10-11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과 외국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외국어가 인간의 언어라면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방언을 외국어인가로 검증한다고?
위에서 본 대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면 노우호 목사가 방언을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검증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그는 37년 동안 방언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아닌 것으로 검증하느라 헛수고를 한 것이다. 방언의 진위 여부를 그것이 실제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엉뚱한 생각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 통역 은사의 목적이 방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의 은사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배 가운데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하는데, 그 조건은 그것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다(고전 14:5). 만약 통역이 되면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고전 14:13). 예언이 위로, 책망, 권면을 통해 듣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라면(고전 14:3), 방언도 통역을 통해 사람들을 세워 주는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목적은 예언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하라고 한 일이 없다. 만약 있다면,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올바로 신앙고백을 하는가에 해당할 것이다(고전 12:1-3).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9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는 영 분별의 은사다. 영 분별의 은사란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고전 12:7)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은사다. 다른 이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의 출처가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즉시 분별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첫 선교 여행지인 구브로에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자마자 보였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1)고 말했다. 바울이 바예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런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행 13:10). 그래서 혹 어떤 사람의 방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분별해 낼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녹음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 해석이 동일해야만 참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방언통역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의 주장 자체가 방언이 외국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실제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신자의 기도라면 통역의 범주는 그 기도 전체라기보다 그 사람의 위로와 책망과 권면의 필요에 따른 일부분이다. 또 통역의 은사 자체도 그것이 통역자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읽어도 다른 설교가 나오듯이, 같은 방언이라도 통역하는 사람의 언어와 신학으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제시하는 방언 검증의 원리로 제시된 사랑과 교회건덕(96-98)도 검증의 원리로써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따라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는데(고전 12:31), 그 전제는 그 은사가 진짜라는 것이다. 은사의 진위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고전 13:1-3). 바울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지, 사랑이 없이 사용되는 은사가 가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세운다고 했지 교회를 세운다고 하지 않았다(고전 14: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로 방언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또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 대한 분별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예배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이 그 예배 가운데 그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4:29).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노우호 목사의 주장 중 그가 매우 중점을 두는 것 중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실상을 잘 모르고 처음에는 은사로 인정했다가 후에 취소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0-12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 목사는 역사비평적방법론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실상을 알고 은사로 인정한 사실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하는가? 흥미롭게도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방언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구절은 두 절이다. 첫째,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해도 잘 용납한다는 것이요(고후 11:4), 둘째,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는 것이다. 노 목사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일꾼(그는 개역한글번역을 사용하여 “궤휼의 역꾼”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이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는 “궤휼의 역꾼”을 고린도교인 전체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교인 전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바울이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방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대한 그야말로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은 고린도교인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었다(고후 10:12, 18). 바울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이들을 바울의 반대자 혹은 대적자라고 부른다. 최근 발행된 한 신약개론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대적자들은 분명히 당시에 회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방문자들로서, 그들은 회중과 함께하는 바울 사역에 어떤 위협을 초래”했던 자들이다(I. Howard Marshall 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62. ).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자들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신약개론 책이나 고린도후서 주석 책 한 권만 읽어도 해결되는 문제를 노우호 목사는 말도 안 되게 풀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그친 것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에는 그쳤다고 말한다. 그는 표적이 나타날 때의 순간성과, 이 표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 나타날 필요성을 착각한 것 같다. 표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순간적이지만, 그 체험은 다른 곳에서 성령이 임할 때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다. 만일 노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에서 각각의 저자는 이러한 표적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썼다는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또한 성령이 임하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16:9-20) 저자는 예수 믿는 곳에 방언을 비롯한 여러 표적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고, 누가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사람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행 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엉뚱하다. 성서적 근거도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 비약도 심하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그가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얻은 신뢰일 것이다. 둘째, 그는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학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칼빈을 신봉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는 매 은사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투로 칼빈의 주장을 소개한다(70-83). 셋째, 그의 주장이 체험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약 성경 구절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번역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적, 나아가서 비평적 해석까지 곁들여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일정 부분 신뢰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 해석은 초보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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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 과연 성경적인가?(下)
김동수 교수(평택대 신학과) l 등록일:2015-04-05 22:52:30 l 수정일:2015-04-06 16:59:34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본래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보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몇몇 구절들을 잘못 번역했거나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든다.
1.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흔히 방언 기도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잘못된 방언을 꾸짖는 것이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교정하는 것이다(115).
2.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하는 자가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교회를 세우는 것에 반대된 것이다. 곧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3.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에서 동사는 가정법인데 이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올바른 번역은 “내가 만일(ean=if)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de=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이다(118).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도 영과 이성으로 모두 기도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방언 기도가 있다면 미래에 영과 마음으로 번갈아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라는 말이다.
4.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했다고 하고 또 방언을 하라고 할 때, 그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바울은 외국어를 잘했고, 또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하도록 권고했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를 사용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외국어를 나타낼 때는 복수형 명사를 사용했다.
5.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는 개역개정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로 고쳐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하는 방언 행습은 ‘품위 없게 하는 것’이다.
책에서, 또한 유투브에서 노우호 목사는 이 부분을 주장할 때 매우 교조적으로, 확신 있게 말한다. 사실 여기에서 주장하는 내용에는 상당한 정도의 헬라어 실력과 성서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필자는 그가 신약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내용으로 볼 때 다음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그의 성서 번역과 주석에는 억지와 무지가 난무한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14:2)
헬라어:
oJ ga;r lalw'n glwvssh/, oujk ajnqrwvpoi" lalei', ajlla; qew'/: oujdei;" ga;r ajkouvei, pneuvmati de; lalei' musthvria:
개역개정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역: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114).
여기서 노우호 목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역한 단어는 접속사 ga;r와 불변화사 de;다. 그는 문장 첫 마디에 있는 ga;r는 번역하고 뒤에 나오는 ga;r는 번역하지 않는다. 이 접속사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요 2:25).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확실히”라는 뜻으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면서 쓰이기도 한다(롬 2:25). 그러면 그 의미는 문장과 문맥에서 결정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을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과 14장 2절의 문장과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바울은 예언을 하라고 해놓고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ga;r는 별 뜻 없이 사용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ga;r가 번역되면 여기서 이 접속사는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14:1). 그 이유는 방언은 그렇지 않는데 비해 예언은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14:2-3).” 그런데 14장 2절의 중간에 있는 ga;r는 본 절 안에서 두 문장의 관계를 명확히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인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혹은 즉] 영에 의해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우호 역은 매우 엉뚱하다. 첫 번째 ga;r가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고, 두 번째 ga;r는 14장 2절 내의 두 문장에 관련된 것인데, 14장 2절 내에서 앞 문장을 이유의 근거로, 뒤 문장을 그 결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은 헬라어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 본문 내에서는 그가 말한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뒤 문장이 이유의 근거이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인간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ga;r) 그것은 그는 영으로(혹은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불변화사 de;에 대한 번역이다. 이 단어는 문장의 계속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여 “이제, 그리고, 그런데”라는 뜻이다. 문장에서 비교되는 것이 상반될 때 이 단어는 “그러나” 혹은 “이와 대조적으로”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바울은 “세우다”라는 동사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데 여기에서 de;가 쓰였다. 여기서 이 단어의 뜻은 “이에 반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14장 1절의 문맥에서 de;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가? 여기서는 de;가 어떤 두 개념을 대조시키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단지 문장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 특별히 번역할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도 본 절의 de;는 번역되지 않았다.
설혹 de;가 본 문맥에서 “그러나”를 의미한다고 해도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de;가 “하지만”을 의미하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 여기서 뒤 문장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14장 14-15절에서 영으로 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완벽한 오역이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삼은 KJV조차도 올바로 번역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2-4절의 KJV을 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즉[혹은 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JV은 전반적으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본 절에서는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노우호 목사는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까? 그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방언은 외국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방언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방언을 외국어를 말하는 표적이라고 보고, 이 정의를 바울 본문에 대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글에서 방언을 정의하는데, 노우호 목사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정의를 여기에 심고 있는 것이다.
본 문맥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은 그 방향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14:3), 방언은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는데(14:2), 노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면 문맥상 방언과 예언의 대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우호 목사의 고린도전서 14장 2절 번역은 헬라어 문법과 문맥, 바울 전체 신학으로 볼 때 완전히 틀린 것이다.
방언이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하는 말이라고?(14:4)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과 예언을 “세우다”라는 단어로 비교한다. 방언은 자신을 세우는 데 반해,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 노우호 목사는 본 문맥을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면과 자신을 세우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방언은 자신을 세우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도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또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생각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 다음 절(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맥상 바울이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 두 은사는 모두가 사모해야 할 은사인데(고전 12:31; 14:1), 공동체 예배 가운데 사용될 때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 즉 타인에게 아무런 “세움”(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언은 그 자체로 소통이 일어나는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 가운데서 더 권장된다. 반면, 방언은 개인 스스로를 세우기에 개인 기도에서 귀중하다. 다만, 예배 가운데 사용할 때는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통역을 동반해야 한다(고전 14:5).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개인의 영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로 “방언이 자신을 세운다”고 한 것은 방언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고?(14:14)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eja;n ga;r proseuvcwmai glwvssh/,)에 사용된 동사가 가정법 현재형인데,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현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방언기도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노 목사는 영어의 가정법과 헬라어 가정법을 헷갈린 것 같다. 헬라어 사전에서 eja;n을 찾아보면 이런 용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상의 조건을 인도하는 영어의 if와 같은 용법이 있다(막 3:24). 하지만 eja;n은 많은 경우에 미래에 나타날 조건을 말하는 영어의 if와 whenever, 혹은 when을 의미한다(요 14:3). 또한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when의 의미로도 쓰인다(살전 3:8). 물론, 그 용례는 문맥에서 결정된다. 본 문맥에서 eja;n은 when의 의미다.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면(고전 14:2) 이것은 당연히 기도 혹은 찬양일 수 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영으로도 기도하고(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노우호 목사는 사용된 동사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가 얼마나 법거롭겠는가?” 하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 해석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자 자신 스스로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이성으로도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다고?(14:18)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은 바울이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옳다면 영적 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바울이 갑자기 자신이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했는가? 둘째,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깨달은 이성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고전 14:19),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선교를 위한 일만 마디 외국어가 어떤 이유로 이성에 기인한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한 것인가? 한 마디로, 이렇게 해석하면 뒷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통성으로 방언기도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위라고?(14:40)
노우호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적당하게 하고”(개역한글)를 개역개정성경이 “품위 있게 하고”로 번역한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방언과 연관하여 “품위 있게”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설정한 품위와 질서는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 교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6-40절에서 말하는 품위와 질서는 예배 시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차례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방언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지 않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의 입장은 노 목사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4장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번역을 시도했지만, 그의 헬라어 실력과 신약학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새로운 번역 제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번역을 확인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좀 더 물어보았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 목사의 헬라어 실력, 주석 실력,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는 초보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전제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억지스런 문법과 번역을 들이댄 것이다.
방언부정론 평가
노우호 목사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방언부정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방언부정론은 신학적 고찰과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성서적 근거가 미약한 주장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과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그의 사상 기저에는 은사중지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방언론은 은사중지론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사부정론까지 간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 방언 기도의 은사는 있었다가 중지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한 때 바울이 잠시 오해해서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한 적은 있었으나 후속 서신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교인들의 헛소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주장은 바울 방언론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이 성령이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또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도 물론 없다.
어설픈 역사비평적 성서 이해에 의한 주장
방언 반대자 중 특이하게 노우호 목사는 성서해석을 하는데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을 일부 도입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잘못 판단하고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고린도후서에서(특히 11장에서) 이 오류를 교정했다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보다 후에 쓰여진 로마서에도 은사 목록이 나오는데(12:6-8), 여기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바울의 방언 은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0-31).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약성서 서신은 상황에 따라 그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 계속해서 어떤 주장을 업데이트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 다 은사이지만, 그 성격상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은사는 영적인 은사이고,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것은 교회 봉사를 위한 재능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가 신약학자들이 사용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를 해석하기는 했으나, 그 방법을 제대로 익히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말았다.
편견에 의해 균형을 잃은 주장
본서에서 그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본서를 쓴 것인가는 다음 인용구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작금 한국 교회에 번지고 있는 방언을 두고 지난 37년 동안 검증해 본 결과는 100% 거짓 방언이었다.”(5)
“필자가 알기에는 정상적이고 아름답게 사역을 하고 주님께로 가신 분들 중에 방언기도를 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229)
“방언하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들이 많았다.”(201)
“..지난 200년 동안 여성들 중에서는 탁월한 신학자나 철학자가 없었다.”(110)
이 인용구들 속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 그의 편견,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첫째,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야 말대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 둘째, 남성우월 사상에 의한 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상식적인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위험 수위에 올라있다. 셋째, 성서학 전문가도 아니요 영적 은사에 대한 체험도 별로 없는 개인이 자신의 권위로 방언을 혼자 검증하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도 확신 있게 말하는 태도에 의해 그에게 설득당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주장을 듣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달리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확신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과 누가 모두에게 방언은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나는 한 결과 혹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과 누가가 기록한 성경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필자는 신약학자로서 방언에 대해서 십 수 년 간 집중적으로 이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방언중지론, 방언부정론은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독자 중 아무도 이러한 이론에 현혹되지 말고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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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목사 한개인의 말 입니다
비성경적인 말에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비성경적인 말에
동조하는 사람에게도 권면의말도
받아들이지 않을것입니다
노목사 정말 말 조심해야 하오 자신을 물론이고 많은 사람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소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자신이받지않으면 다 이단이요 잘못됐다고하죠 성경 어디에도 방언을 금하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아무나 방언을 받나요? 노우호 목사님은 방언을 받지못하고 정죄에 빠지신듯 합니다.
노목사님은
no 목사님이 되시려고 각오하신 분 같다고 생각됩니다
방언부인 이나
비밀휴거는 없다는 얘기를 퍼뜬리는걸 보면 말입니다
성경은 통독하는것도 유익하고 좋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성경통독으로
유명하신 노 목사님을 보면
통독을 통해ㅡ
제대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 입니다
방언은사를 부정하다니... 정말 어찌 될려고 이러는지... 단순히 주장하는것을 넘어서 책으로까지 내다니... 교회의 성도들을 그릇된길로 인도하는 죄를 어찌 감당할려고~!
상식적으로 방언을 하는 거 보시면 이해가 안되는지 은사아닌가요? 방언이 거짓이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실까요? 부정하는 이유를 진짜 모르겠네요..
아무런 의미 없이 나는 소리가 방언이라고 믿는것이 더 문제인겁니다 의미가 없는 언어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카톨릭과 각종이단들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방언입니다 다 그소리가 그소리인거는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압니다
방언은 사투리 또는 타언어를 방언이라 합니다.
창세기 10 :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열왕기하 18 :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컨대 아람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 유다 방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언어를 말합니다.
착각중에 하나는 방언을 마치 신성시하여 천사언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의 말과 방언은 따로 구분합니다.
고린도전서 13 :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은사 중 하나인 방언으로 은사는 교회에서 서로 협력하는 하나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교회을 세우는 지체들로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방언이 사용된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언하고 전파할때 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은사는 교회을 세우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다방언으로 말할때 여러나라 말로 벙언되었고 그들은 방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를 알게되어 구원받았습니다. 즉 방언은 수단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고린도서에서 교회에서는 금하였습니다.
해석하는 자가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은사을 사모하는 것 중에 가중 중요한 은사는 믿음 소망 사랑이며
그중에 제일의 은사는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12장13장14장 잘 묵상해 보시면 많은 은사를 말하고 잇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이 바벨탑을 싸을때에 언어를 혼잡게 하여 바벨탑 쌓은 일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다시 바벨탑을 인간들 싸을것입니다.
우리가 중시 해야 할것은 방언의 능력은 사탄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 :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주는 의미를 알자는 것입니다. 무조건 터졌다고 그것이 방언인지 아닌지요
고전 14장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3장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반문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의 의미를 알자는 것입니다.
마치 방언이 모든것을 증거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큰 은사가 아니며
또한 그 해석은 우리가 말하는 신성것이 아닌 언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방언의 능력은 계시록에 보면 사단에게도 있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때 이집트의 술법사들도 지팡이로 뱀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방언이 성령을 통해서 하기도 하지만 사단에게도 주어진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기 보다는 은사에 사로잡혀 방언을 하면 성령이 충만으로 간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방언이 예수님의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나그네1004 잘못하여 은사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알아가는 지식에 벗어나 방언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가 사모할 은사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