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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9487
글: 영니(寧妮)
노애(嫪毐)라는 이름을 들으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장면은 이러할 것이다: 신체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후궁으로 들어간 무뢰한이며, 태후에게 잘 보여서 후(侯)의 작위를 받고, 마지막에는 반란을 일으켜 거열형(車裂刑)을 받아 죽는다.
스토리는 놀라우면서도 또한 단순하다. 다만, 진나라제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이후 진나라의 작위는 사람머리로 바꾸는 것이다. 백기(白起)는 평생 전투를 해서 적군을 거의 백만을 죽였지만, 그가 얻은 작위는 제16등급의 "대량조(大良造)"이다. 그런데, 소위 "가짜환관"이라는 자가 무엇을 가지고 최고등급인 제20등의 "철후(徹侯)"에 봉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2곳의 봉지까지 받으면서 자신의 "애국(毐國)"을 건립할 수 있었을까?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 노애의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왜 철후에 봉해질 수 있었을까? 소위 "노애의 난"은 도대체 색욕으로 인해 일어난 화였을까? 아니면 정교하게 기획된 정치적 숙청이었을까?
1. 가짜환관이 어떻게 후에 봉해질 수 있었는가? 교과서는 헛점을 얘기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사기(史記)>의 그 유명한 문구를 읽어보면서, 사실을 살펴보자.
노애는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지면서 산양(山陽)의 땅을 봉읍(封邑)으로 받는다. 나중에는 하서(河西)와 태원군9太原郡)이 추가되어, 자신의 "애국(毐國)"을 건립한다. 그에게는 수천명의 동복(童僕)이 있었고, 천명이상의 빈객문인(賓客門人)이 그에게 관직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으며, 진나라 조정의 크고 작은 업무는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皆決於毐)". 이런 광경은 전국시대를 통틀어서도 최고위급의 배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진나라는 상앙변법이후 집행한 것은 엄격한 20등급 작위제였다. 작위가 오르려면? 전쟁에 나가서 적의 수급을 베어야 한다. 후가 되려면? 그건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수준의 공로가 있어야 한다. 진효공(秦孝公)에서부터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할 때까지, 사료에서 고증가능한 철후로 봉해진 사람은 모두 몇명이 되지 않는다: 상앙(商鞅), 양후위염(穰侯魏冉), 응후범수(應侯范睢), 문신후여불위(文信侯呂不韋), 무성후왕전(武成侯王翦)... 하나같이 정국안방(定國安邦)의 대인물이다.
백기(白起)와 비교해보자. 그는 별명이 "인도(人屠)"이다. 평생 크고 작은 70여번의 전투를 벌이면서, 한번도 패전한 적이 없다. 장평전투에서는 조군(趙軍) 40만을 갱살(坑殺)하여 육국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했다. 이런 전신(戰神)이지만, 그의 최고작위는 단지 제16등급의 "대량조"였다. 철후와는 4등급이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백기는 죽어서도 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다시 노애를 보자.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의 모든 재능은 태후의 환심을 사는 일이다. 만일 진나라가 정말 "태후의 환심"만 사면 철후에 봉해지고, 2개군의 봉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상앙변법은 백여년간 헛되게 집행된 것이고, 진나라의 군공작위제도는 휴지조각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진나라는 절대로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순자(荀子)는 직접 진나라로 가서 살펴본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 진나라는 "백리숙연(百吏肅然, 관리들이 숙연했다)", "고사세유승(故四世有勝), 비행야(非幸也), 수야(數也)(그리하여 4대에 걸쳐 승리를 거둔 것이 행운이 아니라, 정해진 일이었다"라고 감탄했다. 제도의 강성은 진나라의 강대한 기반이다. 그런데, 그저 베갯머리송사로 후에 봉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진나라제도의 체면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또 하나의 쉽게 지나치는 부분이 있다. 노애의 봉지는 아무렇게나 획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양군은 지금의 하남성 초작(焦作)일대이고, 진나라군대가 동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나서서 설치한 전선의 양식창고가 있다. 전략적 위치가 극히 중요하다. 태원군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국경부근에 있고, 진나라군대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핵심거점이다.
이렇게 중요한 봉지를 면수(面首, 남총)에게 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배겟머리송사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노애는 봉지만 가졌을 뿐아니라, "애국"까지 가졌다. 독립된 행정관할권을 가진 것이다. 진나라의 다른 철후는 그런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한 공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드러난다: 만일 노애가 태후의 개인적인 관계로 후에 봉해진 것이 아니라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후에 봉해진 것일까?
답안은 아마도 같은 해에 발생한 다른 사건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진왕정(秦王政) 8년(기원전 239년), 노애가 후에 봉해진다. 그리고 같은 해, 영정(嬴政)의 동생 성교(成蟜)가 둔류(屯留)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성교는 영정의 부친 자초(子楚)의 또 다른 아들이고, 모친은 한국공주(韓國公主)이다. 그의 배후에는 진나라내부의 한나라외척세력이 받쳐주고 있었다.
이 반란을 누가 평정했는가? 사서에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북경대학 역사학자 이개원(李開元)이 <진미(秦謎)>라는 책에서 시간라인을 통해 비교대조하고 제도논리로 추정해본 결과 대담한 가설을 내놓게 된다: 노애가 후에 봉해진 것은 아마도 바로 그가 성교의 반란을 평정하는 군사행동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나라법률에 따르면, 종실반란을 평정하는 것은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애가 후에 봉해진 것은 합법적인 봉상이지, 태후의 개인적인 은사(恩賜)가 아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진나라법률에 따를 때, 반란을 제보하는 것도 직접 전투에 나서서 적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작위로 봉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노애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평정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성교반란사건에서 핵심제보자의 역할을 했다면 역시 봉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태후(趙太后)는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그 기회를 틈타 노애를 고위직에 앉힌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제도의 틀내에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합법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추론이 일단 성립된다면, 노애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는 몸으로 때운 무뢰한이 아니라, 진나라의 권력게임에서 진실한 정치와 군사적인 자격을 가진 인물이 되는 것이다.
2.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단서이다. "노애"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좀더 깊이 파보도록 하자.
"노애(嫪毐)"라는 이름을 합쳐서 그 뜻을 살펴보면, "여색에 빠져살고,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남자"가 된다. 한번 생각해보라. 정상적인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이건 한 사람을 "장음탕" 혹은 "이무치"라고 짓는 것이나 같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절대로 그것이 본명일 수 없다.
그럼, 이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후세에 영정이 그에게 붙여준 오명(汚名)이라는 것이다. 그의 죄가 확정된 후, 그의 본명은 말살되고, 모욕적인 별칭으로 대체해서, 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후세에 죄를 지은 신하의 이름을 개명시키고 악시(惡諡)를 추가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건 승리자가 역사를 쓸 때의 관용적인 수법이다.
만일 "노애"가 본명이 아니라면, 그의 진실한 신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서한(西漢)의 유향(劉向)은 <설원(說苑)>에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태후 "행랑노애(幸郞嫪毐, 랑 노애와 관계를 가졌다)". 여기에서 "랑(郞)"이라는 글자를 주목해야 한다. 진한(秦漢)시기 "랑"은 하나의 관직이다. 궁정에서 시위 혹은 시종업무를 담당하는 사인(士人)을 가리킨다. 통상적으로 신분이 낮지 않다. 즉, 노애는 태후의 눈에 들기 전에 이미 관직을 가진 "사인"이라는 것이다. 시정무뢰배나 창우(唱優)같은 자가 아니라.
또 하나의 대담한 단서도 있다. 한 연구자는 <사기.진시황본기>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말년에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규(將軍摎)"가 나온다. 그는 4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적 10여만을 베고, 성 20여개를 함락시킨다. 그는 진소양왕이 극히 신임하는 장군이었다. 다만, 기괴한 점은 이 장군규가 진장양왕(秦莊襄王)과 진왕정(秦王政)의 시기에는 돌연 사서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규(摎)"라는 글자는 고문(古文)에서 "로(嫪)"와 통가(通假, 임시로 빌려쓰는 글)의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추측한다. 장군규와 노애는 아마도 같은 가족 혹은 동일인을 서로 다르게 기록했을 것이라고. 만일 노애가 진나라의 군사귀족가문 출신이라면, 그가 후에 봉해지고, 문객을 양성하고, 군대를 움직이는 것도 모두 말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추론은 지금도 여전히 논쟁중이고, 학설의 가설에 불과하지 정설로 굳혀진 것이 아니다. 다만 최소한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한 가지 문제를 꺼내놓았다: 우리의 노애에 대한 인식은 거의 모조리 <사기.여불위열전>의 그 소설같은 서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기.진시황본기>에서의 노애에 대한 기록은 훨씬 엄숙하다. 단지 그의 봉후, 봉지, 권세와 반란에 대하여만 기록하고 있을 뿐, 여하한 '가짜환관'이라든가, '전륜(轉輪, 바퀴를 돌리다)'같은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같은 <사기>에 두 개의 전기는 두개의 화풍이다. 이것 자체도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썼을 때는 사건발생후 이미 100여년이 지난 후이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진시황본기>는 아마도 진나라의 관방사서 <진기(秦紀)>에 기록된 것이고, 상대적으로 객관적일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열전>의 그 드라마같은 내용은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사서에서 받아들여 써놓은 것일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역사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끔 몇 가지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일설에 의하면..."이라고 하고 집어넣은 내용처럼.
이런 현상은 기실 중국역사상 반복적으로 출현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상주왕(商紂王)은 정사(正史)에 십악불사(十惡不赦)의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근현대학자들이 갑골문과 고고발굴자료를 연구하면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상주왕은 실제로 군사재능이 있는 군주이고, 그는 동으로 회이(淮夷)를 정복하고, 강역을 확대한 공적이 있음에도 뒤의 주(周)왕조에 의해 고의로 말살된다. 승리자가 역사를 쓰고, 패패자는 똥물을 뒤집어 쓴다.이것은 천고불변의 철칙이다.
2천여년동안,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인 판본을 전파하고 싶어했다. 어쨌든, 몸으로 때워서 지위를 끌어올린 '가짜환관'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 다툼에서 오명을 얻은 군사귀족이라고 하는 것보다 스토리가 훨씬 흥미를 끄니까. 다만, 역사의 진상은 왕왕 그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은 판본에 숨어 있다.
3. 노애의 난의 진정한 배경: 삼방이 힘겨루기를 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노애가 다른 진실한 신분을 가졌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살펴보았다. 이제 그 시각을 가지고 "노애의 난"을 살펴보면, 상황논리는 더욱 분명해진다.
진왕정 9년(기원전238년), 22살의 영정은 옹성(雍城)으로 가서 관례(冠禮)를 거행한다. 이는 그가 정식으로 친정(親政)하는 의식이다. 바로 이 순간에 노애는 진왕의 어새(御璽)와 태후(太后)의 새(璽)를 훔쳐 수천명을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노애가 태후와의 사통한 일이 발각되어, 구급도장(狗急跳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노애와 태후의 관계는 진나라 조정에서 그의 반공개된 비밀이었다. 그들은 옹성에서 두 아이를 낳았고, 노애는 공공연히 "진왕가부(秦王假父)"로 칭했다. 사람들은 눈먼 맹인이 아니다. 만일 그 일이 발각되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면 일찌감치 반란을 일으켜야만 했다.
진정한 도화선은 영정이 친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친정은 권력구조가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정이 어렸을 때는 진나라의 권력을 실제로 3개의 세력이 나누어 가졌다: 여불위를 대표로 하는 상인외교가집단, 조태후와 노애를 대표로 하는 조나라 외척세력, 그리고 창평군(昌平君)등을 대표로 하는 초나라 외척세력. 3방은 각자 기반이 있고, 각자 자원이 있어,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정이 친정하면, 이 균형이 무너진다. 노애에 있어서, 그의 모든 권력기초는 태후에게서 나왔다. 일단 영정이 권력을 장악하고, 태후가 막후로 물러나면, 그의 좋은 시절은 끝나는 것이다. 사적인 문제가 들통나서가 아니라, 권력구조가 바뀌기 때문인 것이다.
영정에 있어서, 친정후 첫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조정에 자리잡고 있는 기득권이익집단이다. 노애는 가장 먼저 손쓰기 좋은 상대이다. 그의 권력기반은 가장 불안정했고, 가장 깊이가 얕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태후와 사통했다는 약점이 있다. 그를 손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저항이 가장 적을 터였다.
그래서 영정이 옹성으로 가서 관례를 치르는 것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을 것이고, 정교하게 판을 짰을 것이다. 그가 옹성으로 간 것은 노애의 영향력범위내로 들어간 것이다. 노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다: 착실하게 권력을 모두 내놓고 죽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위험을 무릎쓰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애는 후자를 선택한다.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정은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고, 반란당일 여불위와 창평군, 창문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평정하라는 명을 내린다. 노애의 부대는 일격에 궤멸당한다. 노애 본인은 거열형을 받고, 삼족을 멸한다. 문객, 빈객들도 죽일 사람은 죽이고, 유배보낼 사람은 유배보냈다. 그와 태후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
이어서, 영정은 여불위에게 손을 쓴다. 먼저 면직시키고, 다시 좌천시킨다. 결국은 그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3대세력중 가장 골치아픈 2개의 세력을 뿌리뽑아버린다. 영정은 2년의 시간도 들이지 않아 권력숙청을 완성하고, 대권을 한손에 쥔 진왕이 된다.
전체 사건을 되돌아보면, 노애는 색욕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하게 된 소인배가 아니라, 진나라의 궁중권력교체기에 희생된 장기말이다. 그는 아마도 확실히 태후와 사적인 정을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후에 봉해진 것이나 그의 권세, 그의 반란과 그의 멸망은 하나하나 모두 진나라 정치싸움의 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영정이 사후에 노애를 황음무치한 가짜환관으로 만든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정치적수를 악마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효율적인 역사서사책략이다. 후세인들은 그의 스캔들만 기억하지 아무도 그의 진실한 신분을 묻거나 그 정변배후의 권력논리를 따지지 않는다.
이 수법은 2천년간 유용했다. 당시 나이 겨우 22살의 진왕 영정은 이 권력숙청 속에서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보인다. 그건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그는 조급하게 동시에 삼방에 손을 쓰지 않았고, 가장 쉽게 끌어내릴 수 있는 노애를 먼저 처리한다. 그리고나서 다시 여불위를 처리하고, 최종적으로 담담하게 국면을 수습한다. 전체 과정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순서와 차례를 분명하게 지켰다. 나중에 그가 육국을 통일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통일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년시대부터 단련된 정치지혜의 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소인배'로 규정된 인물의 배후에는 왕왕 고의로 간략화된 서사가 숨겨져 있다. 노애의 이야기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충분히 단순하면서,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나쁜 놈이 하반신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결국은 스스로 멸망했다. 이는 인과응보이니 사람들을 통쾌하게 만든다.
다만, 진실된 역사는 그렇지 않다. 진나라의 군공작위제도는 그저 허수아비가 아니다. 노애의 권세는 그저 얻은 것이 아니다. 영정의 친정도 그저 있으나 마나한 관례가 아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이익충돌이 있고, 제도운용이 있고, 권력의 재분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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