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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네이버 지식인 soldier_ 님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나기전의 상황 ->
1979년 - 1980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정권교체기"중 하나입니다
왜냐면 1979년 10월 26일, 무려 20년 가까이 독재정치로 대통령을 해온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게되고 그로 인해 대통령 자리가 비어있던 시점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박정희 유신독재는 끝납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사라져서 텅 비게 된셈입니다
국무총리인 최규하 씨가 그렇게 해서 임시로 대통령직을 맞게 되므로 인해 상황은 어느정도 진정되나
박정희는 군대를 이용해 통치를 거느렸던 사람인 만큼,
한편 군인들은 대통령이 사망하자 북한이 그걸 기회삼아 전쟁을 하진 않을까하는 우려속에서 몇몇 군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죽어서 권력층 자리가 비어지게되고 나라가 혼란한 정세를 틈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자리들을 차지할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바로 전두환, 노태우를 포함 나머지 똘마니들로 구성된 신군부세력들이죠
(새로 등장한 군부세력이란 뜻에서 "신군부", 그들은 일종의 동아리,클럽같은 사조직으로 활동했는데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뭉쳐있었습니다)
* 하나회에 대한 자세한 정보 : http://ko.wikipedia.org/wiki/%ED%95%98%EB%82%98%ED%9A%8C
(여담이지만, 군인의 본분은 바로 나라를 지키는겁니다. 나라를 지켜야될 군인들이 이렇게 지 밥그릇보다 더 큰 밥그릇가질 생각만 하고 앉았으니 참 한숨밖에 안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시엔 나이먹고 군대에서 별달고 앉았었으니 징병제로 군인된 우리나라 대다수 젊은 사람들만 고생했던것입니다 그렇게, 이런 사람들 명령 따르며 피비린내나는 뒤치닥거리 다할동안 전두환같은 부패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손에 피 한방울도 안묻히고 호의호식하며 잘먹고 잘살았던거죠)
그렇게, 신군부세력들은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계획들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게 바로 12.12 군사쿠데타 입니다.
<신군부세력들의 모습>
(사진의 맨 아랫줄 왼쪽에서부터 4,5번째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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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 이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 <> 에 덧붙입니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 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언제는 자기입으로 혐의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던 사람을 하루만에 범인으로 내몰고 증거나 혐의도 없이 총으로 위협해 잡아간거죠 그것도 심지어 자신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한 사람을 말이죠 "명탐정 코난"으로 비유해보자면 "코난"이 "유명한" 탐정보고 범인이라고 하는거랑 마찬가집니다)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위키피디아 12.12 군사반란-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고 할 것인바, 반란 가담자들이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적법한 체포절차도 밟지 아니하고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행위는 육군참모총장 개인에 대한 불법체포행위라는 의미를 넘어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라고 할 것이며, 반란 가담자들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위와 같은 행위를 한 이상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
형법 제91조 제2호에 의하면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국헌문란의 목적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그 기관을 제도적으로 영구히 폐지하는 경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사실상 상당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
1980. 5. 17.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 등 관계 법령에 의하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게 되므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기본권이 제약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측면이 있고, 민간인인 국방부장관은 지역계엄실시와 관련하여 계엄사령관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지휘감독권을 잃게 되므로, 군부를 대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됨은 물론 국방부장관이 계엄업무로부터 배제됨으로 말미암아 계엄업무와 일반국정을 조정 통할하는 국무총리의 권한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마저도 배제됨으로써,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받는 강압의 효과와 그에 부수하여 다른 국가기관의 구성원이 받는 강압의 정도가 증대된다고 할 것이며, 따라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의 그와 같은 강압적 효과가 법령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법령이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효과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자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하고, 또한 그 당시 그와 같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우리 나라 전국의 평온을 해하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국민들의 안전을 지켜야될 경찰과 군대가 어쩌다가 대학교 교문이나 가로막는 문지기 신세가 됫으며..
또한, 무슨 권리로 대학교를 강제로 휴교시키고 학교에서 배우고 공부할 자유까지 막았을지..깊게 생각해봅시다.)
M113 장갑차와 UH-1,500MD 헬리콥터의 지상/공중 지원을 받고 있으며 개인마다 M16A1 자동소총/유탄발사기가 지급되어 있고 마지막 사진엔 화염방사기도 눈에 띄입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사진속 군사무기들이 모두 광주시민들의 살상에 쓰였습니다.(광주시민을 살상할 목적이 아니였으면 애초에 저런 군사무기들도 동원되지 않았겠죠)
이는 당시의 작전일지와 군사기록상에도 존재하는 사실들로, 국민의 세금으로 나라 지키기 위해 구입한 무기들과 군병력이 공권력으로 휘둘러져 수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어갔음을 뒷받침 합니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산 무기와 실탄으로 나라를 지켜야될 군대가 반대로 국민들을 살상하는데에 역으로 그것들을 사용하는것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에 의해, 당시 세무서가 방화되는등 상징적인 사건도 일어납니다.
사실상 이들이 대학교를 가로막으러 온건지,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학살하러 온건지 감이 잡히질 않을 정도입니다
거기다, 진압군은 이미 투입된 이튿날 부터 총기 발포를 했습니다
(1980년 5월 19일 당시 고등학생인 조대부고 김영찬 씨가 최초로 진압군의 총기에 부상을 당합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294191
그리고 다음날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 인근에서 진압군이 총기 발포를 해서 결국 최초로 총기에 의해 사망하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이날까지도 진압군/경찰중에 총기 사망자나 부상자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기에 광주시민들이 총기를 먼저들어 무장폭동을 일으켜서 군대가 투입되었다는 신군부측의 주장도 허위임이 드러난것이죠)
80년 5월 21일, 3일간에 걸친 진압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전남도청앞에 대규모로 모여 군병력 철수요구 및 진압과정에서 사망/부상당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계엄령해제를 요구했지만 이 마저도 군병력은 발포를 해 결국 이날 오후 1시, 도청앞 집단발포로 수십명의 광주시민들이 사망당하고 수백여명이 부상당합니다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남편을 기다리던 임신 7개월의 임산부인 최미애씨도 사망하고,
헌혈을 하고 나오던 여고생 박금희 양도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진압군의 총기발포에 죽고 다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계엄령하에 모든것이 군사독재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입니다
(광주시민들이 당시에 체험했을 느낌과 감정, 공포와 분노가 공존하는, 소외감 , 압박감이 답변을 쓰는 저로서도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직접 있어보지 않는한 말입니다)
이때부터가 "민주화운동" 에서 "광주항쟁" 의 명칭으로 시작되었던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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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 국헌문란이란,
헌법의 기본 질서를 침해하는 일.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하는 일, 헌법에 의하여 설립한 국가 기관을 강압적으로 전복하거나 기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 따위이다.
(출처 :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집45(1)형,1;공1997.5.1.(33),1303])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9A9B850E40EAE0438C01398240EA&courtName=&caseNum=96%B3C43376&pag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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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은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차량과 장갑차를, 무기고에서 총기와 실탄을 입수해 무장하게 됩니다
도청앞 집단발포 사건이후 몇시간뒤 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싸웟고, 광주시내에서 군병력들은 일시적으로 퇴각하고 시민들이 시내를 장악합니다.
광주시민들이 시내를 사수하는 5월 22일부터 26일까지의 기간동안, 주요활동으로 보자면
종교인/변호사/교수등이 모인 위원회를 구성해 군대와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고,
총기나 무기등의 반납/회수 및 보관을 해 화기관리에 신경을 썻고,
경찰이 없어진 도시에서 자발적으로 순찰을 돌며 치안유지 및 질서회복,
금융시설이나 은행등의 현금을 모두 전남도청으로 회수해 무장강도나 금전 약탈 방지,
그 결과, 당시 1주일동안 광주에서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범죄 0건의 질서와 공동체가 달성되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8KRdeXb6j4
많은 부분에서 폭동이라고 갖다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오히려 앞선 선진국적인 모습들이 많이 있었다는점입니다.
이 기간동안엔 광주시민들은 하루일과를 시작하자마자 전남도청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작하며,
국가를 사랑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또한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죽을때까지도 태극기와 함께했으며, 죽은뒤에도 태극기에 쌓였습니다
(반면 광주시 밖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외부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미니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다가 진압군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고 진압군들이 야간에 서로 시위대로 착각해 전투를 벌이다 13명이 사망하는등,
그 외에도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가 총에 맞아죽는등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7일간의 항쟁은 결국 1980년 5월 27일 진압군의 일방적인 군병력을 동원한 광주 재진입 작전으로 인해 끝나게 됩니다.
(광주시민들의 피로 얼룩진 전남도청 계단의 모습이,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어떤 노력을 통해서 이뤄졌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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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이후 ~ >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의 진실은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숨겨집니다
당시의 보도검열 현실들..
● 앵커: 우리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지난 80년 5월, 국민들의 눈과 귀는 철저히 막혀있었습니다.
계엄사령부의 보도통제로 국내의 모든 언론들이 광주의 진실을 하나도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신문과 잡지들조차 광주관련 기사는 남김없이 잘려나갔습니다.
박성제 기자입니다.
● 기자: 1980년 6월 2일자 타임과 뉴스위크지입니다.
두 잡지 모두 한국의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5.18 광주항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이를 총칼로 무참히 짓밟은 계엄군의 만행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유럽의 언론들도 긴급 뉴스를 통해 한국의 긴박한 정치상황과 광주의 참극을 비중 있게 보도 했습니다.
● 심재훈(당시 뉴욕타임스 서울 특파원): 필름을 가지고 나가려면 공항에서 그 당시에 전부다 체크를 했습니다.
통과가 안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핸드백에 넣고 가기도 하고 그랬죠.
● 기자: 그러나 정작 우리 국민들의 눈과 귀는 철저히 막혀있었습니다.
계엄사령부가 모든 외국 간행물의 한국판을 일일이 검열했기 때문입니다.
국회 도서관에는 지난 20여 년 간의 주요 외국신문과 잡지들이 보관돼 있지만 80년 5월 전후의 한국 관련 기사들은 모조리 잘려나가거나 페이지 째 삭제돼 있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계엄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만 되풀이 했습니다.
모든 방송과 신문은 광주를 무장한 폭도들이 날뛰는 무법천지로 묘사했고 혼란을 틈탄 북한의 도발이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결국 광주항쟁은 무자비한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고, 진실은 외면당했습니다.
권력에 굴복했던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MBC뉴스 박성제입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63921_6157.html
(당시 광주를 가장 많이 기록했던 독일 NDR 외신기자 유르겐 힌츠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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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그렇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 7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합니다.
그렇게 국군 뒤통수를 치는 군사반란과,
우리나라 국민들을 학살해서 이들은,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되었고,
국가기관의 장관급 인사가 되었고,
국회의사당의 국회의원들이 되었고,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외에 "허문도"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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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임기중에도 참 많은 업적이라 할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죄없는 사람이나 청소년까지 삼청교육대 강제로 잡아들여 강제노역과 잔학행위 저지르고(삼청교육대)
정경유착으로 기업들 뇌물을 통해 부정축재하며 뇌물 상납한 기업들 유리한 법안과 시스템 채택해주며 부정부패 사회를 만들고, 북한으로 부터 우리나라 지켜야될 무기 구입하는 사업에서까지 뇌물주고 받고
(율곡비리 - 노스롭/노드롭/Northrop 비리)
생사람 잡아서 증거도 없이 간첩으로 몰고 (모자간첩단 , 아람회 사건)
생사람 잡아서 죄없이 대공분실로 끌고가 물고문과 전기고문해서 숨지게 만들고(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맨날 공영방송 뉴스에 첫시작부터 전두환 찬양 특집 뉴스만 내보내게 하고 (땡전뉴스)
88올림픽 경기장 짓는다면서 근처에 살고있던 달동네 주민들이 사는집 강제로 철거해 어린이 죽게 만들면서까지 내쫓고 (상계동 올림픽)
북한이 댐 붕괴 시키면 서울이 고층빌딩 높이만큼 모두 물에 잠긴다고 구라쳐서 그거 막을 댐 짓는다면서 모든 국민들에게 돈 강제로 거둬가고 (평화의댐)
전두환이 남긴 업적에 따른 병폐는 이로 말할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으론 전두환 시절 발생한 유착경제와 부정부패는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건외에도 결국 1997년 "한보사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IMF사태로 망하는 참사를 불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작용들중엔 군사정권이 남긴 후유증인 경우도 상당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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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나라에서의 진실이 숨겨지긴 했어도 5.18은 해외에서는 잘 알려진 사건이였습니다
해외에 사는 교포들의 노력으로 국내에 5.18 비디오등 해외에서의 정보들이 흘러들어오면서
암암리에 5.18 영상물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매년 5월 이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례도 생겼습니다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몸에 불을 지르며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노력들 끝에 진실은 드러납니다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을 계기로 다시 끔 5공화국에 대한 부당성이 재조명되기 시작해 6월엔 전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5.18 광주항쟁과 같은 5공화국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사건들도 재조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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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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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해서 1987년 6월 항쟁당시에 5.18 사진전이 부산 등지에서 열려 광주가 아닌 부산에서도 부산 시민들이 6월항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햇습니다
<AP통신, 20세기를 대표하는 100대 사진중 하나로 선정된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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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전두환은 이때도 계엄령을 선포해 군대를 동원해서 1980년 5월 광주처럼 전국을 유혈진압 하려고 했지만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047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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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은 1987년 6월 말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국민의 투표로 뽑을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 민주주의 국가가 됩니다.
<오늘날 5.18에 대한 평가>
이로써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죽음은,
1980년대의 민주화세력들과 운동권에 큰 영향을 주었고 5공화국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고발하는 계기로 작용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다시 일어나 우리나라는 20세기 근현대사에서 마지막 독재자인 전두환을 몰아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뽑을수 있게 되며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나라가 되는데에 큰 기여를 한것입니다.
또한 이는 굉장히 중요한 변화로써, 우리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주체와 힘이 국민에게 생긴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정식후보로 출마해 국민들의 투표를 받아야 되는 방식이 되어서,국민들의 표를 얻으려면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할것을 약속해야 되며,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야 국민들의 표를 얻을수 있겠죠
결국 우리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려면
1차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수있는 시스템이 된것입니다
(5.18 국립 묘지의 모습)
(대통령 중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재판대에 선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세력들은 훗날 재판대에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되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일들은 그렇게 민주화운동으로써 정식 인정받습니다)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일성록"과 함께 세계인의 유산으로써 기록될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인정받고 공유되는 역사로 말입니다.
첫댓글 이런 글 올려워서 고마워 언니.정독할게.
읽고자야지
꼭다읽어야지
고마워♥ 모두들 읽어봤으면좋겠다
읽을게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