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만이 전부가 아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하라. 머무름 없이 보시하라..
쉽게 말해서 바라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책 속에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따갑게 들은 말입니다.
불교를 접한 사람이든, 접하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한 번쯤 듣거나 아는 말입니다.
마치 TV의 드라마에서 스님만 나오면 무조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정형화되어 있듯이...
우리 보통사람들이 마음속으로라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보시하거나 남을 돕는 것이 쉬운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보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공부가 많이 되거나, 마음이 저 대해(大海)보다 넓어 성인에 가까운 분들이 하는 일을 일개 보통사람들이 하기에는 상당히,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고 하는 보시는 좋은 일을 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마치 조그마한 죄를 또 하나 짓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끔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온 경향도 있습니다. 심지어 바라고 한 보시에 대해서 부처님께 참회하는 분도 계시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와 ‘보시를 하면 공덕이 있다.’ 이 두 문장만을 연이어서 놓고 보면참으로 묘한 기분이 듭니다.
공덕이 있으니 공덕을 바라고 하라는 건지, 바라지 말고 하라는 것인지 참 묘한 말이 되어 버립니다.
두 가르침은 사실은 맞는 말들이고 좋은 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는 말이 부담이 되고 때로는 죄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은 보시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와 설명이 없이 그 끝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가까이 두면 이러한 의문 나는 것에 대한 자세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과 중간과 끝을 상세하게 설하신 부처님의 원음을 알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에 대하여 언급하신 경중에 하나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보시 경(앙굿따라니까야 A7:49)에서 바라는 보시와 바라지 않는 보시를 일곱 단계로 설명하시고
그 결실로 인한 태어남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 씩 살펴보면
1) 어떤 사람은 기대를 갖고 보시를 하고, [과보에] 마음이 묶여서 보시를 하고, 부(富)를 기대
하며 보시를 하고, '나중에 이것을 누리리라.'는 생각으로 보시를 하는 사람
2) '보시는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보시한다.
3) '나의 선조들이 과거에 보시를 했고 과거에 행했다. 오래된 가문의 전통을 내가 없애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보시를 한다.
4) '나는 음식을 만들지만 이들은 만들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자가 만들지 않는 자들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보시를 한다.
5) '이전의 선인(仙人)들은 큰 제사를 지냈나니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 그들처럼 나도 보시하여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되리라.'라는 생각으로 보시를 한다.
6) 다만 '내가 보시를 할 때 마음이 맑아지고 흡족함과 기쁨이 일어난다.'라는 생각으로 보시를 한
다.
이상 1)~6)까지의 바라는 보시 또는 머묾이 있는 보시,
이러한 보시를 한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사대왕천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그는 그 업과 신통과 명성과 권위가 다하면 다시 돌아오는 자가 되어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오게 된
다."라고 하셨습니다.
7) 1에서 6)까지의 보시가 아니라,
다만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보시를 한다.(無住相布施)
↠ 이러한 보시를 한 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범신천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그는
그 업과 신통과 명성과 권위가 다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어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게 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을 보면 보시는 바라는 보시(1~6)와 바라지 않는 보시(7)로 나눌 수 있고
이 둘은 공덕의 결실과 이익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코 결실과 이익의 있고 없고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보시는 결실과 이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든. 바라지 않는 보시든 모든 보시는 좋은 것이고 뛰어난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보시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시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 욕계의 특성을 꿰뚫어 아시는 부처님께서는
바라는 보시에서부터 차근차근 그 공덕을 설명하시고 더 큰 공덕이 있는 바라지 않는 보시(無住相布施)를 설하시며 보시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경에서 보시의 대상이 참모임의 승가(또는 사문, 바라문)에 보시한 것이라 모두 좋은 공덕의 결실과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의 대상이 승가가 아니더라도 그 결실과 이익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이지 공덕은 모든 보시에 다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경에서 ‘보시하는 자는 여법하지만 보시 받는 자가 여법하지 않을 경우에도 그 보시의 공덕과 결실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조금씩 실천하면 우리의 마음이 더욱더 바른 마음이 되듯이 처음에는 바라는 보시든, 바라지 않는 보시든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보시이든, 재물보시이든, 이 집착과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득 찬 욕계에서 조금씩 남을 위해 행위 한다는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며, 훌륭한 행위입니다. 선(善)한 행위입니다. 선(善)을 행한 자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낀 뒤 선처[善處]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라는 보시이든, 바라지 않는 보시이든 처음에는 실천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보시의 내용은 나중의 것입니다.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보십시오. 수행을 통해서도 증득하기 어려운 돌아오지 않는 자, 아나함이 되는 것인데, 어찌 평범한 보통사람들한테 처음부터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라고 하고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같이 사유해보십시다. 어느 것부터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보시와 계행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지극히 훌륭하고 좋은 것이며 모든 것의 토대입니다.
안으로 계로서 자신을 단속하여 작은 허물에도 부끄러워하며
밖으로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널리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이익을 주는 사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_()_ 나무 석가모니불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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