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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누가복음 8:40-48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 8:40-48 / [하혈증 여인과 야이로의 딸 ; 마 9:18-26, 막 5:21-43] 예수께서 돌아오시자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이 모두 반갑게 영접하였다. 41) 그때 회당 책임자인 야이로라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함께 가시자고 애원하였다. 42) 그의 하나밖에 없는 열두 살 난 어린 딸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의 집을 향해 가시자 군중들이 에워싸 밀면서 따라갔다. 43-44) 예수께서 걸어가실 때에 어떤 여자가 뒤에 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로 고생해 오면서 여러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느라고 재산을 다 써버렸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의 옷단을 만지는 순간 하혈이 그쳤다. 45) 예수께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하고 물으셨으나 아무도 자기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두 선생님을 에워싸며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4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 내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내가 안다.' 47)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떨면서 예수 앞에 엎드려 옷을 만진 이유와 병이 곧 나은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48)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라.'
예수님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신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와 회당장 야이로(40-42) 예수님은 야이로가 회당장으로 있는 회당에서 이미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 4:33-37). 또한 거라사 지방에서 행하신 치유 사역의 소문이 이미 갈릴리 전역에 퍼져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게 됩니다. 그 중에 회당장 야이로도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며 간구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어린 딸에게 큰 병이 생겨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간구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43-48)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예수님은 많은 무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무리 가운데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혈루증은 대개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혈루증은 만성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abscess)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은 영원히 부정한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인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격리될 뿐만 아니라 회당과 성전의 예배에서도 배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사망 선고이며, 종교적인 사망 선고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여인은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갑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지면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녀의 믿음대로 즉시 병에서 낫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도 이 여인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의 몸에 있던 일정량의 능력이 빠져나가 소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믿음 어린 손길이 치유의 사건을 오게 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여인의 간증을 통하여 이 여인에게 육신의 치유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무엇을 간증하고 있나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기억하고 간증하며 붙들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바로 구원의 문으로 가는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삶은 쉬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우리를 죄와 어둠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가질 때 주님께 영원한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려 있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그 한 마디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야 하겠습니다.(출처)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8:40
환영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덱사토'(* )는 '기쁨으로맞아들인다'는 뜻으로 무리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환영하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그렇듯환영한 이유는 아마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것이다. 한편 '다 기다렸음이러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8:41
회당장인 야이로 - 회당장은 회당의 수반(head)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유지, 보존, 운용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또한 토라(율법)를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회당장은 지방에서는 최고의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사회적 지위가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경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경의를 표하며 자기 집으로 가주기를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대한 사건이 있음을 말해준다.
=====8:42
열 두 살 먹은 외딸 - 야이로의 의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가 설명되고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인 외딸이 그것도 열 두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열 두살이라는 나이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바야흐로 결혼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나이를 뜻하므로 이제 막 피어나려는 한 여성의 인생이여기서 마감 된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죽어감이러라'의 헬라어 '아펠네스켄'(* )은 미완료 과거로 되어 있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외동딸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야이로의 애타는 심정은 체면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무리가 옹위하더라 - 아마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도움으로 회생하게 되기를 바라는 동정의 마음으로 또는 과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수히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몰려든 무리들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살아있는 동안에 도착하시지 못하게끔 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가는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43-48절).
=====8:43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이 여인이 병을 앓았던 햇수와 야이로의 딸이 살아온 햇수가 우연히도 일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혈루증'(血漏症)이라는 병은 대개 혈관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boil)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병은 의식적(儀式的)으로도 부정한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병에 걸린 자를 멸시 천대하였고 완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었다(레 15:1-12, 25-27).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 여인은 삶의 의지를 버리지않고 끝임없는 투병 생활을 해왔으며, 마침내는 예수께 구원을 얻고자 무리들 틈에끼어 예수에게 접근하여 온 것이다. 만약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가 발각되는 때에는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대단한 결단력과 의지를 보여준 행위였다.
고침을 받지 못하던 - 열 두해를 통하여 병고침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갖고 있는 가산(家産)을 다 탕진하였지만(막 5:26)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8:44
옷가에 손을 대니...그쳤더라 - 여인은 매우 은밀히 예수의 뒤로 접근하여 예수의옷가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그렇게 은밀히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병이부정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예수께 직접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것은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이었다(막 5:28). 여인이 손을 댄 옷은 유대인들이 입는 겉옷, 더 정확하게는 이 겉옷에 달린 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네모 반듯한 정방형의 천인데가운데는 머리를 내어놓을 구멍이 있고 그옷의 네 귀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하였다. 이 술은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민 15:37-41) 바리새인들은 과시하기 위하여 이것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비난을 받기도 했다(마 23:5). 하여튼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혈루증이 즉시 그치는 이적을 경험했다.한편 '그쳤더라'(* , 에스테 헤 뤼시스)는 '흐르기를 그쳤더라'는 뜻으로 누가에게 볼 수있는 독특한 의학적 표현이다.
=====8:45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예수의 이 물음은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각 사람의 심중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요 13:21-30).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런 질문을하신 까닭은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여인의 병이 나았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증거하기 위함이다. (2)만약 그녀가 예수의 옷을 만진 이유가 미신적 기대 때문이었다면 그녀의 믿음 속에 들어 있는 미신적(迷信的) 요소를 제거하고 온전한믿음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다. (3)사람들로 하여금 여인의 병 나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4)그녀에게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다.
옹위하여 미나이다 - 예수 주변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들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밀치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본의아니게 예수의 옷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듣기에 조금은 의아스러울 수도 있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점잖게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질문을 무시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막5:31에 의하면 제자들은 강한 어조로 예수의 질문이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였음을 알게된다. 이는 누군가 예수의 권능을 힘 입고자 의도적(意圖的)으로 그의 옷에 손을 댄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물으시는 예수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8:46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 이 표현은 예수의 몸에 있던 일정량의 능력이 빠져나가소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에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건의 장본인을밝히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5절 주석을 참조하라.
=====8:47
떨며 나아와...고하니 -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은 사실과 그것을 알고있는 예수의 능력에 깜짝 놀란 그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시도가 공개되고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당혹감과 긴장으로 떨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옷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다른 사람의 옷에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부정이었으므로(레 15:1-12, 19-27) 여자는 그 사실에 대한 추궁이 두려웠을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보도하는데(마 5:33) 비해, 누가는 초점을 증언의 공개성에 맞추어 '모든 사람앞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인의 병 나음은 공개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예수의 신적인 권능 또한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되었음이 강조되는 것이다.
=====8:48
딸아 네 믿음이...평안히 가라 - 예수께서는 먼저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딸아'하고 매우 부드럽게 부르고 있다. 여기서 '딸아'(* , 뒤가테르)는 다정한 목소리로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바,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소유한 예수의 신성을 엿보게 한다. 다음에 예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 하신다. '네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믿음 그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했다는 말이아니다. 단지 그녀의 믿음은 치유가 성취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의 역할을 한 것이다. 즉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의해 자신이 치유될 수 있도록 사용된 도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여인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께서는그 적은 믿음을 귀중히 여기셨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평안히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신다. 아마 이 평안은 영혼과 육신의 안녕을 동시에 뜻하는 온전한 의미의 샬롬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
눅 8장 42~48절 / 주승중목사
1.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말씀이 들어있는 누가복음 8장에는 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악귀들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을 고치신 이야기(8:1-3)부터 시작해서, 그 유명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뿌리는 비유(8:4-8)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8:9-15)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켜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8:16-19)과, 누가 진정 예수님의 가족인가를 말씀하신 내용(8:19-21),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한 놀라운 이야기(8:22-25), 그리고 그 유명한 거라사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8:26-39)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8:40-42, 49-56)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엄청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 그리고 천지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신 놀라운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누가복음 8장의 말씀 속에, 한 작디 작은 이야기가 끼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본문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고, 긴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누가복음 8장의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겨우 본문에 끼어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 보다 대단한 이야기인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겨우 끼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겨우 끼어들어 온 그녀의 이야기의 바로 앞부분에는(40-42a), 당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회당장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끼어든 그녀의 이야기 뒷부분에서 회당장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그 놀라운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봅니다(49-56절).
이렇게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대단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들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대단하고 중요한 이야기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본문이 속해있는 누가복음 8장 전체를 읽고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왜 그녀의 이야기가 대단한 이야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초라한 여인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의 맥을 끊고 들어와 있는가?”
“복음서의 기자는 왜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끝내지 않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 속에 삽입하고 있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2. 고통 받는 한 여인의 이야기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제 이 여인에게 우리의 관심을 한번 기울여 봅시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이 여인은 비참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축에도 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병으로 인하여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43절).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는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또한 혈루증은 율법(레위기 15:25-37)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정죄되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마도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막 5:26) 했습니다. 그녀는 병을 고치려고 모든 노력을 다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병원에 수많은 치료비들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엊그제 뉴스를 통해서 군인병원에서 위궤양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한 군인이 제대하자마자 위암으로 죽은 사건이 벌어져, 군 의료기관이 발칵 뒤집힌 소식을 우리가 들었듯이, 과학과 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렇게 종종 오진이나 의료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는 데, 예수님 당시는 잘못된 진단, 비과학적인 진료, 또한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인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들이 더욱 많았을 것은 충분히 상상을 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많은 의사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가진 것을 병을 고치는 일에 다 쏟아 붓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막 5:26). 가진 모든 것을 병 고치는 데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인데, 오히려 병은 더 심각해저만 갔습니다(막 5:26)
그렇게 그녀는 건강도 잃어버리고, 돈도, 희망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체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적인 고통,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회적 고통,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버린 종교적 고통, 그렇게 그녀는 많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3. 고통가운데서 예수님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
그런데 그러던 그녀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실의와 좌절 가운데 빠져 있는 그녀에게 어느 날 모든 병을 고치시며, 악귀들을 쫓아내며, 놀라운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하고,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며,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분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붙들게 됩니다. “내가 만일 그 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만 하면 내 병이 나을 수 있을텐데...”
그녀는 이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최후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녀의 필사적인 이런 행동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수 많은 군중들 속에서 능력의 예수님을 만지기 위하여 손을 내밉니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칩니다. 예수님을 만지려는 그녀의 노력은 필사적인 희망의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그녀는, 이제 마지막 소망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하여 손을 내 뻗습니다. 정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손으로 양로원에 가끔씩 찾아오는 자녀들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미는 노인의 손과 같이 손을 내뻗습니다. 그녀의 앞으로 내뻗은 연약하고 창백한 손은 예수님의 권능을 만지는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 창백한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그 만짐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듯이 슬쩍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성이 있는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부수고,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필사적으로 만지는 그런 만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피가 멈추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즉시” “즉각적으로” “일순간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크레마”(παραχρημ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정말로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4. 전능하신 주님과 대면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로” 자신에서 권능이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물었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녀를 찾아보아라”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살짝 만진 것이 대수이겠는가 싶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진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밀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서 만진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제자들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온통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마치 제일 소중한 친구보다도 더 특별하게 생각하듯이, 자신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드라마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시며, 주님의 겉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러한 믿음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시며, 그녀를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위의 군중을 둘러보았습니다. 군중 속에 있는 그 믿음의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해서 찾고 계십니다.
이 때 마침내 그 여인이 자발적으로 나섭니다. 이제 고침 받고 새롭게 되었으며,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면서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사실을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모든 사실을 아뢰었다”(47절)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녀는 자신이 부적절하게 예수님을 만진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곳에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남들 같으면 그렇게 권능의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순간에 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고통과,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사실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새롭게 된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습니다. 주님 몰래 행한 일들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부정한 몸을 가지고 주님을 만진 것은 적절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한테 학대받았고, 의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했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에게서조차도 그녀의 병든 몸은 언제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놀라운 역사를 이끌어 낸 믿음을 가진 그녀를 마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창피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학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서 야단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의 체면이 상하거나, 자신의 성결함이 더렵혀지거나, 또는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오직 그녀와 그녀의 미래에 대해서 온 관심을 기울이실 뿐이었습니다.
5.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예수님은 지금 그녀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딸아”(뒤가테르)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사용했던 “딸”이라는 단어를 예수님께서도 지금 이 여인을 향하여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한없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 44절에서 이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옷가”라고 하는 단어는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인데, “크라스페두”는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달린 부속물’, 즉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말하는 것이며, “히마티우”는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 말을 “fringe of His Cloak”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 새번역도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눅 8:44). 즉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끝에 달려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겉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달린 옷은 그 당시 제사장 같은 권위와 위엄이 있는 이들이 입었는데, 그러므로 이 술은 아무나 만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만지도록 허락을 받았거나, 혹은 오직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지금,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을 만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은 부정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 여인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그도 부정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는 옷가의 술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예수님은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외동 딸을 향해서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부르고 있는 “딸”(뒤가테르)이라는 그 단어, 그 딸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요, 아픔이기에 회당장 체면도 다 팽게 치고, 한 시골의 젊은 청년 랍비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바로 그 심정으로 부르는 “딸”(뒤가테르)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부정했던 여인에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이름을 모르니까 일반적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실제로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부녀지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첫 마디에서 벌써 예수님은 그녀의 불손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네가 나를 만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너를 이미 나를 언제라도 만질 수 있는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딸아”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이 소외된 여인을 향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계속해서 칭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음성과 함께 그녀를 보내고 계십니다.
거룩함을 가지고 가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과 함께 가라. 이제 더 이상 피흘림도 없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더 이상의 혈루증도 없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과 희망을 주지도 못하는 의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필요도 없고, 소중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궁해 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 가라. 이제 충만하여, 건강하고, 기쁨에 넘치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라. 이제 그녀는 온전하고, 그 모든 속박으로 완전하게 해방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6. 똑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야기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다시 좀 더 엄청나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향력 있는 사람과 그의 딸에게도, 가련한 한 여인에게 행하셨던 것과 동일한 일을 행하십니다. 회당장의 딸에게 무엇을 더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은 회당장이 받았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허락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 여인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중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었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의 영역 안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으로 초청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이 여인의 이야기가 그 엄청난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의 맥을 끓고, 여기에 끼어 들어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여인의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들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라리 이 여인의 이야기는,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어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속에서도 멈추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바로 여기에 끼어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은 대단한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닙니다. 아니 차라리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께는 그 큰 이야기들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주님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누가는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여인의 이야기로 큰 이야기의 맥을 과감하게 끊고 있는 것입니다.
7. 우리들 가운데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이야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심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온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사랑하시듯,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지금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 진정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옹위했다”는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면 “무리들이 그를 질식시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몰려들어 에워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옷을 스치거나 주님과 몸으로 부딪히는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는 혈루증을 잃던 이 여인과 같이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병들고 문제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어찌 이 여인뿐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그들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도 주님을 따라 갔을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옷을 스치며, 주님의 몸과 부딪히며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녀만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 밀리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로 밀려옵니다.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주님께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믿음으로 손을 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며 그가 주시는 구원과 치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믿음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있는 교인들, 우리 주님과의 영적 접촉이 끊어져서 생명을 상실한 교회, 그곳에는 아무리 주님을 에워싸고 따른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도 그 어떤 변화도,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 가운데서 믿음의 손으로 자신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기와 참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말 못할 고민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내 힘과 능력과 지식과 경험과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이어서 한숨 짖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와 사랑하는 이들의 병고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은 우리 가운데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들도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술을 잡으십시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술만 만졌는데도, 주님의 딸이 되어 12년 동안 앓던 난치병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옷술을 만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서 흘리신 구원의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은 옷깃을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자들이 아닙니까?
옷깃만 만졌어도 구원받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으며,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한 몸이 된 우리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꽉 붙잡읍시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렇게 대답하십시다.
“주님, 제가 만졌습니다. 저의 병든 육체가 치유되기 원합니다. 제 마음의 상처를 고침받기 원합니다. 병들어 있는 제 영혼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제 마음의 죄악들을 씻음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의 피 묻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사랑하는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올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문제에서 놓여 자유할지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40-56 / 이상호목사
오늘 말씀을 보면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과 회당장인 야이로가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절박한 인생 문제가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12살 된 외동딸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고 그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0-48).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 들린 한 청년을 고쳐 주신 후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이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 중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청했습니다. 이는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12살 난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장 야히로의 간청에 그녀를 고쳐주시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밀려들었습니다. 이 무리 가운데에는 밀고 밀리면서 남몰래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비쳐진 이방인은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하물며 이방 여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12년간 건강을 잃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돈과 명예와 권세, 그리고 아기자기한 가정이 있다 할지라도 건강을 상실할 때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소유 모든 것을 다 잃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혈루증으로 12년간 고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혈루증은 끊임없이 출혈하는 부인병 중의 하나로, 레위기 15:25-27절에 보면 이 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그래서 그가 쓴 물건과 옷들은 부정하여 다른 사람이 만지면 그도 부정했습니다. 그녀는 부정의 근원으로서 그녀의 마음은 가해망상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 효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의원들은 병을 고치지 못하면서도 돈은 꼬박꼬박 다 챙겼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건강을 잃고 모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막 5:26).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더 깊이 병든 몸과 함께 절망과 슬픔, 불신과 부정한 자라는 죄의식과 수치심, 그리고 고독뿐이었습니다. 12년간 피를 흘렸으니 그녀의 얼굴은 야윌대로 야위어 꼬챙이 같아 거울 보는 것을 포기한 지도 오래됐을 것입니다. 인생의 꽃다운 시절을 병으로 허망하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군중 속에 버려진 존재로, 그녀의 내면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이 고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어느 날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어떤 몹쓸 병도 다 고쳐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절망이 컸던 만큼 소망도 컸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야윈 몸으로 그 수많은 무리를 헤치고 나아간다는 것은 태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자의식, 율법적인 생각, 불신이 순간순간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밀리고 밀리며 마침내 예수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예수님!'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실 여인은 '예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용기도 없고, 고쳐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떨리는 마음과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옷자락에 손을 댔다'는 것은 단순한 touch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움켜쥐었습니다. 그녀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라 생각하고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4).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움켜잡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질을 움켜잡으면 물독에 빠지게 되고, 쾌락을 움켜잡으면 쾌락의 노예가 되고, 명예나 권력을 움켜잡게 되면 명예와 쾌락의 노예가 되고, 현실을 움켜잡으면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썩은 송장을 움켜쥐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움켜잡으면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생명의 사람, 부활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움켜쥐었기 때문에 생명이 임하여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움켜잡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움켜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생명을 걸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빨리 움켜잡아야 합니다. 이때 나음을 입게 됩니다.
이 여인은 너무나 기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빨리 무리 속에서 빠져나가 부모님께 이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5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냐?'고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어쩌다 만진 사람 말고 믿음으로 만진 믿음의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여인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만나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베드로는 이 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영적 통찰력을 알지 못했지만 여인은 자기를 지목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힘들게 소감을 발표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하기 싫다는 소감을 억지로 발표하게 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처사인 것 같고, 차라리 모르는 체 하시는 것이 여자를 돕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고백을 다 들으시고 딸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이 믿음의 행위였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녀가 병 고침만 받고 그대로 돌아갔다면 육신의 병은 치료되었을지 모르지만 내면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내어 구주와 죄인과의 영적인 관계성을 맺으시고 풍성한 평안을 그녀에게 주시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롬 10:10).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둘째, 아이야 일어나라(49-56).
예수님께서 노중에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 주시고 그녀와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한 사람이 와서 “회당장님,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야이로는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 하니 한없는 슬픔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한편 한없는 두려움이 엄습하여 떨어야 했습니다. 순간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여인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잡은 사단이 딸이 죽었다는 사람의 말을 통해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두려움은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두려움은 악한 영이 주는 것입니다(딤후 1:7).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취직과 건강에 대한 두려움, 학점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예수님을 믿고 살다가 사회생활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생기면 소심해지고 매사에 확신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객관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매사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동공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없게 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야이로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자리잡기 전에 재빨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50)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가능성에 기초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죽음으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때에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계속 갖도록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기초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처음 가졌던 믿음을 계속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변치 않을 수 있습니까? 이는 처음 가졌던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부활의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외적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믿기만 하면 딸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가 믿기만 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기만 하면 슬픔을 이기고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이기고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황이 이런데 '믿기만 하면 되는가, 무슨 뾰족한 재주가 생기는가?' 말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가장 적합한 동역자도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자 사람들이 저가 죽은 것을 알기에 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54b) 그러자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녀를 살리셨습니다. 말씀은 생명과 부활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온 혈루증 앓는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온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그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시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불신과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
눅 8장 40~56절 / 김양인목사
사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중풍병자, 소경, 나병환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손마른 사람 등, 각 색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셨고, 갈릴리 풍랑을 명하여 잔잔하게 하셨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이적을 행하실 때 명령 한 마디면 충분했습니다.
복음서에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 사건들을 기록해 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눅 1:)
이 구절은 누가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그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실히 알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역사상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이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이적들이므로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한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의도 없이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헛되이 읽은 것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가진 성경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또한 성경을 읽고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에 대하여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복음의 내용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은 영광스럽고 복되고 신비한 것입니다.
더구나 히브리서 2장 16절은,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사들보다 우리 인생들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윗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2천 년 된 묵은 포도주가 아니라 지금도 왕성한 발효력을 지닌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복음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일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인물을 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으로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시간대가 겹쳐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회당장의 어린 딸은 혈루증 앓는 여자의 출현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집에 당도하시기 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혈루증 앓던 여자는 회당장의 집을 향해 가시는 주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을 기회를 포착하였고, 이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리신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먼저, 회당장 야이로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유대 사회에서 회당장은 단지 회당 관리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회당 예배의 절차나 설교자 선임 등, 회당의 행정 전반을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회당장은 유대 사회에서 덕망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유지 가운데서 뽑혔고, 상당히 존경받는 지위였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즈음 대부분의 회당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편에 섰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파가 회당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회당장들은 바리새파 사람이거나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회당장 야이로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의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그는 회당장의 위신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만일 그가 위신을 중시했다면 예수님을 찾아가 호소할 수 없었을 것이고, 어린 딸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죽더라도 위신을 살리는 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위신을 버릴 것이냐, 이 문제는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던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믿는 결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회당장 야이로 역시 ‘딸이 죽더라도 예수님을 찾아가 호소할 수는 없어’하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체면보다는 딸을 살리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체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존심이나 교만을 버리고, 그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선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 전에 때때로 우리의 교만과 아집을 꺾기 위해 시련을 가하십니다. 야이로의 경우, 만약에 어린 딸이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주님을 찾아가 호소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역시 다른 회당장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는 편에 서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딸이 당한 불행은 야이로에게 은혜받는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속단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형통할 때보다 역경의 때에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역경이라고 무조건 기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입는 소중한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애절한 마음으로 호소하는 야이로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예상치 못하게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웬 여자가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댄 사건입니다. 이 일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려고 걸음을 멈추셨고, 그 여자를 대면하시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보면서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을까요?
무례한 사람 같았으면 “선생님, 그 여자는 내버려 두시고 빨리 저의 집으로 가셔야지요”하고 재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집에서 사람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십시오. 이제 모시고 올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순간, 야이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야이로의 믿음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이 흔들리는 야이로에게 이처럼 배려해 주시다니, 얼마나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까? 그때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에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기어코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이르러보니, 벌써 울며 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곡하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장례 기간 내내 곡소리를 내게 했는데, 이미 그런 자들이 집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 어린 딸의 죽음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라도 잠자는 자를 깨우듯 살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53절을 보면, 그 딸이 분명히 죽은 것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자 비웃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가 누운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영이 돌아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곧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났습니다. 이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계하시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살아난 어린 딸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결정적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적대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때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였을 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과 관련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13:26)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때에 행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보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밥을 하는데도 때를 잘 맞추어야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지 조급해서 자주 뚜껑을 열면 설익고 맙니다. 농부는 밭에서 곡식이 자라는 것을 인내하면서 기다립니다. 수확을 앞당길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응답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조급증을 버리고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는 것을 참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때야말로 우리에게도 가장 적절한 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때를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범사에 가장 좋은 때를 아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혈루증 앓던 여자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이 여자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 병은 불규칙적으로 하혈을 하는 부인병입니다. 12년 동안이나 하혈을 했으니 극심한 빈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43절을 보면,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병들고 가난한 데다가 부정한 병을 앓고 있으므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이 여자가 직접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몰래 숨어서 옷 가에 손을 댄 이유도 부정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 가련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는 고질병으로 인해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을 그 때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이 여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분이 계시다니. 나사렛 예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고침을 받을 수 있겠구나. 이 지긋지긋한 병을 떨쳐버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겠구나!’ 절망으로 가득 찼던 이 여자의 마음속에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쳤습니다. 이로써 이 여자는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무리를 헤치고 나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의 소문이 주는 충격을 경험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어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여유로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아서 모두 바쁩니다. 그런데 그 바쁜 일을 다 제쳐놓고 주일을 기억하고 교회에 나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뵙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가 경험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소망의 빛을 발견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고 열정이 타오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더니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 순간 이 여자는 자기가 고침 받았음을 확연히 스스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온몸이 날아 갈듯이 가벼워지고 힘이 솟구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이 여자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자기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무리가 에워싸고 밀고 있는 것을 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재차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니 제자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이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는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이유와 병이 완쾌된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했습니다.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안절부절하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딸아”하고 부르시고 평안을 빌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도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자애로운 심정으로 대해 주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옷 자체가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그 여자의 믿음이 원인이 되어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여자의 믿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예로부터 성물 숭배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라든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고 주님의 피를 담았다는 성배, 베로니카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신 주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손수건 등등. 수많은 성물을 거론하면서 신비한 효험이 있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열루증 앓던 여자가 만진 주님의 옷을 신성시하고 그 옷에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미신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너를 치료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이르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1장 17절에 보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르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고침받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하시고 고쳐주신 데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일일이 온 마음을 다해서 대하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가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을 때 주님께서는 즉시로 그 여자의 믿음에 대하여 반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병고로 흉한 몰골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옷 가에 아무도 몰래 손을 대었을 뿐인데도 즉시로 알아채시고 치료의 능력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그 여자를 대면하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아시고 보살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혈루증을 고침받은 여자와 같이 주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을 믿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믿음이 있다면 그 무엇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은 결과로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고,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는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처지에 놓였으나 주님의 소문을 듣고서 믿음이 생겨 길 가시는 주님의 옷가에 손을 댐으로써 치료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언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한 때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혈루증을 고침받은 여자를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사정을 고하고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크신 능력으로 영 육 간에 위대한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변화의 기적을 이뤄내라
눅 8장 40-48절 / 이한규목사
본문에는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두 명 모두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나중에 야이로의 죽은 딸은 살아나고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즉시 치유 받았다. 그런 변화의 기적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을 간절히 추구하라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돌아오셨을 때 모든 무리가 학수고대하며 예수님을 기다렸다가 환영했다(40절). 그때 회당장인 야이로가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다(41절). 체면을 버린 야이로의 요청을 수용해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갈 때 무리가 밀려들었다. 그 무리 때문에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그 발걸음을 더 지연시킨 일이 생겼다.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 받은 일이었다.
그때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을 찾으시자 야이로는 속으로 초조해하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딸이 죽어 가는데 예수님은 왜 저리 여유를 부리실까.” 마침내 야이로가 두려워하던 최악의 일이 생겼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알려준 것이다. 야이로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면서 혈루증 여인이 미웠을 것이다. 게다가 여인은 아무 희생도 없이 그저 가만히 다가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졌는데 고침 받았고 자신은 회당장 체면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사정했는데 딸이 죽었으니 기막힌 일이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그런 일을 겪는다. 내가 먼저 믿고 기도와 봉사도 더 하고 말씀도 더 보는데 축복은 남이 더 받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면 기도하고 헌신할 마음도 없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헌신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결국 승리를 주신다. 믿음은 단발 승부가 아닌 마라톤과 같다. “믿쉽니다”라고 한다고 잘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바로 응답되면 누구나 기도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참된 믿음을 위해 기도 응답을 지연시키실 때도 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 그때 예수님이 일부러 지연하신 것 같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다가 지연하신 것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 때문이었지만 나사로에게 가는 것을 지연하신 것은 의도적인 것 같다. 그 지연이 결국 ‘나사로의 치유’보다 ‘나사로의 소생’이란 더욱 놀라운 기적을 낳았다. 기도 응답과 축복의 지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이 있다. 지연은 거절이 아니다. 계속 믿고 나아가면 응답의 지연은 나의 소원보다 더 선한 응답을 가져다준다.
2. 예수님을 겸손히 추구하라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갈 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자 그녀의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43-44절). 그때 그녀의 예수님을 추구하는 열정도 감동적이지만 더욱 감동적인 것은 겸손하게 예수님을 추구하는 태도다.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면서도 늘 겸손을 잃지 말라. 겸손한 사람은 잘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넘치는 희망을 가진다. 사실 그녀의 상황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특히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유출병에 걸리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가족과도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런 절망적인 고통 중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녀는 희망을 가졌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지만 희망은 소생시키는 치료약이 된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댈 때 역사가 일어났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결코 포기하지 말라. 계속 승리를 생각하고 말하면 승리 가능성은 커진다.
한 사람이 베트남 전쟁 포로로 7년간 감옥에 갇혔다. 그는 골프광이었는데 감옥에서 골프를 칠 수 없자 머리로 상상하며 골프를 쳤다. 골프장에 서서 골프채를 잡고 골프 자세를 갖추고 스윙해서 공이 몇 야드 날아갔다고 여기며 상상으로 골프를 쳤다. 그 후 7년 만에 석방되어 진짜 골프를 치니까 이전보다 실력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좋은 상상을 하며 믿음 가운데 계속 나의 할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진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성공과 승리를 생각하며 용기 있게 장벽에 도전하라.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 낫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장벽이 많았다. 부정한 여인이 사람들 곁에 가면 돌을 맞거나 조롱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미는 상황에서 군중을 뚫고 나갈 힘도 부족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라. 가만히 있으면 승리할 수 없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향해 일어서야 선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3. 예수님을 믿음으로 추구하라
그녀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자 만성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 그때 예수님이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하셨다. 그 순간 혈루증 여인이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다(47절).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 예수님은 그녀에게 “딸아!”라는 호칭으로 평안을 주신 후 그녀의 행동하는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추구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말고 거머리처럼 하나님께 달라붙으라. 마귀는 방학이 없다. 하나님 관계에서도 방학이 없게 하라. 거머리는 한번 붙으면 몸이 쪼개져도 잘 안 떨어진다. 그런 끈질긴 충성심을 가지고 믿어야 고난과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기도하기 싫어도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기도하고 예배에 나오기 싫어도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예배에 참석하라. 몸이 피곤하고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 하나님께 달라붙는 거머리전법을 쓰라.
1998년에 분당 정자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바로 옆에 초대형 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 교회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우리 교회 새벽기도에는 한두 명 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끈질기고 성실하게 매일 말씀을 준비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경강해 원고가 점차 쌓였고 마침내 때가 되어 <월간새벽기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이끌 수 있었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때에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신다.
믿음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예수님의 많은 기적이 믿음을 통해 이뤄졌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흘러들게 하려면 믿음으로 축복의 문을 열라.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믿음으로 살 때 아브라함의 복이 내게도 약속된다. 복은 믿음에서 시작된다. 흔들리지 않는 실천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고 선한 변화를 이끌어내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 변화의 기적을 이뤄내라 >
의사는 직접 환자를 수술하기 전에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수많은 수술 경험을 쌓는다. 아무리 의학 공부 성적이 좋았어도 임상 경험이 없으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 공부나 말보다 실력이 중요하고 지식보다 지식의 실천이 중요하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대로 살면서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집회에서 찬양과 경배를 멋지게 하는 모습보다 고난 중에 빛나는 성육신의 믿음에 더 감동하신다.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고 예수님을 닮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령 충만을 감정 충만으로 오해하지 말라. 성령 충만의 결과는 거룩한 의지와 행동하는 믿음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랑과 평안과 감사를 잃지 않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
하나님과 깊이 만나라. 하나님과 깊이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고 예수님의 삶을 내 삶으로 삼는 것이다. 집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한 극적인 표시로 남이 보는 데서 홀라당 넘어지면서도 언행과 가치관에 하나님의 뜻이 배여 있지 않고 예수님의 향기가 전혀 풍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처럼 큰 죄다. 믿음은 쇼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은 사람과의 깊은 만남을 낳는다. 믿음이 깊어지려면 업무나 사업상의 필요 외에는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지 말라. 만남이 깊어지려면 시간의 한계로 인해 만남의 수는 줄여야 한다. 사람 대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라. 기도 시간은 하나님과 만나 대화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에 젖어드는 시간이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면 사람과의 갈등과 환경적인 시련도 점차 줄어든다.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복된 것은 없다. 가장 큰 불행은 이단 교주와의 잘못된 만남이다. 교주가 달리 교주가 아니다. 필자를 지나치게 의지하면 필자도 교주가 된다. 믿음의 핵심 기초는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에 못지않은 큰 불행이 형식적인 만남이다. 형식적인 만남을 뜻의 일치를 통해 참된 만남으로 만들라. 작은 부분에서 세세하게 다 일치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큰 틀과 비전에서 일치하면 된다. 무엇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키라. 그런 일치가 있는 곳에 행복도 자리한다.
신앙생활의 큰 위기는 문제가 많거나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교회 주변만 맴돌지 말라. 수명을 다해 신호가 끊긴 채 지구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 성도가 되지 말라. 많은 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폐기된 인공위성도 여전히 빠르게 시속 수만 킬로미터로 지구 주위를 돌지만 관제소와의 교신과 통제가 끊긴 상태다. 많은 활동보다 깊은 만남이 중요하다. 많이 이뤘어도 많이 드리는 삶이 없다면 성공과 기적도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변화의 기적을 멋지게 이뤄내라.
믿음을 온전케 하는 사건
눅 8장 40~42절 / 이동아목사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환경을 통하여 연단하십니다. 형통한 날과 곤곤한 날을 병행하사 우리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며 믿음을 연단하여 자라게 하십니다. 믿음이란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생성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된 회당장 야이로의 기적 사건은 환자 자신의 믿음도 아니요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으로가 아닌 기적을 체험하여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성장케 하시려는 의도로 행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하여 희미한 믿음이 분명해지고 연약한 믿음이 강화되어 마침내 성장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회당장의 믿음은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경륜적으로 계시적인 사건으로 주권적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적을 일으킬만한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다가 도중에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주저합니다. 집에 가보니 가족과 이웃은 죽음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통곡하는 자들을 향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할 때 모두가 비웃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킬만한 어떤 준비도 없는 이 가정에 큰 사건을 나타냄으로 야이로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주위 사람들의 불신앙을 심판하십니다. 새로운 믿음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도록 주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기적입니다.
믿음을 강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본문에서 찾고 깊이 생각해 보고 저와 여러분을 사건을 통하여 어떻게 믿음의 연단하시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는 가를 함께 추적하며 배워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요청-가난한 심령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주린 심령이 되어야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주님을 찾고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잘 되면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 보문의 회당장 야이로는 귀족입니다. 부자입니다. 존경받는 유대인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요 지성인입니다.
회당에는 8명의 장로가 지도부에 있는 데 장로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회당장입니다. 유대교에 철저하게 헌신한 사람이 아니면 회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나사렛 청년 예수 앞에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콧대 높은 유대교의 지도자가 적대시한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리는 예수 앞에 나와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눅8:41-42) "이에 회당장(會堂長)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擁衛)하더라" (막5: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야이로는 절박하게 주께 매달렸습니다. 이처럼 사건, 상황, 고통, 시련, 문제를 통하여 주님은 손들고 십자가 밑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초청장으로 사용하신 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에게 12살 된 외동딸이 있었는데 무슨 병에 걸렸는지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건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찾게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불행한 일은 질병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 대부분이 불행을 당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주앞에 손들고 나오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부모도 자식의 생명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간절하고 진실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도 고난을 통하여 더욱 진실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만남에 있어서는 불행할수록 고통이 크면 클수록 은혜와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 불행이 아니면 예수앞에 나오지 못할 사람인데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약으로도 의사도 백방으로 애써도 불가능했는데 자식의 사랑이 절박한 심정으로 체면이고 권위고 따질 것이 없이 예수앞에 나와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환난이 어려움이 광풍처럼 몰려오고 있습니까? 예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께 항복하고 나아와 무릎 꿇은 길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첫관문인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붙들면 나머지는 시시한 것들입니다. 먼저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면 다음은 주님께서 결재하십니다. 아직도 주님 없는 세상에서 그물을 던저 고기를 잡겠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아직도 내 힘이 남아있고 아직도 도움을 받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주님께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회당장 야이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음을 보고 앉아 있을 수 없는 긴급한 현실을 안고 예수앞에 나아와 집에 오셔서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주님을 초청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시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딸이 죽어가는 것처럼 생명이 다해 생명 없는 사망이 엄습해 오는 우리의 가정에 내 심령에 주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길이 있었으면 그의 위치나 체면을 보더라도 예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이 죽어 가고 있기에 믿음과 상관없이 별도리 없이 예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별수 없어서 예수 앞에 나오게 하시는 주님의 개입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면 구원의 때를 주께서 정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만난 사건과 같은 시련과 고난 앞에 서게 됩니다. 이 때 주앞에 손들고 나오는 때입니다. 은혜 받을 때입니다. 구원의 날입니다.
응답이 지연-문제의 극대화를 위한 주님의 개입입니다.
43절 49절에 삽입된 12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병들어 숨이 넘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한가하게 다른 사람 치료받은 장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달려가도 딸에게는 급한 시간입니다. 숨이 지기 전에 기도도 하고 안수도 하고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옹위하여 많은 무리들이 장해요소입니다. 거기다가 급히 달려든 혈루증 앓던 여인치료로 인하여 주님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가 마르는 급박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불평이 없습니다만 애간장이 얼마나 탔겠습니까?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당장 죽어가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딸은 긴급환자와 같은 위기환자인데 주님이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아 속이 더욱 조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옷자락을 만진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딸아 평안히 가라 네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지어다" 도중에 혈루의 근원이 마른 체험을 간증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한 가닥의 소망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속에 예수님만 모시고 딸에게 가서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기적이 일어나는 데 사랑하는 딸이 예수님이 집에 가셔서 손으로 만져주시기만 하면 낫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혈루증 여인을 향하여 믿음을 칭찬하시고 평안을 빌고 건강의 회복을 선언하실 때 비보를 듣게 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으니 예수 선생님을 괴롭게 모시고 갈 필요가 없다는 비보였습니다.
(눅8: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會堂長)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자 여기에서 회당장 야이로는 힘이 쭉 빠지고 맙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목에도 고통이 따르고 좌절과 두려움이 닥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믿음을 가르치시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죽음이 끝인 것입니다. 이제 수많은 원망을 쏟아 놓을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살수 있을 것인데 도중에 혈루증 앓던 여인의 치료 때문에 응답이 지연된 것입니다.
주님은 화당장의 딸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모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이로와 불신앙적인 식구들과 이웃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려면 사건을 극대화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란 마침표입니다. 의사들도 숨이 붙어있을 때는 이런 저런 약을 쓰고 시술을 하다가도 숨이 끊어지면 손을 놓고 나가 버립니다. 시트로 덮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요 지성의 한계요 사랑의 한계요 모든 것의 한계가 바로 죽음입니다.
다윗도 이런 경우를 당했습니다. 밧새바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회개하고 금식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왕 다윗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어버렸습니다. 기도했는데 맡겨 드렸는데 더 악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아이 데려가시고 솔로몬이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대책이 있기에 때로 문제를 악화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살았을 때보다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인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기도했는데도 더 악화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소망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모세는 사막에서 물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비를 주시고 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바위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바위가 깨지고 거기서 샘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홍해바다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다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갈라져 길이 생겼습니다. 겉보기에 가뭄으로 말라 갈라진 땅도 깊이 파보면 여전히 지하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막에서도 흐르는 지하수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도 길을 내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는 사람입니다.
원수의 포위 속에서도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죽음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보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천국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옥 속에서 주님의 역사를 보았고
마리아는 빈 항아리 속에서 가득 찬 포도주를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한계 앞에 섰을 때 그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7:1-2)
꽉 막힌 현실 속에서도 은밀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심치 않는 사람--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고개를 숙이면 땅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면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이 낀 하늘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적을 극대화하고 믿음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상황과 현실을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회당장 야이로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다해 보았지만 딸이 죽어 버렸으니 앞이 캄캄합니다. 여기서 회당장 야이로의 심령은 아직 믿음으로 설 수 없는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급보를 받았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갈 수도 없고 그만 둘 수도 없고 사랑하는 딸의 임종도 못한 마음이 짓눌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슬픔이 두려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바클레이라고 하는 성서 신학자는 "이 소녀의 죽음은 생명이 넘치는 아침이 되어야 했을 때 밤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창 피어나야 할 나이에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이나 슬픔이나 실패라고 하는 것들은 나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리고 그것들은 갑자기 찾아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렵고, 가장 슬프고, 가장 심각한 절망은 죽음입니다.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 번째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며 네 번째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래 살았건 짧게 살았건 간에 죽음은 그 자체로서 슬픈 사건이고 두려운 사건인 것입니다.
기적의 조건-생명주신 주님을 온전히 신로하는 믿음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눅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하에서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아직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이런 믿음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딸을 구원하여 믿음을 온전케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쫒아오는 사면초과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있어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회당장에게 자신 있게 딸의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끝장났다고 포기할 때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절망할 때 여기에 주님은 기적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어떤 위기에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 끝났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망했다는 말을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말도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에 근거하여 내가 할 수 없으니 주님도 못하실 거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경험되지 않는 사건이라 주님도 손 쓸 수 없다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초월적으로 역사하는 능력을 그대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일단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이제는 모두가 끝난 일 그만 둡시다 이제사 무슨 믿음은 믿음입니까? 하고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야이로는 지금 시점에서 반신반의였으나 자신의 모든 판단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자신의 소원도 맡겼습니다. 그 뒤의 결과에 대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 위탁해 버렸습니다. 회당장은 일절 예수님께 대꾸한 흔적이 없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속에 믿어지지 않지만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믿음이 실감이 되지 않을 때 잠깐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상활을 바라보십시오. 조용히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십시오. 서둘러 절망하지 말 것이며 성급히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의 뜻도 그 의미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믿음의 표지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아무것도 확신이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어려운 상황으로 화당장을 몰고 갔을까요?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의 결과의 실제를 보여주시기 위한 주님의 의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역사는 인간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 하에서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두려움을 이기고 염려 근심도 이기고 사망의 권세도 이기고 승리한다는 구원을 말씀합니다.
예수는 생명-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눅8:51-56)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痛哭)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고통의 자리에 주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사망이 드리워진 절망의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초상집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딸의 죽음 앞에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3)-죽은 것을 알고 비웃음
불신자에게 죽음은 삶의 절망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신자에게 죽음은 다음 날의 더 나은 삶의 휴식(안식)을 의미하는 잠과 같이 더 나은 생명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잠자리에 들면서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일 깬다고 생각하고 잠이 듭니다. '잠'으로 비유된 죽음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도 절망의 순간에 "또 다른 내일이 있다" 혹은 "내일 생각하자(Tomorrow is another day)"며 잠자리에 드는 장면은 '잠'이 새로운 내일을 위한 안식(과정)임을 보여줍니다.
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데 자녀들이 죽 둘러앉아 있습니다.
아들딸들이 둘러선 가운데 신앙이 좋은 어머니는 하나하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 마지막 인사는 "굿나잇"입니다. 한 아이에게만 '굿 바이' 라고 인사합니다. 그 아들이 섭섭한 나머지 "왜 저에게는 굿나잇'이라고 말하지 않고 '굿바이'라고 하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다른 아이들을 예수를 믿으니 천당에서 만나겠지만 너는 다시금 만날 것 같지 않아서 그런다. 너는 예수를 믿지 않고 있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아들 "저한테도 '굿나이'해 주십시오. 예수 믿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여러분 죽음은 굿바이가 아닙니다. 굿나잇입니다.
2)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주님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시니 죽은 시체에 생명이 공급됩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남(56)
"달리다굼(Talitha kum)"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은 아람어로 부모들이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믿는 모두에게 주어진 말이기도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은 믿는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께서 생명을 명하여 에스골 골짜기의 뼈들이 살아난 것처럼 죄악과 허물로 죽어있던 모든 죄인들이 주님의 손길로 만지시고 일어나라 명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소녀가 살아난 것은 소녀의 믿음도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도 아닙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은 '빛비춤을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기 위하여 한 줄기의 주님의 생명의 빛이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 으니(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그 영(靈)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그렇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생명을 돌아와 딸이 살아난 것을 보고 그 부모들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제사 생명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불확실한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만드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끌어내어 모리아 산까지 끌어내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까? 오직 사람의 뜻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으로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33년을 인성과 신성이 합하여 사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부활의 영으로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영생을 얻게 하셨고 부르심에 영광 가운데 그 영광의 풍성함을 생명의 떡으로 생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취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오늘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의 우리의 신분은 누가복음 8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1) 거역하는 폭풍이 이는 바다를 처리하시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신 절대적인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하심
2) 귀신 들렸으며 더러운 산업에 연루되엇음,귀신을 내어 쫓겼으며 돼지치기 산업을 깨끗이 정리하심-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
3) 우리의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생명을 공급받아 평안과 건강의 치유를 체험
4) 치료받고 소생되어 주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주권이 우리 안에 임하면 폭풍이 잠잠하고 귀신들이 패배당하고 병이 치료되며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고 치료를 받고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가운데 계시하시는 모든 사건을 통하여 생명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을 생명으로 누리면 구원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체험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장 40~56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
오늘 성경 속에서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열 두 살 난 딸이 죽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난 사건이 나오고..또 십 이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되는 사건이 나온다. 이 사람들의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은 공통적인 신앙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지를 본문 속에서 자세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
1. 혈루증을 앓는 여인
1)레15:25-30에는 혈루증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혈루증은 피가 끊임없이 나오는 병이다.
(1)성경에는 이 병을 부정한 병으로 말씀하고 있다. 유출 병이라고도 한다. 부정하다는 것은 성경에 죄를 모형하고 있다. 문둥병도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도 부정하다고 했다. 다른 말로 이 여인이 죄 지은 자가 된다는 말이다.
(2)자신만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를 만지는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보았다.
(3)이런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4)유대인들은 이런 병이 있는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도 당한다고 한다. 격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가정 생활이 안 되는 것이다.
(5)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 병으로 고통을 당한 것이다.
(6)막5:26절 이하에는 이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이 여인이 많은 의원들..즉 의사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중하여 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고 있는 내용이다. 마태복음은 대강 기록하고 있고 마가 복음서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여인이 자기의 병을 고쳐보기 위해 많은 의원들을 찾아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좋은 의사들도 있는데 좋지 않은 의사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재산도 탕진하고..병은 낳지 않고 오히려 더 중해졌다.
(7)이 여인의 형편이 이러니 세상에서는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인이다.
◑사람들에게 부정하게 보이고..사람도 가까이 오지 않고..혹시 여러분 중에 사람이 가까이 오면 그것이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란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도망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도 와서 좋아하면 도망가지 말고 좋아하시기 바란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이 여인은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예배당에 갈 수도 없다. 또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다. 공동체 생활도 되지 않고..미움을 사도 돈이나 좀 있으면 먹고살기나 하겠는데 돈도 없고..누가 봐도 이 여인은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료받고 복된 여인이 된 줄 믿는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제는 인생을 다 살았다고 한다.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기사가 무엇인가..자살이다.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사람들은 이 혈루증 여인보다도 나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살할 이유가 있어서 자살 한 것이 아니라 길을 몰라서 자살을 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이 여인이 축복된 사람이 된 줄 믿는다.
2)어떤 믿음의 여인인가
**43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마가 복음서에는 뭐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이러라..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안수 기도해 주시고 예수님이 말씀해주시고...여기까지 가지 안았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병이 낳을 것이다 라는 간절함과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하신 줄 믿는다.
(1)왜 이 여인이 이런 간절한 믿음을 가졌는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은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할 때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그분만 내 문제를 해결할 자라는 사실을 알 때이고 둘째로는 그분께 나가면 내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 때 간절해진다.
◑많은 성도들이 간절함으로 주님께 나오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 문제가 해결 되도 되고 안 되면 다른 방법도 있다...이러면 간절해지지 않는 것이다. 기도가 왜 간절하지 못한가...기도를 들어주시면 좋고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다..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그것 밖에 없다면 간절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되어야 갰는가...정말 예수님만 유일한 길임을 알 때 주님 앞에 간절히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언뜻 보면 세상에 물질과 명예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정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한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저주와 죄와 사단의 손에서 이 땅에 승리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이름 밖에 없다. 다른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을 때 주님께 간절히 나가게 된다. 이 혈루증 걸린 여인이 간절히 나간 이유가 무엇인가...예수 외에는 자기의 문제가 해결 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결론 내린 것이다.
(2)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반드시 예수님께 나가면 해결된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다. 이때 간절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사 님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데 이분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을 알 때 간절해지는 것이다. 그럼 부탁을 들어준다는 확신이 없을 때는 그냥 한번 부탁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안 되요..하면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이 확실하게 부탁을 들어줄 것임을 알 때 간절해지는 것이다. 이 혈루증 걸린 여인이 이런 믿음을 가진 줄 믿는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왕이었다. 권세와 물질과 명예...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이 다윗은 늘 어디를 믿었는가..사람을 믿고 명예와 권력을 믿은 것이 아니라..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주님을 의지했다. 언뜻 보면 세상에 믿을 것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믿고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여인이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간절히 나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믿는 신앙이 되시기 바란다.
◑저는 옛날에 기도를 할 때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이런, 저런 문제를 도와 주시옵소서...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저는 하나님 도와 달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고 내가 좀 하다가 부족한 부분을 도와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만 우리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고 그분만 우리 신앙의 대상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분만 우리를 구원할 자이시고 승리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와 우리 교회를 주장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성도들을 다스려 달라고 기도를 한다.
◑저는 가끔 우리 성도 님들 집에 심방을 할 때 하나께 이 가정에 주인 되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 집에 성도 님의 마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고..제가 제일 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가정을 주장하고 다스리고 주인 되시는 것이 제일 복임을 저는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 교회가 최고 복된 때가 언제인가...설교를 잘 하고 성도가 좋고..다 좋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주장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면 최고 복된 교회인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주의 손이 함께 하사 주의 은혜가 보여..라고 했다. 왜 그런가..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가장 복된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간섭이야말로 가장 복된 일인 줄 믿는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올 때 가장 복된 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러니 이 여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였나...옷깃만 잡아도 낳을 줄 확신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지..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때로는 우리에게 응답이 되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은 광대하신 분이시다.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동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로 가는데 여섯 시간이 걸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비행기로 사십분이면 온다. 중국 땅이 얼마나 큰가..여섯시간을 가도 중국이다. 그런데 그 큰 나라와 지구가 하나님 앞에는 발등상도 되지 않는다. 광대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 시고 그분이 함께 하신다. 조금만 믿어도 측량할 수 없는 응답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역사를 해 달라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역사는 조금 되어 있는지...이 여인은 많이 역사를 해 달라가 아니라 옷깃만 만져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알았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구스 여인이 개들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다. 부스러기 같은 은혜만 주셔도 내 인생은 너무너무 복되다는 것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고 증거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몇 번 중심을 가지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다. 하나님은 저에게 조금 주셨지만 저는 일평생...나쁜 말로 우려먹고도 남는다. 맨날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되었다고 우려먹고 있다. 표현이 나빠 죄송하지만...정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님은 살아 계시더라..하나님께서 조금 응답을 주신 이것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이것가지고 밥도 먹고..옷도 입고..신도 신고..예수님의 능력은 과연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이 여인과 같이 정말 내 문제가 예수 안에서 예수님만 해결자임을 정말 믿는다면 그 앞에 안 나갈 자가 어디에 있는가..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시간이 얼마나 엄청난 시간임을 알면 몇 일 전부터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일찍 와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할 것인데..안 믿으니까 그냥 와서 앉아 있으면서 손들고 찬양하고 하니까 와 이라노...기도는 왜 저렇게 또 오래하는지..설교는 왜 이렇게 긴지 미치겠다. 하고..엄청난 중요한 가치를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영적인 힘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응답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역사 하신 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으면 얼마나 감격적인 예배가 되겠는가..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온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 찌라 했다. 저는 예배 시간을 굉장히 귀중히 여긴다. 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고..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이 응답을 받고 치유되어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평안해 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다.
◑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계시며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예배가 중요한가..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될지 안 될지 의심하면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최고의 복된 시간이 주님께 나오는 시간인 줄 믿는다.
**47절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려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성도 되시기 바란다. 정말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 능력을 측량 할 수 없다. 조금만 은혜를 주셔도 살만한 것이다. 늘 감사하고 기쁜 것이다.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드냐..고 다른데 구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 구하는 성도 되시기를 바란다.
3)예수님의 말씀
**45-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손을 댄 자가 있다 하셨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하셨다. 베드로의 대답을 보라...무리가 옹위하여 민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오실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누가 손을 댔냐고 물으니 베드로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누가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 이렇게 가겠는가...용필이 오빠한테...가수만 오면 오빠야...하고..손을 잡으려 하고...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누가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 질문이 아닌 것이다. 무리가 예수님께 나왔는데 응답을 받은 사람이 없다. 무리로 주님께 나오지 마시기 바란다. 똑 같이 나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런 사람이 응답을 받는 것이다.
◑이번 주에 요10장을 성경공부를 하고 다녔는데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나는 목자라 내 양을 각각 불러내느니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전부 각각 부르시는 것이다. 무리가 아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가...각각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각각 다르다. 무리가 의미 없이 와 있을 때는 의미 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은혜 받고 섬길 때 무리로 오지 마시고 정말 주님께 각각 믿음을 가지고 나오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다는 말씀은 무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베드로의 생각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누가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인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틀린 말이다. 성도는 굉장히 맞는 말을 하는데 주님 보실 때는 틀린 말이 많이 있다.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맞는 말인데 주님이 보실 때 틀린 것이다.
4)여인의 자세
**47절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1)떨며 나아왔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여야 한다.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은혜를 받는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믿었다. 그래서 벌벌 떨기만 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간첩보다도 두려워하지 않고 막무가내이다. 틀린 것이다. 진정한 신앙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두려움과 사랑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데 가장 두려운 분으로 또 가장 사랑하는 분으로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인 줄 믿는다.
◑왜 이 여인이 두려워했는가...자신의 병이 낳은 것도 충격이었지만 누가 만졌는지를 예수님이 아시고 계신 것이다. 신적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고 나니까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니시다. 우리의 생명의 주요 없게 하시기도 하시고 있게 하시기도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신데 어떻게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이 여인이 떨며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다.
(2)엎드려...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하게 된 줄 믿는다. 저는 우리 교회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참 감사하고 기쁜 것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예배 전에 찬양하라 라고 찬양하는 것이 참 기쁘다. 모든 성도가 그냥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이 시간 임제 하시고 우리의 찬양과 말씀과 기도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고 응답하심을 사실로 알고 드리기를 원한다. 예배 안에는 교제도 있고 다 있다. 그러나 그 중요한 목적은 경배이다. 은혜 받기 위해 나온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은혜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을 돌릴 때 행복하고 기쁘고 예수 앞에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5))믿기만 하면 된다.
믿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결과가 평안이다. 이 여인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겠는가...예배도 드리지 못하고..죄인으로 취급당하고..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가정도 엉망이요 돈도 없고..살아갈 길이 막막한 여인인데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함께 하심으로 딸아 평안이 가라 하셨다.
◑혹시 여러분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은가..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바라보는 자에게 주님은 참 평안을 주신다. 내가 너에게 평안을 주노니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참 평안이다.
◑좋은 사람 만나면 기쁠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기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쁠 것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쁠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그런 것들과는 다른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기도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 받은 평안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도 가질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이다.
◑예수님께서 이 평안은 너희에게 주노라..딸아 내가 너에게 이런 평안을 주노라 하셨다. 있다가 없어지는 평안이 아닌 것이다. 육신으로 채울 수 없는 참 평안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평화...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주께서 주는 이 평안을 맞본 사람은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세상 것을 구하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왜 이 평안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딸아 평안할 지어다...하셨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인데...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주신 주님께 참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줄 믿는다.
2.야이로의 딸
**40-42절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 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지만 정말 중심으로 기다린 사람이 한 사람이 있었다. 회당 장 야이로였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무릎을 꿇었다. 무슨 뜻인가...누구에게 무릎을 꿇는가..왕이나 주인에게 한다. 이 야이로가 어떤 사람인가..예수님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실 그리스도로 알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왔지만 누가 응답을 받았는가...야이로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줄 믿는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응답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응답을 주시고 치유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치유함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셨다. 찬송가에도 이런 찬송이 있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에 주님 은사 구한 내게 은사의 주님...사람이 구하는 것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응답이 다르다. 이 야이로라는 사람이 간절히 구한 것이다.
**49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사람들의 믿음이 어떤가..예수님께서 딸이 죽기 전에 오면 혹시 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죽었으니 선생님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말인가..나쁜 말인가..좋은 말이다. 참 합당한 말이다. 너무나 논리가 정연하고 합리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가..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으로..내가 좀 하고 모자라면 도와주시고 불가능한 것은 또 안 되는 분으로 믿는다. 그러니 선생님을 괴롭히지 말고 가게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성도들도 있다. 주님이 역사 하시기도 전에 자기 생각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관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 이상을 초월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대상자이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혈루증 여인을 낳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예수 안에서 자녀가 된 것이다. 신분이 면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이다.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예수님께서 믿기만 하라 하셨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라 하셨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낳게 된 것도 믿음 때문이다.
◑어떤 분이 이번 주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제가 강의를 할 때 한 말이 예수님께서 훌륭한 일을 하셔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 말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땅에 오셔서 훌륭해서 그리스도가 되셨다면 우리도 그리스도가 되려고 훌륭해 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그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무엇인가..정말 믿으면 행위는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행위가 따라올 때까지 믿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믿음이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은 말만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이해를 하라고 이런 표현을 했다. 어떤 총각이 아가씨를 사랑한다..그러면 열심이 생기는가 안 생기는가..생기는 것이다. 이건 개으른 사람일수록 더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부지런 한 사람은 일 때문에 그런 열심이 덜 생긴다. 그런데 사랑해 하면서 하나도 열심히 안 하고 열 년에 한번만 전화하고..거짓 말이다. 사랑하면 하루에 한번 한 것 같지만 전화통을 수십 번도 들었다 놓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믿으면 행위는 나오게 되어있다. 기도하면 정말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알 때 기도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예수님께 나가면 정말로 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면 간절히 나가게 되어있다. 행위는 믿음을 포함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을 죽은 믿음이라 했다.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틀린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자기 본향 친척집을 떠났다고 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자식을 드렸다고 했다. 정말 믿으면 하는 것이다. 정말 믿으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정말 믿으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다.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앞에 나오면 다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고 사실이 그렇다. 영접만 했는데 하나님이 역사를 하신다. 영접만 했는데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영접만 했는데 귀신이 떠나간다. 우리가 한 것은 믿고 영접만 한 것이다.
◑말씀을 듣고 은혜만 받았는데 집이 형통해 지고..은혜 받고 주님만 믿기만 하는데 자꾸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정말 믿는 사람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가짜로 믿는 사람은 다 내가 했다고 한다. 전부 가짜이다. 마25장에 기록하고 있다. 진짜는 주여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가짜는 내가 언제 안 했냐고 한다.
◑여러분이 교회를 섬기는데 이것도 내가 했고 저것도 내가 했고..내가 교회 일을 많이 했다..가짜이다. 정말 내가 헌신하고 몸살이 날 만큼 섬겼는데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사람은 정말 교회를 사랑해서 섬긴 사람이다. 불효자와 효자의 차이는 무엇인가..부모님에게 내가 이것도 해 주고 저것도 해 줬는데...불효 자식이다. 가장 잘 섬겼지만 부모님에게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진짜 효자이다. 이것이 진짜와 가짜의 차이이다. 자기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으라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진짜이다. 주님이 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되고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변화되고 치유되고..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기만 했는데 주님이 하신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왜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51절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예수님께서 다 대리고 들어가지 않으셨다. 왜 안 믿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에게만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 믿는다는 증거로 예수님께서 이 아이가 잔다고 하신 말씀에 53절에 비웃었다. 딸아 다니기는 딸아 다니는데 믿지 않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예배는 드리는데 속으로 뭐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실 까..하는 사람..여기까지 와서도 그냥 가는 사람이다. 기도는 해 놓고 안 믿고..헌금은 하면서 하나님이 받는다는 생각은 안 하고..어차피 드릴 것이라면 믿음으로 드리시기 바란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고..인색함이 없이 즐거움으로 드리고..얼마나 멋이 있는가..이 지하실까지 와서 은혜도 못 받고 가지 마시고..
**52-56절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이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날가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영이 돌아와...이 말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 저희를 내 손에서 뺏을 자가 없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렇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디 가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너무 마음이 진실하고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다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제가 심방을 가보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 사람들이 제대로 은혜를 받으면 일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은혜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이 집에 복음을 전했더니 아들이 영접을 하고..해방을 받고 감사와 기쁨이 있고..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 여인을 보니까 진짜로 믿어진다는 것이다. 진짜로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다.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다고 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이 있게 된 줄 믿는다.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3.공통점과 차이점
1)공통점
무엇이 같은가 하면 열 두 살이고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알았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병에서 치유함을 받았고 한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공통점이다. 무엇이 또 같은가..믿음을 가졌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인간을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자기의 문제가 예수님 외에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하게 간절하게 나온 것이 공통점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합당한 은혜와 응답을 주심을 믿는다.
◑이 둘의 공통점이 또 무엇인가...간절하고 겸손했다. 교만한 사람은 간절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다. 저는 제일 머리가 나쁘고 바보 같고 우둔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사람이 학벌이 어떻고 돈이 얼마나 있고 명예가 어떻든지 관계없다. 교만한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 속에 말씀이 들어갈 수 없다.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 남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같이 살 수 없다.
◑제일 복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 하셨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가 임한다. 겸손한 자는 주님 앞에 간절해지는 것이다. 겸손한 자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긴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신다. 온누리선교교회 성도 님들은 겸손하고 서로 섬기는 자 되시기를 바란다. 자기를 나타내려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우리가 나타낼 것이 뭐가 그렇게 있는가...바울은 말하기를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고 우리가 희망이 없고 소망이 아무것도 없던 우리에게 다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고 했다. 감사할 일이지 나를 나타내고 교만해 질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2)차이점
한 사람은 귀한 사람 회당 장이었다. 한 사람은 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천한 자에게나 귀한 자에게나 다 그리스도이시다. 그 사람의 신분 고하를 망론하고 반드시 믿음을 통해서 응답을 하셨다. 신분이 있다고 응답을 하시고 없다고 안 하신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다고 복을 주는 줄 안다.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한다고 생각을 한다. 엉터리 같은 생각이다.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우리의 신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주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응답하시는 줄 믿는다.
◑또 한 사람은 혈루증이었고 한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또 한 사람은 본인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구원을 받았다. 때로는 성경에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고 치유 받은 사람도 있고 친구의 믿음으로 아버지의 믿음으로 자녀의 믿음으로 치유 받고 구원받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를 위해서 불신자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다.
◑제가 복음을 전한다고 이렇게 하지만 저 자신을 볼 때 복음을 전하고 이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늘 감사한 것은 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던 분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내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 지에 가보면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세밀하게 알게 된다. 우리의 믿음도 혈루증 여인과 같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실제적이고 겸손한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남을 위한 믿음도 가짐이 옳은 줄 믿는다. 하나님이 하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할 줄 믿는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는 가서 말하라 하시고 한 사람에게는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 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사람들이 있지만 믿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응답할 자에게 응답을 주신다. 또 한 사건은 제자들이 모르는 사건이고 한 사건은 친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리고 가셔서 보이셨다. 이것이 다른 부분이다. 한 사건은 여인의 믿음으로...한 사건은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양하다. 때로는 우리 개인에게 주시고 때로는 모든 사람에게 같이 보이실 때도 있다. 혼자 주실 때는 그 사건에 대해서 가서 말하라 하셨고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그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지 말라 하셨는데 안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가 알게 되었다. 안 믿는 자에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온 땅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는다.
◑본문에 믿기만 하라 하셨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땅에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전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남편도 문제고 자식도 문제고 교회도 문제고 직장도 문제고...전부 문제이다. 모세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홍해도..광야도..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었다. 문제는 하나이다. 안 믿는 것이다.
◑우리 교회 성도 님들도 예전에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문제가 안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금방 교회가 없어질 것 같다. 그런데 기도하고 정신차려보면 아니다. 그래서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우리가 느낀 것을 맡다 고 다 말하고 다니면 범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넘어트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을 믿음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바른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가지고 보고 말하고 증거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믿는다.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눅 8장 41~55절 / 문기태목사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의심? 욕심? 옛 습관?
방해가 되는 많은 요인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방해는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은 믿어야 하는 줄 알지만 두려움 때문에 망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고 순종해야 하는 줄을 잘 알지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고는 하나님께 믿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마귀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으로 위협하며 제대로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믿으려면 먼저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끝까지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도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 장 야이로의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성전이 파괴된 바벨론 포로 시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회당에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을 재건했지만 곳곳에 회당을 세우고 회당에서 율법을 낭송하기도 하며 율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설교도 했습니다. 그 회당을 관장하는 사람이 회당 장입니다. 야이로는 그처럼 유대교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 예수님께 와서는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열두 살 된 외동 딸이 죽어가고 있는 데 지금 곧 집에 오셔서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시는 중에 그만 지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 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가 옷 술을 만져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미 많은 병자들이 예수의 겉옷 가를 만져 나음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여인이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예수의 겉옷 가에 있는 옷 술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시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갔다."고 물으십니다. 여인이 떨면서 앞으로 나와 자신이 그랬다고 말하며 열두 해 동안 흐르던 출혈이 몸에 멈추었다고 간증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바라보시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십니다.
여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었을까요? 여인의 병은 생리가 멎지 않고 계속 되는 병이었습니다. 율법은 피의 유출이 계속 되면 그 사람이 부정하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혈루 증 여인이 무리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과 부딪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으니 온전하신 예수님도 여인 때문에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의 옷 가에 살짝 손을 대어 나음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정말 피가 멎고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느꼈습니다.
현장을 조용히 빠져 나가려는 순간,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하십니다. 제자가 대답합니다."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습니다. 더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고백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낱낱이 고백하면 무서운 처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나와 엎드립니다. 모두가 듣도록 자신의 병과 손을 댄 이유, 그리고 낫게 된 경위를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온전한 용서와 구원 그리고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처벌 받지 않아도 됩니다.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수치심을 씻어 주십니다. 평생 짊어지고 살아갈 죄의식도 사라지게 해 주십니다. 고통스러운 혈루 증이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고백하므로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외동 딸을 살려보려고 체면도, 지위도,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간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딸이 죽어버렸습니다. 어깨에 힘이 쑥 빠져 버립니다. '다 끝났다.' 하는 생각과 낙심이 밀려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입니다.
회당 장에게 어떤 두려움이 밀려왔을까요? 딸의 죽음의 대한 두려움, 상실의 두려움, 수고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비웃음과 조롱을 받을 두려움, 온갖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두려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지체하게 만든 혈루 증 여인에 대한 원망, 신속히 가시지 않고 길에서 지체하신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도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라도 하신 듯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히 '믿음을 보여라.' 하시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셨을까요? 두려움에 굴복하면 믿음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단이 두려움으로 마음에 가득하게 하여 마음에 품은 믿음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을 몰아 내야 합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마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 두려움이 먼저 우리의 믿음을 삼켜버리고 또 우리 자신을 삼키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회당 장은 두려움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외동 딸이 중병에 걸린 것도 큰 두려움인데 병이 악화되어 죽어 버렸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중간에 만나는 두려움, 비웃음, 의심, 낙심 등이 가로막아도 두려움에 굴복하여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기도하다가도 포기합니다. 순종하다가도 중간에 포기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다가도 포기합니다. 주님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님만 신뢰하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고하게 서서 요동하지 않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두려움과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믿음을 드러내야 하는 때입니다.
나의 실수와 허물이 드러나 곤란하게 될 것 같고,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렵게 되고, 무엇보다도 비난과 비웃음 조롱의 한복판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에 집중하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을 인정받고자 몸부림치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여 질병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며 절망을 이기며 살며 주님께 믿음을 인정 받고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눅 8:42-48 / 조정헌목사
우리에게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응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도응답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우리가 말씀을 알고 있으면 응답을 받은 것이고 말씀을 모르면 응답을 못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까? 떠났습니다. 친척을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까? 안 떠났습니다. 본토를 떠날 때 친척인 롯을 함께 데리고 간 것 때문에 결국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툼이 생겼을 때 롯에게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조카 롯을 떠나보냅니다. 그때서야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터지면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아는 사람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새 힘을 얻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더 기도해야 되는 시대입니다. 대한민국이 힘들고... 한국교회가 힘든 시기이고... 개인의 삶에도 엄청난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이혼율, 자살률이 세계 최고입니다. 가정도 학교도 갈 때까지 갔습니다. 이럴 때 기도 안하고 침묵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무조건 기도를 합니다. 왕부터 나라의 어려움, 민족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이 생기면 무조건 머리에 재를 뿌립니다. 옷을 다 찢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어디 아프세요? 라고 묻는데 “한 번 알아 맞춰 보세요.”라고 하면 안됩니다. 어디가 아프다고 말을 해야 의사 선생님이 처방을 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우리가 어디가 힘들고 아프다고 말씀을 드리십시오. ‘이것 때문에 힘들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데 잘 안되요.’ ‘공부를 잘 하고 싶은데 지혜를 주세요.’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해결해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저주 가운데 있던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저주는 떠나가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약속된 복을 다 누리게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읽다가 구약에 보니까 너무 무서운 내용들이 많고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이렇게 무섭습니까?”라고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설명하기를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과 동시에 그 죄에 대한 결과가 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었으면 그 다음에는 신약성경도 꼭 읽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분이 찾아 와서 하는 말이 “신약성경을 읽어보니까 죽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군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도 "내가 너를 용서하노니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도 용서해주시면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도둑도, 절도도, 강도도, 간음한 자도 다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들은 고쳐주시고... 신약성경에 보니까 구약성경하고는 완전히 딴 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주신 그것이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잘 믿어서 꼭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롬 8장에서도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해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세상에 어머니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한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도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실 분도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초음파로 찍어서 볼 수 없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못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는 우리의 죄를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못보시는 것이 아니라 안보시는 것입니다. 아예 기억조차도 안하신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와 전혀 상관이 없이 우리를 바라보신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어떻게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정말로 값지게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 몸에 수만 개의 혈관과 세포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만 막히거나 터지면 몸 전체가 마비가 되거나 죽게 되는 것처럼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고 사명도 다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동체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한다. 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비록 내가 맡은 일이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식사하는 자리에 초대를 해보신 적이 다 있을 것입니다. 식탁의 자리에 앉아서 함께 대화를 나누다보면 정말로 행복해집니다. 초대를 한 사람도 행복해지고 초대를 받은 사람도 행복해집니다. 그럴 때 초대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준비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를 해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다.
오늘은 교회가 우리를 특별히 초청해준 날입니다. 그러면 초청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됩니다. 영의 양식을 먹고 좋아하면 됩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행복해지면 됩니다.
여러분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대답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자신 있게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이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아니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십니까?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중세 시대의 어느 왕이 지혜자들을 모아놓고 가장 지혜로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 개의 답이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도 공짜가 없습니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고난의 이유를 다 알 수도 없고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또 세상에서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내가 꿈꾸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산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더 잘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건강하기를 원하지만 건강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서운 병이 손님처럼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삶의 무거운 짐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유도 모르는 고난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아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도 보면 그런 삶의 문제로 고민해야 되는 한 불쌍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을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혈루증은 혈관조직이 약해져서 피가 새는 병입니다. 소위 만성출혈병입니다. 보통은 여성들에게 많은데 이 병이 계속되면 결국 악성 빈혈로 인해 생명까지도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이 이 병을 가리켜서 “부정한 병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한 병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병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맹인, 절뚝발이, 곱사, 난쟁이, 괴혈병, 버짐, 피부병, 나병... 등 성경이 정하고 있는 부정한 병에 걸리면 사람들과 격리가 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몸도 힘들고 마음고생도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피가 납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피가 멈추지를 않는 것입니다. 몸이 점점 피곤해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립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나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못합니다. 혼자 숨어서 고생 고생하다가 어느 날 발각이 되면 성 밖으로 쫓겨나야 됩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훨씬 더 아픈 병입니다.
여러분! 이런 여인의 고통을 이해하시겠습니까?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라고 했습니다. 일이년도 아니고 12년 동안이나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 몰골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12년 동안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못 고쳤습니다. 이런 경우에 찾아오는 절망감을 생각해 보셨나요?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겠습니까? 12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상황에 놓여질 수 있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경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이 여인에게 12년은 한마디로 두려움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벌 받고 있다는 생각, 결국 병은 못 고치고 죽게 될 거라는 두려움, 게다가 발각되면 쫓겨날 거라는 불안감,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외로움...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더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잘못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자녀들이 혹시 잘못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혹시 내 몸에 큰 병이 생길까봐 두려워합니다. 이런 두려움들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에 대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두려움이 소리만 큰 공포탄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감정은 있는데 그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마너스 목사님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사해보았더니 아주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의 40퍼센트는 실제로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30퍼센트는 두려워 해봐야 소용이 없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퍼센트는 쓸데없는 두려움이고, 10퍼센트는 아주 사소한 두려움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것은 겨우 8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라면 우리가 한 번 해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100%라고 생각하니까 두려운 것이지 8% 정도라면 우리가 충분히 해볼만하지 않겠습니까?
실체가 없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체가 있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뭡니까? 마태복음 6:30에 보시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려움의 문제가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 데도 두려워하는 아이가 있습니까? 엄마 아빠가 곁에 있으면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물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데 혹시 물질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우리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데 혹시 건강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두려움들은 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식은 바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을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 가능성이 바로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도 처음에는 크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고통이 줄어들면서 나중에는 일상생활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이 바로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불행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는 불행이 우리의 생활이 됩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중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합니다.
“처음에 나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어.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점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게 된거야. 그래서 내가 감옥에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어. 오히려 감옥에서 나가면 힘들고 감옥에 돌아오면 편안한거야. 그렇게 20년을 살았어.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바로 나를 망치는 장본인인 것을 알았어. 나는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것에 익숙해 진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불행의 감옥에서 탈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행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자신의 불행에 익숙해졌다면 그녀는 예수님께로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불행이 찾아오지만 그 불행에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에 익숙해지면 공부를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에 익숙해지면 절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게으름에 익숙해지면 조금만 일해도 힘들어합니다. 불행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집니다. 믿음은 결국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 콜린스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좋은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좋은 것에 만족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라고 해서 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겠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차 한 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쉬면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남들도 다 나처럼 병들었는데 뭐. 나만 병들었나?” 하면 절대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한숨을 쉬면서 “남들도 다 불행해!”하면 불행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더 발전하게 되면 포기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에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지 뭐.”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가롯 유다도 그런 식으로 살다가 결국에는 자살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바로 불행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불행을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공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인해 도망을 가면 도망친 그곳에서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소가 서로 싸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소가 싸울 때 진 소가 이긴 소를 피해서 달아납니다. 그러면 이긴 소가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까? 끝까지 쫓아가서 뿔로 받아버립니다. 도망을 가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도망가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바로 중독입니다. 술도 어쩌다가 한 두 잔은 할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잠시 동안은 기분이 괜찮아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마시다 보면 점점 거기에 중독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TV를 봅니다. 처음에는 한 두 시간 보면서 머리를 식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7시간, 10시간 보다가 점점 바보상자에 중독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조심해야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온갖 나쁜 것들이 다 거기에서 나옵니다. 가정에서 대화의 단절도 그것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43-4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님께로 나아간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불행에 나는 익숙해지지 않겠다. 이것 때문에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겠다. 그리고 도망도 가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우물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밧줄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밑을 보니까 깜깜한 것이 굉장히 깊어서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밧줄을 놓아라.” 하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밧줄을 놓으면 저 밑바닥으로 떨어질게 뻔한 데도 더 이상 밧줄을 붙잡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밧줄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때 풍덩하고 우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염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밧줄과 우물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두려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바닥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닥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내려놓으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부서질 만큼 깊은 바닥이 우리 인생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여인의 행동을 보십시오. 44절입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능력의 근원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어린 양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 5:12에 보시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7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약한 자들에게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부가 되어주십니다. 무지한 자들에게 지혜가 되어주시고... 몸이 연약한 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낮은 자들에게 존귀함이 되어주시고... 죄인들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에너지입니다. 부는 물질이고 힘은 건강입니다. 존귀는 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영광은 거룩한 삶입니다. 찬송은 기쁨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해주셨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왜 그런 것들을 안 주시겠습니까? 독생자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분이 우리에게 뭘 안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을 꼭 만나고 돌아가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왜 나만 이런 고난을 겪고 있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꼭 회복해야 될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환경, 어떤 고통이 찾아온다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그곳이 고통의 자리가 되었든 실패의 자리가 되었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힘
이윤재목사 / 눅8:42-48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가끔 누구를 식탁에 초대해 본 적이 있습니까? 목회자인 저는 성도들의 초청을 자주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가 대학에 붙었어요. 그동안 기도해 주셔서 식사한번 모실까 해요. 꼭 오세요”. “목사님, 새로 공장을 이전했어요. 오셔서 축복해 주세요”. 그래서 가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같이 식탁에 앉아 서로 축복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초청한 분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합니다. 제가 할 일은 다른 것 없습니다.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잘 먹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여러분을 초청한 날입니다. 초청받은 여러분이 할 일이 있습니다. 잘 드시고 기뻐하시면 됩니다. 편한 마음으로 앉아 축복받고 행복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여러분을 초청한 것은 다만 음식때문이 아닙니다. 음식보다 더 큰 기쁨을 드리려고 초청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기쁨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에게 먼저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있게 “나는 행복하다”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행복하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아니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중세 시대의 어느 왕이 지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소”. 결국 두 말이 당첨되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지나간다”. 둘째.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렇습니다. 행복에도 공짜가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며칠전 저는 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어제 아침 제 동생의 아들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지가 겨우 55일밖에 되지 않았는 데, 열흘 전부터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그 조카를 얼마나 사랑했는 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 작은 아이가 무슨 죄로 그렇게 끔찍한 병으로 죽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이 메일을 보낸 분은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교인이었습니다. 어느날 어린 조카가 갑자기 죽자 마음이 아파서 제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조카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모르는 것이나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은 그나 저나 똑같습니다. 혹시 긴 이야기를 잘못 써 그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지금까지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어느 한인교회에서 잠시 설교목사로 있었는 데 어느 토요일, 한 여자신자가 교회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제가 누구인지 아셨을까요?” 저는 “물론이죠.”하며 렘1:5을 찾아 읽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때 그 분이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제가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도 아셨을까요?” “물론이죠”.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가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 데도 미국에 와서 주립대학을 졸업할 줄도 아셨을까요?” “그럼요”. 그때 그 분이 저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침묵이 흐르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이 왜 저에게 불구자 아들을 주었다가 빼앗아 간 것일까요?” 그때 제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실컿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한 뒤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이 왜 불구자로태어났으며 그나마 왜 죽어는지 저는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고난이 있어서 그 이유를 다 알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꿈꾸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꿈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이 더 잘되기도 하고 착한 사는 사람이 손해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건강을 원하지만 누구에게도 무서운 질병은 찾아 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삶의 무거운 환경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 이유도 모르고 우리가 불행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두 상처를 안고 삽니다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혈루병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혈루병은 혈관조직이 약하여 혈관틈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병입니다. 소위 만성출혈병입니다. 대개 여성들에게 많습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결국 악성 빈혈이 생겨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이 이 병을 “부정한 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한 병이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한 병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손부러진자, 곱사, 난쟁이, 눈에 백막있는 자, 괴혈병, 버짐을 가진 사람, 피부병, 고름흘리는 자, 피흘리는 자, 아이낳은 여자, 설정한 자, 사생아, 그리고 한센씨병, 이런 병들은 성경이 규정한 부정한 병으로 이런 병에 걸리면 사람들과 함께 못살고 격리 수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후 제사장의 확인을 받고서야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크겠습니까? 갑자기 어느날 몸이 붓더니 몸에서 피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나옵니다. 몸은 점점 피곤해지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해집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파도 나가지 못합니다. 누가 보면 붙잡혀 끌려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숨어서 혼자 고생 고생하다가 어느날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성밖으로 내쫓깁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아픈 병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고통을 이해하시겠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눅8:43, “이에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열 두해입니다. 일이년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년이나 아팠습니다. 12년이나 피를 쏟았다면 이 여인의 몰골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12년동안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름대로 고쳐보려고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못 고쳤습니다. 그 절망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이 여인이 이방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여인은 유대인이 분명합니다. 말씀의 전후 문맥을 보면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 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부정한 병에 걸렸으니 이 여인은 얼마나 고통가운데 산 것입니까? 그것도 12년째입니다. 문제는 이 여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여인은 나름대로 성실히 살지만 어느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난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누구나 고통당할 수 있고 그나마 갑자기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우리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움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이 여인이 혈루병에 걸려 살았을 12년은 한마디로 두려움의 삶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벌받았다는 두려움, 내 병은 결국 못고치고 죽을 것이다라는 두려움, 사람들이 알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정말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냐?”라고 비난할 두려움, 그러다 발각되면 쫓겨날 두려움, 그렇게 해서 죽으면 아무도 자기를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이 여인을 짓눌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두렵습니까? 하는 사업이 잘 안돼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어느날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까? 혹시 몸에 큰 병이 걸릴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까?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를 제외하면 두려움을 주는 실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만 두려워 하지 않으면 무엇도 두렵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대부분의 두려움은 소리만 큰 공포탄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운 감정은 있으나 두려움의 실체는 없습니다. 하나 하나 바나나벗기듯 벗겨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윈 맥마너스라는 목사님이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의 40퍼센트는 실제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30퍼센트는 두려워 해봐야 소용없는 과거의 일이랍니다. 12퍼센트는 쓸데없는 두려움이고, 10퍼센트는 지극히 사소한 두려움이랍니다.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것은 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0%니까 어렵지 8% 정도 해볼만 하지 않습니까? 실체없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체있는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때문에 두려워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 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워 할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 데 두려워 할 아이가 있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소유한 주인이 있는 물질 때문에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인간의 몸을 지으시고 고치시는 분이 있는 데 건강을 두려워 분이 있습니까?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면서 내일의 희망을 포기하고 사는 분이 있습니까? 두려움은 믿음없어서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아멘. 믿음으로 두려움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는 이렇게 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익숙과 포기와 도피입니다.
자기 불행에 익숙
불행도 처음에는 크게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점점 고통도 줄고 일상화됩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불행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불행이 생활화됩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중에 주인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나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어.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점점 익숙해지고 편하게 된거야. 그래서 내가 감옥에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어. 오히려 감옥에서 나가면 힘들고 감옥에 돌아오면 편안한거야. 그렇게 20년을 살았어. 그런데 어느날 그것이 바로 나를 망치는 장본인인 것을 알았어. 나는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것에 익숙해 진거야. 나는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갇혀 있는 것에 점점 익숙해가면서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가 죽고 있었던거야”. 결국 주인공은 탈출합니다.
지금 제가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기 불행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일 혈루병 걸린 여인이 자기 불행에 익숙해졌다면 그는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불행이 있지만 그 불행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그는 죽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지에 익숙해지면 공부 안합니다. 자기 가난에 익숙해지면 일하지 않습니다. 자기 게으름에 익숙해지면 조금만 일해도 힘들어집니다. 불행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데 익숙해 지면 새벽기도 며칠 나오다 쓰러집니다. 믿음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은 것입니다. 짐콜린스가 그래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하루 좋은 것에 만족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좋은 것에 만족하고 살다가 위대한 일을 놓칩니다. 혈루병 걸린 여자라고 해서 왜 하루 하루 좋은 일이 없었겠습니까? 아침에 배불리 밥먹고 커피 한 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습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포도주 한 잔만 마셔도 행복합니다. 몸은 여기 저기 문들어졌는 데 “남들도 다 나처럼 병들었는 데 뭐. 나만 병들었나?” 하면 고칠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한숨 쉬고 살면서 “다른 사람도 다 나처럼 불행해” 하면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불행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포기
이것이 더 발전하면 자기 포기로 갑니다. “에이, 남들도 다 나처럼 아픈데 뭐. 그냥 그럭 저럭 살지”. 가롯 유다가 그러다 죽었습니다. 자살은 이래서 일어납니다.
도피
가장 나쁜 것이 도피입니다. 도피는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을 정면승부하지 않고 꽁무니빼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피의 공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부터 도피하면 도피한 곳에서 반드시 고통을 당합니다. 마치 소싸움과 같습니다. 소싸움할 때 보면 한 소가 다른 소를 피하여 달아납니다. 그러면 강한 소가 가만 둡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달려가 뿔로 밟습니다. 심판이 중단시키지 않으면 도망간 소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도피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중독입니다. 중독의 문제는 문제를 피하려다가 중독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다 한 잔 할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을 잊기 위해 한 잔 두 잔 마실 수 있습니다. 잠시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마시면 나중에 문제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술 때문에 죽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봅니다. 처음에는 한 두 시간 보면서 머리도 식힙니다. 그러다가 하루 7시간, 10시간 보면 텔레비전 때문에 바보가 됩니다. 인터넷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터넷은 필요해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앉기만 하면 인터넷으로 손이 간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나쁜 것이 거기서 나옵니다. 포르노중독도 인터넷하다가 생깁니다. 가정에서 대화 단절도 인터넷 때문에 옵니다. 인터넷에는 “인터”가 없습니다. 인터넷 열심히 하는 사람도 몰라 봅니다. 자녀가 있는 가정은 아예 T.V, 인터넷을 안방에 놓고 시간을 정해주고 하게 해야 합니다. 거실에는 책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성인들도 핸드폰, 인터넷 조심하세요. 고통을 없애기 위해 도피한 일이 사람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43-44절 볼까요? 눅8:43-44,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불행에 익숙하지 않겠다. 나는 혈루병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고통을 피하여 다른 데로 가지도 않겠다”. 물론 이 여인에게두려움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고통을 없애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문제 때문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밧줄을 붑잡았습니다. 이렇게 내려다 보니 우물물이 시퍼렇게 깊습니다. 무섭고 두려운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옵니다. “밧줄을 놓아라”. 어떻게 합니까? 밧줄을 놓으면 바닥으로 떨어지는 데. 그래도 “밧줄을 놓아라” 소리가 들립니다. 더 이상 밧줄을 잡을 힘도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고 밧줄을 놓았습니다. 그때 풍덩하고 우물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염려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물물은 무릎까지밖에는 안 닿았고 밧줄과 우물사이는 30센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물이 깊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두려운 것입니다. 보이는 바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닥이 두려운 것입니다. 포기하고 줄을 놓으면 30센티밖에 안 됩니다. 산산이 부서질 만큼 깊은 바닥이란 인생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또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습니다. 자신 있게 밧줄을 놓아야 합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와서 지금까지 자기가 붙들었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여인의 다음 행동을 보십시오. 다시 44절입니다. 눅8: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여인은 예수님께 나올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안되면 일이었습니다. 부정한 병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고 사람들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성경은 여인이 만진 것이 예수님의 “옷가”라고 말합니다. “옷가”는 이 “옷가”는 유대인들이 입고 다니는 기도복에 늘어진 “옷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옷술은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습니다. 만드는 방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방법은 처음에는 15번을 감고 다음에 13번을 또 감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신앙고백때문입니다. 15는 이스라엘 수에서 “아도나이”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13은 “에하드”, 곧 “하나”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합치면 “아도나이 에하드” 곧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옷에 붙은 옷술을 만진 여인, 이 여인이 붙잡은 것은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 다른 환자들이 자신들의 불행때문에 탄식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 옷가를 만졌습니다. 그가 붙든 것은 옷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능력이신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이시다”. 얼마나 세게 붙잡았든지 예수님도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실 정도였습니다. 46절을 보실까요? 눅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러분,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자 마자 능력이 나간 것을 믿습니까? 모든 능력의 근원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다른 데 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힘의 근원이 있습니다. 지혜를 찾는 분이 있습니까? 지혜의 근원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사업 잘되기를 바랍니까? 사업의 근원도 예수님에게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어린 양 예수를 향하여 이렇게 찬양합니다. 계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 여기에 7가지가 나옵니다. 능력, 예수님은 연약한 자에게 능력의 근원입니다. 부, 예수님은 가난한 자이게 물질의 근원입니다. 힘, 예수님은 몸이 약한 자에게 건강의 근원입니다. 존귀, 예수님은 낮은 자에게 존귀의 근원입니다. 영광,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영광의 근원입니다. 찬송, 예수님은 생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찬송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을 만지면 그 몸에서 능력이 나갑니다. 예수님을 만지면 그 몸에서 부가 나갑니다. 예수님을 만지면 그 몸에서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나갑니다. 한 몸에서 7가지가 나갑니다.
저는 예수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고2때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떠났습니다. 하나님도 잊었습니다. 거기다 어느날부터 몸에 병까지 생겼습니다. 그 일로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완전히 추락했습니다.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 준 분이 있었습니다. 대학 선배였습니다. 그 선배는 저에게 와 성경을 펴고 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억지로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한번 한번 의지해 보아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느날 성경을 읽는 데 온 몸이 뜨거웠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밀려 왔습니다. 그 순간 제 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 해 저는 바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택하자 예수님은 저에게 7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능력,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입니다. 부, 물질입니다. 힘, 건강입니다. 존귀, 사람들 위에 높여주는 것입니다. 영광, 깨끗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찬송, 생의 기쁨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한 분 예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혈루병 여인에게 주신 이것들을 여러분에게는 안 주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에게서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나아왔으면 그 몸에 손을 대십시오. 왜 나만 당하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을 이 시간 들으십시오. 눅8:48, “예수께사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오늘 염려하는 가운데 교회 나오셨습니까? 이제는 평안히 가십시오. 어떤 환경, 어떤 고통이 있든지 다시 일어나십시오. 일어나라. 일어나 걸으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아멘.
생명, 긍휼의 눈물
이윤재목사 / 눅 8:42-48
여러분은 성경중 가장 짧은 귀절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 전체가 31, 173절인데 그 중 가장 짧은 것이 요11:35절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말로는 3개의 단어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두 단어입니다. “Jesus wept." 딱 두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이 귀절이 또한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앞에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귀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피조물 하나의 죽음앞에 진실로 슬퍼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울어 보셨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부터 조금 눈물이 많아 “울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울면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이 잘 우는 것이 몸에 좋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울면 우선 눈의 독소를 제거하여 눈동자 표면을 촉촉하게 적셔 준답니다. 이른바 눈물의 자동세척 기능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눈동자를 깨끗하고 부드럽게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울면 마음도 시원해집니다. 단단한 마음이 부드러워 집니다. 모든 스트레스와 병이 사라집니다. 대부분의 병은 잘 안 울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고 싶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무”자로 시작하는 일곱가지 울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조건 우십시오. 무차별적으로 우십시오. 무시로 우십시오. 무수히 우십시오. 무릎끓고 우십시오. 무안을 당해도 우십시오. 무엇보다 울고 또 우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물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최근에 우리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북한의 전쟁 위협으로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더니 지난 주 미국 보스톤 마라톤에서는 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중에 마틴이라는 8살 소년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사진). 자전거타기와 야구를 좋아했던 소년은 그날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막 결승점을 앞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폭발물이 터졌고 8살 소년 마틴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6살 여동생도 크게 다쳐 함께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자기를 기다린 가족의 품에 안기리라는 희망을 가진 아버지에게는 너무 참담한 슬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이 마틴을 포함해 3명이고 다친 사람이 170명을 넘었습니다. 타박상을 입은 사람, 화상을 입은 사람, 고막이 손상된 사람, 팔,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왜 이런 고통들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들과 싸우며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왜 고통이 오는지 한번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그 고통을 이기며 살아야 할지 한번도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고통에 대하여 말할 때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당한 사람에 대한 긍휼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고통을 없애주거나, 우리 삶에 아예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기를 바랍니다. 혹시 고통이 생겼어도 그것을 이기는 신비한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고통당할 때 잘 참고 기다려라.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과 함께 제가 읽은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지나다가 만난 한 환자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저마다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하여 밀고 당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하고 돌아보았더니 한 여인이 예수님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혈루병을 앓는 여자인데 예수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자기 병이 나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43절에 혈루병 걸린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혈루병은 여성병으로 만성출혈병입니다. 혈관조직이 약하여 혈관틈으로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피가 흘러나와 결국 악성 빈혈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은 이런 저런 방법을 다 해보고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려고 그날 예수님께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예수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기 몸의 병이 고침받았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6절입니다. 눅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앏이로다 하신대”. 이 여인이 고침받은 것은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혈루병 여인에게 흘러갔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부정한 병이라고 규정한 병이 있음을 아십니까? 레11장에 나옵니다. 이런 병입니다. 소경, 절뚝발이, 손부러진자, 곱사, 난쟁이, 눈에 백막있는 자, 괴혈병, 버짐을 가진 사람, 피부병, 고름흘리는 자, 피흘리는 자, 아이낳은 여자, 설정한 자, 사생아등입니다. 이들이 부정한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하게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온전성을 깨뜨리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인들은 이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병중의 하나가 혈루병이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지금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주 부정한 여인입니다. 치료는 커녕 사람들과 멀리 격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마다 보여준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성경이 말합니다.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능력보다 먼저가 긍휼입니다. 손을 내밀기전에 먼저 가진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손을 내밀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깨끗함을 받으라고 소리치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깨끗함을 받으라 소리쳤습니다. 나인성에서 아들을 잃고 슬피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눅7:13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다같이 “불쌍히 여기사”.
의사는 병을 고치고 하나님은 사람을 고칩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하나님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병보다 더 큰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먼저 치료하십니다. 한 목사님에게 장애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들이 기도하다 울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들, 기도하다 왜 우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예수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요.” “왜?” 한참 있다가 아들이 말햤습니다. “슬프하세요”. “왜 예수님이 슬프실까?” 아들이 한참있다 말했습니다. “제가 슬퍼하니까요”. 수님은 장애인이 아들이 슬퍼하니까 예수님도 슬퍼하셨습니다.
11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이 성경을 번역해서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기도하는 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제롬이 하도 기뻐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선물을 드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나에게 무슨 선물을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는 데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제롬이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죄와 고통을 다 나에게 다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긍휼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설명할 때 가장 좋은 말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느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긍휼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사라와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자 그를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사라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하갈이 광야로 내쫓겼습니다. 사람들은 다 하갈을 버렸습니다. 사라도 버리고 아브라함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막으로 내쫓긴 하갈을 따라 광야까지 가서 거기서 그들 모자를 위해 샘을 내 주었습니다. 물이 없던 광야에 퐁퐁퐁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네 씨가 많아 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오늘날 아랍족입니다. 그때 하갈이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16:13-14,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살피시는 하나님이 엘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바라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피시고 바라보시는 것을 믿습니까? 394장,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긍휼의 하나님,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긍휼이 생기는 순간, 그에게서 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능력입니다. 46절,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 예수님 마음에서 긍휼의 샘이 솟는 동안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긍휼과 함께 나갔습니다. 긍휼과 함께 치료의 능력이, 긍휼과 함께 회복의 능력이, 긍휼과 함께 치유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늘의 생명입니다. 언제나 공식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긍휼과 함께 흘러 갑니다. 그러면 능력은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의 능력이, 우매한 사람에게는 지혜의 능력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요의 능력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기쁨의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흘러 갑니다. 개인에게도 흘러 가고 교회에게도 흘러가고 열방과 우주적 생명으로도 흘러갑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흘렀던 또 하나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48절입니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안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간 이유를 여인의 믿음에 돌리고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과연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어떤 믿음을 보았을까? 예수님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다. 그 믿음 때문에 여인이 나았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무엇일까?
우선 믿음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인이 했던 행동중 계속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지다. 만졌다”라는 말입니다. 44, 45, 46, 47절에 네 번이나 나옵니다. 여인은 그날 무엇을 만진 것일까요? 44절에 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여인이 예수님 옷의 어떤 부분, 옷의 끝자락같은 데를 만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옷가”란 말은 유대인들이 입고 다니는 “탈리트”라는 기도복에 길게 늘어뜨려진 “옷술”을 말합니다(사진). 유대인의 기도복에 붙어 있는 이 옷술은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습니다. 여러번 감고 감아 매듭을 만드는 데 그것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처음엔 15번 감고 다음에 13번 감아 매듭으로 만듭니다.
이스라엘에 수신학이 있습니다. 수신학은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3은 하나님 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구약에도 천사가 나타날 때 항상 셋이 나타납니다. 4는 인간의 수입니다. 동서남북, 봄, 여름, 가을, 겨울, 남녀노소, 4는 인간의 수입니다. 이 3과 4을 합친 7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을 때 완전해집니다. 12도 완전수입니다. 3x4가 12입니다. 그래서 12지파, 12제자가 나옵니다. 그런데15란 수는 “아도나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13은 “에하드”,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합치면 “아도나이 에하드”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볼 때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유대인의 기도복의 옷 자락은 그래서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것은 단순히 옷을 만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치료할 유일할 전능자라는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두 조각 나도 나는 하나님을 붙잡겠다. 세상 아무도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내 몸이 불치병이라도 하나님은 고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신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는다면 고난에 대한 생각도 다릅니다. “고난은 어쩌다 찾아온 재수없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가운데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보따리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말씀이 전3:11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기서 좋은 말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인생은 항상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아릅답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가 있고, 문제는 그 때를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일의 시종을 사람이 측량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커다란 모자이크의 한 부분입니다. 전체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입니다. 영원중에는 이런 저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체 그림의 “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지금은 어두운 때구나”.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항상 고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 그림인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왕따란 말이 있습니다. 따돌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왕따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왕따=왕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 그렇습니다. 왕따는 지금 볼 때 따돌림 당하지만 왕이신 하나님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나를 고치신다. 그래서 나는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붙잡겠다. 내 병은 나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내 병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려고 나에게 주신 선물보따리, 은혜의 보석 상자다. 나는 현재의 고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을 사모하리라”. 이 믿음이 예수님의 생명이 그에게 흐르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긍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읽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에게도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과 그 생명이 예수님처럼 긍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2서 3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 여기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쓴 딤후1:2에도 나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똑같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 이 세 단어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람간의 사랑입니다. 은혜는 죄를 사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은혜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긍휼은 나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먼저 은혜가 임하고 긍휼이 뒤따라 옵니다. 그러나 같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갖습니다. 은혜는 긍휼을 낳고 긍휼은 은혜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은 은혜 더하기 긍휼입니다. 따라서 둘 중의 하나가 없으면 평강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은지 아십니까? 은혜없는 값싼 긍휼만 있거나 긍휼없는 값싼 은혜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를 받아도 평강이 없는 이유는 그 은혜가 긍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를 좋아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의 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긍휼을 가져야 할 이유는 세상에 좋아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의롭고 착해서가 아닙니다. 딱 한 가지입니다. 모두 다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핵을 무기삼아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굶어죽는 데 지도자들은 위험한 전쟁놀이에 미쳐 있지 않습니까? 같은 민족이지만 너무 화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떠들던 김일성이도 가고 김정일이도 가지 않았습니까? 결국 모두 죽어갑니다. 그래서 불쌍합니다. 100년도 못되어 죽어갈 것들이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앞에 큰 소리칩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싸우고 원수갚은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다 죽어갈 것들이 인간의 작은 감정으로 하나님 주신 생명을 스스로 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던 수도자중에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자기를 모욕한 형제에게 복수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장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아바, 제가 당한 만큼 그에게 갚아주려고 갑니다”. 수도원장은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가 자기를 모욕한 자의 대가를 치루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수도원장이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제 우리는 당신이 필요없어 졌습니다. 당신이 할 일을 우리가 모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그때 생각을 바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한 분 계십니까? 이유없이 모욕을 당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분이 계십니까? 잊어 버리세요. 원수 갚지 마세요,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불쌍히 여기세요. 엡4:32절 말씀대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왜 불쌍히 여겨야 합니까? 모두 다 죽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몸에 갑작스런 병이 발견되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 가락하며 수술을 받는 사람들, 서울 난곡동의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 거기에 씌여있는 미혼모의 편지, “목사님, 우리 애기를 잘 부탁해요. 그리고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우연히 인터넷에 “자살”이라고 치자 이런 글이 떠 올랐습니다. “자살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짜증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우울증때문이라는 사람이 많은데, 잘 모르겠고,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어요. 가끔 아무 이유없이 계속 눈물날때도 있고, 엄마도 싫고, 친구도 싫고, 그냥 전부 다 싫어요”. 아직 어린 학생같은 데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확 나왔습니다. 삶의 지쳐 너무 지고 쓰러진 사람들, 하루 하루 일에 쫓겨 하나님도 잊고 사는 사람들, 평소에 그렇게 믿고 친하게 지냈다가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리며 원수처럼 된 사람들,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피를 흘리며 살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혈루병 환자였듯이 그들도 또한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혈루병환자들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당한 교통사고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기록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날 때까지 저는 인생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용기를 내 가해자의 방을 노크했을 때 이 쓸데없는 이분법은 사라졌습니다. 뜻밖에 가해자는 나보다 더 많이 상처를 받고 누어 있었습니다. 운전대를 들이받아 내장이 파괴되고 목의 신경을 다쳐 두 손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타박상을 입고 기브스를 한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 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나만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피해자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당하는 상처의 공동 피해자다”. 가까이 다가가 그를 껴안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인생에 가해자, 피해자는 따로 없다. 누구나 가해자요 누구나 피해자다”. 그래서 평생 이집트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살던 안토니의 말이 제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일은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자기의 죄의 탓으로 돌리라. 그리고 숨이지는 순간까지 시험이 있을 것을 기대하라”.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숨어 넘어가는 순간까지 “이 세상에는 시험이 없을 수 없지” 라고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것처럼 내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긍휼로 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고이고 썩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생명, 긍휼로 흘러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강같이 흐르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