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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4YeKUS9XNQ&t=4s
A: 샤푸르와 발레리아누스의 항복
A1: 샤푸르 1세
샤푸르는 승마에 적합한 헐렁한 의례용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사산 왕조 초기 양식의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착용했다. 샤푸르의 말은 장식된 마구를 갖추고 있으며, 안장 앞뒤로 두 개의 황금 문장이 달려 있다. 샤푸르는 칼자루 위에 손을 얹고 무기를 비스듬히 기울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A2: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에게 패배한 로마 황제들 중 마지막 인물이다. 비샤푸르와 나크셰 로스탐 유적의 기록을 보면 발레리아누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로마와 페르시아 모두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통용되던, 황금 걸쇠가 달린 보라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발레리아누스가 찬 칼은 '제20군단(Legio XX)' 유형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에는 로마식 샌들형 부츠를 신고 있으며, 보라색 모자에는 진주가 장식되어 있다.
A3: 로마 원로원 의원
포로로 잡힌 대규모 로마인 집단 속에는 원로원 의원이나 군 지휘관 같은 고위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비샤푸르 유적의 기록을 보면, 원로원 의원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발레리아누스를 비롯한 수많은 로마 고위 인사들이 포로가 된 사건은 로마에 큰 타격이었다.
A4: 수렌 가문의 기사(사바르)
수렌 가문 출신인 이 기사는 비샤푸르에서 발견된 '바랑가(Varanga)'와 유사한 형태의 의례용 투구를 쓰고 있다. 그의 튜닉 상단은 사산 왕조 초기 양식의 원형 문양(파르티아 또는 이란 북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음)으로 장식되어 있다. 허리춤에는 칼집 고정 장치(scabbard-slide)가 달린 칼을 차고 있는데, 이는 간다라 쿠샨 왕조의 칼과 매우 흡사하다. 이 검은 종종 그림에 나온 것보다 길이가 6인치, 너비가 1인치 더 길었을 것이다. 그의 헐렁한 "코사크" 바지는 승마용으로 디자인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적층 갑옷을 착용했다.
A5: 여성 사르다르
로마 문헌에 따르면 여성들은 초기 사산 왕조의 전투 대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칼집에 넣은 검을 차고 투구를 썼으며 다른 기병 엘리트처럼 갑옷을 착용했다. 이 사르다르는 앞면에 삼지창 문양이 있는 튜닉을 입고 두라 에우로포스 양식의 투구를 들고 있다. 이 투구는 사산 왕조 보병과 관련이 있지만 사바인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튜닉 아래에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사슬 갑옷을 입고 있다. 그녀의 붉은 바지는 몸에 꼭 맞는 "페르시아" 스타일이다. 그녀가 신고 있는 부드러운 가죽 승마 부츠는 이란 서부의 루르족 일부 부족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B: 훈련 중인 사바란, 서기 3세기 후반
이 사바란들은 사산 왕조 시대 크테시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띤 훈련장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B1: 아르즈바드-에-아스프와라간(Arzbad-e-Aspwaragan)
아르드-알란(Ard-Alan) 씨족 출신의 아르즈바드(수석 교관)는 사바란 정예 부대의 일원이자 과거 전쟁을 치른 베테랑이다. 그가 지닌 의례용 사르마티아식 검은 그의 알란족 혈통을 보여준다. 머리 장식에 새겨진 문양은 사산 왕조의 군사적 상징이거나 특정 씨족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그의 복장은 서부 이란 양식으로, 단추가 없는 길고 헐거운 망토를 걸치고 있으며, 상단은 금속제 걸쇠로 고정되어 있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부츠를 신고 있으며, 승마용 바지는 넉넉한 품이다. 부츠에는 장식용 원판이 달려 있다. 교관은 검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칼자루를 잡고 있다.
B2: 젊은 사바란 훈련병
이란계 민족들 사이에서 승마와 궁술 훈련은 매우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간소한 형태의 마구(馬具)는 혹독한 환경에서 훈련을 강조했던 사산 왕조의 교육 방침과 일치한다. 비교적 체구가 작은 말은 중앙아시아 품종에서 유래한 것이다. 젊은 기수는 목표물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활을 쏘고 있다. 4세기 중반 무렵, 사산 왕조 군대에서 기마 궁술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B3: '주르-셈셰르(Zur-Shemsher)' 훈련 중인 정예 기사들
무거운 검(셈셰르)을 사용하여 '주르(zur, 힘)'를 기르는 고대의 훈련 방식은, 강인하고 잘 훈련된 로마군이나 비잔티움군을 상대할 때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여기서 사용된 브로드소드(양날 장검)는 크고 무거운 칼날을 가진 사르마티아식 검이다. 실제 전투에서 사바란은 주로 대규모 기병 돌격과 전술을 통해 로마군의 전열을 무너뜨렸으나, 전장 상황에 따라 근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C: 투르크 전쟁(TURKISH WARS)
C1: 사산 왕조 후기 사바란(Savar-Framandar)
사바란(사산 왕조의 기병대)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는 타크 에 보스탄에서 발견된다. 후기 사바란은 궁술, 근접 전투, 그리고 창을 이용한 전투에 매우 능숙했다. 그들이 사용한 검은 투르크-아바르(Turco-Avar)식의 '2점 현수' 방식이며, 사산 왕조 특유의 벌집 모양 깃털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투구는 타크 에 보스탄 양식(호스로 2세 시대)의 스팡겐헬름(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투구) 형태이며, 무릎까지 내려오는 사슬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무기는 '판자가간(Panjagan)'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화살을 5발이나 빠르게 발사할 수 있는 장치였다. 현재까지 이 무기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착용한 장식용 벨트는 군사적 계급을 나타낸다. 방패에 그려진 사자 문양은 사산 왕조에서 흔히 사용되던 전투용 군기(軍旗)였다. 활집에는 고대 이란의 상징인 '노란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가 탄 말은 앞부분에만 갑옷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620년대 후반 비잔티움 제국군이 공략했을지도 모를 취약점이었다.
C2: 아바르샤흐르(Abarshahr)의 카나랑(Kanarang)
쿠샨(Kushan) 혈통인 이 전사는 타크 에 보스탄 양식의 복장을 하고 있다. 어깨 장식은 사산 왕조의 색상 규정, 즉 '랑(rang, 계급/색상)' 체계에 따른 군사적 계급을 나타낸다. 이러한 형태의 조끼는 페르시아 전역에서 표준 복장이 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 귀족들 사이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가 사용하는 검은 비교적 크고 무거운 편인데, 이는 서사시 '샤나메(Shahname)'에 언급된 중앙아시아 출신 이란계 민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C3: 파이고스파난-바누
이 바누(여인) 지방 군사령관(파이고스파난)은 사산 왕조 말기와 이슬람 초기 중앙아시아의 이란 및 투르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복장을 입고 있다. 그녀의 복장은 푸르에바흐만 양식으로, 중앙아시아식 높은 부츠, 장식된 허리띠, 북부 이란식 헐렁한 승마 조끼를 착용하고 있다. 그녀는 투르크인의 칼을 든 손을 쳐서 화살을 막을 기회를 빼앗고 두 번째 치명적인 화살을 쏘려고 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장식하는 메달리온은 사바란 정예 기병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바란의 상징은 유럽,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계에 계속해서 전해졌다. 페르시아 여성들은 18세기까지 중요한 행정 및 군사 직책을 계속해서 맡았다.
C4: 곡투르크족(돌궐족)의 전사들
이 돌궐족 전사들은 11세기에 아란, 아제르바이잔, 아나톨리아를 침략한 오구즈어를 사용하는 투르크족의 조상이다. 그들의 투구, 검, 갑옷은 이란, 투르크-훈족, 중국(특히 판갑옷)의 강한 영향을 보여준다. 투르크족은 바흐람 초빈에게 당한 참패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호스로-헤라클레스 전쟁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려 했지만, 슴바트 바그라투니가 이끄는 소수의 사바란 정예군에게 다시 한번 패배했다. 투르크족의 중앙아시아와 중동 진출은 637년에서 651년 사이에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D: 율리아누스 황제의 죽음, 서기 363년 6월 26일
D1: 푸슈티그반 – 왕실 경호대
샤푸르 2세는 로마 군단의 최정예에 맞서기 위해 초중기병을 창설했다. 헬리오도루스와 암미아누스는 이 부대에 대해 훌륭한 묘사를 남겼다. 이들은 전신에 사슬 갑옷을 입고 그 아래에 보호용 판갑과 적층 갑옷을 착용했으며, 두 손에는 철제 판갑들을 이어 붙인 장갑을 끼었다. 날개 달린 투구는 바흐람 2세와 같은 동시대 왕실 경호대와 왕들의 투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코와 눈을 위한 구멍과 틈이 있는 꼭 맞는 얼굴 가리개와 목 뒤와 주위를 감싸는 보호용 사슬 갑옷에 주목하라. 각 기사는 무거운 검, 철퇴, 도끼, 그리고 무거운 창을 지녔다. 이 창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사과 운반자" 조각상을 본뜬 것으로, 창날은 루리스탄에서 발견된 금속 세공 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말은 다리와 몸통에 두꺼운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사산 왕조의 정예 기사들은 로마 보병 두 명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고 전해진다.
D2: 율리아누스 황제
치명상을 입은 율리아누스 황제는 갈비뼈에서 창을 뽑아내고 있으며 칼은 버린 상태이다. 율리아누스 갑옷을 입지 않고 전투에 나선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페르시아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가 입고 있는 튜닉의 스타일은 적어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부터 로마 병사들이 입었던 튜닉과 비슷하다. 황제의 말은 비샤푸르에서 발견된 로마 기병을 묘사한 페르시아인들의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D3: 로마 사령관
게르만족 사령관은 3세기 후반과 4세기 초반의 "서방" 병사(예: 작센의 리토리스 용병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산 왕조의 비문에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군대에 "고트족과 게르만 왕국" 출신의 병사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투구는 피터슨이 복원한 "능선형" 투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비기독교적 상징들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배교했음을 보여준다. 튜닉은 시칠리아의 피아차 아르메리나 모자이크에 있는 하급 장교를 피터슨이 복원한 것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파르티아나 알란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방패 또한 피아차 아르메리나 모자이크에서 나온 것이다. 지휘관은 긴 스파타 검으로 무장하고 있다. 푸슈티그반의 말 아래로 뛰어들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 결국 창에 꿰뚫리는 결과를 낳았다.
D4: 로마군
이곳의 로마 병사들은 특징적인 깊은 두개골과 경사진 목 보호대를 하고 있다. 그들은 스파타 검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중앙 손잡이와 뾰족한 돌출부가 있는 두라 에우로포스 양식의 방패를 사용한다. 피아차 아르메리나 모자이크는 4색 체계와 멧돼지 모티프의 모델을 제공한다. 정정: 이 시기의 병사들은 여기에 보이는 로리카 세그멘타타보다는 사슬 갑옷을 입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D5: 기안-아브스파르 페슈메르가(Gyan-avspar Peshmerga)
기안-아브스파르 페슈메르가는 사슬 갑옷, 판갑, 갑옷 장갑, 그리고 장식용 조끼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사산 왕조의 전사들과 유사하다. 이전 시대 전사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가슴에 두른 메달 장식 띠와 '스팡겐헬름' 형태의 투구이다. 칼자루는 샤푸르 1세의 검 중 하나를 본떴으며, 칼집은 비샤푸르 유적의 묘사를 바탕으로 재현되었다. 앞선 공격에서 창을 잃어버린 그는 현재 무거운 브로드소드(양날 장검)를 사산 왕조 특유의 파지법(오늘날 '이탈리아식' 파지법으로 알려짐)으로 앞을 향해 찌르고 있다. 이 검술은 충격을 가하거나 단기 교전을 벌이기 위한 것으로, 이후 그는 뒤로 물러나 원거리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왼손에 든 활과 화살은 최소 65피트(약 20미터) 거리에서 사용된다. 화살통은 페로즈 왕 시대의 것을 모델로 했다.
D6: 야자타 모바드(Yazata Mobad)
이 전사는 사산 왕조의 깃발을 흔들며 절박한 공격 상황 속에서 동료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의 복장과 머리 장식은 사산 왕조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전형적인 기마 복식이다. 권위와 지위를 상징하는 망토는 이후 북유럽 사회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검은 샤푸르 2세가 묘사된 금속 공예품을 본떠 제작되었다. 이와 거의 동일한 복식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미트라 관련 묘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 바흐람 초빈의 서임식 및 기사 서임식, 6세기
이 서임식 및 기사 서임식은 바흐람 구르의 사르비스타 궁전 입구 중 한 곳에서 거행되었다.
E1: 바흐람 초빈
바흐람 초빈은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오늘날까지 이란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튜닉은 북부 이란의 영향을 보여준다. 어깨끈 디자인은 사산 왕조 중기에 서부 페르시아에서 처음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어깨끈과 바지에 있는 원형 무늬는 전형적인 페르시아 양식이다. 부드러운 승마용 부츠는 사카족과 같은 초기 이란 민족의 것을 연상시킨다. 벨트 버클은 나하반드에서 발견된 금제 원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E2: 모바드 샤프셰라즈
이 복원은 타그에보스탄의 미트라스 조각상을 기반으로 한다. 샤프셰라즈(칼을 휘두르는 자)는 궁정 및 종교 행사에서 의례용 칼을 휘두른다. 사바란족은 전투 전에 사제인 마기들과 함께 조로아스터교 또는 다른 아리아인 의식을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장은 서부 이란의 양식이며, 이란의 마마사니족, 쿠르드족, 루리족 사이에서도 비슷한 변형이 나타난다. 머리 장식은 태양의 힘과 신성을 상징한다. 어깨 장식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분이나 씨족 소속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미트라스 씨족은 쿠르드족 사이에 일부 남아 있다. 당시 케르만샤의 쿠르드족 대부분은 이 샤프셰라즈보다 피부색이 더 밝았다.
E3: 아나히타 사원의 여사제
여사제는 바흐람에게 신성한 영광의 상징인 파르(Farr)를 건네주고 있다. 그녀의 왕관은 아나히타 숭배 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나타낸다. 의상은 로마노-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서부 이란 의상이다. 아베스타에 기록된 대로 그녀의 신발은 금색이다. 스파타리는 로마 여신 코레의 헤어스타일이 아나히타의 헤어스타일과 동일하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조로아스터교의 종교 및 의례적 의무뿐만 아니라 더 오래된 숭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그에보스탄에서는 호스로 2세가 오른쪽에 아나히타, 왼쪽에 위대한 신 아후라 마즈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E4: 라이의 사바르 장교
이 장교의 복장 디자인은 특정 연대 또는 정예 부대 소속을 나타낼 수 있다. 스팡겐헬름 투구는 니네베 유물에 근거하여 원뿔형이다. 보병용 두라 에우로포스 투구와 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장교는 헤로도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유럽인들이 관찰했던 고대 이란의 의식인 땅에 대검을 꽂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의식은 알란족에 의해 켈트족이 살던 브리튼 섬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F: 호스로 2세와 시린 왕비, 7세기 초
F1: 호스로 2세 “파르베즈(Parveez)”
호스로 2세는 ‘바랑가(Varanga)’ 양식의 새 날개와 진주 및 초승달 모양 장식이 박힌 커다란 원반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다. 목에는 보석(특히 루비)으로 정교하게 꾸며진 장신구를 둘렀다. 그의 복장은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고대 이란의 ‘켈트 십자가’ 형태 문양을 주목할 만하다. 장식용 허리띠에는 보석이 박혀 있으며, 허리띠 양옆으로 각각 네 개의 띠(각 띠에는 다섯 개의 금색 원반이 달려 있음)가 늘어져 있는데, 이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튜닉 하단과 발목 부분에는 바깥쪽을 향하고 있는 신화 속 새 ‘시무르그’가 묘사되어 있다. 신발은 사산 왕조 전통 양식이다. 왕이 장검을 짚고 서 있는 자세는 이 왕조 초기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F2: 시린 왕비
시린 왕비의 복장은 사산 왕조 후기 양식으로, 타크 에 보스탄의 부조와 이란 서부 지역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머리에 쓴 장식은 타크 에 보스탄 부조 속에서 호스로 왕의 사냥 행렬을 수행하는 귀족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옷깃 아래의 장식 문양은 이란 서부 지역 특유의 양식이다. 의복 전체는 벌집 모양의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문양 안에는 원형 장식이 박혀 있다. 장식적인 짧은 승마용 부츠도 눈에 띈다. 네스토리우스파 십자가는 시린 왕비가 기독교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이슬람 정복 직전, 기독교는 페르시아 서부 지역(메디아, 쿠르디스탄, 후제스탄)에 널리 퍼져 있었다.
F3: 귀우(Guiw) 가문의 귀족
이 초기 사산 왕조 시대의 복식은 메디아인, 쿠르드인, 아투르파테칸(오늘날의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지역민, 다일람인,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였다. ‘나팔바지’ 형태의 바지에는 튜닉(상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해치 라인(빗금 무늬) 디자인이 바지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적용되어 있다. 신발은 오늘날 이란 부족들이 신는 ‘기베(Geeveh)’와 유사한데, 이는 발목 높이까지 올라오는 천 소재의 신발이다. 왼쪽 어깨 아래에서 팔 쪽으로 이어지는 띠는 군사적 표식(훈장)일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칼집 고리가 달린 짧은 형태의 검은 오직 의례용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전장에서는 이미 구식 무기가 되어 있었다. 리틀턴과 말코르는 최근 귀우(Guiw) 가문의 명칭이 영국-켈트 전설 속 ‘가웨인(Gawain)’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을 제시했다.
F4: 슴바트 바그라투니(Smbat Bagratuni)
‘동방의 벨리사리우스’라 불리는 슴바트 바그라투니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인 그는 전투에서의 탁월한 능력과 용맹함을 인정받아, 귀우(Guiw)나 스판디야르(Spandiyar) 가문과 더불어 왕실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그가 입은 튜닉은 이란 특유의 꽃무늬 원형 장식(나비넥타이 모양과 유사), 새 문양, 그리고 팔 부분의 ‘발톱’ 모양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진주와 값비싼 보석들이 디자인 곳곳에 박혀 있다. 허리에는 두 개의 띠(벨트)를 둘렀는데, 위쪽 띠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 띠는 금으로 꾸며져 있으며, 이 띠에 투르크-아바르 양식의 검이 매달려 있다. 그는 ‘푸르 에 바흐만(Pur-e-Vahman)’ 양식의 부츠를 신고 있는데, 부츠 상단은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유니폼은 왕실 근위대 장교가 착용했을 수 있다.
G: 샤르바라즈 장군과 보란 공주, 7세기 초
G1: 수석 모바드(사제)
이 전사 사제는 오늘날 케르만샤 지역의 쿠르드족이나 데흘로란 지역의 루르족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인 서부 이란식 ‘파르티아’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있다. 망토는 사산 왕조의 문장이 새겨진 금색 걸쇠로 고정되어 있다. 북부 이란계 민족들은 이러한 형태의 망토(칸디스, Kandys)를 동고트족에게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프탄(긴 겉옷), 파르티아풍 모자, 그리고 의례용 칼집 장치가 달린 검에 주목하라. 이 모바드는 ‘드라프슈-에 카비아니(카베의 깃발)’라 불리는 제국 왕실 표준기의 변형된 형태를 들고 있는데, 여기에는 사산 왕조의 엘리트 기병대인 ‘사바란’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던 왕실 독수리 문양이 포함되어 있다. 말 목에 걸린 메달 속 개 문양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충성심, 우정, 그리고 사후 세계로의 안전한 여정을 상징한다.
G2: 샤르바라즈 장군
타크-에 보스탄(Tagh-e-Bostan) 부조에 묘사된 복식은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문양과 디자인은 페르시아 또는 북동부 이란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샤르바라즈 장군의 복장에 나타난 ‘시무르그(Simurgh, 신화 속 새)’ 문양은 러시아 발굴단이 발견한 사산 왕조 시대의 외투에서 유래했다. 활집에 달린 메달에는 ‘바라즈(Baraz, 멧돼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샤르바라즈가 비잔티움 제국군을 중동에서 몰아내고, 7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의 전공을 기리는 것이다. 샤르바라즈는 두 지점에서 고정하는 세련된 형태의 검을 차고 있으며, (모바드나 보란 공주와 마찬가지로) 등자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목에 걸고 있는 활은 이 장군의 매우 높은 지위와 위상을 나타낸다.
G3: 보란 공주
보란의 복장은 이란 북부 마잔다란 지역의 의복에서 유래했다. 다일람인들은 아랍 세력이 페르시아 북부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냈으며, 그 덕분에 사산 왕조 시대의 많은 복식 양식이 근대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복장 하단에 있는 색띠는 지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보란은 등자를 사용해 말을 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보란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레이오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7세기 초에 벌어진 파괴적인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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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24년, 사산 왕조는 피루자바드(Firuzabad)에서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후,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부터 근동 지역의 쿠르드족, 메디아인, 페르시아인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거대한 국가 체제를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는 훗날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Savaran)’ 기사단의 기술적·전술적 토대를 마련해 두었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시대에 감행된 그리스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페르시아 보병과 기병의 장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 당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기병대가 청동 흉갑, 비늘 갑옷, 투구, 허벅지 보호구, 철퇴, 투창, 단검, 베는 용도의 검인 ‘코피스(kopis)’, 화살 30개가 담긴 화살통, 그리고 활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제국 말기에는 투창과 장창(랜스)도 사용되었다. 말 또한 머리 보호구, 가슴 보호구, 허벅지 보호구로 구성된 청동 갑옷을 착용했다.
이러한 기술은 중앙아시아, 구체적으로는 코라스미아(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 사이에서 처음 발달했다. 바로 이곳에서 ‘중장(重裝) 기병’의 개념이 탄생했으며, 이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통해 근동 지역으로 전해졌다.
농경 정착 생활을 하던 코라스미아-마사게타이(Chorasmo-Massagetae)족은 스텝 지역 기병대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를 개발해 냈다. (사람과 말 모두 갑옷을 갖춘) 중장 기병은 스텝 지역의 빠르고 민첩한 기마 궁수들에 대한 초기 전술적 대응책이었다.
코라스미아의 중장 기병은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초기 중장 기병은 고대 그리스의 보병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phalanx)’에 대응하는 이란 측의 전력이었다. 이 기병들은 비늘 갑옷을 착용하고 긴 창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말 또한 갑옷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마사게타이족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이란계 동족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까? 후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기병대는 마사게타이족의 갑옷 기술을 확실히 도입했으며, 고대 문헌들에서도 아케메네스 왕조 내 마사게타이 출신 기병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독자적인 ‘페르시아인’ 부대가 빠르게 등장했다. 이들은 ‘아자타(Azata)’, 즉 ‘아리아인’ 혈통의 상류 귀족 계층에서 충원되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Kyropaidia)』에 따르면 초기 페르시아인들에게는 기병이 거의 없었으나, 그리스와의 전쟁 무렵에는 코라스미아(Chorasmia) 지역의 영향을 받은, 매우 효과적인 기병대를 대규모로 운용하게 되었다. ‘양손’으로 다루는 창은 북부 이란계 코라스미아 기병들에게서 처음 나타났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기병대가 이를 도입한 것은 오늘날 ‘기사(knight)’의 원형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아자타’ 기사들은 종종 기마 상태에서 분쟁을 해결하곤 했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의 ‘파르(Farr, 신성한 영광)’ 개념과 북부 이란의 전투 방식이 결합하여 일대일 마상 결투(joust)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리스 측 문헌들에 따르면, 반란군이나 왕족 구성원들 또한 이러한 마상 결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가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과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끈 비교적 짧은 헬레니즘 시대도 이러한 이란 고유의 문화를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군대의 중기병은, 이후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 시대에 나타난 것과 같은 핵심 타격 부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남긴 매우 중요한 교훈은, 경무장한 병력으로는 그리스의 정예 호플리테스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대형이 갖춘 뛰어난 훈련 수준과 지휘 체계를 당해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중기병 부대가 국지적으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그리스 군대를 상대로 한 아케메네스 왕조 군대의 근본적인 약점을 보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보병과 기병을 긴밀하게 운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 병종 전술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가 거둔 압도적이고 신속한 승리들은, 크세노폰이 일찍이 경고했던 '전문적인 중장기병을 앞세워 부활할 페르시아'가 지닌 잠재적 위험성을 완전히 가려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중장기병 부대를 계승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와 전쟁을 벌일 당시, 이러한 부대들이 그의 군대에서 운용되었다.
이후 기원전 2세기,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는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를 격파했다. 파르티아 기병대는 마케도니아식 중보병과 그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전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북부 이란계 민족인 사카족이나 그보다 앞선 시대의 마사게타이족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파르티아인들은 자신들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북부 이란계 민족의 전투 방식을 페르시아에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전투 전술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경무장한 기병들은 주무기인 활로 무장했다. 이들은 뛰어난 기마 궁수들로서, 유명한 니사아산(Nisean) 군마를 타고 창과 검으로 무장한 중장기병들을 지원했다. 파르티아 기병은 대개 튼튼한 흉갑과 안면 보호대가 달린 투구를 착용했으며, 그들의 말 또한 갑옷으로 보호받았다.
서기 3세기 초에 이르자, 제국 내 이란계 민족들은 로마의 침입으로부터 페르시아를 지켜내는 파르티아의 능력에 더 이상 신뢰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서기 224년, 아르다시르와 그의 아들 샤푸르가 파르티아 왕조를 무너뜨리자, 이란 고원 지대 민족들(메디아인, 쿠르드족, 북부 이란계 민족들)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인과 동부 이란계 민족들이 사산 왕조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미흐란 가문이나 수렌 가문과 같은 많은 파르티아 귀족 가문들 또한 이에 동참했다. 사산 왕조는 기병을 군사력의 핵심으로 삼는 파르티아의 군사 전통을 계승했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중장기병과 관련하여 전술적, 기술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도입해 나갔다.
파르티아와 그 뒤를 이은 사산 왕조가 직면했던 전략적 난제는 동쪽과 서쪽, 양면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는 전쟁의 위협이었다. 서쪽 전선에는 강력한 로마 제국이, 이후에는 비잔티움 제국이 버티고 있었고, 동쪽은 훈족과 돌궐계 전사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합리적인 전략은, 어느 전선에서든 즉각적으로 투입될 수 있는, 고도로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문적으로 훈련된 기병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파르티아인들은 로마 군단병들을 상대로 보병 대형에 의존하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내렸다. 로마 군단병들은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중무장 근접전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페르시아 북동부와 중앙아시아의 탁 트인 초원 지대에서, 치명적이고 민첩한 유목 기병대를 상대로 보병은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로마의 동쪽에 위치한 ‘또 하나의 초강대국’이었다. 로마와 벌인 거의 모든 전투에는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Savaran)’이 등장했다. 이들의 군사 체계는 로마와 대등한 수준이었으며, 로마인들은 결국 이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학계나 대중적 상상력, 그리고 미디어는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한니발, 아틸라, 나폴레옹 같은 인물들에 열광하지만, 생애 동안 세 명의 로마 황제를 격파했던 샤푸르 1세(재위 241~272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페르시아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사건이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는 로마가 페르시아를 병합하고 인도와 중국 국경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아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사바란이 적들에게 얼마나 큰 경외감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리바니우스(서기 314년~392/393년. 동로마 제국 시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소피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수사학 교사)는 로마인들에 대해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얼굴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어떤 운명이든 감수하려 한다”고 언급했다(Libianus, XVIII, 205~211쪽). 사산 왕조의 사바란은 로마인들(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이후의 다른 유럽인들)은 물론, 아랍인과 투르크인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사바란은 수 세기 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에 대한 복수를 상당 부분 수행했으며, 오늘날 거의 잊혀진 인상적인 유산을 남겼다.
사산 왕조 군대의 조직과 개혁
사바란(Savaran)
사산 왕조의 사회는 크게 아르테슈타란(Arteshtaran, 전사 계급), 서기, 사제, 그리고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사 계급 중에서도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Savaran)'은 가장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했다. 각 사바란 부대는 고유한 '드라프쉬(Drafsh, 군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부대나 기타 중요한 직책은 일반적으로 아리아인 혈통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 범주는 페르시아의 7대 유력 가문들로, 그중에서도 사산 가문(House of Sassan)이 으뜸이었다. 나머지 6개 가문은 파르티아 혈통을 두고 있었는데, 아스파흐바드-팔라브(Aspahbad-Pahlav, 북부 페르시아 고르간 지역), 카린-팔라브(Karin-Pahlav, 쉬라즈), 수렌-팔라브(Suren-Pahlav, 남동부 페르시아 세이스탄 지역), 스판디야드(Spandiyadh, 쿠르디스탄 인근 니하반드 지역), 미흐란(Mihran, 현대 테헤란 인근 레이 지역), 그리고 기우(Guiw) 가문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범주는 '아자단(Azadan)'이라 불리는 상층 귀족 계급이다. 그리스 문헌에서는 '자유민(freemen)'으로 혼동되기도 했던 아자단은, 메디아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근동 지역에 정착했던 초기 아리아인 씨족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의 기원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아자타(Azata)' 귀족 계급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바란의 핵심을 이룬 것은 바로 이 아자단 계급이었다.
세 번째 범주는 호스로 1세(Khosrow I)의 개혁으로 생겨난 것으로, 하급 귀족 계층인 '데흐칸(Dehkan)'들이 사바란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면서 형성되었다.
사바란 중 가장 유명한 부대는 1만 명 규모의 '자예단(Zhayedan, 불멸의 부대)'으로, '바르트라그-니간 크바다이(Varthragh-Nighan Khvadhay)'라는 칭호를 가진 지휘관이 이들을 통솔했다. 이 부대는 사산 왕조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다리우스 대제(Darius the Great) 시대에 활약했던 동명의 부대를 직접적으로 본뜬 것이었다. 이 부대의 군복과 휘장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통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바란 부대의 임무는 전선의 돌파구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예비대로 대기하다가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곤 했다.
사바란(Savaran)의 또 다른 정예 부대로는 '푸슈티그반(Pushtighban)'이라 불리는 왕실 근위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푸슈티그반-살라르(Pushtighban-Salar)'라는 직함을 가진 지휘관의 통솔을 받았다. 푸슈티그반의 규모는 대략 1,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시에는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에 주둔하며 왕실 근위 연대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에서 특히 용맹함을 떨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기병들은 '기안-아브스파르(Gyan-avspar,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라는 뜻)'에 편입되었는데, 이는 흔히 '페슈메르가(Peshmerga)'라고도 불렸다.
호스로 2세(재위 서기 590~628년)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바란의 정예 부대가 더 많이 등장했다. 그중 '호스로게타에(Khosrowgetae, '호스로의 부대'라는 뜻)'와 '피루제타에(Piroozetae, '승리자들'이라는 뜻)'는 왕실 근위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지스탄 연대기(Khuzistan Chronicle)』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남아 있는데, 604년 다라(Dara) 포위 및 정복 당시 호스로 2세가 덫에 걸릴 뻔했으나, '무슈칸(Mushkan)'이라는 이름의 정예 경호원이 덫의 올가미를 끊어내어 그를 구했다는 내용이다. 이 경호원은 아마도 호스로게타에나 피루제타에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부대들은 603년부터 628년까지 이어진 전쟁 중에도 다시 언급되는데, 당시 호스로 2세는 호스로게타에와 피루제타에를 코카서스 알바니아(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있던 샤라플라칸(Shahraplakan) 장군에게 파견했다.
호스로 2세 시대에 존재했던 또 다른 정예 부대로는 '황금 창병대(Golden Spearmen)'라 불리는 5만 명 규모의 거대한 사바란 군단(스파, Spah)이 있었다. 이 부대는 샤힌(Shahin) 장군에게 파견되었는데, 그의 동료였던 파로칸 샤르바라즈(Farrokhan Shahrbaraz)가 이를 지원했다(테오파네스 연대기, A.M. 6117년, 315.2–26).
마지막으로, 군대의 다른 병과를 지휘하던 장교들 역시 기병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멘을 침공했던 보병 부대는 '바흐리즈(Vahriz)'라는 이름의 사바란 장교가 지휘했다.
조직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의 군사 조직 체계를 계승했으나, 그 체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발전했다. 초기 사산 왕조의 '스파(Spah, 상비군 또는 군대)'는 파르티아의 군대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세 가지 단위가 사용되었는데, (1) 소규모 부대인 '바슈트(Vasht, 파르티아어로는 Wast)', (2) 독자적인 군기와 문장 체계를 갖춘, 약 1,000명 규모의 부대인 '드라프슈(Drafsh)', (3) 대규모 정규 사단인 '군드(Gund)'가 그것이다.
'군드'는 '군드-살라르(Gund-Salar)', 즉 장군이 지휘했다.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격파한 장군 수레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파르티아 시대의 군단(corps)은 약 10,000명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정규군의 규모는 아마도 12,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사산 왕조 군대(스파)의 자랑은 '사바란(Savaran)'이었다.
파르티아 시대에는 기마 궁수와 중장갑 창기병의 비율이 10 대 1 정도였으나, 사산 왕조 초기에는 이 비율이 창기병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이는 창기병의 중요성이 커졌음을 의미하며, 사산 왕조가 부상할 무렵에는 중장갑 창기병이 이란 전쟁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고, 반면 기마 궁술은 쇠퇴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적들과 달리, 아케메네스 왕조는 '스파다(Spada, 아케메네스 왕조어로 군대를 의미)'를 조직할 때 십진법을 사용했다. 사산 왕조 역시 십진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는 '하자르마르드(Hazarmard, 1,000명의 병사)'나 '하자르바드(Hazarbad, 1,000명 부대의 지휘관)'와 같은 직함, 혹은 "샤르바라즈(Shahrbaraz)의 군대에서 1,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장이었던 구스다나스페스(Gusdanaspes)"와 같은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테오파네스, A.M. 6118, 325.10).
군사 직책
부주르그-프라만다르(대사령관)는 군주를 수호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군주가 전쟁에 나가 있을 때는 부주르그-프라만다르가 크테시폰에서 국정을 대행했다. 그는 최고사령관이 될 수도 있었고, 특히 전쟁이나 전투 후에는 외교 협상을 담당했다.
정규군 총사령관 겸 국방부 장관은 에란-스파바드였으며, 그 역시 평화 협상을 진행할 권한을 가졌다. 그는 또한 안다르즈바드, 즉 왕의 고문 역할도 수행했다.
아스프바드 또는 사바란 사르다르로 알려진 사바란 사령관과 아르즈바드-에-아스프와라간으로 알려진 사바란 수석 교관의 직책 역시 엘리트 계층이 맡았다.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침공 당시 사바란 사르다르 직책은 미흐란-파흘라브 가문의 일원이 맡았다.
실제 가문 이름과 다른 중요한 군사 직책을 구체적으로 연결하기는 어렵지만, 수렌과 미흐란이라는 이름은 자주 등장다. 로마 사료에서는 귀족의 이름을 실제 군사 직책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침공 당시 로마인들이 "수렌"이라고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사실 "수레나"는 7대 주요 가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스파바드, 마르즈반, 카나라앙, 파고스판, 이스탄다르라는 용어 사이에는 약간의 혼동이 있다. 스파바드는 육군 장군이자 군사 총독을 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보좌관은 파고스판으로 알려졌다. 스파바드의 부하 장교는 파단이었고, 전장 지휘관은 프라만다르로 지정되었다. 스파바드와 마르즈반을 정확히 구분하는 방법은 명확하지 않다.
일부 기록은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반면, 다른 기록들은 스파바드가 왕의 명령에 따라 협상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받은 장군 겸 외교관이었고, 마르즈반은 변경 지역 사령관이나 중요한 국경 지방의 통치자라는 역할에서 알 수 있듯이 순전히 군사적인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동부 이란어에서 사용되는 카나라앙(Kanarang)은 의미가 가장 불분명한데, 중앙아시아 아바르샤흐르의 마르즈반(Marzban)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이고스파난(Paygospanan)은 지방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탄다르(Istandar)는 이스탄(주 또는 주 내의 지역)의 지도자였다.
중기 사산 왕조 시대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왕조식 군사 용어가 여러 개 등장했다.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인 전사에게 부여되는 아르테슈타란-살라르(Arteshtaran-Salar, 전사의 우두머리)는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시야부쉬 장군과 바흐람 구르 등이 이 칭호를 받았다. 아르그바드(Argbadh)는 최고위 군사 칭호로 왕족이 사용했다.
라스난(Rasnan)은 의미가 덜 명확한 칭호이다. 아르타비드(Artabid) 가문처럼 특정 아자단(Azadan) 가문은 새로운 군주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등 특정한 임무를 맡았다.
부주르간(Vuzurgan) 또는 대귀족 집단도 대관식에 참석했다. 조로아스터교의 마기(모간)와 사제(모바단)는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갔다. 사제단의 수장인 모바단 모바드는 궁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암각화에는 마기들이 왕과 그의 전사들을 호위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호스로 1세의 개혁
호스로 1세(재위 서기 531~579년)가 단행한 개혁은 네 가지 주요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하급 귀족 계층인 '데흐칸(Dehkan)'이 '사바란(Savaran, 기사 계급)'의 대열에 편입되면서 기병 전력의 인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둘째, 경기병, 특히 기마 궁수 부대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러한 역할은 외국인 용병 부대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보충했다. 사바란은 이제 국가 관리로 대우받게 되었으며, 정기적인 급여와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또한 무기와 장비, 말도 국가로부터 직접 지급받았다.
셋째, 왕조 초기부터 존재했던 공식적인 군사 점검 절차가 더욱 철저해졌는데, 때로는 40일씩 지속되기도 했다. 심지어 왕조차도 이 점검 과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변화는 단일 총사령관(에란-스파흐바드, Eran-Spahbad) 직책을 폐지하고, 그 대신 네 명의 야전 사령관, 즉 '스파흐바드(Spahbad)'를 임명한 것이다. 기존의 네 명의 '마르즈반(Marzban, 변경 방위 사령관)'은 이제 각 스파흐바드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각 스파흐바드는 제국의 한 구역을 담당하여 방어했다.
동부 스파흐바드는 호라산, 세이스탄(사카스탄), 케르만을 관할했다.
남부 스파흐바드는 페르시스, 수시아나, 후제스탄 지역과 페르시아만의 긴 해안선을 담당했다.
북부 스파흐바드는 메디아, 쿠르디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란 지역을 방어했으며, 코카서스산맥의 주요 통로(예: 데르벤드 관문)도 책임졌다.
서부 스파흐바드에게는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무역·농업 중심지이자 로마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 '저지대'를 뜻하는 이란어 '아라크(Arak)'에서 유래)의 방어가 맡겨졌다.
각 스파흐바드는 또한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징집할 책임을 졌다. 이론적으로는 각 스파흐바드가 전체 군대의 4분의 1을 지휘하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운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바란의 무기들
사산 왕조 초기 군사 체계가 그 이전의 파르티아 왕조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흔히 언급되며, 이는 대체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산 왕조가 서기 224년 피루자바드(Firuzabad) 전투에서 파르티아를 무너뜨렸을 당시, 이미 파르티아와는 다른 검과 갑옷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후 에프탈 훈족 및 돌궐(투르크)계 집단들과의 군사적 충돌을 겪으면서, 사산 왕조는 아바르족이나 돌궐족의 방식과 같은 새로운 기술, 즉 검을 두 지점에서 고정하는 현수(懸垂)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투구
사산 왕조는 사르마티아인과 같은 이란계 민족으로부터 '스팡겐헬름(Spangenhelm, 여러 조각을 결합해 만든 투구)'과 같은 정교한 투구 제작 기술을 물려받았다. 로마 제국 또한 사르마티아인, 동고트족, 그리고 사산 왕조와의 군사적 경험을 통해 이러한 기술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초기 암각 부조에는 스팡겐헬름 형태의 투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비샤푸르의 부조를 보면, 샤푸르 왕과 함께 있는 사산 왕조 기병들이 일체형 투구와 의례용 머리 장식을 혼용하여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사산 왕조 초기에는 스팡겐헬름 형태의 투구를 알지 못했거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일체형 투구를 대량 생산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스팡겐헬름은 다수의 병사에게 철제 투구를 보급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사산 왕조 초기 병사의 투구는 두 개의 조각을 결합한 형태, 이른바 '능선형 투구(ridge helmet)'였다. 이 투구는 높이가 약 25~26cm, 너비가 16cm였다. 두 개의 머리 부분 조각은 리벳으로 고정된 두 개의 철제 띠로 연결되었으며, 투구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사슬 갑옷(mail)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형태는 서기 3세기 이후 로마군에 빠르게 도입되었다.
이 투구는 주로 전투 보병이 사용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병이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피루자바드, 나크셰 로스탐(Naghsh-e-Rustam), 비샤푸르에 남아 있는 부조들은 2차원적인 평면 형태여서 전사들의 얼굴과 머리가 측면으로만 묘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마치 일체형 투구를 쓴 것처럼 보이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으로, 테페 야히야에서 발견된 4세기 테라코타에는 네 부분으로 된 스팡겐헬름을 쓴 사산 왕조의 전사가 묘사되어 있다. 헬리오도로스는 샤푸르 2세 재위 시기에 샤푸르 2세의 중무장 사바란 부대가 금속 가면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스팡겐헬름은 페르시아에서 계속 발전했다. 사산 왕조 시대 스팡겐헬름 제작 방식의 핵심은, 틀과 머리띠를 사용하여 4개 또는 6개의 금속 조각을 리벳으로 결합하는 것이었다.
사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4조각 구성 스팡겐헬름은 높이가 약 22~24cm, 너비가 약 20cm 정도였다. 이는 대체로 4개의 철제 조각과 금속 띠를 청동 리벳으로 고정하여 제작되었다. 사산 왕조의 스팡겐헬름은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고 원뿔형에 가까운 '바슐리크(Bashlyk)'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투구를 구성하는 4개의 철제 조각 위에는 0.1~0.2mm 두께의 은판이나 금판을 덧씌울 수 있었다. 장식은 주로 '바랑가(Varanga, 그리핀과 유사한 고대 이란의 새)'나 '시무르그(Simurgh)'의 깃털 문양으로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사산 왕조 후기 검에서도 이와 동일한 깃털 장식 문양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산 왕조 스팡겐헬름의 가장 발전된 형태는 타크 에 보스탄 유적에 새겨진 중기병(호스로 2세)의 부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투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전과는 다른 디자인을 확인할 수 있다. 투구 앞면에는 눈 모양의 틈이 나 있고, 그 위로는 금속으로 만든 '눈썹'이 달려 있다.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초기 사산 왕조 시대 투구와 달리, 이 투구는 사슬 갑옷으로 얼굴까지 보호한다. 사슬 갑옷은 어깨까지 이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투구의 형태는 원뿔형보다는 반구형에 더 가깝다. 또한 이마 중앙에는 보석과 같은 장식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두 줄의 진주 장식이 뻗어 나와 있다. 투구 꼭대기에는 구체(球體)가 얹혀 있고, 그곳에서 리본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검
초기 사산 왕조의 검은 그 이전 시대인 파르티아 왕조의 검과 유사했다. 이 검들은 폭이 넓은 칼코등이(검가드)와 길고 곧은 칼날을 갖추고 있었으며, 칼집에 부착된 고정 장치(칼집 슬라이드)를 이용해 매달았다. 초기 사바란(사산 왕조의 기병대)의 검에서는 검을 매다는 방식, 구형(공 모양) 칼자루 끝장식(폼멜), 폭이 넓은 칼코등이 등 사르마티아적인 특징이 많이 발견된다. 초기 부조에는 허벅지에 단검을 묶어 차는 모습도 나타나는데, 이는 북부 이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사르마티아적 영향은 쿠샨 왕조를 통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긴 철검은 쿠샨 왕조에 의해 파르티아 시대의 페르시아로 처음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시대 검의 길이를 1~1.11m, 폭을 약 5~8.5cm 정도로 늘렸다. 그 결과 파르티아 시대의 검보다 전반적으로 더 길고 날씬하며, '사르마티아적' 외형을 띤 비교적 거대한 무기가 탄생했다. 초기 사산 왕조 검의 칼코등이는 대체로 폭이 넓었으나, 한나라(중국) 양식처럼 더 작은 형태도 존재했다. 비샤푸르와 나크셰 라자브에서 발견된 검들에서는 페르시아적 영향도 엿보이는데, 칼자루 끝장식이 구형으로 되어 있거나 바깥쪽으로 퍼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심지어 칼집 끝부분이 하트 모양인 것에서는 로마의 영향까지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사산 왕조의 긴 검은 칼집에 달린 고정 장치(슬라이드)를 이용해 허리띠에 수직으로 매달았다. 칼집에 부착된 금속 슬라이드를 통해 허리띠에 수직으로 매달린 검은 허리띠를 따라 위치를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수직으로 매다는 방식은 기병이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나크셰 로스탐 유적에 새겨진 샤푸르 1세의 부조를 보면, 당시 사산 왕조 사람들은 칼자루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검을 매달았음을 알 수 있다. 부조 속 샤푸르 1세는 왼손을 칼자루 위에 얹고 검을 오른쪽으로 45도 기울인 모습이다. 이때 칼집은 샤푸르의 다리 바로 뒤쪽, 말의 옆구리에 놓여 있다. 이 방식은 왕조 초기에는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용 흔적이 확인되는 가장 늦은 시기는 샤푸르 2세(서기 310~379년) 시대, 혹은 그의 후계자인 아르다시르 2세(서기 379~383년) 시대까지로 추정된다.
보병의 경우, 칼자루를 계속 누르고 있지 않으면 행군 중에 칼이 땅에 끌리게 되므로 '칼집 슬라이드' 방식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2점식 현수 방식'이 도입되면서 해결되었다. 4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란계 언어 사용자들이 비(非)이란계 민족들로 대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군사 기술들이 유입되었다. 2점식(또는 이중 고리형) 현수 방식은 튀르크계나 아바르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사산 왕조는 5세기경 에프탈과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이 방식을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새로운 방식은 두 개의 끈을 이용해 칼을 허리띠에 매다는 형태였는데, 각 끈은 칼집 가장자리에 달린 'P'자 모양의 고리를 통과했다. 끈의 길이를 조절하면 칼이 기울어지는 각도를 바꿀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칼의 각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칼집 슬라이드'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칼을 뽑을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기병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라술라스(Karasulas, 2003)의 현장 실험과 관찰 결과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전투 상황에서 기병이 반드시 '빠르게 칼을 뽑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2점식 현수 방식을 사용하면 칼이 보병의 다리와 평행하게 매달리지 않게 되어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덕분에 강인한 다일람(Dailamite) 보병들은 더 긴 칼을 효율적으로 휴대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산 왕조 후기가 되면 단검 또한 이러한 2점식 현수 방식으로 휴대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판지켄트, 발랄리크 테페(테르메즈 인근), 바라크샤와 같은 유적지에서 확인된다.
한편, 이전부터 사용되던 수직 형태의 칼은 의례용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이는 타그 에 보스탄에 새겨진, 아나히타 여신과 아후라 마즈다가 호스로 2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타그 에 보스탄에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형태의 칼도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중요한 종교 의식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야만적”이라고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Lerner, 2002, p.102). (종교적·의례적 용도로 쓰인) 구식의 수직형 칼과, 더 실용적인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형태’의 칼이 모두 사용된 사례는 소그디아나(Soghdiana)나 판지켄트(Pianjekent)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이란어권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Lerner, 2000).
사산 왕조 후기의 칼은 손잡이 부분에 두 개의 홈이 파여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나는 검지 손가락을 위한 짧은 홈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세 손가락을 위한 긴 홈이다. 초기 형태의 칼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진 이 칼의 손잡이에는 별도의 칼날 보호대(가드)가 없다. 또한 손잡이는 마치 ‘권총’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칼날에 대해 각도를 이루며 아래쪽으로 굽어 있어 칼날의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쏠리게 한다. 이는 더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칼날은 철제로 제작되었으나, 현존하는 유물들은 부식이 너무 심해 정확한 무게를 측정하거나, 이것이 주로 베기용으로 설계되었는지 아니면 찌르기용으로 설계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칼 제작에 사용된 철은 주로 인도에서 들여오거나 제국 내 철제 생산지(쿠르디스탄 지역일 가능성이 높음)에서 조달했다. 이란 고원 지대에는 양질의 철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철을 가공하는 데 필요한 목재도 충분하지 않았다.
칼과 칼집의 전체 길이는 평균 105.5cm에 달했다. 칼집은 대체로 입구에서 끝으로 갈수록 약간 좁아지는 형태(약 4.4~3.5cm)를 띤다. 칼집의 끝부분은 대개 'V'자 모양의 장식판으로 감싸여 있었다. 사산 왕조 후기의 검은 자루와 칼집이 금과 은으로 만든 얇은 판으로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집을 금속판으로 감쌌는데, 칼집 뒷면에서 금속판의 가장자리가 맞닿는 부분에는 접합부를 보강하기 위해 평평한 띠 모양의 금속판을 덧대었다. 칼집 뒷면은 주로 '켈트' 양식의 나선형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칼집 앞면은 '스팡겐헬름(Spangenhelm)' 투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바랑가(Varanga)' 깃털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창, 장창, 철퇴, 도끼, 그리고 채찍
사산 왕조 초기부터 장창(lance)은 사바란(사산 왕조의 기병)의 주된 공격 무기였다. 사산 왕조가 계승한 파르티아식 창은 관통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헬리오도로스는 이 창이 두 사람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위력은 창 자체의 무게와 돌격하는 기병의 운동량이 결합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돌격할 때 사산 왕조의 기병은 보통 허리 높이에서 양손으로 장창을 잡았다. 나크셰 로스탐과 같은 암벽 부조를 보면, 장창이 말 목의 오른쪽에 위치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운용 방식은 더 넓은 이란 문화권의 특징 중 하나였는데, 케르치에서 발견된 보스포루스 왕국 기병의 모습에서도 동일한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 헬리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창은 말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정 장치는 돌격 중에 창과 기병 모두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타크 에 보스탄에 묘사된 사산 왕조 후기 기사는 더 이상 장창을 ‘양손’으로 잡고 있지 않다. 대신 오른팔만 사용하여 무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더 개선된 안장이나 등자가 도입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철퇴는 주로 상대의 갑옷을 부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철퇴는 철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40cm에서 55cm 정도였다. 돌궐족이 사산 왕조와의 군사적·교역적 접촉을 통해 철퇴를 무기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를 다소 신화적으로 노래한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사산 왕조 전사들을 묘사할 때 채찍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채찍이 전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채찍은 상대의 목을 낚아채 말에서 끌어내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르마티아인과 같은 이란계 초원 민족들 또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올가미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전신인 파르티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식 활을 사용했는데, 이는 뿔, 나무, 힘줄을 결합하여 만든 복합궁이었다. 활은 보통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쏘았다. 하지만 양손 모두를 사용하여 활을 쏠 수 있는 궁수들은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중앙아시아의 궁술을 다룬 카라술라스(Karasulas, 2002)의 최근 연구는 고대 궁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유효 사거리(관통력 기준)와 정확도라는 개념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 무기의 유효 사거리인 175m 거리에서도 치명적인 관통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정밀한 사격을 위한 사거리는 50~60m 정도였다. 60m를 넘는 거리에서 화살을 쏠 때는 특정 목표를 정밀하게 타격하기보다는, 집단적으로 수많은 화살을 쏟아부어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가 컸다. 이때 발사된 화살들 역시 여전히 치명적이었지만, 정밀 타격보다는 대규모 일제 사격의 일부로서 발사된 것이었다.
사산 왕조의 궁수들은 복합궁의 시위를 당길 때 중지와 약지를 사용했다. 이때 검지는 화살대(화살 몸통)를 따라 곧게 뻗은 형태였다. ‘페르시아식 당기기(Persian draw)’에서 새끼손가락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엄지손가락의 역할은 완전히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도 검지와 함께 작용하여 화살이 시위에 단단히 고정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인 나마(Ayin-Namah)』에는 왼손의 세 손가락으로 활을 잡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화살을 받치는 구체적인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사산 왕조의 궁수들은 손가락 끝을 보호하는 도구를 착용했는데, 최근 이러한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오버라에트(Overlaet, 1998)는 이 손가락 보호구가 더 강력한 복합궁의 시위를 당기기 쉽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는 시위에 의해 손가락이 마모되거나 상처 입는 것을 줄여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손가락 보호구가 떨어지지 않도록 작은 사슬이 이를 고정하고 있었는데, 이 사슬은 손목을 감싸고 손등을 가로질러 양 끝이 가운데 손가락에 연결되는 형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활시위를 당기는 '몽골식 당기기(Mongolian draw)' 방식을 결코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바르(Bivar, 1972)는 사산 왕조 사람들이 이러한 당기기 방식을 야만적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왜 '야만적인' 방식인 2점식 검 현수 장치는 받아들였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어쩌면 사산 왕조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식 궁술이 더 우수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산 왕조 사람들에게 궁술의 성공을 결정짓는 네 가지 기준은 관통력, 발사 속도, 화살 발사량, 그리고 명중률이었다.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발사량을 확보하기 위해 '판자가간(panjagan, '다섯 장치'라는 뜻)'이라 불리는 도구가 고안되었는데, 이를 사용하면 기사는 활을 한 번 당겨 다섯 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이는 궁술을 극도로 치명적으로 만들었는데, 첫 번째 화살 무리가 목표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궁사가 다섯 발의 화살을 추가로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화살통 속의 화살들이 다섯 발씩 묶여 신속하게 꺼낼 수 있도록 미리 배치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활을 쥔 손에 화살 세 발을 함께 들고 다니던 일반적인 사산 왕조 시대의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 무기의 목적이 단순히 발사 속도와 양을 늘리는 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집중 사격' 또한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판자가간을 사용하면 화살들을 의도한 구역 전체에 퍼뜨려 특정 지역을 '살상 구역(kill zone)'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더 적은 인원으로도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까지 판자가간의 실물은 발견된 바 없다.
로마 측 기록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인들의 뛰어난 궁술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예로, 바흐람 구르가 소년 시절 '만자르'라는 이름의 아랍 왕과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 보여준 놀라운 일화가 있다. 당시 바흐람과 만자르는 야생 당나귀를 덮치려는 사자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바흐람은 화살을 쏘아 사자와 야생 당나귀를 한꺼번에 꿰뚫어 둘 다 쓰러뜨렸다. 바흐람의 별명이 '구르(Gur, 야생 당나귀라는 뜻)'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산 왕조의 화살대도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세 개의 깃이 달려 있었다. 화살의 시위가 걸리는 부분(오늬)은 갈대 마디를 잘라 만들었으며, 화살의 전체 길이는 약 80~85cm 정도였다. 다양한 종류의 화살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전장에서 각기 다른 목적에 맞춰 활용되었다.
문헌(『메흐르 야슈트(Mehr Yasht)』 X, 129)에는 매 날개 모양, 철제 날, 뿔로 만든 손잡이, 금으로 장식된 오늬, 납 독이 발라진 것, 혹은 독수리 깃털이 달린 것 등 여러 형태의 화살촉이 언급되어 있다.
『샤나메』에는 상대의 눈구멍을 꿰뚫기 위한 '두 갈래 화살촉'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이는 실전 무기라기보다는 문학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금속 공예품 등을 보면 두 갈래로 나뉜 무기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나, 이는 주로 작은 야생 동물을 사냥할 때 사용되었다. 화살통에는 총 30개의 화살을 담았는데, 이는 고대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파르티아 시대에 사용되던 스키타이 양식의 '고리토스(gorytos, 활과 화살통이 결합된 형태)'는 사산 왕조 초기에는 활을 넣는 '카만단(kamandan)'과 화살을 담는 '티르단(tirdan)'이 분리된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사산 왕조의 기사들은 중앙아시아식 현수 장치를 이용해 이 장비들을 휴대했다.
타크 에 보스탄에 새겨진 갑옷 입은 기사의 모습을 보면 두 개의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의복용 허리띠이고, 그 아래에 실용적인 두 번째 허리띠가 있는데, 여기에는 칼뿐만 아니라 화살통과 활집이 함께 매달려 있다. 그의 화살통은 오른쪽 옆구리에 위치해 있다. 이는 화살통을 오른쪽 옆에, 검을 왼쪽에 매달았던 초기 사산 왕조 기사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방패
초기 사산 왕조의 기사들에게 방패는 불필요한 방해물에 불과했는데, 이는 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 창을 다루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패는 창으로 무장한 다른 적을 상대할 때 별다른 보호 수단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 사바란(사산 왕조의 기병)들은 당시 자신들이 갖춘 갑옷만으로도 전장에서 충분한 보호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보병, '파이간(Paighan)'이라 불리는 공성 부대원, 그리고 보병 궁수들은 방패를 사용했다. 1930년대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중보병용 방패는 약 500년 전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방패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페르시아식 방패는 통가죽 한 장으로 만들어졌는데, 가죽 가장자리에 'W'자나 'V'자 모양의 홈을 파고 그 사이로 버들가지를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이후 방패를 물에 적셨다가 말리는 과정을 거치면 가죽이 약간 수축하면서, 결과적으로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방패가 완성되었다.
파이간 공성 부대원들은 염소 털로 만든 길고 두꺼운 '킬리키아' 방패를 사용했다. 이는 방어 수단인 동시에, 적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굴착 작업 등을 은폐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동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보병 궁수들은 어깨에 매는 작은 방패(버클러)를 휴대하여 얼굴과 목을 보호했다. 사산 왕조 후기에는 질긴 생가죽을 엮어 만든 커다란 버들가지 방패가 다시 등장했다. 보병 궁수들은 원거리 무기를 발사할 때 이 방패를 세워 자신을 보호했다.
사산 왕조 후기에는 사바란 기병들 또한 방패를 사용하는 모습이 확인되는데, 이는 후대 이슬람 문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타크 에 보스탄에 묘사된 사산 왕조 후기 기사는 왼쪽 팔뚝에 작은 원형 방패를 착용하고 있다. 이는 아바르-훈족이나 비잔티움(동로마) 제국군이 쏘는 강력한 원거리 무기를 튕겨내거나, 근접전에서 머리와 목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갑옷과 사슬 갑옷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갑옷은 크게 판갑(lamellar), 띠갑(laminated), 비늘갑(scale), 사슬 갑옷(mail)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판갑은 철, 청동, 또는 가죽으로 만든 작은 직사각형 판들을 수직과 수평으로 엮어 제작했다. 4세기 사산 왕조의 부조에서 이러한 형태의 방어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겉옷 형태로 착용하는 반소매 판갑이 묘사되어 있으며, 사슬 갑옷 위에 덧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이를 도입하여 특히 경기병의 장비로 활용했다.
또 다른 형태의 판갑은 긴 판들을 바탕재에 꿰매거나 묶어 몸통, 팔, 다리를 보호하도록 구성되었다.
띠갑은 금속 띠를 원형으로 만들어 가죽 바탕 위에 수평으로 겹쳐서 고정한 형태이다. 이는 주로 팔과 다리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로마인들도 이를 도입했다. 사산 왕조는 왕조가 끝날 때까지 띠갑을 사용했다.
비늘갑은 작은 금속 조각(비늘)들을 바탕재 위에 수평으로 겹쳐지도록 엮어 만든 것이다.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청동 비늘들이 이를 증명한다. 더 큰 비늘은 신체의 취약한 부위를 보호했고, 작은 비늘은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사슬 갑옷은 금속 고리들을 서로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에서는 사슬 갑옷으로 된 상체 보호구(코르슬렛)가 발견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는 아르다시르 1세 시대 무렵 이미 사슬 갑옷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유형의 갑옷보다 제작하기는 어렵지만, 사슬 갑옷은 더 뛰어난 강도와 내구성,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고리 사이로 열기가 빠져나갈 수 있어 더운 기후에서 매우 유용했다. 사슬 갑옷은 관절과 같이 취약하거나 '열려 있는' 부위를 효과적으로 보호해주었다.
다만, 사슬 갑옷의 주된 단점은 화살의 운동 에너지를 스스로 완전히 튕겨내거나 흡수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갑옷과 함께 착용할 경우, 사슬 갑옷은 매우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되었다. 피루자바드에서 아르다시르가 아르타바누스 5세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는, 사산 왕조 초기 군대가 흉갑, 팔 보호구, 사슬 갑옷 등 다양한 형태의 방어구를 사용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비바르와 샤바지는 피루자바드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그들이 주로 판갑(lamellar armor)에 의존했던 점을 꼽았다. 반면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는 판갑 외에도 사슬 갑옷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방어구를 혼용했다. 이러한 ‘복합적’ 방어구 체계는 신체의 움직임을 최대한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사산 왕조의 방어구가 제공하는 뛰어난 기동성은 피루자바드 전투에서 파르티아가 패배한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복합적’ 형태의 갑옷은 적어도 3세기 후반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서기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침공 당시, 초중장갑 기병인 ‘사바란(Savaran)’은 온몸이 사슬 갑옷으로 덮여 있었으며, 그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안장 위로) 올라타야” 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헬리오도로스, IX, 14, 5). 일단 말에 올라타면 갑옷의 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강력한 니세아 품종의 말은 기수를 충분히 태우고 움직일 수 있었다.
사산 왕조의 사슬 갑옷을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는 타크 에 보스탄에 새겨진 부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호스로 2세 시대의 후기 중장갑 기병이 묘사되어 있다. 이 전사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사슬 갑옷을 입고 있다. 상체는 몸에 딱 맞고 허리 아래로는 헐렁하게 떨어지는 형태인데, 이는 동부 이란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양식과 유사다. 또한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시대의 손 보호구인 ‘바즈판(Bazpan)’을 계속 사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암라쉬 지역에서 사산 왕조 시대의 바즈판이 발견된 바 있다.
말 장비와 갑옷
안장 틀은 사르마티아인들이 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더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수가 더 크고 강력한 창을 다룰 때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안장에 달린 ‘뿔(pommel/horn)’은 기수가 몸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특히 창을 들고 돌격할 때 충돌 순간 기수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돕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기마 전사들은 또한 무릎으로 말의 옆구리를 조여 균형을 유지하기도 했다. 사르폴-에-조하브에 있는 암각화는 페르시아에서 ‘뿔 달린 안장’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사례이다. 암각화는 매우 마모되었지만, 기수의 무릎 근처에 있는 ‘불룩한 부분’을 여전히 식별할 수 있다.
서기 3세기경에는 네 개의 뿔이 달린 안장이 사용되었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앞쪽 뿔이 길게 뻗어 허벅지를 감싸는 형태까지 나타난다. 이렇게 길게 뻗은 앞쪽 뿔은 기수에게 더욱 강력한 지지대 역할을 했다. 안장의 뿔은 기수의 척추와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주었으며, 균형을 더 잘 잡게 해줌으로써 마치 등자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덕분에 기수는 칼을 휘두를 때 몸을 낮게 숙이거나, 창을 들고 돌격할 때 몸을 앞으로 기울여도 불편함 없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산 왕조 후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안장이 등장했다. 기존의 ‘뿔’은 사라지고, 그 대신 앞쪽에 ‘솟아오른 활 모양의 구조’가 나타났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안장은 스키타이 시대부터 이란계 민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 안장 깔개 위에 얹어 사용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의 배 아래와 가슴 주위를 지나는 끈을 이용해 안장을 고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더 강력한 중갑 기병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안장은 기수가 창을 사용할 때 더 큰 힘과 추진력을 낼 수 있도록 고안된 전체적인 체계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산 왕조의 이러한 ‘활 모양 앞부분을 가진 안장’은 다소 의아한 구석이 있다. 앞쪽의 구조물은 안정성을 제공하지만, 뒤쪽에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해 줄 ‘뿔’이 없기 때문이다. 헤르만(Herrmann, 1989)은 안장 뒤쪽에 지지대가 없다는 점은 또 다른 새로운 기술, 즉 등자가 동시에 도입되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미할락은 등자가 달린 안장이 도입됨으로써 기수에게 더욱 안정적인 기반이 제공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산 왕조가 등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으나, 사산 왕조 말기에는 등자가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소그디아나(펜지켄트)의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란인들에게 등자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타크 에 보스탄에 새겨진 인물상들은 발과 다리 부분이 손상되어 있어, 이를 면밀히 조사하더라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헤르만은 타크 에 보스탄에 남아 있는 사산 왕조 후기 부조(멧돼지와 사슴 사냥 장면)에 주목한다. 이 부조 속 기수들의 발은 전형적인 ‘발레리나 자세’(발끝을 아래로 향한 형태)가 아니라 ‘앞쪽을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등자가 사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사산 왕조 시대의 금속제 접시 예술을 보면, 후기 군주들이 등자 없이 ‘발레리나 자세’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사자 사냥을 하는 어느 사산 왕조 국왕(5~7세기, 소장 번호 BM.124092)의 모습을 담은 접시가 그 예이다. 사산 왕조 양식의 접시 중 등자가 묘사된 유일한 사례는 ‘푸르 에 바흐만’의 접시인데, 이는 사실 사산 왕조 이후의 작품이며 페르시아 본토 밖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장 기술과 다리 및 발의 자세에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 헤르만의 견해는 타당하다. 나아가, 앞부분이 굽은 새로운 형태의 안장이 어떻게 더 큰 안정성과 고정력을 제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헤르만의 의문은 설득력이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안장이 도입될 당시 등자와 같은 또 다른 혁신이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말을 위한 '바르고스트반(Bargostvan 말한테 입히는 말 갑옷, 마갑)' 또는 판갑(lamellar armor) 형태의 갑옷은 적의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말을 보호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요구에 따라 등장했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인해 이란인들은 말용 갑옷을 고안해 냈고, 페르시아 지역의 동족들 또한 이를 도입하게 되었다.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파르티아 시대의 말이 가죽 바탕 위에 청동이나 강철로 만든 비늘 형태의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안장을 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말은 머리, 목, 다리를 보호하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유물이 초기 사산 왕조 시대의 말 갑옷과 동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주 초기 형태의 말 갑옷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는데, 예외적으로 피루자바드에 묘사된 아르다시르와 샤푸르, 그리고 신원 미상의 귀족(혹은 왕자)이 탄 말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4세기 중반에 이르면 상황은 분명히 달라진다. 헬리오도로스(Heliodorus, IX, 14, 4)는 사산 왕조의 말들이 다리와 머리를 포함해 몸 전체가 갑옷으로 덮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산 왕조 말 갑옷의 마지막 모습은 타크 에 보스탄에 새겨진 호스로우 2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의 말 갑옷은 머리, 목, 그리고 가슴 앞부분에만 판갑 형태의 보호구를 갖춘 '부분적'인 형태였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무게를 줄여 정면 돌격 시 말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지원 및 보조 부대
파이간(Paighan)
파이간은 농민층에서 징집되었다. 각 파이간 부대는 '파이간-살라르(Paighan-Salar)'라 불리는 지휘관이 통솔했다. 파이간은 보급 부대 호위, 사바란(기병대)의 시종 역할, 성벽 돌파, 참호 구축, 그리고 갱도 굴착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주로 창과 방패로 무장했다. 전투 시에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밀집 대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군사 훈련 수준, 전투 효율성, 그리고 사기는 대체로 낮았다.
공성전이 벌어질 때면 이들의 존재로 인해 군 전체 규모가 크게 불어났다. 『크로니콘 아노니뭄(Chronicon Anonymum)』에 따르면, 호스로 아누시르반의 군대는 총 18만 3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대다수인 12만 명은 공성 작업을 위해 징집된 농민과 노동자들인 파이간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전투 보병 4만 명과 기병 2만 3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보병과 메디아인(Medes)
메디아인은 근동 지역에 진입하여 정착한 최초의 이란계 민족 중 하나이다. 이들의 후손으로는 쿠르드족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있다. 아시리아의 부조에는 메디아 기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아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메디아 보병이었다. 메디아인은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페르시아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구성 요소였다.
그러나 이들이 거둔 가장 놀라운 승리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파르티아와 메디아 연합군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지역의 타브리즈 인근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했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에 도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4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메디아인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군대인 '스파(Spah)'에 우수한 투석병, 투창병, 그리고 중보병을 공급했다. 사산 왕조는 초기부터 중장보병을 운용했다. 헤로디아누스는 아르다시르가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했을 당시 사산 왕조군이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약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사산 왕조의 보병을 장비가 부실하고 무능한 농노들의 집합 정도로 여기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로마인들이 ‘파이간’을 정규 전투 보병과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초기 사산 왕조의 전형적인 보병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 능선형 투구, 긴 사슬 갑옷,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 양식의 가죽과 버들가지로 만든 방패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형태).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침공 당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페르시아 중장보병을 매우 규율이 잡혀 있고 “검투사처럼 무장한” 병사들로 묘사했다.
이 시기 사산 왕조는 로마 군단을 모방하려 했거나, 혹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보병 전통을 부활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병들은 때때로 로마 군단병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유능했다고 전해진다. 전투 시 중장보병은 처음에 궁병들 뒤에 배치되었는데, 궁병들은 화살이 바닥날 때까지 사격을 가한 뒤 중장보병 대열 뒤로 물러났고, 이후 중장보병들이 근접 전투를 수행했다.
흥미로운 점은 보병이 사바란(기병대) 뒤편 중앙에 배치될 만큼 신뢰받는 병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중장보병은 사바란과 협력하여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산 왕조의 보병 전력은 로마군, 그리고 이후의 비잔티움군과 완전히 대등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보병 전투 전통은 사산 왕조보다 훨씬 더 폭넓게 발달해 있었으며, 이란인들은 본래 기병전과 궁술에 더 뛰어났다.
다일람인(Dailamites)
사산 왕조 후기에 이르러 북부 페르시아에서 '다일람인(Dailamites)'이라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중보병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최고의 보병 부대가 되었다. 로마 측 기록들은 근접 전투, 특히 검과 단검을 사용하는 데 있어 다일람인들이 보여준 뛰어난 기량과 강인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종종 로마 군단의 정예병들과 정면으로 맞붙곤 했다. 또한 예멘 침공 당시에도 맹활약했는데, 이때 바흐리즈라는 이름의 사바란 장교가 800명의 다일람인 부대를 이끌었다.
다일람인들은 전투용 도끼, 투석기, 단검, 그리고 무거운 검 등을 무기로 사용했다. 사산 왕조 후기 다일람 보병들은 사바란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검을 고정하는 'P'자형 현수 장치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북부 페르시아에서는 '바랑가' 깃털 장식이 달린 사산 왕조 후기 양식의 검이 다수 발견되었다. 활 또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북부 페르시아에서 궁수용 손가락 보호구(깍지)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투척 무기로는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이 있었다. 이는 근접 전투에서 사용하거나, 로마의 투창처럼 던져서 공격할 수도 있었다. 방패는 화려하게 채색되었는데, 이러한 다일람인들의 전통은 이슬람 시대까지 이어졌다.
7세기 아랍 침략자들은 다일람인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다일람인들이 이슬람 세력에 합류할 때면, 아랍인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자신들의 대열로 받아들였고, 종종 아랍 병사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기도 했다.
보병 궁수
보병 궁수들은 매우 높게 평가받았다. 궁술은 전투 승리의 핵심으로 여겨졌으며, 궁술 훈련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보병 궁수들은 공성전과 정면 전투 모두에 투입되었다. 공성전에서는 적 요새를 상대로 종종 탑을 세웠는데, 궁수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적 거점 내부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지상에 있는 궁수들은 수비군에게 맹렬한 화살비를 퍼부어 그들의 방어 능력을 약화시켰다.
전장에서 이들은 화살이 바닥날 때까지 강력한 일제 사격을 가했다. 보병 궁수들의 주된 임무는 사바란(중장기병대)의 결정적인 타격에 앞서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치명적이고 정밀한 사격으로 최대한 많은 화살을 퍼부어 사바란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적의 궁수 및 보병 대형에 타격을 입혀 사바란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방어 상황에서는 적 보병이나 기병의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로마군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궁술에 대응하기 위해, 페르시아군 대열을 향해 과감하게 돌격하여 자신들의 강점인 근접 전투 능력을 발휘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전술이 항상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여기서 핵심은 로마군의 돌격 속도와, 로마군이 거리를 좁히기 전까지 사산 왕조의 보병 궁수들이 얼마나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느냐 하는 대결이었다.
각 궁수 부대는 '티르바드(Tirbad)'라는 지휘관이 이끌었다. 티르바드는 궁수들을 여러 중대로 편성하여, 한 부대가 사격하는 동안 다른 부대가 교대함으로써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화살을 쏟아낼 수 있도록 했다. 18세기에는 서부 페르시아의 루르(Lur)족이 이 전술을 총기 운용에 응용하여, 남동부 아프가니스탄에서 침입해 온 파탄(Pathan)족을 격퇴하기도 했다.
사산 왕조 후기 보병 궁수들이 사용한, 생가죽을 씌운 커다란 버들가지 방패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를 연상케 했다. 이들의 전술은 고대 메디아-페르시아 시대와 거의 동일했는데, 함께 전진하며 치명적이고 압도적인 화살비를 퍼붓는 방식이었다.
또 다른 전술로는 사바란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군 전선 가까이 접근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로마군 진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중장기병대의 보호 아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보병 궁수들은 후퇴하면서 뒤를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는데, 이는 기마 궁수들의 '파르티아식 사격'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또한, 왕실 소속의 정예 보병 궁수 부대도 언급해야 한다. 100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왕좌를 죽음으로 사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보병 궁수들이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전투 중 하나는 서기 542년 아르메니아의 앙글론에서 벌어졌다. 당시 나베드가 이끄는 4,000명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은 3만 명 규모의 비잔티움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나베드는 비잔티움군이 방어선의 취약한 부분을 돌파해 마을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비잔티움군을 겨냥한, 마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상케 하는 매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옥이나 미리 치밀하게 준비된 진지에 숨어 있던 궁수들은 추격해 들어오는 비잔티움군을 향해 여러 방향에서 화살을 퍼부었다.
이때 궁수들 중에는 말에서 내린 기병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화살의 속도와 정확도, 그리고 쏟아지는 양 때문에 비잔티움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비잔티움군의 공격은 순식간에 국경을 향한 공포에 질린 도주로 바뀌었고, 도망치던 병사들 중 다수가 포로로 잡혔다. 결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이 전투에서 비잔티움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르메니아 정예 기병대
아르메니아인들은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기병대의 장비와 복장은 사바란의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사산 왕조를 지지하는 아르메니아 기병 부대는 사산 왕조의 깃발 아래에서 싸웠으며, 크테시폰의 왕실 구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때 왕은 왕실 사절을 보내 아르메니아의 상황을 묻곤 했는데, 이러한 절차는 세 차례 반복되었다. 그다음 날, 왕은 직접 군대를 사열하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예우했다.
아르메니아의 장군 슴바트 바그라투니(Smbat Bagratuni)는 호스로 2세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619년 투르크족을 상대로 거둔 놀라운 승리 덕분에, 바그라투니는 보석으로 장식된 특별한 예복을 하사받았으며 왕실 근위대 일부에 대한 지휘권까지 부여받았다. 호스로 2세는 그에게 특별한 영예를 부여하는 의미로, 그를 궁정 귀족 서열 3위까지 격상시켰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또한 귀중한 경기병대와 우수한 보병대를 제공했는데, 이들은 투석기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적 기병대를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근접전에서는 창을 사용하는 데에도 매우 뛰어났다.
경기병대
경무장한 기병대는 활을 다루는 데 매우 능숙했으나, 외국에서 온 많은 부대는 투창과 같은 다른 무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경기병들은 아란/알바니아(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지역의 알란족, 북부 페르시아의 겔란족, 중앙아시아의 쿠샨족,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동부 이란에 정착한 사카족 등 이란어권 민족들 중에서 모집되었다. 또한 키오니테스족, 에프탈족, 투르크계 하자르족과 같은 비(非)이란계 민족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아래에서 다룰) 라크미드(Lakhmid)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경 지대에 배치된 이러한 전투적인 동맹군들은 사산 왕조의 주력 부대인 사바란이 도착할 때까지 적의 침공군을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라크미드 아랍인
아랍인 부대는 특히 사막전에서 뛰어난 효율성을 발휘했으며, 제국 남부 국경을 약탈하러 오는 다른 아랍 부족들로부터 제국을 방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정찰과 습격에도 매우 능숙했으며,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갔을 당시 샤푸르 2세에게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전력이 되어주었다.
사산 왕조는 오만 등 아라비아 반도 내 여러 아랍 동맹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사바란 부대를 파견했다. 이들 동맹 세력 중 가장 효과적이고 유명했던 이들은 라흠 왕조(Lakhmids)로, 이들은 4세기부터 사산 왕조의 핵심 아랍 동맹국이 되었다. 이들은 사바란과 유사한 장비를 갖추고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아랍 부족들로부터 남쪽 국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뛰어난 전사로서 그 가치를 입증했고, 칼리니쿰 전투에서처럼 사바란을 훌륭하게 지원했다. 사산 왕조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아마도 호스로 2세가 라흠 왕조를 해체해 버린 일일 것이다. 이러한 동맹 세력의 부재는 637년부터 시작된 아랍인들의 페르시아 정복을 용이하게 만든 주요 군사적 요인이 되었다.
낙타 부대
사산 왕조에서 낙타 부대가 수행한 역할은 명확하지 않으나, 로마 측 기록에는 파르티아군에 낙타 부대가 존재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낙타는 말보다 키가 커서 궁술을 구사하는 데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 말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낙타는 훨씬 더 튼튼하고 회복력이 강하며 엄청난 무게를 운반할 수 있다. 낙타를 탄 사산 왕조 전사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전설적인 바흐람 구르가 비잔티움 출신의 아담한 여성 동행인과 함께 낙타를 타고 활을 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사바란의 개발, 배치 및 전술
사바란(Savaran)의 발전
사산 왕조 페르시아 군대의 전술적 발전은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파르티아식’으로, 중장기병 부대가 경무장한 궁기병(사기타리, Sagittari)의 지원을 받는 형태였다. 로마군과 전투할 때 사바란의 역할은 로마 보병대를 교란하고 밀집시켜, 궁기병들이 공격하기 좋은 표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샤푸르 1세 시대를 지나면서 궁기병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샤푸르 2세(재위 310~379년) 시대에 이르러서는 초중장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적 변화가 나타났다. 사산 왕조의 중장기병에 관한 기록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율리아누스 황제의 연설문, 그리고 헬리오도로스의 『아이티오피카(Aethiopica)』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이들은 대개 눈과 코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린 안면 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착용했다.
샤푸르 2세는 “자신의 기병대를 난공불락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단순히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를 갖추거나 말의 이마와 가슴에 청동 판을 덧대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기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슬 갑옷으로 무장했고, 말 또한 머리부터 발굽 끝까지 갑옷으로 덮여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의 몸을 철제 사슬 갑옷의 보호에 완전히 맡겼던 것이다. 사슬 갑옷 안쪽에는 판갑과 비늘 갑옷을 결합한 형태의 방어구가 착용되었다.
헬리오도로스는 이러한 초중장기병의 방어구에 대해 “어떠한 투사체도 막아낼 수 있으며, 모든 부상으로부터 확실하게 몸을 보호해 준다”고 언급했다. 이는 당시 갑옷 기술이 매우 고도로 발달하여, 초중장기병인 사바란이 로마군의 궁술을 더 이상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시사할 수 있다. 무기 체계 또한 확장되어 도끼, 철퇴, 투창 등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러한 초중장기병 전술이 율리아누스 황제나 이후 등장한 에프탈 훈족을 상대로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결점들은 사바란의 전투 교리와 장비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어쩌면 호스로 1세가 단행한 후대의 개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3단계에 이르러서는 활과 창을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만능형 기병'이 등장했다. 이러한 유형의 전사는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영향은 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사산 왕조 후기에는 등자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타크 에 보스탄의 부조에 묘사된 전사는 긴 사슬 갑옷을 입고 창, 검, 화살통, 활을 갖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알 타바리는 사산 왕조 후기 기사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전사는 투구(투구 뒤편에는 예비용 활시위 두 개가 달려 있었는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부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를 썼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사슬 갑옷, 흉갑, 팔 보호구, 허벅지 보호구, 정강이 보호구를 착용했다. 또한 검, 창, 올가미, (허리띠에 매단) 철퇴, 도끼, 화살 30개가 든 화살통, 활 두 자루가 담긴 활집을 갖추었으며, 이전 시대의 사바란 기병들과는 달리 방패도 사용했다. 방패는 근접전에서의 방어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투사체를 막아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기병 간의 전투에서는 검뿐만 아니라 도끼나 철퇴가 사용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튀르크계의 전쟁 방식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전쟁 방식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란 고원과 메소포타미아의 기병 전통 자체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고대 메디아-페르시아인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의 본래 이란계 민족들은 초기 아케메네스 왕조와 이후의 파르티아 왕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다시 그 전통을 사산 왕조에 전해주었다. 두 전통 사이의 주된 차이점은 페르시아에서 이러한 체계가 발전해 나간 방식에 있다. 갑옷 기술은 중앙아시아 및 로마와의 교류, 그리고 페르시아 내부의 독자적인 발전을 통해 진화했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중앙아시아와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반면, 비잔티움의 기병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 민족들과의 경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한편 중앙아시아는 그곳 고유의 풍부한 전통을 중국 및 페르시아의 전통과 결합했다.
전투 대형
일반적인 전투 전술은 군대를 다섯 개의 부대로 나누는 것이었다. 즉, 기병으로 구성된 주력 전열, 그 뒤를 받치는 중보병 증원 부대, 양 측익(주로 기병), 그리고 최정예 사바란 부대(기안-아브스파르 페슈메르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예비대가 그것이다.
주력 전열과 증원 부대는 중앙을 형성하며, 이를 ‘두 개의 핵심부’ 또는 ‘심장부’라고 불렀다. 이 핵심부들은 좌익과 우익 사이를 잇는 연결점 역할을 했다. 이 핵심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진형을 유지해야 했는데, 이는 큰 피해가 발생했을 때 어느 한쪽 측익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핵심부들을 경사면에 배치한 것은 적의 돌파 시도에 대해 더 강력한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중앙 부대는 항상 지대가 높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증원 부대 뒤편에는 예비대가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주로 자예단(불멸의 부대, Zhayedan)과 같은 정예 부대가 포함되었다. 사바란은 주로 우익에 배치되었으나, 지휘관의 전략에 따라 좌익에 배치되기도 했다.
이론적으로 사바란은 항상 최전방에서 싸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전술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기록은 앞서 언급한 사산 왕조의 전투 대형, 즉 우익·중앙·좌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체계와 일치한다. 또한 이 기록에는 “그들(사산 왕조군)은 각 부대의 기병들을 제1열과 제2열, 혹은 팔랑크스(밀집 대형) 형태로 배치하려 한다”는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전투 시 사산 왕조군과 로마군은 서로 상대의 좌익을 자신의 우익으로 공격하여 측면을 우회하려 했다. 암미아누스는 이에 대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는데, 사산 왕조군이 로마군의 좌익을 밀어붙인 뒤 포위망을 형성했던 전투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그들은 투사 무기와 창을 사용하여 공격했다.
좌익은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며, 극도로 위급한 상황에서만 전투에 개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좌익은 자신이 공격받을 위험이 임박했다고 판단될 경우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또한 좌익은 전략 예비대 역할도 겸했으나,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공격에 나설 수도 있었다. 설령 지휘관의 허락을 받아 공격을 수행하더라도, 좌익은 공격 후에는 다시 원래의 방어 위치로 복귀해야 했다.
상황에 따라 좌익의 반격은 지휘관의 판단하에 우익이나 중앙 부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좌익이 공격 임무에 선호되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중보병이 왼쪽에 방패를 들고 있을 경우 그 방향으로 효율적인 공격을 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고려하여, 좌익에는 오히려 더 강력한 병력과 왼손잡이 궁수들이 배치되었다. 왼손잡이 궁수들은 좌우 양쪽에서 모두 효과적으로 활을 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은 때때로 기존의 ‘우익 공격’ 원칙에서 벗어나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칼리니쿰 전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바란의 전략
사산 왕조의 군사 교리는 기병대를 전방, 즉 선봉에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초기 사산 왕조 전략의 상당 부분은 파르티아의 방식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이는 본래 유목민의 전통적인 초원 전쟁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장기병(카타프락토이)은 긴 창을 들고 적에게 육박해 들어갔고, 기마 궁수들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며 이들을 지원했다. 실제 전투에서 이러한 전략은 경무장한 궁수들을 동원한 치고 빠지기식 전술, 중장기병의 신속하고 강력한 돌격, 거짓 후퇴, 그리고 압도적인 궁술을 통해 적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방식 등을 포함했다.
또한 후퇴하는 척하던 기병이 갑자기 몸을 돌려 화살을 쏘는, 이른바 '파르티아식 사격'도 사산 왕조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 사산 왕조의 전술은 파르티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위협적이었다.
이러한 정교함이 잘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가 복합적인 3단계 공격인데,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훈련과 규율, 그리고 부대 간의 긴밀한 협동이 필요했다.
율리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350년 싱가라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은 먼저 사바란(정예 기병)을 앞세워 돌격시켰고, 그 뒤를 궁수 부대가 따랐으며, 다시 사바란 부대가 뒤이어 공격을 가했다. 뒤따르는 사바란 부대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궁수들은 기마 궁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첫 번째 파동으로 투입된 정예 기병대는 방어군이 창을 든 기병들에 맞서 대열을 정비하도록 강요했다. 방어군이 대열을 좁히며 밀집하게 되면, 뒤이어 나타난 기마 궁수들에게는 완벽한 표적이 되었고, 이들은 화살을 퍼부어 적의 방어선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약화된' 방어군은 뒤이어 들이닥치는 세 번째 파동, 즉 창을 든 사바란 부대의 공격에 더욱 취약해졌다. 이 전술의 효과는 '창 공격 - 원거리 사격 - 다시 창 공격'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공세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방어군이 어떤 대응책을 써야 할지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데 있었다.
암미아누스가 언급했듯이, 사산 왕조의 기병 부대는 매우 강력했으나 전투를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은 부족했다. 이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정예 기병대가 적진을 돌파하거나 적의 대열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충격 부대로 운용되었다는 견해를 부분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러한 특성은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침공 당시 유용하게 발휘되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게 있어 전투의 승패는 대개 '사바란'이라 불리는 기병대가 창을 앞세워 가하는 강력한 일격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이는 곧 그 공격의 핵심이자 힘이 집중되는 지점이 바로 최전방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사산 왕조군을 피해 달아나던 로마-비잔티움군에게 정면으로 반격하지 말라는 조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잘 정돈된 적의 대열에 부딪혀 큰 피해를 입을" 위험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3세기 후반에 이르러 로마 보병대는 방패를 서로 맞물려 하나의 거대한 벽을 형성함으로써 사산 왕조 기병대의 돌격 충격을 견뎌내는 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전술은 보병대가 제자리를 지키며 규율을 유지할 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549년 라지카에서 벌어진 전투가 그 사례인데, 당시 로마-비잔티움 기병대는 사산 왕조 기병대와 직접 교전하는 대신 말에서 내려 보병대와 합류했고, 이를 통해 사산 왕조 기병대의 돌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해 냈다.
로마-비잔티움군의 이러한 전술에 대응하여, 사산 왕조 페르시아 측도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가 『익명의 연대기(Chronicon Anonymum)』 제36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전술은 사바란이 (본대보다 앞서) 평소처럼 정면 돌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다 사바란이 로마군 방어선에 거의 도달할 무렵, 그들은 좌우 양익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면 사바란의 돌격 뒤를 따르던 중보병대가 적에게 접근하여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는 기병대와 싸울 것으로 예상했던 적군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 되었다.
지휘관
전투 중 왕이나 지휘관은 높은 곳에 위치했다. 그는 극도로 필요한 상황에서만 전투에 직접 개입했다. 『아인 나메(Ayin Nameh)』는 이러한 경우 지휘관이 전투를 하루가 끝날 때까지 이어가도록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지휘관 앞에는 왕권을 죽음으로 사수해야 하는 왕실 근위대가 배치되었다. 왕의 뒤편에는 왕실 군기(드라프쉬-에 카비아니, Drafsh-e-Kaviani)가 세워졌으며, 궁수와 보병들이 이를 호위했다. 사바란의 정예 부대(코스로게타이, Khosrogetae)는 대개 지휘관 근처에 배치되어 예비대로 대기했다. 이곳에서 지휘관은 전장을 더 잘 조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군과 측면 부대에 신속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마기(Magi,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항상 지휘관과 함께 전장에 나섰다. 나크쉬-에 로스탐의 암벽 부조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항복을 받는 샤푸르 왕의 뒤편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세를 한) 마기 한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식수 공급과 기후
사산 왕조군은 적군이 물 근처에 있더라도 그들이 물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는 목마른 적이 배불리 마신 적보다 훨씬 더 끈질기게 저항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군 진영은 가급적 물이 풍부하고 나무가 우거진, 은폐하기 좋은 곳에 설치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군대는 바람과 태양을 등지고 배치해야 했으며,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짐은 챙기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전술은 마우리키우스의 『스트라테기콘(Strategikon)』에서도 권장된 바 있다. 상황을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다면, 적에게 평원이나 저지대를 내주도록 했다. 『스트라테기콘』을 비롯한 여러 서구 역사학자들의 저술에는 사산 왕조군이 더운 날씨에 작전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잘못된 견해가 담겨 있다.
이는 이란의 기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란 내륙과 남부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등 인근 아랍 지역과 기후가 비슷하지만, 북부와 북서부의 많은 지역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포함하여 매우 ‘유럽적인’ 기후를 띠며, 울창한 숲도 형성되어 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혹독한 여름 더위나 겨울 추위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사산 왕조는 코카서스의 혹한 기후 속에서도 여러 차례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키타브 알 아인(Kitab al-Ayin)』에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전투를 벌이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겨울에는 매우 추울 때이고, 여름에는 매우 더울 때이다.”
선봉대, 정찰, 매복, 그리고 함정
선봉대는 평탄한 지형을 통과하여 고지대에 자리를 잡도록 했다. 정찰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정찰병들은 전투가 벌어질 지형을 사전에 면밀히 살폈다. 야간 기습에 대비하여, 눈에 띄지 않는 전략적 요충지에는 함정을 설치했다.
매복 작전 지침에는 강물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적인 소음을 이용해 아군이 접근하는 소리를 감추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한밤중이나 밤중 가장 어두운 시간을 골라 공격하는 것도 매복을 은폐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매복 작전 시에는 먼저 적의 중앙을 신속하게 타격하고, 곧이어 나머지 병력이 적의 잔여 부대를 포위하는 방식을 취했다. 작전 계획을 세우고 각 병사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는 일이 매우 강조되었다. 신속함과 정확성이 핵심이었으며,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은 함정으로 도랑을 활용하는 전술로도 유명했다. 528년, 타누리스 사막에서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사산 왕조군의 이러한 전략에 걸려 패배하고 말았다. 사산 왕조군은 참호 사이에 도랑을 파고 이를 교묘하게 숨겨두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전속력으로 페르시아군 진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자, 많은 병사가 숨겨진 함정에 빠졌고, 곧바로 사산 왕조군에게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병력은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전장에서 퇴각했다.
중앙아시아와 기동적 국경 방어
사산 왕조의 요새 체계가 일종의 ‘마지노선’식 사고방식을 낳았다는 견해가 있다. 코카서스 지역의 데르벤트 성벽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일지 모르나, 로마·아라비아·중앙아시아 국경을 따라 구축된 요새 체계는 방어와 공격을 아우르는 전략의 일부였다.
그 예로 대규모 군대를 수용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 도시였던 니시비스를 들 수 있는데, 이곳의 기능은 단순히 방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실 니시비스는 로마를 상대로 한 공격 작전을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는 중요한 전방 기지였다. 603년 호스로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감행했을 당시, 니시비스는 그의 군대가 집결한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5세기경에 이르면 중앙아시아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기존의 이란어 사용 주민 상당수가 투르크-훈족이나 투란 계통의 집단들로 대체되었다. 투란 방면 국경 방어는 3단계 체계로 이루어졌다. 이 전략은 우선 적이 제국 영토 내부로 진입하도록 허용한 뒤, 침입자들을 미리 설정해 둔 ‘섬멸 구역(kill zones)’으로 유인하는 방식이었다. 요새와 방어 시설들 사이에 갇힌 침입자들은 고립되고 말았다. 거점 자체는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그곳에 집결한 군대가 반격의 방향과 위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반격을 담당한 부대는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사바란(정예 기병대)’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밀려오는 투란의 위협에 맞서 정예 기병대가 집결하던 핵심 거점은 네브-샤푸르(니샤푸르)였다. 투르크족을 상대로 거둔 바흐람 초빈(Bahram Chobin)의 성공적인 공세 역시 바로 이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이 방어 체계는 '거짓 후퇴 후 반격'이라는 스텝(초원) 지역 기병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매우 중앙아시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산 왕조는 자신들의 뛰어난 요새 축조 기술을 스텝 지역에서 검증된 전쟁 방식과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이 체계는 침략자를 저지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사산 왕조가 영토 밖으로 공격을 감행할 경우를 대비해 병력을 집결시키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전투 경험, 병력 규모, 그리고 교대 운용
병사들이 숙련된 경우, 지휘관은 적이 먼저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반면 병사들이 미숙할 때는 선제공격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적 영토를 공격할 때는 적보다 3~4배 많은 병력을 확보하는 것이 권장되었고, 적 영토 내에서 방어할 때는 최소 1~1.5배의 병력 우위가 필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국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이러한 비율을 항상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군사 지침서에는 적이 제국 영토를 침공해 들어올 경우, 수적 열세 속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료들을 보면 전체 병력의 절반은 전방에서 싸우고 나머지 절반은 후방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전방 부대와 후방 부대가 교대하며 전투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병력은 주로 중보병과 궁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바란(정예 기병대)은 돌파 임무를 맡았으며, 피루제타이(Piroozetae)와 같은 정예 부대는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었다.
기마 궁술의 쇠퇴
피루자바드와 나크셰 로스탐의 암각화에는 창을 든 정예 기병대의 모습은 나타나지만, 전투 중 활을 사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근거로 사산 왕조가 집권할 무렵 페르시아에서 기마 궁술이 쇠퇴했거나 아예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 초기 군대는 파르티아 왕조의 모델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창을 들고 돌격하는 정예 기병대가 주축을 이루고, 기마 궁병대가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다만, 사산 왕조의 기마 궁병대는 이전 파르티아 왕조의 기마 궁병대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초기 기마 궁병대는 훨씬 더 조직적이었으며, 파르티아 시대와 달리 방어를 위해 사슬 갑옷을 착용했다.
서기 233년 크테시폰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휘하의 군대가 아르다시르에게 패배한 주된 원인은 정예 기병대의 거듭된 창 돌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돌격으로 로마 보병대는 더 작고 밀집된 대형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기마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치명적인 화살 세례를 퍼부을 수 있었다.
이는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서도 뒷받침되는데, 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이 “로마군을 마치 그물 속의 물고기처럼 가두어 놓고, 포위된 병사들을 향해 사방에서 화살을 쏘아 군대 전체를 몰살시켰다”고 기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스로와 벨리사리우스가 맞붙었던 전쟁 무렵(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는 활과 창을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복합적인 유형의 기병이 등장했다. 484년 페로즈 왕이 훈족을 상대로 겪은 참패와, 이후 투르크계 전사들과 치른 전투들은 활이 다시금 주요 전장 무기로 도입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활이나 투창으로 무장한 경기병의 경우, 제국은 동맹 보조 부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보급, 군수, 그리고 말 관리
원정 중인 군대에게 양질의 보급품을 제공하기 위한 정교한 보급 및 군수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 원정 기간 동안 병사들에게는 소고기, 우유, 빵이 충분하고 공정하게 배분되었으며, 전투가 있는 날에는 병사와 말 모두에게 더 많은 양이 지급되었다.
평시에는 무기와 장비가 지정된 보관소(암바라그, Ambaragh)와 병기창(간즈, Ganz)에 보관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이곳에서 무기를 꺼내 분배하는 일은 ‘보관소 책임자’인 ‘에이란-암바라그바드(Eiran-Ambaraghbad)’가 담당했다.
사바란(기병대)이 운용하는 말들의 건강과 활력은 ‘스토르-베자슈크(Stor-Bezashk)’의 책임하에 있었다. 그는 약초에 정통한 말 전문 수의사였다. 스토르-베자슈크는 원정이 시작되기 전, 기병들에게 건강한 말을 확실히 공급해야 했다.
전투 손실 파악
전투로 인한 손실을 파악하기 위해 화살을 사용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 전해지는 신화적 궁술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 전, 왕 앞에서 열린 군사 점검 때 각 전사는 왕실의 커다란 바구니에 화살을 하나씩 넣었다. 이후 바구니는 왕실의 인장으로 봉인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봉인을 풀고 각 병사가 바구니에서 화살을 하나씩 회수했는데, 바구니에 남아 있는 화살의 수는 곧 전투로 인한 손실을 의미했다. 왕은 지휘관들과 함께 전투의 대가를 평가하고 분석했다. 북부 이란의 스키타이인들도 인구수를 추산할 때 이와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다.
징집 및 인력 문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보유한 인력과 자원은 로마 제국의 절반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질의 인력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이는 켈트족, 게르만족, 발칸 반도 및 아나톨리아 출신의 강인한 정착민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로마 제국이나 이후의 비잔티움 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400년대 초 무렵,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로 인해 페르시아는 더 이상 방대한 이란계 인력 자원을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 사산 왕조는 다수의 지원군, 보조군, 동맹군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으나, 이들의 군사적 역량은 정예 부대인 '사바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사산 왕조의 군대는 주로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정예 기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578년 당시 사산 왕조의 전문 전사 총병력은 7만 명이었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다른 전선들에서 끊임없이 위협이 발생했기 때문에, 가용 자원을 모두 한 전선에 집중시킬 수 없었다. 사산 왕조는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병대를 운용할 수 있었지만, 병력 규모가 작았던 탓에 전투에서 큰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이를 보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약점
사산 왕조의 전투 대형에는 세 가지 주요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파이간'을 비롯한 다수의 보조 병력들이 근접전을 꺼렸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바란의 가장 큰 강점인 '정면 돌격'에서 비롯된 약점이었다. 강력한 정면 돌격에는 대가가 따랐는데, 사바란은 전술적으로 측면과 후면이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 그리고 어쩌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휘관이 전사하면 병사들이 전장을 이탈해 도망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전투 중의 사바란
샤푸르 1세 대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그리고 발레리아누스
일부 로마 측 사료의 과장되고 승리감에 도취한 어조, 그리고 당시 역사가들의 다소 편향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계의 연구와 1차 사료 및 기타 증거들을 살펴보면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로마와 대등한 수준의 적수였음이 드러난다.
아르다시르가 호르미즈다간 전투에서 파르티아를 타도한 것은 로마에게 페르시아에서 새롭고 강력한 왕조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에 대응하여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재위 222~235년)는 231~233년에 이 새로운 제국을 공격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르다시르의 아들 샤푸르 1세가 241년 왕위에 오르자, 로마는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이 새로운 위협을 분쇄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재위 238~244년)는 샤푸르의 제국을 공격하여 243년에는 초기 승리를 거두었고, 244년에는 크테시폰 북쪽의 미시케(오늘날의 안바르)까지 진격했다.
양측 군대는 이곳에서 격돌했고, 로마군은 패배했다. 고르디아누스가 샤푸르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는지, 아니면 그 이후 자신의 부하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필리푸스 아라부스(재위 244~249년)가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즉시 샤푸르와 평화 협정을 맺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샤푸르는 이를 구실로 다시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샤푸르는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군대를 진격시켜 바르발리소스(기원후 253년경)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번에는 6만~7만 명 규모의 대규모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 패배로 인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두라 에우로포스가 256년경 함락되었다.
로마는 군사적 패배를 설욕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샤푸르와 신흥 사산 왕조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 마지막 원정은 발레리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년)가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행했다.
초기에는 발레리아누스가 성공을 거두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을 안티오키아에서 몰아냈다(기원후 256년경). 이에 대응하여 샤푸르 1세는 에데사와 하란(카르하이)을 포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발레리아누스는 그곳으로 이동하여 샤푸르와 맞서야 했다. 샤푸르는 로마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는데(기원후 260년경), 이는 다음과 같은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가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우리에게 들이닥쳤으나… 우리는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를 직접 사로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근위대장, 원로원 의원들, 장군들, 그리고 그 군대의 모든 장교를 포로로 잡아… 아리아 제국(사산 왕조 페르시아)으로 끌고 왔다…”
고르디아누스 3세나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아누스가 겪은 이 참사는 아마도 로마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패배 중 하나였을 것이다. 황제가 측근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은 로마 제국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로마는 이러한 패배들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비문들에 근거해 추산해보면, 로마는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발레리아누스 시대에 발생한 모든 손실을 포함하여) 거의 1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3세기 로마군의 규모가 35만 명 이상이었다는 휘트비의 분석을 고려하면, 이는 실로 재앙적인 수준이었다.
또한 로마는 서부 및 북부 국경에서 유럽(즉, 고트족)의 위협에 대응하는 데 필수적인 전문 직업 군인들 상당수를 잃고 말았다. 샤푸르 1세는 내키지 않아 하던 로마인들에게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로마와 대등한 제국의 군주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미시케, 바르발리소스, 카르하이-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 기병대가 구사한 전술에 관해서는 1차 사료를 통한 상세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다.
다만 샤푸르 1세의 비문에는 “로마 제국 전역과 고트 및 게르만 왕국들에서 군대를 모아 ‘아리안 제국(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맞서 진격해 왔다……”는 흥미로운 단서가 남아 있다. 로마가 게르만족 보조병을 기용한 이유는, 그들이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사르마티아인들을 상대로 겪었던 중기병 전투 경험—기병용 갑옷 착용이나 창을 이용한 전투 방식 등—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가 고트족 병력을 동원한 것은 사바란의 전투력을 상쇄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고트족 기병대를 활용한 것은 사실상 “재앙”으로 끝났는데, 이는 사바란이 창을 이용한 전투와 기동 전술에서 고트족을 압도했음을 시사한다. 당시 페르시아의 갑옷은 사슬 갑옷, 찰갑, 판갑이 결합된 형태였으며, 고트족 전사들이 착용했던 사르마티아식 갑옷보다 더 뛰어난 방어력을 제공했다. 샤푸르와의 전쟁 당시 로마군 주력은 보병이었다.
강인하고 규율이 잘 잡힌 로마 보병대가 왜 사바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는 파르티아인 및 사르마티아인들과의 전투를 통해 이란식 기병 전술을 충분히 경험한 상태였다. 이란의 중기병과 기마 궁수들이 가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는 기존 전술을 수정하여 이란식 전술에 익숙한 기병, 궁수, 중보병으로 구성된 보조 부대를 편입시켰다.
이는 사산 왕조의 전술과 무기 체계가 전임자인 파르티아 왕조의 것보다 더 정교했으며, 당시 로마인들이 이에 익숙하지 않았음을 시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사산 왕조 정예 기병대의 갑옷과 관련하여 특히 두드러졌을 것이다. 로마군 전투 대형의 일부였던 로마 궁병들은 돌격해 오는 사산 왕조 기병대를 향해 당연히 화살을 퍼부었을 것이다. 서기 224년의 파르티아군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화살이 사산 왕조의 갑옷에 거의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으로 무장하고 돌격하는 기병들은 대형을 유지한 채 로마군 방어선까지 온전히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기마 궁병(및 보병 궁병)들 또한 화살을 쏟아부어 로마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반복적인 창 돌격과 집중적인 사격으로 로마군의 방어선이 약화되자, 사산 왕조의 정규 중장보병들이 잘 훈련된 로마 보병들과 근접전을 벌일 기회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로루아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주된 전술적 오류가 로마군을 잘 훈련된 사바란이 그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한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왜 사바란의 이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카르하이와 에데사의 탁 트인 평원에 군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는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마르쿠스 크라수스가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를 거의 그대로 반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샤푸르가 로마의 최정예 군단들을 상대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나 페르시아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팔미라의 군대는 제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팔미라인들은 이란식 복장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기병대 또한 사산 왕조와 유사하게 중장기병을 운용하고 창을 이용한 전투 기술을 구사했다. 오데나투스는 서기 260~261년경 시리아에서 샤푸르의 보급 부대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사산 왕조군을 페르시아 본토로 밀어냈다.
사산 왕조를 상대로 거둔 팔미라의 성공은 당대 로마인들, 그리고 일부 서구 및 아랍 역사학자들에 의해 과장되었다. 오데나투스는 사산 왕조의 군사 체계를 파괴하거나 그들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지 못했으며,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구출하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산 왕조는 팔미라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서기 265년까지 이어진 군사 작전에서도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로마의 정예 야전군을 상대로 거둔 압도적인 승리들에 비하면 사소한 좌절에 불과했다. 미시케, 바르발리소스, 그리고 카르하이-에데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창으로 무장하고 돌격하는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 '사바란'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로마 측 사료들이 (발레리아누스 관련 내용을 제외하면) 이러한 패배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로마인들이 "정보 보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로마는 다시 일어섰으며, 이러한 패배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재위 337~361년)는 ‘페르시아식’ 로마 중기병을 편성할 때 사바란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사용한 사슬 갑옷과 판금 갑옷은 피루자바드 및 나크셰 로스탐 유적에서 확인되는 기사들의 갑옷과 거의 동일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는 로마 기병대를 사산 왕조의 사바란을 본떠 재편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코바드라는 지휘관이 이끄는 페르시아 탈영병 기병대는 아르메니아계 비잔티움 장군 나르세스의 군대에 받아들여졌으며, 프로코피우스는 6세기 비잔티움 제국을 위해 복무하던 이란계 기병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샤푸르 2세 대 배교자 율리아누스 (서기 363년)
샤푸르 2세는 율리아누스(재위 361~363년)에게 왕좌와 제국을 거의 잃을 뻔했다. 361년 로마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곧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로마의 전통적인 이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로마의 동부 국경에 대한 위협, 즉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제거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 362년, 율리아누스는 기동 부대와 국경 수비대로 구성된 6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고, 초기 작전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황제는 3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동쪽 크테시폰을 향해 진격했다.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율리아누스의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무려 1천 척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선박이 건조되었다.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나머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향했다. 이론상 프로코피우스는 아르메니아군과 합류하여, 샤푸르가 율리아누스의 후방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계획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군대를 나누지 않는 편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율리아누스는 프로코피우스와 적절한 협조 및 소통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로마에 재앙을 초래했다.
율리아누스 전략의 또 다른 근본적인 결함은 사산 왕조군이 크테시폰 앞에서 전군을 동원해 결전을 벌일 것이며, 그들이 패배하면 크테시폰도 함락될 것이라고 가정한 점이었다.
크테시폰 앞에서의 격전은 율리아누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패배한 페르시아군은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도시 안으로 철수해 버렸다. 크테시폰은 함락시키기에는 너무 견고했고, 사산 왕조의 핵심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의 주력은 수도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율리아누스는 '적의 군대를 격멸하고 적의 수도는 피하라'는 고전적인 전쟁의 격언을 어긴 셈이었다.
샤푸르 2세는 최정예 부대를 예비대로 남겨두고, 장군들과 함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도 로마군을 타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초중장갑 기병대인 사바란은 충격 부대, 즉 현대의 '전차 부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로마군의 장비와 사기에 최대한 큰 타격을 입히는 임무를 맡았다. 로마군의 저항이 거세지면 기병대는 곧바로 후퇴했다.
율리아누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크테시폰을 공격하여 방어선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바란 군대를 소탕할 것인가, 아니면 크테시폰을 포기하고 샤푸르와 그의 사바란 군대를 찾아 섬멸할 것인가.
이때까지 율리아누스는 패배를 겪지 않았고 그의 군대는 온전한 상태였다. 장군들과 회의를 마친 율리아누스는 샤푸르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기 위해 동쪽으로 페르시아 진군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유프라테스 강에 있던 배들은 페르시아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파괴되었다.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심장부로 진군했을 때, 프로코피우스 군대의 부재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1,450여 년 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처럼, 율리아누스는 적군이 초토화 작전을 펼치는 것을 발견했다.
샤푸르는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면 대결을 벌이려 하지는 않았다. 크테시폰 앞에서의 전투를 통해 샤푸르는 로마군이 정면 승부로 격파하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잘 훈련된 군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페르시아의 방어는 전적으로 사바란의 행동에 달려 있었다. 사바란은 창을 앞세우고 로마군 대열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향해 돌격했다. 이 공격 대형은 중앙에 초중장갑 기병을 배치하고, 그 양옆에 일반 사바란을 배치하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 무거운 갑옷을 입은 동료들과 달리, 이 일반 사바란들은 활을 휴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바란이 이러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로마군의 궁술이 사산 왕조의 창기병들을 저지하거나 그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로마군의 사기를 꺾었을 또 다른 요인은 사산 왕조가 동원한 전투 코끼리였다. 이 코끼리들 역시 사바란과 연계하여 ‘충격’ 돌격에 활용되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 시대에 코끼리를 접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수 세기 전의 일이었기에 율리아누스 시대의 로마 군단병들에게 코끼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였다. 중장갑 기병과 함께 투입된 코끼리들은 사산 왕조 기병대의 습격에 확실히 더 큰 위력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 역시, 로마 보병과의 근접전은 최대한 피하는 분위기였다. 로마군은 근접전에서 매우 위협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바란의 돌격에 대응하는 기발한 방법까지 찾아냈기 때문이다. 매우 효과적인 전술 중 하나는 사바란이 아군 대열에 접근해 오면 곧바로 그들의 말 아래로 파고들어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말의 배 부분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반 사바란들은 교전을 중단하고 물러나 원거리에서 활을 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초중장갑 사바란들은 지원 세력을 잃게 되었고, 로마 군단병들과의 정면 대결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363년 6월 22일, 마랑가에서 마침내 율리아누스가 원하던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군은 사바란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초승달 모양의 대형을 취했다. 사바란은 중앙에 배치되었고, 그 양옆에는 갑옷을 입은 기마 궁수들이 지원군으로 자리 잡았다. 코끼리들은 후방에 배치되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궁술은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궁수들에게 최대한 빠르게 돌격함으로써 그들이 쏘는 화살의 위력을 상쇄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과거 크라수스도 카르하이 전투에서 같은 전술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율리아누스가 거둔 성공은 그가 상대한 사산 왕조의 궁수들이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보병 궁수들에게는 로마 보병의 돌격 앞에서 기병처럼 신속하게 후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중장갑 기마 궁수들을 어떻게 제압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로마군의 예상보다 빠른 돌격으로 인해 그들의 말이 통제를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산 왕조의 창기병들을 어떻게 저지했는지 또한 분명하지 않다. 로마 보병의 돌격 속도가 매우 빨랐던 탓에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근접전 상황에 휘말리면, 정예 기병대라 할지라도 효과적인 창 돌격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속 거리'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사산 왕조군을 근접전으로 끌어들인 전술 덕분에 로마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큰 대가를 치른 승리)'에 불과했다. 사산 왕조 군대의 주력은 온전히 보존되었고,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철수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군은 보급품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발생한 사상자를 보충할 방법도 없었다.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사산 왕조의 군사 체계를 파괴해야 했으며, 이를 달성하려면 사바란을 격파해야 했다. 그러나 마랑가 전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사바란은 건재한 상태로 남아 로마군을 자유자재로, 사방에서 괴롭힐 수 있었다. 이는 로마군 행렬이 "전방, 후방, 측면" 등 여러 방향에서 공격받았다는 기록이나, "사방에서 적이 로마 병사들을 공격했다... 페르시아인들이 로마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기록(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IV.29)을 통해 뒷받침된다.
이러한 로마군의 실패에 관한 언급들은 암미아누스의 기록과는 상충한다. 이러한 작전의 일환으로, 중장갑 기마 궁수들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고는 곧바로 후퇴하는 방식으로 로마군 전열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창으로 무장한 아랍 경기병대 일부도 샤푸르의 군대에 합류하여 지원을 제공했다.
그 결과, 로마군은 페르시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약해져 갔다. 샤푸르의 장군들은 잇따른 전투와 습격이 로마군의 전력을 소진시키고 약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로마군이 사바란(정예 기병대)의 공격에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마랑가 전투 나흘 후, 율리아누스는 사마라를 향해 진격했다. 사바르 부대는 기다리고 있다가 창을 쥐고 다시 공격해 왔다. 그들의 공격은 로마군의 우익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저지되었지만, 로마군 우익은 패배했다. 이 위기 때문에 율리아누스는 어리석게도 갑옷도 입지 않은 채 그곳에 나타났다. 사산 왕조의 창기병대가 돌격해 오자, 율리아누스는 창에 맞아 그날 사망했다. 누가 창을 던졌는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사산 왕조의 병사였는지, 아니면 율리아누스 진영의 불만을 품은 기독교인이었는지 말이다. 그 직후, 요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은 샤푸르의 강요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니시비스와 같은 전략적 도시들을 로마에 넘겨주는 대신 페르시아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로마의 패배는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군대의 핵심 주력인 사바르 부대를 먼저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샤푸르는 로마군의 종대들을 반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면 대결에서 로마군을 완전히 격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소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보병대는 공격해오는 사산 왕조 기병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혀서 그들을 쫓아냈지만, 달아나는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로마 기병대 역시 페르시아 사바르 부대의 공격으로부터 아군 보병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기병대가 전투에 뛰어들면 사산 왕조 기병대는 곧바로 후퇴해 버렸다.
칼리니쿰 전투(서기 531년): 아자레테스 대 벨리사리우스
서기 531년, 벨리사리우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코마게네 지역(현재의 튀르키예 북동부)으로 진격했으며, 시리아까지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페르시아군이 페르시아 본토로 철수하여 비잔티움군을 함정으로 유인하기 전에 칼리니쿰 인근에서 그들과 교전을 벌이도록 강제했다.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 1만 명은 아자레테스가 지휘했으며, 알 문디르가 이끄는 5천 명의 아랍 라크미드족 동맹 기병대도 함께했다. 이에 맞선 벨리사리우스의 2만 명 병력은 비잔티움군과 보조군으로 구성된 보병과 기병의 혼성 부대였다.
양군은 유프라테스 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전장에 대치했다. 지형은 서쪽으로 갈수록 높아졌는데, 바로 이곳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사산 왕조는 사바란의 정예 병력을 아자레테스와 함께 중앙에 배치했고, 진지 앞에는 참호를 팠다.
벨리사리우스는 아자레테스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예 기병대를 중앙에 배치했다. 그는 맨 오른쪽 측면에 5천 명의 아랍 가산족 기병대를 배치하여 아자레테스 측의 라크미드족 동맹군을 상대하게 했다. 가산족 기병대 옆에는 리카오니아(프리기아 고원 지대 출신) 보병대가 자리 잡았는데, 이들은 가산족 기병대와 더불어 벨리사리우스 방어선에서 취약한 고리가 되었다. 리카오니아 보병대 옆에는 아스칸이 이끄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그 왼쪽에는 심마스와 수니카스가 지휘하는 강력한 훈족 부대가 섰다. 유프라테스 강과 맞닿은 측면, 즉 벨리사리우스의 좌익은 강인한 비잔티움 보병대가 방어했다.
전투는 대규모 궁술 대결로 시작되었다. 사산 왕조군은 뛰어난 궁술 실력에 더해, 화살의 위력과 추진력을 높여주는 바람 방향까지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이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설상가상으로 페르시아군의 궁술은 더 빨랐고, 이는 곧 더 많은 화살이 쏟아졌음을 의미했다. 뒤이어 훈족을 상대로 중앙아시아식 기병 결투가 벌어졌는데, 이는 로마군의 주의를 분산시켜 아자레테스의 진짜 의도를 가리는 역할을 했다.
아자레테스는 사바란 중에서도 최정예 부대를 알 문디르 옆인 좌익으로 이동시켜 배치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우익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알 문디르 휘하의 사산 왕조식 기병대는 가산 왕조 측 기병대를 순식간에 격파했고, 그 옆에 있던 사바란 부대는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리카오니아 보병대와 아스칸의 기병대는 페르시아 최정예 전사들에게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용감히 맞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스칸과 그의 부대는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리카오니아군 병사들은 대열이 무너진 채 유프라테스 강을 향해 도망쳤고, 극히 일부만이 힘없이 짧은 저항을 시도했을 뿐이었다.
비잔티움군과 동맹 훈족 보병대는 사산 왕조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즉시 남은 병력에게 90도 방향을 전환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등지도록 명령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바란 부대는 벨리사리우스의 남은 비잔티움군을 계속해서 유린했을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보병대를 밀집 대형으로 배치해 사바란 부대에 맞서게 함으로써 전멸의 위기를 막아냈다. 앞줄의 비잔티움 보병들은 방패를 서로 맞물려 연결했고, 그 뒤편의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때까지 사산 왕조군은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것으로 보이나,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남아 있던 로마 보병대는 자리를 지키며 버텼다. 사바란(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할 때, 비잔티움 궁병들은 그들의 공격 대형을 흩뜨리기 위해 화살을 쏟아붓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훈련받고 규율 잡힌 보병 궁수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바란은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화살의 벽을 향해 돌격하게 되었다. 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다.
만약 사산 왕조군이 이 전투에 보병 궁수들을 배치했더라면, 사바란이 입은 피해 중 일부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산 왕조 기병대의 거듭된 돌격은 벨리사리우스의 최후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실패했고, 덕분에 벨리사리우스는 살아남은 보병들을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로코피오스는 벨리사리우스가 사바란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주장하지만, 자카리아스는 이와 상반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로마군은 “페르시아군의 공격 앞에서 돌아서서 도망쳤다. 많은 이들이 유프라테스강에 빠져 익사했고, 나머지는 살해당했다.” 이것이 벨리사리우스가 내린 ‘90도 회전’ 명령 이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자레테스의 승리는 성공적이기는 했으나 그 대가가 컸으며, 카바드 왕(재위 499~531년)에게 바칠 만한 전리품도 거의 없었다.
한편 동로마 정부는 자국 군대가 사산 왕조 군대에 패배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결과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페로즈 시대의 훈족(에프탈) 전쟁 (서기 484년)
서기 5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는 페르시아의 동족들과 언어적·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이란계 유목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4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훈족, 그리고 뒤이어 돌궐(투르크)계 민족들이 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알타이계 민족이었던 이들은 결국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돌궐 및 훈족과 벌인 전쟁들은 피르다우시의 서사시 『샤나메』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전쟁들의 역사적 기록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기록들은 당시 벌어진 일련의 처절하고 유혈이 낭자했던 전투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쟁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성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이전까지 이란어권이었던 중앙아시아 지역, 나아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동부 영토까지 아우르는 훈족 및 돌궐계 민족의 거대한 세력 확장 과정의 일부였다.
훈족의 첫 페르시아 침공은 코카서스를 거쳐 메소포타미아까지 이르렀으나, 서기 395년 사산 왕조 군대가 이들을 격퇴했다. 470년대 중반에 이르자 페르시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페로즈 왕(재위 서기 457/9~484년)은 에프탈 훈족과 여러 차례 참혹한 전투를 치렀고, 484년 그들과 싸우던 중 전사했다. 이로 인해 제국은 멸망 직전의 위기를 맞이했다.
에프탈 훈족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기마 궁술'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성공의 핵심 요소는 등자의 사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등자는 기마 궁수들에게 더 안정적인 발판을 제공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무거운 창으로 무장하고 돌격하던 사산 왕조의 기병대 '사바란'은 훈족의 더 정확하고 강력한 궁술 공격으로 인해 대열의 결속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개별 사바란 기병들은 부대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빠르고 민첩한 기마 궁수들이 이들을 고립시킨 뒤 원거리 공격으로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마 궁수들도 근접전에서는 중갑을 두른 창기병에게 취약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리함은 유연하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예측하기 어려운 빠른 움직임, 거짓 후퇴,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쏘는 사격(파르티안 샷)과 같은 전통적인 기마 궁술 전술을 통해 상쇄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산 왕조의 창기병들은 명확하고 고정된 공격 목표를 설정하기 어려웠기에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기마 궁수들은 거리를 유지하며 흩어졌다가, 곧바로 사바란(사산 왕조의 중장기병)의 측면과 후방에서 신속하게 다시 대형을 갖추곤 했다. 이란인들은 오랫동안 로마인들을 상대로 이러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해 왔는데, 이제는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전술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사산 왕조 초기 페르시아에서 기마 궁술은 기술적 발전 측면에서 정체 상태에 있었다. 중장갑을 갖춘 사바란들은 중앙아시아의 전장에서 혹독한 현실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투르크-훈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산 왕조는 초중장기병을 보다 복합적이고 다재다능한 형태의 기병으로 변화시켰다. 갑옷은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무기 체계에도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로즈 왕의 죽음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바흐람 초빈은 에프탈족에게 당했던 굴욕을 설욕했다.
바흐람 초빈(서기 588년)과 슴바트 바그라투니(서기 619년)에 의한 훈족과 돌궐족의 격퇴
: 호스로 1세는 서돌궐 칸국과 동맹을 맺고 기원후 558년경 에프탈을 격파했다. 옥수스강 북쪽 지역은 돌궐의 차지가 되었고, 남쪽 지역은 사산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580년대 초, 중앙아시아의 돌궐족은 실크로드를 통한 사산 왕조의 수익원을 방해하기 시작했으며, 북동쪽에서 사산 제국을 위협했다. 588년, 돌궐의 봉신이 된 에프탈족이 다시 한번 제국을 공격했다.
사산 왕조의 군부는 신속히 군사 회의를 열었고, (오늘날 테헤란 인근) 레이 지역 미흐란 가문 출신의 뛰어난 장군 바흐람 초빈을 에프탈 및 돌궐족과의 전투를 지휘할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샤흐바지에 따르면, 바흐람의 군대에는 ‘엄선된’ 1만 2천 명의 사바란이 배치되었다. 바흐람과 사바란 부대는 네브샤푸르(Nev-Shapur)에서 출발하여 서돌궐 및 그들의 봉신인 에프탈족과 교전했고, 588년 4월 이들을 격파한 뒤 발흐 시를 점령했다.
589년에는 헤라트 인근에서 돌궐군이 다시 한번 패배했다. 이후 바흐람의 군대는 옥수스강을 건너 동돌궐을 정복했으며,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바흐람이 쏜 화살에 동돌궐의 카간이 사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약 30년 후, 돌궐-에프탈 연합군은 호스로 2세와 헤라클레이오스 황제 사이의 치열한 전쟁으로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전세를 뒤집으려 시도했다. 샤르바라즈(Shahrbaraz)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던 619년, 그들은 제국을 공격했다.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바그라투니는 2천 명의 아르메니아 사바란을 이끌고 사산 왕조 군대를 지휘하여 동쪽에서 밀려온 이 새로운 위협에 맞섰다.
첫 번째 전투는 투스(Tus)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바그라투니가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사산 왕조의 왕자 다토얀(Datoyan)이 이끄는 300명 규모의 소수 병력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불분명하나, 투르크족과 훈족은 북방의 카간(돌궐의 군주들 중 한 명)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카간은 30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군대는 곧 다토얀의 부대를 제압하고 라이를 거쳐 이스파한에 이르는 동부 영토까지 휩쓸었다. 약탈과 습격을 마친 투르크족과 훈족은 일단 철수했다. 바그라투니는 사산 왕조의 동부군을 신속히 재정비하여 투르크족과 훈족을 격파했으며, 직접 벌인 백병전에서 그들의 지도자를 살해했다. 지도자의 죽음은 투르크족의 사기를 꺾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투르크군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도주했다. 사바란 기병대와 그들의 아르메니아 동맹군은 즉시 추격에 나서, 도망치던 투르크족과 훈족 다수를 격퇴했다. 바흐람 초빈과 바그라투니의 이러한 활약은 아랍인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페르시아의 북동부 국경 지대를 효과적으로 안정시켰다.
바흐람과 바그라투니가 거둔 성공은 창과 활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새롭고 기동성이 뛰어난 복합형 기병의 등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중앙아시아식 전투 방식과 장비가 반영되어 있었다. 기존 사바란의 초중장갑 기병과는 달리, 이 복합형 기병은 중앙아시아의 기마 부대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판자가간(Panjagan)'은 아마도 이러한 국경 지대에서의 전투를 위해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좁은 표적 지역에 화살을 연속적으로 빠르게 퍼붓는 전술은, 중앙아시아 기병들이 자랑하던 뛰어난 기량과 기동성을 크게 무력화할 수 있었다.
승리와 비극, 서기 603~628년: 호스로 2세의 전쟁
호스로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재위 582~602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는 호스로 2세에게 군대를 지원해주었고, 이를 통해 호스로 2세는 왕위를 찬탈했던 바흐람 초빈을 몰아낼 수 있었다. 호스로 2세는 590년 또는 591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호스로 2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상당한 영토를 양보했다. 602년 포카스에 의해 마우리키우스가 암살당하자,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로 삼아 과거 비잔티움 제국에 할양했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603년, 사산 왕조군은 비잔티움 제국을 성공적으로 공격했으며, 61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을 사실상 완전히 몰아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내전이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로 인해 사산 왕조군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604년부터는 수수께끼 같은 장군 파로칸, 일명 '샤르바라즈(제국의 멧돼지)'가 사산 왕조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샤힌 장군은 테오도시우폴리스에서 비잔티움군을 격파하고 611년까지 아르메니아를 장악했으며,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이아까지 점령했다.
613년, 황제 헤라클레이오스와 그의 형제 테오도로스, 그리고 또 다른 비잔티움 장군 니케타스가 힘을 합쳐 샤르바라즈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리아에서 샤르바라즈에게 패배했고,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를 빼앗기고 말았다. 헤라클레이오스는 북쪽의 '킬리키아 관문'으로 후퇴했으나, 뒤쫓아온 샤르바라즈에게 다시 한번 패배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고, 킬리키아 지역은 함락되었다.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둘로 나뉘게 되었다.
614년, 샤르바라즈는 다시 한번 비잔티움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 '진정한 십자가(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가 탈취되어 사산 왕조의 본토로 보내졌다. 헤라클레이오스의 정교하게 장식된 갑옷 또한 노획되어 크테시폰으로 보내졌으며, 637년 아랍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보관되었다. 이집트는 619년에 함락되었다.
샤힌은 614년 크테시폰에서 출진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케돈(615년), 사르디스(616년), 그리고 앙키라(오늘날의 앙카라, 622년)까지 진격했다. 617년에는 페르시아 함대가 살라미스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로도스섬은 622년 해군 공격을 받아 실제로 함락되었다.
사산 왕조가 제1단계와 제2단계에서 거둔 성공은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바흐람이 돌궐을 상대로 거둔 승리 덕분에 위험했던 북동부 국경 지대가 대체로 평정되었다. 이를 통해 사산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국경에 대규모의 정예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 간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619년에 돌궐이 다시 공격을 재개했으나, 그들은 바그라투니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호스로와 그의 참모진은 단일 전선에 강력한 병력을 집중함으로써 전략적 균형을 영구적으로 페르시아에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비잔티움군은 사바란(사산 왕조의 기병대)의 강력한 정면 돌격을 피하거나 막아낼 적절한 대응책을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트라테기콘(Strategikon)』에 따르면, 사바란의 정면 돌격은 그 앞쪽이 가장 강력하고 위험하지만, 측면과 후면은 취약할 수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사산 왕조는 자신들의 정면 돌격에 대한 비잔티움군의 대응책을 파악하고, 이를 무력화할 방법을 찾아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 호스로 2세가 바흐람에 맞섰을 때, 사산 왕조의 왕실군과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보낸 비잔티움군 부대가 함께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때 비잔티움군이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구사하는 전술을 더 면밀히 연구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사바란은 더 빠른 속도와 높은 결속력을 바탕으로 정면 돌격 전술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측면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622년 7월, 헤라클리우스는 아르메니아에 도착하여 이번 전쟁에서 비잔티움 제국 측의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전략적 상황을 완전히 뒤바꾼 것은 아니었으나, 비잔티움군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샤흐르바라즈와 샤흐라플라칸 장군은 샤힌이 이끄는 제3의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헤라클리우스를 격파하고자 힘을 합쳤다. 곧 벌어질 결정적인 전투는 호스로의 야망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풀이 무성한 평원에 진을 치고, 숲이 우거진 언덕에 자신의 군대를 매복시켰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군은 언덕에서 쏟아져 나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기습했다.
비잔티움군은 사산 왕조의 정예 기병대인 '사바란'의 취약점을 성공적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산 왕조군이 앞으로 돌격해 들어올 때, 매복해 있던 비잔티움 기병대가 사바란 선봉대가 지나쳐 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의 측면을 강타하고 일부 부대는 후방까지 공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샤흐라플라칸은 등 뒤에서 날아온 칼에 맞아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샤흐르바라즈는 살아남아 이후 다시 전투에 나섰고, 새로운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호스로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헤라클리우스와 화친을 맺고 627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전쟁 잔여 기간 동안 사산 왕조의 중요하고도 위협적인 군대 하나가 전장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샤힌과 라주티스의 군대가 괴멸되면서, 헤라클리우스의 페르시아 본토 진격을 막을 사산 왕조의 군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샤힌은 황제의 동생인 테오도루스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의 상세한 내용이나 당시 사바란의 역할은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예기치 않게 ‘우박 폭풍’이 쏟아져 내려 야만인(페르시아군) 다수를 쓰러뜨렸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사바란의 결정적인 돌격이, 정면을 피하고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라는 『스트라테기콘』의 지침에 따라 성공적으로 격퇴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627년에서 628년 사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반격은 투르크계 하자르족의 지원을 받아 코카서스 알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페르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자르족은 이후 철수했다. 라주티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는 전멸했다. 이 패배로 다스티게르드 궁전과 시즈의 화염 신전이 함락되었다. 호스로는 궁정 쿠데타로 폐위되었고, 630년 6월 보란 공주가 왕위에 올라 헤라클레스와 공식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비잔틴 제국의 성공은 전술적,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헤라클레스의 뛰어난 지휘력, 특히 산산조각 난 비잔틴 군대의 전력과 사기를 재건한 그의 능력은 전장 전술의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비잔틴군은 사바르 부대의 돌격에 대한 "대응책"으로 적의 취약한
측면과 후방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개발했을 수도 있다. 훈련과 연습은 강도 높았고, 민간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년간 이어진 전쟁과 그 뒤를 이은 헤라클레이오스의 승리는 비잔티움 제국에 매우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가브리엘과 부스는 비잔티움군이 입은 손실이 무려 2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러한 손실의 대부분은 602년에서 622년 사이의 초기 포위전과 재난적인 전투들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막대한 피해로 인해 비잔티움의 승리는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큰 대가를 치른 승리)'가 되고 말았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역시 그에 못지않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는데, 특히 627년 샤힌이 이끄는 군대와 628년 라주티스가 이끄는 군대가 비잔티움의 대규모 반격으로 패배했을 때 그 피해는 극심했다. 이러한 손실은 양 제국의 군사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고, 그 결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랍의 침공을 허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일부 서구 및 이란 역사학자들은 잘 인정하지 않지만, 비잔티움과 사산 왕조를 격파한 아랍 장군들은 매우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아랍인들이 비잔티움이나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유연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전쟁 지휘 체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동료들의 제안을 경청하고 의견을 구하던 습관은 이슬람 군사 체계에 세 가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권한 위임으로, 이를 통해 전투가 한창인 상황에서 군사 지휘관들은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복종의 원칙이 강조되기는 했으나, 군대가 불필요한 위험에 처할 경우 명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둘째, 군사 지휘관은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Umma)' 구성원들의 협의를 통해 선출될 수 있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공동 지휘 체계인 '타사누드(Tasanud)'가 운용되기도 했다. 이는 군사적 공을 세운 인물들이 비잔티움이나 사산 왕조와 같은 보수적인 제국들보다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갈 기회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셋째, 전문성이 매우 높게 평가받고 존중받았다. 그 예로 627년 메카군이 메디나를 포위했을 때, 예언자 무함마드는 페르시아 출신 살만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슬림들로 하여금 참호를 파게 했고, 그 참호 안에서 공격자들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했다.
더구나 호스로 2세는 602년에 라크미드 왕조의 왕 누만을 폐위시키고 해당 왕조를 해체하는 중대한 전략적 실책을 범했다. 강인하고 잘 훈련된 이 아랍 전사들 대신, 이야스 이븐 카비사라는 또 다른 아랍인이 사산 왕조의 관리와 함께 임명되었다. 이로써 아라비아 사막에서 몰려올 미래의 이슬람 군대에 맞설 효과적인 아랍 동맹 완충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샤푸르 2세가 건설한 '칸다크 샤푸르'(유프라테스강의 히트에서 현대의 바스라 인근 지역까지 이어지는 운하)는 그 이후로 보수, 유지, 강화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라크 남부의 방어 체계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호스로 2세와 헤라클리우스 황제 사이의 참혹한 전쟁 이후, 사산 왕조가 훈련된 전문 인력을 보충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비잔티움 제국과 마찬가지로, 사산 왕조 역시 그 전쟁들을 치르는 과정에서 숙련된 베테랑 병사들을 다수 잃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최종적인 대가는 카디시야 전투(637년)와 니하완드 전투(641년)라는 결정적인 전투들에서 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야즈데게르드 3세(재위 632~651년)는 저항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동쪽 호라산 지역으로 피신했으나, 651년 메르브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사산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예술, 부, 지식, 통치 체계를 아우르는 사산 왕조의 문명은 우마이야 칼리파국으로 흡수되었다.
햄블린은 사산 왕조의 군사 이론과 관습이 후대 이슬람 군대에 미친 영향이 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때때로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사산 왕조의 군대는 매우 높게 평가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에 합류한 이들은 종종 아랍 병사들보다 더 많은 급료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는 다일람 출신 보병대와 사바란(기병대)이 모두 포함되었다.
사산 왕조의 방대한 고품질 무기들이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고, 이는 무슬림의 정복 활동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알 타바리는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이라는 인물을 인용하는데, 그는 페르시아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자신의 군대에게 분배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아랍인들은 스페인의 고트족과 근동의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거둔 압도적인 승리, 그리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일람인들의 고향인 북부 페르시아를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들어선 아바스 왕조는 771년부터 약 100년 동안만 이 지역을 점유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독립적인 지역 왕조가 권력을 잡았다. 이 왕조는 88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사파르 왕조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사산 왕조 문화의 여러 측면과 '사바란(기사 계급)'의 전통은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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