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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4YeKUS9XNQ&t=4s
A: 대셀주크 제국(11세기 후반~12세기 초반)
A1: 북 치는 사람(고수)
셀주크군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 군대에서 전투용 북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북을 치는 사람들의 복장이 특별히 구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갑옷을 입지 않은 이 인물은 펠트 모자와 두꺼운 모직 코트를 걸친, 튀르크-이란 양식의 간소한 복장을 하고 있다.
A2: 투르크멘 지도자
이 인물은 투르키스탄 유목 지역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로 새로 유입된 이들을 대변한다. 그가 쓴 투구는 여러 조각을 직접 리벳으로 고정해 만들었으며, 복부 앞쪽만을 가리는 가벼운 형태의 가죽제 라멜라(판갑) 흉갑을 착용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들은 이교도 시절 튀르크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바탕으로 재현되었다.
A3: 서부 이란 출신의 굴람(Ghulam)
노예 출신의 전문 전사인 이 인물은 셀주크군 내의 '굴람'들과 부족 단위의 '투르크멘' 전사들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당시 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장비로 중무장하고 있는데, 장식이 들어간 일체형 투구, 얼굴까지 가리는 사슬 갑옷 두건, 그리고 비늘 갑옷과 라멜라 갑옷의 중간 형태인 철제 흉갑을 착용하고 있다.
B: 파티마 왕조 (12세기)
B1: 자르와자라야(Jarwajaraya) 보병
자원병인 이 인물은 간소한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복장 또한 일반 민간인의 것과 같다. 이러한 자원병들 중 다수는 칼조차 휴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든 투창 중 하나는 갑옷을 꿰뚫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이 분명하며, 방패는 바닥이 평평하고 길쭉한 '자누와리야(januwariyah)' 형태다.
B2: 아랍 기병
아스칼란(Asqalan) 수비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이 갑옷 입은 기병은 파티마 왕조의 전사들과 남유럽 전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잘 보여준다. 그의 방패와 각반은 비잔틴 양식과 매우 흡사하며, 장식된 허리띠는 오랫동안 이어진 투르크족의 영향을 나타낸다. 말 머리에 씌운 가죽제 마면갑(馬面甲)은 방어보다는 장식적인 목적이 더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B3: 시브얀 알 리캅(Sibyan al-Rikab)
'통치자의 등자 곁에 있는 젊은이'라는 뜻의 명칭을 가진 이 화려한 복장의 병사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최측근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중동에서 오랫동안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양산을 들고 있는데, 이는 파티마 왕조의 행렬에서 사용된 양산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바탕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자수가 놓인 튜닉 아래에 사슬 갑옷(메일 하우버크)을 입고 있으며, 터번 아래에는 샤그린(상어 가죽)으로 덮인 아벤테일(투구에 달린 사슬 가리개)이 부착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C: 아타베그 시대(12세기~13세기 초)
C1: 수비대 보병
이 인물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유사성을 잘 보여주는데, 그의 장비 대부분이 이웃한 비잔티움 제국의 것과 흡사하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긴 스카프는 여러 시각 자료에서 확인되며, 이는 터번을 풀어헤친 형태일 가능성이 있다. 틀에 고정된 대형 쇠뇌인 '지야르(ziyar)'는 화염병(불이 담긴 항아리)을 발사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C2: 부족 출신 기마 궁수
말에서 내린 이 투르크계(투르코만) 전사는 사슬 갑옷(메일 하우버크) 위에 전형적인 투르크식 겹여밈 코트를 입고 있다. 모피를 덧댄 그의 모자는 전사 귀족 계급을 상징한다. 그가 사용하는 활에는 짧은 화살(다트)을 쏘기 위한 '마즈라(majra, 화살 유도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관련 그림 자료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묘사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C3: 굴람(노예 전사) 기병
갑옷 아래에 착용한 이 전사의 복장은 기본적으로 투르크계(투르코만) 전사와 같은 투르크-이란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가 쓴 일체형 철제 투구는 채색되어 있으며, 금박을 입힌 가죽 목 가리개가 달려 있다. 그가 착용한 가죽제 라멜라(비늘 모양 갑옷) 흉갑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지만, 그는 동물 머리 장식이 달린 철제 메이스와 굽은 형태의 사브르를 모두 휴대하고 있다. 안장 아래에는 더 무거운 직검(곧은 칼날의 검)도 꽂혀 있다.
D: 아이유브 왕조(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
D1: 살라딘
이 위대한 무슬림 지도자는 노란색 모자, 흰색 숄, 사슬 갑옷으로 된 두건(mail coif), 그리고 사슬 갑옷을 안감으로 댄 '카잔드(kazaghand)'를 착용한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카잔드는 겉보기에는 일반 의복과 비슷하지만, 암살자의 칼날로부터 몸을 은밀하게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 배경에는 이른바 '아랍식' 투석기(망고넬)가 보인다.
D2: 타와시(Tawashi) 기병
아이유브 왕조 군대 중 일부는 근접전을 위해 중무장한 기병으로 편성되었다. 이 기병이 쓴 투구는 유럽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슬 갑옷으로 된 목 가리개(aventail)는 비단으로 덮여 있으며, 사슬 갑옷(hauberk) 위에는 비교적 큰 철제 판갑(lamellar cuirass)을 착용하고 있다. 말에게는 두 겹의 펠트로 만든 마갑(bard)을 씌워 화살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D3: 근위병
동방 이슬람 왕궁 수비대의 의례는 이란식과 이후 유입된 튀르크식 양식이 혼합된 형태를 띠며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양식은 아이유브 왕조가 집권한 이후 이집트로도 전파되었다. 이 남성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지만, 그가 쓴 머리쓰개는 일종의 투구였을지도 모른다.
E: 룸의 셀주크 왕조 (13세기)
El: 아나톨리아 보병
이 남자는 아마도 그리스 출신일 것이다. 그의 갑옷은 비잔틴 양식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양식은 발칸 반도와 남부 러시아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엉덩이를 보호하는 부분이 연장된 그의 사슬 갑옷은 원래 기병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양날 창은 이란식 후핀이다.
1S2: 기마 궁수
이 전사는 아마도 동부 아나톨리아 투르크멘 부족의 장비가 더 잘 갖춰진 귀족 출신일 것이다. 그의 무기는 코카서스 부족과 북쪽의 페체네그 부족의 영향을 모두 보여준다. 이러한 부족 전사들은 대부분 사슬 갑옷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아다.
1S3: 굴람 중기병
이 기병은 비잔틴 양식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비잔틴 지역 자체는 당시 셀주크 왕조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의 높은 방패는 분명 서양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가죽 갑옷은 순전히 터키 양식이다. 그의 높고 여러 부분으로 나뉜 투구는 중앙아시아 양식이다.
F: 호라즘 왕조와 아바스 왕조 (13세기)
F1: 베두인 전사
아랍 부족민들은 이란이나 튀르크 양식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어구로는 단순한 사슬 갑옷(메일 하우버크)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긴 창과 어깨띠(발드릭)에 매단 검이 가장 일반적인 무기였다.
F2: 이라크 보병
아랍계로 추정되는 이 전사는 몽골군에게 패배했을 당시 회수한 아바스 왕조의 깃발 두 개를 들고 있다. 그는 사슬 갑옷 위에 짧은 킬트를 걸치고 있으며, 어깨에는 보급품이 담긴 가방을 메고 있다.
F3: 호라즘 왕조 기병
트란스옥시아나(중앙아시아 북부) 출신의 기병들은 이슬람권 동부에서 가장 중무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사는 중앙아시아 양식의 경첩 달린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부착된 투구를 쓰고 있으며, 사슬 갑옷과 더불어 경화 가죽으로 만든 타셋(허벅지 보호대)이 달린 대형 철제 라멜라(비늘형) 흉갑을 착용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검은 이란식 직선형이며, 말 또한 철제 마면갑(말의 얼굴 보호구)과 가죽 마갑으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다.
G: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 (13세기)
G1: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보병
13세기 무렵, 소(小) 아르메니아 왕국은 사실상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으며, 그곳의 전사들은 서구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인물의 경우, 약간 휜 세이버(sabre)만이 그를 동시대 유럽인들과 구별 짓는 요소이다.
G2: 조지아의 기마 궁수
조지아는 오랫동안 이란과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왔으나, 13세기에는 튀르크 양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무슬림 이웃들과 사실상 구별하기 어려운, 가볍게 무장한 기마병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G3: 무슬림 농민
중동 지역 아랍 농민들의 복장은 오늘날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다만 기본적인 튜닉 형태인 '디시다샤(dishdashah)'의 길이에만 다소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H: 맘루크 왕조 (13세기 후반~14세기 초반)
H1: 맘루크 기마 궁수 (하급)
훈련 중이라 갑옷을 입지 않은 이 젊은 전사는, 경무장한 산병(skirmisher)으로서 원정에 나설 때도 이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실전에서는 겉옷 아래에 사슬 갑옷(mail)을 착용했을 것이다. 그가 멘 화살통 측면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마즈라(majra, 화살 유도 장치)'를 사용하여 쏘는 짧은 화살을 넣기 위한 용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H2: 맘루크 중기병
맘루크 군대의 중무장 정예병은 몽골 및 동방 이슬람 양식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는 이 인물이 착용한 무거운 라멜라(lamellar, 비늘 모양 판을 엮어 만든) 흉갑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부 회화 자료에는 (여기 묘사된 것처럼) 챙이 늘어진 펠트 모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유럽식 '샤펠 드 페르(chapel-de-fer, 챙이 넓은 철모)'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 인물의 각반에 새겨진 맘루크 가문 문장(heraldic device)을 주목하라.
H3: 몽골인 투항자
여러 겹을 덧댄 펠트 코트는 몽골인들이 가장 흔히 착용하던 방어구였으나, 이 인물은 비늘 모양의 갑옷(찰갑)도 함께 걸치고 있다. 갈고리 모양의 창끝은 이들 민족만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둥근 펜던트 형태의 귀 보호구 역시 전형적인 몽골식 장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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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을 침략했던 후대의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제1차 십자군 역시 무슬림 세력이 극도로 취약해진 시점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공격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튀르크족이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이후, 룸 셀주크(아나톨리아 지역)는 오늘날 튀르키예의 중심부에서 아직 완전히 기반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이라크와 이란을 중심으로 했던 대(大)셀주크 제국은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으며, 이미 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일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곳에서는 튀르크족,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족, 아랍인 영주들이 도시와 성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사막 지대와 유프라테스 계곡에서는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독립을 유지한 채, 비옥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역시 쇠퇴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이슬람 세계 전체를 정복하려던 파티마 왕조의 야망은, 시아파 칼리프들의 손에서 더 현실적인 감정관(재상)들의 손으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사실상 포기된 상태였다. 당시 이 지위는 아르메니아계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련의 내전과 정치적 격변 이후 카이로의 질서를 재확립한 뒤, 홍해와 시리아 해안의 무역항들을 장악함으로써 이집트의 상업적 부를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미래에 있을지 모를 튀르크족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적 완충 지대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은 다시는 재현되지 않았으며, 이후의 십자군 원정들은 제1차 십자군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는 무슬림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단결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좌절도 있었지만, 결국 2세기 후에는 십자군이 중동에서 완전히 축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중동 내 무슬림 국가들의 군사화가 진행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가 강화되었으며, 이전 시대의 특징이었던 비무슬림 소수 집단에 대한 관용 정신이 안타깝게도 쇠퇴했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들의 원인을 어느 정도까지 십자군 전쟁 탓으로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유럽의 위협에 맞서는 과정에서 형성된 결속력과 힘은, 이후 맘루크 왕조가 13세기 말 몽골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군사 체계를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는 훗날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더욱 성공적으로 모방되었다.
룸(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왕조
기독교 침략자들과 맞선 최초의 무슬림 군대는 룸의 셀주크 왕조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이 아나톨리아 투르크족은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육로를 차단하여 십자군 국가들의 대규모 증원군을 차단했다.
이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셀주크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멘 유목민 부족 전체를 데려왔고, 이들은 무슬림 세계 내에서 새롭고 자급자족적인 민족 집단을 형성했다. 이 부족민들은 초기 셀주크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전술적 효율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화살은 장거리 사거리뿐만 아니라 단거리에서도 뛰어난 관통력을 자랑했다. 후대의 유럽 장궁과는 달리, 투르크식 복합궁은 화살의 무게보다는 더 강력하고 일정한 장력에 의존하여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셀주크 왕조의 새로운 곡선형 복합궁은 12세기 동안 대부분의 무슬림 지역에서 기존의 각진 형태의 복합궁을 점차 대체했다.
이후 셀주크 왕조 군대에서는 부족 출신 전사보다는 전문 전사들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궁술은 여러 면에서 다르고 더욱 다양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병사들은 구역 사격, 즉 성 내부와 같은 지정된 구역 안에 화살을 떨어뜨리는 훈련을 받았다. 또한 모든 관찰자는 그들의 사격 속도를 기록했다.
1세기 후반과 12세기 셀주크 궁술의 또 다른 특징은 고속의 짧은 화살을 쏘는 나와크(nawak) 또는 마즈라(majra) 화살 유도 장치를 널리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1차 십자군에 참가한 저자가 작성한 문헌인 <게스타 프랑코룸>에 기록된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사용된 '다트'였을 것이다.
기마 궁술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 자체로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투르크족이 패배하거나 포위되었을 때처럼, 최후의 돌격과 근접전이 일반적으로 필요했다. 이때는 활을 버리고 철퇴, 검, 창을 사용했다.
제1차 십자군이 중동에 도착했을 무렵, 유목민 투르크멘 부족들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란의 대(大)셀주크 술탄들에 의해 대부분 국경 지대로 밀려나 있었다.
룸(아나톨리아)과 타우루스 산맥을 포함하는 이러한 지역에서, 그들은 '가지(ghazi)'로서 자신들의 전투적 에너지를 계속 발휘했다.
'가지'란 이슬람의 지배를 유지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싸우는 국경 지대 전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중앙 정부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활동했으며, 18~19세기 미국 개척 시대의 사람들처럼 끊임없는 습격과 보복 습격을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룸 셀주크 왕조와 그들의 경쟁자인 동부 아나톨리아의 다니슈멘드 왕조가 세운 국가들은 본래 투르크멘 '가지'들의 영토였다. 그러나 곧 룸 셀주크는 대셀주크 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왕조를 세웠는데, 이는 이란의 친족 왕조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룸 셀주크는 투르크멘인들을 자신들과 비잔티움 제국 영토 사이의 불안정한 국경 지대로 밀어내는 한편, 다른 중동 국가들과 유사한 형태의 직업 군대를 구축해 나갔다. 이후 룸 셀주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군대를 운용했는데, 그중 하나는 '구군(Old Army)'이라 불렸다. 이는 사실 전통적인 혹은 초기 형태의 군대로, 투르크멘 부족 출신의 '전사 목동들'과 노예 출신의 직업 군인인 '굴람(ghulam)'이라는 두 주요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중동 국가들의 군대와는 달리, 룸 셀주크에서는 12세기 내내 투르크멘인들이 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용맹하고 숙련된 전사들이었으나, 규율이 부족하고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의 부대는 부족 단위로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개별 전사들은 자신의 부족장(베그, beg)으로부터 전리품이나 금전으로 보상을 받았다. 반면 부족장들은 술탄으로부터 직접 선물이나 대가를 받을 것을 기대했다.
'굴람'들은 통치자의 상설 군대를 구성했으며, 이전 시대의 이슬람 '굴람' 부대와 마찬가지로 주로 노예를 사들이거나 전쟁 포로를 징집하여 충원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후퇴함에 따라 아나톨리아에는 이러한 인력 자원이 자연스럽게 풍부해졌는데, 특히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인 12세기 후반에는 그리스인 '굴람(ghulam)'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궁정 굴람들로 구성된 소규모 정예 부대는 통치자의 경호원이자 신뢰받는 측근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반적인 '굴라만-이 하스(ghulaman-i khass)'들은 통치자 혹은 고위 군사 지도자, 왕자, 장군들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12세기 말 무렵, 이들의 수는 최대 1만 명가량에 달했다.
군대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훨씬 더 다양했으며, 12세기에는 그 중요성이 다소 낮았다. 여기에는 튀르크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혼혈 후손들로 구성된 '이크디쉬(igdish)' 부대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이크디쉬바시(igdishbashi)'의 지휘 아래 주요 도시에서 일종의 경찰력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 밖에도 용병, 지역 민병대,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 붕괴 이후 셀주크 측으로 전향한 비잔티움 군사 귀족의 잔당들이 있었다. 비티니아나 기타 산악 국경 지대에서 게릴라전과 공성전에 능숙했던 보병들은 아마도 적극적으로 영입되었을 것이다.
그리스인 용병이나 조지아인 용병들도 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일부는 무거운 투창을 사용하는 보병이었고, 또 다른 이들은 튀르크식 활과 올가미로 무장한 기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갑옷을 입고 창과 검으로 무장한 기병이었으며, 이들은 이란인, 쿠르드인, 아랍인 등 주변 중동 민족들과 동일한 군사 전통에 따라 전투에 임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그 뒤를 이어 룸 셀주크(Saljuqs of Rum)와 기독교 이웃 세력들 사이에 비교적 고정된 국경선이 형성되면서, 서유럽 출신의 기병과 보병들이 셀주크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시리아나 이집트에서 무슬림 통치자를 위해 싸웠던 유럽인들과 달리, 이들은 같은 기독교인들로부터 '배교자'나 '변절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들 중에는 십자군 전쟁 포로들(무슬림 세력 간의 전쟁 중에 시리아의 감옥에서 풀려난 이들이 많았다)과 이탈리아 출신 석궁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셀주크 왕조와 아타베그(Atabegs)
이란과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거주하던 튀르크멘족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멘족보다 훨씬 짧은 기간 동안 군사적 우위를 누렸다. 대(大)셀주크 제국의 거대한 영토는 십자군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셀주크 왕조는 12세기 말까지 이란과 이라크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으나, 대부분의 영토는 뒤를 이은 여러 왕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들 후계 왕조는 대체로 셀주크의 군사 전통을 계승했다. 즉, 군대를 '굴람(ghulam)'으로 구성된 전문 직업 군인 집단인 '아스카르(askar)'와 용병들, 그리고 주로 튀르크멘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단위의 보조 병력으로 나누어 운용했다. 이러한 체계 하에서 '아스카르'는 기병과 보병, 주둔군, 그리고 통치자 개인 경호대로 구성된 소규모 상비군 역할을 했으며, 보조 병력은 특정 군사 작전이 있을 때만 소집되었다.
11세기 후반 또는 12세기 초 셀주크 시대의 장비를 가장 잘 묘사한 자료는 로맨스 작품인 『와르카와 굴샤(Warqa wa Gulshah)』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기류로는 투창, 창, 검, 활, 철퇴, 올가미 등이 있다. 갑옷은 비교적 무거운 편으로, 투구와 (투구 아래에 착용하는) 머리·목 보호구, 그리고 몸 전체를 감싸는 사슬 갑옷(하우버크)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르크멘 부족 방식의 장기적인 치고 빠지기(hit-and-run) 전술을 유지하려면 전사 한 명당 아마도 다섯 마리의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반면, 굴람(ghulam) 전술은 더 적은 수의 말을 필요로 했고, 말 한 마리가 감당해야 할 부담도 적었기에 더 무거운 갑옷을 입은 전사를 태울 수 있었다. 이로써 굴람은 투르크멘 전사보다 더 다재다능한 전사가 되었으며, 건조한 지역에서 장거리 원정을 수행할 때 보급에 대한 부담도 훨씬 적었다. 굴람들은 물론 이동 중에도 활을 쏠 수 있었지만, 보통은 말을 멈춰 세우고 규율 있게 대열을 갖춘 상태에서 사격했다.
충분히 훈련된 굴람은 2.5초 만에 최대 다섯 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고, 곧바로 화살통에서 다시 다섯 발을 꺼내 쏠 수 있었다. 따라서 시속 35km로 돌격해 오는 적 기병은 돌격의 마지막 30야드(약 27미터) 구간에서 다섯 발의 화살을 마주하게 되었다. 숙련도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훈련을 받은 굴람이라면 같은 시간 동안 한두 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을 것이다(참고로 아쟁쿠르 전투 당시 영국의 장궁병은 분당 12회 정도 사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기술을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훈련과 뛰어난 신체 능력이 필요했다. 물론 굴람에게는 창, 검, 혹은 철퇴(mace)를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도 요구되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자유민 출신의 전문 전사들보다 노예 출신의 전문 전사들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일단 이들 굴람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친위대'가 되고 나면 훈련을 소홀히 하기 일쑤였고, 결국 십자군이 돌격해 올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튀르크족의 화살은 적당한 거리에서도 당시의 갑옷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기에,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그들이 패배한 가장 분명한 이유는 사격 속도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붕괴해 가던 대셀주크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여러 아타베그(atabeg, '고위 장교'를 뜻함) 국가들 가운데, 12~13세기 시리아와 자지라 지역을 다스린 장기 왕조가 아마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사에서 이마드 앗딘 장기나 누르 앗딘 마흐무드 같은 인물들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장기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전 시대의 통치자들보다 더 제한된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해야 했다. 다마스쿠스와 디야르바크르 지역을 통치했던 부리 왕조와 아르투크 왕조의 통치자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군대 구성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1126년, 다마스쿠스에서 파견된 군대는 기병 한 명당 보병 한 명을 말 뒤쪽에 태우고 전장으로 향하는, 과거 아바스 왕조 시대의 전술을 사용했다. 수십 년 후 누르 앗 딘의 군대는 주로 투르크멘족과 쿠르드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기마 궁수와 창을 든 기병의 역할을 맡았으며, 여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훈련받은 굴람(ghulam, 노예 병사)들이 더해졌다.
또한 아랍 베두인족 출신의 보조 기병들도 다수 징집되었다. 1120년대 중반 알레포 지역으로 유입된 야루키(Yaruqi) 부족과 같은 많은 투르크멘족 역시 일종의 보조 병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투르크멘 부족은 이슬람 세계 내에 거주하고는 있었으나, 이슬람 문명권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부족 관습에 기반한 '야사(yasa)'라는 독자적인 법 체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누르 앗 딘이 자신의 군사 엘리트들에게 이슬람법을 따르도록 강제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투르크멘족이 군사적인 측면에서조차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자연스럽게 기여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소규모 군대(아스카르)에서도 투르크멘족 특유의 전술 일부가 계속 유지되었다. 유목민의 기마 궁술을 구사하도록 훈련받지 못한 정규군을 상대할 때, 그들은 적을 끊임없이 괴롭혀 대열을 완전히 무너뜨린 뒤 결정적인 돌격으로 전투를 마무리하곤 했다. 장기 왕조를 비롯한 여러 세력은 십자군을 상대로 이러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물론 그들은 잘 정비된 대열을 갖추고 정면으로 맞붙는 회전이나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또 다른 전술적 변화로는 적대 지역을 행군할 때 기병을 보병 뒤가 아닌 앞쪽에 배치하는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투르크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타베그 정권하의 기병 장비에 관해서는, 당시 문헌 자료들이 아랍식(혹은 쿠르드식)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문헌에는 활보다는 검, 터번, 투구, 창에 대한 언급이 더 자주 등장한다. 12세기 초중반, 샤이자르(Shayzar)와 같이 아랍인이 주도하던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면모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샤이자르 성을 중심으로 서술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h ibn Munqidh)는 기병의 장비로 '칼라간드(kalaghand, 천을 덧대고 패딩을 넣은 사슬 갑옷)', 무거운 투구, 검, 창, 그리고 크고 둥근 방패를 열거했다. 특히 창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었는데, 그는 창을 이용한 인상적인 공격 사례들을 서술하는 데 여러 페이지를 할애했다. 우사마는 기병들이 창으로 무장한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검만 가진 기병들은 창을 든 적과 교전하기를 꺼렸다고 적었다. 또한 그는 유럽식 '겨드랑이에 끼고 찌르는 창술'에 대해 무슬림들도 알고는 있었으나, 널리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언급했다.
같은 시기, 십자군에 맞선 무슬림 국가들 사이에서 보병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유럽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투르크멘족 기마 궁수들이 아나톨리아나 다른 북부 국경 지대로 물러나면서, 과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이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자지라 지역의 장기 왕조는 다수의 보병 궁수, 쇠뇌병, 공성 기술자, 나프타 투척병(naffatin), 그리고 긴 방패와 창 또는 장창으로 무장한 중보병을 운용했다.
공성전에 특화된 병력 중에서는 이란 북동부 출신의 호라산인들과 알레포 출신 병사들이 특히 유명했다. 누르 앗 딘(Nur al-Din)이 적과 평원에서 정면 대결을 벌일 때, 보병들은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기병대와 협력하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사마의 회고록에는 검, 커다란 원형 방패, 무거운 창, 나프타 수류탄, 단검으로 무장하고 사슬 갑옷과 투구(종종 얼굴을 보호하는 사슬 가리개가 달린 형태)를 착용한 보병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병력은 당시 해당 지역의 거의 모든 군대에서 운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보수를 받는 전사들 모두가 무슬림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누구를 위해서든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시리아의 누르 앗 딘(Nur al-Din), 샤이자르(Shayzar)의 문키드 가문(Munqidhites), 십자군 국가들, 파티마 왕조 치하의 이집트, 그리고 룸 셀주크(Saljuqs of Rum) 왕조 등을 위해 복무했다. 그들의 장비에는 이러한 다양한 고용주들의 영향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비잔티움 양식과 초기 이슬람 양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검, 철퇴, 창, 그리고 무엇보다 투창(javelin)이 그들이 선호하는 무기였으며, 이는 특히 아르메니아인 기병들에게서 두드러졌다.
누르 앗 딘의 군대는 전형적인 아타베그(atabeg) 군대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젊은 누르 앗 딘이 알레포(Aleppo)만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통치자의 직속 부대인 '아스카르(askar)'의 규모가 1,000명 정도였으나, 그의 통치 말기에는 3,000명까지 늘어났다. 당시에는 여기에 더해 지역 군대에서 동원된 1만 명에서 1만 5천 명가량의 전사들이 합류할 수 있었다.
아스카르는 70~200명 단위의 '툴브(tulb, 부대)'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무거운 무기들은 정부의 '자르드카나(zardkhanah, 병기창)'에 보관되어 있다가 원정이 시작될 때만 지급되었다. 많은 지역 병력은 '이크타(iqta, 봉토)'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보유자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디완 알 자이시(diwan al-jaysh, 군무부)'를 통해 정부의 재량에 따라 부여되거나 회수될 수 있었다. 튀르크족이나 쿠르드족 출신의 다른 전문 기병들은 급료를 받았으며, 최소한의 장비와 말, 운송용 노새나 낙타, 그리고 종자(squire)를 갖추고 참전해야 했다. 전문 보병들 역시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군수 보급 부대인 '아틀랍 알 미라(atlab al-mira)'는 신뢰할 수 있는 '아미르(amir, 장교)'가 책임지고 관리했다. 다만, 일반적으로 병사들은 스스로 필요한 것을 해결해야 했으며,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동식 시장인 '수크 알 아스카르(suq al-askar)'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이들을 도왔다. 그 밖에도 종교 지도자, 교사, 판사, 서기, 통역관, 외과의사 등이 군대를 따라 이동했다. 부족 단위의 보조 기병대 외에도, 비정규군에는 종교적 열정에 고취된 '무타위아(muttawi'ah, 단기 자원병)'와 상시 복무하는 '가지(ghazi, 성전 전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누르 앗 딘(Nur al Din) 군대의 전술은 대셀주크 제국군의 전술과 유사했으나, 일반적으로 더 신중한 편이었다. 이는 충분히 훈련된 굴람(ghulam, 전문 직업 군인)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활을 쏘며 교전하는 방식을 자주 활용했기 때문이다.
행군 시에는 정찰병들이 본대 앞을 가로막듯 배치되어 경계망을 형성했다. 그 뒤를 선발대가 따랐는데, 이들은 적절한 야영지를 찾는 임무도 함께 수행했다.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대는 대개 주력 부대보다 앞서 이동했고, 가축 떼는 그 뒤를 따랐다. 후위대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는 하루에 약 30km를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야영지는 지휘관의 텐트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되었다. 야영지 주변에는 참호를 파거나,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뾰족한 가시가 달린 '마름쇠(crow's feet)'를 뿌려두었다. '야자크(yazak)'라 불리는 전초 부대가 더 바깥쪽에 배치되었으며, 근처에 적이 있을 경우 '카라리야(karariyah, 충격 부대)'가 해당 방향에서 즉각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기본 체계는 살라딘(Saladin)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은 모든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발전되었다.
후기 파티마 왕조
11세기 후반과 12세기, 파티마 왕조 군대의 규모는 비교적 작게 유지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영토를 상실하고 셀주크 제국의 정복 활동으로 동방 지역에서의 병력 충원이 막히면서, 가용 군사 인력이 심각하게 감소했다. 아르메니아인과 흑인 아프리카 노예의 징집을 늘리거나, 도시 민병대인 '아흐다스(ahdath)'를 장려하고 이집트의 노동 부대인 '하왈라(hawwalah)'를 군사화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파티마 왕조가 해군력에 크게 의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병력 부족이었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그들은 잘 무장된 소규모 병력을 비교적 신속하게 위협받는 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대(大)셀주크 제국과 달리, 파티마 제국은 긴 해안선을 가진 지역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권력을 장악할 당시, 셀주크 제국의 '아스카르(askar, 정예 군대)'에 해당하는 파티마 왕조의 궁정 부대는 아르메니아인과 수단인들로 구성된 3만~5만 명 규모였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파티마 왕조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10세기에도, 모든 주둔지의 상비군을 합쳐 5만 명을 넘지는 않았다. 대규모 원정대의 경우, 약 1만 명의 정규군과 수천 명의 보조 병력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000년경의 보다 신뢰할 만한 기록에 따르면, 칼리파의 개인 경호대에는 은으로 장식된 무기를 든 300명의 흑인 노예가 있었고, 최고 재상(와지르)을 수행하는 500명가량의 중무장 전사들이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약 4,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이 따랐다고 한다. 이 병사들은 카이로에서 열린 중요한 행진에 참여했는데, 아마도 이들이 궁정 부대의 주축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작은 규모의 부대들이 주요 도시와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파티마 왕조의 군대에는 항상 높은 비율의 보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 시 이들은 출신 민족별로 배치되었으며, 중무장한 병사들이 최전열에 섰다. 방어 시에는 방패벽을 형성하고 창을 장창처럼 사용했으며, 궁수와 투창병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공격 시에는 보병대가 집단으로 전진하거나 전열의 일부 부대를 앞으로 내보냈고, 기병대는 이러한 움직임의 측면을 엄호했다.
다시 말해, 파티마 왕조의 전술은 튀르크족 유입 이전의 초기 무슬림 군대 전술과 유사했다. 그들의 장비 또한 전통적인 형태였는데, 크고 둥근 방패나 연 모양의 평평한 방패를 비롯하여 투창, 활, 검, 장창, 그리고 후대 유럽의 글레이브나 빌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자루 달린 무기들로 구성되었다.
이란 북부 출신의 데일람(Daylam) 보병대는 오랫동안 파티마 왕조를 위해 복무했다. 이들은 양쪽 끝이 뾰족한 투창인 '주핀(zhupin)', 전투용 도끼, 그리고 길쭉한 연 모양의 '타리카(tariqah)' 방패를 사용했다. 일부는 화염 수류탄을 던지는 병사로 운용되기도 했으며, 12세기경에는 이들의 지휘관들이 튀르크-이란 양식이 가미된 굽은 검을 휴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민 출신이든 노예 출신이든, 흑인 아프리카계 병사들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의 충성심과 인상적인 외양은 파티마 왕조가 (이전의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경호 부대로 선택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1099년 아스칼란(Asqalan) 외곽에서 십자군과 마주친, 피부색이 어두운 보병 궁수와 투창병들이 수단 출신 노예 병사였는지, 아니면 누비아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용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 전사의 고향에서 전해지는 정보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커다란 가죽 방패와 단창, 투창, 혹은 긴 창으로 무장했으며, 보호용 의복(아마도 누비옷 형태였을 것)을 착용했다. 홍해와 가깝거나 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지역 출신들 중에는 단순한 형태의 장궁을 사용하는 궁수들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이집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1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자, 군사 귀족 계층을 포함한 다수의 군인이 이집트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보병 궁수 부대로 잘 알려진 중요한 군사 집단을 형성했다.
1074년, 무슬림으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 바드르 알 자말리(Badr al-Jamali)가 재상의 지위에 오르면서 더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이집트로 이주해 왔다. 이러한 이주는 제1차 십자군이 도착했을 당시 재상이었던 바드르 알 자말리의 아들, 알 아프달에 의해서도 장려되었다. 그 후 12세기 초, 십자군이 킬리키아의 신생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를 점령하려 시도하자, 그곳에서 더 많은 전사가 이집트로 피신해 왔다.
유럽계 병사들은 파티마 왕조 군대에서 미미한 역할을 했다. 이들 중에는 '사칼리바(saqalibah, 슬라브계 혈통으로 추정되는 노예들)'와 용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용병 대부분은 이탈리아 출신 보병이나 기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민병대 조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파티마 왕조 말기에 '준드 미스르(jund misr, 카이로 군대)'라는 명칭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도시 민병대, 퇴역 군인, 혹은 과거 군인 가문의 후손들이 민간인화된 집단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티마 왕조는 시리아에서 '아흐다스(ahdath)'라 불리는, 잘 조직되고 무장된 민병대(과거 아랍의 '준드' 체제 잔재일 수도 있음)를 육성한 바 있는데, 이들은 십자군의 공격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데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집트에서는 아흐다트(ahdath)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동기로 무보수로 봉사하는 무타위아(muttawi'ah) 자원병은 존재했다.
파티마 왕조의 기병대는 보병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베르베르족이 많았지만, 12세기에는 현재 리비아 동부 지역 출신의 바르키야(Barqiyah)만이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수 투르크족 굴람(ghulam) 부대가 정예 기병대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파티마 왕조의 '투르크족' 대부분은 이전 굴람의 자유민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이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보병대와 협력할 때 가장 효과적이었다.
11세기에는 파티마 기병대의 갑옷이 전반적으로 증가했고, 심지어 말 갑옷까지 도입되었다. 이는 기병 무기로서 투창이 버려지는 데 기여했을 것다. 마지막이자 아마도 가장 철저하게 갑옷으로 무장했던 파티마 기병대의 장비는 재상 알 탈라이의 시에 사슬 갑옷, 누비옷이나 천으로 덮인 사슬 갑옷, 검, 그리고 긴 창으로 묘사되어 있다.
파티마 왕조는 오랫동안 베두인 전사들을 기동성이 뛰어난 경기병 보조 부대로 고용해 왔다. 아랍인들은 창으로 무장한 경무장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능하고 잘 훈련된 것으로 보이며, 사막 인근 지역의 여러 주(州)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수는 항상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티마 왕조 정규군의 훈련 방식은 그 전술만큼이나 전통적이었으며, 주로 기병 양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훈련은 궁전 내부나 그 주변에 설치된 군사 학교인 '후즈라(hujra)'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신병들은 '우스타드(ustadh, 교관)'의 지도하에 여러 기숙사 중 한 곳에 배치되었는데, 각 기숙사에는 전투적인 느낌을 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궁술, 창술, 검술, 마술(승마술) 및 기타 군사 기술에 대한 훈련은 3년에서 7년 동안 진행되었다.
11세기에는 행정적 역량도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십자군에게 연달아 패배한 이후 재상 알 아프달(al-Afdal)은 순수 군사 훈련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는 또한 7개의 후즈라를 추가로 개설하여 기존 군인들의 아들 3,000명을 수용했다. 파티마 왕조 말기에 이르러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大) 후자리야(Greater Hujariyah)'와 '소(小) 후자리야(Lesser Hujariyah)'라는 두 개의 독립된 기병 연대를 구성했으며, 그 규모는 최대 5,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티마 왕조 군대의 대부분은 군부 산하 부서인 '디완 라와팁(diwan rawatib)'을 통해 매달 현금으로 급료를 받았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토지를 하사하는 '이크타(iqta)' 제도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이는 군부의 다른 부서에서 담당했다. 규모가 큰 이크타는 주로 부족 유력자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들은 그 대가로 일정 수의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한편, 사막 가장자리 지역의 가치가 낮은 이크타는 베두인 부족들에게 할당되었다. 11세기 이집트 인구를 크게 감소시킨 일련의 끔찍한 역병으로 인해, 토지를 보유했던 많은 군인이 직접 자신의 땅을 경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사실상 국가의 전투 병력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또한 경제 위기로 인해 정부는 군대 급료를 마련하고자 세금을 인상해야 했으나, 군대는 급료 체불을 이유로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급료는 당연히 계급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으며, 파티마 왕조 군대에는 네 가지 주요 서열 등급이 존재했다. 카이드와 세 계급의 아미르는 모두 독특한 제복을 입었고, 아미르 알주유쉬(총사령관)가 지휘했다.
십자군이 도착하기 전에는 이 장교가 시리아 주둔군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도 맡았다. 셀주크 왕조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후 파티마 군대의 대부분은 시리아 항구에 주둔했고, 이 항구들은 십자군 국가가 세워진 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티마 왕조의 지배하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스칼란은 이집트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항상 강력한 수비대가 주둔했다. 이집트 남부의 아스완도 비슷한 이유로 중요했다.
행군 시 파티마 군대는 셀주크 왕조나 아타베그 왕조의 군대와 유사하게 정찰병과 습격대가 주력 부대보다 앞서 이동하고, 진지를 보호하기 위해 참호를 팠다. 노새와 부크티 낙타가 운반 동물로 사용되었는데, 부크티 낙타는 아라비아 낙타와 호라산 낙타의 교배종이었다.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은 누르 알딘의 이집트 총독으로 처음 두각을 나타냈다. 171년 마지막 파티마 칼리프가 사망하자 그는 이집트의 공식 종교를 이슬람교에서 수니파 이슬람교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파티마 왕조나 누르 알딘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살라딘은 관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계층에서 병력을 모집했다. 그는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 수단인, 아랍인으로 구성된 정규군과 보조군, 그리고 살라딘의 삼촌이 초기 장기 왕조 점령 기간 동안 이집트로 데려온 쿠르드족 기병 굴람과 투르크멘족을 포함한 파티마 군대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살라딘은 파티마 군대의 대부분을 격하, 해산 또는 완전히 파괴하는 한편, 누르 알딘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하려는 장기 군대는 유지했다. 또한 그는 점점 더 많은 자유 쿠르드족 중무장병을 모집했다. 기병, 투르크멘 기마궁수, 투르크 굴람 등이 있었다. 살라딘은 이후 시리아와 자지라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지역의 혼합 병력을 자신의 느슨하게 조직된 군대에 편입시켰고, 여기에 아흐다트 민병대, 무타위아 자원병, 아랍 베두인 보조병도 추가될 수 있었다.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은 살라딘과 그의 후계자들의 군대에서 투르크멘 기마궁수의 다소 화려한 역할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 이집트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의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미미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들은 보조 기병의 두 가지 공급원 중 하나로 전락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하나는 베두인이었다. 이러한 투르크멘 기마궁수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역할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재정복 당시처럼 침략군보다 앞서 진격하는 습격 부대였을 것이다.
살라딘 군대에서 가장 효과적인 기마 궁수들은 언제나처럼 훈련이 잘 된 굴람, 또는 당시 더 흔히 맘루크라고 불리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중동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방식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활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지 상태보다는 이동하면서 활을 쏘는 경향이 더 컸던 것 같다. 이러한 신중하고 소규모 교전 방식의 전쟁은 셀주크 제국의 분열 이후 나타난 경향과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의 통치는 이 지역에 더 큰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부분적으로는 그 결과로 굴람의 훈련은 꾸준히 향상되었고, 아이유브 왕조 말기에는 훈련이 잘 된 맘루크 병사들이 활만으로 십자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1244년 가자 전투에서 일어난 일이며, 제1차 십자군 이후 이전에는 결코 달성되지 않았던 위업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맘루크들은 각 대대의 선봉대인 기마 궁병대로 배치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말에서 내려 대열을 갖춘 채 적을 향해 활을 쏘도록 훈련받았는데, 이는 사거리와 화력 집중도, 그리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전투 중 말에서 떨어지더라도 그들은 계속해서 싸웠는데, 처음에는 활을 사용하다가 마지막에는 검을 꺼내 들었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아이유브 왕조 시대 알 타르수시(al-Tarsusi)의 군사 지침서나, 이후 맘루크 시대의 기병 전술서인 '푸루시야(furusiya)'에 나타난 훈련 내용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알 타르수시는 기마 궁병에게 갑옷을 입은 적을 상대할 때 그 적의 말을 겨냥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검을 든 적 기병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쏘라고 했는데, 이는 첫 발을 빗나가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적 기병이 창을 들고 돌격하거나 '나와크(nawak, 화살을 안정적으로 발사하기 위한 보조 도구)'와 짧은 화살을 사용해 공격해 올 경우, 기마 궁병은 거리를 유지하거나, 최소한 검과 방패를 준비해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창을 든 적은 가장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아이유브 왕조 기병대의 장비는 상당히 표준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복장 위에 무거운 판갑을 착용했는데, 그 안에는 천으로 덮인 갑옷(카라간드, karaghand)이나 사슬 갑옷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창을 든 기병이 타는 말 중 일부는 말갑옷과 머리 보호구로 보호받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기마 궁병은 쇠뇌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하게 무장한 중기병과 경기병들은 긴밀히 협력하며 전투에 임했다. 기마 궁병이나 쇠뇌를 든 기병을 포함한 부대들은 통제된 돌격을 감행했고, 이들이 후퇴할 때는 '압탈(abtal)'이라 불리는 정예 중갑 기병들이 그 뒤를 엄호했다. 이는 과거 아랍의 '카르 와 파르(karr wa farr, 반복적인 공격과 후퇴 전술)'를 더욱 발전시킨 형태였다.
이러한 전술은 비잔티움 제국의 '쿠르소레스(cursores, 돌격 기마 궁병대)' 체계와도 유사한데, 당시 비잔티움군 역시 측면을 보호하는 '디펜소레스(defensores, 방어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전투를 수행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중기병 중 상당수는—통치자 직속 맘루크를 제외하면—자지라(Jazirah) 지역에서 동원된 부대들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쿠르드족 출신 자유 기병대(전문 기병)의 본거지와 가까웠다. 아크레 포위전 당시, 이 지역의 잔기 왕조 통치자 중 한 명이었던 신자르의 무이즈 알 딘은 긴 창과 검으로 무장한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이들은 전신을 덮는 사슬 갑옷을 착용했고, 아마도 깃털이나 장식물이 달린 조각 형태의 투구를 썼을 것으로 보이나, 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살라딘의 적들조차 술탄의 조카인 타키 알 딘 휘하의 기병대가 기마 궁수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반면, 북부 자지라 지역 하산카이프의 아르투크 왕조는 그들의 조상인 투르크멘족의 기마 궁술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예술 작품들을 보면, 당시 군대 구성원들의 출신이 다양했던 만큼이나 그들이 사용한 장비 또한 매우 다채로웠음을 알 수 있다. 창이나 검으로 무장한 전사들은 비잔틴 양식의 방패를 들거나, 사슬 갑옷 및 판갑을 착용하기도 했다. 또한 검의 교차부 위에 검지를 올려놓는 이란식 검술을 구사했는데, 이는 유럽 대부분 지역에는 100년이 더 지나서야 전해질 방식이었다. 그들은 창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쿠르드족 출신으로 보이는 전사들은—적어도 한 기록에 따르면—사슬 갑옷을 입고, 매우 볼록한 형태의 커다란 가죽 방패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외의 기록들에서는 아이유브 왕조 기병대의 출신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장비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쿠마', 즉 얼굴을 가린 기병들은—아마도 사슬로 된 가리개로 얼굴을 가렸을 것이다—아크레 외곽에서 검, 철퇴, 창을 들고 싸웠으며, 중무장한 유럽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뜨릴 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사소한 사건 하나와 특정 전사 한 명이 무슬림 측 연대기와 십자군 측 연대기 모두에 기록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1191년 8월 30일 카이사리야 전투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용사 '키 큰 아야즈'가 전사했을 때는 이러한 기록이 양측 모두에 남았다. 앞서 아야즈는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라고 묘사된 바 있는데, 이번 전투 도중 말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철갑옷의 무게 때문에 다시 말에 올라타기도 전에 적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야즈가 갖추었던 다른 무기로는 활과 화살통, 검, 그리고 유럽인 적수들이 놀라움을 표할 정도로 무거운 창이 있었다. 이와 유사한 장비들(철퇴와 검 포함)은 반세기 후 만수라 전투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맘루크 부대원들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경기병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중기병의 것만큼이나 다양했지만, 그 수량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리다(jaridah)'라고 불리는 병사들은 가장 가벼운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적진에 대한 신속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거나 고립된 전초 기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주로 아랍계 보조병들로, 빠른 속도와 기동성을 바탕으로 적의 보급 부대를 매복 공격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십자군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사들은 갑옷을 입는 것을 '정해진 죽음의 날을 피하려는 시도'라 여겨 경멸했다고 한다.
아랍인이나 투르크멘인으로 구성된 다른 유사한 부대들 역시 가벼운 장비를 갖추고 활, 날개 모양이나 곤봉 형태의 철퇴, 검, 단검, 혹은 가벼운 창으로 무장했다. 특히 대나무로 만든 가벼운 창은 아랍인들의 전형적인 무기로 널리 인식되었다.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도 보병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이 거대한 성채 방어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십자군 국가들을 상대로 공세를 펼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보병의 수는 오히려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살라딘의 군대는 구성이 다양했는데, 여기에는 키나나 부족 연합 출신의 아랍 보병 및 기병, 아스칼란 수비대 출신의 '아사킬라', 그리고 파티마 왕조로부터 계승된 병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 이집트 군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아르메니아인 부대는 1169년 파티마 왕조를 지지하는 봉기에 가담했다가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이 봉기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아마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하급 맘루크들 또한 기마 전투뿐만 아니라 보병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그 밖에도 부족 단위의 징집병, 시리아 도시 출신의 지역 민병대인 '준드(jund)'나 '아흐다스(ahdath)', 알레포와 모술 출신의 뛰어난 공성 기술자들, 그리고 호라산 지역에서 온 전문가들이 군대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보병은 보병끼리, 기병은 기병끼리 맞붙는 정면 대결은 십자군과 아이유브군 모두가 가급적 피하려 했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알 타르수시(al-Tarsusi)의 기록에 따르면, 무슬림 병사들은 여전히 기병대 앞쪽에 대열을 갖추고 '자누위야(januwiyah)'나 '타리카(tariqah)'라고 불리는 커다란 방패벽 뒤에 서는 훈련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기병과 보병 간의 협력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방식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다만 보병은 기존 무기 체계에 쇠뇌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은 결코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아크레에 주둔하던 살라딘의 수비대가 대규모 출격 작전을 펼칠 당시 이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191년 아르수프 전투의 서막을 연 무슬림 궁수와 투창병들 중에는 훈련받은 전문 보병이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이유브 왕조 보병의 역할은 공성전에 국한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요새화된 거점을 포위하거나 봉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야전을 포함하는 의미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사료들은 이러한 전투에 참여한 무슬림 군대의 무장 상태가 매우 다양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가볍게 무장한 '자리다(jaridah)' 전사들부터, 중무장한 '타클라(thaqlah)' 보병, 그리고 말에서 내려 싸우지만 여전히 갑옷을 갖춰 입은 기병들에 이르기까지 그 구성은 다채로웠다.
언급된 무기류로는 검, 단검, 긴 날이 달린 도끼, 철퇴, 투창, 쇠뇌, 나프타 수류탄, 나프타 '관'(화염방사기), 장창과 단창, 크고 둥근 나무 방패, 크고 작은 가죽 방패,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사슬 갑옷 등이 있다. 대형 방패와 특수 방패막이(mantlet)는 종종 반영구적인 방패 벽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참호전과 다름없는 양상을 띠었다.
파티마 왕조 출신의 키나나(Kinanah) 부대를 비롯한 많은 병력은 살라딘 사후에도 아이유브 왕조를 계승한 통치자들을 위해 계속 복무했다. 이들의 장비와 전술에는 별다른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이슬람 군대에는 기독교 세계(정교회 및 가톨릭권) 출신의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보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중 상당수는 공성 기술자나 쇠뇌병과 같은 전문 병력이었을 것이다. 유럽 출신 기병들 또한 아이유브 왕조 치하의 시리아에서 복무했는데, 십자군 측에서는 이들을 배신자로 간주했다.
살라딘의 군대 규모에 관해서는 다른 중세 무슬림 군대보다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살라딘은 초기에 약 500명 규모의 개인 친위대인 '아스카르(askar)'와 3,000명의 투르크계 보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1169년경에는 육군 정규군 규모가 8,640명에 달했다.
해밀턴 깁 경은 1171년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측 사절들을 위해 열린 열병식을 분석하면서, 당시 74개의 기병 부대(tulb)가 현장에 있었고 20개 부대는 다른 임무 수행 등으로 인해 불참했음을 기록했다. 이 병력은 총 4,000명의 전문 기병대와 주담(Judham) 부족 출신의 아랍 기병 700명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툴브(tulb)'가 상설 부대였는지 아니면 임시로 편성된 부대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실전용이었는지 아니면 의례적인 열병식만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파티마 왕조 출신 병력들이 해체되면서 전체 병력 규모는 축소되었다.
살라딘이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국외로 나갈 때조차, 다양한 침략 위협 때문에 전체 병력의 최소 절반은 항상 이집트에 잔류해야 했다. 시리아와 자지라(Jazirah) 지역의 아이유브 왕조 영토나 동맹 지역에서 파견된 병력은 대체로 소규모였다.
추산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는 1,000명, 홈스는 500명, 하마(샤이자르와 같은 산하 요새 포함)는 1,000명, 알레포는 1,000명, 모술과 자지라 지역을 합쳐 2,000~4,000명 정도를 지원했다. 이들 역시 모두 한꺼번에 원정군으로 동원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하틴 전투 당시, 살라딘이 이끈 군대는 12,000명 정도(대부분 경기병)였던 반면, 이에 맞선 십자군 병력은 최대 18,000명(대부분 보병)에 달했다.
아이유브 왕조 군대에 대한 급여 지급 방식은 상당히 복잡했다. 현금 급여를 받는 이들 중 쿠르드족, 맘루크, 그리고 자유 신분의 튀르크 정규군은 최고 수준의 급여를 받았다. 팔레스타인 남부 출신인 키나나(Kinanah) 연합 소속 아랍인들, 아사킬라(asaqilah), 그리고 그 밖의 파티마 왕조 출신 병력은 최고 급여의 절반을 받았고, 해군 병력은 4분의 1, 나머지 아랍 보조 병력은 8분의 1을 받았다. 그 외의 병력은 '이크타(iqta)', 즉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봉토(영지)를 통해 보상을 받았다.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 시대의 다소 초보적이었던 이크타 제도를 대폭 확장했는데, 우선 파티마 왕조 군대가 보유하던 이크타를 자신의 휘하 병력에게 재분배하고, 이어 국가의 다른 지역들에 새로운 이크타를 추가로 설정했다. 또한 함대와 그 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이크타가 할당되기도 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위계 체계는 아미르(amir),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 아미르 알 이스파살라르(amir al-isfahsalar)로 구성된, 상당히 단순한 3단계 체계였다.
이러한 야전 계급 위로는 수비대 사령관부터 군 총사령관에 이르기까지 5개 정도의 특별 고위직이 존재했다.
셀주크 왕조나 아타베그 정권, 그리고 파티마 왕조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아이유브 왕조의 정규군에게는 원정을 준비할 때에만 '자르드카나(zardkhanah, 병기창)'에서 무기와 갑옷이 지급되었다. 이때 원정에 필요한 다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급료도 함께 지급되었다. 행군 중에는 무거운 갑옷을 보통 보급품과 함께 운반하다가, 전투가 예상될 때에만 착용했다. 장기전, 특히 한 계절 이상 지속되는 원정의 경우, 이집트·시리아·자지라(Jazirah) 지역의 군대들 사이에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순환 체계를 도입하여, 항상 최소한 하나의 군대가 전선에 배치되도록 했다.
살라딘은 또한 약탈을 목적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아랍의 전통적인 기습 전술인 '라지아(razzia)'가 군사 자원을 보충하는 데 유용한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누비아(1172~1173년), 리비아와 튀니지(1173년), 요르단 지역의 베두인족(1173년), 그리고 예멘(1174년)에 대한 보복성 기습 작전들이 모두 이러한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예멘 원정은 전략적·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파티마 왕조 시대에 매우 강력했던 이집트의 영향력을 다시 부활시키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멘은 아이유브 연합체의 일부가 되었지만, 살라딘의 군사력에 예멘이 직접적으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즉각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기는 예멘의 군사 조직에 흔적을 남겼으며, 12세기 예멘에는 전문 기병대에 관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현지 군대는 여전히 부족과 도시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수의 투르크인 또는 투르크화된 이들이 예멘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더 정교한 장비들도 등장했다.
홍해 지역에서 살라딘의 해군력에 대한 예멘의 기여는 훨씬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동부 지역은 오랫동안 인도, 동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심지어 중국까지 이어지는 해상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당시 '샤야니(shayani)'라고 불리는 강력한 유형의 갤리선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배에는 해병대가 탑승했으며 140개의 노 또는 노잡이를 동원해 추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 국가들이 가했던 해군력의 위협,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럽 세력이 인도양 무역권으로 침투해 들어올 위험성은 1182년 르노 드 샤티용이 홍해에서 감행한 대담한 습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재난과 혼란: 호라즘 샤 왕조
몽골군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슬람 세계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중동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12세기 중반 대셀주크 제국이 분열된 이후, 이 지역에서는 유목 투르크멘족의 기마 궁술이 갖는 중요성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왕조에서 이러한 기마 궁수들은 혼성 군대의 일부 요소에 불과했다. 12세기 후반 가즈나 왕조를 무너뜨린 구르 왕조는 기병보다는 보병으로 더 유명했다.
이들이 사용한 가장 독특한 장비는 '카르와(karwah)'였는데, 이는 면화를 채워 넣은 거대한 황소가죽 방패로, 전투 시 최전방 부대원들이 휴대했다. 또한, 구르 왕조의 전열을 돌파한 적을 포위할 때 방패 벽(shield-wall)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과 북인도의 이슬람 지배 지역에서는 보병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구르 왕조 출신의 보병들은 트란속시아나의 호라즘 샤 왕조에서도 복무했는데, 1220년 사마르칸트가 몽골군에 함락될 당시 그곳의 수비대에도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라즘 샤 왕조 군대의 핵심은 튀르크계 맘루크들과, 킵차크 및 칸칼리 부족 출신의 유목민 전사들(이들은 이슬람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 상태였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호라즘 샤 왕조의 맘루크들은 훨씬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했고 그들의 말 또한 중무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트란속시아나가 풍부한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무기 제조로 명성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전사들과 킵차크 및 칸칼리족 보조 병력은 머지않아 몽골군을 상대로 패배하게 되지만, 1212년에는 오랫동안 이슬람 투르키스탄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불교 국가 서요(카라 키타이) 왕조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라 키타이는 비록 투르크족이었으나, 뒤이어 곧 들이닥칠 몽골 무리의 중국적 영향을 받은 선봉대로 여겨져 왔다.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 13세기 이란의 예술 작품들에는 대체로 이 지역의 전통적인 군사 장비가 묘사되어 있다. 새로 유입된 몽골인들의 독특한 양식은 아주 가끔씩만 나타날 뿐이다. 전사들은 대개 셀주크 시대의 전통을 따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특히 전신을 덮는 사슬 갑옷을 착용한 중무장 병사들의 모습은 당시 호라즘 왕조의 군사 장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13세기 이슬람권의 중앙아시아 접경 지역에서 사용된 무기와 갑옷은 셀주크 시대 및 그 이전의 양식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점차 강력해지는 유목 기마 궁수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더욱 무거운 형태의 장비로 진화한 결과였다.
이란과 이라크 지역의 오랜 전통을 지닌 무기 제조 산업은 1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몽골식 무기와 갑옷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이들은 몽골의 종주권 아래 존속하던 지역 왕조들을 위해 전통적인 방패와 기타 군사 장비들을 계속해서 생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북서부에 새로운 몽골의 수도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지역 산업은 빠르게 확장될 수 있었다. 특히 1300년 이전까지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검(칼) 제작 기술이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3세기 아나톨리아와 코카서스 지역
호라즘 왕조에 다수의 병력을 공급했던 킵차크족은 11세기 중반부터 몽골의 정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아시아와 러시아의 초원 지대를 지배했다. 이 시기에 그들은 때때로 기독교 왕국인 조지아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킵차크족 내부 구성은 매우 다양했는데, 무슬림인 이들도 있었고, 기독교인이나 여전히 샤머니즘을 믿는 이들도 있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쓰인 조지아의 서사시 『표범 가죽을 두른 기사(The Man in the Panther's Skin)』에서 사람과 말을 위한 최고급 갑옷을 '호라즘식'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이러한 동맹 관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서사시는 조지아가 중동의 군사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했던 타마라 여왕 시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전사 엘리트 계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란, 쿠르드, 비잔티움, 아랍 등 주변 국가들과 유사한, 튀르크 이전 시대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무장하고 전투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술은 왕족의 여가 활동이었으며, 전쟁보다는 사냥에서 더 흔히 사용되었다.
갑옷은 사슬 갑옷과 판갑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자브샨(javshan)'이라 불리는 판갑은 무슬림 세계의 '자우샴(jawsham)'과 분명히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카프히(kap'hi)'라고 불리는 유연한 어깨 및 팔 상부 보호구는 무슬림 세계의 '카프(kaff)'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일부 전사들은 투구, 머리 보호용 두건(coif), 다리 보호구 등을 착용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무기는 창과 검이었으며, 때때로 철퇴나 올가미(lasso)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13세기 중동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또 다른 기독교 국가로는 아르메니아를 들 수 있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대(大) 아르메니아'의 중심지는 타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킬리키아(Cilicia)와 타우루스 산맥 지역에 세워진 '소(小) 아르메니아' 왕국은 초기에는 전통적인 체계를 따라 조직되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봉건적이었으며, 소 아르메니아의 군대 또한 그러했다. '나차라르크(nachararks)'라 불리는 고위 귀족들은 왕과 거의 대등한 권위를 행사했으며, 이들의 군사적 의무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아래에는 나하라르크에게 군사적 봉사를 하는 대가로 토지를 소유한 아자트크가 있었다. 가장 낮은 계층은 세습 노예로 고된 노동을 하며 군사적 의무가 없는 농노였다. 킬리키아에서 이 최하층 계층이 모두 아르메니아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카파도키아와 대아르메니아에서 킬리키아로의 대규모 이주는 1080년대 초에 시작되었으며, 아마도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정복으로 지위를 잃은 특권층이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주로 도시에 정착했고, 그들의 군사 엘리트는 타우루스 산맥의 많은 성들을 점령할 만큼 강력했다. 이 지역의 기존 그리스-비잔틴 인구는 대부분 추방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훌륭한 군인으로 여겨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여전히 비잔티움 제국에 복무했지만, 그들의 지위와 수는 11세기 후반과 12세기에 걸쳐 꾸준히 감소했으며, 가장 활발하게 킬리키아와 그 너머 지역으로 이주했다.
아르메니아의 전통 무기와 갑옷은 위대한 민족 서사시인 《다비드 이프 사순》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사시에서 전사는 솜을 넣은 투구, 사슬 갑옷, 판갑, 금속 다리 보호대, 그리고 커다란 방패를 착용한다. 그의 무기는 검, 창, 활과 화살을 포함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퇴다.
기병이 철퇴를 던지는 장면과 심지어 기수의 다리를 안장에 고정시키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구전 설화를 후대에 전승한 사람들이 철퇴(gurz)를 이란에서 구자르(guzar)라고 불리는 무거운 투창과 혼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무딘 투창을 든 기병 간의 투창 전투는 터키 동부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경기이며, 그곳에서는 이를 체리트(cerit)라고 부른다.
1198년 레온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주요 남작들의 명단에는 45개의 영지가 언급되어 있다. 이 외에도 대관식에 불참한 남작들이 있었으며, 왕실 직할령에 속한 지역들도 존재했다. 14세기 초의 기록들에서도 이러한 봉건적 권력 중심지 대부분이 여전히 확인되지만, 레온 2세는 소아르메니아의 군사 조직에 근본적인 변화를 도입했다. '나차라르크(nachararks, 아르메니아의 귀족 계층)'들은 과거의 자치권을 상당 부분 상실했고, 지도자들의 명칭과 직무는 라틴식으로 바뀌었으며, 군대 구조의 여러 측면은 십자군 국가들, 특히 안티오키아 공국을 본떠 재편되었다.
과거의 체계는 구시대적인 전사 사회에 기반을 두었을지 모르나,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결코 뒤처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구축한 요새는 규모가 크고 인상적이었는데, 비록 셀주크나 다른 무슬림 세력의 요새만큼 과학적으로 설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실제로 십자군 측은 아르메니아인 공성 기술자들을 고용했는데, 그중 '하베디크(Havedic, 라틴어식 표기)'라는 이름의 전문가는 1124년 티레(Tyre) 공격에 사용된 공성 병기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1296년경, 마르코 폴로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기량이 안타깝게도 쇠퇴했다고 평했다. 그는 과거에는 아르메니아인 한 명이 다른 민족 다섯 명의 몫을 해낼 정도로 뛰어났으나, 이제는 폭식과 음주에 빠진 노예 같은 인간들이 되어버렸다고 기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리키아의 소아르메니아 왕국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있던 십자군 국가들보다 72년 더 오래 존속했다.
몽골이 도래하기 전 이 지역의 주요 군사 세력은 룸 셀주크였다. 하지만 13세기 셀주크의 군사 조직은 12세기와는 달랐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저항 세력이 아나톨리아의 이즈니크(니케아)로 집결하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사이의 국경은 더욱 강화되고 명확해졌다. 이는 또한 비잔티움의 '니케아 제국'과 룸 셀주크 사이에 상호 군사적 영향력이 증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니케아 본토, 아르메니아 킬리키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아마도 비잔티움의 트라브존에서 온 다수의 동맹군 및 속국 군대들이 종종 셀주크를 위해 싸웠다. 당시 셀주크군은 야전 요새를 광범위하게 활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군대 구성에서 유목민 출신 투르크멘 전사들의 역할은 미미했을 것이다.
셀주크의 군사력은 이제 '구(舊)군'과 '신(新)군'이라는 두 부분으로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12세기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체계로, 주로 굴람(노예 병사)과 투르크멘인들로 구성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이 공고해짐에 따라 그리스인 굴람의 공급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이크타(iqta)' 제도, 즉 국가가 부여하는 봉토 체계가 발달했으며,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티마르(timar)' 체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이크타는 유력한 굴람들은 물론, 심지어 패배한 적들에게까지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제공되었다.
'신군(新軍)'은 대체로 급료를 받는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개별적으로 모집되거나 집단 단위로 영입되었다. 유럽 출신 용병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병사는 '지라-흐바르(jira-khvars)', 즉 '급료를 받는 자들'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 중 다수는 정착 생활을 하는 투르크인이나 현지에서 개종한 주민들 가운데서 모집되었는데, 현지 기독교인들은 충성도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그 밖에도 셀주크 제국 국경 너머에서 고용되어 왔거나 봉신 자격으로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셀주크 군대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매우 다양했다. 조지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아랍어(베두인족의 언어와 시리아 또는 자지라 지역 도시들의 아랍어 모두 포함), 아르메니아어, 이베리아어(코카서스 지역 언어), 쿠르드어, 카즈빈 및 데일람 출신 이란인들의 언어는 물론, 현지 투르크인들의 언어 외에도 호라즘어, 킵차크어, 카이마리어, (당시 소련의 키로바바드 인근인) 간자 지역의 언어, 수르마리어(동부 아나톨리아 투르크어) 등 수많은 투르크어 방언이 사용되었다.
유럽 출신 용병들은 '신군' 내에서 별도의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 중 다수는 십자군 국가에서 왔거나, 비잔티움 제국의 니케아 또는 아르메니아의 킬리키아 지역에서 고용되어 합류했다. 사료마다 차이는 있으나 그 수는 3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독일과 가스코뉴 출신,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북부 이탈리아인, 그리고 키프로스나 베네치아의 여러 해안 영토에서 온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봉신 군대의 일원으로 복무한 유럽인들도 있었는데, 트라브존에서 온 약 200명(1240년경),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에서 온 기병 1,000명과 쇠뇌병 500명(1225년경), 킬리키아에서 온 '랜스(lance, 아마도 소규모 기병 부대를 의미)' 300개 단위와 람프론의 아르메니아 지도자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29개 랜스 단위(1240년경), 비잔티움 제국 니케아에서 온 400개 랜스 단위(1240년경), 그리고 알레포에서 온 유럽인으로 추정되는 1,000개 랜스 단위 등이 그 예이다.
몽골군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 룸 셀주크 왕조는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군대의 구성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각 부문의 상대적 중요성에는 변화가 있었다. 굴람은 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고대'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크타(iqta) 제도는 붕괴되고 보다 엄격한 봉건 제도로 대체되었다. 토지는 이제 대개 군인 가문이 소유했으며, 아버지에서 아들로 상속될 수 있었다.
투르크멘 보조병에 대한 언급은 드물지만, 투르크멘 용병(jira-khvar)은 점차 중요해졌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곧 아나톨리아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게 된 게르미얀(Germiyan) 부족 출신이었다. 유럽인을 포함한 외국 용병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종속군은 1256년 이후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 세력은 이후 오스만 국가가 형성되던 초기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피티얀(fityan)' 또는 '형제단(brotherhoods)', '이크반(ikvans)', 혹은 페르시아어로 '젊은이들'을 뜻하는 '자반(javans)'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이들 모두는 '푸투와(futuwa)'라고 불리는, 종교적·시민적·군사적 윤리를 아우르는 느슨한 형태의 행동 규범을 기반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력은 대부분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거의 전적으로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기존 민병대를 보완하거나 심지어 대체하기도 했다. 셀주크 제국이 쇠퇴하며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이들은 대개 주변에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투르크멘 부족들로부터 자신들의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투르크멘 부족들은 이전부터 셀주크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무주지'에 밀집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농촌 지역을 장악하며 이슬람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도시들은 마치 비잔티움 영토의 섬처럼 고립되었다.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이 도시들은 결국 셀주크 통치자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몽골의 승리를 등에 업은 투르크멘 부족들은 같은 전술을 셀주크 도시들을 상대로 구사했고, 그 결과 도시들은 투르크멘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국경 지대에 존재하던 기존 도시의 '가지(ghazi, 전사)' 계층 상당수는 셀주크 제국을 등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여러 투르크멘 왕조로 넘어갔다. 동방에서 유입된 전사 난민들, 다수의 종교 지도자와 데르비시(수피 수행자)들, 심지어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 집단까지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은 제국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남부 러시아 지역에 있던 또 다른 투르크계 부족들을 서부 아나톨리아로 불러들였다. 이들 중 일부는 표면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여전히 이교도 상태로 남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니케아의 통치자들이 십자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비잔티움 정부는 아나톨리아 지방을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국경 지역의 총독들과 주둔군 전체는 물론, 소외된 전사-농민 계층까지도 점차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투르크멘계 무슬림 '가지' 국가들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나톨리아 각지의 투르크멘 부족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전투 방식과 무기 체계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아르메니아의 서사시 '사순의 다비드'에 비견되는 터키의 민족 서사시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Book of Dede Korkut)'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당시 사용된 장비로는 색깔이 들어간 방패, 검, 긴 창, 긴 사슬 갑옷(메일 하우버크), 투구, 활, 화살, 화살통, 단검, 그리고 철이나 단단하게 가공한 가죽으로 만든 판갑(라멜라 갑옷) 등이 있었다.
다른 사료들을 통해서도 투르크멘 부족들이 종종 훌륭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례로 1262년 코니아(Konya)를 포위했던 투르크멘 병력은 최대 2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 모두가 판갑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룸 셀주크 왕조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아나톨리아 지역 갑옷의 무게와 품질은 저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기마 궁술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진 것과도 맞물려 있다.
암살자들과 칼리프들
중동의 복잡한 군사적 갈등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활동했던 전사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흔히 '암살자(Assassins)'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현대적 의미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어원적으로도 정확하지 않다.
시리아와 이란의 이스마일파(Isma'ilis)는 본래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긴밀한 동맹 관계였다. 양측 모두 이슬람의 시아파에 속해 있었으며, 자신들의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군인만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양측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했다. 가장 심각한 갈등은 1094년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가 사망한 이후에 발생했다. 그의 장남 니자르는 계승권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동생인 알 무스탈리를 옹립하려는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파티마 왕조는 이미 팽창 정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으며, 신중한 성향의 아르메니아 출신 재상들의 주도하에 번영을 재건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하지만 니자르의 살해 사건은 동방의 많은 이스마일파 소수 집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 중 다수는 파티마 왕조를 외면하게 되었고, '니자르파(Nizaris)'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들이 주로 기억되는 이유인 '정치적·종교적 암살'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한편, 이들은 문학, 신학, 시, 그리고 신비주의 철학의 훌륭한 후원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첫 군사 거점은 이란 북부에 위치한 거대한 알라무트 성이었다. 시리아의 니자르파는 이란의 니자르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알라무트에 있는 이맘의 권위를 인정했다. 예외적인 시기도 있었는데, 바로 시난 라시드 앗딘이 마스야프에 본부를 두고 시리아 산악 지역에 있는 니자르파의 성채들을 통제하던 시기(1162~1192년)가 그러했다.
시리아의 니자르파는 적을 개별적으로 암살하기 위해 요원을 파견하는 한편,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군사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이들의 작전에서 기병대는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조직은 매우 엄격하게 운영되었다. 핵심적인 '다이(da'i, 선교사)'들이 군사 지도자이자 행정관 역할을 맡았고, 그 아래 보조적인 다이들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그 아래에는 '동지' 또는 'da'i'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rafiq'들이 있었다. 그 다음은 운동의 활동적인 세력인 'fida'i'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자리 종교의 신비에 일정 단계까지만 입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투 기술뿐만 아니라 외국어와 다른 종교에 대한 훈련도 받았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문화적 배경에 융합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능력은 중동 전역에 공포의 파장을 일으켰다.
그들이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하시시를 복용하여 즉 '암살자'라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활동적인 니자리파의 가장 낮은 계급은 '초보자' 또는 'lasiq'들이었고, 그 아래에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나머지 구성원들이 있었다.
시난이 죽은 후, 시리아의 니자리파는 더욱 정교한 조직 구조를 발전시켰는데, 아마도 알 카프 성에 훈련을 집중하고 다이 계급을 나킵(장교), 자나(부대), 나지르(감찰관), 왈리(성 사령관)로 세분화했을 것이다. 니자리파 조직과 십자군 템플 기사단의 조직 사이에 유사점이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라피크들은 붉은색 장식이 있는 흰색 튜닉과 모자, 허리띠를 착용했는데, 이는 템플 기사단의 붉은색과 흰색 제복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중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작지만 중요한 또 다른 참여자는 바그다드를 거점으로 한 수니파 무슬림 국가, 아바스 왕조(칼리프국)였다. 수 세기 동안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정복자들의 손아귀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는데, 셀주크 왕조처럼 그들을 존중하며 대우한 정복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와 13세기 초에 이르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점차 독립성을 회복해 나갔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은 바그다드와 이라크 중부 지역을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이들의 소규모 군대는 당시 다른 소규모 통치자들의 군대와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었는데, '굴람'을 비롯해 투르크족, 아랍족 및 기타 용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경우보다 자원병의 비중이 다소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그다드에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민병대가 존재했는데, 12세기 후반과 13세기에는 이 민병대에서 '푸투와(futuwwa)'라고 불리는 새롭고 다소 신비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푸투와'라는 명칭은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해 왔는데, 본래는 종교적 연대보다는 부족적 연대라는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이 용어는 무슬림 변경 지역의 '가지' 집단이나 신비주의적 결사체들과 연관되기도 했다. 11~12세기 알레포에서는 이 용어가 '아흐다스' 민병대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2세기 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나시르(al-Nasir)가 이라크 내 푸투와 집단들에 대한 지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가 이들을 유럽의 기사도와 같은 이슬람적 형태로 탈바꿈시킨 것은 아니었다(일부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는 이들을 기존 행정 체계의 일부로 편입시키지도 않았다. 새롭게 재편된 푸투와는 십자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은 시리아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 나시르의 이러한 행보는 바그다드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고 분쟁을 일삼던 집단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다만, 그의 지도력은 이라크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푸투와 운동의 위상을 높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칼리프는 이 집단들에 어느 정도 질서를 부여하고 쇠뇌(석궁) 사용을 장려했다. 이때 그는 당시 새롭게 인기를 얻던 이 무기를 소유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인 허락을 받도록 했다. 그는 또한 '주투와(jutuwa)'와 모종의 연관성이 있던 전서구(통신용 비둘기)의 사용을 통제했다. 나아가 그는 '사라위트(sarawit)'라 불리는 특정 형태의 바지를 주투와 모임에서 하사할 수 있는 권리를 오직 자신, 즉 칼리프만이 갖도록 했다. 이 바지는 그러한 모임들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주투와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철천지원수인 '이자리(izari)'들과 마찬가지로 '피티얀(fityan)' 또는 '라피크(rafiq)'라 불렸으며, '카비르(kabir)', 즉 '우두머리'의 지도를 받았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도 임시 회원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었으나, 이슬람을 받아들여야만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정식 회원이 되면 천으로 된 허리띠와 입회 의식 때 마시는 소금 탄 음료, 그리고 의례용 바지가 주어졌는데, 때로는 이것들 대신 무기가 주어지기도 했다. 몽골군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에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술탄들은 14세기 초까지 이러한 전통을 계속 이어갔다.
맘루크(Mamluks)
13세기 후반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루크 군대는 이전의 아이유브 왕조 군대에서 발전해 나왔다. 하지만 두 군대가 완전히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유브 왕조 후기의 군사력은 강력했으나, 국가 체제가 단일한 구조라기보다는 가문 연합체에 가까웠기에 그 힘은 분산되어 있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살리흐와 알 카밀 시대에 이집트는 1만 명에서 1만 2천 명 규모의 기병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다마스쿠스는 알 무아잠 통치 하에 최대 3천 명의 기병대를 유지했는데, 이 수치에는 도시 수비대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남부에서 온 병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알레포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도 약 3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으로 보이나, 그중 상당수는 보조 병력이었다. 홈스나 하마 같은 소규모 도시들은 1239년 당시 각각 400~500명 정도의 병력만을 제공할 수 있었고, 카라크, 발베크, 바니야스, 보스라 같은 도시의 병력은 이미 다마스쿠스의 더 큰 군대 규모에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유브 왕조 치하의 자지라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는데, 13세기 중반 무렵 동부 지역에서는 약 1,800명의 기병을, 북부 및 서부 지방에서는 약 4,000명의 기병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군사력을 모두 합치면 그 규모는 컸지만, 개별 군대 단위는 대부분 소규모였기에 내부 구조 또한 단순했다. 바로 이 점이 13세기 후반 완전히 체계를 갖춘 맘루크 군대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아이유브 왕조가 주로 자유민으로 구성된 군대 내에서 노예 출신의 '맘루크'를 정예 요소로 활용했던 것과 달리, 맘루크 왕조의 술탄들은 맘루크 병사들을 군대와 국가 체제 모두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러한 중요한 변화는 이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중 한 명인 알 살리흐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아이유브 가문 연합체 대부분에 자신의 중앙집권적 권위를 관철시켰으며,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가문 구성원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추종자들에게 의존했다.
이를 위해 알 살리흐는 다수의 튀르크계 맘루크를 모집하여 '바흐리야'와 '잠다리야' 연대를 창설했다. 그는 이 부대들을 본대와 분리하여 카이로 인근 로다 섬의 요새에 배치했다.
또한 알 살리흐는 이 연대원들이 자신들의 튀르크적 기원과 맘루크라는 신분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인력의 대규모 모집이 가능했던 것은 몽골의 팽창으로 인해 과거 강력했던 킵차크 국가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몽골이 남러시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사 노예의 수는 더욱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바흐리야 연대의 규모는 800~1,000명 정도였고, 정예 부대인 잠다리야 근위대는 200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실 알 살리흐가 조직한 바흐리야는 이후 맘루크 왕조의 군사 조직 체계에 있어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후 등장한 맘루크 왕조는 아이유브 왕조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화된 국가였지만, 이러한 통합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맘루크 군대 전체가 이집트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예 부대는 카이로에 주둔했으나, 상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도 대규모 지방 주둔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시리아에 주둔한 군대는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맘루크 왕조가 몽골과 십자군이라는 양측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며, 이집트 본토 역시 해상을 통한 유럽 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맘루크 군대는 13세기 말 바이바르스 통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흥미롭게도 이 위대한 군사 지도자는 자신의 주적이었던 몽골군을 일종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바이바르스가 이집트의 통치권을 장악했을 당시, 그곳에는 몽골의 시리아 진격을 피해 도망쳐 온 수많은 피란민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맘루크들과 아이유브 왕조 지역 제후국 출신의 자유민 전사들을 포함)는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할카(halqa)', 즉 지방군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바이바르스는 기존에 이집트에 존재하던 맘루크 부대와 이전 술탄들이 운용하던 연대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의 초기 과업 중 하나는 맘루크 군대를 체계화하여 중세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일관된 군대 중 하나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 방어 시설에 대해서도 같은 노력을 기울여 여러 도시의 방어력을 크게 강화했다.
이전 아이유브 왕조 출신 장교들에 대한 숙청은 없었으며, 자유민 출신 전사들도 계속해서 군에 입대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정예 연대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쿠르드족이나 투르크멘족 장교들은 시리아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자유민 출신 병력의 주된 공급원은 이제 몽골 영토에서 여러 이유로 탈출해 온 투르크-몽골계 피란민들이 되었다. '와피디야(wafidiyya)'라고 불린 이 전사들은 이미 독자적인 전투 기술과 전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바이바르스 치세 동안 약 3,000명이 시리아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별도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대부분 술탄 직속 맘루크 연대나 아미르(장교)들의 휘하 부대에 편입되었다.
이집트를 거점으로 하는 맘루크 국가의 중앙군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술탄 직속 맘루크, 아미르(장교)들의 맘루크, 그리고 '할카'가 그것이다. 할카는 주로 자유민 출신 기병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맘루크들보다 낮은 급료를 받았으며 사실상 이집트의 '지방군' 역할을 했다.
시리아에도 이와 유사한 할카 부대가 주둔했다. 이들은 대개 '이크타(iqta, 봉토)'를 보유한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는데, 이때 할당받은 봉토의 규모는 각 장교의 계급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러한 지휘관들 중에는 '아미르 미아(amir mi'a, 명목상 100명의 지휘관)' 또는 '무카담 알프(muqaddam alf)'가 있었는데, 이들은 실제 전투에서 1,000명의 기병을 지휘했다. 이는 아마도 그 휘하 병력들이 하급 지휘관들 아래로 세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100명을 지휘하는 '아미르 아르바인(amir arba'in)'—'아미르 타블카나(amir tablkhanah)' 또는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라고도 불림—이 있었고, 10명을 지휘하는 '아미르 아샤라(amir 'ashara)'가 있었다.
약 40명으로 구성된 임시 야전 부대는 '무카담 알 할카(muqaddam al-halqa)'가 지휘했다. 고위 지휘관들은 최대 250명의 병력을 부양할 수 있는 '이크타(iqta, 토지 수익권)'를 보유했다. 그러나 이 체계가 엄격하게 고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했다.
맘루크 왕조 초기, 술탄 군대의 중추인 술탄 직속 맘루크들은 약 40명의 지휘관 휘하에 총 2,000명 규모였으나, 13세기 말에는 그 수가 거의 10,000명에 달했다. 거의 모든 고위 지휘관과 원정군 지도자들은 이 정예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새로운 술탄이 집권하면 이전 통치자의 맘루크들은 위세를 잃었지만, 반드시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 그들은 다른 지휘관 휘하의 '아미르의 맘루크(amir's mamluks)'로 소속이 옮겨졌다.
새 통치자가 자신만의 맘루크 세력을 구축하는 동안, 경험이 풍부한 일부 구세대 맘루크들은 그대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이피야(sayfiya)'라고 불린 이들은 경쟁이 매우 치열한 맘루크 궁정에서 개인 자격으로 복무했기에, 결과적으로 정치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사키야(khassakiya)'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술탄을 직접 호위하는 400~1,200명 규모의 친위대였다. 이들만이 유일하게 상시 칼을 휴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성격도 띠고 있었으며, 고위 장교나 대사들은 대개 이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맘루크 부대들 사이에는 상당한 경쟁 의식이 존재했으나, 그것이 후대에 나타난 살육이 난무하는 격렬한 대립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시리아와 자지라 지역에 잔존했던 아이유브 왕조의 소규모 영주국들이 수행한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1250년 맘루크가 처음 권력을 장악했을 때, 많은 쿠르드족 병사들이 이집트를 떠나 아이유브 왕조 통치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패배한 이후, 이들 영주 중 일부는 맘루크의 종주권 아래 시리아로 돌아왔다. 홈스의 영주들은 1263년까지, 카라크의 영주들은 1286년까지, 하마의 영주들은 1341년까지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병력은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 주둔하던 맘루크 주력 부대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맘루크 군대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대략 16,000명의 맘루크 기병과 24,000명의 할카(halqa, 정규군 부대)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훈련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아이유브 왕조 말기부터 14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향상되었다.
전통적인 궁술을 높은 수준으로 부활시킨 것은 아인 잘루트(1260년), 홈스(1281년), 샤카브(1303년) 전투에서 맘루크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맘루크군의 전술에도 반영되었는데, 보통 맘루크 궁병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한쪽 날개에는 베두인 보조병을, 다른 쪽 날개에는 투르크멘족 병사들을 배치하는 형태였다.
맘루크의 전술과 군사 기술은 본질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13세기 말,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을 완전히 격퇴하고 몽골군을 저지하는 한편, 중동 내의 여러 소규모 적대 세력까지 제압하며 당대 가장 성공적인 군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들이 갖춘 우수한 병참 체계와 무기 체계, 그리고 엄격한 규율은 이후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거둔 군사적 성공의 토대가 되었다.
끊임없이 발전해 온 이러한 군사 전통 속에서 기병의 역할은 단연 핵심적이었다. 보병 또한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공격 작전과 대규모 기동의 주축은 기병이 담당했다. 기병은 속도와 타격력, 그리고 무기의 위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격이 이들의 주된 임무였던 만큼,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작성된 맘루크의 ‘푸루시야(furūsiyya, 기사도적 군사 훈련)’ 지침서들에서 활만큼이나 창(랜스) 사용을 강조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지침서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궁술은 유목민인 투르크족의 방식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비잔틴 및 아바스 왕조의 전통을 발전시킨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맘루크의 기마 궁수들은 말 위에서, 필요하다면 어느 방향으로든 활을 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이동 중에 활을 쏠 때는 주로 근거리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카바크(qabaq)’라 불리는 훈련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이 훈련에서는 장대 꼭대기에 표적을 설치해 두고 사격했다. ‘키가즈(qighaj)’라는 훈련에서는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이 이루어졌는데, 지면에 놓인 표적을 향해 기수가 거의 그 위를 지나칠 정도로 바짝 다가가 활을 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단순히 적을 교란하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 위한 ‘충격 전술’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맘루크 국가도 경기병을 운용했다. 이러한 병력의 대부분은 부족 단위의 보조병이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궁술 기법이 실제로 명맥을 유지한 유일한 사례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의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투르크계 부족과 쿠르드족 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아랍 베두인 부족들도 시리아, 시나이, 이집트의 국경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맘루크 국가의 정규 보병은 현지에서 모집되었거나 하급 맘루크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귀족적 적수들이나 몽골군과는 달리, 모든 맘루크는 도보 전투 훈련도 받았다. 이 보병들이 사용한 장비는 매우 다양했는데, 맘루크가 아닌 구성원 중 상당수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의 정착 사회에서 차출된 궁수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이 전담했던 전투 분야 중 하나는 화염 무기 운용이었다. 무슬림들은 비잔틴 제국의 기름 기반 화염 무기를 대폭 발전시켰으며, 구리 관을 통해 발사하는 '나프트(naft, 그리스의 불)'를 상시적으로 사용했다. 그 밖에도 나프트를 채운 '카루라(qarura)'라는 크고 작은 화염 항아리를 손으로 던지거나 공성 병기를 이용해 발사하기도 했고, 나프트가 담긴 통을 부착한 '시함 키타이야(siham khita'iya, 일명 '중국식 화살')'를 사용하기도 했다.
1230년경, 중앙아시아로부터 초석(질산칼륨)에 관한 지식이 중동으로 전해지면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곧 초석 10, 숯 2, 유황 1.5의 비율로 혼합된 초기 형태의 화약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혼란스럽게도 이것 역시 '나프트'라고 불렸으며, 기존의 화염 무기 체계에 통합되었다.
이 초기 화약을 1300년경에 이미 발사체를 추진하는 용도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더 가능성이 높지만) 고정된 위치에서 산탄(grapeshot)과 같은 것을 흩뿌리는 용도로 사용했는지는 여전히 치열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무기와 갑옷
중앙아시아의 영향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동의 무기와 갑옷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특히 13세기 후반부터 주류를 이루게 된 사브르 또는 곡선형 검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슬람 검은 항상 찌르기보다는 베는 무기로 여겨졌다. 초기에는 대부분 비교적 짧고 직선형이며 끝이 가늘어지지 않는 형태였지만, 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사니아에서는 거의 직선형의 외날 장검이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에서 곡선형 사브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무기는 터키령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했지만 셀주크 왕조의 정복 이후에야 이슬람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몇몇 곡선형 무기가 이슬람 지역으로 수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최근 니샤푸르에서 하나가 발굴되었다. 12세기 초부터 사브르는 동부와 중부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검 형태였지만, 직선형 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철퇴는 주로 갑옷을 부수는 무기였으며, 그 지리적 분포는 의미심장할 수 있다. 실제로 철퇴는 이란과 투르크 지방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고, 거기서 서쪽으로 퍼져 비잔티움과 이슬람을 거쳐 기독교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창은 아랍 세계에서 전통적으로 전사의 가장 믿음직한 무기로 여겨졌다. 이란인들 사이에서도 그 위상은 거의 비슷했으며, 유목민 투르크족 역시 기마궁술에 주로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민족은 말을 타고 다양한 방식으로 창을 사용했으며, 유럽의 적들보다 훨씬 다재다능했다. 기병용 창은 일반적으로 보병용 창보다 짧았는데, 이는 보병이 장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카나(qanah)는 가장 긴 무슬림 창으로, 처음에는 보병용 무기로 등장했다. 나중에야 기병들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기병들이 사용하는 카나는 로마-비잔틴 기원의 더 짧고 굵은 쿤타리야(quntariyah)와 대조를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에서 창은 베기와 찌르기에 사용되는 무기로서 그 형태가 가장 불분명한 무기이지만, 그 사용은 보병의 중요성이 여전히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여러 지역에서 보병이 투창을 많이 사용했다는 기록은 보병 궁술이 제한적으로 발전했음을 시사할 수도 있지만, 다른 증거들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기병과 다른 보병 모두를 상대로 이러한 무기를 사용했던 훈련된 보병 부대가 여전히 존재했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나와크(nawak)' 또는 '마즈라(majra)'라고 불리는 화살 유도 장치는, 적어도 중동 지역에 있어서는 쇠뇌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기원은 불분명하며, 동쪽에서 전파되었음에도 이집트까지만 도달했다. 진정한 의미의 쇠뇌 역시 동쪽, 즉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이는 이슬람 이전 시대의 일이었다.
이 장치는 10세기경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서 기록되었는데, 약 400년의 공백을 거친 뒤 유럽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다시 등장했다. 이 시기의 쇠뇌가 이슬람 세계를 거쳐 기독교 세계로 전해졌거나, 혹은 그 반대였다고 볼 만한 증거는 거의 없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연한 형태의 갑옷은 최고의 방어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는 당시의 군사적 상황에 따른 대응이었을 뿐, 기술적 퇴보의 결과는 아니었다. 투구의 설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권의 갑옷 제작자들은 대형 금속 판을 다루는 기술을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또한, 유연한 사슬 갑옷이나 금속 조각을 엮어 만든 라멜라 갑옷이 반드시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물론 가죽으로 만든 라멜라 갑옷이나 누비옷과 같은 '부드러운' 형태의 갑옷은 확실히 더 가벼웠다.
이러한 방어구들이 널리 사용된 것은 해당 지역의 금속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기동 속도를 중시하는 전술적 강조를 반영한 것이었다. 가죽 라멜라 갑옷은 종종 사슬 갑옷과 함께 착용되기도 했다. 라멜라 갑옷은 화살에 대해 단계적인 충격 흡수 기능을 제공했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비슷한 무게의 판금 갑옷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까지 이슬람권 중심부에서는 사슬 갑옷이나, 드물게는 비늘 모양의 갑옷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어구였다. 사슬 갑옷 아래에 부드러운 갑옷을 덧대어 입으면, 같은 무게 대비 칼날에 의한 베기 공격, 심지어는 손에 든 창에 대해서도 최고의 방어력을 발휘했다.
14세기까지 이슬람 세계는 팔(그리고 어느 정도는 다리)을 보호하는 장비 측면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특히 동부 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아마도 유럽의 브로드소드가 가하는 타격 위주의 충격보다, 곡선형 세이버가 가진 강력한 절단 능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슬람권의 투구와 관련된 다양한 명칭은 실제 투구의 형태와 제작 방식이 매우 다채로웠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타원형의 일체형 철제 투구인 '바이다', 여러 조각을 이어 만든 '타르크', 그리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경화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쿠드' 등이 포함된다. '미그파르'는 사슬 갑옷으로 만든 두건 형태의 방어구였다.
이슬람권의 방패는 대부분 원형이었으나, 11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까지 중동 지역에서는 연 모양의 방패도 사용되었다. 이 방패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손에 들고 사용하는 작은 형태의 '타리카'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아래쪽이 평평하고 길쭉한 보병용 방패인 '자누위야'는 이탈리아, 특히 제노바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당시 제노바는 중동 지역으로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수출하던 주요 도시였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이슬람권에서 말 갑옷의 사용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나, 13세기까지의 시각 자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부 말 갑옷은 누비 형태이거나 펠트(모직물)로 제작되었고, 또 다른 것들은 기수용 갑옷인 '카자간드'와 마찬가지로 천으로 덮고 안감을 댄 사슬 갑옷 구조로 만들어졌다. 13세기 후반까지 판갑 형태의 말 갑옷은 동방의 양식이었다.
이 시기 유럽 무기 체계에서 나타난 많은 발전은 이슬람권의 사례를 한두 세대 정도의 시차를 두고 뒤따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무기가 이슬람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슬람권에서 유래한 것들도 존재한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는 바시넷 투구, 사슬로 만든 아벤테일(투구에 부착하는 사슬 목가리개), 면을 채워 넣은 아케톤, 경화 가죽이나 이후 금속관 형태로 발전한 팔다리 보호구, 자제란트, 하우버크(사슬 갑옷) 아래에 착용하는 비늘 형태의 흉복부 보호구, 말 갑옷, 날개(혹은 돌기)가 달린 메이스, 경기병용 도끼, 그리고 '트레뷰셋'이라 불리는 평형추식 망고넬(투석기) 등이 있다. 이 공성 병기는 12세기 중동에서 기존의 인력식 망고넬이 발전한 형태로 등장했는데, 이것이 비잔티움 제국에서 발명된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권에서 발명된 것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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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 디펜스코리아 시절에, 서봉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유저가 아랍 기병들이 산처럼 느리고 무거웠다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본문에 그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대단한 사람이었다. 혹시 역사 전공자였나, 아니면 직접 역사를 배운 사람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