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이 / 정미연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왈칵 불안한 생각이 들어 어깨에 두른 숄을 단단히 여미고는 걸음을 빨리 했다. 따라오는 걸음도 빨라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하이힐을 신은 다리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도 뛰는 것 같았다. 아파트 정문을 막 들어서는데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건장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렇게 불러도 도망을 가시는 거예요. 저 H초등학교 때 OO예요.”
“뭐, 누구라고 정말이야?”
공업탑 정류장에서 버스에 오르는 나를 알아보고 뒤쫓아 왔다는 것이다. 버스 속에서 인사를 건네도 고개를 돌리시더니 뒤따라오면서 여러 번 불러도 돌아보지 않더라는 것이다. 전혀 몰랐다고 했더니 제가 미워서 일부러 모르는 체하나 싶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녀석을 가까운 포장마차로 데리고 갔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앞머리 가마가 뚜렷한 얼굴을 보니 어릴 때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 아직도 제가 밉지요. 이제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왜 또 말썽 더 피우고 싶어서?”
“아이참 선생님도.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도를 했다고요.”
녀석을 보자 반가운 생각보다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은 지난날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헤어진 지 십 년이나 되었지만 생각하면 머리 아픈 제자였다.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녀석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의 원성을 자아내어 교실 분위기를 흩뜨려놓았다.
선생님. OO이가 내 연필 훔쳐갔어요. 내 크레파스, 내 실내화 내 체육복, 내 돈도요, 가만히 있는데 이유도 없이 때려요….
여러 방법으로 지도를 해 보았지만 그때뿐이라 나를 지치게 했다. 결석도 잦았다. 반 친구들 말로는 결석하는 날은 두세 명이 몰려다니며 일을 저지른다고 했다. 남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오줌을 누다가 혼이 나기도 하고 지하주차장에서 불을 지피다가 경찰에게 붙들려 가기도 했다.
하루는 파출소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인데 아이를 인수하여 가라는 것이었다. 아파트 계단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관에게 붙들렸다. 집 전화번호와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아무리 물어도 모른다고 하더니 담임선생님 이름은 말하더라고 했다.
어느 날 밤에는 학교 시계, 양호실에 현금과 약품, 책상 서럽에 둔 저금통 등이 없어졌다. 이튿날, 범인이 잡혔다는 아이들 말에 설마 했는데 OO와 4학년 형 둘이 체육 선생님께 혼이 나고 있다고 했다.
담임인 내 입장이 말이 아니었다. 교실마다 자동 방범장치가 되어 있는데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냐고 물었다가 그 대답을 듣고 아연 실색을 했다. 캄캄한 곳에서는 손전등으로 비추면 레이저 선이 다 보여서 기거나 엎드려서 들어가면 선에 닿지 않아서 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학생 형이 다 가르쳐 주었다고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훔친 돈이나 물건도 그 형에게 다 주었고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형이라고 딱 잡아뗐다.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씨름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만나 보니 어린 나이에 남자를 만나 아들 형제를 낳았다. 1학년짜리 동생도 등교할 때마다 교실 복도에서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건축미장 일을 하는 남편은 술만 먹으면 폭행을 휘두르고 설상가상 바람까지 피우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엄마도 아이들은 관심 밖이었다. 녀석의 장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했다.
고민 중, 체육시간 공차기 놀이에 녀석의 활약이 돋보였던 장면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나는 축구 감독을 찾아갔다. 당시 우리 학교가 울산시 축구 우수학교였다. 선수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축구연습에 매달렸다. 걸어 다니는 화구 같은 녀석을 공이나 주워주는 볼보이를 시켜달라고 간청을 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으나 다급한 마음에 여러 번 찾아간 끝에 허락을 받았다.
반 이이들 앞에서 청소 당번과 숙제를 하지 않는 특혜를 준다고 했더니 녀석은 오전 수업만 마치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감독 선생님 말로는 성실하게 붙어 있다고 했다. 가끔 퇴근길에 지나다보면 공 줍느라고 바빴다. 어쩌다 나랑 눈이 마주칠 때면 엄지손가락을 세워 “파이팅”을 외쳐주면 녀석의 어깨가 우쭐했다. 녀석의 관심은 오로지 축구장이었고 덕분에 아이들의 불평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십 년 만에 만난 녀석이 나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는 국가대표 선수가 꿈이라고 했다. 중학교도 축구 덕분에 무난히 들어갔고, 지금은 축구로 유명한 학성고등학교 3학년에 다닌다고 했다. 더 놀라운 소식은 얼마 전에 전국 축구 시합에서 우승을 한 덕분에 선수들 모두가 고려대학교에 특채로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장하다 정말 멋지구나. 국가대표 선수, 될 수 있고말고 내가 꼭 지켜 볼 거야.”
그도 나도 울먹거리며 두 팔을 뻗어서 하이파이브를 연신해 댔다. 나와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기숙사 입실 시간이 엄중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 앞까지 나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열두 번 변하는 것이 남자 애들이라고 하더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축구에 관심이 아주 많아졌다. 큰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은 선수들의 얼굴이나 이름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머지않아 볼보이(ball boy)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축구장을 누비는 모습도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