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 청와대는 오는 24일부터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 사적지 '칠궁'(사적 제149호, 종로구 궁정동 소재) 권역을 일반 관람객들에게 공개한다.
이번 '칠궁'의 개방은 지난 1968년 남파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1.21 사태'를 계기로 일반 관람이 금지된
이래 33년여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p>
<p class=""> '칠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해서 저경궁(儲經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등 7개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p>
<p class="">'칠궁'의 일반공개는 문화재 보존과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청와대 관람과 연계하여 시간대별 안내관람으로 실시되며 기존 청와대 관람절차에 따라 청와대 관람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청와대는 그동안 '열린 청와대'를 지향, 일반 국민들에게 경내 관람을 실시해 왔으며, 이번 '칠궁' 개방으로 관람객들의 관심과 참여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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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font class="" color="#000066">[참고자료]</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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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b class="">칠궁(七宮) 현황</b></p>
<p class=""><br>
<b class="">▣ 일반현황<br>
</b> ㅇ 문화재명 : 육상궁(毓祥宮), 사적 제149호('66,3.22 지정)<br>
ㅇ 지정면적 : 25,791㎡(7,815평)<br>
ㅇ 건물현황 : 육상궁 등 묘궁 5개동을 포함 총 24동 278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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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lass="">▣ 연 혁 <br>
</b> 칠궁은 조선시대 제왕 중 정비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의 사친을 모신 사당이다. 이 곳은 원래 숙종의 후궁이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우가 있어 숙빈묘라 하였는데, 영조 20년(1744)육상묘로 개칭하였다가 동 29년(1753)에 육상궁이라 하였다.<br>
고종 19년(188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 20년 6월에 중건하였다.<br>
그후 융희 2년(1908)서울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사친묘를 합사함에 따라 영조의 후궁이며 진종의 생모인 정빈이씨의 연호궁, 선조의 후궁이며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의 저경궁,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대빈궁, 영조의 후궁이며 장조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경우궁을 육상궁 분내에 합사함으로써 육궁이라 했는데, 1929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덕안궁을 이곳에 이안하면서 칠궁이라 하였다.<br>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에서부터 남향한 육상궁, 연호궁, 덕안궁, 경우궁, 선희궁, 대빈궁, 저경궁이
있는데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전통적인 한국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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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br>
<b class="">▣ 주요 건물별 연혁</b></p>
<p class=""> <b class="">▲ 육상궁(毓祥宮)</b></p>
<p class="">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최숙빈은 숙종 44년(1718) 3월에 세상을 떠났다.<br>
영조는 즉위하면서 숙빈최씨의 사우를 그의 잠저(潛邸)에다 건립하기를 명하였으나 대신들로부터 잠저에 사우를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새로 터를 정하여 영조원년(1725) 12월에 경복궁 북쪽 즉 현재의 위치에다 건립하였다.<br>
건립당시 묘호는 숙빈묘라 하였고 영조 20년(1744) 3월에 육상묘로 정명하였으며 그후 다시 영조 29년(1753) 6월에 육상궁이라
개명하였다. 고종 19년(1882) 8월에 육상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고종 20년 6월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br>
육상궁은 영조 사친의 묘임에는 틀림없으나 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의 어진도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봉안처가 정조때까지는 봉안각이라하고
순조때 이후에는 냉천정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건물 북쪽 가까이 냉천이 지금도 있는 것으로 보아 냉천정이란 여기서 연유하여 봉안각을
지칭한 이름으로 추정된다.<br>
※ 잠저는 창업의 임금이나 종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하며, 영조의 잠저는 창의궁인바 창의궁 현 통의동
35번지 일대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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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lass="">▲ 연호궁(延祜宮)</b></p>
<p class="">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靖嬪)이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정빈은 경종원년(1721) 11월에 세상을 떠났다.<br>
정조대왕은 즉위 후, 진종을 추존하고 진종의 생모인 정빈을 위하여 정조 2년(1778)에 정빈묘를 연우궁이라 정호하면서 북부 순화방 즉
경복궁 추성문밖 서북방에 묘를 정하였다. <br>
육상궁과 가까운 거리에 존속해 오다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내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p>
<p class=""><br>
<b class="">▲ 저경궁(儲慶宮)</b></p>
<p class="">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仁嬪)김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인빈은 광해 5년(1613) 10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묘는 인빈의 서거 직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br>
영조 19년(1743) 이전에 원종의 잠저인 송현궁(현 한국은행 후편)에 봉안하였다가 선조의 8남인 여천군가에 옮겨 지었다. 영조 31년(1775)에
다시 사우를 송현궁으로 옮겨 궁호를 저경궁이라 하였다. 저경궁에 이안한 인빈묘는 그후 조선말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고종 7년(1870) 정월에
경우궁(景祐宮) 별묘(桂洞)에 이안하였으며, 고종 23년(1886)에는 경우궁이 계동에서 옥인동으로 이건하였고 융희 2년(1908) 7월에는
인빈묘를 육상궁내에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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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lass="">▲ 대빈궁(大嬪宮)</b></p>
<p class="">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희빈은 숙종 27년(1701) 10월에 돌아가셨다. 신주를 정동 사저에
봉안하였다가 경종 2년(1722) 10월에 희빈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면서 사우를 중부 경신방(현 낙원동 24번지 부근)에 건립하였다.
그후 고종 7년(1870) 정월에 육상궁 내에 이안하였고, 고종 24년(1887)에는 경신방의 묘궁에 환봉한 일이 있은 다음, 다시 순종
융희 2년 7월에 육상궁내에 재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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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lass="">▲ 선희궁(宣禧宮)</b></p>
<p class="">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의 생모인 영빈(暎嬪)이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으로, 영빈이 영조 40년(1764) 7월에 서거한 다음해 7월에
시호를 의열이라 추정하였고, 그후 백운동에 영빈묘가 건립되어 의열묘라 하였다.<br>
정조 12년(1788) 선희로 개명하였으며 묘를 궁으로 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어 진다. 고종 7년(1870)에 선희궁을 육상궁내에
이안하였다가 건양 2년(1896)에 다시 구 선희궁(북부 順化坊으로 현 신교동 1번지 맹아학교터)으로 환봉, 그리고 융희 2년(1908)에
다시 육상궁에 재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렀다.</p>
<p class=""></p>
<p class=""><b class=""> ▲ 경우궁(景祐宮)</b></p>
<p class="">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박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 12월에 서거하였으며, 그 다음해
신주를 창경궁내 전각에 봉안하여 현사궁(顯思宮)이라 하였다.<br>
순조 24년(1824) 5월에 별묘가 세워지고 같은해 12월에 경우궁으로 명명되었으며 순조 25년 2월에 경우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br>
건립한 터는 구 용호영의 터였으며 그 위치는 북부 양덕방(종로구 계동으로 현 휘문고교 운동장)에 있었다. 건립 후 성일각에는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는 육상궁의 냉천정에 아들 영조의 어진을 함께 봉안한 예와 같다.<br>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갑신정변에는 고종이 경우궁에 이어하여 혁신내각을 이곳에서 조직, 하루를 묵고 다음날 18일 이재원의
집 계동궁에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에 환어한 사실이 있다. 이일이 있은후, 경우궁을 이건하는 의논이 있어 고종 23년에 양덕방에서 인왕동(현
옥인동 45-46번지 일대로 중부병원 자리)으로 이건하였고, 다시 융희 2년에는 제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에 따라 저경궁·대빈궁·연우궁·선희궁
등과 더불어 경우궁도 육상궁내에 이안하게 되어현재에 이르고 있다. </p>
<p class=""><b class=""><br>
▲ 덕안궁(德安宮)</b></p>
<p class="">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br>
광무 원년 엄비가 황자를 출생하면서 경운궁내 구 명례궁터에 거처할 궁을 건립, 경선궁이라 불렀고 1911년 7월 엄비의 서거후, 덕안궁으로
개칭하였다. 1913년에는 현 태평로 1가 61번지에 신궁을 영조하여 엄비의 묘우로 하였으며 그 궁명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따라서 1929년
7월 11일에는 덕안궁을 육상궁 내로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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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520" border="0" cellspacing="2" cellpadding="4">
<tr><td class=""><img src="http://www.cwd.go.kr/korean/data/images/5.jpg" width="300" height="366"></td>
<td class="">[사진1] 칠궁 배치도</td>
</tr>
<tr>
<td class=""><img src="http://www.cwd.go.kr/korean/data/images/4.jpg" width="300" height="212"></td>
<td class="">[사진2] 칠궁전경</td>
</tr>
<tr>
<td class=""><img src="http://www.cwd.go.kr/korean/data/images/3.jpg" width="300" height="210"></td>
<td class="">[사진3] 육상궁과 연호궁</td>
</tr>
<tr>
<td class=""><img src="http://www.cwd.go.kr/korean/data/images/2.jpg" width="300" height="210"></td>
<td class="">[사진4] 대빈궁.저경궁.선회궁.경우궁 (좌로부터)</td>
</tr>
<tr>
<td class=""><img src="http://www.cwd.go.kr/korean/data/images/1.jpg" width="300" height="209"></td>
<td class="">[사진5] 냉천정 전경</td>
</tr>
</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