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2
황제와의 첫 밤의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은에게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이른 아침, 등청하던 재상들 가운데 몇몇의 발걸음이 먼저 동궁으로 향했던 것이 그를 증명했다. 어중간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대부분의 재상들은 황제의 총애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있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동궁을 찾아와 은을 배알한 재상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들을 덧붙였다.
“부디 태자를 생산하시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은은 미소로 답했지만, 그런 말이라면야 저 후궁에 틀어박힌 소용에게 가서 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말을 들어보았자,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은 소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라도 은은 당분간 여러 가지 일들로 바빠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은의 생각처럼, 오늘 하루 은을 찾아올 손님들이 즐비할 것이라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아침나절, 한 차례 재상들을 상대하고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고 환관이 여러 환관들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황후마마, 옥안이 이리 밝으시니 신의 마음이 놓입니다.”
“어서 오세요, 태감.”
마치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 환관에게서 듣는 높임말이라니. 낯간지러운 기분에 자꾸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인사를 받으시지요. 앞으로 황후마마께 목숨을 바칠 환관들입니다.”
그는 여태껏 자신을 맹신하고 따라온 고려 출신의 환관들이라며 그들을 소개했다. 제 손의 여파가 미치는 환관들을 다 데리고 오자면 끝도 없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자들만을 데려왔노라고 했다. 열댓쯤 되는 환관들이 은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마마에 관한 한, 대략의 일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앞으로는 저를 대하시듯 하시면 됩니다.”
은은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저를 괴롭히던 ‘고려인’이라는 딱지가, 이제 이렇게 단단한 연결고리가 되어 이 환관들과 저를 유대 시켜주고 있었다. 동향 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갑고 기뻤다.
“나를 도와줄 여러분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든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큰 일이 생길 때마다 손을 빌리도록 하지요.”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그들은 기꺼운 듯이 예를 표하고 고 환관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났다. 남은 고 환관이 은을 향해 은근스레 묻는다.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원래부터 그렇게 폐하의 안방정치에도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하례드릴만한 일이 아닙니까. 모든 재상들과 온 나라 백성들을 모조리 속여 놓았으니, 폐하께서도 의무감이 크실 겝니다. 하하.”
원색적인 농담에 두 사람이 한참을 웃는다.
“하지만 역시, 벌여놓은 일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가 버겁군요. 언젠가는 폐하께도 거짓 회임을 고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너무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원의 모든 환관들을 손에 쥐게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머잖아 정말 마마께서 회임을 하시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더할 나위없는 일이 되지요.”
“허면, 소용은 어찌 하시려구요.”
“그렇게만 된다면 적당한 기회를 봐서 제거해야겠지요. 어차피 마마께 목숨을 바쳤고, 인형으로 삼으시기로 하신 것이 아니십니까.”
“........”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실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마마 스스로의 일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 서궁에 들어앉은 여자 때문에라도 말입니다.”
고 환관은 은에게 꼭 필요한 충언들을 내려놓고 동궁을 떠났다. 그가 말 한대로 과연 가장 좋은 해결책이란 저 스스로의 회임. 그렇지 못하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열 달 동안 비밀을 숨기고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언주였다. 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손이 닿을 수 있도록 하려면 공녀들의 힘이 무조건 적으로 필요했다.
“장 상궁!”
“예, 황후마마.”
“당장 효궁으로 가, ‘언주’라는 궁인을 데려오게.”
//貢女 奇皇后//
“그래서 옷자락을 이렇게 그슬리셨다구요?”
언주는 우겸의 그슬린 옷자락을 보며 큭큭, 웃었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는 우겸의 말에, 숙면에 좋은 향유를 하나 가져다주었었는데 향유 병을 등촉에 너무 가까이 두는 바람에 불이 옮겨 붙어 그것을 끄려다 옷까지 그슬리고 말았다고 했다. 손으로 입을 막기까지 하며 웃음을 참는 언주 덕분에 우겸은 멋쩍게 웃어버렸다.
“그만 좀 웃거라.”
“의외로 빈틈이 있으시잖아요.”
“그러니 어쩌면 좋겠느냐. 관복을 이리 만들어버렸으니.”
“어디 보세요.”
언주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우겸을 찬찬히 훑어본다. 다행히 옷자락 끝 모서리 부분이긴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부분이라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보였다.
“이 끝에 장식된 천을 덧대보면 어떨까요. 괜찮을 것 같은데.”
우겸이 바느질에 대해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언주는 또 웃어버렸다.
“오늘 하루는 입고 계셔야 하니까, 밤에 가지러 갈게요.”
“네가?”
“이래봬도 바느질 경력 10년차라구요.”
“영 미더운데 말이다.”
“이러실 거예요?”
이제는 제법 친 남매 같은 장난도 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다른 눈이 있는 곳에서야 그렇지 못하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행동들이 멀리 진 대인의 시야에 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언주의 웃음 뒤로 누군가가 다가섰다.
“네가 ‘언주’더냐.”
은이 보낸 장 상궁이었다.
“예, 상궁마마.”
“동궁 마마께서 찾아계시느니라. 따르거라.”
장 상궁은 우겸을 의식하듯 간단하게 목례를 건네고 엄한 눈길로 언주를 보며 뒤돌아선다. 눈인사로 상궁을 뒤따르는 언주. 그 뒤에 대고 우겸이 상궁을 향해 말했다.
“그 아이, 내가 붙잡고 있었던 것이니 돌아가는 길에 야단을 칠 생각은 마시게.”
속내를 들켜버린 장 상궁이 더욱 뚱한 표정이 된다. 언주와 우겸은 장 상궁 모르게 작게 손 인사를 했다.
...
언주가 장 상궁과 함께 동궁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은은 먼저 온 손님을 맞고 있었다.
“입후를.. 하례 드립니다. 황후마마.”
“뭘 그리 데면데면하게 구는 겐가. 앉게.”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며 들어선 소란이 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은이 보는 소란의 안색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역시 심적인 부담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얼굴색이 나빴고 붓기도 있어 보이는데다, 무엇보다 저 배. 이제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다면, 이렇게 밖으로는 대놓고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을 터였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경황이 없어, 미리 문안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라니, 당치않은 소리. 홀몸도 아닌 것을.”
은의 말에 소란이 흠칫, 몸을 사렸다.
“얼굴이 그 모양이래서야 폐하께도 예가 아니지. 이제 내명부를 돌보는 것도 내 소임이 아닌가. 당장 태의원에 일러 탕재를 들이라 할 테니 어서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야 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황후마마.”
“그리고,”
“........”
“그 상태로는 후궁 생활이 불가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은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소란을 대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달갑기는커녕 두려움에 몸을 떨게 만드는 미소일 뿐이었다.
“불러오는 배를 숨기려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기 맑은 곳에서 맘 편히 요양도 할 겸, 해산할 때 까지 조용한 산사에 가 있는 것은 어떻겠는가. 내가 준비를 해 둘 테니.”
“..황후마마의 하교,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모두를 위한 것이니 서운케 생각지 말게. 자네에게도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할 테고.”
“예, 그리 하지요.”
“빠른 시일 안에 내가 폐하께 청을 드려 보겠네.”
그 사이 언주를 데리고 온 장 상궁이 문 밖에서 고했다. 은은 그만 돌아가도 좋다는 눈짓으로 웃어 보인다. 소란은 예를 갖추고 불안한 시선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뒤돌아선 소란을 향해 은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부디 아들을 생산하시게. 그 아들이 이 나라의 태자가 될 것임을 잊지 마시고.”
첫댓글 은이가 직접낳았으면 좋겠는데.....
은이에게 대세가 기울었군요. 일단 몇몇 재상들과 환관들이 은의 편이 되었으니까요... 은이 거짓 회임이 아니라 진짜로 회임을 하였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은의 저 마지막 말은...진심이 아니겠죠?;;
은의 마지막 말은 진심일까요 훼이크일까요?? 궁금작렬!! 그래도 전 은이 직접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어요ㅜㅜ 그나저나 진대인;;; 우겸과 언주를 이용할생각?!
오랜만에 왔는데 글이 두편이나 있네요 ㅎㅎ 어서담편도 .ㅋ.ㅋㅋ 근데...정말 소란의 아이를 태자로 만들생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