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는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켰다. 헬카이트의 말에서 미루어 짐작할수 있는 것이나 요사이, 아니 약 1,2백년 전쯤부터 점점 확대되고 있는 스리즈 안타리아의 일들을 보면 어렴풋이 자신이 무엇에 필요한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헬카이트, 루나는?"
"아아, 여기."
어디선가 들려온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헬카이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려 답했다. 평소라면 그다지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겠지만, 현재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라 저만한 존재도 그녀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루나는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여 저런 거물급 존재들이 모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견 둔중해보일 수 있는 검은 갑주와 갈색 날개.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존재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이런 특징은 유명했다.
지룡왕(地龍王) 울페리온이었다.
그는 루나를 힐끗 보더니 헬카이트에게 말했다. "헬프리즘이군. 그렇다면 길어봐야 2분일 터. 빨리 시작해야겠어. 일단 1단계는……."
울페리온은 다시금 루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순간 바닥의 암석을 한쪽 발로 한번 탕 구르며 외쳤다.
울페리온의 주박은 보통의 주박과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 그의 주박은 지룡왕주박이라 불릴 정도로 타 주박과는 그 위력부터 달리 하는 주박이었다. 물론 한정 시간 또한 비교도 되지 않게 길었다. 루나라도 이 주박을 뚫으려면 약 30분은 있어야 할 정도였다. 왜 이정도의 시간이 걸리냐 하면 온 몸이 주박당한 상태인데 마나를 개방하거나 뭐 그런것도 단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들도 보통의 레벨은 절대 아닌지라 30분의 시간 동안 그들이 자신을 그들의 일이 끝날때까지 단단히 이곳에 묶어두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의 힘을 빼내고자 한다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이씨……. 이때는 예전같으면 아수라파천무로 확 갈라버리면 됐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되니까 문제야 문제. 익숙하지도 않은 역천열낙월사식으로 뚫어야 하다니……. 좋아 좋아! 뭐 따로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니까, 마법하고 역천열낙월사식 동원해서 뚫어보자! 텔레포트는 분명 마법적 방해를 받을거고. 자 간다!"
란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져있었고 - 에르지야스가 자동시간조절시스템을 설치해서 아공간에도 낮과 밤이 있었다 - 란은 엑스칼리버를 보았다.
"흐음… 아수라가 아쉬운 때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자아……."
란은 심호흡을 했다. 자신, 기, 자연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삼성일체(三聖一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란은 그것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고도의 집중상태. 란은 이 상태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건드리면 유체이탈상태가 되어버릴 정도로 완벽한 그 셋의 트랜스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란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발검(發劍). 엑스칼리버가 눈부신 은빛의 싸늘한 검신을 드러내며 서서히 뽑혀나왔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길게 나간 검을 거두어들여 등 뒤로 검을 돌리고 천천히 앞으로 견적을 잡았다. 검끝이 단전에서 뻗어나가도록 가만히 겨누고 란은 조용히 외쳤다.
"역천열낙월사식(逆天裂落月死式) 멸공섬(滅空殲)."
"에잉… 여기 고기들은 도대체가 모닥불같은걸로 지글지글 구워먹을수가 없단말야! 역시 고기는 모닥불로 구워먹는게 제맛인데말이야. 에르지야스는 그런 별미를 몰라서 매일 적당히 익혀서 먹는데… 내가 그걸 먹을…음?"
몰래 숨어서 막 모닥불에 닭고기를 꼬챙이로 끼워 Y자모양 나뭇가지 두개에 그 꼬챙이를 얹어놓은 기파랑은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힘의 파동에 얼굴을 굳히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는 얼굴을 풀며 허허 웃었다.
"허헛! 그놈 참. 벌써 저 정도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확실히 낙월관 박살내고 뛰쳐나가서 얻은게 조금 있긴 있었구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쉬운 눈길을 구워지고 있는 닭고기에 한번 던진 뒤(그의 눈길은 오랫동안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막 마법진을 그리고 룬을 세우고 있던 흑명진룡 데카드는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힘에 흠칫하며 마법진을 그리던 수인을 멈췄다. 옆에 있던 무상진룡, 제피르 역시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감았던 눈을 뜨지 않은 상태였다. 제피르가 나직이 말했다.
"너도 느꼈나."
"음. 강렬한 힘의 파동이더군. 상당히 강력한……. 그런데 현재 이 아공간에 에르지야스나 헬카이트님, 그리고 울페리온님을 제외한 존재 중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상대가 있었나?"
"…모르겠군. 어쨌든 현재는 우리 일에 충실할 때다. 수인을 다시 맺지."
데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소리없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느려진 듯이, 강력한 반가속화마법이 걸리기라도 한 듯 느리게, 그러나 장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역천열낙월사식 멸공섬의 진수인 것이다. 극성이 아닌 6성 공력임에도 불구하고 몇겹으로 중첩된 그 결계를 깨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이 아닌 최고위급 클래스의 마법 결계를……. 새로운 경지의 깨달음이었다. 멸공섬, 역천열낙월사식을 넘어선 새로운 경지의……. 이윽고 깨끗이 뚫려버린 낙월관 결계를 보며 란은 털썩 주저앉았다.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한 것이었다. 전혀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헤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성공했어. 나 혼자서 이런 걸 만들어 해내는거… 불가능할줄 알았는데… 헤, 헤헤헤헷……."
주르륵,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기쁨에서 오는 눈물이었다. 그동안 란이 쓰던 검술, 기술 중 정말 초(超) 필살기라 할만한 것들 중 자신이 만든건 없었다. 아수라파천무(阿修羅破天舞). 진(眞) 아수라파천무. 역천열낙월사식 멸공섬. 크게 이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 초필살기. 그리고 검술은 문 크로슬리와 자기류 검법, 그리고 리베리아 가문검법을 조잡하게 융합해내어 만든 검술. 그리고 그걸 다 잊어버리고 또다시 다른 이의 길을 걸었다. 역천열낙월사식, 모든 진행자들의 데이터를 융합해내 추리고 또 추려 만든 톱 클래스의 검술. 그러나 그것 또한 자신의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이제, 비록 시작이긴 하지만 '자신의 것' 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느낀 듯 란은 서서히 일어났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채 두 자루의 쌍검을 등 뒤로 돌려 묶은, 그야말로 야인(野人) 이었다. 란은 씩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사부."
기파랑은 말했다. "뭐가 오랜만이냐 녀석아!" 그리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 따닥! 금세 몇대 얻어맞은 란은 투덜대며 따졌다. "우씨, 왜 때려요!" "왜 때리냐고? 네놈이 그걸 지금 말하게 됐냐! 네가 훈련을 빼먹은것 때문에 내 봉급이 적어졌단 말이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말대꾸네 이놈이? 어디 더 맞아봐라!" "우아아악!" 따다다다다닥!!!
"그래, 어쨌든 돌아왔구나. 바깥 세상 - 기파랑은 아공간 밖을 이렇게 불렀다 - 에 나가니까 기분이 어떻던?"
란은 드러누워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나가니까 좋은것 같기도 했지만, 원래 간게 도와주려고 간거니까……." "도와줘? 뭘? 바깥 세상에 연결된 연(蓮)이더냐?"
란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채 하루도 안된 기간에 한 일이라곤 참 스펙터클했어요. 루나와의 격전 하며……." 란은 말을 멈췄다. 기파랑의 얼굴에 떠오른 형언할 수 없는 표정 때문이었다. 기파랑은 침을 삼켰다.
"루나? 루나라고? 그 녀석이 왜 그곳에 왔단 말이더냐? 아니 아니. 그것보다 격전이라고? 그렇다면 너와 루나가 한판 붙었단 얘기냐?"
란은 멋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파랑이 말했다.
"이겼냐 졌냐."
"져, 졌는데요."
"……."
기파랑은 한동안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조금 지나자 걱정이 됐는지 란은 슬그머니 다시 소리내어 불렀다. "저, 사부?" "…그래. 뭐 실력차가 워낙 컸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아까 그 기술로 어느정도는 따라잡은것 같구나." "에?" "그것의 이름을 지어야 할 게 아니냐. 뭐라고 짓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