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영남땅 비슬산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도반의 병문안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동구의 ‘인수문고’ 로 유명한 남평 문씨의 고택을 찾았다. 뜨거운 여름 고풍스러운 황토 담장 너머 능소화가 고샅길 바깥으로 흘러넘치듯 너울너울 피어오른다. 넌출이 솟아올라 하늘까지 가닿을 듯한 까닭에 ‘능소’라고 했다는 고인들의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서울도심 조계사 구석 켠에 있는 낡은 이층 일본식 기와집의 담장에도 이즈음이면 그 꽃은 그 자리에 피어 있다. 도심에서도 그 꽃은 여전히 여름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 정열적인 기상과 더불어 붉은 색깔 그리고 도발적인 생김새가 보통사람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한 궁녀의 상사병이 결국 꽃으로 화하여 죽어서도 임금의 모습과 발걸음 소리를 그리워하며 담장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움보다는 처연한 마음을 먼저 일어나게 한다.
혹자는 ‘기생꽃’으로 불렀다. 늘 화려한 자태로 요염함을 자랑하며 마지막까지 그 모습 그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연예인의 삶 속에서도 그 꽃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 『능소화』 는 안동에서 발견된 사백여 년 전의 이응태씨 부인의 애틋한 사랑의 ‘원이 엄마의 편지’에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편지 원문에는 한마디도 없는 ‘능소화 곱게 피던 날 만나 능소화 만발한 여름날 이별한 응태와 여늬’로 승화된다. 그리고 시인 이해인 수녀는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라고 하면서 ‘능소화 연가’를 불렀다.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아울러 제일이라는 ‘강호 능소화’는 황해도 백천군 강서사 경내에 있다. 이는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 걸로 봐서 절집의 능소화 역사도 만만찮다고 하겠다. 얼마 전 비구니 절에서 원고청탁서를 보내왔다.
이곳 ○○사에서는 ‘양반꽃’이라고 불리는 능소화가 장맛비 속에서도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습니다. 다른 꽃들이 시들시들 제 색을 잃고 초라하게 지는 것과는 달리. 어느 날 ‘뚝’하고 떨어져 그 꽃이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 그 우아하고 처연한 모습에서 석가모니의 남김없는 열반을 보게 됩니다.
그 글을 보면서 요즈음 젊은이들 표현을 빌자면 ‘양반꽃’이란 단어에 ‘필’이 꽂혔다. 일반적으로 능소화의 여성적 이미지에 반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꽃말이 ‘명예’이고 또 양반 집 마당에만 심었다. 혹여 평민들이 가꾸면 벌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예전에는 아무나 심어놓고 즐길 수 있는 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 꽃에서 ‘양반’이란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가 양반 측에 끼이지 못한 까닭인가 보다.
사실 성이 없는 꽃을 보며 각각 여성미를 발견해내고 남성스러움을 찾아낸다. 이게 업이다.
‘물’을 두고서도 사람들은 그걸 물로 보지만 물고기는 그렇지 않다. 사람으로 치자면 ‘공기’ 정도로 인식한다고 한다. 하늘에 사는 천신들에게는 물이 투명한 ‘얼음’으로 보인다고 유식론은 말하고 있다. 같은 물을 보면서도 각기 자기의 처지에 따라 볼 수밖에 없다.
모자가게 주인은 그 사람이 쓴 모자로 그 사람의 미적안목, 경제수준 등 모든 것을 파악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모자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 잣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모자에만 유별나게 집착하여 그것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부분적 명품족’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판단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업이기도 하다.
내가 머무는 토굴에도 올봄에 능소화 한 줄기를 옮겨 심었다. 저게 ‘언제 커서 담장을 넘어가나’하고 생각해보는 한여름 오후이다.
출처 ; 원철 스님 / 모두 함께 꽃이 되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