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불망하던 눈꽃빙수를 기어코 찾았고 팥-블루베리-망고 재치고 '홍시'가 완전 내 스타일입니다. 환장할 만큼 섹시하고 달달한 맛 때문에 연속으로 네 개(15000*3=45000)를 폭풍 흡입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중국의 사유는 음과 양이 상관성이라는 틀로 이 이행 과정을 살피고 그 결과를 가늠합니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어서 그 상관관계 속에서 변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젊음 속에 이미 늙음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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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유럽 사유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끝은 목적이자 완성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유는 끝을 목적이나 완성으로 보지 않아요. 유럽 사유가 시작과 끝의 사유라면, 중국 사유는 끝과 시작의 사유에요. 끝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고명섭/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교양인/358-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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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된 영화 <연인1992>을 보았는데 중국인 남자(양가휘)와 프랑스 여성의(제인 마치) 러브스토리가 죽은 줄 알았던 나의 남성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고 엔딩의 선상에서 들리는 쇼팽의 왈츠까지 온몸의 솜털을 주볏부볏 세우고 맙니다. 영화를 5번쯤 본 것 같은데 정말 새로운 이 느낌은 뭔가요? 퐁티의 몸의 철학인가. 영화 < 연인 (L’Amant, 1992)> 은 장-자크 아노 감독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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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를 배경으로, 15세 프랑스 소녀와 중국인 부호의 금지된 사랑을 그립니다. 탕웨이의 <색계2007>를 무색게 하는 관능과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1929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가난하고 불행한 프랑스 가정의 10대 소녀는 학교 방학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오는 페리에서 부유한 중국인 남자를 만납니다. 그는 사업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청년입니다. 소녀는 처음에는 15살이라고 말하지만, 그에게는 17살이라고 속이고, 남자는 32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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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대화 끝에 소녀는 그의 리무진을 타고 도시까지 가게 되고, 다음날부터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남자는 첩들을 위해 마련해 둔 방에서 소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눕니다. 소녀는 곧 파리로 돌아가고 남자는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들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깊이 빠져듭니다. 소녀의 가족은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남자의 재력을 알고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자 그들의 관계를 묵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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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자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해요. 남자는 아버지에게 소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간청하지만, 아버지는 백인 여자와 함께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거절합니다. 결국 남자는 정해진 결혼을 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에 오릅니다. 수십 년 후, 소녀는 성공한 작가가 되었고 어느 날 남자가 아내와 함께 프랑스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는 소녀에게 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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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사랑은 짧았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국 사유는 끝을 목적이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유럽 사유가 시작과 끝의 사유라면, 중국 사유는 끝과 시작의 사유이니 끝은 새로운 시작이 아닙니까? 영화는 땀에 젖은 천, 습한 공기, 햇살과 그늘의 명암 등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몸과 감각의 영화를 만듭니다. 육체적 접촉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 변화가 서서히 드러나는 감각적 언어가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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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가 아닙니다. 나이, 인종, 계급, 식민지 권력 구조가 얽힌 가운데 “사랑”은 쾌락과 착취, 자유와 억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합니다. 남자는 그녀에게 돈을 주며 감정을 사고, 여자는 그 관계를 통해 여성성과 주체성을 자각해 갑니다. 프랑스의 가난한 백인 소녀와 베트남의 부유한 중국 남성이라는 설정은 식민지 권력의 위계를 뒤집는 듯하지만, 결국 그 위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조차 제국주의 구조에 의해 불가능한 감정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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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답게 회상체 내레이션이 영화의 정서를 이끕니다. 이미 끝난 사랑을, 시간이 지난 후 되새기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고백으로 완성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육체가 아닌, 기억 속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아! 뜨거웠던 사랑의 편린들이 소녀의 자스민향기와 함께 온몸을 감싸고 돕니다. 이 영화는 ‘사랑의 절정’보다 사랑의 허무와 불가능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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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나는 그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라는 내레이션은 사랑의 본질이 이해 불가능한 감정이라는 걸 고백합니다."죽거든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한국판 소나기(황순원)인가. 유럽 사유가 '완료'를 찾으려 할 때, 중국 사유는 '순환'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끝난 것'인가, 아니면 이제야 '시작된' 것인가? 사랑은 감각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자신을 소비하는 자기 기만일까?
2025.7.29.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