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등 강가로 나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 곧기는 뉘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조선 중기 윤선도가 남긴 시조 ‘오우가’에 나오는 대나무를 이른 노래다. 대나무는 예전부터 묵객들의 사군자 소재이며 서민들에게는 바구니를 비롯해 생활 도구에 쓸모가 많았다. 한때 비닐하우스 농사에서 골조로 쓰였으나 내구성이 좋은 철골에 밀려났다.
나에게 대나무는 어릴 적 연을 만들었던 재료였다. 방패연이나 가오리연 제작에는 일반 대나무보다 훨씬 작은 신우대가 좋았다. 신우대는 줄기가 가늘고 마디가 굵지 않아 얇게 쪼개 한지를 잘라 붙여 목줄로 균형을 맞추어 하늘 높이 날려 올렸다. 농가에서는 닭장을 짓거나 사립문을 엮을 때도 대나무는 요긴하게 쓰였다. 이런 대나무가 흘러간 세월 따라 기억 저편 아득해졌다.
고대 중국 오나라 사람 맹종의 효도를 일러 ‘설리구순 맹종지효(雪裏求筍 孟宗之孝)’라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병환이 깊어가던 모친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하자 죽순을 구하러 나섰다. 그때가 마침 겨울이라 대숲 속에는 눈이 쌓여 죽순을 마련하지 못해 울고 있었더니, 기이하게도 눈밭에 죽순이 솟아나 어머니께 요리해 바칠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맹종 죽순 이야기다.
대나무의 용처에서 죽순으로 옮아온 데는 나름의 연유가 있다. 나는 이른 봄부터 산과 들로 나다니면서 자연에서 채집하는 찬거리라 다양하다. 이런 산나물과 들나물들은 우리 집 식탁에 올림은 물론 주변 지기와 친구에 나누기도 예사다.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준 엊그제는 북면 외감 들녘에서 돌나물을 걷어와 물김치 재료로 삼았고 미산령을 넘으면서 영아자 산나물을 뜯어왔다.
늦은 봄이나 초여름이 다가오면 연례행사가 있다. 이때면 산나물도 아니면서, 들나물도 아니면서 우리 집 식탁에 오르는 것이 있다. 이게 다름 아닌 죽순으로 내가 자연에서 구하는 봄철 이후 거의 마지막 찬거리에 해당한다. 죽순은 비가 온 뒤 대숲으로 가야 꺾을 수 있는데 기상 조건도 맞아야 하지만 대숲이라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는 안 되기에 주인이 관리하는 사유지는 제외한다.
나는 창원 근교 대숲에서 죽순을 마음 놓고 꺾어오던 국유림이 있었다. 임야는 주택과 달라 문패나 주소를 붙여 놓지 않아 누가 주인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국유림임을 쉽게 판별하는 요소는 군사시설 지구다. 그곳이 다름 아닌 지금은 함안으로 터를 옮겨간 북면 중방마을 뒤 향토사단 사격장이다. 병사들의 사격 훈련이 없는 날이면 그 언덕 대숲에서 죽순을 꺾어왔다.
북면 향토사단 사격장 가까운 곳은 근래 감계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루었다. 향토사단 사격장도 택지로 개발해서 주택을 짓는 공사에 착수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몇 해 전부터 그곳 대숲으로 찾아가질 못하게 되어 대체할 국유림 대숲을 미리 점 찍어둔 데가 있었다. 낙동강 강언덕에 절로 자란 대숲이었다. 국가하천 부지는 물어보나 마나 당연히 국유림이었다.
며칠 전 오랜 가뭄 해갈에 도움이 된 비가 왔다. 유월 둘째 금요일 자연학교는 오후반 학생이 되어 점심 식후 느긋하게 등교했다. 죽순이 솟아나길 기다려 근교 대숲으로 나가는 날이다. 동정동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주남저수지를 둘러 가술을 지난 송등에서 내렸다. 비닐하우스 당근을 수확한 논에는 모를 내어놓았다. 강둑 너머 둔치 파크골프장을 지나 유등 강가로 향해 걸었다.
유등 강언덕 서원사 근처에 이르러 대숲으로 드니 죽순은 막 솟아나는 즈음이었다. 쇠뿔 같은 죽순 둥치를 발로 밀쳐 차 몇 개 꺾어 껍질을 벗겼더니 속살이 나왔다. 이후 주남저수지 근처 초등학교 재직하는 벗이 퇴근길 차를 몰아와 합류했다. 친구와 같이 고깃배가 묶여 있는 강 언저리 대숲으로 들어가 일용할 찬거리가 될 죽순을 더 마련해 시내로 들어오니 하루해가 저물어갔다. 22.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