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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누가복음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눅 9:28-36 / 눅 9:28 [형상이 변화하시다; 마 17:1-8, 막 9:2-8] 이 말씀을 하신지 여드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그런데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옷 또한 희어져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더니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스런 빛에 감싸인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32) 그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피곤하여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광채와 영광에 싸여 있는 예수의 모습과 그곳에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33)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불쑥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구름이 일어나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35) 그때 구름속에서부터 음성이 들려 왔다. ㄱ)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ㄱ. 신 18:15, 시 2:8, 사 42:1) 36) 그 음성이 들린 후에 제자들이 보니 예수만 거기 계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성의 모습을 벗고, 본래의 신성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건입니다.
용모가 변화되고(28-29) 누가는 변화 산 사건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지 8일 후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대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특별히 선별하여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이 산을 헬몬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던 중 용모가 변화되십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때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합니다(마 17:2). 이는 예수님께서 본래의 천상적 존재로 변화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시 84:11; 계 1:16; 10:1).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빛은 입고 있으신 옷까지도 희게 투과되었습니다. 이는 성자의 신성의 가시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이나, 부활하여 본래의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30-36)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이들이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것은 율법과 선지서의 가르침이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일관되게 계시해 온 구약성경의 예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하시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졸던 제자들이 잠을 자다가 깬 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서 대화 소리와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광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대화를 끝내고 떠나려 하자 베드로는 3개의 초막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이 감동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귀한 손님을 위해 초막을 지어 대접하는 당시의 풍속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왕하 4:9-10),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대개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출 16:10; 레 16:2; 민11:25; 왕상 8:10-11; 겔1:4).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이때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인 “이는 나의 아들 곧 나의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는 시편 2편 7절과 이사야 42장 1절의 말씀을 종합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와 수난 기간 때에 들렸습니다(마 3:17; 요 12:28).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공생애 초기와 중간, 그리고 마감하는 시기에 친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걷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믿음 있는 성도 중에서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빨리 해결하고픈 막연한 기대 심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포기해야 할까요? 두려움에 쌓인 어린 아이를 연상해 봅시다. 두려움에 소리쳐 울부짖을 때 안 보이고 멀리 있어도 내 아이의 소리를 듣고 달려와 안아주시는 어머니가 떠오르지 않나요? 시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도움으로 환난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기도 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9:29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 계 1:16; 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 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마 28:3; 막 16:5; 행 1:10; 계 3:4, 5; 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 )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 )와 '빛이 번쩍나다'를뜻하는 '아스트랖토'(* )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는 ❶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❷ 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❸ 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 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9:30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 18).
=====9:31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 )인데 이말은'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9:32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결과를 초래했다(22:42-46).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다.
=====9:33
<변회산>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9:34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 16:10; 19:9; 24:15-18; 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❶ 예수와 두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❷ 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❸ 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 24:4-5).
=====9:35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오직'이란 뜻의 '모노스'(* )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 막 9:9).
제자들이 경험한 천국
눅 9장 27~36절 / 안효관목사
미국 뉴멕시코 주에 약 400만년 전에 형성된 ‘칼스배드’(Carksbad)라는 너무너무 아름다운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동굴을 처음 다녀온 뒤에, 그 동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기의 아내를 데리고 다시금 그 동굴을 찾아갔습니다. 그 두 부부는 동굴 한가운데에 펼쳐져 있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 아름다운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동굴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전에 한번 여기를 오지 않았소?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에 대해서 왜 나에게 단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나요?”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다오. 내가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당신이 직접 눈으로 보라고 당신을 여기에 데려 온 것이라오.”
여러분!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천국을 보고 와서, 여러분이 본 천국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남원 동북교회에서 신앙부흥회가 있었는데, 강사로 오신 분이 병원에서 주사 쇼크로 58분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어있던 58분 동안에 천국을 보고 와서, 자신이 보고 온 천국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분이 무어라고 간증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제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분이 천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끔씩 한숨을 푹- 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직접 본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말로도 자신이 본 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곤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직접 천국을 본 적은 없지만, 제가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도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천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열두 진주문과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된 길들,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있고 강 주변에는 사시사철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생명나무가 있고, 성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로 둘려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설명해 놓았지만, 사실 천국은 그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설명한다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천국입니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천국은 너무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천국에 가 보지도 않고서 그곳이 좋은지 어떻게 아세요?” 그 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건 말이야, 천국에 간 사람들 가운데 천국이 싫다고 돌아온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었거든.”
그렇습니다. 천국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명은 그런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서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면서 하나님 나라 -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셔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3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을 가만히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 같습니다. 3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친히 천국복음을 가르쳐주셨고, 천국의 삶을 보여주셨건만 제자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곧 공생애를 마치고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건만, 제자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무언가를 얻으리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 주님의 마음에 뼛속 깊이에 스며드는 아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 후의 상황을 마태복음 16-17장과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누가복음 9:18절 이하의 말씀을 종합해서 구성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 다다랐을 때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참 위대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헤롯의 손에 죽었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큰 능력을 베풀었던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이 땅에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또다시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3년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니며 내게 배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과감하게 앞에 나서면서 말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십니다.”
그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마음이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알려주어도 되겠구나’ 생각하시고는,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텐데, 거기에 가면 내가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단다. 그러나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고 삼일 만에 살아날 테니 너희들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깜짝 놀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로마의 억압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고 우리 선생님이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왕좌에 오르면 자기들도 뭔가 한 자리씩 할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고 잔뜩 기대했던 예수님이 왕좌에 오르시기는커녕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성질 급한 베드로가 또 나서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런 생각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선생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단호하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자로구나.”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다고 좋아했더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이 정도니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생각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이 땅에 왔는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겠구나.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 보아야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발걸음을 돌려서 북쪽 헬몬산으로 향하셨습니다.
헬몬산 아래 이르렀을 때에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3명의 제자들을 불러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고는 다른 제자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도 그래도 영적으로 좀 눈이 떠 있는 이 세 명을 데리고 가는 게 낫겠구나’ 생각하시고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오후 늦게야 산에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올라갔을 때에는 저녁이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여행길에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은 힘들게 산에 올라왔기 때문에 헬몬산에 오르자마자 곧 지쳐 쓰러져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엄청난 일을 생각하면 피곤조차 느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갑자기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광채가 났다’는 말은 어두운 밤에 번개가 번쩍해서 캄캄했던 세상이 갑자기 환해졌을 때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얼굴과 옷이 그렇게 빛났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도록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되었다”(막9: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구경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황홀할 정도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찬란한 빛 때문에, 잠에 떨어졌던 제자들은 눈이 부셔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뜨고 그 빛나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쳐진 광경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이 때까지 살아오면서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경험, 천국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과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31절에 보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황홀한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시는데, 예수님께서 이제 곧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벌어진 상황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대화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넋 놓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 황홀한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막 그 곳을 떠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본 바로 이 황홀한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떠나가는 두 사람을 붙잡아 두고 싶어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 가지 말게 붙잡아 두십시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을테니. 하나는 주님이 사용하시고, 다른 두 천막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살도록 해 주십시오.” 베드로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베드로도 온전한 정신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3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베드로 자신도 그 말을 해 놓고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상황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 광경을 오래오래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원히 붙잡아 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그곳을 떠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우리 기독교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펄시 콜레라는 한 선교사가 7일 동안 천국을 경험하고 와서 쓴 책입니다. 물론 그 책의 잘못된 영향력이 1992년 시한부 종말론 사건으로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큰 문제를 주기는 했지만, 그 책을 쓴 펄시 콜레라는 분도 자기가 천국구경을 하고 나자 하나님께서 ‘너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천국을 떠나오기가 싫었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강렬한 열망은 일순간에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구름이 그들을 덮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황홀했던 경험은 거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진정으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제자들을 덮었을 때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갑자기 구름이 몰려온 것도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기 충분한데, 그 구름 속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제자들은 두려워서 떨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34절에서는 단순히 ‘무서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7장에는 “심히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히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너무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마치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낀 그런 거룩한 공포를 제자들이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때의 경험을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경험, 황홀한 경험이었기에 평생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후서에서 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후서는 핍박 때문에 고향을 떠나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베드로는 자신이 변화산에서 잠깐 동안 경험한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예수님)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너무나도 황홀한 천국을 경험하였는데, 그 천국 경험이 평생 잊혀지지 않고 힘들 때마다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그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기에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용기를 잃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그 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경험은 그렇게 사도 베드로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경험이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구름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음성에 귀 기울이던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이미 세상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 보인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36절에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님만 보인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204장에서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렇게 찬송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게 천국입니다. 세상살이의 고민과 걱정을 다 끌어안고 사는 곳에는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버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평강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때, 우리는 그것을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움켜쥘 것은 다 움켜쥐고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마음에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우리 주님은 장차 일어날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면 누가 주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까, 누가 왼편에 앉게 될까’ 서로 다툼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기대를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천국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교회에 가면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교회에 오셨고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천국을 건설해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들의 심령 속에 천국을 이루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오늘도 천국을 경험하러 변화산에 올라간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당을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찾아올 때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바로 이 자리에서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황홀한 천국의 경험을 했던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 나오면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교회당이 아름답게 지어져있기 때문에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교회당에서도, 비가 오면 천장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예배당 안으로 뚝뚝 떨어지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교회당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의 설교가 좋아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덤과 같은 곳이기에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곳은 무덤과도 같습니다. 변화산 위에 건설된 무덤이요, 갈보리산 위에 세워진 무덤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근심이나 걱정, 세상의 염려, 사업의 실패로 인한 고통, 금전적인 문제로 곤고해진 우리들의 마음들을 모두 장사지내야 하는 무덤이 바로 교회요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런 세상적인 모든 것은 다 교회라는 무덤에 장사지내고, 그래서 걱정과 근심 덩어리인 ‘나’라는 존재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오직 예수만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없어지고,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그리고 내가 안고 있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다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거기에 장사지내고, 그리고 나서 예수만 바라볼 때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은 다 잊고 예수님만 계시면 행복한 바로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덤이면서 동시에 천국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변화산에서 제자들에 체험한 것과 같은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빛난 광채가 변화산 전체를 휘감았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빛난 광채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체험한 것과 같은 천국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없어져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서 계신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며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세상살이의 고달픈 짐, 가정의 문제라는 무거운 짐,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라는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영혼들을 향하여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주님 앞에 가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서 세상의 모든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다 벗기시고 평강 가운데 쉼을 얻게 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나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오직 예수만 보여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그 천국 경험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준 것처럼, 여기 예배의 자리가 여러분에게도 천국을 경험하는 변화산이 되어 여러분이 경험한 천국 경험이 힘들고 고달픈 세상살이와 인생살이에서 늘 큰 힘을 주는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천국을 경험하는 기쁨과 은총을 주셔서 변화산의 감동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원과 시간
눅 9장 28~36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영원과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천지가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과 물질 삼차원의 세계가 천지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시간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은 영원하심으로 시간에 소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제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짓자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은 줄기차게 흐르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이 호수이면 시간은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물과 같습니다. 강물은 자꾸 흐르잖아요. 그러나 호수에 들어간 이상은 물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잠잠하게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들어가면 시간이 흐르지도 아니하고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시간 속에 살 때는 끊임없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 이 우주의 시간은 마귀가 점령하고 있어서 마귀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부패되고 부정과 흑암이 꽉 들어찬 시간 속에 있습니다. 과거에도 마귀로 말미암아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시간이고 지금도 마귀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장차도 그렇게 할 것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 삶의 시간은 마귀의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시간이 언제 끝나느냐. 이 세상 시간이 흐르는 것을 끝내고 나면은 마귀의 세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있을 동안에 세월 안에 살고 세월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가 되고 변화 받고 변화되는 현실 환경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일단 이 땅의 변화된 세계 속에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이 세상 시간이 끝나면 영원으로 들어갑니다. 영원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변화가 없습니다. 흐름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대로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서 구원 못 받았으니 다시는 저 세상에 가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세상에 가면은 시간도 변화도 없습니다. 시간과 변화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지 이 세상을 떠나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현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세가 지나고 내세로 들어가면 영원한 세계가 전개되면서 시간도 변화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제2의 기회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영원히 형벌 받을 따름인 것입니다.
<본론>
1.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그들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었습니다. 그 당시에 모세는 세상을 뜬지 2천 년 가까운 전의 사람이고 엘리야는 천 년 가까이 전의 사람인데 분명히 모세는 2천 년 전에 죽었고 오늘날로 계산하면 4천 년 전이지요. 엘리야는 3천 년 전에 구름 타고 올라갔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시간을 초월해서 공간을 초월해서 그들에게 나타났는데 여전히 모세요, 여전히 엘리야였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보여준 것은 일단 사람이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어린 아이로 태어나고 젊음이 있고 장년이 있고 노년이 있고 죽지만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존재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옛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니 영원을 입은 모세, 영원을 입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놀랬습니다. 주님 이곳이 참 좋습니다. 여기는 보니까 죽는 것도 없고 늙는 것도 없고 변화도 없고 영원한 모세요, 영원한 엘리야요, 영원한 예수님이요, 영원한 우리들이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초막을 짓고 여기서 함께 삽시다. 그때 구름이 내려와서 그들을 덮었고 하나님 음성이 들려오기를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말을 들어라. 그리고 난 다음 구름이 벗어지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우리 산 아래로 내려가자. 왜, 산 아래는 시간이 흐릅니다. 과거가 현재, 미래가 흐르고 젊음이 늙어지고 늙음이 죽음을 가져오게 되고 병든 자가 생기고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싸움이 있고 저주가 있고 절망이 있는 변화무쌍하고 흑암의 세력이 꽉 들어차고 파괴와 고통이 있는 세계로 주님께서 내려가자! 그것은 상징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원에 그냥 계셨으면 좋았을 것인데 왜 산 아래 이 흑암의 세상에 내려왔느냐. 이 시간의 변화무쌍한 고통의 괴로움 속에 사는 사람들을 건져주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사람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 내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로 내려오자 귀신 들린 사람이 있고 병든 자가 있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슬픈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예수님은 돌보아 주시고 그들의 짐을 짊어지시고 그들과 함께 삶을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이가 예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아요.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산 위에서 보았지 않습니까? 모세도 엘리야도 영원의 세계 속에서는 죽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으로 빛을 발하고 나타나시자 2천 년 전에 세상을 뜬 모세도 여전히 젊은 모세로 천 년 전에 떠난 엘리야도 젊은 엘리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 여기에는 영원한 세상이구나. 그 영원의 세상을 가진 예수님께서 육신을 쓰고 시간 속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와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시간 속에서 고통하는 우리의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시간 안에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릴 때가 있고 젊을 때가 있고 중년이 있고 노년기가 있고 죽습니다. 시간 안에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성장하여 죽는 과정의 시간 안에 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현실의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 육체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생활도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세계는 마귀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세력으로 지배하는 세계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인간은 이 암울한 시간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도 마귀의 지배하에서 고통당했는가 하면 장년이 되어도 마귀의 세력하에 있고 늙어도 마귀의 세력하에 있다가 세상을 뜨는 비극 속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 위에 ‘삶’이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강물 위에서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지납니다.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거를 돌이킬 수 없고, 현재를 붙잡아 놓을 수 없으며 미래를 비껴서 나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하여 야고보서 4장 14절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의 슬픈 현상을 베드로는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결국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이며,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한 부자가 저명한 학자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의 묘비에 새겨 넣을 좋은 문장을 하나 적어 달라고 했습니다. 학자는 그에게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를 설명해 달라고 하니까 그 부자가 입에 침을 튀기면서 그가 살아온 자랑스러운 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학자가 다 듣고 난 후에 아~ 과연 당신 많은 일을 이루었군요. 그러나 무덤 묘비에 쓸 문장은 내가 생각해 보니까 세 구절밖에 없습니다. 나는 태어났다. 나는 살았다. 나는 죽었다. 그 중간에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다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해도 인간은 누구나 이 땅에서 태어나 살면서 고난을 겪고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융은 우리 시대에 가장 심한 노이로제는 허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태어났다 자랐다 죽었다 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여 죽는 시간 안에 살며 변화를 체험하지만, 누구나 죽음이라는 시간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습니다. 죄악의 고통, 허물의 고통, 질병에 잡혀서 고통당하고 가난과 저주와 절망의 고통,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 안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간적인 존재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이가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쓰고 온 이유는 여러분과 나를 시간 안에서 고통당하는 여러분과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올 필요가 없는 분인데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때문에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러분과 나를 예수님께로 끌어가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끌려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났기 때문에 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훌륭하기 때문에 와 계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롭고 거룩하기 때문에 와 계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 볼 때는 별로 자랑할만한 비교될 처지도 못됩니다. 사람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으며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습니까?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느냐.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누구세요? 나는 사랑이다.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사랑은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고 찾아오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주님은 어찌 할 수없이 여러분과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과연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당에 왔는데 하나님이 계실까? 하나님이 날 돌봐 주실까? 그것은 마귀가 갖다 주는 의심인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예수님은 여기에 와 계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이 여러분의 호소를 들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므로 정말로 너무나 억울할 정도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강제적으로 거머쥘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시간적 존재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인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인데 변화무쌍한 육신이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아이로 태어나서 청장년으로 자라나시고 시간 안에서 아담이 저지른 죄악을 인간을 대신하여 청산하시고 영생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으로 오셔서 예수님은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셨고 피곤해 하시고 주무셨으며 민망히 여기시고 근심하며 노하시고 인간적인 희로애락, 감정과 눈물과 땀을 흘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한없는 고통을 당하셨고 우리가 당하는 여러 시험들을 겪으셨으며 죽음까지도 당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여러분과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대신 책임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대속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의 대속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이 오셨으나 오직 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죄인이 죄인의 죄를 짊어질 수 없지요. 인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질 수 있어요. 내가 빚이 없어야 빚 있는 사람의 빚을 대신 감당할 수 있지 나도 빚쟁이면 이웃의 빚을 어떻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타락한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처럼 사셨으나 죄는 예수님께 전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잉태되시고 죄 없이 태어나시고 죄 없이 33년을 사신 분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에 슬픔, 고난, 괴로움을 겪고 살았지만 우리는 죄를 다 지었는데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죄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인간의 죄와 허물, 병과 저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청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은 여러분과 나의 죄를 다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모든 불의를 청산하고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청산하고 우리의 저주와 가난과 슬픔을 청산하고 우리의 죽음과 절망을 청산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너희들이 이룬 것이 아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면 주님이 여러분과 나의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청산해서 주님 앞에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니까 우리 인간과 같이 오셔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세력을 다 옷 벗겨 버리고 폐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십자가에서 폐하여 버리고 마귀는 십자가에서 모든 무장이 해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영적으로 심적으로 육신으로 생활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무장은 예수로 말미암아 해제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마귀의 무장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은 마귀에게 저항해서 우리 해방과 자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죄의 힘에서 해방되고 이 세상의 불의의 세력에서 해방되고 병의 힘에서 해방되고 저주에서 놓여남 받고 죽음과 절망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여러분에게 주어지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자유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으로서 생각하고 자유인으로서 꿈꾸고 자유인으로서 믿고 자유인으로서 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젠 더 이상 죄와 허물, 병과 저주, 죽음을 걸머지고 고난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1858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영국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목사님으로 있는 주의 사업하는 주의 종의 딸이었지만 이름뿐인 기독교 신자였었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와서 마음대로 살고 주님께 나오지도 않고 멀리멀리 떠나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의 초청을 받아 친구의 별장에 갔는데 굉장히 큰 별장에 복도를 지나가는데 거기에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어요. 그 그림을 보니까 유명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으로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을 보니까 그 밑에 글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그만 이 글자를 보는 순간에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화살처럼 임하여서 거꾸러졌습니다. 통곡을 하고 울고 또 울고 울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그림에서 받았던 감동과 회개를, 그리고 앞으로 헌신하고 살 결심을 한편의 찬송시로 적었는데 그 찬송가가 바로 311장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다같이 이 소녀와 함께 찬송가 311장을 한번 불러 보십시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몸 찢고 피를 흘리시고 난 다음에 변화 많은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고 변화되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았지요. 어린 아기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러서 하나님 사업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이제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간 이상은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계신 것입니다. 처음 오실 때는 벌거숭이 아기로 오셔서 아무 공로도 없고 메달도 없었습니다. 그냥 벌거숭이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난 다음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올라갈 때는 많은 메달이 거기에 달려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용서를 허락하시고 의롭게 해주신 메달이 달려있고 허물을 사하신 메달, 병을 고치신 메달, 저주를 청산하신 메달, 부활 영생의 메달을 가슴에 다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벌거벗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의를 주시는 공로를 가지고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시는 공로를 가지고서 부활하셨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부활하셨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는 은총을 가지고 부활하셨고 영생복락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아, 예수님 2천 년 전에는 그렇게 기적을 역사했지만 오늘날은 예수님이 그렇게 역사하지 아니한다. 세월이 지나갔다. 과거에는 그렇게 했지만 현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라파 교회가 잠들고 죽어버린 것은 어제의 예수만 있지 오늘의 예수는 없습니다. 어제의 예수 이야기만 듣고 오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실 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영원한 예수님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 동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 죽고 난 다음에 저 세상은 영원한 세상인데 저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동일하게 죄를 용서하시고 동일하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동일하게 우리에게 병을 고쳐 주시고 동일하게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동일하게 영생천국을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메달은 하나인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예수님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메달을 달고 오시는 것입니다.
3. 올바른 이해
예수님이 이루신 열매는 이제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있고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옛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용서를 같이 가지고 부활하셨으며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부활 하셨으며 치료를 가지고 부활하셨으며 축복을 가지고 부활하셨으며 천국 영생 복락을 가지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발가벗고 이 세상에 응아하고 울고 태어난 빈 손든 예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대한 구원자요, 위대한 성령충만한 자요, 위대한 치료자요, 위대한 축복자요, 위대한 영생복락을 주는 하나님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볼 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영원한 예수님으로서 이와 같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가지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주는 변함없는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모셔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이제 부활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과거의 부활이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예수님이기 때문에 영원히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셔 들이면 오중복음, 삼중축복은 예수님과 함께 들어오고 예수님과 분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것은 아담이 망쳐 놓은 시간과 공간, 물질의 세계를 주님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책임지고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이 세상은 옛날 아담이 만들어 놓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옛날 아담은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날뛰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다 철폐하시고 무장 해제시켜 버리시고 주님은 죄를 청산하시고 불의를 청산하시고 병을 청산하시고 저주를 청산하시고 죽음을 청산하시고 부활이요 생명으로 여러분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오늘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다가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의 이미지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새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수님 안에서 시대가 새로워졌는데 이 예수님이 오늘날 교회 와 계시고 우리나라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속에는 성령께서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교인들이 모인 곳에는 성령께서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새로운 창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 즐거운 소식이 증거되고 성령이 운행되는 곳에는 포로된 자는 자유를 얻게 되고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영적 영안이 열리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눌린 자가 해방과 자유를 얻고 치료받게 되고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자유가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기적이 따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시고 영원하신 주님께서 영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요한일서 3장 8절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 여러분 생애 속에 있는 마귀를 멸해버린 것입니다. 다시는 마귀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억압당하지 마십시오. 협박 공갈을 당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여러분 주위에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억압하여서 정신적으로 억압을 당하여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점령해서 우울하게 만들고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여러분을 마귀화 만들어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당연히 쫓아내고 멸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시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과거 2천 년 전에 예수님 시간 속에 계시던 예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시간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난 다음 영원한 주님으로 환원하셨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변화 없는 영원한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를 영원히 멸하시고 이제 영원한 구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 우리 함께 읽어 보십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제 우리는 누굽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가는 변화 받는 사람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도 변화무쌍한 세상에 삽니다. 태어나서 청년, 장년, 노년이 되어서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장막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속에 누가 계십니까? 어제의 예수님이 계십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이 계십니까?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 속에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어제 옛날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요 장차 미래에 바라고 목을 빼고 기다릴 예수님이 아니시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이제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빼앗고 손에 영원한 생명을 지닌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 변화 받은 무상한 인생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히 들어와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시간적인 존재는 인간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간적인 존재이지만 예수님 영원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또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생각 속에 영원을 생각하고 영원히 꿈을 꾸고 영원을 믿고 영원을 입으로 말할 때 여러분 영원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우리는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혼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영원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시간 속에 있으면서 항상 영원에 점령되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성령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치료가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축복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영원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 희한한 존재요, 비상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옛날 사람이 아니고 영원을 품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으로 이 세상의 죄의 노예가 되고 허물의 노예가 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마귀의 종이 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벌벌 떠는 그런 사람은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마귀가 이 시간을 점령하여 저주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시간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십자가에서 다 청산하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주님이 되어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 속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입니다. 그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영원히 용서가 있고 영원히 의로움이 있고 영원히 거룩함이 있고 영원히 치료가 있습니다. 병들면 겉사람은 병이 들어도 언제나 이렇게 말하십시오. 영원한 치료가 내 속에 있다.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치료가 되신다. 그러므로 나는 치료를 가지고 이긴다. 영원한 축복자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저주가 있고 환경이 고달프고 금전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고 사업적인 어려움이 다가올지라도 여러분은 항상 나는 영원한 축복을 가지고 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영원한 축복이 있으니 영원한 축복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희안한 능력이 여러분을 점령해서 영원한 축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이 다가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영원한 예수님을 믿고 천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안개와 구름이 덮고 있는 것입니다. 안개와 구름이 덮고 있으면 그 밑의 동리에는 언제나 비가 있고 물이 출렁거리고 가뭄이 없습니다. 곡식이 잘됩니다. 구름과 안개가 덮어 있어야 그 밑에 물이 흐르고 곡식이 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는 눈에 안보이지만 영원이 덮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영원한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영원한 영광이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들어가도 영원이 있고 나와도 영원이 있고 일어서도 앉아도 영원이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용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거룩한 성령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건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축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는 물러갔습니다. 영원히 축복 받았습니다. 영원한 축복의 예수가 여러분을 점령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영원히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타난 모세,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의 모세가 예수님께 나타날 때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야도 공중에 올라갔지만 그대로 변함없이 나타난 것은 영원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영원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살아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원한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에 여러분 이제는 산 위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산 밑에 내려가서 병과 저주와 절망과 죽음과 고통에 휘몰아치지 않습니다. 산 위에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영원한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세요. 여러분은 일시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일시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영원한 존재이다. 그러니 여러분 영원한 여러분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몰라도 여러분은 영원한 존재요, 영원한 축복의 근원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그분이 여러분 속에 생명의 근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면 너희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영원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목마름을 채워주시고 생수의 강이 되어 주시고 축복과 건강의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시고 쓴물을 달게 하는 영원한 은총이 되어 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원한 예수님과 늘 대화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영원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영원히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과 함께 살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통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조용기 목사는 육신으로는 75살 먹은 노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한 예수님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인간일 뿐 아니라 영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 변하지 않는 세계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절대 안 변하는 것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안 변하는 것은 영원한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온갖 세상 힘이 들어와서 넘어뜨리고 짓밟고 죽이려고 해도 영원한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들어와 있으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함께 하나님 보좌에 앉아있는 것이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특이한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새 것이 된 것입니다.
영원을 모신 여러분 자신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생각하고 깨달으라고요. 생각이 달라져야 된다구요. 그리고 이것을 꿈꾸십시오. 항상 여러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셀프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자화상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그리스도가 영원히 여러분 속에 계신 영원화된 여러분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요. 하나님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맡기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말해요. 이제 영원을 가진 사람처럼 말해야 돼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나는 성령을 모신 거룩한 사람이다. 나는 마귀와 병을 이긴 사람이다. 나는 저주와 가난을 이긴 사람이다. 나는 천국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영원을 가진 사람처럼 말해요. 여러분은 영원과 일치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볼 때는 제가 육신으로 살지만 저 생각하는 것이나 꿈꾸는 것이나 믿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영원한 예수님과 같이 말하고 있다. 희한하게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나타난다. 왜냐, 우리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무쌍한 시간 속에 살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니 여러분의 가슴 속에 계신 예수님을 놓치지 말고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십시다.
변화산에서 생긴 일
>성경본문|
눅09장 28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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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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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정익목사
>비 고|
신촌성결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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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6
이 말씀을 하신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
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잇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맹자를 교육하는데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가 크면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가 갑자기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는 보고 싶었던 아들이라 달려가 안아보고 싶었지만 정을 억제하고 왜 갑자기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베틀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칼로 날실을 자르면서 공부를 중단하는 것은 이렇게 날실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말없이 그 밤에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단호한 모습을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맹자가 태어난 것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머니의 엄격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대 학자로 맹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력의 핵심 기간입니다. 년중 교회력이 여러 가지 진행됩니다. 교회력 중에서도 지금 맞이한 사순절이 핵심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일이 예수님의 산상 변모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찬란하게 변화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3명의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40여일이 지나면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변모는 죽으시기 40여일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하나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일정을 자신이 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지방에서 활동하시다가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으시기 40여일 전에 예수님은 세 제자를 이끌고 변화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인데 세 제자만 이끌고 가셨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12명중 세 제자였을까요? 그것은 그 세 제자의 향후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사후에 그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 세 제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변화산에서 이 세 제자가 아주 찬란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의 모습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옷이 희어지고 얼굴이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음성이 들려오기를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들려준 음성,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그 말씀이 다시 반복해서 들려진 것입니다. 그 음성을 세 제자가 똑똑히 듣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 사후 이 3인에게 특별한 역할을 맡기시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베드로
그중 한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말 그대로 수제자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변화산에서 찬란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하고 예수 사후에 서신서를 기록할 때 베드로후서 1:17-19에서 예수를 샛별로 묘사하였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19절) 베드로는 일생동안 그날 변화산에서 보았던 그 영광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산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엘리야가 나타나고 모세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가 택한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광경을 잊겠습니까?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비로소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훗날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를 샛별로 묘사한 것입니다. 샛별은 새벽녘에 떠오릅니다. 샛별은 유난히 빛이 납니다. 샛별이 뜨면 어둠이 서서히 물러갑니다. 천문학에서는 이 샛별을 비너스 즉 금성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는 계명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초저녁에 서쪽에서 금성이 떠오르고 이 별이 동쪽으로 돌아와 새벽녘에 샛별로 떠오릅니다. 그러면 날이 밝게 됩니다.
베드로의 인생 역정을 보면 굴곡이 참 많았습니다. 때로 덤벙대기도 하고 덤비기도 하고 불필요한 만큼 장담하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곧 후퇴도 하고 때로 도망가 숨기도 하였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베드로는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수제자 노릇을 다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난받은 신앙인들에게 서신서를 통해 권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4)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볼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5:7-9) 베드로가 이렇게 강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변화산상에서 영광의 예수를 보고 천국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두 눈으로 영광의 예수를 보았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사도요한
두 번째 사람은 사도요한입니다. 요한은 계시의 사람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서신서의 주제가 예수의 영광입니다. 요한이 변화산에서 본 예수의 찬란한 변화를 본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당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하였고 마가는 고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였고 누가는 예수의 인자됨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영광의 예수를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이 변화산에서 영광의 예수를 본 영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광이 사도요한의 신학의 바탕을 이루고 기초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만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요한은 원래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졌다고 하는데 그 기름가마가 너무 뜨거워서 던지자마자 뜨거운 화기때문에 튕겨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번 죽일 수 없다 해서 밧모섬에 유배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밧모섬에서 다시 환상을 봅니다. 다시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영광을 보고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말미를 보면 요한이 천국의 모습을 보고 너무 찬란함에 감탄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는데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하고 끝을 맺습니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보면 더 구체적이 됩니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구체적이 됩니까? 오늘은 정보의 시대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들을 들으면 무엇이 진짜인지 혼동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때 뭔가를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구체적이고 확신있는 정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알기도 해야 하지만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
세 번째 제자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가운데 첫번째로 순교한 제자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영광에 제일 먼저 참여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때 야고보의 어머니가 와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하소서.”(마 20:21) 이는 일종의 청탁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내가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재빨리 “내가 마실 수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야고보가 그때 그 잔의 의미나 뜻을 알고 대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날 야고보가 그 잔의 의미가 예수때문에 수난받는 것이고 예수 때문에 순교해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대답했다면 야고보가 그렇게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변화산의 영광의 모습과 천국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본다는 것이 때로 이렇게 중요한 결단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동행해서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을 보았던 세 제자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가지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하나는 선택받음의 은혜입니다. 여기 세 제자가 선택받아서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사역중에 더 중요한 일에는 많은 사람보다 소수의 준비된 제자가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더 중요한 더 큰 역할자가 필요합니다. 출애굽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 등 몇 명이 감행을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따르기만 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는데 싸울 군대를 소집하니까 모인 사람이 2만 2천명입니다. 두려운 자는 집에 돌아가라 하니까 만 2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더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을 추려보니 다 돌아가고 300명만 남았습니다. 그 300명이 전투를 해서 그날 승리를 하게 됩니다.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돌아와 10명은 기가 죽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합니다. 진로를 가로막았습니다. 결국은 그들의 그 행동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방해한 것이 되었습니다. 숫자가 많은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 두명은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나안 행은 그 두사람 때문에 재개되었습니다.
때로 사람이 많은 것이 복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이 많은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세명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결정적일 때는 다수가 아니고 준비된 소수가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그렇게 준비된 사람들로 선택받기를 기원합니다. 결정적일 때 후퇴하고 침묵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때로 침묵이 금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은 때로 비겁한 행동이고 나쁜 행동일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이런 경고문이 있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으로 위기의 때에 중립을 지킨 침묵자들이 예약해 놓은 자리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 자신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스토리를 엮은 책인데 단테는 저승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서 이승에서 책임있는 행동하는 삶을 살라는 경고를 위해서 지은 책입니다.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행동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는 강남의 부자들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강남의 부자들은 평소 침묵하고 말을 안합니다. 그러다가 언제 말하는가 하면 기득권이 침해당할 때입니다. 어느 구청장은 강남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정보를 알았을 때 눈앞에 캄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로비를 다해서 계획을 저지하고 대신 그 자리에 테니스장을 만들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참 가관입니다. 오늘은 파출소가 들어온다니까 한사코 반대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술주정뱅이들이 모일테니 집값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거날이 되면 해외 여행을 떠납니다. 이런 보수 꼴통들 때문에 이 땅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 뱉는 좌파들이 준동하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으면 뭘 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12명의 제자중 세명만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유사시에 세 제자에게 행동하여야 할 사명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 제자중 세명의 제자가 부름 받았듯이 부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행동이 필요한 때 행동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실전 즉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훈련은 참 중요합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더 알아야 하고 더 많이 깊이 들어가야 하고 더 많은 의존도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삶에는 한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실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설이 아니고 개념도 아니고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에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생존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선비가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열심히 노를 젓는데 그 사공이 너무 무지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공에게 “글을 읽을 줄 아는가, 공자의 도를 아는가, 글을 지을 줄 아는가” 하고 물었지만 사공은 “모릅니다”로 일관했습니다. 그러자 선비는 혀를 차면서 “원, 세상에 자네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고 불쌍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얼마후 배가 암초에 부딪치게 되어 침몰하여 배가 곧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공이 선비에게 “선비님은 헤엄칠 줄 아십니까?” 하고 묻자 선비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사공이 말합니다. “지금까지 뭘 배우셨습니까? 헤엄칠 줄 모르면 죽을 수 밖에 없겠네요.” 지식이 있다는 것은 때로 고상하고 품위도 있고 알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지식도 품위도 불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배가 암초에 부딪쳐 침몰할 때입니다. 그 때는 글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 때는 살아남는 방법만 필요할 때입니다. 그것이 실전입니다. 그 살아남는 방법이 믿음의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세 제자에게 이 깊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깊은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알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 제자는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알고 뭔가를 본 사람은 다릅니다. 안다는 것, 보았다는 것은 비젼이 됩니다. 세 제자는 변화산에서 뭔가를 보았습니다. 그 보았다는 것이 제자의 삶에 내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지에 가 보았을 것입니다. 가서 보니까 참 비참하고 열악하고 낙후되어 그 영혼들이 참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때 내안에 비젼이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헌금하게 되고 또 직접 가서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농촌 고향에 부모님이 앓고 누워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면 어찌 그 부모를 위해서 기도를 안하겠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비젼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젼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고 대상이고 분야입니다. 평소 여러분이 주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문이나 뉴스를 안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식을 사 보십시오. 그러면 매일 방송을 듣고 신문을 뚫어져라 보게 됩니다. 보고 때로 한숨을 짓고 때로 혼자 씩 웃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 비젼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젼은 관심입니다.
여기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가서 찬란한 변화를 목격합니다. 하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세 제자의 일생과 뇌리에서 그 모습이 지워지겠습니까? 그래서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시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깊이 알고 목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도 진정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생긴 일
눅 9장 28~36절 / 이정익목사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잇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맹자를 교육하는데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가 크면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가 갑자기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는 보고 싶었던 아들이라 달려가 안아보고 싶었지만 정을 억제하고 왜 갑자기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베틀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칼로 날실을 자르면서 공부를 중단하는 것은 이렇게 날실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말없이 그 밤에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단호한 모습을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맹자가 태어난 것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머니의 엄격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대 학자로 맹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력의 핵심 기간입니다. 년중 교회력이 여러 가지 진행됩니다. 교회력 중에서도 지금 맞이한 사순절이 핵심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일이 예수님의 산상 변모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찬란하게 변화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3명의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앞으로 40여일이 지나면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변모는 죽으시기 40여일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하나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일정을 자신이 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지방에서 활동하시다가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으시기 40여일 전에 예수님은 세 제자를 이끌고 변화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인데 세 제자만 이끌고 가셨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12명중 세 제자였을까요? 그것은 그 세 제자의 향후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사후에 그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 세 제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변화산에서 이 세 제자가 아주 찬란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의 모습이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옷이 희어지고 얼굴이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음성이 들려오기를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들려준 음성,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그 말씀이 다시 반복해서 들려진 것입니다. 그 음성을 세 제자가 똑똑히 듣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 사후 이 3인에게 특별한 역할을 맡기시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베드로
그중 한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말 그대로 수제자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변화산에서 찬란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하고 예수 사후에 서신서를 기록할 때 베드로후서 1:17-19에서 예수를 샛별로 묘사하였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19절) 베드로는 일생동안 그날 변화산에서 보았던 그 영광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산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엘리야가 나타나고 모세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가 택한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광경을 잊겠습니까?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은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비로소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훗날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를 샛별로 묘사한 것입니다. 샛별은 새벽녘에 떠오릅니다. 샛별은 유난히 빛이 납니다. 샛별이 뜨면 어둠이 서서히 물러갑니다. 천문학에서는 이 샛별을 비너스 즉 금성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는 계명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초저녁에 서쪽에서 금성이 떠오르고 이 별이 동쪽으로 돌아와 새벽녘에 샛별로 떠오릅니다. 그러면 날이 밝게 됩니다.
베드로의 인생 역정을 보면 굴곡이 참 많았습니다. 때로 덤벙대기도 하고 덤비기도 하고 불필요한 만큼 장담하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곧 후퇴도 하고 때로 도망가 숨기도 하였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베드로는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수제자 노릇을 다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난받은 신앙인들에게 서신서를 통해 권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4)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볼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5:7-9) 베드로가 이렇게 강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변화산상에서 영광의 예수를 보고 천국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두 눈으로 영광의 예수를 보았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사도요한
두 번째 사람은 사도요한입니다. 요한은 계시의 사람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서신서의 주제가 예수의 영광입니다. 요한이 변화산에서 본 예수의 찬란한 변화를 본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당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하였고 마가는 고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였고 누가는 예수의 인자됨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영광의 예수를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이 변화산에서 영광의 예수를 본 영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광이 사도요한의 신학의 바탕을 이루고 기초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만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요한은 원래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졌다고 하는데 그 기름가마가 너무 뜨거워서 던지자마자 뜨거운 화기때문에 튕겨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번 죽일 수 없다 해서 밧모섬에 유배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밧모섬에서 다시 환상을 봅니다. 다시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영광을 보고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말미를 보면 요한이 천국의 모습을 보고 너무 찬란함에 감탄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는데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하고 끝을 맺습니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보면 더 구체적이 됩니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구체적이 됩니까? 오늘은 정보의 시대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들을 들으면 무엇이 진짜인지 혼동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때 뭔가를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구체적이고 확신있는 정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알기도 해야 하지만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
세 번째 제자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제자들 가운데 첫번째로 순교한 제자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영광에 제일 먼저 참여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때 야고보의 어머니가 와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하소서.”(마 20:21) 이는 일종의 청탁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내가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재빨리 “내가 마실 수 있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야고보가 그때 그 잔의 의미나 뜻을 알고 대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날 야고보가 그 잔의 의미가 예수때문에 수난받는 것이고 예수 때문에 순교해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대답했다면 야고보가 그렇게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변화산의 영광의 모습과 천국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본다는 것이 때로 이렇게 중요한 결단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동행해서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을 보았던 세 제자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가지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하나는 선택받음의 은혜입니다. 여기 세 제자가 선택받아서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사역중에 더 중요한 일에는 많은 사람보다 소수의 준비된 제자가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더 중요한 더 큰 역할자가 필요합니다. 출애굽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 등 몇 명이 감행을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따르기만 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는데 싸울 군대를 소집하니까 모인 사람이 2만 2천명입니다. 두려운 자는 집에 돌아가라 하니까 만 2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더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을 추려보니 다 돌아가고 300명만 남았습니다. 그 300명이 전투를 해서 그날 승리를 하게 됩니다.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돌아와 10명은 기가 죽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합니다. 진로를 가로막았습니다. 결국은 그들의 그 행동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방해한 것이 되었습니다. 숫자가 많은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 두명은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나안 행은 그 두사람 때문에 재개되었습니다.
때로 사람이 많은 것이 복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이 많은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세명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결정적일 때는 다수가 아니고 준비된 소수가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그렇게 준비된 사람들로 선택받기를 기원합니다. 결정적일 때 후퇴하고 침묵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때로 침묵이 금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은 때로 비겁한 행동이고 나쁜 행동일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이런 경고문이 있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으로 위기의 때에 중립을 지킨 침묵자들이 예약해 놓은 자리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 자신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스토리를 엮은 책인데 단테는 저승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서 이승에서 책임있는 행동하는 삶을 살라는 경고를 위해서 지은 책입니다.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행동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는 강남의 부자들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강남의 부자들은 평소 침묵하고 말을 안합니다. 그러다가 언제 말하는가 하면 기득권이 침해당할 때입니다. 어느 구청장은 강남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정보를 알았을 때 눈앞에 캄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로비를 다해서 계획을 저지하고 대신 그 자리에 테니스장을 만들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참 가관입니다. 오늘은 파출소가 들어온다니까 한사코 반대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술주정뱅이들이 모일테니 집값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거날이 되면 해외 여행을 떠납니다. 이런 보수 꼴통들 때문에 이 땅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 뱉는 좌파들이 준동하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으면 뭘 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12명의 제자중 세명만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유사시에 세 제자에게 행동하여야 할 사명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 제자중 세명의 제자가 부름 받았듯이 부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행동이 필요한 때 행동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실전 즉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훈련은 참 중요합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더 알아야 하고 더 많이 깊이 들어가야 하고 더 많은 의존도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삶에는 한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실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설이 아니고 개념도 아니고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에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생존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선비가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열심히 노를 젓는데 그 사공이 너무 무지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공에게 “글을 읽을 줄 아는가, 공자의 도를 아는가, 글을 지을 줄 아는가” 하고 물었지만 사공은 “모릅니다”로 일관했습니다. 그러자 선비는 혀를 차면서 “원, 세상에 자네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고 불쌍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얼마후 배가 암초에 부딪치게 되어 침몰하여 배가 곧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공이 선비에게 “선비님은 헤엄칠 줄 아십니까?” 하고 묻자 선비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사공이 말합니다. “지금까지 뭘 배우셨습니까? 헤엄칠 줄 모르면 죽을 수 밖에 없겠네요.” 지식이 있다는 것은 때로 고상하고 품위도 있고 알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지식도 품위도 불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배가 암초에 부딪쳐 침몰할 때입니다. 그 때는 글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 때는 살아남는 방법만 필요할 때입니다. 그것이 실전입니다. 그 살아남는 방법이 믿음의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세 제자에게 이 깊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깊은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알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 제자는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알고 뭔가를 본 사람은 다릅니다. 안다는 것, 보았다는 것은 비젼이 됩니다. 세 제자는 변화산에서 뭔가를 보았습니다. 그 보았다는 것이 제자의 삶에 내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교지에 가 보았을 것입니다. 가서 보니까 참 비참하고 열악하고 낙후되어 그 영혼들이 참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때 내안에 비젼이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헌금하게 되고 또 직접 가서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농촌 고향에 부모님이 앓고 누워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면 어찌 그 부모를 위해서 기도를 안하겠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비젼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젼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고 대상이고 분야입니다. 평소 여러분이 주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문이나 뉴스를 안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식을 사 보십시오. 그러면 매일 방송을 듣고 신문을 뚫어져라 보게 됩니다. 보고 때로 한숨을 짓고 때로 혼자 씩 웃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 비젼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젼은 관심입니다.
여기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가서 찬란한 변화를 목격합니다. 하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세 제자의 일생과 뇌리에서 그 모습이 지워지겠습니까? 그래서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시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깊이 알고 목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도 진정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성홍모목사 / 눅 9:28-36
‘데이비드 그레고리’라는 사람은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유명한책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예수라는 사람을 등장시켜놓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의 핵심과 진수를 들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닉 코민스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부터 고급 식당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닉 코민스키’는 예수와 함께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진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선물, 그 귀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희생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닉의 명함 뒤편의 백지에다 닉이 추천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인 마더 테레사의 이름을 위쪽에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아래쪽에 가장 악질적인 인물 히틀러의 이름을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닉의 이름은 중간에서 약간 위쪽으로 테레사에게 가까운 곳에 기록하고는 선을 그었습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사실 이 조그만 명함 안에 모든 눈금을 넣을 순 없지만, 어쨌든 히틀러는 여기 있습니다. 닉선생은 여기 쯤 있다고 하였고, 마더 테레사는 여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짜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감 잡으려면....” 예수라는 남자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세웠습니다. “시카고에 있는 시어스타워(442m) 맨 아래 주춧돌 위에 이 카드를 놓는다고 가정해보세요. 하나님의 도덕적인 기준은 시어스타워 꼭대기, 100층 높이 위에 있습니다.” 닉이 질문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에 비하면 마더 테레사와 히틀러는 결국 같은 수준이라는 건가요?” “아뇨, 히틀러는 지극히 악랄했고, 마더 테레사는 커다란 자비를 베풀었으니 같지 않죠. 그렇지만 마더 테레사가 행한 나름의 덕행 역시 하나님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히틀러만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이고 각자 나름의 공과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말에 닉은 잠시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누구도 그 기준에는 못 미치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자신들의 쌓은 공적으로는 안 되죠.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완벽 그 자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정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공정하신데, 그 기준에 미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정의 때문에 인간의 죄는 용서하실 수 없으시지만, 누군가가 죄과를 지불하면 공의가 충족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의 나라에 들어가서 처음 창조하실 때에 계획하셨던 그 풍성한 은총에 거하게 되려면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죠. 사람들이 스스로 죄과를 치르게 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이 직접 그 벌을 받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보다 위대하니까요.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직접 죽음이라는 벌을 받으면 완전한 정의를 만족 시키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그것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충족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무죄평결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선물,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그 사랑을 그냥 받기만 하면 됩니다. 닉이 말했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네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이지 하나님이 아니잖소” 예수는 말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책을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속전이 되셨는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복음입니까!!! 우리도 시간을 내어 예수님과 함께 앉아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교회력은 주현절기가 끝나고, 사순절기로 접어들면서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은 산상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다음주일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눅9:18-20절을 읽어드립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이 공관복음을 함께 놓고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사건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는데, 그곳에 가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고 말씀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신령하신 말씀, 하나님의 구속사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가르치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미 심장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4복음서의 고백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하였으며,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9:20)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한 주간 쯤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변화산이라고 하는 산은 어느 산입니까? 빌립보 가이사랴 부근에 있는 헤르몬산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다볼산이라고 하여 이 산 정상에는 베드로가 주장한 3개 초막을 상징하는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볼산은 ‘하르 타볼’인데, 그 뜻은 ‘높은 산’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해발 588m의 비교적 높은 산입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미 5세기 경 교부인 제롬은 “경이로우며, 둥글고 높은 산”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전통적으로 주님이 변화하신 그 산은 다볼산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하였는데, 다볼산의 뜻이 ‘높은 산’이라고 하였기에 변화산은 다볼산이라고 기정사실화하였습니다. 4세기경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이 다볼산을 찾았고, 6세기경에 베드로가 고백한 초막 셋을 상징하는 세 개의 거대한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예배당은 1924년에 개축되어 지금도 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예배당입니다.
어떤 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산에 올라가셨느냐, 예수님은 이 사건을 가지고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12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그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 제자를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앞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바라보시면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입으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용모가, 얼굴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천상적인 참 모습이 드러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가복음은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 주간 전에 베드로가 신앙고백하였는데, 물론 성령으로 감동을 받고,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지만, 과연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이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형되심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틀린 고백이 아니라, 분명한 고백이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고난을 받으신다고 하여도 다시금 그 영광을 회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참 모습을 이 땅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을 잠시만 보여주셨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을 영원히 뵈올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보니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베드로가 두 분이 모세인지, 엘리야인지 어떻게 알아보았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며 많은 것을 상상해봅니다. 먼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시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옆에서 듣고 알았다고 생각해봅니다.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고 듣는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면서 “저는 모세입니다, 저는 엘리야입니다.”라고 예수님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옆에서 듣던 베드로는 이 분이 모세이고, 저 분은 엘리야이신 것을 알았다고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 상태로 보셔도 됩니다.
세 분이 무슨 말씀을 나누었습니까? 세 분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별세하실 것을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별세하다”는 말은 원문에는 “엨소도스”라고 하여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 라는 뜻인데,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말할 때에도 70인역 헬라어성경에는 ‘엨소도스’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인데, 영혼이 육신을 떠나가는 것으로 새로운 출발입니다. 당시 엨소도스라는 말은 죽음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완곡어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엨소도스를 말씀하였습니다.
엨소도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해방을 받아 가나안으로 출발하는 것 같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엨소도스를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 별세하시는 것을 가지고 구약의 대표이신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한 사람이요, 유대교회를 이룬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예언하신 분입니다. 구약의 두 인물을 들어보라고 하면 모세와 엘리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내다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오는 사람들을 이미 성취하신 십자가의 사건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요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전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사람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고 기다린 사람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오시는 메시아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하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모세나 엘리야 그들의 사역이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을 준비하신 사역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예루살렘에는 1년에 몇 번 다녀가셔야 했지만, 이제 마지막의 죽음도 예루살렘이어야 하고, 부활하실 장소도 역시 예루살렘이어야 하고, 승천하신 장소도 예루살렘이고, 다시 오심도 예루살렘이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택하신 장소요, 하나님의 임재하시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장소요,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성전이 되어주셨고, 당신의 육체를 찢으시므로 성소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하늘로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큰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드리는 한 영원한 제사가 되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높이 매어 달리므로, 저주와 심판을 받으신 몸이 되어 주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진리가 되셨습니다. 한 번 저주받은 자리는 다시 저주받지 않습니다. 한번 심판한 죄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저주와 심판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다” 이 말은 앨런로스가 ‘거룩과 동행’이라는 레위기 연구에서 스튜어드(J.S. Steward)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화목의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섬김은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정죄 받지 아니하고, 살아났고,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죄와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다시는 죄와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엡3:12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데, 예전 성경에는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는 다른 두 제자도 잠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졸았는데, 이제 온전히 깨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서 계신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있었습니다. 두 분,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이렇게 말하여도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두 인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순간이요, 존경하던 선조들인데, 좀 더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찬란하게 빛나고 희어지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위인들이 찾아오고, 하여튼 그 산 위가 좋았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 초막 셋을 짓자고 말씀을 드릴 때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세 분을 덮었습니다. 그 세 분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주 쉽게 말하지만, 그때 당시로는 두려울 정도가 아니라, 무섭기까지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들려진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면 이제,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였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이 우리를 친구가 삼아주신다고 하셨으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제는 주님이 다 알아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가 그쳤습니다.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36절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를 증언하는데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그들의 역할이 끝나자 그들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3 제자가 그들이 산에서 겪은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말하면 믿을 것입니까? 허기져서 허깨비를 보았다니, 잠자다 무슨 꿈을 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합리적인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천상에서나 일어날 일인데, 지상의 높은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은 좀 더 큰 세계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 경험을 파괴하는 세계, 우리의 이성을 무너뜨리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이 사실만 알고, 확실하게 붙잡으면 인생을 성공합니다. 악한 죄악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성전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장차 영광중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 한 분만 모시는 성전을 지으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김흥규목사 / 눅 9:28-43
예수님의 산상변모 사건 / 오늘은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또한 우리나라의 음력설입니다. 많은 분들이 설을 쇠기 위해 고향에 갔을 것입니다. 또한 고향 부모님의 집을 찾아 오늘 이렇게 우리 내리교회에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모든 가족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와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실 신정을 이미 쇳기 때문에 2013년은 벌써 한 달 이상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구정을 또 한 번 쇠어야 하기 때문에 구정이 지나야지만 진짜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온 가족이 다함께 모이는 이번 음력설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음력설을 쇰으로써 명실 공히 2013년도가 새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도 여러분이 계획하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고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회력으로 볼 때 오늘은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지만 산상변모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변형되어 영광을 받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지요. 그러기에 저는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9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수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약 550미터 쯤 되는 다볼산에 다름 아닌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이 너무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입으신 옷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우리의 옷에도 광채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시간은 온통 빛이신 하나님과 접속하는 시간이요 대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두 기둥입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기록한 저자로서 율법을 대표하는 기둥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가장 많은 이사와 기적을 일으킨 선지자로서 예언서를 대표하는 기둥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볼산에서 변화되신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다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1절에 보면 이 세 분은 특별히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DEPARTURE,” 즉 “떠나가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화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DEPARTURE,” “떠나가심,” 혹은 개역 개정판의 번역대로 “별세”는 헬라어 원어 그대로 하면 “EXODUS”입니다. 출애굽을 뜻하는 “EXODUS”가 바로 “별세,” 혹은 “떠나가심”으로 번역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특히 EXODUS의 주인공인 모세와 더불어 EXODUS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주도했던 EXODUS가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끌어냈듯이, 예수님의 EXODUS는 온 세상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내는 자유와 해방의 EXODUS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산꼭대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의 주제는 장차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변화산에서의 영광은 그 영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끌 영광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너무도 황홀한 산꼭대기 체험을 한 뒤에>
문제는 세 명의 제자가 이런 사실을 깜깜하게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와 같이 기도하시고 영광스러운 대화를 나누실 때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눅 22: 45-46).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금방 잠에서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을 목격했습니다. 너무도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청원을 합니다. 33절을 보세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황홀해서 이 역사적인 사건을 오랫동안 기념하고 보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념 예배당을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산꼭대기에 짓고 싶었습니다. 영원토록 잊지 않고 기억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기념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예수께서 산꼭대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우리는 “mountaintop experience,” 즉 “산꼭대기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너무도 신비하고 황홀한 시간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이와 같이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체험을 수도 없이 해오셨을 것입니다. 병들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치유됐습니다. 산꼭대기 체험을 한 것이지요. 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하여 다시 일어섰습니다. 산꼭대기 체험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다가, 찬양대의 찬양을 듣다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고 설교방송이나 간증을 듣다가 참으로 신비한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두 다 산꼭대기 체험이지요!
문제는 이런 산꼭대기 체험을 할 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다시는 이와 같은 산꼭대기 체험을 할 수 없으리라고 지레 짐작해서 영원히 그 산꼭대기 체험을 했던 시간과 장소를 떠나지 않고 잊지 않고 싶어서 초막 셋을 지으려고 합니다. 역경과 고난이 기다리는 저 산 밑, 계곡이나 평지로 내려가기 싫어서 산꼭대기에만 머무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산꼭대기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추락하는 저 골짜기에도 계시고, 그저 단조롭기 그지없는 평지 위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 산밑 골짜기에도 계시는 주님>
문제는 제자들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산꼭대기가 너무 좋아서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저 빛나게 영광 받고 황홀하고 신비한 이 순간에 영원토록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자고 보채는 베드로에게 또 한 가지 신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4-35절을 보세요. 베드로는 너무도 황홀한 가운데 이 말을 내뱉었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 말을 했습니다(33b). 바로 이런 베드로를 책망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분을 휩싸서 세 사람은 모두 구름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산꼭대기의 황홀한 체험에만 사로잡혀 자기 말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꾸지람을 하시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만 입 닥치고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 예수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중한 고난을 받고 돌아가셔야 하는데 너무 인간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꾸지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로 말을 줄이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 분,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제 9장 전체를 놓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9장은 예수님의 12제자가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은 것으로 시작합니다(1). 이들은 실제로 곳곳에 복음을 전하여 두루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다가 9장 중간에 가면 12제자들 가운데 수제자 세 사람이 그 놀라운 변화산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산상변모 사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산에 올라간 그 다음날 예수님을 비롯한 세 제자가 산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를 제외한 아홉 제자는 귀신 들린 아이의 병 하나를 못 고칩니다. 분명히 9장 1절은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제자들은 귀신을 못 쫓아냅니다.
그렇다면 왜 능력(power, dynamis) 있는 제자들이 전혀 무능한(powerless, ouk dynamai) 제자로 곤두박질 쳤을까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능력 있는 제자들과 능력 없는 제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예수님의 산상변모 사건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요? 아마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가 문제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은 영광과 권능의 산꼭대기 체험에만 관심이 있었지, 저 산밑으로 떨어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골짜기 체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광과 권능과 신비의 그리스도에만 집착했던 것이지요!
베드로가 산꼭대기의 영광스럽고 신비한 체험에 압도당해서 산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고 영원토록 머무르자고 간청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에만 관심이 있었지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꼭대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산밑에도 계십니다. 기막힌 고난의 골짜기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저 단조로운 일상생활이 되풀이 되는 평지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만 먼저 앞세웠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지껄이기만 하니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힐 때 제자들은 무능해집니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다면 다시 권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 우리도 마음을 새롭게 해서 먼저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욕심을 예수님께 투사해서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아주 오래 전에 한 가톨릭 방송사에서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 봉사사역을 하는 마더 테레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기로 했습니다. 촬영 팀이 여러 날 동안 테레사 수녀가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하루는 캘커타 시내의 후미진 골목에서 하수구에 처박혀 죽어가는 한 남자를 돌보는 장면을 찍게 되었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냄새 나고 더럽고, 가쁜 숨을 내쉬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노숙자를 돌보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동이에 물을 떠다가 옷을 벗기고 그 죽어가는 남자의 몸을 닦아주었습니다. 이 장면을 촬영하던 카메라 기사 한 사람이 카메라 촬영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서 말했습니다. “나는 백만 불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는 못 하겠어.”(I wouldn’t do that for a million dollars.) 이 말을 엿들은 마더 테레사는 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그 남자의 몸을 씻겨주면서 “나도 마찬가지랍니다.”(Neither would I.)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산꼭대기에서 영광스럽고 황홀한 체험을 할 때에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 산밑에서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테레사 수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우리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무거운 짐을 질 때에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영광과 권능의 주님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 당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수치와 수난에 귀를 기울여 그분의 진정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눅 9장 28~36절 / 문기태목사
예수께서 제자도와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 붙이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못 이해하고 그들의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으로 해석하고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엘리야처럼 들림을 받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슴을 하신 주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생각하며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그 말씀을 하신 27절 직후인 28절에 곧바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임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변화산에서 직접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앞에서 용모가 변형되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옷이 희게 빛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본래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 드물게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내려왔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어 모세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얼마동안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바로 하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영광의 광채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맛을 본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모세와 엘리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렇게 전혀 다른 시대를 산 믿음의 거장들을 다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때에 피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는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말슴을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는 튀어나온 말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 산에다가 초막을 셋을 짓고 내려오지 않고 거기서 살려고 했겠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보니 거기가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잘 드리고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보면 여기가 천국이 됩니다. 세상의 복잡한 문제 다 잊어 버립니다. 여기가 좋사오니..가 나옵니다.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여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예배가 끝났지만 가기 싫고 지체들과 만나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빨리 가고 싶습니다. 밥 먹고 가라고 아무리 붙잡아도 축도만 끝나면 부리나케 가 버립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따분하고 지루하고 졸리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맛 본 사람은 다릅니다.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처럼 억지로 끌려와 예배시간에 졸기만 하다가도 예배중에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뵈오면 그 얼굴에 주님의 영광이 반사되어 빛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뵙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지내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갑자기 영광을 드러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잠간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확신있게 증거하기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아주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사람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오늘 피었다가도 내일이면 사라집니다. 대단한 명예를 얻었다가도 곧 추문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너무나 쉽게 꺽여지고 오히려 더욱 추하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심으로 당신께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되심으로 그리고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의 영광을 한 번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고 단순히 사람의 아들로만 믿습니다. 나보다 조금 훌륭한 인물로만 믿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려도 세상만 보이고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대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주님의 영광을 보게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집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빛을 조명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영적인 눈이 열려져 영광의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는 책망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드러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선포되는 말씀앞에 믿음으로 화합하면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앞에 활짝 열립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시간마다 천국을 맛보고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입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려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라면 원수들을 물리쳐야지 비참하게 패배자처럼 십자가를 지시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과 그 영광이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어릴 때 엿장수가 마을에 나타납니다. 엿장수는 아이들에게 맛보기라른 이름으로 공짜로 엿을 짤라 줍니다. 엿의 맛을 본 아이들은 엿을 더 먹고 싶어서 집에 가서 부모에게 엿 사먹게 돈을 달라고 조릅니다. 어떤 아이들은 빈 병을 찾아 가져 가고 심지어 멀쩡한 고무신을 가지고 갑니다. 나중에는 야단을 맞을지언정 엿을 더 먹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천국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 주셨습니다. 천국을 경험한 제자들이 너무나 좋아 외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 여러분 사람들은 맛을 봐야 그 음식이 맛있는 줄을 압니다. 맛을 봐야 천국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리고 천국가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스데반은 열린 하늘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천국의 문앞에 있는데 무엇이 겁나고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처럼 천국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천국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과 고통스러운 현실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보여 주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천국을 맛보게 하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천국을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이 천국을 맛보며 천국의 소망으로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통해서 천국을 맛보며 참만족과 참 기쁨에 젖어 살기를 바랍니다.
3.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33절)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 전혀 대답을 않습니다. 베드로가 신비한 은혜를 알기는 알았지만 아직도 분별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저들이 눈을 들고 보았더니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고 싶었던 은혜는 오직 예수였습니다.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은혜는 예수가 '오직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예수, 절대적인 예수, '오직 나에게는 예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만을 듣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마을을 가보면 마을 한 복판에 반드시 교회가 있습니다. 유명한 대학을 가 보아도 대학의 중심이 반드시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유명한 대학들, 노벨상 후보를 많이 배출한 시카고 대학, 세계의 석학들이 연구하고 있는 하버드 대학,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흠모하는 MIT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에딘버러, 이런 대학의 중심에는 교회당이 서 있습니다. 교회당을 중심하고 작은 칼리지 대학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그 교회당을 바라보는 곳에 도서관이 함께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교회당이 높이 중앙에 서 있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도서관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당의 높은 종탑 보다 결코 도서관이 높을 수 없다 해서 건물을 지을 때 어떤 도서관도 교회당보다 높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도서관을 높이 세우지 못하는 대신 지하로 들어가서 건물을 세우는 건축을 했습니다.
큰 나라를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인 힘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던 그 힘이 바로 대학의 힘이요, 나라의 힘이요, 전 세계를 움직인 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흐르는 정신을 앞세워 살았기에 축복을 받았고 세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1등을 한 가구찌 다이로 박사라는 일본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만 치면 가구찌 다이로가 1등을 합니다. 그런데 졸업반 때 그만 병이 들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급의 학생들이 "이제는 다이로가 1등 못한다." 생각하고 2등을 하는 영국 사람이 1등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졸업 시험을 쳤을 때 다이로가 또 1등을 했습니다. 병원에 있었던 사람이 퇴원해서 또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졸업식장에서 1등 상을 받는 다이로가 이렇게 연설을 합니다. "이 상은 사실은 부끄러운 상입니다. 나는 공부는 1등했지만 여러분 앞에 자랑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2등을 했던 영국의 스미스씨가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강의록을 다 기록해서 병원에 있는 나에게 갖다 주어서 나는 병상에 누워서 공부를 해서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스미스입니다. 나의 1등을 시기하지 아니하고 질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공부 잘하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사람, 스미스씨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감동을 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이 학교의 정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1등을 한 다이로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를 끝까지 공부를 잘하도록 병상까지 찾아가서 도와준 스미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1등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배워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참 주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오직 예수, 예수에게서 배우려고 한 사람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을 입고 빛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슴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를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도는 말씀을 거울로 들여다보면서 영광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말슴안에 있는 진리를 묵상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게 만듭니다.
여러분,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사모하며 사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꿈꾸며 사십니까? 무디목사님이 죽으면서 아들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소개합니다. "땅은 꺼져가나 하늘이 내 앞에 열리고 있다. 그래 이것은 꿈이 아니야! 아름다운 모습이야.. 이것이 죽음이라면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야.. 그곳에는 골짜기가 없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셔. 나는 가야만 해!"
무디는 죽기 몇 년 전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겠지만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죽음의 순간에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 오래된 진흙 옷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집을 향해 갈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다시 죽는 일도 없고 죄로 더러워지지 않는 육신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육신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육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와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영광을 덧입기를 축원합니다.
번영에서 변화로!
눅 9:28-36 / 박신진목사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가 작년 9월 14일 아침에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국내 개신교 연합단체 중의 하나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조 목사의 장례를 한국교회장으로 치렀다. 한때 이단시비까지 있었지만, 조 목사가 한국 개신교 부흥을 이끌었던 원로 목사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교총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고(故) 조용기 목사님은 20대인 1958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해 60여 년간 목회하면서 세계 최대 교회를 이룬 능력의 목회자였다.” 면서 “특히 산업화 시대, 실향민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고 추모하였다.
천막에서 출발해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조용기 목사가 제시한 ‘삼중축복’에 바탕을 뒀다. 삼중축복은 영혼의 죽음, 환경의 저주, 육신의 질병이라는 삼중형벌에 갇힌 인간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영혼의 축복을 받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육체의 질병이라는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많은 한국인이 영혼을 구원해 주고 부자가 되도록 축복해 주며 건강도 지켜 준다고 이야기하는 삼중축복에 매료됐다. 삼중축복 교리를 두고 교계 일각에서는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오늘 예수님의 산상변화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 상황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전하려 한다. 70년대 복음주의적 전도와 성령운동으로 부흥의 시기를 맞이했던 한국교회는 8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번영신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번영신학이란 예수 믿고 잘 된다는 복음, 즉 신앙은 우리를 번영의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기독교의 중심 가르침이 고난이면 고난신학이라 할 것이고, 깊은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신학이라면 영성신학, 혹은 체험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수십 년 동안 예수 믿고 잘 되는 번영신학을 추구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번영신학을 대표할 수 있고 대중적으로 가장 잘 전파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조용기 목사였다. 그는 번영신학의 챔피언이었다. 그 시대는 한국사회도 번영을 전파하는 산업화시기였고, 79-80년의 격동기를 지나 다시 80년대 번영을 추구하는 제2의 산업화 번영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국교회는 번영을 추구하고 번영을 축복하는 번영신학의 시기였다.
위키백과에는 번영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번영신학이란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반성경적 신학이다. 번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안정과 번영을 준다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 번영신학의 교리는 개인적인 능력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성경해석은 초기 유대주의의 주된 흐름에서 나타나는데 기독교 전통에서는 없다.
사실 번영과 축복을 믿음의 열매로 강조하는 이와 같은 번영신학은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현대판 샤머니즘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기독교의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며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 않는다. 많은 신학자들은 번영신학이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가히 조목사의 삶은 세계 최고의 위대한 신앙과 목회였으나, 삶과 교회적 열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이신건 박사는 네 가지로 말한다. 이걸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믿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시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회중의 욕구에 탁월하게 부응하는 목회자였지만, 성경을 임의로 선택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둘째로, 그는 심리학과 경영학을 목회에 접목하여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가 진정한 목회자였는지 성공한 사업가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종종 예언자처럼 용감히 설교했지만, 시대의 모순과 불화하거나 저항할 줄 모르는 심약한 목회자였다. 이어 셋째로, 그는 너그러운 자세로 늘 배우려고 노력하고 남의 비판도 너그러이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혼합적이고 타협적인 지식 세계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목회와 설교자, 부흥 강사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변과 가족의 관리에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인다.
또 한 명의 번영신학의 챔피언이 있는데,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이다. 세계 최대의 메가처치를 일군 조목사와 한국의 유명한 부흥하는 교회들이 사실 많은 내용을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서 받았다. 로버트 슐러는 1만명 신도를 거느렸던 ‘번영신학’의 원조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설교와 목회는 한때 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인간의 죄성과 회심 대신 ‘성공’을 외치며 수정교회를 초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그의 별명은 ‘꿈꾸는 자’(dreamer)였다. 슐러 목사는 매주 방영됐던 TV프로그램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을 통해 유명세를 탔는데, 이 프로그램은 무려 40여년간 방송됐다. 매주 수백만 명이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1955년 슐러 목사는 오렌지카운티에 ‘가든그로브 커뮤니티 교회’를 세웠다. 그는 ‘드라이브-인’ 야외 극장에 교회를 개척해 주목을 받았다. 다소 무거운 주제인 인간의 죄성과 회심만 전했던 그 무렵 목사들과는 달리 슐러 목사는 꿈과 성공을 외쳤다. 그의 달콤한 메시지는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가주 지역의 랜드마크인 ‘수정교회’ 건물은 1980년 완공됐다. 당시 최고의 건축가였던 필립 존스가 설계한 이 교회는 당시 시가로 무려 2000만 달러가 투입됐다. 건물 외벽은 대형유리 1만 664장으로 장식됐고, 세계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됐다. ‘수정교회’란 이름은 건물이 완공되면서 붙여졌다.
1990년대 들어 교계에서는 ‘슐러 목사 따라하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부동산 붐과 함께 ‘메가처치(mega church)’가 속속 생겨났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맥도널드를 빗댄 ‘맥처치(McChurch)’란 신조어와, 대형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이때쯤이다. 슐러 목사는 ‘번영 신학’의 대표 인물로 여겨졌다. 존 파이퍼, 존 맥아더 등 개혁주의권 목회자들은 그가 외쳐온 ‘성공’의 의미가 “성경과 다르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슐러의 목회 인생 말년은 초라했다. 목회직 계승을 두고 자녀간의 불화도 시작됐다. 교세가 줄면서 수정교회는 결국 지난 2010년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교계의 경종을 울렸다. 혹자는 '번영신학의 말로'라는 평가까지 내렸다.
사순절이 시작된다. 이번 주간 수요일이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리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 중에 셋을 데리고 “기도하려고 산을 오르셨다.” 누가는 복음서 가운데에서도 기도를 많이 강조했는데,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주님과 제자들이 산을 오른 이유를 분명히 한다.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 주님의 제자들의 삶에는 기도의 동산이 필요하다.
주님은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신 후에 모습이 변형되셨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절) 지상에서 주님이 사역하신 모습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 여기 ‘용모가 변화되다’라는 말씀은 ‘내적인 요인으로 생기는 외적 변화’이다. 근본적인 내면의 변화가 외모의 변화까지 가져왔다는 말씀이다. 청년들이 사랑을 하면 모습이 변형된다. 예뻐지고 세련되어진다. 얼굴이 정돈되고, 웃는 모습도 매력적으로 변하며, 심지어 몸매까지 세련되어진다. 마음의 변화가 용모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변화하신 주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율법과 예언의 양대 산맥인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 하자, 베드로가 말씀드린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33절)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영적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구름이 그들을 덮을 때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오늘은 주님이 변화산에 올라서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신 것을 기억하는 변화주일이다. 이 변화산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영적으로 준비하는 일이었다. 구원의 큰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산 위에서의 변화가 필요했다.
1. 주의 제자들에게는 거룩한 경험이 필요하다.
제자들에게는 신비한 산 위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지만 거룩한 꿈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꿈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투지와 손해나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능력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느냐 하면,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투지나 능력은 거룩한 경험을 통과할 때 생긴다. 제가 40여년 목회하며 얻은 경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경험을 한번 해서 체험적인 신앙이 될 때 비로소 열심을 내고 헌신하며 희생까지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분명하고 초월적인 체험이 전혀 없는 신앙인은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거룩한 체험, 산 위의 경험을 사모하라! 변화되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경험과 구원의 확신이 필요하다. 구원의 확신은 열심히 성경공부 교리공부하고 책을 읽어서도 얻지만, 거룩하고 신비한 신앙 체험을 한 번 하면, 확실히 가질 수 있다. 여러분에게 뜨겁게 기도함으로 얻어지는 특별한 기도의 즐거움을 주시기를 축복한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를 축복한다. 찬양의 은혜, 성찬의 신비를 알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성격이 변하고, 말할 수 없는 환희와 자신감을 회복하는 특별한 체험이 있기를 축복한다. 제자들의 변화산 체험은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는 의미를 주었다. 거룩한 체험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성에 매이지 말고 ‘새 것’을 추구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어렵고 실망스러운 일이 반복됨으로 생기는 낙심과 타성이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중요한 일이 늘 습관적으로 하는 일상이 되면서 생기는 지루함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똑같은 일을 자꾸 반복한다. 예배와 성경공부도 계속 반복되니 아무런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 성경공부도 사실은 그 뜻이 매우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자꾸자꾸 반복해서 배워야 하고, 기도도 결코 완성이라는 것이 없으며 하면 할수록 새롭고 깊은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대부분 반복을 통해서 자라나고 완성되어 간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그 생명력과 긴장감이 사라진다. 변화가 없으니 깊이가 없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전혀 다른 것, 새로운 것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변화된 모습으로 매년 새롭게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예배의 형식과 태도도 좀 새로워져야 한다. 타성에 매이지 말고 ‘새것’을 추구하자. 산 위로 올라가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과 함께 새로운 변화산의 도전에 참여해야 한다.
반복되는 일정에 따라 습관적으로 기독교인의 삶을 살지 말고, 끊임없이 새것을 찾는 태도로 살아가라! 네비게이션 틀어놓고 그냥 무대포로 가듯이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말고, 매일 제자의 삶을 살아가라! 우리에게 높은 산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새로운 초월과 꿈을 향한 도전이 있다. 내면이 깨어있어, 기대감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과 기적을 보여주신다!
3.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산 위의 변화, 새것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또한 우리가 산 아래의 삶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7-80년대 교인들 가운데는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는 신비한 은사들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가정제단을 쌓고 교회에서 철야를 하면서 계속 초월적이고 신비한 은사를 추구하는 은사주의, 신비주의에 빠졌다. 통성기도를 하고 입신하고 방언하면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교회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가정은 문제가 생기고, 믿는 이의 생활은 파탄이 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믿음과 생활이 분리되고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는 신앙위기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원주에서도 이런 신비 체험에 젖어 가정을 돌보지 않고 가족들을 살피지 않은 한 여인이 교회에서만 살다시피 하니까, 참다못한 남편이 교회로 와서 자기 아내가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에다 불을 질러버렸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나고 그 남편은 방화살인범이 되어 실형을 살고 가정이 깨지는 일도 있었다.
여러분! 산 위의 변화를 체험하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서 위대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한 기쁨과 은혜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놀라운 체험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이때 중요한 것은 변화산에 머물러 초막 셋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7절 말씀이다. 거기에 병든 아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한 아버지가 있었다. 거기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한 들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산 위의 변화와 산 아래의 고통이 연결되어 해결됐다는 데에 누가복음 말씀의 위대함이 있다. 강단 위의 촛불을 두 개 켜듯이, 신앙인의 삶은 두 개의 촛불을 켜는 것인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신비한 신성의 촛불이고, 또 하나는 우리 삶의 고난과 죄를 해결하고 사랑을 이루는 인성의 촛불이다. 그러니 여러분 산 아래로 내려오라!
번영에서 변화로! 주님은 이번 사순절에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한국교회여, 번영을 추구하는 바알의 길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길로 돌아오라! 변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되라! 거기에 진정한 구원의 열매가 있고, 평안이 있으며, 영원한 기쁨이 있다. *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눅 09장 28~36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여러분! 먼저 사진 한 장 보실까요? 이것은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유명재 사모님께서 손수 작성하신 글을 전도지로 만든 것입니다.
오늘은 유명재 사모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년이 되는 날이기에 전도지 내용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유명재 사모님은 소천하시기 하루 전날까지 새벽 제단을 지키셨던 말씀과 기도의 어머니셨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찾아오셔서는 당신이 손수 전도지 문구를 쓰셨는데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라는 전도지입니다. 이 전도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3가지 세상을 산다고 합니다! 처음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 그리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80세 길면 100세.
마지막 정말로 넓고 넓은 저 높은 하늘나라 천국. 천국은 슬픔이나 탄식, 시기와 질투, 다툼이나 미움, 죽음이 없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만 있는 곳입니다.’
지금 유명재 사모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바로 그 천국에서 우리 주님 품에 안겨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이 전도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세상이 전부인 줄만 알고 세상 향락에만 도취되어 살다가 심판 날이 도적같이 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신부처럼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기쁨과 감격함으로 하나님을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큰빛광성교회 유먼지’ 아마도 본인이 먼지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유먼지’라고 예명을 쓰셨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늘 언제나 따스한 어머니 같았던 유명재 사모님이 오늘 따라 너무나도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신앙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말씀을 주고 싶으실까요?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 당신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똑바로 믿고 구원받아 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이를 위해 12명의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인류 구속 사역의 대업을 성취하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뽑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가룟 유다라는 배신자도 있었지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한 충성스런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 중에 야고보는 열 두 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를 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며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게 하는데 있어 초기 기독교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명을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핵심 인재로 양육하셨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에게 진정 복음 사역의 미래가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사역을 할 때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만큼은 꼭 데리고 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5:37) 이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도(막14:32) 이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변화산에도 이들만 데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변화시켜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세 제자를 변화산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 우리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변화산을 통해 부활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죽음의 고통보다 훨씬 더 영광스런 삶이 죽음 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하고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바로 이것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길 원하셨던 겁니다. “팔일 쯤 되어”라는 말을 통해 이것이 신화적 사건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일 쯤 지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시는지 29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서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부활 후에 가지실 신비한 형체로 변형되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형되셨습니까? 29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성경은 예수님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히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잠시 제자들 앞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영광스런 광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이미 오래 전 사람인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저만 이상합니까?
그 당시 사진 기술이 발달해서 모세와 엘리야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습니까?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의 초상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부활체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천국 가서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까?’ 대부분이 나이가 들어서 죽었을텐데...
누가 내 부모요, 내 자식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영광스런 광채를 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단 번에 알아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 말씀입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12절 말씀을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여러분! 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신 줄은 분명히 알겠는데 육신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고 축사하시는 순간, 그제서야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먼저 보여주신 겁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통해 진정 부활의 확신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화산 상에 나타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대망의 메시야의 모형(신18:15)이었습니다. 그는 시내산에서 이미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한 자(출31:18)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 중 대표자입니다. 메시야의 선구자에 대한 모델(말4:4,5 눅1:17; 마11:14)로 기록된 자입니다. 이미 여호와의 영광을 호렙산에서 경험(왕상19:8)한 자입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주님의 재림 시에 무덤에서 일어나 주님을 맞으러 나올 죽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자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 살아서 맞을 자들을 대표하는 자로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확신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변화산에서 실제적으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변화된 영광스런 모습을 통해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머리를 스쳐지나 가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지 팔일쯤 되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평화의 나라, 번영의 나라를 이루시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당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인재로 만들기 위해서 변화산을 통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음을 정복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세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부활의 모습을 경험하고 목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분명히 경험하도록 하신 겁니다. 신비한 영적 세계를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도록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똑같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증언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과 17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진정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인재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잠깐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참 소망을 가지고서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 전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화산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믿고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변화산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바로 ‘내가 인정하는 메시야다. 내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경험시키고 확증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는 변화된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여러분! 예수님이나 엘리야 모세가 무슨 초막이 필요하겠습니까? 아직까지도 베드로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만에 하나 초막이 필요하다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나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할 당시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심리 상태를 34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그들이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이고 눈부신 광경을 보고서 두려워한 겁니다. 이는 변화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가 심히 부족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노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냥 조용히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느끼는 바를 꼭 말하고야 마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부적당한 말, 하나님 마음과 동떨어진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때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름이 임했다는 것은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35절 하반절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일진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온전히 순종하라는 겁니다. 유대인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믿음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정치적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참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메시야가 죽으신다고 하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구름 속에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기 위해서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이해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부인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을 것입니다.
무척이나 황당하고 난처하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성만 황당한 것이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이제 변화산에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의 말씀을 들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영광스런 증인으로 삼고 싶으셨습니다. 피난처로 만든 초막이 아니라, 진정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도 동일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메시야 신분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 공적인 선언을 하신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십니다. 나의 구주이시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인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성경적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이 믿음이 없으면 능력은 없습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도 바로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율법과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었던 모세와 승천했던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지배하는 메시야의 능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그림자였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두 세 증인 있어야 하는데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진리를 확증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아직도 의심이 가십니까? 하나님은 변화산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우리 마음도 변화되어 예수님께서 확실히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고서 우리 입술로 고백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변화산을 통해 진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변화산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변화산에서 함께 머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31절을 보면 정작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하신 말씀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갈보리 산’에서 있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영광스런 ‘변화산’에 머무르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갈보리산의 고난’ 없는 ‘변화산의 영광’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변화산을 내려와 갈보리산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갈보리산의 십자가가 없다면 변화산의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디니가 쓴 ‘내 곁에 계신 주님’이라는 글의 일부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고, 당신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선을 행해야 합니다. 창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거리로 달려 나가야 하고, 거리에 서 있지만 말고 행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 들어가서는 그들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같이 올라간 산에서 지극히 큰 영광을 보게 됩니다. 변화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면서 머리로만 믿었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곳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베드로처럼 세상과 떨어져서 주님과 나만 있는 은둔 생활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바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변화산의 변모 사건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심만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거룩하게 변화될 가능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목적도 있다. 즉 우리도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처럼 거룩하게 변화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에게 ‘산 위에서의 체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명심해야 할 것은 계속 산 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을 만나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면 이제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산 위서의 삶’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변화산의 진정한 의미는 산 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메시지가 ‘고전의 한 구절’로 남아 있지 않고, 생동감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를 산 아래로 내려가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세상과 떨어져 있어서도 안 되고, 세상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도 아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창가에서 거리로, 거리에 서 있지만 말고 행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고백하면서도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내 방식대로 믿으려 합니다. 내 뜻대로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내 방식이 아니고, 내 뜻이 아니면 다 틀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머릿속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주님 방법을 결코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 드리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법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들어가라 하면 법궤를 메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을 열세 번 돌라 하면 열 세 번 도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35절 말씀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상식에 맞지 않고, 비이성적인 것 같고,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 말씀은 완전 진리일진대 100%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주의 말을 듣고 그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날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목도하면서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저 천국에 당당히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진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감으로 부활의 영광에 기쁘게 참예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변화산
임춘수목사 / 출 34:29-35, 눅 9:28-36
오늘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심을 기념하는 주님 산상 변모 주일입니다. 주님 산상 변모 주일을 맞이해서 오늘은 출애굽기의 말씀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에서의 변화산 사건은 모세에게 있었던 사건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되셨습니다. 2022년 주님 산상 변모 주일에는 모세의 변화산과 예수님의 변화산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두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모세의 변화산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 만큼 중요한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모세의 변화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모세의 변화산 사건과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출애굽기 34:2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올라간지 40일 되는데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서 경배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공포를 하고 축제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아시고 모세를 급히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왔으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면 축제를 하는 것을 보고 돌판을 던져 우상을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선 자는 내게로 오라고 하고 우상 숭배를 주도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다시 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십계명을 새겨서 준 돌판과 같은 판을 만들어 가지고 올라오라고 하셨고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가서 40일간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입니다. 모세는 거의 80일 동안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모세의 변화산 사건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임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영광의 빛을 받아서 어둠의 세상을 비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32절을 보면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첫 40일을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 율법과 성막과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40일간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40일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모세에게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말씀은 등불이 되어 우리의 길을 비추고 말씀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을 비추게 합니다. 성도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빛을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빛이 임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80일 지내면서 말씀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빛이시고 모세는 그 빛을 받아서 세상에 비추는 빛의 모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광채가 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고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우리에게 영적인 빛이 나게 되는데 우리는 그 빛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우리는 얼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빛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변화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께서 시내산에서 영광의 빛을 가지고 내려온 변화산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신 사건을 기록한 변화산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셨습니다. 눅 9:28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이유를 기도하시러 가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한 반면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산에 가실 때에는 늘 기도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셨습니다. 29절을 보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광채가 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변화되셔서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긴 시간 동안 함께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기도하시는 순간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가 이런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는 내 이야기를 하나님께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또한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우리의 내면과 삶이 영광의 광채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변화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30-31절을 보면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광채가 났습니다. 그리고 영광중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데 모세와 엘리야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입니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 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습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예언되었습니다(말 4:5).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신 34:6).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변화되신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고 죽으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은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29절을 다시 보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마태는(마 17:2)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에서의 신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라는 헬라어는 헬라적 사고방식에서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표현이기 때문에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광채가 나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변모는
(1)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다시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님의 모습과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것은 앞으로 우리들이 부활을 하게 될 때 지금과는 다른 부활체로 변화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육신은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약해지지도 않는 몸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 사건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3. 다시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고 예수님을 기도하러 변화산으로 가셧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면
변화산은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33절을 보면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 한 다음에 두 사람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그 놀라운 광경에 앞에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정신이 몽롱하고 황홀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여기에 초막 셋을 짓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하는 것은 초막을 짓고 거기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즉 여기를 떠나지 말고 여기에서 계속 놀라운 광경을 경험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만난 그 놀라운 산에 계속 머물면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40일을 두 번 금식을 했는데도 은혜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개인적으로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그곳에 머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은혜를 받는 곳은 우리가 머물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은혜를 받은 그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37절을 보면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예수님은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머물자고 한 베드로의 말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려오셨습니다.
모세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80일간의 함께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세상으로 내려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녀답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정을 떠나서 집단생활을 하라고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은혜 받은 성도는 집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영원히 은혜 받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즉 직장으로 사업체로 학교로 삶의 자리로 가서 받은 은혜를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런 존재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변화산의 예수님처럼 마지막 때 부활체를 입을 것입니다.
은혜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은 우리는 세상으로 가서 즉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학교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끝날 때 우리는 모두 세상으로 파송을 받은 일터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드릴 때마다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영적 변화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가서 영광의 빛을 전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별세의 말씀
눅 9장 28~31절 / 이중표목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모든 복음과 진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 손에 가지고 있는 최대의 보화가 있다면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할 때 성경에서 부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성경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고, 내가 잠못 이루는 밤에 성경은 나의 수면제가 될 것입니다. 내가 낙심될 때 성경은 나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말씀이 될 것이며, 마지막 내가 죽음이라는 절망의 순간에도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면 그는 천국이 환하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화로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에브라함 링컨도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물려준 것은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어머니 낸시가 12살 된 링컨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함아, 나는 너에게 줄 문전옥답도 없고 금은보화도 없다만은 네 어머니가 즐겨 읽었던 이 성경을 주노니 네가 어려울 때 이 성경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응답해서 네 가는 길이 형통할 것이다."
마지막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물려받은 링컨은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 성경 말씀을 붙들고 역사에 가장 위대한 정치가요, 존경받는 인격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늘 성경을 손에 드는 것을 기뻐하고 이 성경이 자손 대대에 가문에 가보로 유산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맑게 하도다"(시 19:7-8)
성경이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십니다. 이런 축복을 우리가 다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었던 디모데에게 이런 글을 보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너로 능히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 인격이 성숙하고 내 행동이 온전케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날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자손들 교육에도 유익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생에 놀라운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하고 효용이 있습니다. 훌륭한 학문을 닦지 못했을지라도 성경 한 권만 알고 있다면 이것으로 최고의 지성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 모든 책이 다 없어져도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은 진정한 문명의 선구자였고,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수많은 곤고와, 절망과, 낙심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슬을 풀어주고 노예를 해방시키고 억울한 자의 한을 풀어주었던 책이 성경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자산, 예술, 음악, 법률 등이 다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이 왜 그렇게 가치가 있을까요? 예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말대로 성경은 예수님이 누워 계신 요람과 같습니다. 마치 베들레헴 구유에 아기 예수가 누워있듯이 성경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가리켜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책이라고 말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한 책이요, 서신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책이요,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이 16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다고 흔히 말합니다. AD 100년으로부터 BC 1500년에 걸려서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저자가 40명인데 시인, 목동, 어부, 의사, 왕 등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했지만 한번도 성경을 기록할 때 서로 만난 일이 없습니다. 모세와 누가가 만난 일이 없습니다. 각각 자기 처소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는데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증하고 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통일성 있게 성경을 쓰셨다는 사실이 확증되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40여명을 각각 때마다, 시간마다 은혜를 주셔서 기록했는데 편집해놓고 보니까 흐르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창세기는 창조의 신화에 불과하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그치고 맙니다. 시편은 인간의 탄식시에 불과하며 아가서는 연애 단편소설에 불과합니다. 창세기를 펴도 예수, 시편을 펴도 그 속에서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난다는 것을 신비하게도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실 것을 얘기했습니다(창 3:15). 모든 사람들은 다 남자가 낳았는데 예수님만은 여자가 낳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12:4), 또 이사야서 7장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것과 부활하실 것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다 미리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성경은 그리스도의 별세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에 대해 가장 잘 말한 핵심 구절이 31절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성경은 별세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뭘 말하고 있느냐? 예수님의 별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별세는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을 것을 '별세하실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별세'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죽음을 높인 말"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별세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는 별세'인데 세상 사람들이 죽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세상으로 간다' 해서 헬라어로 '엑스도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엑스도스'는 출애굽이라는 말인데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별세한다'는 말을 쓰신 것은 혼자 별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죽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2절)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떠나는 별세고, 부활하는 것은 다른 세상의 별세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 한마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날마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날마다는 매일 같이 사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듯이 너도 스스로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을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본 신앙고백으로 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육체로 내가 날마다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삽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이냐?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고 있다고 믿는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운명을 결정합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자기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지은 나, 타락한 나, 하나님을 반역한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고 예수님이 사실 때 나도 예수 안에서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별세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별세를 말씀할새' 누가 별세를 얘기하느냐? 모세와 엘리야가 얘기합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가 얘기하느냐? 모세는 구약에서 율법의 대표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별세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한대로 예수님이 별세를 했는데 왜 예수님이 별세를 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별세할 필요가 없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우리와 함께 죽으시므로 살 때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곧 나의 별세입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따로 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내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므로 내가 죽었고 예수님이 살므로 내가 살았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신앙고백입니다.
둘째, 별세의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을 이 말씀에서 봅니다. 보통 사건은 가난한 자에게 빵을 먹이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다 남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산의 기적은 예수님 몸에 직접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 최대의 기적은 변화산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최대의 기적은 별세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의 최대의 변화였습니다. 이 변화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합니다. 내게 최대의 변화는 죽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기적이며 최대의 변화인데 예수 믿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왜 믿습니까? 변화하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되느냐?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것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이냐?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도록 변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는다든지, 술을 끊는다든지, 부정한 행위를 끊는 것도 변화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변화, 이 변화가 별세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별세를 우리의 생애에서 이루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나 자신이 별세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 또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했다고 믿으면 나와 예수님이 따로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거기에 달려있는 것을 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 내가 예수 안에서 나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보게 되면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별세한 사람 속에는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므로 내 생각이 예수 생각이며, 내 마음이 예수 마음이며, 내 언어가 예수 언어이며, 나의 행복이 예수의 행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별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별세의 말씀이 성경의 핵심이며, 예수의 복음이며,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기록되었느나냐? 예수를 증거하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성경은 나를 변화시키려고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나를 위해서, 나 때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살리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저자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은 나 한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합니다.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장로님 부인이면서 권사 된 지 20년 된 분인데 이 분이 목사를 10명을 쫓아냈습니다. 은혜가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처음에는 좋다고 모셔왔는데 나중에는 마음에 안들어서 쫓아내요. 그리고 목사를 또 새로 모셔오는데 1년 조금 넘으면 마음에 안맞는 것입니다. 하루는 이 권사님이 서울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야,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안된다." 그때 딸이 "엄마, 제가 책을 한 권 보내드릴테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는「나는 매일 죽는다」는 책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이 책 읽으면 해결됩니다."
이 권사님이 그 책을 읽고 통곡을 했답니다. '내가 20년 권사, 예수 잘못 믿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별세한 것처럼 나도 나를 죽여 별세해서 살아야 될 것을 목사한테 은혜받으려고 했으니... 그렇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은혜요, 내가 죽는 것이 은혜다.'
이것이 은혜인데 이 은혜를 못받으면 이 세상에 은혜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권사님이 이 책을 읽고 은혜받아서 통곡을 하고 제 목소리라도 한 번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요. 이 여종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한다. 죽을 사람은 나다.' 하고 은혜를 받고 보니까 목사님의 모든 말씀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다고 그래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지상에서 가장 은혜받은 예수님이십니다. 은혜를 어디에서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최상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받았고 부활로 영생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셋째, 우리는 별세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은혜를 내가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별세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내가 별세 안하려고 하면 믿어봤자 특별한 것 없습니다. 별세 외에는 예수에게서 얻어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있어도 지극히 작은 것들입니다. 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얻어야 할 것은 별세의 은혜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주려고 했던 은혜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는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를 내가 받을 때 세상이 바꾸어집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별세의 기도를 할 때 용모가 변화되면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산하에 내려갔더니 어떤 사람이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고치려고 했는데 못고치니까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할 때 귀신이 소리 지르면서 나갔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한적한 곳에 와서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할 때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안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신 후에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죽이는 기도를 해야 내가 죽으면서 그런 것이 나간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저절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 부활하려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부활시키려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도 있지만 나와 함께 있는 내 아내와, 내 자식과, 내 남편과, 내 회사와, 내 민족과, 내 이웃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사는 일, 이것이 바로 별세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변화산 성회
눅 9장 28~36절 / 김영대목사
운동경기의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잠깐 쉬는 시간을 '하프타임'이라고 합니다. 이 하프타임을 통하여 선수와 감독은 전반전의 경기 내용을 분석하여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시키는 작전을 세워 후반전에 임하게 됩니다. 이 하프타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후반전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잘 했던 팀일지라도 후반전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기도 하고, 반대로 전반전에서 실점하여 패색이 짙다가도, 만회할 뿐만 아니라 역전승의 짜릿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밥 버포드(Bob Buford)'가 지은 "하프타임(Halftim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낮은 울타리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나온 책인데,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슬기로운 질문과 생각할 점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신은 인생의 전반전에서 어떤 능력과 열정을 가지고 살았는가?' 물으면서, 또한 '인생의 후반전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가운데는 이제 막 인생의 전반전을 시작한 어린 학생들도 있고, 반면에 후반전도 이미 한참 지나서 이제 경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임박한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물론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으로 향하는 중년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우리의 나이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의 하프타임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기 인생의 전환점, 가치관의 터닝 포인트를 갖게 되었다면 그 계기가 바로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을 나누는 하프타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프타임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든지 꼭 필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지금까지 출세와 성공을 바라보고 그 정상을 향하여서 뛰고 또 뛰어오는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평가된다면 이제 잠깐 하프타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잠깐 멈추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바른 것이었는지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프타임' 책의 저자 밥 버포드는 누구든지 인생의 전반전을 성공 지향적인 목표, 출세 지향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면 후반전은 가치 지향적인, 의미 지향적인 인생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권고요, 충고라고 생각됩니다. '의미를 찾는 인생'에 대하여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지배하고 싶어하는 성취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우리에게 '너는 무엇을 가졌느냐?' 보다, '너는 어떤 존재가 되었느냐?'를 묻도록 하프타임을 주십니다. 잠깐!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지향하고 있는 삶이 바른 삶인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한 주일 동안 우리는 돈을 위하여, 혹은 성공과 성취를 위하여 열심히 달렸습니다. 피곤하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주일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프타임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서 혹 잘못 가고 있지는 않은지 인생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잘못 가고 있다면 인생의 방향을 틀어 하나님의 거룩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 되길 하나님은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등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일, 바쁜 일 많지만 다 접어 두시고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과 여러분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방향으로 돌려놓는 귀중한 전환점이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후반전을 주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 예배가 여러분의 인생에 귀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서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 등반은 단지 산에 올랐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성숙과 체험적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준비하신 등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보신 분들은 산밑이나 중턱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한 눈에 보게되는 시야의 탁 트임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작년 가을에 지방 목사님들과 함께 설악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운동을 잘 안한 터라 그야말로 산행 길은 고생길이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고생 끝에 정상에 올라가서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앞에 보이는 속초 바다와 아름다운 설악의 연봉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정상을 한 번 경험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삶의 터전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손을 잡으시고, 높은 산으로 함께 올라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은 괜히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높은 산에 오르는 믿음의 등반에 초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구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정말 추구하고 붙들어야 할 귀한 것을 깨닫게 하는 계획이 있으시기에 우리를 초청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불평하지 말고 산을 끝까지 올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중간에서 힘들다고 내려가시면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절대로 도중에 포기하고 내려가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우리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거룩한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환희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저녁부터 춘계부흥성회를 갖게 됩니다.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부흥회가 이런 영적인 변화산에 오르는 경험이 되는 부흥회, 또한 인생의 전반전을 바쁘게 살아왔다면 이제 잠시 머물러 쉬면서 인생의 후반전을 구상하는 부흥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의 간절한 소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흥회는
첫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화를 체험하는 부흥회가 되어야 합니다(28).
본문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산을 오른 구체적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는 중에 예수님에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먼저, 예수님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는 것입니다.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은 여자 성도님들은 특별히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여러분을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시간, 바로 그 시간이 여러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는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얼굴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증거가 성경에 있습니다. 모세가 사십일 동안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출 34:29-35) 왜냐하면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광채가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면 이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얼굴에도 반영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느끼도록 하십시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옷이 얼마나 빛났던지 빨래하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요즘 많이 선전하는 그 어떤 세제나 표백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옷이 희어 빛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계신 순간에 예수님의 얼굴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었던 옷까지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 천이나 종이로 된 갓을 씌운 전기 스탠드가 있습니까? 있으시다면 불을 꺼 두었을 때와 켰을 때의 느낌이 어떻게 다릅니까? 전혀 다르지요! 스탠드 안에 불이 켜지면 온화하고 환한 느낌이 온 방안을 감싸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통하여 우리 속에 성령의 빛이 비춰지게 되면, 우리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존재인 것 같지만 그 느낌부터가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역에 속한 영광을 나타내는 빛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신성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제자들의 눈에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기도 가운데서 일어났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깊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가장 가까이 느끼는 시간입니다. 이번 부흥성회를 통하여 이런 깊은 기도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비를 맛보는 부흥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회는 언제나 무엇인가 변화를 일어나게 합니다. 생각의 변화, 생활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정의 변화, 신앙의 변화가 부흥성회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 우리 교회의 부흥회도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는 부흥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확고한 영적 체험과 간증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 변화산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그 때의 경험을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에서 18절 말씀(p. 385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지금 베드로가 과거 이 변화산의 경험을 근거로 확실하게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히 눈으로 보았고 귀로들은 것을 말하는 간증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힘있는 말입니까? 체험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간증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번 부흥 성회를 통하여 주님을 깊이 만나고 아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이런 영적인 정상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변화산에서 하늘의 신비, 영적 세계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찬송가 가사처럼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님만이 보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신비의 경험은 모든 의심을 물리치는 힘이 됩니다. 또한 모든 환란과 고난에서도 인내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지금 베드로서를 받게된 믿음의 공동체는 핍박과 환란이 심한 가운데 처한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확고함을 증거하기 위해 그가 일찍이 맛보았던 그 신비의 경험을 이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의 세계를 경험한다고 해서 무슨 이상한 마술에 걸려 몽롱한 가운데 헛것을 보는 그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이 신비를 체험할 때 오히려 온전한 정신가운데 경험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잠들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 하시는 것을 듣고는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 32절에는 베드로가 '온전히 깨어나'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 온전히 깨어나란 말은 잠에서 아주 깼다는 말입니다. 잠이 깨끗이 달아났다는 뜻입니다.
깨어나서 보니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에게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것을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여기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이유는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사역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소리에 제자들이 깨어났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에 자던 사람이 깨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 때의 경험에 근거하여 요한일서 1: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님)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너무도 확실하게 체험했다는 제자 요한 자신의 간증입니다.
이번 부흥회에 오시는 강사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예비해 두셨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의 졸던 믿음, 잠자던 믿음, 병든 믿음이 이번 기회에 아주 완전히 깨어나고,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는 깊은 영적인 경험이 있는 부흥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만 남는 부흥회가 되어야 합니다(35-36).
본문 35-36절을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남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구름이 걷히고 나니 모세도 없고 엘리야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이번 부흥회가 꼭 예수님만 남는 부흥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것 생각할 것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담임목사이지만 이 김영대 목사를 바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다 부족과 허물이 있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오시는 강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아서 큰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전해 주는 말씀만 남고, 증거하는 예수님만 여러분 마음속에 남기를 바랍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변화산의 성회는 첫째로 기도하는 성회였습니다. 이번 우리 교회의 부흥성회를 통하여서도 깊은 기도의 체험이 있는 성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변화되는 성회였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각의 변화, 생활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정의 변화, 신앙의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세 번째로 아주 잠에서 깨어나는 성회였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졸던 믿음, 잠자던 믿음, 병든 믿음이 이번 기회에 아주 완전히 깨어나고,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는 깊은 영적인 경험이 있는 부흥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오직 예수님만 남는 성회였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마치고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자리잡고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눅 9장 28~36절 / 손상률목사
그리스도인은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다(빌 3:20). 하늘의 시민권자는 하늘나라의 꿈을 간직하고 그것을 향해서 끊임없이 도전합니다(빌 3:14).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변형되었습니다.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좌우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었습니다. 이 황홀한 광경을 본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거기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저 높은 곳의 실상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슴에 담고 있는 이상향(理想鄕)이요, 또한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1. 낮은 곳(세상나라)의 실상
예수님은 높은 곳의 주인입니다. 그분이 스스로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빌 2:6-8). 마귀가 활동하는 곳으로, 죄와 죽음의 횡포에 시달리는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1) 질병과 죽음에 시달리는 곳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은 변화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바티칸시티의 베드로 대성당 안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에는 산위의 밝은 모습과 대조시켜 산 아래는 어두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죄와 마귀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떠나가나이다"고 하였습니다(눅 9:39).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이와 같은 불행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약점을 틈타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략해 오기 때문입니다.
2)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산 아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가운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 9:22).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이 거부하며 박대하고 죽였습니다(요 1:11). 질병이나 재난이나 죽음 같은 것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외적(外的)인 요인이라면 사람끼리 서로 싸우며 대립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의한 내적(內的)요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싸우는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약 4: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아온 세상에는 다툼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서로 큰 자가 되려고 다툼을 하였습니다(눅 9:46).
3)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10-12). 사람들은 교육을 통하여 인격의 완성을 이룬다고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배우면서 수제자의 위치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고 신앙고백을 하여 크게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마 16:16-17). 그러나 잠시 후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시는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16:22-23).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든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2. 높은 곳(하나님 나라)의 실체
신령한 눈이 열려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은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 준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1) 셋째 하늘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통하여 셋째 하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고후 12:1-2). 그때 저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세계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을 때 체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행 14:19). 셋째 하늘이란 공간적인 하늘과 다른 개념으로서 이는 영적인 세계를 뜻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기가 있는 대기권을 첫째 하늘이라 하고, 별들이 있는 성군층(星群層)을 둘째 하늘로 불렀으며, 셋째 하늘은 천사들의 활동공간으로 영층(靈層)이라 불렀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환상을 통하여 육신 밖에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하였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2) 하늘나라, 곧 천당입니다.
밧모섬에 유배 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하여 체질세계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계시록 21:1-2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 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하늘과 땅과 바다는 범죄한 인간들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파괴되었기에 죄와 상관없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복낙원(復樂園)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6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성(城)이라고 했는데 거기에는 질병이나 재난이나 죽음이 없으며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할 일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계 21:4).
3) 중생한 성도의 신령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7:21).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삶을 통하여 순간순간 천당의 실체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특권입니다.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는 동안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육신의 문제로 시달리곤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성령과 함께하는 의와 평강이 있어서 천국의 맛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지만 잃어버린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시고 회복된 자의 자리에서 차원 높은 삶을 맛보게 되었습니다(눅 19:1-10).
3.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대 희랍 사람들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과 육신의 갈등 속에서 신령한 삶으로 향상되어 가는 것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1) 위의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땅위에 살면서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특징입니다. 산위에서 예수님의 변화하신 모습과 함께 황홀한 천당의 환상을 본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을 짓고 그냥 눌러 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의 어둡고 답답한 현장이 그들의 활동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변화산의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 어둠의 현실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예배생활의 즐거움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생각의 범주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영적인 감격을 최대한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와의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위에 것을 사모하는 사람은 아랫것을 포기하여야 됩니다. 아랫것(육신의 소욕)과 위의 것(성령의 소욕)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5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속사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열망을 가질 때 육신의 사람이 이를 막고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치열한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을 하였습니다(롬 7:23-24). 히브리서 기자는 이 고상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고 하였습니다(히 12:1).
3)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유한 사람일 경우 거기 맞는 생활양식으로 길들여집니다. 잠시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겪게 되는 불편함 때문에 변화산의 감격마저 잃어버린다면 곤란합니다. 현재의 환경이 초막이건 궁궐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