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이 의미하는 것들
내일이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일제강점기 1919년 3월1일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2019년 3월 1일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민족의 감회가 새롭다. 당시는 조국을 잃어버린 민족이었고 그 후 100년이 지난 지금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진입하여 조국의 위상이 높아진 선진국 국민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이고 그 후 행방과 6.25를 거치면서 삼천리강토가 초토화된 거지의 나라에서 이승만, 박정희시대 국민소득 93달러(1961년)에서 2019년 현재 국민소득 3만 달러로 7위(2018년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GDP는 1조 6945달러로 세계11위가 되었다.
상전벽해 같은 삶의 변화를 체험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70세 이상 대부분 중, 노년들이 어려서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국가적 가난을 체험한 세대다. 이들의 조부모세대가 일제 강점기 조국을 잃었고 사는 게 고통인 일제시절 민족의 해방을 위해 조부모 같은 세대의 민초들은 눈물과 피를 바쳤다. 비분강개한 의사와 지사와 열사들은 목숨을 바쳤다. 피와 눈물과 생명을 받쳐 조국을 지킨 선열들의 그 숭고한 애국정신이 오늘의 위상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헌법전문에 이 정신을 기록했다.
후대와 후손을 위하여 조국을 해방시키고 적으로부터 지키고 죽을 각오로 고단한 삶을 수 십 년 이어온 그 시대 인물들의 생사여일의 사상을 바라보노라면 덴마크왕자 햄릿의 세익스피어작 명대사가 생각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숭고한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끝장내기 위해 맞서 싸우는 것이 숭고한가?
죽음이야 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죽는 건, 자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 그게 문제로다. 사랑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시간이 사랑의 불꽃을 약화시킨다는 것을 목격하고 사랑의 열정 속에는 촛불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처럼 사랑이 식어가듯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지 좋은 것도 가득차면 도가 넘치는 바람에 시드는 법. . . .” 고뇌와 방황 그 처절한 사랑과 죽음 이는 우리 모두의 아픔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생과 사의 운명의 굴레에 묶인 모든 실존의 절규일 것이다.
서구와 달리 동양의 정신에서 바라보면 죽음과 삶의 고민은 생사여일의 사상에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긴다면 우리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알차고 보람된 삶일까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자신의 생명을 거둔 순국열사와 의사들 이처럼 치열한 영혼들이 조국 앞에 충정이 없는 세상이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이토록 발전된 조국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이 호화로운 세상에서 당시에는 살아보지도 못한 이들의 잣대로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지독히도 불행했던 시대의 슬픈 지식인들이 억울하게 친일파의 낙인이 찍힌 채 지하에 누워있지는 않은지 살펴야할 것이다.
그 혹독한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언필칭 정의롭다는 후손들에게 친일의 낙인이 찍힌 이들도 무고와 위증이 속에 억울한 희생일 수가 있다. 나약한 인간들이 한계상황 속에서 저지르는 부도덕한 과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인간성의 불가피한 부조리(不條理)이기에 어느 정도는 관용해야한다. 대통령 박정희, 시일야방성대곡의 위암 장지연, 운보 김기창, 애국가의 안익태, 시인 정지용, 춘원 이광수, 청마 유치환, 미당 서정주, 난파 홍영후(일명 홍난파)등등은 일경의 앞잡이도 아니었고 일제의 고위관직을 누린 적도 없는 저들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나 경술국적(庚戌國賊)처럼 적극적으로 민족을 능멸한 매국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친일파 명단에 올랐다.
이름을 빼앗기고 성마저 갈아야했던 고난의 시절 늘 엄숙한 민족정기만을 뿜어낼 수 없는 고단한 일상이 절박한 삶의 현실이 그들의 영혼을 겁박하지 않았을까? 갈등과 모순투성이의 실존을 끌어안고 남몰래 목 놓아 울지 않았을까! 기미가요 울려 퍼지는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은 일장기 선명한 가슴으로 시상대에 올랐다고 친일파라 비난할 수 없듯이 민족을 위해 큰 줄기를 지키자고 곁가지 몇 개 던져줄 수밖에 없는 선인들의 비통한 영혼에 진실과 정의에 충실하다는 그 모진 세월을 단 하루도 살아 본적이 없는 그들이 지난날 고통을 이기고 선진국반열에 올려놓은 조국 앞에 고통과 고난을 견뎌보지 못한 주제에 살 떨리는 치욕의 세월을 억척스런 삶으로 견뎌낸 옛 어른들께 숙연한 추모의 묵념을 올리지 못할망정 얄팍한 정의감으로 침을 뱉을 만큼 고결한 정의감과 도덕적 자신감이 있단 말인가? 정의의 양심에서 고뇌어린 관용으로 호소해야 한다. 죽음의 피보다 삶의 땀이 먼저라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일제시절 이름과 성을 가는 창씨개명의 수모까지 겪으면서 아들딸 낳아 어렵게 기르며 피땀 흘려 가르쳐온 어르신들과 슬픈 지식인들이야말로 수난의 민족사를 지탱해온 버팀목이 아니던가. 역사는 정신과 실태(實態)의 결합이다. 선인들의 비통한 영혼에 단죄의 칼날을 꽂은 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이 상황 속에서 민족과 조국에 진실과 정의롭게 대처했는가? 고뇌어린 관용이 아쉬운 이 정의로운 시대의 슬픔이 대국적인 차원에서 관용으로 치유되길 바라며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되뇌어본다.
2019년 2월 28일 목요일
율 천
첫댓글
이율천님!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참으로 심오한 분석과 논리정연한 해석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 혹독한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언필칭 정의롭다는 후손들에게 친일의 낙인이 찍힌 이들도 무고와 위증이 속에 억울한 희생일 수가 있다. 나약한 인간들이 한계상황 속에서 저지르는 부도덕한 과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인간성의 불가피한 부조리(不條理)이기에 어느 정도는 관용해야한다.'
이 글을 많은 국민이 읽고 옳지 않은 관념 속에 큰 잘못 없는 선인들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애게 올바른 경종을 울려줄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좋은 글을 정중히 받들어 퍼서 옮겨도 되겠지요?
율천님!
감사합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