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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口淑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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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 大鷹 淑子 오오타카 요시코 おおたか よしこ |
別名義 | 李香蘭 리코란 |
生年月日 | 1920年2月12日 |
没年月日 | 2014年9月7日(만94 세 졸) |
出生地 | 中華民国 奉天省 奉天市 北煙台(現: 中国 遼寧省 灯塔市) |
死没地 | 日本 東京都千 代田区 一番町 |
民族 | 大和民族(本籍:佐賀県杵島郡北方町〈現:武雄市〉) |
ジャンル | 映画俳優、歌手 |
活動期間 | 1938年 - 1958年 |
配偶者 | イサム・ノグチ(1951-1955) 이사무 노구치 |
主な作品 | |
『白蘭の歌』 『支那の夜』 『熱砂の誓ひ』 | |
李香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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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種表記 | |
繁体字: | 李香蘭 |
簡体字: | 李香兰 |
拼音: | Lǐ Xiānglán |
和名表記: | り・こうらん |
発音転記: | リ・シャンラン |
英語名: | Shirley Yamaguc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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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政治家 山口 淑子やまぐち よし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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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職 | 女優、歌手、司会者 |
所属政党 | 自由民主党 |
選挙区 | (全国区→) 比例代表 |
当選回数 | 3回 |
在任期間 | 1974年7月8日 - 1992年7月7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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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口 淑子(やまぐち よしこ、1920年(大正9年)2月12日 - 2014年(平成26年)9月7日)は、日本の歌手、女優、政治家である。戸籍名:大鷹淑子(旧姓:山口)。さまざまな名前で活動し、戦前の中国(中華民国)と満州国・日本・戦後の香港で李 香蘭(り こうらん、リ・シャンラン)、第二次世界大戦後のアメリカ合衆国ではシャーリー・ヤマグチの名で映画、歌などで活躍した。日本の敗戦を上海で迎えた彼女は、中国人として祖国を裏切った漢奸の容疑で中華民國の軍事裁判に掛けられたものの、日本人であることが証明され、漢奸罪は適用されず、国外追放処分となり、日本に帰国した。
야마구치는 일본의 가수 배우 정치가이다. 호적의 이름; 오오타카 요시코. 여러 이름으로 활동하였는데, 전쟁 전의 중국과 만주국 일본 패전 후의 홍콩에서 이 향란으로, 제2차세계대전 후의 미국에서는 셜리 야마구치의 이름으로 영화 노래등에서 활약하였다.
일본의 패전을 상하이에서 맞이 하였던 그녀는 중국인으로 조국을 배반한 한간의 용의로 중화민국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일본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서 한간죄는 적용되지 않고 국외 추방처분이 되어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帰国後は、旧姓(当時の本名)・山口淑子の名前で芸能活動を再開し、日本はもとより、アメリカや香港の映画・ショービジネス界で活躍をしたが、1958年(昭和33年)に結婚のため芸能界を退いた。そして1969年(昭和44年)にフジテレビのワイドショー『3時のあなた』の司会者としてマスメディア界に復帰、1974年(昭和49年)3月まで務めた。後に1974年(昭和49年)から1992年(平成4年)までの18年間は、参議院議員をも務めた。2006年に日本チャップリン協会[1](大野裕之会長)の名誉顧問に就いた。
2014年9月7日、心不全のため東京都千代田区一番町の自宅で死去した[2]。満94歳。叙正四位[3]。
귀국 후는 옛성(당시의 본명) 야마구치의 이름으로 예는활동을 재개하여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나 홍콩의 영화 쇼비지네스계에서 활약을 하였지만 1958년에 결혼때문에 연예계를 떠났다. 그리고 1969년에 후지 텔레비젼의 와이드쇼[ 3시의 그대]의 사회자
로서 매스컴계로 복귀하였고 1974년 3월까지 일을하였다. 나중에 1974년 부터 1992년까지의 18년간 참의원 의원도 지냈다. 2006년에 일본 채플린 협회의 명예고문으로 취임하였다.
2014년 9월7일 심부전으로 동경도 치요다구 이치반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만 94세 정4위을 받음
1920年(大正9年)2月12日に、中華民国奉天省(現:中華人民共和国遼寧省)の炭坑の町、奉天北煙台で生まれた。南満州鉄道(満鉄)で中国語を教えていた佐賀県出身の父・山口文雄と福岡県出身の母・アイ(旧姓石橋)の間に生まれ「淑子」と名付けられる。奉天(現:瀋陽市)と北平(現:北京市)で育った。本籍は佐賀県杵島郡北方町(現:武雄市)。
親中国的であった父親の方針で、幼い頃から中国語に親しんだ。小学生の頃に家族で奉天へ移住し、その頃に父親の友人であり家族ぐるみで交流のあった瀋陽銀行の頭取・李際春将軍(後に漢奸罪で処刑される)の、義理の娘分(乾女児)となり、「李香蘭(リー・シャンラン)」という中国名を得た。その後、のちに天津市長になった潘毓桂とも義理の娘として縁を結んだ。中国の旧習では、元来縁を深めるために互いの子供を義子とする習慣があった。これは実際に戸籍を移す法的な養子という関係ではなく、それぞれの姓で互いの子女に名前を付けあうなどのものである。
1920년 2월21일 중화민국 봉천성( 현 중국 요녕성)의 탄갱의 마을, 봉천 북연대에서 태어났다.
남만주철도(만철)에서 중국어를 배웠던 사가현 출신의 아버지 山口文雄와 福岡県 출신의 어머니 ・アイ(처녀 성:石橋)사이에서
태어나ㅓ [ 요시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봉천(현 심양시)과 북평( 현 북경시)에서 자랐다. 본적은 佐賀県 杵島郡 北方町(現:武雄市)이다.
친중국적이었던 아버지의 방침으로 어릴 적부터 중국어와 친숙하였다. 소학교 학생 무렵에 가족이 봉천으로 이주를 하여 그 때에
아버지의 친구로 가족과 관련있던 교류가 있었던 심양은행의 행장 이제춘 장군( 후에 한간죄로 처형됨)의,수양딸이 되어
「李香蘭(リー・シャンラン)」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얻었다.
이 후에 나중에 천진시장이 된 潘毓桂과도 수양 딸이 되는 인연을 맺었다.
중국의 옛 습관에는 본래 인연을 깊게하기 위하여 서로의 자식을 수양자식으로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호적을 옮기는 법적인 양자라는 관계는 아니고 각각의 성을 서로의 자녀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その後、奉天に住む幼なじみのユダヤ系ロシア人であるリューバの母からの紹介を受け、白系ロシア人と結婚したイタリア人オペラ歌手のマダム・ポドレソフのもとに通い、ここで声楽を習うようになった。1934年(昭和9年)、淑子は「潘淑華」の名(潘毓桂の義子としての名前)で北京のミッション・スクール(翊教女子中学)に入学し、1937年(昭和12年)に卒業した。
이후에 봉천에서 살때 소꼽친구인 유태계 러시아 인인 류 바의 어머니를 소개 받고서 백계 러시아인과 결혼한 이탈리아인 오페라
가수인 마담 포도렌푸에게 다니며 여기서 성악을 배우게 되었다. 1934년 요시코는 「潘淑華」의 이름(潘毓桂의 수양딸로서의 이름)으로 북겨의 미션 스쿨(翊教女子中学)에 입학하여 1937년에 졸업하였다.
日本語も中国語も堪能であり、またその絶世の美貌と澄み渡るような歌声から、奉天放送局の新満洲歌曲の歌手に抜擢され、日中戦争開戦の翌1938年(昭和13年)には満州国の国策映画会社・満洲映画協会(満映)から中国人の専属映画女優「李香蘭」(リー・シャンラン)としてデビューした。映画の主題歌も歌って大ヒットさせ、女優として歌手として、日本や満洲国で大人気となった。そして、流暢な北京語とエキゾチックな容貌から、日本でも満洲でも多くの人々から中国人スターと信じられていた[4]。また、この頃「東洋のマタ・ハリ」と呼ばれた川島芳子との親交があった。
일본어나 중국어도 통달하고, 또 그 절세의 미모와 맑게 개이는 노래 소리로, 심양 방송국의 신만주 가곡의 가수에 발탁 되어 중일 전쟁 개전의 다음 해 1938년(쇼와 13년)에는 만주국의 국책 영화 회사・만주 영화 협회(만영)로부터 중국인의 전속 영화 여배우 「이향란」(리・샹란)로서 데뷔했다. 영화의 주제가도 불러서 대히트시켜, 여배우로서 가수로서 일본이나 만주국에서 대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유창한 북경어와 이국적인 용모로, 일본에서도 만주에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인 스타라고 믿어지고 있었다[4]. 또, 당시의 「동양의 마타・하리」라고 불린 카와시마 요시코와의 친교가 있었다.
日中戦争中には満映の専属女優として日本映画に多く出演し、人気を得た。人気俳優の長谷川一夫とも『白蘭の歌』『支那の夜』『熱砂の誓ひ』で共演した。1941年(昭和16年)2月11日の紀元節には、日本劇場(日劇)での「歌ふ李香蘭」に出演し、大盛況となった。大勢のファンが大挙して押し寄せ、日劇の周囲を7周り半もの観客が取り巻いたため、消防車が出動・散水し、群衆を移動させるほどの騒動であったと伝えられている(日劇七周り半事件)[5]。
1943年(昭和18年)6月には、阿片戦争で活躍した中国の英雄・林則徐の活躍を描いた長編時代劇映画『萬世流芳』(151分)に、林則徐の弟子・潘達年の恋人(後に妻)役で主演した。この映画は、中華電影股份有限公司、中華聯合製片股份有限公司、満映の3社による合作で、阿片戦争敗北100周年記念に作られた映画であった。中国全土で映画が封切られるや、劇中、彼女が歌った主題歌「売糖歌」と挿入歌「戒煙歌」も大ヒットしたが、映画『萬世流芳』は、中国映画史上初の大ヒットとなったのである。また内容は、阿片戦争の相手国であったイギリスを当時の日本に見立てて、中国民衆の抗日意識を鼓舞するものだった。
중일 전쟁중에는 満映의 전속 여배우로서 일본 영화에 많이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인기 배우의 하세가와 카즈오와도 「백란의 노래」 「시나의 밤」 「열사의 맹세」로 공동 출연했다. 1941년(쇼와 16년) 2월 11일의紀元節에는, 日本劇場(일극)에서 「「歌ふ李香蘭」노래하는 이향란」에 출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많은 팬이 대거 밀려 들어 일본극장의 주위를 7 바퀴 반의 관객이 둘러쌌기 때문에, 소방차가 출동・살수를 하여, 군중을 이동시킬 정도의 소동이었다고 전하고 있다(일극7 바퀴 반사건)[5].
1943년(쇼와 18년) 6월에는, 아편 전쟁에서 활약한 중국의 영웅・임칙서 林則徐의 활약을 그린 장편 시대극 영화 『萬世流芳』(151분 )에서, 임칙서의 제자・반들년의 연인( 후에 처가 됨) 역으로 주연을 하였다. 이 영화는, 중화전영주식유한 공사, 중화 연합제편주식유한 공사, 満映의 3사에 의한 합작으로, 아편 전쟁 패배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중국 전 국토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마자, 극중, 그녀가 노래한 주제가 「売糖歌」라고 삽입노래 「戒煙歌」도 대히트 했지만, 영화 『萬世流芳』는, 중국 영화 사상최초의 대히트가 되었던 것이다. 또 내용은, 아편 전쟁의 상대국이었던 영국을 당시의 일본으로 보여서, 중국 민중의 항일 의식을 고무 하는 것이었다.
『萬世流芳』の大ヒットにより中国民衆から人気を得た李香蘭は、上海から北京の両親のもとへ帰郷し、北京飯店で記者会見を開いた。 当初、この記者会見で彼女は自分が日本人であることを告白しようとしていたが、父の知人であった李記者招待会長に相談したところ、「今この苦しい時に、あなたが日本人であることを告白したら、一般民衆が落胆してしまう。それだけはやめてくれ」と諭され、告白を取りやめた[5]。この記者会見が終わりかけた時、一人の若い中国人新聞記者が立ち上がり、「李香蘭さん、あなたが『白蘭の歌』や『支那の夜』など一連の日本映画に出演した真意を伺いたいのです。あの映画は中国を理解していないどころか、侮辱してます。それなのに、なぜあのような日本映画に出演したのですか? あなたは中国人でしょう。中国人としての誇りをどこに捨てたのですか」と質問した。これに対し彼女は、「20歳前後の分別のない自分の過ちでした。今は後悔しています。あの映画に出たことを後悔しています。今後、こういうことは決して致しません。どうか許してください」と答えるや、記者会見会場内からは大きな拍手が沸いたという。
『萬世流芳』의 대히트에 의해 중국 민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은 이향란은, 샹하이에서 북경의 부모님의 곁으로 귀향하여,北京飯店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당초, 이 기자 회견에서 그녀는 자신이 일본인인 것을 고백하려고 하었지만, 아버지의 지인인李記者招待会長과 상담했는데, 「지금 이 괴로울 때에, 당신이 일본인인 것을 고백하면, 일반 민중이 낙담해 버린다.그것만은 그만두어라」라고 설득되어 고백을 취소하였다[5]. 이 기자 회견이 끝나갈때, 한 명의 젊은 중국인 신문기자가 일어서, 「이향란씨, 당신이 「백란의 노래」나 「시나의 밤」 등 일련의 일본 영화에 출연한 진심을 묻고 싶습니다.그 영화는 중국을 이해하고 있기는 커녕, 모욕하고 있습니다.그런데도, 왜 그와 같은 일본 영화에 출연했습니까? 당신은 중국인이지요. 중국인으로서의 자랑을 어디에 버렸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것에 대해 그녀는, 「20세 전후의 분별이 없는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그 영화에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런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라고 대답하자 마자, 기자 회견 회장내에서는 큰 박수가 끓었다고 한다.
記者会見と前後して、上海の百代唱片公司で収録した「夜来香」「海燕」「恨不相逢未嫁時」「防空歌」「第二夢」などがヒットした。このうち汪兆銘政権(南京国民政府)の国策宣伝歌「防空歌」は、中国人の祖国防衛意識をかきたてた。また、1945年(昭和20年)6月23・24・25日に上海・静安寺路(現・南京西路)の大光明大戯院Grand Theatre(現・大光明電影院)で行われたリサイタルでは、ヒット曲「夜来香」を含む中・日・欧米の歌曲などが披露され、観客の喝采を浴びた。そして人気の勢いは留まることを知らず、李香蘭は、周璇、白光、姚莉、呉鶯音らと共に上海灘の「五大歌后」の1人に数えられた)[5]。
それまで、李香蘭は満州国と日本のスターだったが、映画『萬世流芳』とその主題歌「売糖歌」、挿入歌「戒煙歌」そして「夜来香」「海燕」「恨不相逢未嫁時」「防空歌」「第二夢」などのヒット曲により、中華民国でも人気スターとなった。そして『萬世流芳』の後、『香妃』という映画が企画されたものの、撮影開始前に終戦を迎え、上海での映画出演は1本に終わった。また歌においては、1945年(昭和20年)にカップリングで吹き込み発売された「第二夢」と「忘憂草」とが、中国での最後の収録曲となった。なお「第二夢」は2012年、中国で蒼井そらによりリヴァイヴァルされ、現代の中国人にも創唱者は李香蘭であるということが知れわたった。「第二夢」は、台湾のトップ・シンガー費玉清が、台湾は元より東南アジアや中国大陸各都市でのコンサートでも歌い継いでいる。
기자 회견과 전후해서, 샹하이의 百代唱片公司 에서 수록한 「夜来香」「海燕」「恨不相逢未嫁時」「防空歌」「第二夢」등이 히트 했다. 이 중 汪兆銘政権(남경 국민 정부)의 국책 선전노래 「防空歌」는, 중국인의 조국 방위 의식을 북돋우었다. 또, 1945년(쇼와 20년) 6월 23・24・25일에 上海・静安寺路(現・南京西路)의 大光明大戯院Grand Theatre(現・大光明電影院)에서 행해진 리사이틀에서는, 히트곡 「夜来香」을 포함한 중・일・구미의 가곡등이 공연되어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인기의 기세는 머무를 줄 모르고,이향란은,周璇、白光、姚莉、呉鶯音 등과 함께 상해탄의 「5 대 가후」의 하나로 꼽혔다[5].
그것까지는, 이향란은 만주국과 일본의 스타였지만, 영화 『萬世流芳』와 그 주제가 「売糖歌」삽임곡「戒煙歌」그리고 「夜来香」「海燕」「恨不相逢未嫁時」「防空歌」「第二夢」등의 히트곡에 의해, 중화 민국에서도 인기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萬世流芳』의 뒤에, 、『香妃』라고 하는 영화가 기획되었지만, 촬영 개시전에 종전을 맞이하여 샹하이에서의 영화 출연은 하나로 끝났다. 또 노래에 있어서는, 1945년(쇼와 20년)에 커플링으로 취입 발매된 「第二夢」과「忘憂草」가, 중국에서의 마지막 수록곡이 되었다. 또한 「第二夢」은 2012년, 중국에서 蒼井そら에 의하여 리바이벌 되어 현대의 중국인에게도 원창자가 이향란이란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第二夢」은, 대만의 톱・싱어 費玉清이, 대만은 본래부터 동남아시아나 중국 대륙 각 도시에서의 콘서트에서도 불려지고 있다.
李香蘭は中国人と思われていたため、日本の敗戦後、中華民国政府から漢奸(売国奴・祖国反逆者)の廉で軍事裁判にかけられた。そして、李香蘭は来週上海競馬場で銃殺刑に処せられるだろう、などという予測記事が新聞に書かれ、あわや死刑かとも思われた。しかし奉天時代の親友リューバの働きにより、北京の両親の元から日本の戸籍謄本が届けられ、日本国籍であるということが証明された。
結果、漢奸罪は適用されず、国外追放となった[4]。無罪の判決を下す際、裁判官は「この裁判の目的は、中国人でありながら中国を裏切った漢奸を裁くことにあるのだから、日本国籍を完全に立証したあなたは無罪だ。しかし一つだけ倫理上、道義上の問題が残っている。それは、中国人の名前で 『支那の夜』 など一連の映画に出演したことだ。法律上、漢奸裁判には関係ないが、遺憾なことだと本法廷は考える」と付言を加え、李香蘭は「若かったとはいえ、考えが愚かだったことを認めます」と頭を下げて謝罪した[5]。
1946年(昭和21年)2月28日、李香蘭と似ても似つかぬように化粧を落とし、もんぺ姿で引揚船に乗船しようとしたが、中華民国側の女性出入国管理官に李香蘭と見破られ、再度収容所に連れ戻された。10日後に誤解は解け、1か月後の3月末に今度こそ出国できることになった。李香蘭は乗船するや否や、一旦は便所に身を潜めたが、船が港を離れてからデッキで遠ざかる上海の摩天楼を眺めていると、船内のラジオから聞こえてきたのは、奇しくも自分の歌う「夜来香」だった[4]。
이향란은 중국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패전 후, 중화 민국 정부로부터 배신자(매국노・조국 반역자)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이향란은 다음 주 上海競馬場 에서 총살형에 처해질 것이다, 라는 예측 기사가 신문에 쓰여져,자칫 사형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奉天시절의 친구 류바의 활동에 의해, 북경의 부모님의 본래 일본의 호적 등본이 도착되어 일본국적인 것이 증명되었다.
결과, 배신자죄는 적용되지 않고, 국외 추방이 되었다[4]. 무죄의 판결을 내릴 때, 재판관은 「이 재판의 목적은, 중국인이면서 중국을 배반한 배신자를 재판하는 것에 있으니까, 일본국적을 완전하게 입증한 당신은 무죄다.그러나 단 하나 윤리상, 도의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그것은, 중국인의 이름으로 「시나의 밤」 등 일련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법률상, 배신자 재판에는 관계없지만,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본법정은 생각한다」라고 부언을 더해 이향란은 「젊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어리석었던 일을 인정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여 사죄하였다[5].
1946년(쇼와 21년) 2월 28일, 이향란과 전혀 닮지 않게 화장을 지우고, 몸빼 모습으로 인양선에 승선하려고 했지만, 중화 민국측의 여성 출입국 관리관에 이향란이라고 들켜서 재차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10일 후에 오해는 풀 수 있어 1개월 후의 3월말에 이번이야말로 출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향란은 승선하자 마자, 일단은 便所에 몸을 감추었지만, 배가 항구를 떠나고 나서 데크로 멀어지는 샹하이의 마천루를 바라보고 있자, 선내의 라디오로부터 들려 온 것은, 기이하게도 자신이 노래한 「夜来香」이었다[4].
帰国した後、翌年には旧姓(当時の本名)「山口淑子」に戻って銀幕に復帰、日本映画を中心に活躍した。主演作では、池部良と共演した1950年(昭和25年)の『暁の脱走』などが名作として名高い。『わが生涯のかがやける日』では森雅之と、『醜聞』では三船敏郎と共演している。
またアメリカに渡り、アクターズ・スタジオの講師から演技を学び、シャーリー山口(Shirley Yamaguchi)の名でハリウッド映画に主演したり、ブロードウェイでのミュージカルにも主役で出演した。その際に受けたインタビューで山口は「キスの勉強にやって参りました」と渡米の理由を述べている。その頃ニューヨークで彫刻家イサム・ノグチと知り合い、1951年に結婚した。鎌倉の北大路魯山人の邸宅敷地内にアトリエと住まいを構えたが、1955年(昭和30年)に離婚する。
1952年(昭和27年)から1958年(昭和33年)にかけてはイギリス領香港で映画『金瓶梅』『神秘美人』『一夜風流』に主演し、中国語圏で「李香蘭」の名を復活させた。また同時に、香港の百代唱片公司で十数曲の主演映画の主題歌を吹き込み、映画と共にリリースしてヒットさせる。それらは今日もスタンダード・ナンバーとして、世界の中国人・華人の間で歌い継がれている。「三年」「梅花」「小時候」「十里洋場」「分離」などである。
귀국한 후, 다음 해에는 옛성(당시의 본명) 「야마구치 요시코」로 돌아와 은막에 복귀, 일본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주연작으로는, 池部良 이케베 아키라와 공동 출연한 1950년(쇼와 25년)의 『暁の脱走』「새벽의 탈주」등이 명작으로서 유명하다. 。『わが生涯のかがやける日』「우리 생애를 빛날 수 있는 날」에서는 森雅之 모리 마사유키와 、『醜聞』에선 三船敏郎 미후네 도시로와 공동 출연하고 있다.
또 미국에 건너가, 아크타즈・스튜디오 アクターズ・スタジオ의 강사로부터 연기를 배워, 셜리 야마구치(Shirley Yamaguchi)의 이름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주연 하거나 브로드 웨이로의 뮤지컬에도 주역으로 출연했다. 그 때에 했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는 「키스를 공부하러 하고 왔습니다」라고 도미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 무렵 뉴욕에서 조각가 イサム・ノグチ 이사무 노구치와 알게 되어, 1951년에 결혼했다. 鎌倉의 北大路魯山人(카마쿠라의 기다오오지 로산진)의 저택 부지내에 아틀리에와 거주지를 지었지만, 1955년(쇼와 30년)에 이혼한다.
1952년(쇼와 27년)부터 1958년(쇼와 33년)에 있어서는 영국령 홍콩에서 영화 『金瓶梅』『神秘美人』『一夜風流』에 주연 하여, 중국어권에서 「이향란」의 이름을 부활시켰다. 또 동시에, 홍콩의 百代唱片公司에서 수십곡의 주연 영화의 주제가를 불어서, 영화와 함께 릴리스 하여 히트 시킨다. 그것들은 오늘도 스탠다드・넘버로서 세계의 중국인・중화인의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다. 。「三年」「梅花」「小時候」「十里洋場」「分離」 등이다.
1958年(昭和33年)に、駐ビルマ日本大使館の三等書記官で国連大使の加瀬俊一の秘書官も務めた日本人外交官の大鷹弘(のち駐ミャンマー特命全権大使、1928年 - 2001年)[6]と再婚し、20年にわたる女優業を引退する。引退直前には原節子の呼びかけにより、芸能生活20周年記念映画として『東京の休日』が製作された。それは三船敏郎、池部良、越路吹雪などの東宝オールスターが出演する豪華なものとなった。そしてこの映画が最後の出演映画となった。
その後はマスコミに一切姿を見せなかったものの、1969年(昭和44年)に、「山口淑子」の名でフジテレビのワイドショー『3時のあなた』の司会者になり、芸能界へのカムバックを果たす。番組ではベトナム戦争中の南ベトナムやカンボジア、中東などの海外取材も行う。朝日放送が製作した番組『こんにちは!北朝鮮』ではリポーターを務め、北朝鮮を訪問、金日成国家主席と会談している。1973年(昭和48年)には日本赤軍の重信房子とのインタビューに成功した。
1958년(쇼와 33년)에, 주 버마 일본 대사관의 삼등 서기관으로 유엔 대사의 加瀬俊一(카세 도시카즈)의 비서관으로도 일하던 일본인 외교관 大鷹弘(뒤에 주미얀마 특명 전권대사, 1928년- 2001년)[6]과 재혼하여, 20년에 걸친 여배우를 은퇴한다. 은퇴 직전에는 原節子(히라세츠코)의 요청에 의해, 예능 생활 20주년 기념 영화로서 『東京の休日』이 제작되었다. 그것은 三船敏郎、池部良、越路吹雪(미후네 도시로, 이케베 아키라, 고시지 후부키)등의 東宝 올 스타가 출연하는 호화로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마지막 출연 영화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매스컴에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1969년(쇼와 44년)에, 「야마구치 요시코」의 이름으로 후지테레비의 와이드쇼 「3시의 당신」의 사회자가 되어, 연예계에 컴백을 한다. 프로그램에서는 베트남 전쟁중의 남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중동등의 해외 취재도 실시한다. 아사히 방송이 제작한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북한」에서는 리포터를 맡아 북한을 방문, 김일성 국가 주석과 회담하였다. 1973년(쇼와 48년)에는 일본 적군 重信房子(시게노부 후사코)와의 인터뷰에 성공했다.
1974年(昭和49年)に、時の総理大臣・田中角栄の要請で自由民主党から第10回参議院議員通常選挙に全国区から立候補し、初当選した。田中派に所属、後に宮沢派に転じる。1980年(昭和55年)、1986年(昭和61年)と再選され、環境政務次官・参議院沖縄及び北方問題に関する特別委員長・参議院外務委員長・自民党婦人局長などを1992年(平成4年)に引退するまで歴任した。1993年(平成5年)11月3日、勲二等宝冠章受章。政界引退後は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の呼びかけ人となり、同基金の副理事長を務めた。[7]
1974년(쇼와 49년)에, 당시 총리대신・田中角栄(타나카 가쿠에이)의 요청으로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전국구로부터 입후보 하여, 첫 당선 했다. 타나카파에 소속, 후에 미야자와 파로 변한다. 1980년(쇼와 55년), 1986년(쇼와 61년)에 재선되어 환경 정무 차관・참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회원장・참의원 외무 위원장・자민당 부인 국장등을 1992년(헤세이 4년)에 은퇴할 때까지 역임했다. 1993년(헤세이 5년) 11월 3일, 훈2등 宝冠章 수상. 정계 은퇴 후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의 대변인이 되어, 동 기금의 부이사장을 맡았다. [7]
劇団四季では、彼女の半生を『ミュージカル李香蘭』としてミュージカル化した。1991年の初演以来、劇団四季の代表作品として人気を呼び、幾度となく再演され続けている。後に、『ミュージカル異国の丘』『ミュージカル南十字星』と共に“昭和の歴史三部作”ひとつ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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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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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代: 岡野裕 | 参議院外務委員長 1991年 - 1992年 | 次代: 野沢太三 |
先代: 上田稔 | 参議院沖縄及び北方問題に関する委員長 1981年 - 1982年 | 次代: 佐々木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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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마솥 더위에 몸 건강 하세여...
감사합니다.;;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인물의 당시 삶을 보면서 오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삼복더위에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李香蘭, !
중.일전쟁 의 틈바구니속에 굴곡진 삶을 겪으면서도 최후에는 생애 마지막 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네요.
더위에 장문의 번역 감사드리고 잘 읽고 보고 갑니다.
애 많이 쓰셨읍니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중국에서 태어났어도 유력 중국인의 양녀가 되어 중국학교도 다녔고
백계 러시아 인에게 성악도 배워 유명한 가수가 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용모도 서구적으로 생겨 일본인 중국인 모두에게 인기를 얻는 영화배우로
만 25년 까지 활동하였는데 다만 중국인 행세를 하였기에 일본 패전후
중국의 법정에서 매국노 처벌을 받을 뻔 하였으나
일본인 신분이 역시 외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증명되어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즉 25 살부터 일본서도 유명한 가수 배우로 활동하다가
미국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정도로
일어 중국어 영어 모두 유창할 정도로
스마트한 여성이었고 당대 유명예술가와 결혼 후
이혼 한뒤 외교관과 결혼하여 살던 중
자민당 참의원으로서 여러번 연속 당선되어 18년간 정치가로 살다가
은퇴 후에도 많은 사회 활동을 하였으니
화려하게 94년간을 살았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알던 등려군의 노래들이 이향란님의 노래였다는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주야곡도 미소라히바리노래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향란님 노래였는것도 첨 알았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중국인의 수양딸로서의 이름보다는
일본인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단지 약15년 정도 썼던 것보다
80여년을 함께한
야마구치 요시코가
그녀의 이름이라 보여집니다
야마구치 요시코?
이향란?
리샹란?
[김강현] [오전 8:43] “리샹란, 노래·연기로 관동군 사기 진작 총살 감”소문 무성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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