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서 바람이 바꾸어 분다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서 그야말로 화사(꽃절)가 아닐 수 없었다. 꽃 아래를 거닐면서 봄날의 찬가를 불렀다. 내 생애 특별하고 황홀한 봄날을 맞이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색이 툭 터진다
그저께는 햇살이 따스해서 종일 밖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다. 법당 뒤쪽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낙엽더미를 걷어내는 일로 몇 시간을 보냈다. 영산홍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낙엽까지 걷어냈다. 벌써 꽃가지에는 생명의 기운들이 봄 기지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란 가지에 새 움이 트고 함박꽃 새싹이 흙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내밀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앞뜰에서 복수초 몇 송이를 보았다. 얼마나 청초하던지 나도 모르게 감탄을 연발했다.
누가 봐주지 않았어도 저만치 홀로 피어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고 있다.
다른 꽃들이 몸을 열지 않고 아직 침묵하고 있는 이 시기에 먼저 말문을 열어주어서 고맙기 그지없다.
견디기 어려워, 드디어
겨울이 봄을 토해 낸다
흙에서, 가지에서, 하늘에서,
색이 툭 터진다
여드름처럼
조병화 시인이 두고 간 봄 편지다.
봄은 이렇게 그 때를 참지 못해서 여드름처럼 툭툭 터지고 있다. 바람의 느낌도 조금씩 다르다.
봄 손님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어느 날 훅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아장아장 아주 조금씩 걸어와서 안부를 전한다. 봄꽃이 순식간에 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근차근 준비한 축제라는 뜻이다.
다만 바쁘게 살다보니 봄 기척을 듣지 못할 뿐이다. 그 겨울부터 준비해온 것이다. 꽃나무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가을 즈음에 이미 꽃눈이 맺히고 그 꽃눈을 외피가 여러 겹으로 감싸주고 있다. 다시 말해 꽃은 추워지기 전에 온전히 형성되어 겨울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봄이 되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과정이 개화의 순간이다.
우리 인생도 최선을 다하며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 기회를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계획했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아직 때가 다가오지 않았다고 위로하면 되는 것이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듯 인생의 결승점에 도달하는 때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 때는 따로 있는 것이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일본 에도 시대의 시인으로 유명한 료칸선사(1758-1831)가 남긴 하이큐는 읽을 때마다 마음을 청량하게 한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초막에 밤도둑이 들어 스님의 양식을 가져가고 빈 쌀독만 남았을 때, “도둑이 창가에 달만 남기고 갔네”라고 후기를 적었다. 도둑이 물건을 모두 가져갔지만 달은 가져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읽을수록 깊고 긴 여운이 있는 일화다.
자루엔 쌀 석 되
화롯가엔 땔나무 한 단
밤비 부슬부슬 내리는 초막에서
두 다리 한가로이 뻗고 있네
탈속의 경지가 잘 드러나 있어 좌우명으로 삼고 싶을 정도다.
나중에 초막을 가지게 되면 이 게송을 걸어 놓고 지낼 작정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더라도 이러한 처지만 된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을 것 같다. 분수 넘치게 많이 가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쌀 석 되, 땔나무 한 단에도 발 뻗고 자는데... 욕심은 버리는 것이라 했던가. 옛글은 이렇게 가슴 한쪽을 시원하게 해 주는 맛이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런 가르침을 배우면서 아주 신선한 한 때를 보냈다. 이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고 있다.
날이 풀어지면 새들은 먼저 나들이를 하며 햇살을 즐긴다. 아무리 들어도 시끄럽지 않고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출처 ; 현진 스님 / 꽃을 사랑한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