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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벨테브레이(Weltevree)
생애 및 활동사항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나 1626년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Gijsbertz,D.)·피에테르츠(Pieterz,J.)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1628년(인조 6)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동료 2인과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
분투했고 이 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1653년(효종 4) 하멜(Hamel, H.) 일행이 표류해 도착했을 때는
박연 (벨테브레이(Weltevree)은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으며
이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병영(兵營)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네들란드어로 그들과 소통하면서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
큰 키에 노란 머리, 푸른 눈을 지녔으며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견문한 동양 각 국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를 말해 도자(道者)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크리스토교(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의 거취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하멜(Hamel) (1692년 사망)
1653년(효종 4) 1월 배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바다비아를 거쳐 타이완에 도착했다.
그해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 표착했다.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은 후 이듬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그뒤 165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1666년 9월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13년간의 한국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1668년 네덜란드수도 암스테르담의 서점에
이색적인 50 여페이지 정도의 책 한권.)
'하멜 표류기'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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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8월 조선에도 아주 사소한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號)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제주도 해안에서 폭풍우로 난파되었다. 선원 64명 가운데 선장을 포함하여 28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살아남아 가까스로 뭍에 표착(漂着)했다.
그 이후 이들은 무려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생존자들이
탈출해 귀향했다.
이 중에는 그 배의 서기(書記)였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도 끼여 있었다.
그는 1666년 9월 조선을 탈출해 이듬해까지 나가사키에 머물렀다.
그때 그는 회사에 밀린 급료를 요구하기 위해
그동안 일행이 공무를 수행하다 겪은 재난을 연도별로 꼼꼼히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문건을 흔히 ‘하멜 표류기’라고 부른다.
13년간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제출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했다는 하멜의 표류기는 정작 분량이 얼마 안 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시아 무역을 독차지하고
신대륙을 발견한 후,
후발 주자로 뛰어든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세계 무역의 주도권을 움켜쥔 활약 등,
17세기 서구 사회의 모습과 인공섬 데지마를 통한
서구와의 무역으로 활짝 열린 일본 정세를 이해하기 쉽도록
이 책은 도입부를 상당 할애했다.
물론 광해군부터 현종까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사회의 움직임 또한 세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헨드릭 하멜은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회계사로
1653년 조선에 표착하여 1666년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하기까지
13년간 조선에 억류된 외국인이었다.
하멜의 기록대로 하멜일지 와 조선 왕국에 대한 기술
그리고 이후상황 을 나누어 정리해 놓았습니다.
하멜일지 편에서는
1653년 8월 16일 퀠파르트 (제주도)에 난파하여
생존한 스페르베르호의 승무원과 선원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적은 기록으로
나가사키로 탈출하기 전까지 그들의 눈으로 본 조선의 풍속과 정치. 군사. 교역 등이 기록되어 있다.
돌아가기전까지 14년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위해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하멜 표류기가 그 의의는 있다 .
조선인을 처음 볼때는 추방당한 중국인인가 추측했다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자신들에게 의사는 잘 통하지 않지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지내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살펴주고 친절을 베푼
한 제주 목사의 모습을 느낀 그대로 사실감있게 적어놓았다.
그리고 또 그와는 대조적으로 새로 온 제주 목사는
반찬지급을 줄이기도 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노역을 심하게 시킨곳도 있었다고도 적혀있다
이런 기록은 조선에서 억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신들의 거취문제가 달라질때마다 기록되어 있다.
궁으로 압송되어 가며 머문 해남. 영암, 장성. 정읍. 태인. 금구. 전주 은진. 연산 . 공주 등
우리나라의 구체적 명칭들과 모습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든 나라의 모습과
왜란을 겪으며 황폐해지고 굶주린 백성들의 모습이
그들의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하멜의 일지 중 제가 조금 놀랐던 부분은
바로 일본으로 탈출하여 나가사키 수장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적어놓은 기록부분이었다.
50가지가 넘는 질문들이
외국인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물에 대한 관심도가
너무도 잘 표현된 문항들이었다.
그 중에는 일본이 하멜일행에게
우리 조선에 대한것들을 묻는 질문이 많다.
조선이 얼마나 큰지. 지금 전쟁 수행중인지.
조선의 무기와 군사장비들은 어떤지.
전라도의 크기와 위치. 성이나 요새까지도 묻고 있다.
조선에 머무르는건 허락하지만
돌려보내지는 않겠다는 조선의 건 바로 이 기록들 때문이다.
하멜 일행중 8명만 일본에 1년을 머물렀는데
그 1년 동안에 일본은
하멜일행에 대한 조사를 하멜 스스로 기록에 남길만큼 자세히 했다
우리 나라에서 머무는 13년동안 이었다
하멜 일행은 표착 직후 체포되어 제주도에 억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이 통역 겸 조사관으로 파견한 사람이
바로 박연(朴淵)이었다.
그 역시 1627년 배가 난파해서 조선 해안에 표착했다가 붙잡힌
3명 가운데 2명은 조선 전쟁에서 죽고 남은 네덜란드인이었다.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의 포병장교로 있었다.
하멜은 당시 박연의 나이를 57~58세로 추정했다.
이듬해 5월, 조정은 그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내라고 명령했다.
호송 도중에 한 명이 사망하여 한양에 도착한 것은 35명이었다.
며칠 후 그들은 국왕(효종) 앞에 불려 나가
고국(네들란드)으로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국왕은 이를 거부하면서
대신 “죽을 때까지 부양해주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그들은 박연이 소속된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호패와 화승총을 지급받았다.
하멜의 표류기 시대는
스페인 포르투칼은 뒤로 물리치고
당시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던 나라였다.
하멜 일행도 항해사, 조타수, 포수, 갑판원, 선의(船醫), 서기 등
다양한 직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배에는 대포만 수십 문이 있었다.
1666년 조선을 탈출할 당시의 생존자(16명) 중에도
포수만 4명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그들의 근대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들을 처음 접견한 국왕은 그들에게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했다.
이어서 그들은 ‘매일 고관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명령을 받고’
그 집 식솔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다.
큰 코, 붉은 머리, 흰 피부를 가진 ‘남만인’들은
당시 한양 사람들에게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들이 어디를 가나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그들은
청나라 사신들이 그들을 보지 못하도록
가택에 연금되거나 남한산성으로 격리되었다.
그런데 1655년 3월 그들 중 두 명이 몰래 숨었다가
청나라 사신의 행렬로 난입하는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다.
조정은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조선이 외국인을 몰래 숨겨두었다는 사건을 무마하고도
상당 기간 청나라의 트집을 염려했다.
두 명은 투옥되었다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돌발적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이들의 존재에 부담을 갖게 되었다.
청나라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도 문제였다.
임진왜란 후 양국은
외국인의 표착을 상호 통보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강경파들은 아예 이들을 처형해서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국왕은 호남으로 보내도록 조치했다.
호남은 청나라와 일본의 눈길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다.
1656년 봄, 생존자 33명은 전라병영(강진 소재)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잡다한 부역에 시달리며 땔감을 구하고
심지어 구걸까지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5~6년 동안 그들 중 무려 11명이 죽고 1662년에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재정이 피폐해진 전라병영의 요청으로
그들은 다시 여수(12명)·순천(5명)·남원(5명)으로 분산배치되었다.
여수에는 '하멜 표류기' 기념관이 있다
당시에는 가뭄·혹한과 같은 자연재해가 잇따라
그들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가 도탄에 빠졌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사회는 피폐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했다.
주자학도 이미 순기능을 다했다.
그럼에도 엘리트들은 시대 변화를 외면한 채 수구적인 예학(禮學)을 통해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여러 측면에서 당시는 조선의 암흑기였던 셈이다.
다시 3~4년이 흘러 생존자는 불과 16명으로 줄었다.
그들은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한’ 끝에
1666년 9월 웃돈을 주고 산 배를 타고 8명이 일본으로 탈출했다.
1668년에 잔존자 7명이 일본을 통해 네들란드로 송환되었다.
잔존자 8명 중 1명은 그 사이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리하여 최후의 생존자 15명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항해술, 조선술, 포술(砲術)과 같은
그들이 보유한 선진적 기술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또한 돌발적 사건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그들의 신병 처리를 고민했다.
아울러 사건의 대목마다 늘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조선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피상적인 호기심, 무전략,
온정주의 등으로 일관했다.
아쉽게도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조선의 안목은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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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만 보아도 그들은 우리 것 보다 훨씬 진화된 조총을 가지고 있었고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하멜의 배는 총 30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음). 망원경과 함께 정밀한 천체관측술(天體觀測術; 그들은 배의 좌초지점을 북위 33도 32분으로 간단히 알아냈을 정도였음)과 측량기구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하는 해상강국이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를 감당할 선박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좌초로 파손되었지만 그런 기술로 건조된 그들의 선박도
조선 당국이 의사만 있었더라면 충분히 살펴 보고
상당한 기술정보를 알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멜 배의 잔해를 보는 족족
도끼로 조각을 내어 불태워 버린 것이다.
항해술만 보더라도 통일신라 후기 장보고(張保皐)가
한 때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 고려나 조선조에서의 우리 항해술은
내해에 국한 되어 있었다.
항해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당시의 첨단과학기술이 망라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조선 조정이나 지방관 누구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조정에서 의사만 있었더라면
하멜 일행을 통해 서구열강의 식민(植民)현황과
국제정세 등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을 주로 강제노역과 잡역에만 동원했던
우를 범했을 정도로 무심했다.
유교와 성리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던 조선은
중화(中華)인 중국에 대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스스로를 종속적 위치에 얽어 매어 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모든 외방(外邦)은 오랑캐이고
중국문명 이외의 모든 문영은 하찮은 오랑캐 문명으로 얕봤다.
심지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까지도 오랑캐로 보았을 정도다.
이런 대외 자세에서 유럽제국의 선진문명과
첨단 과학기술을 알아보고 배우려 했을 리 만무하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셋째, 둘째에서 지적한 내용이지만 조선 조정에는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전담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멜의 시대에도
이미 세계는 좁아져 있었고
각박하리만치 국익추구 우선의 냉정하고 살벌한
제국주의적 국제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대중국(對中國) 사대(事大)에만 매몰되어 있던
우리는 구미선진국들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데에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지구상 문명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뒤쳐졌고
훗날 우리가 일본에 병탄(倂呑)되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은
그 당시 우리 조정 누구도 예견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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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
생활사는 주로 그들 외방인에게 크게 주의를 끈 부분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금했던 부분의 생생한 기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행 중 숙식에 대한 기록과 주석은 이렇다.
‘여행자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여관은 없다.
여행자들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비록 양반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는다.
그러면 집주인은 즉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같이
나그네를 대접한다.
여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나그네들을 맞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군소리도 없다.? -
(미주 : 환대는 가장 신성한 의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식사시간 중에 방문한 사람에게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중대한 수치일 것이다.
여기저기 먼 곳을 걸식하며 다니는 가난한 사람은 채비를 잘 할 필요가 없다.
밤이 되면 그는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호텔 |주막|에 가지 않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는데 어떤 집이든지 행랑채는 방문하는 사람이 묵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그 집에서 그날 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피스, 조선, 1905, 288~289).’
하멜이 조선에 머물렀던 13년이라면 참으로 긴 세월이다.
식습관을 비롯하여 의식주 모두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낯설고
불편했을 터이지만 탈출을 원했던 이유로는
자유에의 갈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주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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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Jan Janse Weltevree)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란이름이 알려지게된 것은 하멜 표류기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무기제조에 능숙한
단순히 남만인-박연,(朴燕,朴淵,朴延,朴仁)으로만 알려져왔다
여기서는 박연으로 통칭한다. 즉 귀화한 조선인으로 알려져왔다. 하멜표류기 내용중 제주도에 있을당시 박연은 통역관으로 내려와 박연의 출신지 타고 있던 선박명,이름이 기록되어있다.
이로서 박연은 네덜란드사람이고
연합동인도회사소속의 홀란디아(hollania)호에 승선하였다가
1627년에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로 옮겨타고
일본을 향하던중 조선에 표착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차츰 박연에 대해서 더많은사실을 확인 할 수 있게되 었다.
드리크 하이스베르츠(drik gijsbertsz)와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jan pieterse verbaest)와 함께
식수를구하려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힌 것이다.
박연의 고향은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드 라이프(de lijp)이다.
라이프시는 1654년 대화재로 공문서들이 함께 타 버려 확인할 수 없지만 네덜란드를 떠날때 그에게는 부인과 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연의 부인은 당시 네덜란드의 관습에 따라
재혼했을 것으로 추정되고,박연역시 조선에서 결혼하여
두자녀가있었고 1648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의 관료로 살아갔다.
하멜표류기와 연합동인도 회사의 기록에의하면
박연의 표착시기는 1627년으로
하멜의 표착의 시기 1653년보다 무려 27년이나 앞선다.
표착지는 제주 호남,경주등으로 알려져있으나
호남은 제주를 포함한 지명이었고
경주는 전해들은 바를 적은기록이고, 제주일 가능성이 높다.
제주의 표착기록은 정재륜의 한거만록(閑居漫錄)과
김석익의 탐라기년(耽라紀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조선에 억류되어 조선인으로 살아간
박연은 이후 동료 두명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동료들은 전사하고 박연만이 살아 남아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의 관리로서 병기개량에 앞장섰다.
박연이 표착할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수습되기전에
이괄의난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흉기하고 있었다.
국호를 후금이라 칭한 여진족은
인조의 항명 배금정책에 대항하여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다시국호를 청이라 칭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게 이르렀다.
박연과같이 조선에 표착한
동료 두명도 이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고 박연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전쟁에 승리한 청은 조선에 군사기술개발과 무기재료의 유출을
엄격히 금 하였다.
따라서 효종은 선왕의 굴욕을 씻기위하여
불벌정책을 국가적 차원으로 추진하는 한편
청의 세력을 견제 하였다.
당시 북벌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총제조와 화포개량이었다.
조총제조와 검술에 뛰어난자를 중앙의 훈련도감과 군기사에 배속 시켰는데 이때 훈련도감에 소속 되어있던 박연은 효종의 정책에 따라 각종화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후 1648년 박연은 과거에 급제하여 정식무관으로 활동하여
1652년 홍이포 제작에 성공하고
1657년에는 수석식총을 모방 제작하는성과를올린다 .
박연은 조선 표착 후
조선의 병기개발과 개량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면서
차츰 조선인으로 변모 해 갔다.
그러나 병기개량에 의한 군사기술의 축적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쇄퇴해갔으며
더욱이 조선과 청나라관계의 개선과
국내적으로는 재정난과 파벌간의 당쟁으로 군비증강에 힘을 쓸 수 없는 여건이조성되지 못하고 이후 꾸준한 병기개발에도 불구하고 전란이후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구식 조총과 화포로 근대 서구세력에 대적하는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모방 제작된 수석식총이 사장 된 점이라 하겠다.
참고로 조총과 수석식총의 차이점은 조총은 한발한발 쏠 때 불을 붙여 발사하는 총이여서 우천시 사용하는데 어렵고 ,
수석식총은 부싯돌이 총에 내장되어 있어
수시즉각 탄환만 넣으면 날씨 가리지 않고 발사되는 총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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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멜 (Hendrick Hamel)
(1)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과 스페르웨르(Sperwer)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네덜란드 호르큼(Gorinchem) 사람으로 1653년 암스테르담을 출발하여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거센 폭풍에 밀려 같은 해
8월 16일 새벽 1시경 제주 차귀진(遮歸鎭) 부근 해안에 난파하였다.
이때 스페르웨르(Sperwer)호는 30문의 함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배에는 향신료, 설탕, 명반, 동물가죽 등 조선 금액으로 30만 냥에 이르는 무역품이 실려 있었다. 선원은 하멜을 포함하여 64명이었으며 이중 28명이 난파로 인해 36명만이 살아 남았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200년간 네덜란드를 떠나 나가사키로 향했던 범선은 총 606척에 달했는데
그 중 난파한 선박은 3.7%에 불과하므로
스페르웨르호가 난파한 사건은 드문 경우였다.
난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의 항해를 감행한 것은
이국적인 여행 체험보다 무역을 통한 고이득에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도착한 땅은 조선의 제주도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과 제주도는 미지의 세계이자
공포의 대륙이었다.
다행히 제주에서는 당시 목사인 이원진의 따뜻한 배려는
귀국에의 희망과 위안이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조사와 통역을 위해서,
조선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이 현지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하멜 일행의 본격적인 조선 억류생활이 시작되었다.
제주에서의 1차 탈출 실패 후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3년간 생활하였다.
서울에서도 2차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657년에는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에는
전라좌수영과 순천, 남원에 분산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였다.
기근과 질병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그들은 3차 탈출을 시도했으며 1664년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조선생활 13년 28일만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하멜은 조선 역류기간 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하멜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아마도 회사의 규정에 따라 6부가 필사되어
네덜란드의 각 사무소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하멜의 보고서와 하멜 일행의 생존은
연합동인도회사에게 새로운 무역지에 대한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네덜란드와 조선의 교역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이 하멜 일행의 귀국 후 조선무역을 기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코리아호(Corea)의 교역시도도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양의 교역대상으로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ꡔ하멜의 보고서를 원전으로 한 ꡔ하멜표류기ꡕ는 조선을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2) 하멜의 고향 호르큼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Gorinkem)시에서 태어났다.
호르큼시에는 하멜이 고향을 떠날 당시의 생가터가 전해지고 있다. 아직도 교회, 시청(현재 호르큼박물관), 풍차, 항구, 거리 등이
17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멜의 집안이 호르큼시에서 살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디크 하멜(Dirck Hamel)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전에는 호르큼시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허즈든(Heusden)에서 살았었다. 1대조인 디크 게리트 하멜(Dirck Gerits Hamel)이 허즈든에 정착한 후 하멜가는 이곳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허즈든의 박물관(Het Gouverneurshuis)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쳐 승리한
하멜선조의 업적을 기념하는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하멜의 가족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일종의 호적등본인 하멜가의 문장에 관한 기록이
호르큼시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아버지(Dirck Hamel)와 어머니(Margreeta Verhaar)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 관한 내용이 있다.
특히 하멜에 관해서는 조선에 표착한 과정과
홀로 생을 마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3) ꡔ하멜표류기ꡕ 육필 원본
ꡔ하멜표류기ꡕ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서적의 원전이 되는
이 육필 원본은 원래 하멜이 소속 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스페르웨르호의 난파 이후
조선 억류기간(13년 28일)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작성된 보고서이다.
이 원본을 저본으로 하여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ꡔ하멜표류기』가 출판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잇따라 암스테르담에서 1종이 추가 출판되었다.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의 조선이란 나라에서
하멜 일행이 경험한 이야기는 유럽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켜 계속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번역판들이 발간되었다.
일년 후인 1670년, 파리에서 미뉘톨리 불역판이 나왔고
1671년에는 독역판이 뉘른베르크 총서에 실렸다.
영역판은 1704년 미뉘톨리의 불역판을
존 처칠이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멜표류기』는 그 후로도 계속 서구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프랑스에서 1715년, 1732년, 1746년에 신판을 찍어냈고
독일에서는 1748년 중간본을 발간했으며,
영국에서는 1705년, 1732년, 1808년, 1884년, 1885년에 각종 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1920년 네덜란드 학자 회팅크(B. Hoetink)는 네덜란드 식민지관계 기록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멜표류기」 육필원고와
「조선에 관한 기술」 원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회팅크는 이것을 그동안 출판된 책들과 대조하여 조사한 후
하멜보고서 원본과 함께 다른 책들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고증하는 내용을 실어 새로운 네덜란드판을 출판하였다.
하멜표류기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7년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에 연재된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고 그대로 『청춘』이란 잡지에 전재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936년 역사학자 이병도박사가 번역하여 『하멜표류기』라는 제목을 붙여 ‘진단학보’에 발표하고
1939년에는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하멜관련 서적은 1971년 김창수의 『하멜표류기』를 비롯해서 약 10여종이 된다.
(-제주국립박물관 기록에서)
_ 또 다른 하멜의 소개기록
핸드릭 하멜은 1630년 호르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Dirck Hamel과 G. Verhaer였으며,
부친은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세 번 결혼했었다.
1650년 11월 6일, 그는 Texel(네덜란드 북부에 있는섬)의 Landdiep에서 Vogel Struijs (타조란 뜻)호에 승선하여 인도로 향했다.
1651년 7월 4일 그는 바타비아 항에 도착했다
Vogel Struijs 호 승선 명부에 하멜은 사격수를 뜻하는 Bosschieter 로 등록되어 있었다. 분명하게도 그와 같이 언급되어 있는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면, 후에 장관인 Wiese도 인도로 가는 항해 명부상에 보통선원을 뜻하는 hooploper 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Wiese는 당시 장관이었던 Van der Parre의 조카였다.
인도에서 하멜은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서기에 이어 보좌관이 되고 1653년에는 장부 계원이 되었다. 장부 계원의 업무는 선박의 항해 유지와 재무 관리는 물론 재정을 맡아 보는 것이었다. 서열상으로는 키잡이와 동등했다.
7월 18일 하멜은 이런 임무를 띄고 대만으로 가는 도중에 Sperwer 호에 승선해 Batavia 를 떠났다.
배는 무사히 아무런 사고없이 1653년 7월 16일 대만에 도착했다. 배는 Batavia 를 다소 늦게 떠났는데, 그것은 대만에 근무할 네덜란드 에서 오기로 해 야 했던 많은 군인들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도착하기로 한 군인들을 헛되이 기다린 후에 Sperwer호는 군인들없이 대만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순항은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바타비아에서 대만으로 가는 항로에서 날씨는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표류기 에는 대만에서 나가사끼로 가는 두번째 항해 때
약간 순탄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에 우리가 결론내린 바로는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겪게되는
일들은 바타비아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perwer호의 실종사실이 공식화 되자 총독인 Joan Maetsuyker는 중국과 일본해 사이에서 그날 이후 발생할지 모르는 폭풍과 관련해 7월 1일 이후로 대만 북부해협으로 배를 보내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하멜과 그의 일행이 대만을 출발해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표류기 에 광범하게 묘사되어 있다.
표류기의 저자가 헨드릭 하멜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것이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바로 장부 계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자신을 제삼자로서 말하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또한 하멜은 표류기에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보고서는 글쓴 사람에 의해 서명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의 거의 모든 기록들은 하멜을 저자로 간주하고 있다.
거기에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그가 언제 표류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데시마에 강제로 머물러 있던 기간동안 일어난 일들로 알 수 있다.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조선에서 운좋게 탈출한 뒤
이미 그들은 1666년 10월 23일 Esperance 호로 바타비아로 떠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가를 받지 못했고
데시마에서 일년을 더 지내야 했다.
2년후인 10월 25일 심문이 있었다. 이 심문은 하멜과 그의 일행이 조선인 어부의 배로 나가사끼에 도착한 날인 1666년 9월 14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심문이 이미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통역관은 포르투칼어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인과 일본인 두 명이었다. 그로 인해 심문은 그 날의 가장 큰 행사였고 하멜과 그의 일행은 그날 저녁, 데시마섬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넜고 상관과 VOC의 직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일본인들의 그 ' precisiteyt ' (꼼꼼함)으로 유명했던 심문과 답변은 일본에서 복사되어
10월 25일 또다시 두명의 통역관의 도움으로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큰소리로 읽혀졌다.
그러던 우연한 기회에 9월 14일, 10월 25일, 하멜은 심문내용을 복사하거나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좀더 명확한 가능성으로는 VOC 통역관이 기록했었을 수도 있다.
1666년 10월 18일짜 상관장의 보고서에는 Volger씨가 정박을 하고 이미 Esperance 호에 승선했을 때 Sperwer 호에서 난파된
이들의 일들이 기록되었어야 한다고 총독에게 썼다.
하멜은 출발전에 보고서 작성의 의무를 띄고 있었던 듯 하다.
하멜이 표류기 를 작성하는 동안 자신의 임의대로 기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수많은 장소와 날짜를 언급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조선에서 일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반면, 그가 일기에 의해 표류기 를 썼을 경우
기입했을 정확한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가 임의대로 기록을 했다면 매우 간결했을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 를 쓰는동안 자신이나 동료들의 기억에 의존했음에 틀림없다.
다음해인 10월 22일 떠나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을 때 하멜은 오랫동안 썼던 표류기 를 끝마쳐야 했을 것이다.
그날 헨드릭 하멜과 그의 일행은 출항준비를 마친 Spreeuw 호에 승선했다. Batavia 로 돌아가는 항해는 Formosa 를 경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섬이 1662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해 Zeelandia 요새는 Ming왕조의 후손들에 의해 정복당했다.
Spreeuw 호는 10월 23일 심해를 택하고 11월 28일 Batavia 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Joan Maetsuyker의 일일 보고서에 따르면,
Journael 이 Joan Maetsuyker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하멜의 일행은 Batavia 에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배를 이용해서
조국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1668년 7월 20일 조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하멜은 인도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네덜란드 에 대한 항수가
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Hague 주 문서국에 있는 그 원고는 면밀히 검토한 바에 의해 하멜이 기록한 원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원문은 Batavia 문서국용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총독에 의해 네덜란드로 보내졌으나, 사본은 소실되었다.
표류기 에서 두드러진 점은 하멜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언제 바타비아로 떠났는지 그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Spreeuw 호가 언제 Batavia 에 도착했는지는 빠져있다.
하멜은 난파선에서 살아남아 구조된 두 번째 생존자들과 함께
1669년 Holland 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배는 다시 수리되지 않았다. 1670년 8월 하멜은
두 번째 생존자들 중 2명과 함께 Heeren 17세 앞에서
조선에 감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받지못한 임금에 대한 지불을 요구한다.
동일한 요구를 첫 번째 생존자들도 했었다.
Heeren 17세 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1670년에도 거절했다.
VOC의 직원들은 VOC의 배에 승선하고 있었을 때나 공장에서
일했을 때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Heeren 17세가 만든 이 규정은 피해갈 수 없는
힘겹고 엄격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들은 Sperwer호에서 살아남은 모든 직원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액수는 그들이 조선에서 13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 받아야할
전체 분량에 미치지 못했다.
VOC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무역회사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 이후 하멜의 생활은 조선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경 호르컴에 보관되어 있는 손으로 쓴 문서에는
하멜이 1670년 호르컴에 정착했다고 씌여있다.
수년후에 하멜이 정확히 언제 인도로 다시 떠났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인도체류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690년이나 그보다 더 일찍 하멜은 호르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692년 2월 12일 "vrijer zijnde " ( 여전히 미혼인 상태 )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2세였다.
추가적인 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들.
한편으로 하멜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정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호르컴 : 헨드릭 하멜의 거리 1930년 7월7일 이후로 Linge 거리에 소재.
호르컴 : 하멜과 그의 동료들이 살았던 강진(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이 세워 짐.
nr 65 구내옆의 Kortedijk에서 태어난 헨드릭 하멜에 대한 경의로 생겨났다.
Heusden(흐스든) : 하멜 공원
1500년경에는 시장출신의 하멜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헨드릭 하멜의 선조였다.
The Hague(헤이그) : 헨드릭 하멜의 거리
Heusden : 헨드릭 하멜 공원
1630-1692년 까지 최초의 서양인 조선 전문가.
Hendrick 과 Hendrik은 같은식으로 사용되었는데, 표류기 원문에는 Hendrick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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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고국에 도착 하기도 전에 출판된 하멜표류기
하멜이 고국에 도착하기전에 하멜 표류기가 출판되었다.
1668년 네덜란드수도 암스테르담의 서점에
이색적인 50여페이지 정도의 책 한권이 진열되었다.
스패로우 호오크호의 불행한 항해일기.
1653년 바타비아를 출항한 이 배는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라는 섬에 표착한다.
탑승원 64명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36명뿐이였으며
이들은 섬의 야만인들들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다시 배를타고 조선국이라고 부르는 꼬레에 도착한 이들은
야만인들의 틈에서 13년28일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하게된다.
그동안 16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죽고 8명만이 1666년에
작은배를타고 탈출에 성공 1668년 조국에 돌아왔으나
8명은 아직 꼬레에 남아있다.
이와 같은 모든이야기는 스패로우 호오크 호의 서기이며
호루쿰출신인 핸드릭 하멜이 직접 집필한 것이다.
이는 출판업자가 많이 팔기 위해 광고문이 아니라
바로 이책의 제목이다.
이 책은 페이지수가 적고 내용도 빈약한것이었지만
바로 3개의 출판사에서 동시에 출판되었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 책이 꼬레라는 나라를 최초로 소개한 책이되겠다.
하멜이 고국에 돌아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경합이붙은 출판업자들은 독자들의 취미에 영합하기 위해 황당한 이야기-조선에 서식하지도 않는 코끼리, 악어이야기등을 추가하기도하고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그 후 이 책들은 불어판으로 영어판으로 독어판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러나 하멜이 쓴 모험담과 조선왕국견문록의 정본은(공문서-공식원고) 1920년에 비로서 햇빛을 보게되었다.
그의 원고 정본이 그동안 헤이그대학교 네덜란드 식민지관계 기록문서 보관창고에 파묻혀 있었기 떼문이다.
이 원본을 찾아낸 사람은 회딩크(B.Hoetink)라는 네덜란드 학자였다.
하멜이 조선국에 대한 이 책을(보고서-급료를 받기위한) 쓴 것은 그가 나까사기에 머무는동안 ,
즉 그가 1666년9월(당시-36세)부터 그곳을 떠난 1667년 10월까지의 (1년1개월)기간동안이었다.
그 곳을 떠나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그의 동료들은 1968년 7월28일 고국에 돌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하멜은 억류기간 동안 급료를 받기위해 머물다 1970년이전에 고국에 돌아온 것 같지 않다.
1692년까지 살다가 고향인 네덜란드 호루쿰에서 숨졌다.
하멜표류기(레드야드 편)-삼중당 문고
출처 링크
<하멜표류기>
1653년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타이완(7/16도착)->(7/30 타이완 출항)->일본
태풍, 암초에 부딪쳐 난파->중국 해안 ->8/2 출항 ->8/15 조선 제주도(케파르트섬) 표류 (64명중 36명살아 남음)
: 선장 레이니어 에흐버츠 죽음 8/18 : 제주도민에게 체포됨 -> 8/22 제주(목관) 도착
10/29 네덜란드인 베테브레(박연) 만남(조사, 통역)
1654년 탈출시도, 5-6월 서울향해 출발
제주->해남->영암->나주->장성->입암산성->태인->금구->전주->여산->은진->연산->공주->경기도->한강->서울(6/26도착)
왕: 효종(통역: 베테브레)->남한산성(청나라 칙사방문시)9월
1655년 3월 청나라 칙사 재방문시 헨드릭얀스와 보스가 칙사 만나는 소동
1656년 3월 서울 출발 -> 영암->전라병영 (33명) 군역및 잡일
1657~62년 전라병영(강진) 생활, 허드렛일
1663년 2월말 여수-12명, 순천-5명, 남원-5명 (22명) 집, 가구, 텃밭
1964년 한달에 2번 점호, 외출 허락
1965년 고생은 여전, 배구하려고 했으나 실패
1966년 배구하려고 온갖 노력, 조선인을 통해 배구함
9/4~9/5 출항(탈출)->9/6 일본 열도의 섬 접근(피란도: 하라도) (8명)
50~60년 전에 그들은 담배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때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담배 재배술과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인들은 그 담배 씨를 남반국에서 가져왔다고 말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남반코'라고 부른다. 이 나라에서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여자들은 물론 네댓 살 되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우린 스님들과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 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p. 49
숙소가 정해진 후 곧바로 국왕(효종) 앞에 끌려갔다.
왕은 (네들란드어에서 조선어로 통역하는)벨테브레(박연)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우리는 왕에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일본으로 보내,
동포도 만나고 다시 네들란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벨테브레(박연)를 통해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왕은 우리더러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보이도록 했다.---p. 37
그 총독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따금씩 그는 우리를 불러 우리말로 이것저것 묻게 했고 뭔가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에게 향연을 베풀어 우리의 시름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 부상자도 치료받도록 조처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p. 24
박연 (벨테브레이, 벨테브레(Weltevree, J. J), 朴淵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나 1626년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Gijsbertz,D.)·피에테르츠(Pieterz,J.)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1628년(인조 6)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동료 2인과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 분투했고 이 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1653년(효종 4) 하멜(Hamel, H.) 일행이 표류해 도착했을 때는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으며 이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병영(兵營)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
큰 키에 노란 머리, 푸른 눈을 지녔으며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견문한 동양 각 국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를 말해 도자(道者)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의 거취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나가사키 총독이 한 질문과 이름을 밝힌 우리들이 대답한 답변 내용
1666년 9월 14일
23. 그들이 어떤 신앙을 믿으며, 우리에게 그것을 포교하려고 든 적이 있었는가?
23. 우리들의 판단으로는 중국인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제도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려 들지 않고 개인의 뜻에 맡긴다.
35. 중국과 조선이 대륙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35. 그들 말에 의하면 두 경계가 커다란 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겨울철에는 추위로, 여름철에는 사나운 맹수들로 말미암아
여행하기 위험하다고 한다. 따라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대부분 수로를 이용하고 겨울철에는 그 수로의 빙판 위를 걸어서 오간다고 한다.
39. 전라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그 곳 위치 및 실정은 어떠한가?
39. 남쪽에 있는 도로서 52개의 고장이 있고, 전국에서 제일 인구 밀도가 높으며 생활 수준이 뛰어나게 높다.
46. 타고 온 배는 어떻게 구했는가?
46. 구걸을 해 모아 둔 자금으로 우리가 직접 매입했다.
47. 그와 같은 배를 전에도 더 가지고 있었는가?
47. 이게 우리의 세 번째 배이긴 하나,
다른 배들은 그것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하기에는
너무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