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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울리는 종소리는 산뜻하지만 손에 든 짐들은 칙칙하고 무겁기만 하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얼굴이 익은 직원이 주문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줄줄이 늘어 선 메뉴를 눈으로 짧게 헤집어 적당한 이름을 대고, 대기 시간이 지나면 부르르 몸을 떨어 댈 역시나 칙칙하게 까만 물건을 들고서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의 오른쪽은 벽 대신 유리로 되어 있어 오전 10시의 맑은 햇살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 바깥에 있는 베란다에도 목재로 된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다. 난간에 옹기종기 매달린 담쟁이덩굴이 이따금 파란 손을 흔든다.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면서 여자는 그 반대편 구석에 있는, 푹신해 보이는 1인용 소파가 놓인 자리로 가 앉는다. 가방에서 펜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려가며 여자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다시 가방을 뒤져 노트북을 꺼내고 테이블 밑에 있는 콘센트에 전원을 연결한다. 불이 들어오는 모니터를 바라보다 몸을 뒤로 기대며 작게 한숨을 쉰다. 고개까지 뒤로 젖혀 천장에 매달린 노란 불빛의 조명을 눈에 담는 순간, 요란한 진동 소리가 테이블 위에 약진을 일으킨다.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커피를 받아온다. 그 사이 컴퓨터는 완벽히 준비된 화면을 펼쳐놓고서 칭찬해주길 바라는 애살스러운 아이처럼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다시 펜을 손에 쥔다. 굳이 뭔가를 쓰지 않더라도, 생각할 것이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펜을 손으로 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자의 버릇이다. 고민과 기다림. 지금은 그 두 가지 상황이 미묘하게 섞여 있다.
펜 끝으로 똑똑 테이블을 두드리던 여자는 천천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여기저기에서 문서들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인터넷도 연결한다. 그저 메모장에 두서없이 늘어서 있는 글도 있고, 한글 문서에 제대로 표로 정리되어 있는 글도 있다. 여자는 그 중 날짜별로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문서를 최대화시켜 교정을 보듯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눈이 피곤해지는지 몇 번 질끈 감았다 뜬다. 깜박이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더니, 결국 어딘가에 있을 인공눈물을 찾기 위해 가방 안으로 시선을 박는다. 잡동사니들로 들어 찬 가방 안을 휘젓고 있을 때, 여자의 맞은편에서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래 기다렸지."
뚝. 여자의 부산한 동작이 일순 정지한다. 가만히 그대로 가방 안에 머리를 밀어넣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커다랗고 투박한 헤드폰. 여자는 테이블 위에 헤드폰을 잠깐 올려놓았다가 볼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다시 헤드폰을 집어 머리 위로 덮어 쓴다. 귓바퀴가 살짝 눌리는 것을 손가락을 집어넣어 편안하게 고쳐놓는다. 그 모든 동작은 맞은편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감싸여 있다. 여자 역시 그것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마주 웃어주는 대신 스크롤바를 움직여 보고 있던 문서를 제일 마지막 페이지로 내린다. 펜을 놓은 손가락이 대신 키보드 위에서 까딱까딱 의미 없는 고갯짓을 반복한다. 노트북과 연결되지 않은 헤드폰 줄 끝이 테이블 밑에서 대롱거린다.
"네가 치는 피아노 듣고 싶다."
여자는 여전히 침묵한다. 문서의 맨 마지막에는 오늘의 날짜와 함께 '피아노' 세 글자가 또박또박 늘어난다. 이 작은 단서 하나하나가 어디로 도달하는 길의 조각이 될 지, 여자는 짐작도 할 수 없다. 흑백의 건반이 수없이 자리를 바꾸듯이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여자는 맞은편에서 전해져오는 눈길이 천천히 흐릿한 기억을 헤집고 있음을 느낀다. 그 느릿한 곱씹음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문득 자신이 너무도 선명하다고 생각한다. 건조한 눈의 껄끄러움과 혀끝에 남은 커피의 쌉쌀함과 손목을 스치는 소매 자락의 가벼움과 굳어서 저려오는 어깨 주변의 뻐근함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녀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다. 여자는 무더운 여름 손가락 끝에 닿는 피아노 건반의 미끈하고 서늘한 느낌을 상상해 본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모조품처럼 어딘가 삭막한 가공의 세계에 놓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하고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피아노 건반의 느낌을 알지 못한다.
"너는 남들만큼 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고 했었지만, 난 남들과 똑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여보다 흘러가는 그의 말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남들과 똑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무형의 활자는 대신 여자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거부하려는 듯 눈썹을 작게 찌푸려보지만, 이미 심장에 새겨진 말들은 어떻게도 메워낼 수 없다. 그렇게 하나씩 늘어가는 것.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쉰다.
"날씨 좋다..."
일요일 아침에 켜는 기지개처럼 느긋하고 편안한 목소리에 이끌려 여자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에게 보이는 날씨는 언제일까. 완연한 봄. 혹은 초여름. 어쩌면 가을. 겨울일까? 겨울을 좋아하나요? 여자는 문서 위에 그렇게 써보기만 하고 지워버린다.
"이런 날씨면 놀이공원에 또 가도 될 것 같아."
"놀이공원?"
여자가 드디어 소리 내어 물음을 던진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힐끗 그녀를 쳐다본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주변에 흥미를 가질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아마 고개를 살짝 기울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대롱거리는 헤드폰 줄 끝도, 1인용 소파에 앉은 그녀의 시선이 노트북 모니터가 아닌 맞은편으로 곧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카페 안에 흐르던 음악이 끝나고 잠깐의 공백 후 다음 곡이 시작된다.
"며칠 전에 갔었잖아. 그새 까먹었어, 송아현?"
그의 말끝에 웃음기가 배어 있다. 그의 며칠 전은 또 언제일까. 여자는 일단 문서에 '놀이공원', '며칠 전'을 입력한다. 그가 말한 마지막 단어는 이미 기록해 두었으므로 내버려둔다. 그것은 가시처럼 여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미묘한 각도로 박혀 있다. 가시는 견디지 못할 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항상 인식하게 만드는 미세한 통증을 만들어 낸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어 가시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 '며칠 전'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며칠이었지, 그게?"
"글쎄, 금요일이었으니까... 며칠이지?"
그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그의 모든 기색이 옅어진다. 회상이 막히면 그는 희미해지다, 결국엔 사라져버리고 만다. 여자가 초조해지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다. 다음 순간 그의 대답이 들린다. 여자는 안도한다.
"아, 그 전날이 1분기 보고서 마감일이었으니까, 23일이었겠네. 이제 기억나?"
너 회사 앞까지 왔다가 나 못 만나고 그냥 갔었잖아, 그 땐 진짜 미안했어. 그의 말을 여전히 동그란 귓바퀴에 담아가며 여자는 앞서 입력한 '며칠 전'을 지우고 '3월 23일(금)'을 입력한다. 여자는 잠깐 생각한다.
"C월드였나, 거기가?"
"어, 거기. 동물원 없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괜찮지?"
"응."
여자가 알고 있는 놀이공원의 개수는 제한적이었다. 다행히 여자는 단번에 정답을 맞추었다. 그녀는 맥없이 웃으며 다음으로 걸어갈 길을 고른다. 사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아니, 그 도착지는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매우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과도 연결되어 있다. 다만 그 곳까지 가는 길의 입구를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 그러나 지금, 무성한 나뭇가지와 잡초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길이 드디어 희미한 흔적을 드러내었다. 여자는 문서를 내려놓고 인터넷 창을 최대화시킨다. '3월 23일'과 'C월드'만으로 여기저기를 헤집으면서, 여자는 그 날을 다시 걷는 그를 따라간다.
부드럽고 차분한 그의 언어로 그날의 하루가 재현된다. 놀이공원 입구에서 울고 있던 꼬마 아이, 초봄답지 않은 따가운 햇살, 활짝 핀 꽃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지나가던 퍼레이드 행렬, 다리가 아프다는 투정, 달래기 위해서 산 구슬 아이스크림, 그는 질색했지만 결국엔 타고 만 롤러코스터와 바이킹, 놀이기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나누었던 이야기들, 찾아오는 저녁 해, 가득 핀 장미, 하루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 그리고 그 다음.
꿈꾸듯 이어지던 그의 말이 멈칫한다.
"마지막으로 탄 게 뭐였지? 기억이 잘 안 나네."
대관람차.
여자는 그보다 먼저 답을 말해주는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목구멍에 걸리는 정답을 삼킨다. 마침내 마지막이 왔다.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이어지던, 때때로 작고 소박한 풀꽃이 피어 있던 아름다운 길 끝에 녹슨 철문이 서 있다. 여자가 손을 대자 세월에 부식된 자물쇠가 부서져 내린다.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린다. 손을 뻗어 도로 닫아버리고 싶지만 여자는 꼼짝도 할 수 없다. 거기까지 걸어온 것은 그녀 자신인 것이다.
노트북 화면 속에 나열된 팍팍하고 굳은 기사글로 그 날의 마지막이 재현된다. 해질녘의 하늘 아래,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거대한 몸집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대관람차. 하늘색 칸에 올라타는 연인. 놀이공원 직원의 오래된 사진 같은 미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연인의 웃음소리.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철컥,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들은 점점 지상에서 멀어진다. 천천히 흔들의자처럼 기분 좋게 기우뚱거리던 대관람차의 어느 한 칸에서 그 무언가가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한다. 수레바퀴는 이 빠진 톱니바퀴가 되어 그 결정적 결함에 도달할 때까지의 맞물림을 계속한다. 그리고 바이킹이 하늘로 솟구치고 울고 있던 아이가 엄마를 찾고 광장 한가운데의 시계탑에서 인형들이 북을 치고 장미정원에 폐장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회전목마에 조명이 켜지고 누군가가 손에 들고 있던 풍선을 놓치던 그 순간.
노트북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그 위에 얹힌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헤드폰의 줄 끝이 테이블 밑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잠시 기다려 보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깊은 숨을 내쉰 뒤, 여자는 조용히 노트북과 헤드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타박타박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와 문고리를 집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여자를 부른다. 뒤를 돌아본다.
"손님, 저... 지금 바쁘신가요?"
여자는 살짝 고개를 젓는다. 아까 주문을 받았던 눈에 익은 얼굴의 어린 여자 직원이 망설이는 얼굴을 하고 카운터에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직원이 조금 머뭇거리듯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 자주 오시는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면 포인트 적립 카드라도 만들어 드릴까 해서.."
"아..."
이 곳에 매일같이 들르게 된 것도 벌써 두 달 째다. 여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직원은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웃는다. 익숙한 몸짓으로 신원조회를 하는 직원에게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댄다.
"이유정이요."
"이유정 님이시죠, 여기 적립 카드 만들어 드렸습니다."
여자가 작은 카드를 받아들고서 고마워요, 라고 중얼거리듯 말한다. 직원이 주위를 살짝 둘러보고는 여기 비싸잖아요, 하고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싱긋 웃어 보인다. 그 꾸밈없고 귀여운 미소를 보며 여자는 생각한다.
송아현.
아마. 가시가 살짝 몸을 비튼다. 아마 그녀도 이런 사람이었겠지. 직원에게서 몸을 돌리기 직전 여자는 그녀의 명함을 힐끗 훔쳐본다. 물론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송아현'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이 그 이름을 의식한다는 사실 자체로 서글퍼진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다시 바라본다. 색색깔의 동그라미가 매달린 커다란 바퀴가 그려져 있다. 대관람차. 여자는 천천히 카드를 눈 위로 들어올려 본다. 살짝 흔들어보기도 한다. 동그라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자리에 단단히 붙어 있다. 그날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차라리 풍선이라면 날아갈 수 있었을 텐데.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드를 다시 손에 쥔다.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자 카드 모서리가 손바닥을 아프게 찔러 온다. 그는 아직 그의 연인과 저녁 해를 보고 있다. 여자는 한숨을 쉰다.
나는 언제쯤 그를 태워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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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와서 이상한 걸 두고 가네요;;
지인들이 뭔 소린지 모르겠다고 했던 이상한 물건입니다. 전 왜 맨날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할까요ㅠ
여자는 퇴마사 같은 존재이고 남자는 유령이었다는 구차한 부연설명을 덧붙이고 갑니다..ㅠ
첫댓글 오오, 그런 설정 이었군요. 재밌어요! 다음에도 한 편 올려 주세요~
으허, 부연설명이 없었다면 저도 고고님의 지인들과 같은 입장이 될 뻔했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건필!
예쁜 이야기...
설정이 그런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