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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
사람이 사랑이라면
그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가 함께 죽을 때까지는
상처입고
상처 속에 들어가
상처되지
푸르고 붉은
아픈 저 별빛
(기자가 찾아가 본 선생의 생가터)
언양에 남은 ‘눈솔 정인섭’ 풍모는 ‘영국신사’ |
작천정에 부친 詩 자필로 쓴 편액 남아 英 여왕 즉위식 혼자 초청된 일화 유명 생가는 누이가 살다가 언양성당에 기부 |
울주군 언양읍 어음 상리 380번지 일원. 눈솔 정인섭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큰 기와집이었던 가옥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철지난 채소가 자라는 작은 규모의 밭으로
변해 있다. 기와집 뒤란 무너진 토담의 흔적과 고사 직전의 감나무만 남았다. 그나마 생가
터에 이르는 길은 지워지고 2층 양옥집의 텃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터의 새 주인은 자신의 집이 눈솔의 생가 터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눈솔의 생가 마
당은 넓었고 지금은 4가구의 새 주인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을의 터줏대감 최 학(75)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눈솔의 생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생가 사랑채는 큰 기와집이었고 마당이 넓어 대문에 들어서서도 사랑채에 이르는
거리가 상당했습니다. 휴가 때 고향집으로 내려와 마당을 거닐거나 마을에 나들이를 하던
그 분의 모습은 영국신사 같았습니다.”
최씨는 눈솔 정인섭의 생가 바로 옆집에 살았고 지금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띠었으며 마을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
정했습니다.”
생가에는 눈솔의 누이 정복선 안나 수녀가 두 수녀와 함께 살았다. 정안나 수녀가 선종하
자 생가는 퇴락해 사라졌고 터만 언양성당에 기부돼 부산교구 재산으로 편입됐다.
눈솔 정인섭 집안의 또 다른 재산이었던 언양읍 남부리 282-2번지에는 정안나 수녀가
1968년 유치원을 세웠다. 이 자리는 어물전이 있던 자리로 언양장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이밖에도 눈솔의 흔적은 작천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천정의 처마에 진열된 참락시선
(1902년 여름에 최시명 군수가 헌양시사(獻陽詩社)를 정비하면서 정각을 세우고 시회를
열어 참가한 언양 유림들의 시를 모아 전시한 것으로 알려짐)에 눈솔이 부친 정택하의 칠
언율시를 친필로 쓴 액자가 걸려있다. 정택하는 언양의 유림이었으며 한학자로 알려져 있
다.
그리고 언양읍성이 사적지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의 즉위식 때 이승만 대통령은 초청이 되지 않았지만 정인섭 선생은 초청돼 한동안 언양
에 큰 화제가 됐다.
눈솔의 자손은 2남 3녀가 있었지만 작고하거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현재 장남 정해룡
(삼공사 회장)만 한국에 살고 있다.
( 2009년 11월 19일 (목) 울산제일일보의 정인섭 선생 관련 기사)
눈솔 정인섭을 아십니까?
1943년 함흥형무소. 울산출신의 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과 눈솔 정인섭 선생은 타관의 감옥에서 조우하는 기이한 인연을 만든다.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됐던 것이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과 글과 얼을 잇기 위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 했고 여기에 가담한 학자들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가졌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해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 고장의 학자 두 분이 포함됐다.
외솔은 이미 우리 울산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추앙받은 지 오래다. 생가도 복원됐고 추모사업도 벌인다. 그 분이 민족을 위해 쏟은 충정을 기리는 우리의 노력은 아직 미흡하지만 시민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눈솔을 기억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 두 분의 공적에 대해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불경스러운 일이다. 두 분이 우리 민족문화에 끼친 공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눈솔 정인섭 선생은 시민 대다수가 그 분의 행적과 공적, 심지어는 울산 출신이라는 사실까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후학들의 무관심이 빚은 결례였다.
눈솔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영문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가 없었다. 영문학계와 국문학계는 눈솔의 학문적 성과를 따로 정리하고 있었다. 국문학계에서도 현대문학과 설화문학에 미친 영향이 겉돌고 있었다. 하지만 영문학계에서도, 국문학계에서도 각개 분야에 남긴 학문적 성과가 대단하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 학계가 통섭적 시각을 갖지 못한 잘못으로 생긴 일이다.
눈솔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설화 99가지를 골라 영어로 번역하고 서양에 처음 소개한 분이다.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할 무렵에는 탁월한 어학실력으로 우리의 설화를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의 ‘다다미야화(たたみ夜話)’에 비견되는 ‘온돌야화(溫突夜話)’라는 용어를 만들고 우리의 설화를 소개했다. 봉놋방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모두 올돌방에서 얻은 수확이다. 온돌이 상징하는 바가 한국 문화의 핵심이라면 일본에서 소개한 책에 붙인 제목은 그야말로 절묘하다. 우리의 설화를 외국에 소개했다는 공로도 커지만 그때까지 구술로만 전해지던 설화를 채록하고 정리했다는 점은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설화문학이 우리 학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은 때가 조동일 선생이 국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킨 1980년대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눈솔은 대단한 선각자다. 그 분이 남긴 설화의 자료는 우리 구비문학 연구에 비옥한 거름이 됐다.
그 분의 큰 자제인 정해룡 회장을 만났다. 부산 녹산공단에서 (주)삼공사라는 조선기자재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 달에 1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고 하니 아주 큰 회사다. 눈솔 선생이 1950년 런던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될 때 함께 건너가 뉴캐슬의 킹스칼리지에서 조선공학을 공부했다. 조선업의 선진국인 덴마크에서 4년동안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서울공대에서 강의했던 경력도 있다. 정회장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모든 선박 부품이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국산화에 대한 의지를 담아 회사를 설립했다. 내년 1월이면 창사 40주년을 맞는다.
정회장도 이미 75세의 원로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옛이야기를 듣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정회장의 아들에게 또 손자에게 이어졌다. 우리는 정회장이 선친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때 서둘러서 눈솔의 역사를 가지런히 정리해야 한다.
언양읍 어음상리 미로 같은 골목의 한 귀퉁이에 외롭게 버려진 선생의 생가 터는 멀지 않아 누군가의 새로운 거처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60년대 언양장의 중심이었던 어물전에 눈솔 선생의 누이동생 정복선 안나 수녀님이 세운 안나유치원도, 작천정 처마에 걸린 선생의 친필도 모두 소중한 유산이다. 정회장의 집무실 서재에 소중하게 간직된 선친의 서책들도 기념관에 가야할 것들이다.
그리고 선생이 우리에게 문자로나마 남겨준 이야기를 우리 후손들에게 더욱 풍부한 자산으로 만들어 물려줘야 한다. 우리에게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확대 재생산 기법이 생겼다. 눈솔 선생이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큰 선물이다.
첫댓글 국민(초등)학교 다닐적 작천정 호박수를 배경으로 백일장을 매년 개최하기도 했죠.
정인섭 박사님께 직접 받은 상장과 시집~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정복순(안나)님은 수녀가 아니라 동정녀입니다 참고하세요 그리고 그때당시 정복순(안나)는 경기고녀를 나온 여성으로서 언양에서는 최고의 여성지식인 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19일 (목) 울산제일일보 기사에 눈솔 선생의 누이동생 정복선 안나 수녀님이 세운 안나유치원도... 라는 기사에 나와있습니다
수녀가 아니라 동정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