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마왕은 마물들의 봉인을 풀어 영한암이나 세지의 마법 같
은 것을 쓰지 않고도 볼 수 있게 했다. 그와 함께 영한암은 사라졌
고 마물과 인간들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26일 저녁 6시경 국력이 약한 몇몇 나라가 정복되었다.
26일 밤 11시경 한국의 서울이 정복됐고 마왕이 서울을 본거지로
삼았다.
27일 새벽 1시경 아시아 반 이상의 나라가 초토화됐고 2시경에 아
시아 전체가 정복당했다. 3시경에는 아메리카와 유럽이 정복당했고
4시에는 전 세계가 정복당하였다.
세상은 마왕이 부활한 26일 아침 9시부터 27일 새벽 4시까지 약
19시간만에 마왕의 손에 들어갔다. 인간들은 전 병력을 쏟아 부어
마물들을 막으려 했지만 마물들의 힘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2004년 8월 23일.. 인간들은 마물들의 '노예'로 힘든 나날을 지내고
있다. 서울의 남산은 나무한 그루 남아있지 않았고 남산타워 대신
마왕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은 마왕의 본거지답게 마왕성을 중
심으로 2년 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이상한 재질로 만들어진 건
물들이 63빌딩보다도 높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왕의 살로
만들어진 것으로 살아있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왕성의 최하층
에는 마왕의 피로 만든 '머리 좋은' 마물이 각종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편, 인천의 바다 속의 한 곳에는 수중도시 '샤오 제 13기지'가
마물들의 눈을 피해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전 세계가 반격했지만 막지 못한 자들입니
다! 지금 인천에만 해도 20만의 마물들이 있는데..!"
"우린 5만의 군대가 있고 한달 후에 다른 기지로부터 10만의 군대
가 올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마물들 절반 이상이 별 힘없는 하
급 마물이고.. 지금이 가장 마땅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로부터 곧 마물들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왕 스케벨리는
자신의 피와 기력으로 엄청난 군대를 만들 수 있다고요!"
'샤오 제 13기지'의 중앙 사령탑 5층에서 30~50대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언쟁을 하고 있었다.
".... 시끄럽군요."
"맞아요. 시끄러웠어요."
약 30여분동안 원형의 큰 탁자에서 10여명이 말싸움을 하던 것을
지켜보던 세현과 세지의 감상 평이었다. 2년 전 같았으면 '무슨 참
견이야!'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한세현군..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싸움을 해야 하는가?
결정을 내려주게."
이 말 또한 지금 21세인 세현에게 할만한 부탁은 아니었다. 하지
만 상황이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절반이라고 해도 그 수는 10만이에요. 상급 마물이 몇 놈
이나 되는지 모르는 판에 저 혼자서도 상급 마물 한 마리 처리하기
힘든데.. 15만의 군대로 친다는 것은 너무너무 무모한 일이네요."
세현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보내려고 했던 사
람은 불만이 있는 듯 싶었지만..
세현, 세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샤오 특수인물'로 분류되
는데 그런 인물이 전 세계에 약 4000여명 있다. 세현은 '마법사'라
는 50명도 안 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최고실력자였다. 헬렌은 미국
의 '샤오 제 27기지'에 몸담고 있었다. '암살자'로..
'샤오 기지'는 마왕에 손아귀에 들어간 지구를 구하기 위한 해저
비밀기지였다. 전 세계에 200개정도 있는 '샤오 기지'는 샤오 켈렌
티라는 프랑스인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샤오는 마법사이다.
"오늘의 별 도움 안 되는 '형식적인'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
다아아."
지루한 듯이 기지개를 펴며 회의를 끝마치는 말을 한 세지는 머리
가 하얀, 60대는 되어 보이는 사람을 불렀다.
"아아.. 세지양. 한달 전에 부탁한 자료다. 푸훗! 내가 판타지 소설
들을 읽고 게임들도 보면서 마물들의 이름을 지었지.. 정말 재미있
더군. 하하하하!"
"네에. 고마워요, 아저씨."
세지는 방긋 웃으며 그 사람에서 CD 한 장을 받았다. 세지는 세현
을 불러 11층의 컴퓨터실에 들어가 CD를 집어넣었다. CD 안에는
마물들의 사진과 마물의 이름, 그리고 마물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영감. 조금 미쳤지만 그 천재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설명도
자세하고.. 아주 좋아."
"인쇄할까?"
"책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녀야겠어. 인쇄해."
그 때, '샤오 제 27기지'는 마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북아메리
카를 지휘하던 최상급 마물이 바다 위를 지나가다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30만의 마물들을 투입시킨 것이었다. 약간의 생성능력을 부
여받은 최상급 마물은 기존의 마물들에게 물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주고 공격하게 하였다.
'샤오 제 27기지'는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곧 20
명의 '샤오 특수인물'들과 군대가 반격에 나섰지만 상황은 '샤오 제
27기지'의 패배 쪽으로 기운 상태.
".... 땅의 기운을 잠시 빌려 저 추악한 마물들을 잡고자 하오니. 어
스 퀘이크!!"
헬렌의 외침으로 수중도시의 마른 땅이 흔들리며 위로 솟아올랐고
그곳에 있던 마물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이 박살났다.
"헬렌! 어서 피해요!"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아 사람들이 죽는다면 나에게 커다란 죄
책감으로 남을 겁니다."
"그 죄책감도 살아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 해 나
갈 일들을 위해 우린 살아야 하오!"
헬렌은 자신의 마법과 크로우, 단검으로 마물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들은 큰 입구를 통해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젠장.."
헬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슈베린의 뜻에 따라
비상탈출구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으로 '샤오 제 121기지'로
가게 되어있는 비상탈출구가 봉인되어 있었다. 모두 다 탈출했으리
라 생각하고 마물들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막은 것이었다.
"제길!!"
검을 쓰는 슈베린은 검을. 헬렌은 크로우와 단검을 들고 뒤돌아 서
서 다가오는 마물들을 보았다.
(12) 여행의 시작-2
밤 10시.. '샤오 제 13기지'의 어느 한 탑은 '샤오 특수인물'들을 위
한 숙소이다. 총 5층으로 되어있는 탑은 1층에 4명의 특수인물들이
머물고 있다. 4층에는 세현과 세지, 그리고 검을 쓰는 2명의 사내가
있는데, 세현과 세지는 벽 하나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밤이 되면
둘은 베란다로 나와 대화를 하곤 했다.
"27기지가 당했데. 헬렌이 있는 곳인데.. 헬렌은 괜찮을까?"
"헬렌은 약하지 않아. 121기지로 가는 비상탈출구가 있으니까, 분
명 그곳으로 탈출했을 거야."
"세현아, 난 말야.. 2년 전에 마왕이 부활했을 때에 그 부활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때 조금 더 힘이 있었더
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 어쨌든 우린 최선을 다했잖아? 그거면 된 거야. 힘이 있다면
언제나 그에 따른 책임이 있기 마련인 거야. 우린 그 때에 그 책
임을 짊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힘이 주어지지 않은 거야. 편하게
생각해."
세현은 말없이 바다와 수중도시의 경계면을 바라보다가 잠깐 세지
를 보았다. 성인이 된 세지는 키가 세현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고
몸은 완벽한 굴곡을 이루었다. 때문에 수중도시의 남자들에게 여러
번 프로포즈를 받기도 했었다. 물론 다 거절했지만 말이다.
1년 전에는 인물 좋고 성격 좋고 배경 좋은 어떤 검을 쓰는 사람
이 2달 동안 세지에게 작업하다가 프로포즈를 하기도 했다. 세지는
이틀동안 고민하다가 거절을 했었다. 세현은 그 남자가 왠지 싫어
져서 만나기만 하면 차갑게 대하였다. 그 남자는 아직도 세지에게
작업중이다.
아무튼 세현은 약간 큰 잠옷을 입은 세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얼굴엔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이상해.."
"어? 뭐, 뭐가?"
세지는 바깥 배경을 보다가 세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
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뭘 그렇게 놀래.. 백구(白球)말이야. 화이트 볼."
"화이트 볼?"
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세지가 눈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마왕은 분명 백개를 모으던 천개를 모으던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
런데 우린 그걸 만개나 모았단 말이야. 마왕 말대로 그걸 천만개나
일억개를 모아도 소용없을지 몰라. 하지만 그로 인한 마나의 파동
은 있어야 할거 아냐?"
"그런데?"
세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어제 '샤오 제 1기지'에 가서 확인해보니까 보통 물건이 가지고
있는 정도도 없었어. 만개나 모여 있는데."
"흐음.. 그거 확실히 이상하네.."
"세현아, 우리 내일 121기지에 가보지 않을래? 헬렌도 걱정되고..
또 노르웨이의 상황도 볼 겸.."
세지는 노르웨이에 마물들이 모인다는 사실에 왠지 안 좋은 예감
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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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울의 마왕성 최상층에는 마왕이 언제나 앉아있다. 마법으
로 만든 검은 구가 그가 보고싶어하는 모든 것을 비추었고 그것은
결계로 막은 곳이 아니고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그녀'를 생포하였습니다."
"오, 드디어 잡히셨나. 큭큭큭.. 이곳으로 데리고 오너라."
"그 말에 따르겠습니다."
IQ가 180이 넘는 마물이 거대한 철문을 열고 나간 1분 뒤에 창을
든 두 마리의 마물이 '그녀'와 함께 들어왔다. 그녀는 은빛 머리카
락을 가지고 있었고 차가운 검은 눈동자와 길고 뾰족한 귀, 진한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헬렌이었다.
"헬렌, 왜 나와 손을 잡지 않는 거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난 너
에게 이 세계의 절반을 너에게 줄 수 있어."
"그따위 것, 필요 없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너의 죽음뿐."
"아름다운 헬렌.. 너무 매정한 게 아닌가? 그런데 추악한 다크엘프
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헬렌이 잠깐 움찔거렸지만 그건 착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잠깐이
었다.
"내가 좋아하는 종족은 다크엘프지 마족이 아냐. 네가 이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난 마족에 대해 더욱 적대적일 수밖에 없어. 어서 이
세계를 놓아줘."
"그런 너도 마족이 아닌가? 거부하려 하지 마. 아무리 거부해도
넌 마족이야. 나와 같은."
마족이길 거부하는 마족. 마족을 증오하는 마족. 그게 바로 헬렌이
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연은 있으리라.
"전처럼 너와 내가 막상막하(莫上莫下)로 겨루리라고는 생각하지
마. 이 세계는 마계보다 시간이 느리기 때문에- 2년 전 싸움으로
알았겠지만 난 강하다."
헬렌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고 스케벨리는 말을 계속 이었다.
"뭐, 이 세계는 나 혼자서도 다스릴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편해지
기 위해서는 너와같이 아름다운 마족을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진 않
지.. 허튼 생각은 하지 마. 난 언제라도 널 죽일 수 있지만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널 죽이긴 싫으니까."
(13) 여행의 시작-3
마왕성 지하의 최하층에는 고문실이 있다. 그곳에는 항상 피비린
내와 살 타는 냄새가 풍기고 고통에 찬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오늘도 그곳은 고문을 받고있는 인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치지지직-
"으아악! 크.. 끄윽-"
그 비명소리 안에는 슈베린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다. 불에 달군
쇠방망이를 슈베린의 벌겋게 달아오른 등에 지지는 마물은 기분 좋
은 듯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감정이 있고 지능이 있는
마물을 만든 스케벨리가 참으로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어서 말하라. 네가 속한 단체의 이름을."
"크윽.. 내가 말하면.. 너흰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데?"
"너에게 우리들의 아버지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주지. 너희
들이 좋아한다는 돈도 주고, 이 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도 함께. 만약 네가 허튼짓을 한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을 것
이다."
"그래..?"
슈베린은 힘겹게 들어올린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그의 머
릿속에서는 어지러운 생각들이 난무했다.
"샤오.. 샤오기지라고 한다. 전 세계에 203개가 있고 핵심은 제 1기
지와 32기지, 121기지이다. 잠깐 오른쪽 팔을 풀어줄래?"
"흐음.."
마물이 약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의 오른쪽 손목에 걸려있던 수
갑을 풀어줬고 슈베린은 그 손을 바지 뒷주머니로 향했고 곧 작게
접은 종이를 꺼내었다.
"이것이 전 세계 샤오 기지의 위치를 적은 지도이다."
그것은 슈베린이 다른 기지로 이동할 때에 그 기지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슬쩍'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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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에서 북쪽으로 3km정도 떨어진 지역에는 마물들끼리 사회
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 있다. 그곳으로부터 서쪽으로 1km정
도 가면 인간시장이 있다. 인간을 사고 파는 곳이다. 거래는 '마나'
로 이루어진다. 마나를 상대방에게 부여하는- 마물들의 마나는 동
물이나 인간들에게서 당연히 느껴지는 양보다도 적다. 그 마나를
상대방에게 부여하기 때문에 부여하는 자는 약해지고 부여받는 자
는 강해진다.
인간시장에서 북쪽으로 1km정도 가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인간
촌'이 있다. 그곳의 인간들은 거의 팔이나 다리 같은 것이 없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장애인이다.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마물들
이 인간들을 버린 곳이다. 때때로 '인간 쓰레기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곳을 헬렌이 걸어가고 있었다.
"가여운 인간들.. 한 마족의 장난에 놀아나다니."
헬렌이 작은 입술을 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그녀를 보
고 슬슬 자리를 피하는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듯이 굵은 음성이 헬렌의 머릿속에서 들려
왔다.
'큭큭큭.. 뭐가 어째서?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강자의 밑에서 무릎을 꿇고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살아야 그나마 편
한 삶을 살 수 있어. 여기에 있는 인간들은 그렇게 할 수 없거나
그러기를 거부한 인간들이지. 쓸데없는 자존심만 가지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인간들이야.'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스케벨리의 것이었다. 헬렌은
살기를 뿜으며 어딘가에서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린 스케벨리
에게 말했다.
"언제부터 따라온 거냐."
"네가 내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스케벨리는 히죽히죽 웃으며 허공에 모습을 들어냈다. 인간들은
그 모습에 놀라 그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다. 그는 한쪽 손을 들어
도망가는 인간들 중에 한 명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끌어당겼다. 그
인간은 자신이 공중에 들려 스케벨리를 향해 가자 바둥거리며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큭큭큭.. 이 인간을 봐. 두 다리가 없잖아? 그래서 마물들에게 무
릎을 꿇을 수 없었던 거야."
"사, 살려주.. 크악!"
스케벨리는 자기 앞까지 날아온 그의 가슴에 빠르게 손을 뻗었고
그 손은 그의 가슴을 뚫고 등으로 튀어나왔다. 스케벨리가 냉소를
피우며 말했다.
"그런 자에게는 죽음밖에 내려지지 않아."
다른 인간들은 그 모습에 질겁하여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려움
에 몸을 떨었다.
"그만해! 너와 인간은 똑같은 생명체일 뿐이야. 네가 그 인간들 위
에 설 권리는 없어!"
스케벨리는 그렇게 소리지르는 헬렌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헬
렌은 그런 그를 보고 '이.. 망할 천하의 악질!!'이라고 외쳤다. 하지
만 아무리 화가 나도 자기보다 강한 스케벨리를 공격할 수는 없었
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기에-
헬렌과 함께 마왕성으로 텔레포트한 스케벨리는 헬렌을 미리 마련
한 침실에 보내주고 자신의 방으로 가서 검은 구를 가만히 쳐다보
았다. 그 검은 구는 하얀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헬렌을 비
추었다. 스케벨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분 좋다는 듯이 웃고 있
었다.
(14) 여행의 시작-4
8월 24일.. 아침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세
현은 기지개를 펴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
갔다. 20분 후, 세현은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수건을 앞의 탁자에 던진 세현은 탁자 위에 있는 노트북
의 키보드로 손을 옮겼다.
햄버거 2개와 우유 1.5L
그렇게 주문을 한 세현은 옷을 한곳에 모아놓은 방으로 가서 옷을
찾아 갈아입었다.
특수인물의 숙소는 한 사람에 80평의- 한 명이 살기엔 너무 큰 곳
이었다. 특수인물들은 노트북으로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했는
데, 세현은 옷과 음식, 와인 외에는 별다른 주문은 없었다. 가끔 책
들도 주문하곤 하지만.
각각 특수인물마다 수집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샤오 제 13기지'
의 대표적 인물로는 3명이 있다.
1층에 살고있는 한 에스퍼계열의 초능력자는 온갖 종류의 숟가락
을 수집하고 있었다. 12살의 소년인데 금숟가락, 은숟가락, 유리숟
가락 등등.. 그런 숟가락을 초능력으로 휘어서 모으곤 했다. 작품이
라면서..
세지는 총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 가면, 입구부터 살벌하게
생긴 총들이 손님을 반긴다.
세현은 앞에서 말한 와인을 모은다. 그는 자신의 숙소를 개조하여
80평 중에 20평을 한 칸으로 만들어 그곳에 와인을 모았다. 세현
은 와인 전문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와인에 대해 해박한 지
식을 가지고 있다.
5분 뒤에 온 아침식사를 먹은 세현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머리모
양을 다듬은 뒤에 자신의 숙소에서 나와 옆방인 세지의 숙소 문 앞
에 서서 세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자 청바지와 파란 티셔츠로 간편한 복장을 한 세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헤에..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내가 일찍 나온건데."
"그럼 빨리 가자!"
세지는 방실방실 웃으며 세현의 손목을 잡고 도시 가장자리에 있
는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가기 시작했다.
탑을 내려와 길거리를 지나가던 둘은 벌써부터 사람들의 눈에 띄
기 시작했다.
"어머! 백화유(百火有) 세현님이네! 꺄~ 세현님! 손 한번 잡아주세
요!"
세현을 처음 발견한 여자가 소리치며 달려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열 명이 넘는 여자들이 세현에게 달려갔다. 세지는 그녀들의 몸에
떠밀려 소외되고 말았다. 백화유란, 마법을 쓸 때에 주로 불을 다루
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는데 백가지 불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소외된 세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시여.. 어찌 저 여자들은 당신의 미모를 못 알아
보는 것입니까? 당신이 갈 축복 받은 길을 모시는 영광을 제게 주
시겠습니까?"
"미, 민준 씨?"
아마 전에 언급한 적이 있을 것이다. 2개월 동안 작업했다가 차였
다는 검을 쓰는..
"아, 당신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가 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함이었다니.. 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죽여줄까?"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의 살기가 담긴 목소리가 세현의 입에서 나
왔다. 세현은 어느새 그 많은 여자들을 달래서 보낸 후였다.
"레이디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참으로 무례하군."
민준은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뒤로 묶은 긴 금발이 매력적인 남자
였다. 아마 세지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했다면 그 여자는
대부분 넘어갔을 것이다. 양다리, 또는 문어발을 걸치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었던 세지였기에 민준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여기고
거절했던 거였다. 세현도 그가 바람둥이의 성격을 타고났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흥. 네 입에서 나오는 느끼한 말보다는 낫다!"
"오늘은 이상하게 세게 나오네?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본데."
"네놈을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꽉 차 있거
든!"
"그래? 그럼 왜 죽이지 않고 입만 놀리고 있는 거지?"
이대로 가면 상황이 뻔했다. 둘은 말싸움을 하다가 결투를 신청하
고 결투장까지 가서 결투를 하다가 둘 중 누가 다쳐서 병원신세를
질 것이다. 그만큼 민준은 검술이 뛰어났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121기지로 가게 되는 것은 미뤄질 것이고
그럼 그동안 이곳에서 '형식적인' 회의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라
는 생각이 세지의 머리를 스쳤고 곧 그 생각은 둘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세현아, 빨리 갈 길을 가야지! 민준씨, 민준씨도 날 위해서 세현
이와 싸움을 그만두세요."
"그래, 얼른 가야지. 저 버터와는 되도록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으
니까."
"말을 해도.. 아, 세지씨. 당신의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지 못 따르
겠습니까?"
그렇게 둘의 싸움은 끝났고 세현과 세지는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진 앞에서 세현은 세지에게 '나중에 만
날 때에 그놈보고 죽으라고 해봐.'라고 했고 세지는 '한번 생각해
보지 뭐.'라고 한 뒤에 둘은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121기지
로 순간이동 되었다.
(14) 여행의 시작-5
'샤오 제 121기지'로 이동한 세현과 세지는 이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121기지의 상황은 '상황종료'였기 때문이다. 진한
혈향(血香)이 코를 자극했고 사방에서는 마물들이 둘러싸고 있었
다..
"이, 이럴 수가.."
마물들이 공격했다면 다른 기지로 금방 연락이 되어 그 사실을 세
현이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121기지는 마물들이 사방에 있으
므로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 ** *****!!'
세현이 머릿속에서 마법언어를 외우자, 세현과 세지를 발견하고
공격해오던 한 무리의 마물들 아래서 불기둥이 솟아올라 그들을
녹여버렸다.
세현은 2년 동안, 머릿속에서 외우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 한 무리의 마물들이 공격해오자 세현은 그들 앞에 불의 장벽을
만들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제길.. 어째서 연락이 없었던 거지?"
"일단 사람부터 찾고 생각하자."
세지가 이상한 언어로 장궁과 화살을 소환하고 말했다. 세지가 쓰
는 언어는 정령의 언어라고 헬렌이 말했다. 하지만 세현이 쓰는 언
어는 아직도 어떤 언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세현이 불의 장벽을 거두자 세지가 화살 하나를 쏘았다. 그 화살
은 몰려있던 마물들의 가운데 떨어지고 곧 그곳을 중심으로 큰 폭
발이 일어났다. 세지가 특수 제작한 화살이었다.
'샤오 제 121기지'는 해저 절벽에서 움푹 파인 곳에 위치했다. 절
벽의 중간쯤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기도 힘들고 공격당한다 해도 다
른 기지와는 달리 '입구'가 존재했기 때문에 막기도 한층 수월하다.
그런 그곳이 당하다니- 세현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중앙 사령탑 지하 벙커에 있을 거야. 탈출구가 봉쇄됐으
니까. 분명.."
"가자."
세현이 짧게 대답하며 손에 불의 검을 만들고 그 검으로 허공을
세로로 그었다. 그 검으로부터 시작된 불길이 마물들을 둘로 갈라
놓아 그 사이에 길을 만들었고 세지가 빠르게 그 사이를 지나갔다.
세현은 길을 계속하여 유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세지가 길을 완전
히 지나자 세현도 불의 검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지나갔다. 하
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급 마물이 세현의 앞을 가로막았고, 세현이 휘두른 검에서 나온
불길은 그 마물의 몸에 큰 상처를 주지 못했다. 덕분에 세현은 사
방에서 마물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 ***** ****!!'
세현은 불의 검을 소멸하고 마법을 소환했다. 세현의 주위를 불꽃
이 휘감았고 그 불꽃들은 사방으로 퍼져 주위의 마물들을 불태웠
다. 하지만 앞의 상급 마물은 뒤로 조금 물러나갈 뿐, 큰 데미지는
주지 못했다.
'*** ** ***** ****!!'
세현의 한 손에 주위의 에너지들이 모여 빛의 구를 형성했고 그
구를 든 손을 상급 마물에게 뻗자 구에서 줄기가 나와 그 마물의
가슴을 뚫었다. 그 뒤에 있던 마물들의 몸까지 뚫고 계속하여 나간
빛줄기는 갑자기 폭발하여 줄기의 주위에 있던 모든 마물들이 흔적
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으로 이동속도를 빠르게 하여 앞에 생긴 길을 뛰어가던 세현
은 중앙 사령탑 바로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보.."
사령탑 입구에서는 최상급 마물이 세지의 목에 자신의 길고 뾰족
한 손톱을 대고 있었다. 인질극이 된 것이다.
"인간. 나의 말에 따르라. 순순히 손을 들고 저 팔찌를 껴라. 안그
러면 이 인간의 목이 뚫릴 것이다."
세현은 눈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불길을 솟아오르게 할 것 같았
지만 마물의 말을 듣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 마물이 팔찌를
들고 와서 세현의 두 손에 팔찌를 끼웠다. 세현은 알 수 없는 찌릿
함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최상급 마물은 손가락을 들어 신호를
했다.
푸욱-
"커억!"
세현은 갑자기 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아래를 보았다. 등을
뚫고 배로 나온 길다란 무언가가 보였다.
'독.. 촉수..'
"세현아!! 세현아!!"
세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세현은 정신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세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점점 작게 들려왔고
눈앞의 모든 형상들이 뿌옇게 보이며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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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이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 *** ***!!'
손을 앞으로 뻗어 마음속으로 마법언어를 외운 세현은 곧 양손에
서 강렬한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으윽.."
세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주위에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깨어났나? 후후.. 어제 보니까 손목에 마법억제팔찌를 끼고 있던
데- 마법사냐?"
"누구시죠?"
"나? 너와같이 마물들과 싸우다가 잡혀온 특수인물 검사다."
특수인물 4000명중에서 검사는 30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보통 검
사가 아니라 검기를 쓰거나 신비한 검들을 쓰는 사람들이다. 보통
검사는 중급 마물 한 마리한테도 쩔쩔매고 실력이 좋더라도 중급
마물이 몇 마리만 있어도 막는데만 벅찰 것이다. 특수인물의 기준
은 상급 마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바뀐다. 상
급 마물을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은 일반군인으로 분류된다.
아무튼 세현은 처음 보는 사람이 영어로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기
분이 약간 상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아직도 영어를 공용어
로 쓴다는 것이 세현은 항상 불만스러웠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
었다.
"제길.. 그 망할 마물놈들이 내 마누라를 잡고 검을 버리라는 게
아니겠어? 이제 그 검을 빼앗겼으니 난 특수인물 생활 접어야지."
아마 이 검사는 신비한 검을 쓰는 류나보다. 라고 생각한 세현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신의 손을 보이진 않지만 그쪽을 보았다.
"저도.. 저한테 소중한 사람을 잡고 투항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아마 욕을 당하지 않을까? 소문을 들어보니 여자들은 욕을
보인다더군.."
세현은 그의 목소리에서 슬픈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마왕이란 놈의 피나 기운으로 만든 피조물들이 그런
짓까지 한다는 거지? 소문에 불과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검사는 스스로를 자위하며 위안을 삼았다. 세현의 마음속에는 왠
지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그것은 마왕이나 마물들에 대한 것이 아
니라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젠장.. 눈앞에 있었는데.. 구하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세현의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자신에게 마법언어를
가르쳐준 목소리의 주인공을 원망했다.
검사는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라이터의 불을
담배에 붙였다. 라이터 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30대 중반이었는데,
여기 있는 동안 길렀을 수염을 가진 수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
다.
"통성명이라도 하지? 내 이름은 게스벨 달하트. 넌?"
"전.. 한 세현이라고 합니다."
"허언 쉐에 효온? 이상한 이름이군."
어색한 발음으로 세현의 이름을 부른 게스벨을 보고 세현은 눈물
을 닦으며 쓴웃음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내 마누라는 죽었어."
"예?"
갑작스런 발언(發言)에 세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아내
가 죽었다니..
"뭐, 내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어. 그때 그 여자는 죽었
어."
담뱃불에 살짝 비친 그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넌 너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해라. 내가 도와주마!"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는 세현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16) 여행의 시작-6
사방에는 마물들이 있고 세지는 그 가운데 있었다. 정령언어로 정
령을 부르려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
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뒤에서 누군가의 살기를 느끼고 어렵사리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
을 피한 세지는 자신을 공격한 자를 보았다.
'마왕.. 스케벨리..'
분노가 치솟아 들고있던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흐느
적거리며 바로 앞에 떨어질 뿐이었다. 또다시 옆에서 강한 살기를
느낀 세지는 공격을 피하고 자신을 공격한 자가 누군지 보았다.
'헬렌.. 헬렌, 왜 그러는 거야!'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또 들어오는
공격을 팔이 살짝 긁히며 피한 세지는 그를 보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세, 세현아..'
이젠 분노조차 나오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한 슬픔과 두 명에 대
한 배신의 치욕은 끊임없는 눈물을 만들어 내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본 세지는 이젠 슬퍼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민
준을 포함한 기지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세지에게 살기를 내
뿜으며 말했다.
"저주받은 년!"
"배신자!"
"넌 죽어도 마땅해!"
"죽어라!"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검과, 마법과, 총을 쏘아댔
다. 고통은 있었지만- 죽진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비명을지
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학! 하아.. 하아.. 하아.."
꿈이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가쁜 숨을 쉰 세지는 다시는
꾸고싶지 않은 꿈을 떨쳐내려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
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흐윽.. 흑.."
주변에는 길거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미녀들이 발목이 쇠사슬
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자신의 발목에도 쇠사슬이 묶여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쇠사슬은 방의 중간에 있는 기둥에 묶여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도 있었고 흐느
끼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도 있었다. 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여자도
있었고, 세지와 같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자도 있었다. 그녀들의
숫자는 세지를 포함해서 23명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
"...."
세지의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곧 유일하게 미소를 짓
고있던 여자가 세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는 전쟁에서 잡혀온 여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아마 당신도 곧
그 일을 당하겠죠?"
"네?"
그녀는 방긋 웃더니 이곳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 이야
기는 세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곳은 아까도 말했듯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지능 좋은 마물이 봐서 예쁘다 싶으면 이곳에 오는 것
이다. 이곳에 잡혀온 여자들은 모두 순결을 읽게 된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세지가 마물들의 짓이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아뇨, 인간이에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요.
보질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지우거든요. 일단 목욕을 하
고 그 방에 들어가면 한 남자가 있는데.. 그 이후부터는 기억하지
못해요. 다만 기억이 나는 건 그 남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있었고
우리들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 밖에는.. 분명 그때에는 의식
이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과 그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
만 우린 알고 있죠. 몸이 더럽혀 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린 괴로워해요."
그녀가 표정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도.. 그 일을 피하진 못할 거예요. 어쩌죠? 우린 새로이 사람
이 들어올 때마다 설명은 해 주지만 도와 줄 수는 없으니.. 미안해
요."
"아니에요. 왜 언니가 미안해 해야해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세지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억지로 움직이며 웃어 보였다. 그녀
는 세지의 그런 모습에 안쓰러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자
신들은 계속 당하기만 할 뿐 대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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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게스벨이 풀어준, 이제는 자유로운 두 손을 바라보았다. 빛
의 구를 형성하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이상한 재질의 벽으
로 둘러싸여 있었다. 강도를 느낀 세현은 자신의 마법으로 쉽게 부
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뒤쪽의 큰문이 보았
다. 벽과 같은 재질이었다.
"호오.. 대단하군. 이렇게 밝은 빛을 만들다니.. 마법사란 존재에 대
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어.."
허탈하게 웃으며 농담을 하는 게스벨은 온몸의 핏기가 없는 것 같
았고 힘은 완전히 빠져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괜찮겠어요? 그런 상태로.."
"괜찮아.. 이제 늦어도 내일은 마물 한 마리가 올 거야. 그때 타이
밍 잘 맞춰서 그놈을 죽이고 나가. 지금 여기는 지하 1층이야. 여기
마탑은 11층으로 되어 있어. 지상 1층부터 5층까지는 절대 아니고
9층부터 11층은 일을 보는 곳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전에 재판 받으러 10층에 갔을 때에 익혀 두었지. 머리가 좋아서
말이야. 뭐, 재판이라고 해 봤자 벌을 얼마큼 받고 죽냐. 이거 정
하는 거지만.."
게스벨은 씁쓸한 웃음을 지며 세현에게 말했다.
"너도 재판 받으러 10층에 올라갈 거니까 타이밍 잘 맞춰서 도망
가던가. 힘있으면 다 뒤엎어버리던가."
세현은 게스벨을 향해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타이밍 잘 맞춰서 뒤엎어버릴게요."
(17) 여행의 시작-7
이상한 재질의 문이 열렸고 곧 못생긴 마물 한 마리가 들어오며
말했다.
"거기, 너! 나와라."
그 마물은 세지를 가리키며 말했고 곧 뒤에서 다른 마물이 나와
세지의 발목에 있던 사슬을 풀어주었다.
세지를 끌고 걸어가던 두 마물은 어느 한 문 앞에서 멈추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라."
마물이 세지를 밀며 말했다. 세지는 그녀가 해 주었던 말이 기억
났다.
'.... 일단 목욕을 하고 그 방에 들어가면 한 남자가 있는데.. 그 이
후부터는 기억하지 못해요. 다만 기억이 나는 건 그 남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있었고 우리들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 밖에는..'
그 말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며 두려움을 삼킨 세지는 그 안
으로 들어갔고 앞에는 욕조가 놓여 있었다. 여자의 형상을 한 마물
이 세지의 몸을 강제로 씻겨 주었고 그녀에게 흰 원피스를 주었다.
'이제 방에 들어가는 건가.. 안 돼! 이대로..'
다시 한번 정령언어를 작게 중얼거렸지만 손목에 강렬한 통증만
안겨줄 뿐이었다.
그 마물은 강한 힘으로 그녀를 다른 문으로 밀어 넣었다. 흰색 침
대가 있는 방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상한 장식품들이 신경을 거슬
리게 하였다.
세지는 갑자기 뒷덜미에 따끔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꼈고 자기 의
지와는 달리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최면 침인가..?'
쓰러지는 순간 세지는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세현아..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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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의 계획대로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게스벨도 같이 가자
고 했지만 게스벨은 '내 온 힘을 쏟아 부어 그 팔찌를 해제시켰기
때문에 내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어.. 기껏해야 2~3시간? 난 희망이
없으니 짐짝인 나는 놔두고 너 혼자 가.'라며 거절했다.
'*** ***** **!!'
세현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세현을 포위한 마물들이 모두 얼어
버렸다. 세현은 얼은 마물들을 피하며 계속하여 걸어갔다. 아니, 뛰
어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20분 가량을 뛰어다닌 세현은 마지막으로 8층을 지나고 있었다.
이곳에까지 없으면 큰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방으로
간 세현은 강도 높은 마법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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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는 정신을 차릴 때 온 몸이 서늘하다는 것을 느끼며, 곧 자신
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 마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세지는 수치심에 몸을 가리려 했지만 팔과 다리가 묶여
있다는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인간. 이해가 안 간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마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방을 나갔고 곧 바지만 입은 뚱뚱한
남자가 들어왔다.
"흐흐.. 새로 온 물건인가? 품질이 좋군.."
마치 세지를 물건 취급하듯이 말하는 남자는 30대로 보였는데, 초
록색 눈동자와 금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세지는 자신을 탐욕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를 보며 수치심과 공
포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시, 싫어!! 다가오지 마!!'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어 신음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세지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더러운 손을 세지에게
로 뻗었다. 그때!
콰앙!!
가까운 어디선가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야!!"
콰앙!!!
방의 문이 큰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그 문
이 있던 자리로 검은 머리카락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세현아.."
세현이었다. 세현은 세지를 잠시 보더니 분노의 눈길로 남자를 바
라보았다. 가라앉은 세현의 목소리가 방 내에 울렸다.
"네짓이냐.. 프란츠 세일니드.."
놀랍게도 세현은 그를 알고 있는 듯 했다. 프란츠라 불린 남자는
세현에게 비꼬듯이 답했다.
"흥, 넌 여길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텐데? 내 밑으로 들어오면
널 살려 줄..."
프란츠는 다음을 말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 주위에 불길
이 솟아올라 재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배신할 거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
세현은 잿더미를 향해 내뱉고는 세지를 바라보았다.
세지는 손발이 묶이고 남자라면 헤벌레~하고 바라보았을 몸매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체 하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울고 있는 세지를 바라보던 세현
은 바닥에 뒹굴고 있던 이불로 세지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마물
들과 프란츠에 대한 분노와 세지에 대한 안쓰러움을 눈물로 표현하
였다.
(18) 여행의 시작-8
한동안 눈물만 흘리던 세현은 세지에게 다가가서 세지의 팔다리를
묶고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마법언어로 세지에게 옷
을 입혀주었다.
마법언어로 '옷이 앞의 사람에게 입힌다.'라고 생각하자 세지에게
세현이 생각한, 간편한 옷이 입혀졌다. 마법언어로 생각한 일이 펼
쳐지자 세현은 내심 놀랬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세현은 세지를 데리고 가로막는 마물은 쉽게 처리하며 마성을 걸
어 나왔다.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킬거야.. 어떤 일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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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여차 해서 노르웨이의 '샤오 제 82기지'로 도망친 세현과 세지
는 82기지의 기지장에게 프란츠의 행적을 모두 말했다.
"그래서.. 프란츠 세일니드는 마물들의 유혹에 넘어가 지금까지 스
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예기입니까?"
"그리고 마물들은 그런 그에게 전투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을.. 대가
로 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프란츠의 눈동자가 생각나자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허허.. 프란츠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군요. 지금까지 유출된 정보가 어
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큰일이군요."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세지는 혼자 있고 싶다면서 배정된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세현은 그런 그녀를 보내고 시장의 거리를 걸었다.
"이봐!"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세현의 어깨를 쳤고, 세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친 사람을 보았다.
백발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눈에는 날카로운 예기가
있어서 보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듯한 사람이었다.
"나랑 예기 좀 하지?"
세현은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눈빛에 한숨을 쉬며 노인의 정체도
묻지 않은 체 그를 따라갔다.
시장 귀퉁이에 있는 집으로 세현을 끌고 간 노인은 지문인식으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간 노인은 세현을 보
지도 않은 체 한 방으로 들어갔고 그런 노인을 세현은 말없이 따라
갔다. 방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노인이 세현에게 말을 했다.
"넌 아직 스케벨리를 이길 수 없어."
"예?"
"네가 신어(神語)를 알고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지금
슈베린은 마물들에게 넘어가 세계 샤오 기지가 있는 지도를 마물들
에게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기지를 치려고 준비하고 있어, 마
물들은.. 넌 1기지로 가서.. 직접 보여주지."
노인은 주머니에서 하얀색 구슬을 꺼내었다. 화이트 볼이었다.
"**** ** *****!!"
세현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언어에 크게 놀랐다. 노인
이 외치자 화이트 볼이 가루가 되어 그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언어..?"
"마법언어가 아냐. 신어(神語)!! 신의 언어! 네가 쓰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지.. 물론 신어는 신들만 쓸 수 있는데..
네가 쓰다니 좀 놀랍구나."
"신어? 당신은 누구죠? 어째서 저에게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예
요?"
"흠.. 시끄럽다. 아무튼 1기지로 가서 화이트 볼이 있는 곳에서 신
어로 '화이트 볼을 흡수!!'라고 외어라. 그럼 너의 신어의 영역이 넓
어질게다. 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루는 자.."
그리고는 노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세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더니 이내 어둠이 내려앉았고 세현이 눈을 떴을 때에는
낯선 방의 침대에 자신이 누워 있는 것을 느꼈다.
"아아.. 지금이 몇 시지..?"
세현은 몸을 일으키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혼잣
말로 중얼거렸는데, 의외로 대답이 나왔다.
"지금, 2004년 8월 29일 아침 7시 13분 21초를 지나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음성이 세현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세현이 자기 기지에
있을 때에는 수없이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여기서까지 듣자 세현은
놀라워했다.
'손님방에도 그 비싼 지능 컴퓨터를 달아주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챙겨 입은 세현은 세지를 부르기 위해 그녀
의 임시 방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고 곧 화
사한 미소를 품은 세지가 나왔다.
"가자, 세현아.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세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는 쓴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프랑스, 제 1기지로."
'세지야, 너무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 마. 그럼 네 마음만 힘들어
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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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 제 1기지'로 이동한 세현과 세지는 기지 장이자 샤오 기지를
창단한 샤오 켈렌티에게 인사하기 위해 그가 있다는 도서관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그 도서관에는 13~14세로 보이는 소년과 40대
로 보이는 여자가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세현은 그 넓은 도서관을 찾았는데도 샤오란 사람이 보이지 않자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저.. 샤오 켈렌티라는 사람을 본 적 있니?"
그 소년은 책을 덮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현을 바라 볼 뿐, 아
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소년 대신
대답했다.
"그분이 샤오 켈렌티 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이 말했기 때문에 세현은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가 한 말의 뜻을 알고는 엄청
나게 놀라 버렸다.
"네에에~? 이 꼬마가요?"
(19) 귀국 대 작전!-1
"잘 먹었습니다."
"아, 오른쪽에 휴게실로 가 주세요."
"알았다, 꼬마야."
"우쒸.. 저게.."
"진정하세요."
세현은 40대 여인에게 팔이 붙잡혀 다시 자리에 앉아 자신을 노려
보는 샤오를 보고 피식 웃고는 식당의 문을 열고 오른쪽의 휴게실
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음식을 다 먹고 먼저 들어온 세지가
방긋 웃으며 쇼파에 앉아 있었다.
"다 먹었어?"
"응. 휴우.. 그 꼬마녀석.. 어떻게 샤오 기지를 만들었다는 거지?"
"곧 알게 되겠지."
"그래.."
세현은 세지의 옆에 앉았다. 둘의 대화는 그렇게 끊겼고 어색한
침묵에 휴게실을 감돌았다.
10분쯤 후에 샤오가 아까 여자와 같이 들어왔다. 그 둘은 세현과
세지의 앞에 있는 쇼파에 앉았고 샤오가 입을 열었다.
"자, 일단 통성명부터 하죠? 저는 아까 말했듯이 샤오 기지를 창
단하고 현 1기지의 기지 장 샤.오. 켈.렌.티.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세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샤오였다. 세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전 샤오님의 경호 겸 비서인 미젤 라인트입니다."
밝게 웃는 그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인상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경호.. 라고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둘을 번갈아 보는 세현은 '둘, 혹시 사칭
사기범 아냐?'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전 '샤오 제 13기지'의 특수인물 신세지라고 합니다."
"쉬인 쉐에 쥐이? 발음이 힘들군요."
샤오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투덜거리자 세지는 그를 향해 한 번
웃고는 말했다.
"셀리라고 부르세요."
"저도 '샤오 제 13기지'의 특수인물 한세현이라고 합니다. 센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전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란 말에 샤오와 미젤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본래
의 표정으로 돌아왔고 샤오가 세현에게 물어왔다.
"저도 마법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죠?"
진지한 샤오의 표정에 덩달아 진지해진 세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이트 볼 아니? 그거 찾으려고 왔지."
"반말 좀.. 자제해 줄래요? 저도 이런 모습으로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라구요."
"무슨 말이니? 혹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거니?"
"으... 일단 넘어가죠.. 화이트 볼은 왜 찾는거에요?"
"먹으려고."
"에?"
샤오는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세현을 바라봤다. 아니, 샤오만 그
런 게 아니라 미젤과 세지도 비슷한 표정으로 세현을 보았다.
"가면 알아. 가르쳐 줄 거야, 말 거야?"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샤오는 갑자기 고개
를 들더니 대답했다.
"뭐,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화이트 볼이 그렇게 중요한 것
도 아니니깐.. 그럼 가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샤오를 따라 나머지 세 명도 일어
섰다. 휴게실을 나가 샤오와 미젤의 뒤를 따르던 세현과 세지는 어
느 순간 갑자기 주위의 온도가 낮아진 것을 느꼈다.
샤오가 어느 한 문 앞에서 멈추더니 세현과 세지를 향해 뒤돌아서
고 말했다.
"여기야. 화이트 볼들을 모아 둔 창고가.. 창고 안은 좀 추울 거
야."
샤오는 눈동자 인식으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세현은 앞의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화이트 볼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와.. 정말 많다. 이걸 모두 흡수해야 한다니.. 하하.."
"흡수한다고? 에에.. 설마 진짜로 먹는 건 아니지?"
화이트 볼을 보던 세현은 갑자기 샤오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 아까부터 반말하더라? 그 이유, 물어봐도 될까?"
"당신이 반말하는데 내가 존대해 줄 이유는 없지."
"넌 꼬마고 난 어른이잖아."
"난 꼬마가 아냐!"
세현은 다시 화이트 볼을 향해 눈을 돌렸고 그의 중얼거림으로 샤
오는 순간 울컥했지만 따질 수 없었다.
"꼬마가 아니라 애였어.."
세현이 화이트 볼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기 때문이다.
(20) 귀국 대 작전!-2
화이트 볼이 더미로 쌓인 곳에 간 세현은 화이트 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 *****!!'
그러자 앞의 화이트 볼들이 빛에 둘러싸이더니 그 빛이 그대로 세
현의 몸 속으로 흡수되었다. 세현은 머릿속이 상쾌해 지는 것을 느
꼈다.
"휴우.. 겨우 5개.. 더 많이는 안되나?"
세현이 중얼거리고, 뒤의 세 명은 화이트 볼 5개가 세현의 몸에
흡수되는 것을 보고는 놀란 눈이 되어 세현의 뒤에 섰다.
"어, 어떻게 한 거야?"
"몰라, 누가 이렇게 하래."
"누가?"
'**** ** *****!!'
샤오는 세현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이트 볼을 흡수하자
입술을 쭉 내밀고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화이트 볼이 8개가 흡수되었다.
"오, 좀 늘었네? 계속하면 점점 느는 건가?
"언제 끝나?"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나요?"
"그나저나 굉장히 신기하네.. 화이트 볼도 쓸모 없는 게 아니였나
봐. 이런데 쓰일 줄이야.."
위쪽부터 세현, 세지, 미젤, 샤오이다. 아무튼 세현은 계속 화이트
볼을 흡수했다.
10개.. 13개.. 18개.. 23개.. 35개.. 42개..
그렇게 불규칙하게 화이트 볼을 흡수하는 수가 늘어났고 세현은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느낌을 계속 느꼈지만, 뒤의 세 명은 지루하
다는 얼굴로 기다리다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예 자리를 잡
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언제 끝나는 거야?"
"아직 반도 못한 것 같은데요?"
'**** ** *****!!'
50개.. 아까부터 50개에서 멈추더니 계속 50개씩 흡수하고 있었다.
그걸 센 건 미젤이었다.
"미젤은 그런 거 잘 세더라. 저번에 바늘 수백 개를 한꺼번에 쏟아
부었는데 정확해 세었었어."
"헤에.. 그래요?"
세지가 샤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지었다. 세지는
처음부터 샤오에게 존댓말을 써 주었는데 세현은 그게 못마땅한 듯
싶었다.
"휴우.. 난 가 봐야겠어. 정말 언제 끝날지 모르겠단 말이야. 피곤
하기도 하고.. 지금이.. 3시네. 나 먼저 갈게! 같이 갈 사람은 따라와
도 좋아요."
샤오가 세지와 미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지는 고개를 도리도
리 흔들며 거절했고 미젤은 당연히 그를 따라가겠다는 미소를 지었
다.
"이봐, 센! 미젤과 나는 간다! 셀리님, 밖에 경호원들을 배치하겠습
니다. 쉬고 싶으시면 그들에게 말씀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샤오와 미젤은 문을 열고 나갔고 창고에는 세현과 세지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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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 세지는 자신에게 지정된 방으로 갔고 화이트 볼을 모두
흡수한 세현은 휴게실의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리는 엄청나게 맑아졌지만.. 몸이 이렇게 피곤하니.. 어휴.. 어째
서 화이트 볼이 이런데 쓰이는 거지?'
세현은 탁자에 놓여있는 커피 잔을 들었고 향을 음미하다가 한 모
금 들이켰다. 아직은 따뜻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식어 있었다.
'이것만 다 먹고 자야겠다. 하아.. 피곤해라.'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세현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지? 여긴 어쩐 일로.."
"아, 세현이가 있었구나.. 그냥, 생각 좀 하려고.."
세지는 세현에게 베시시 웃어 보이더니 세현의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세현이는 여기에서 뭐 하는거야?"
"나도 생각 좀 하려고.."
"무슨 생각?"
"으응..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
휴게실에는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고 그 침묵은 세현의 헛기침으
로 인해 사라졌다.
"저, 세지야.."
"...응?"
"할 말 있으면 해. 뭔가 말하고 싶다고 네 얼굴에 다 써 있어."
"헤에.. 그래..?"
세지는 세현에게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 저번.. 에
도 너한테 걱정이나 끼치고.. 바보같이 인질이나 돼서 안 좋은 일..
당할 뻔하고.. 흑.. 지금까지.. 흐흑.. 내가 한 일은 뭐가 있지..? 흑
흑.. 짐만 된 것 같아.. 흐흑.."
세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세현은 자리
에 일어나 세지의 앞에 서서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짐이 아냐. 샤오 기지에서는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이고, 지금
까지 나와 함께 한 동료이고, 내 마음을 빼앗은 나의.. 나의 사랑스
런 여자야.."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세지의 귀를 통해 머릿속에 전해졌고 곧 심
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동시에 마음의 공간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흘렀고, 세현의 셔
츠는 그녀의 따뜻한 눈물로 적셔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