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만군과 노소영씨도 저에게 특공무술을 배운 제자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25년간 청와대를 지키며 경호원들의 무술지도를 해온 ‘무술의 달인’ 장수옥씨, 7cm 두께의 송판을 주먹과 이마로 가볍게 격파하던 70년대 최고의 미녀 무술사 ‘철선녀’ 김단화씨. 특공무술을 만든 무술인 부부로 유명한 두 사람의 특별했던 무술인생과 청와대에서의 비화 단독공개.
대통령을 보호하는 청와대 경호원들에게 무술지도를 해온 무술 사부 장수옥씨(56). 그는 청와대 경호원뿐 아니라 국내외 특수부대와 특수요원들에게 무술을 지도해온 이 시대 최고의 무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국 50여만명의 수련생을 가진 특공무술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청와대라는 특수한 곳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렸던 탓이다.
지난 2월 25년간 몸담았던 청와대에서 정년퇴직한 그가 최근 자신의 무술인생 역정을 담은 에세이 <대통령 경호원들의 영원한 사부>를 펴냈다. 더구나 그의 아내 김단화씨(55) 역시 70년대 명성을 날렸던 여자 무도인. 우리나라 최고의 무술인 부부로부터 특별했던 무술인생과 청와대에서의 비화를 듣기 위해 특공무술협회를 찾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커다란 사진액자 5개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장씨 부부와 악수를 나누는 인물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현직 대통령들이다. 청와대에서 특공무술시범을 보인 후 격려를 받는 모습이라고 한다.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있는 장씨와 살은 쪘지만 군살은 별로 없는 김씨는 첫눈에도 무림의 고수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25년간 대통령 경호원들을 교육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의 무술인생을 되돌아보고, 특공무술이 뭔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특공무술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책을 내게 된 겁니다.”
얼마전 태권도를 배우는 기자의 초등학생 아들이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갑자기 “특공무술이 가장 센 무술”이라며 특공무술을 배우겠다고 해 제 엄마를 긴장시킨 적이 있다. 일반인에게 특공무술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긴장시키는 무시무시한 싸움기술이고, 특수부대 군인들이나 하는 무술이라는 선입견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간의 인식을 아는 듯 장씨는 “이름에서부터 군대 냄새가 나고 특수기관 요원들이 주로 익히다보니 사람들이 막연히 어렵고 거친 무술일 것이라고 지레 겁먹는데, 오히려 어린이나 여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외공을 주로 하는 무술이나 내공을 주로 하는 단전호흡과 달리 특공무술은 내공과 외공을 결합한 무술입니다. 그래서 어떤 운동보다도 어린이들의 발육발달과 정서함양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옆에 있던 김씨도 “특공무술은 주부들이 배우면 특히 좋다”며 거든다. 실제 김씨는 자식 둘을 둔 55세의 주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단단했다. 또한 피부도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보였다. 현재 특공무술 공인 7단인 김씨는 남편 장씨와 함께 특공무술을 만든 숨은 내조자로 특공무술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또한 큰딸 지경씨(28)는 공인 2단, 아들 은석씨(25)는 공인 4단으로 온 가족이 특공무술인이다. 특공무술 유단자인 지경씨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재즈발레를 전공했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지면서도 ‘특공무술이 결코 강직하기만 한 무술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전호흡을 하고 기본동작을 배우는 동안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생활에 활력소가 생겨요. 그리고 몸매관리 뿐 아니라 호신술까지 되니까 일석이조인 셈이죠. 일년 정도만 하면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밤거리를 나가도 전혀 두려울 게 없어요.”
‘외공의 고수’와 ‘내공의 고수’ 결합으로 화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71년 함께 무술시범단으로 뽑혀 아르헨티나로 원정을 떠나면서. 당시 장씨는 국내 최고의 발차기 기술로 무도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있었고, ‘철선녀’로 불리는 김씨는 괴력을 가진 미모의 여성 무도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제 생일이 부처님과 같은 사월초파일이라는 인연으로 절에 다니곤 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68년에 우연히 서울 인왕산에 있는 청산거사라는 스님이 여제자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불가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정신도법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스님이라 호기심에 찾아갔죠. 원래 몸이 약해 운동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김씨는 청산거사로부터 3년 동안 무공을 익혔다. 그녀가 배운 것은 상대방을 제압하는 격투기술이 아니라 단전호흡 등으로 몸속에 흐르는 기를 연마하는 수련법인 내공. 하지만 내공을 쌓으면 격파 등의 기술은 저절로 익혀진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어느날 선생님이 두꺼운 송판을 가리키며 이걸 이마로 깨라고 하셨어요. 단전호흡으로 정신을 집중시켜 내공의 힘이 올라왔을 때 하니까 그냥 깨지더라고요.”
인왕산 속에서 무공을 연마하는 처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70년 일본 후지TV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세계의 기인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괴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그녀는 이마로 송판 깨기, 이빨로 트럭 끌기, 배 위에 바위를 올려놓고 깨뜨리기, 오토바이 두 대를 양팔로 끌기, 쇠정을 가슴에 댄 채 해머로 내려치기 등 다양한 묘기를 선보였다. 특히 가슴을 친친 동여맨 철사를 내공의 힘으로 끊는 시범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일본에서 먼저 알려진 그녀는 곧 우리나라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국내는 물론 베트남, 미국 등 해외까지 시범공연을 다니며 연예인 못지않은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녀는 무예뿐 아니라 외모도 연예인 못지않아 가수와 모델 제의가 잇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음반까지 취입했다고.
당연히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김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은 장씨였다. 아르헨티나 원정시범을 위해 함께 연습하는 동안 묵묵히 자기 수련만 하는 장씨를 보며 한눈 팔지 않고 순수하게 무도의 길만 충실히 걸어온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듬직한 사람이란 믿음에 결혼까지 결심했다고 한다. “말이 없는 사람이라 데이트할 때 심심했겠다”고 농담을 건네자 “말 대신에 행동으로 했죠” 하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신혼부부처럼 다정해 보였다.
두 사람은 전라도와 경상도, 기독교와 불교 집안이라 양가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그런 제약이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74년 결혼한 두 사람은 전북 이리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장씨가 체육관을 운영하는 동안 김씨는 살림을 했지만, 단순한 전업주부로 머물지는 않았다. 남편이 그의 장점인 외공과 자신의 장점인 내공을 합해 더 좋은 무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장씨도 그런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내를 만난 후 내공의 위력을 깨달았어요. 저는 연속동작의 무술을 하기 때문에 항상 호흡이 거칠었는데, 아내에게 단전호흡법을 배운 후 호흡이 자연스러워졌어요. 또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죠. 손바닥보다 주먹이 더 강해보이잖아요? 하지만 내공이 실리면 손바닥이 주먹보다 더 강해요. 보호장비를 두겹이나 껴입어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죠.”
그렇게 해서 외공과 내공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무술인 특공무예가 잉태되었다.
극한의 생활고에 지쳐 자살 결심하기도
두 사람 모두 무예를 사랑했지만 생활은 항상 쪼들렸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려고 75년 서울로 올라왔지만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 허름한 사글세방을 전전하다 연탄가스에 질식해 온 가족이 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또 한번은 어린 딸아이가 뜨개질바늘에 목이 찔리는 사고가 났다. 간신히 바늘은 뺏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데리고 갈 수조차 없었다. 그때의 비참한 심정은 지금도 그의 가슴 깊이 응어리로 남아 있다.
“무술은 자신있는데 사는 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구차하게 사느니 온 식구가 다 함께 죽자고 생각했어요. 아내도 순순히 남편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해요. 그날 저녁 김치와 간장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젖을 먹고 있는 지경이를 보래요. 그러면서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겁나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예쁜 지경이를 어떻게 죽여’하는 거예요. 세상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아이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죠.”
그러던중 그의 인생을 바꾸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78년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이다. 침투한 무장간첩을 생포한 군은 그들의 무술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우리의 무술인들과 대련을 시켜보았다. 그런데 남한의 각종 무술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북한 특수부대원들에게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씨가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전국의 무술사범들을 모았어요. 저도 거기에 참가했고, 차실장의 눈에 띄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무술시범을 선보이게 되었죠.”
차지철은 그에게 북한의 특수무술을 이길 수 있는 독창적인 무술을 개발하도록 했고, 새로운 무술의 이름을 특공무예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79년 특공무술이 태동했다. 또한 그를 특수부대는 물론 청와대 경호원들의 무술을 지도하는 사범으로 위촉했다.
문득 두 사람이 부부싸움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피 터질 것 같은 부부싸움의 야사를 듣고 싶어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쉽게도 대답은 “한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
“남편은 한번 삐치면 말을 안해요. 그래서 싸움이 안돼요. 그리고 남자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화를 냈다가도 제가 먼저 풀어요.”
장씨가 청와대까지 입성하게 된 데에는 김씨의 내조가 단단히 한몫했다. 특공시범단에 그가 유일한 여자로 참가해 송판을 이마로 격파하는 등 남자들도 흉내낼 수 없는 내공의 힘을 선보여 눈길을 끌게 한 것이다.
“제가 무술시범에 동참하려고 한 것은 남편을 쉬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남편만 계속 시범을 보이니까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물 한잔 마시고 한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 시범 중간중간 제가 끼어들은 거죠. 그런데 남편은 그런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쉬지도 못하고 계속 자리를 지키더라고요.”
시범을 보이면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일 때였다. 정권으로 7cm의 송판을 내리쳤는데 깨지지 않은 것이었다. 이럴 경우 송판이 깨지지 않으면 손뼈가 깨진다. 다시 한번 힘껏 내리쳤지만 역시 송판은 그대로였고, 손가락 뼈 두 개에 금이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보고 있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즉시 이마로 송판을 들이받았고 비로소 두 조각이 났다.
“깨진 것을 보니까 한가운데 커다란 옹이가 있었어요. 옹이는 접착제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런 송판을 깬다는 것은 남자고수들도 불가능한 일이었죠. 박대통령도 그걸 알고 있어서 대단한 여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55세 나이에도 두꺼운 송판 이마로 박살내는 여자
장씨는 역대 대통령들뿐 아니라 그 자제들과도 인연의 끈을 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막내 재만씨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에게 직접 특공무술을 가르쳐준 것. 둘 다 영부인들이 직접 데리고 와서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재만군은 86년부터 가르쳤는데, 아버지를 닮아 무예에 재질이 있어서인지 1년6개월 만에 공인 2단을 땄어요. 그 정도면 경호원 없이도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을 실력이죠.”
재만씨는 당시 공부에 쫓기는 고등학생이었는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훈련에 임했다고 한다. 그것도 사범보다 먼저 체육관에 도착해 훈련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는 재만씨를 무척 예의 바르고 건장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전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는 “아들 교육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고 믿고 맡기는 무장이었다”고 기억했다.
특공무술을 배우는 아들을 대하는 모습도 역시 전대통령다웠다고. 하루는 재만씨가 훈련을 하던 중 스파링 파트너의 기습공격에 명치를 맞고 쓰러졌다. 주위 사람들은 재만씨가 크게 다치지 않았나 걱정하는데 전대통령은 “맞았으면 다시 일어나 공격을 해야지, 그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런 정신상태로 어떻게 운동을 하겠다는 거야” 하고 다그치며 다시 대련을 하도록 했다는 것. 그리고 훈련이 끝나 후에야 아들의 몸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훗날 전대통령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재만군을 만나 적이 있는데 저에게 ‘특공무술을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뿌듯했죠.”
노소영씨도 미국 유학중 한국에 돌아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에게 6개월 동안 호신술을 배웠다. 대통령의 외동딸이라 다치기라도 하면 어떨까 싶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소영씨가 먼저 “영애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소영이라고 불러달라”며 부담없이 대해 마음 편하게 가르칠 수 있었다고.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했어요. 일주일에 두세번씩 와서 배우곤 했는데, 운동신경도 좋고 몸도 강골이어서 곧잘 했어요.”
그는 소영씨가 아니라도 노대통령과는 인연이 많았다. 노대통령은 특히 “김단화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라고 극찬을 할 정도로 김씨의 팬이었다. 그래서 김옥숙 여사도 “남편이 하도 김단화씨 자랑을 해서 꼭 한번 무술시범을 보고 싶었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퇴임 후 댁으로 찾아갔어요. 당시 노대통령은 단전호흡을 하고 있었는데, 잘 안된다며 봐달라고 하더군요. 보니까 호흡법이 잘못되어 있어서 교정을 해주기도 했어요.”
역대 대통령과 얽힌 비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그는 퇴직한 지 2개월밖에 안돼 청와대 안에서의 일을 말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청와대에 있는 사람은 안에서의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라는 것.
청와대에서 나온 그는 요즘 특공무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9·11테러사태 이후 미국에서 경호무술로 특공무술을 배우는 붐이 일 정도로 특공무술이 세계화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경호무도의 기술을 더욱 체계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도 특공무술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좀더 쉬운 교육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운동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김씨가 5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이마로 송판을 깨뜨리고, 팔로 막아 각목을 부러뜨리는 시범을 보일 정도. 그는 기자에게 자신의 팔뚝을 만져보라고 했다. 말랑말랑해 보이던 팔뚝이 기를 넣자 무쇠처럼 단단해졌다.
장수옥씨는 소림사와 같은 무림본산인 무림원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한다. 중국을 보면 공원이나 광장에서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무술을 익힐 정도로 무술이 사회체육처럼 된 데에는 소림사와 같은 무림본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우리나라에도 그런 무림원을 만들어 건전한 무술보급에 힘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꿈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