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작열하는 태양. 숨 막히는 열기, 그 속으로 땀 냄새 물씬 풍기며 끝 간데 없이 질주하는 젊음, 그것이 청춘이라면 중년은 가을이다.
필자가 중ㆍ고등 학교 시절을 보낸 70년대까지만 해도 중년은 30대 중후반을 일렀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캐릭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의 나이는 35세를 두엇 넘긴 정도였고 그를 일러 원숙한 중년 여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에 나온 국어 참고서에는 40(불혹)이라고 돼 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20대까지를 봄, 30대에서 40대 중반까지가 여름, 50대 전후가 가을 이른바 중년의 초입이고 70대 이후를 노년이라 봐야 할 것 같다. 질병의 원인이 밝혀지고 예방 의학의 발달로 인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건강하게 더 오래 살 확률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회 변화가 오고 있다. 청년들의 결혼 적령기가 늦어져 30대를 넘기고 50대까지 어린 자녀를 가진 가정이 많아지는 것도 그런 추세에 부응하는 사회 현상일 것이다.
패션이 바뀐다. 청바지뿐만 아니라 정장도 슬림 피트가 대세다. 건강 유지뿐만 아니라 몸매 관리를 위해 피트니스 센터를 찾는다. 매니큐어ㆍ페디큐어 관리는 물론 화장을 하고 때로 미용 성형도 감행한다. 모바일 기기를 가지고 소셜네트워킹을 활용하고 부가적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차원으로 진화한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에 심취한다. 모두 최근 중년 남성 세대들이 열광하는 새로운 조류다.
지금 50대에 근접했거나 막 넘긴 세대들에게는 아직 고전적 의미의 중년의 경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간 숨차게 앞만 보고 달려온 열정의 질주 기억만 있을 뿐. 그런데 오늘 이 10월의 한가운데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왔던 길을 돌아보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이윽고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는 순간,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 서서 미래의 행보를 생각하게 된다. 다가올 50년은 이제와 다른 새로운 세상일까?
중년은 제2의 인생을 내딛는 첫걸음이다. 청춘의 동력이 열정이라면 중년의 동력은 흥미 또는 흥미로움이 아닐까? 열정은 시한부이지만 흥미는 지속성을 갖고 인생의 마지막 갈 때까지 유지되는 생명력이다.
어쩌면 흥미롭다는 것은 열정의 새로운 업그레이드 버전일지 모른다. 그러면서 또한 원초적이다. 유년기 소년 시절 창조적 발상의 출발점 역시 흥미였으니까.
그를 불러주기 전에는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그러나 그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 또한 그의 꽃이 되고 우리가 비로소 '눈짓'으로 '통'해야 한다. 눈짓이란 말 없이도 통하는 합일의 경지 아닌가. 인문학에 대한 사랑과 독서, 몸매 관리와 개성 연출, 새로운 취미의 추구, 세대 간의 대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 부부나 연인 간의 고양된 사랑, 그 밖에 중년이 추구하는 어떤 덕목이든지 간에, 그 관계 안에서 의미 있는 눈짓으로 서로 합일되고 마침내 행복으로 귀결하고자 한다면 그 바탕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흥미로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가을, 살에 와 닿는 바람결이 어제와 다르다. 겨울을 예고하는 듯한 조바심이 없지는 않지만 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을 마냥 붙들고 즐기고 싶다. 그러나 가을이 영원하다면 이미 그것은 가을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순환되는 전체로 보면 끝없이 진행되는 연속형이지만 문득 북풍한설을 보고 겨울을 체감해 계절을 구획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중년을 관리하고 즐겨야 할 이유다. (2012년 10월 중앙일보)
첫댓글 통영제 가 신문에 정기적 으로 글 올리는 명 수필가 인줄 미쳐 몰랐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