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웅때 20여개 단어와 열 밖에 않되는 숫자로 3 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토착민을 교화 하다니?
고토회복님의 의문과 질문은 당연 하다.
이것은 이 카페에 써진 글들을 모조리 읽어보아 전 윤곽을 추리해본 사람이 아니면 구구나 가질수 있는 의문이다.
필자는 이에 " 말이란 거짖말을 하기위해 말들어 진것" 이란 설명을 했으나 이것도 너무 고차원 식 답변이고 이것이 또 현대인에게 먹혀들어 가지 안을것 같아 다시 정리하여 신지녹도문 천부경 해독 첫머리에도 군더덕이가 될 망정 덧붙일 필요가 있다.
이에 이것을 여기에 정리한다.
* 우선 고토회복님의 질문 요지
1. 언어에 대한 질문
우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도 엄마는 아이의 듯을 알아채는데 그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품을 때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마찬가지로 환족이 바이칼 호수로부터 내려와서 웅족이나 범족을 교화할 때 환족은 웅족이나 범족의 원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가 있겠지만 웅족이나 범족은 환족의 뜻을 알아차리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웅족에게 20단어도 안되는 말로 천부경의 의미를 납득시키기가 쉬웠을까요?
하나에서 열까지의 숫자는 그 의미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해서 납득시키려면 다른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하였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물론 말이 안 통하는 외지에 가서도 밥 얻어먹고 물마시면서 생존은 가능하겠지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알아 들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것도 선진 문화 속에서 살아 봤던 사람이나 가능하겟지요.
웅족에게 하늘의 의미나 천부경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어떤 방법이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는지가 정말로 궁금합니다.
먼저 공부하신 분들의 청량한 답변을 부탁해도 될까요?
1. 번 언어에 대한 답
필자는 신지녹도문천부경해독을 하면서 가장 먼저 부탁한것이 그 신지녹도물을 풀려면 혀재 우리이 상식이 아닌 6 천년정 원시조상의 입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자고 했다.
왜냐하면 현재 과학문명과 20 만 어휘를 쓰는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그들의 문화를 생각해 본다는것은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1)그때 말이라고는 불과 20 여 단어밖에 되지 안았다? 어떻게 아는가?
가. 언제부터 말이 만들어 졌을까?
구석기인들 이전 인류는 지금 고릴라나 오랑우탕같이 그저 생식을 위하여 나오는 대로 본능적으로 소리지르고 몸동작을 했을 것이고 이는 짐승들 같이 그 집단에서는 의사가 통했을 것이다. 이는 지금 동물과 같아서 미국 개나 닭이 한국 개나 닭들과 통역이 없어도 의사가 통하는 것과 같다. 또 각자 다른 짐승들끼리도 일단은 공통된 의사 표시가 있을 것인데 이는 바로 외적이 처 들어올 때나 먹이를 취할 때 위협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돌을 이용할 줄 알았던 인류의 조상 구석기인들은 그저 본능적인 소리지만 이것이 체계 있게는 다듬어졌을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로 인용하면 바벨탑 이전의 인간들이 모두 의사가 통했다는 비유로 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선악과의 지혜가 생긴 인간들, 즉 신석기 인들은 본능적 의사표시 이외에 새로운 의사표시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이 신의 섭리, 즉 자연의 섭리에 인간의 지혜가 덧붙여 저 좀더 발전된 생활을 해보려 했던 것이 말이 창조되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각 부족들의 말이 각자 갈라지게 된다. 즉 신의 섭리를 넘보던 인간의 바벨탑은 무너지고 각 부족이 각자 만들었던 각자의 말들은 서로 헷갈리게 된다고 본다.
나. 우리말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 젓을 까? 대략 6천년 전 신석기문명이 끝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될 무렵 지금 바이칼 호 부근에 사시던 환한 부족 이라는 북방계 몽골리안 무리의 지도자 이셨던 우리 하느님은 본능적 이거나 무의식이 아닌 의식적으로 처음 말을 만든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처음 만든 말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말하는 아, 마, 사 로 본다. 여기서 아마사라고 표현 했지만 세종께서 필요에 의해 만들었지만 잘난 한글학자들에 의하여 없어진 글자 아래아점 으로 보면...또 우리말의 습관으로 보면 어, 마, 서와 중간 음이 된다.(감둥이와 검둥이가 같은 말인 이유를 모음의 혼동이라고 했지만 실은 아래아점을 찍어 감 과 검의 중간 음을 발음하면 하나의 음으로 두 발음이 통일된다)
필자는 여기서부터 말 이라고 하고 싶다. 왜냐하면 먼저 본능적으로 나오는 소리를 모두 말 이라고 한다면 짐승들도 모두 말을 하고 갓 태어난 아기들도 말을 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뿌리를 추적해보면 신기하게도 다른 나라 말들과 다르게 하늘과 땅과 사람(天地人) 이라는 철학적인 말들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 이유는 우리말의 뿌리를 캐 올라가면 결국 아, 마. 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쓰고 있는 순수한 말들은 결국 이 아, 마, 사, 에서 진화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 우리가 처음에 말이 몇마디 되지 안았다는 증거는 지금 우리 말의 뿌리를 찾아보면 알수있다.
즉 눈(目)도 눈이고 눈(雪)도 눈이다.
그러나 이 "눈" 도 세종이 모음을 완전히 만들었으니 지금과 같이 눈 이라 쓰고 눈으로 발음하지 검둥이 감둥이 또 파릇 파릇 퍼릇 퍼릇 포릇 포릇 푸릇 푸릇 갗이 모음이 혼동 됬도 모음의 글자까지 완전치 못했던 원시한글에게 "눈" 을 어떻게 적고 말했을것 같은가?
"ㄴ" 자는 신지녹도문자에서 '누리'(세상)를 뜻하니 'ㄴ' 속에는 누어있는 뜻이 들어있고 그래서 目도 ㄴ 이고 雪도 비와는 달리 흘러내리지 안으니 ㄴ 이다.
그러니까 결국 ㄴ 자 하나 써 놓고 누리, 目, 雪, 누나, 누에 등 모두를 말할했다는 말이다.
하늘의 달(月) 음달 양달 하는 달, 딸(女), 이 달이 진화하여 우리의 약방의 감초격 ' 이' 가 붙어 된말 달이> 다리( 脚), 달이> 다리(橋) 도 이와 같이 ㄷ 만 써 놓으면 된다.
이게 우리 뿌리말이니 그때 도대체 우리말이 몇마디나 되었을까?
그러고도 그들이 어떻게 생활 했을까?
애기가 앙앙 대는 울음소리 하나만 듣고도 엄마는 요놈이 배가 고푼지 쉬를 했는지 밖에 나가고 싶다는 말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했고 엄마의 댓구 하는 말이래야.
"응 " 한마디만 하고도 볼기짝을 두들겨 주고 그녀석 소원만 들어 주면 된다.
즉 여러 말이 필요없다.
(2.) 그 렇다면 그 작은 말로 어떻게 토착민을 교화 했을까?
가. 일본군이 우리나 중국, 그리고 동남아세아등 외국을 정복할때 뭐 사상과 문학작품을 가리키는것은 차치하고 그들은 그 외국말을 다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총 하나로 위협하면 그들은 죽지 안으려고 다 알고 따라온다. 그리고 약삭빠른 놈은 일본말을 배운다.
나. 부처가 3 천년전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설법을 할때 각 지방의 인도인들이 그 말이 통일되 있었을 것 같은가? 또 부처는 각 지방의 방언을 다 배운다음 그들을 가르쳤을 것 같은가?
부처는 자기가 쓰던 범어로 벌법했고 그들은 어떻하던 알아 들을려 했을 것이다.
다. 원시 조상들은 지금 선악과 이전의 인간 같은 신선들 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좋게 말한것이고 나뿐 표현을 쓴다면 마치 짐승과 같았으리라고 본다.
짐승 이라니까 조상을 매우 불손하게 보는것 같은데 이번 남아세아 쓰나미 사건때도 심승들은 죽지 안았고 그 짐승의 행동을 보고 따라간 섬에서는 단 한명도 죽지 안았다.
즉 짐승은 창의력은 없을망정 자연의 섭리와 통한다.
이 짐승이 무리를 통솔 하는 행동을 보자.
사자건 코리리건 진빤지 고릴라, 들소건 반드시 지도자가 있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안는데 수십 수백 수천의 무리를 잘도 통솔한다.
라. 6 천년전 환웅이 곰족이나 호족을 교화 시킬때 지금 정치가들처럼 달변과 거짖말로 그 토착민들을 통치했을것 같은가?
화웅은 그저 그 무리와 함께 진심으로 그 토착민을 위한 행동만 하면 그들은 다 알아듣고 곰족같이 따라올 놈은 따라오고 호족처럼 도망갈 놈은 도먕간다.
2. 슷자에 대한 고토회복님의 질문
20개 정도의 단어를 가지고 통치가 가능한가?
의문의 시작 : 한웅이 신천지를 찾아 움직일 때 이미 3000명의 인원이 움직였다고 하는데 그럼 구 수를 그 당시 사람들이 세지 못하였는데 어찌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둘째 14세 단군 때 인구가 1억8천만명이라고 하는데 구 수를 헤아라려면 이미 억 이상을 표시하는 단어가 만들어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등 한단고기를 읽어보다 보니 우리님의 말대로라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생겨난다.
한웅이 17대를 전하고 단군이 47대를 전한다면 그 숫자까지는 셀수 있는 단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정치를 하면서 즉 많은 사람을 이끌려면 20개 정도의 단어로는 생존은 가능할지 몰라도 통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아님 한단고기에 실린 글이 정확하지 않고 가필을 한 것인가?
무척 궁금하다
답
우선 신지녹도문자 천부경 해독 61번 우리 숫자는 애초 열 밖에 없었다는 증거 와 62 번 우리숫자가 다른 나라 숫자보다 먼저 나왔다는 근거 부터 정독해 보시라!
우리 숫자 열에서 스물이 나온 이유에 반론부터 달아 보시라!
그렇다면 그때 과연 삼천의 숫자들이 있었을까?
후세인의 추리는 아닐까?
우리에게 한자가 들어온것은 삼국시대 초로 보인다.
즉 진사황이 망하고 거기에 살던 유민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어 삼국(가야까지 4 국)이 이루어 지는데 진시황때만 해도 한자라곤 대전 소전뿐이니 한자라고 할수도 없었다.
그후 한자가 지금과 비슷하게 정립되면서 삼국으로 흘러들어왔고 그래도 보편적 주어 들은대로 써진 일연의 삼국유사나 모화사상에 젖은 김부식의 삼국유사도 고려때나 써 진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도 단군의 내력은 古記 라는 중국 기록을 인용하고 있고 그 내용은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곰과 결혼 단군을 낳는다는 내용이고 김부식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의 기록은 아예 찾아 보기도 힘이 든다.
이에 비해 환단고기는 신라때 승려인 안함로가 상편을 쓰고 행적이 물분명한 원동중이 하편을 썼다는 것인데 우선 안함노의 상편에는 환인 하느님이 무려 7 대나 이어졌고 그 통치년대는 알수가 없다 했으며 원동중의 하편에는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 과 아만(阿曼)으로 시작하여 일세 환님 (桓因)으로 부터 지위리(智爲利)환님 까지 환님들 이름도 상세하고 그 역대 역시 7 대가 이어지며 그 재위기간도 3.301년 혹은 63.182 년 이라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 알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다음 장에서 한국 말기에 안파견(安巴堅)이 산위태백을 내려다 보시면 " 모두가 가히 홍익인간을 할 곳이로다" 했다 하는데 그 안파견은 위 7 대 환님 명단에는 없다.
다음 환웅의 신시가 1대 환웅(桓雄)천황(일명 居發桓) 환을 거처 18 대 거불단(居弗檀)환웅까지 각 환웅의 이름과 재위 년도 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그 신시가 무려 1565년 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시란 원시 뿌리말로 풀어보면 검은벌 이라는 검불이고 혹 배달국을 세웠다 하는데 배달도 우리 뿌리말로 밝달 즉 단군의 밝달나라가 전음된 것이다.
또 18대 환웅이 있었다는 기록에 의심이 가는것은 다음과 같다.
* 환웅은 혹시 치우천황 한분이 아닐까?
1. 고기(古記)를 근거로 썻다는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은 그 아버님 하느님에게 별도의 나라를 세울것을 청했고 하느님은 그 나라 세울땅을 조사해 보니 과연 홍익인간을 할만한 땅이라 천부인 세개와 삼천여명의 백성들을 주었다.
환웅은 이 것을 받아가지고 고조선 개국지에 내려와 곰족과 결혼 단군을 낳는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보면 환웅님은 제 1대 居發桓 한웅으로 부터 제18대 居弗檀 환웅까지 무려 1565년간 배달국이 이어진다.
2.여기서 하느님의 천부인과 천부경을 받아 가지고 오신 환웅님은 누구 인가? 물론 초대 환웅임 이겠지.
3.곰족과 결혼 단군을 낳은 환웅님은 누구인가? 물론 마지막 거불단 한웅님 이겠지. 그렇다면 무려 18대 환웅이1565년간 기다려 하느님 말씀을 실현했단 말인가?
4.참전계경에 따르면 그 중간 6 대 多儀發 환웅은 부자 상속제가 이루어 졌다면 태호복희 씨에 해당하며 특히 치우 천왕은 제 14세 慈烏支 桓雄인데 그는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싸운 분이다. 그런데 황제헌원의 손자가 요임금 이다.
5.요임금은 단군보다 50년 먼저 임금이 되느데 치우 천왕과 단군의 아버지인 마지막 환웅 거불단 사이는 재위 기록상 374년...여기서 황제 헌원의 손자가 요임금 이라면 2대 100년을 빼고 요임금은 50년 빨랐다니 또 50년을 더 빼봐도 224년 차이...그렇다면 최소한 4대의 환웅이 날라간다.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것 같은 환단고기 환웅 역대표에 이런 허점이 있고.
6.물론 옛 기록에 그만한 차이는 있을수 있다 하더라도 그 년대와 재위기간 그리고 각 환웅님들의 수명까지도 정확히 기록했는데 그때 그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이 오히려 의심이 간다.
7. 또 환웅의 배달국은 결국 '밝달국'이고 단군의 檀역시 '밝달'로 같은 이름인데 왜 1580년이 지나서야 밝달임금인 단군(檀君)이 등장할까?
8. 하느님 시대에 동경등 천부인을 준 것으로 보나 단군유적지 즉 고조선 유적지에서 수많은 돌 화살촉등이 발견 된는것으로 보아 하느님(桓因) 시대나 단군 시대는 긴 시간이 아니고 거의 동시로 신석기문명과 청동기 문화가 병행하던 시대로 유물학상 보이는데 만약 1580년의 차이가 난다면 단군 시대는 청동은 그만두고 철기문화가 완전히 정착 될 시기인데...
9.언어 발달로 보더라도 하느님 시대는 불과 20여단어, 3세 단군때 가서 가림토를 만들었어도 불과 160단어... 만약 하느님 시대로 부터 3 세단군때를 대락 계산하면 1700 여년이 되는데 그때 겨우 140개 단어가 늘다니...
10."돈으로 계산할수 없는 보물 천부인 세개와 하나 둘 셋 ...열" 이라는 위대한 천부경을 받아기지고 내려오신 환웅께서 제 1차 홍익인간의 위대한 사업을 펼치신 일은 바로 짐승와 같은 토착민 곰족을 사람을 만들어 그들과 피를 섞어 동화되는 것이다.
이위대한 사업을 천부경을 직접 하느님 으로 부터 받은 1대 환웅이 하지 않고 18대나 기다려 1565년만에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 1565년간 그간의 환웅님들이나 그 토착민인 곰족들은 무얼하고 있었나?
11.차라리 하느님 으로부터 천부인 세개와 천부경를 받아가지고 바로 태백산에 신단수를 세우고 곰과 결혼 단군을 낳아다는 삼국유사의 고기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12.참전계경에 태호복희씨로 나타나는이는 환단고기에 6 대 多儀發 환웅인것 같기는 하나 태호복희씬는 중국측에서는 자기네 조상이라고 우기니 과연 누구네 조상인지 알수 없고...
다만 치우천황만은 실존적 존재가 차츰 밝혀지니 치우천황 한분만을 환웅으로 보고....
13 치우천왕을 제외한 다른 환웅님들은 환단고기 이외의 기록엔 나타나지 않고 있다.
14.아래 단군세기를 보자.
단군세기 - 십육세단군 위나 무술이십팔년(BC 1583년) 구환(九桓)의 모든 칸(큰=汗)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상제와 그 배위 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과 환웅치우밎 단군왕검 이었고 오일동안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대중과 더불어 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며 경을 부르고 마당밟기를 했다. 한편으로는 햇불을 나란히 하고 한편으로는 환무(環舞, 강강술래)를 하며 애환가(愛桓歌 환인 환웅등 ‘환한것’을 사랑하는 노래) 를 불렀는데 이 애환가는 바로 옛날 하느님을 사랑하는 노래 류 이다. 선인들은 환화(桓花)를 가르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환의 노래가 있는데 이르되 “산에는 꽃이있네 산에는 꽃이있네 작년에 만 구루 심고 금년에 만 구루 심으니 불함산에 봄이오면 온 세상은 붉은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노래하리”
(十六世 檀君 尉那 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亨之五日大宴與衆明燈守夜唱經踏庭一邊列炬一邊環舞齊唱愛桓歌愛桓卽古神歌之類也先人指桓花而不名直曰花愛桓之歌有云山有花山有花去年種萬樹今年種萬樹春來不咸花萬紅有事天神樂太平
여기서 "구환(九桓)의 모든 칸(큰=汗)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상제와 그 배위 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과 환웅치우밎 단군왕검 이었고 ...." 18명이나 되는 환웅중에 왜 환인과 환웅치우 와 단군만을 삼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가?
15.현재 바이칼호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독립국가를 세우러 곰족이나 다른 부족들이 우글대는 고조선 개국지로 내려오실 용감하고 담력이 세신분은 환단고기만 보더라도 치우천황 밖에는 없다. 즉 다른 환웅님들은 뭔가 한 흔적이 전연 없다.
16. 그렇다면 하느님 한테서 직접 천부인과 천부경을 하사 받아가지고 고조선 개국지로 내려오신분은 바로 치우천황이고 그는 탁록에서 황제 헌원과 싸워 이겼으며 (황제헌원도 동이족 이라고 하지만...) 그가 곰족과 동화하여 단군을 낳는게 아닌지?
17.사실상 우리 민족은 지신족인 곰족과 혼혈된 단군때 부터 시작 되는데 씨족사회 만을 중시하는 우리 선열 누군가가 애족심에 불타 우리 상고사를 늘리는 가필을 하고...그것도 아주 정확한체 연대를 세세하게 밝히며 가필을 하고 이런 어설픈 가필로 오히려 진서인 한단고기를 망처 위서 취급을 받게 하는건 아닌지?
이는 물론 추리이기때문에 좀더 연구를 해볼 문제이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환웅은 그렇게 용감했다는 치우천왕 한분뿐이라고 생각되고 나머지 환웅들은 필사가가 우리의 역사를 늘리느라고 가필을 한것으로 보여 지는데 환단고기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되는 진실된 내용도 많치만 혹 필사가들에 의하여 가필이나 윤색의 흔적이 있다.
그 증거중 두래만 예로 든다.
* 三神五帝本紀 - 王儉氏承徑一周三徑一(두르잡)四之機 (삼신오제본기 - 왕검씨는 지름에 3.14를 곱하여 둘레를 만드는 기계로...) 단군왕검때 그런 수학 공식이 있었다? 이는 이조중기 연순군때 태백일사를 쓴 이맥도 몰랐던 수학공식 이라고 생각되므로 일제초 계연수 선생의 가필로 추정된다.
*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 (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상) - 예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년을 만드시고....)
이역시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이 아니라 계연수의 가필로 보인다. 아니 환웅시대 그러니까 5-6천년전에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 라니....그때 태양력을 썻고 시계가 있어 초를 말했다는말은 초등학생도 믿지않을 소리로 본다.
18. 이상을 근거로 황웅은 치우천황 한분이나 많아봐야 그 위아래 한분씩 세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다고 환단고기가 위서라고는 하지 안는다. 필자는 환단고기가 위서일수가 없다는 근거를 현재까지 30 개나 밝혀놓고 있다. 단 환단고기는 누군가 조상을 찬양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가필이 좀 있을것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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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가필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불명확한 글자등에 의한 불확실한 역사서 기록때문이다.
그렇다면 단군이래 거의 3 천년동안 우리 역사 기록은 어떤 글자로 써저 있을까?
단군 3 세 가륵때 만들어진 가림토로 써저 있을까?
발해 등에 원시 한글 같은 글자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볼수있는에 먼저 말했드시 원시한글이라는 가림토는 모음이 없다시피한 자음의 나열 이다.
또 종이란 고구려 중옆에나 중국으로 부터 들어오고 중국에서도 죽간(竹竿) 이란 책(冊)과같이 대나무를 쪼개어 역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의 기록은 구전되어 오는 말에서 그 죽간에 써진 원시한글 자음과 부호에 힌트를 얻어 한자로 써진것으로 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