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山宋正勳先生墓碣銘幷序
동산 송정훈 선생 묘갈명 병서
故友人東山先生,鎭川宋公正勳,得病於美洲寓所,以一九九八年五月七日(戊寅四月十二日亥時),考終于寢所,享壽七十二歲,越四日,家族門徒,奉葬于所居州之公園墓地,
옛친구 동산선생 진천 송정훈公이 무인년 4월 12일에 미국 집에서 병을 얻어 寢所에서 돌아가시니, 가족과 제자들이 모두 모여 臨終을 參觀하니 享壽 72세라. 5일째 되던 날(4월 16일) 근처 公園墓地에 葬禮를 모셨다.
在世情弟,金麟煥聞訃,設位痛哭曰,嗚呼,余與公,交五十年于玆矣.許以知己,有事必告,相論相駁,我小公大我狹公寬,親非骨肉,情同兄弟,然而病不能一問,葬不能執 ,嗟乎,人世豈有如許人情耶,在天之靈俯,瞰我衰老景狀,付之一笑而恕諒耶否,
살아있는 情弟 김인환이 부음을 듣고 자리를 깔고 통곡하기를, 슬프도다! 나와 公이 젊어서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써 50년이 흘렀다. 세상에 얻기 어려운 知己로 相許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相議하고 토론을 벌이니, 언제나 公의 理論이 正大하고 나는 옹졸하며, 公의 이론은 寬弘한데 비해서 나는 언제나 狹小했다. 비록 피는 섞지 않았지만 情은 형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병이 들었어도 問病 한번 못 가고 訃音을 받고도 葬禮에 참석을 못하니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늘에 계신 英靈이시여! 이런 나의 몰골을 보고 웃으면서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日昨公之甥侄,金寬洙君,具公之事狀,致余書而請公之墓銘,余雖不敏,豈敢辭諸,
일전에 公의 甥姪 김관수 군이 공의 행장을 갖추어 나에게 편지로 공의 묘갈명을 부탁하니, 내가 비록 글에 能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병들고 쇠약한 사람이 공의 훌륭한 업적과 미덕을 제대로 闡揚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謹按,公諱正勳,初諱再圭,號東山一云聽石,姓宋氏鎭川人,世爲儒學多聞人,李朝中有,諱英耉,謚忠肅,號瓢翁,於公爲十三代祖也,曾祖,諱淳輔,號平齊,有遺集五卷,祖諱元植,號陶隱,官通信院判任官主事,考諱炳敎,號松雲,有隱德, 扶餘徐氏,基鴻女,賢有德,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正勳이요, 初諱는 再圭요, 호는 東山이니 聽石이라고도 한다. 姓은 宋씨니 본관은 鎭川이라. 代代로 儒學을 숭상해서 세상에서 학자 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李氏朝鮮때 諱英耉 諡忠肅 號瓢翁은 공의 13代祖요, 曾祖의 휘는 淳輔요, 號는 平齊니 遺集 5권이 있다. 祖는 휘가 元植이요, 호는 陶隱이니 通信院 判任官 主事를 지냈다. 考의 휘는 炳敎요, 호는 松雲이니 숨은 덕이 있었다. 는 扶餘徐氏 基鴻의 따님으로 어질고 덕이 있었다.
公,以一九二七年,丁卯九月十七日,生于全羅北道,完州君,鳳東面,堤內里,第容貌俊秀,才智英敏,自幼時受學於祖考,少長拜蘆隱具弘祖,欽齊崔秉心,兩先生,各以師事之,通讀七書及諸子百家,譽聲藉藉,
公이 1927년(丁卯) 9월 17일에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 집에서 태어나시니, 容貌가 俊秀하고 재주가 英敏해서 어려서부터 조부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자라서 노은 구홍조, 금제 최병심 兩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4서 3경과 제자백가를 通讀하시니, 그 名聲이 자자하였다.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二十五,薦爲全北戰時聯合大學校講師,講儒敎及老莊哲學,二十七,投身政界立國會議員候補,同年再遊京師,廣交金九,趙素昻,曹奉岩,金昌淑,等諸名士,其後入進步黨,爲中央委員兼敎化委員長,又歷任成均館典學,社團法人儒道會理事,漢詩協會理事,等重要職責焉,
25세에 전북전시연합대학교 강사로 천거되어 유교와 노장철학을 강의하였고, 27세에 政界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다. 그해에 다시 서울(京師)에 올라가 김구, 조소앙, 조봉암, 김창숙 등 여러 名士들과 交遊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 후에 進步黨에 入黨하여 중앙위원으로서 敎化위원장과 이리시 당위원장직을 겸임하였다. 또 그후에 성균관 典學과 사단법인 유도회이사, 漢詩협회이사 (대동기업사 사장) 등 중요직을 역임하였다.
公,年近四十,尤勤於學問,常獨坐精硏之際,忽然覺得生生天衷之理,自謂喜不可形言,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起舞虛室中云,自此,聲名漸播,被薦爲東洋醫大,慶熙大等講師,任黃帝內經等醫學講義,
公의 나이 40에 가까워서 더욱 학문에 전념하면서, 항상 홀로 앉아 정밀하게 연구하는 즈음에 홀연히 生生과 天衷의 이치를 깨달아 얻었는데, 말로는 다 표현을 할 수 없는 희열에 젖어,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손과 발이 저절로 춤이 추어졌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점차 알려졌다. 동양의대와 경희대 등에 강사로 취임되어 황제내경 등의 한의학을 강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