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마씨 (木川, 長興馬氏)
1> 시조 : 마 려[馬 黎]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마씨(馬氏)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에서 발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로서 마한의 첫 군주인
마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에는 백제 건국공신으로 좌보의 벼슬을
역임한 마려(馬黎)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수 없으므로 [마육침]을1일세조로 하여 계보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인문이 이끄는 13만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군사를 일으켜 옛 목지국의 성거산(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을 도모했던
장군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목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목천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을 신라 경덕왕이 대록군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목주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때 목천으로 개칭하였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때
목안군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때 홍주목사로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를 지낸
지백(智伯)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관산군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후학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 당상촌으로 이거하였고, 만년에 수령군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난 때 방원을 도와 좌명삼등공신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전라도
병마절제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1419년 북방육진 개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을 완축하는데 공을세워 장흥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폭군 연산군의 불의와 패륜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윤(倫),응훈(應勳),운종(蕓宗),
온종[溫宗], 창종(昌宗) 5종형제가 모두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의 가통을 지켰다
3> 집성촌
전남 고흥군 점암면 남열리
경북 의성군 단촌면 하화동
전남 장흥군 안량면 학송리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천동
전남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함북 학성군 학동면 하천리
14.장흥마씨(長興馬氏)
김철 기자 kim72@gjon.com
강진의 성씨(14) - 장흥마씨(長興馬氏)
마씨는 백제의 건국공신인 마려(馬黎)를 시조로 여겼으나 백제가 패망하면서 역사기록이 사라져 선조들의 내력을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고조선에 뿌리한 마완(馬浣)을 시조로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장흥에 생활을 시작한 중시조는 영(榮)이다. 영의 아들인 천목(天牧)은 장흥마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태종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두 번이나 역임한 천목은 왜구를 차단하기위해 광주에 있던 병마본영을 병영면으로 옮겨 축조시켰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사라졌고 전라 병영성의 초대 절도사로 부임했다. 또한 천목은 세종때 북방육진 개척의 필요성을 밝히면서 여진족 침범을 대비해 김종서가 육진을 만드는 공을 세웠다. 이에 임금은 천목에게 장흥부원군을 하사했고 사후에 영의정에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천목은 4명의 아들을 두게되면서 장흥마씨의 계파를 이루게 된다. 첫째 승(勝)은 문광공파의 시조로 곡성에서 터를 잡았다. 승은 이조참판과 현재의 시장에 해당하는 경주부윤을 지냈다. 승은 또한 관직을 떠날 때 옷과 이불보따리 두개만을 가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청렴함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둘째 전(?)은 단양군수를 지내다 장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힘썼다. 전은 현재 장흥에서 생활하는 조은공파의 시조이다. 셋째 반(?)은 정삼품 문관인 통훈대부 현감을 지냈다.
현감공파의 시조인 반의 후손들은 강진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 넷째는 증가선대부를 지냈던 춘이다. 춘은 참판공파의 시조로 주로 북한에 후손들이 기거하고 있다. 현재 장흥마씨의 원사는 장흥 용산면에 위치해 있다. 장흥에서 처음 터를 잡은 영을 시작으로 선대를 모시고 있고 매년 음력 10월 8일 전체 문중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관내 거주하는 대부분 장흥마씨는 현감공파에 속한다. 가장먼저 관내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응정(應井)이다. 작천면 척동마을에 처음 생활을 시작했던 응정은 광릉참봉을 지냈고 그후 후손들이 군동면 삼신리 일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진안현감, 흥덕현감을 지내고 난후 후진교육에 힘을쓴 응방(應房)은 작천면에 후손들이 번성했다. 응방과 응정은 사촌사이로 정유재란때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에서 전사했다. 두 선조를 기리기 위해 작천면 척동마을에는 충정사가 위치해 병마절도사를 지낸 천목과 함께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무관 종6품에 해당하는 별정교위 오위부장을 지냈던 희수(希遂)는 옴천면으로 이주해 후손들이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작천면 척동마을에 위치한 충정사에는 장흥마씨의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매년 10월 23일경에 해당하는 상강(霜降)에 유림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천목과 응정, 응방을 기리기위해 영모제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여기에 후손들은 음력 10월 15일 조상들에 대한 시제를 모신다.
충정사는 지난해 11월 종친들이 사비를 모아 총공사비 1억8천여만원을 들여 새롭게 보수공사도 마쳤다. 깨끗하게 정돈된 충정사는 후손들에게 위용을 떨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군동 하신마을 선산에는 강진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한 응정의 묘와 제각이 위치해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 또 병영면 소재지에는 병영성을 만들고 초대 병마절도사를 지낸 천목을 기리는 대형 비석이 설치돼 있다.
관내 장흥마씨 종친회의 활동도 자리를 잡았다. 지난 15년전부터 모임을 갖고있는 종친회는 마홍식(75)회장과 마병문(76)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또한 총무 마금조씨와 감사 마기홍씨가 회장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두달에 한번정도 임원회의를 거쳐 문중일을 논의하고 매년 시제가 열리는 충정사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장흥마씨로는 남양건설 마형렬회장, 문화방송 마삼열 전사장, 문화관광부에서 근무하는 마성배 서기관, 서울경찰청 마경석경정, 전남대 사범대 마성렬교수, 기술고시를 합격한후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마옥원씨, 광주농협 광산지부에 근무하는 마태현씨, 광주에서 안과를 개업한 마양례박사, 흥진토건 마효열 회장, 농업기반공사 마주명부장, 강진경찰서 교통사고조사계 마덕렬 계장, 군청 민원봉사실 마정배계장이 있다.
인터뷰
장흥마씨 종친회를 15년째 이끌고있는 마홍식(75)회장은 “처음 각마을에 나눠져있던 종친들을 모아 모임을 결성하게됐다”며 “임원들과 회원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하면서 종친회가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마회장은 “지난해 완공한 충정사에 많은 종친들이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왔다”며 “1억8천만원을 들여 새롭게 꾸며진 제각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남겨질것”이라고 자랑했다.
종친회에 대해 마회장은 “군동면 하신마을경우에만도 예전 150호가 넘는 장흥마씨의 자자일촌이였다”며 “이제는 객지로 떠난 종친들이 많지만 아직도 종친회에 대한 애정은 크게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문중제각관리에 대해 마회장은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3천여평을 이용해 문중의 제각을 관리하고 있다”며 “젊은 사람들이 없어 제각을 관리하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든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마회장은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어 문중관리가 걱정이 된다”며 “임원들과 함께 문중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