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리(돌래) 소개
율산 무거 삼거리에서 7호 국도를 따라 부산쪽으로 대복 고개를 넘어 13km를 내려가면 오복리 돌틈 삼거리가 나온다. 둘틈 삼거리에서 좌 회전하여 회야강율 따라 1.4km를 들어가면 오른쪽 길가에 아직 송진 냄새가 물씬거리는 석계서원이 웅장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서원 반대편 쪽으로 동구 실을 따라 동네 초입에 들어서면 높이 2-300여m 되는 능선이 소쿠리 모양으로 감싸면서 소쿠리 한가운데 봉어 모양의 동산이 자리잡고 있고, 붕어의 험이 가장 센 꼬리 자락에 고래동 같은 골 기와집이(울산시광역시 문화재자료 3호) 우뚝하게 서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세도가의 집(66칸)이었읍을 금방 알 수 있다. 봉어의 머리쪽에는 연당을 만들어 놓고 온갖 꽃은 심고 가꾸어 봉어가 회야강으로 가지 못하계 막았는데 이 집터는 국풍이라 불리는 앉은뱅이 풍수의 도움으로 석전 벼락더미에서 동뫼 쪽으로 가서 지금의 종가집 부엌자리에 말목을 꽂고 집의 방향을 일러주는데로 집을 지은 것으로 터가 좋아서 발복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집이 바로 석천리의 입향조이신 선창(근제공 11세손. 1725-1781) 할아버지께서 1765년 (영조41년)에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입향조께서 대대리에서 사시다가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지금부터 약 250년 전후로 짐작할 수 있다
선창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謹吾(근오), 호:竹塢 1760-1834)는 대과급제하여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지내면서 持平公(지평공) 항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입향조의 손자 장찬, 都事公)은 문과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셨다.
입향조 4세손 奎魯(규노), 奎龍(규용) 형제분이 진사급제 하였고, 5세손 錫瑨(석진)은 1894년도에 마지막 대과에 及第하여 입향조 이래 다섯분이 진사 급제하였는데 이 중 두 분이 大科 及第하셨다.
持平公 함아버지는 정조 때 당파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낙향하여 石川亭(후일:좌천정)을 지어 이곳에서 竹塢 文集 2집을 발간하는 등 학문에 전넘하셨다
石溪書院은 1737년 (영조 13년) 은월봉 하 용연상에 용연사를 세운 것이 嚆矢(효시)이다. 그 후 1782년(정조6년) 11월에 문수산 남쪽 석천리에 이건하고 石溪, 당호를 敬守라 改題하여 세웠으니 그 때 持平公께서 크게 기여하셨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 되었다가 2000년 12월 15일 울산 유림회의에서 秉稷(병직)씨가 석제서원 복원을 발의하여 공의를 얻으므로서 서면파 문중에서 북원비 1억원 찬조를 계기로 서원복원 추진위원회(회장 東一)가
구성되고 많은 후손들이 협찬하여 총 5억여원의 예산으로 복원하였다.
좌천정과 합께 우리 문중의 상징적 聖所(성소)로 손색이 없게 된 이곳은 養吾(양오 磻溪公 1737-1811) 할아버지께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시면서 평론 문하과 세태 告發詩, 科擧부정을 고발한 불후의 세평시등 많은 저서를 남기셨던 곳으로 지난 9원 20일 한국문학비 동호회에서 磻溪 문학비를 서원 경내에 건립하였다.
선비 마을인 石川은 일제 치하에서 忠節의 마을로 이어지면서 독립운동의 용맹스러움을 보여준다.
在洛(1960년 작고)옹께서 남창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 하시면서 거액의 독린자금을 快擲(쾌척)하여 독립운동율 펼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겪였으나 훗날 그 공로가 인정되어 독립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一落(1960년 작고. 대통령 표창)옹은 1919.3,19일 남창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투옥되어 6개월의 감육살이를 한 독립투사였다. 이들의 용맹은 임란시절부터 왜적을 물리친 우리 선조들의 호국 정신에서 이어져은 충절위 연장으로써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씨고가’를 학성이씨 근제공 고택으로 바꾸고 하마길을 체험의 현장으로
해방 후 80여 호의 주민 중 60여 호가 학성이씨로 구성되어 있던 집성촌이 현재는 12가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산. 서율 등 전국으로 흩어져서 국가 발전을 위해 중주적 역할을 하고있는 출향 인사들의 면면율 살펴보면. 우선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厚洛(작고)은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允洛(작고). 周洛(작고)은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을, 東碩(55)은 울산광역시의원 및 울주군의회의장읍 역임했으며, 복(63)은 민주당 울산시지부 상임고문이다.
관계에는 충남도 문교사회국장을 역임한 東立(작고) 울산경찰서장 및 제주도 경찰국장을 역임한 東允(작고). 경찰종합학교장(경무관)을 지낸 居洛(79)을 비롯하여 褉(73)은 국가안보회의이사관, 탁(작고)은 농수산부 부이사관. 東萬(79)은 울산시 부시장을 지냈으며, 정희(여 46)는 온양면장을 거처 현재 울광역시 사무관으로 재직하였다.
학계에는 東珣(58) 신라대학교 미술과 교수. 東德(45) 공학박사. 柄 浩(56) 경상대 건축공학(박사) 교수. 樹元(53)은 농학박사로 광능수목원 근무, 容煥(44) 서울대 전자공학(박사)과 교수. 庸煥(44) 인제대 의대(박사)교수, 官洙(63) 동의대학교 경제학(박사)과 교수, 東夏(56)는 동의과학대학교 사무국장으로 재직하였다.
의료계에는 東九(68)가 산부인과(박사)의사이며. 泰杰(47)은 울산에서 외과의원을 개원 중이다.
산업계에는 式(煥(68, 화수회 부회장)이 강남고속관광(주) 회장이며, 東浩(61)가 태정개발 대표이사로 있고, 種杰(50)은 ㈜우주전기 대표이사이다.
금융계에는 東(權(62)이 부산은행 지점장을 지냈으며, 日煥(58) 외환은행지점장, 東勳(56) 제일화재보협(주)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석천리를 지나려면 들틈에서 부터 말에서 내려서 걸어 가야만 하는 하마(下馬) 길이었다.
石溪書院과 左川亭이 복원되고, ‘이씨 고가'가 鶴城李氏 謹齊公 宗宅’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새롭게 단장한 뒤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이 길에서 옛 정취를 한껏 느껴보길 소망해 본다.
서면파 문희장이신 동윤회장과 동우 총무 그리고 임원 여러분들의 지도력으로 많은 발전 있으리라 기대하며, 아직도 석천리를 사랑하며 꿋꿋이 지키고 있는 동석, 수학 족친과 본 기사 자료를 위하여 애서주신 동우. 동호, 식환, 태수, 동필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