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두산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다.
또는 용의 머리와 흡사하다 해서 용두봉(龍頭峰)으로도 불린다.
경복궁 주산인 북악산 우백호가 신촌 연세대학교를 휘감으며
서강대학교까지 내룡한 뒤 당인리에 와 멈춰선 암벽지점이다.
절벽의 암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부서지는 파쇄석이다.
푸석한 암반지형에는 사람이 모여드는 향교, 성당, 사찰, 교회, 학교 등이 들어섬이 필연적이다.
밀집한 여러 사람의 운기가 흩어진 땅의 산기(散氣)를 제압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알아갈수록 묘미가 있는 것이 또한 풍수다.
풍수는 한마디로 조화이다.
또 기(氣)를 평(平)하게 잡아주는 기술이다.
기의 균형이 맞지 않이 산 물 바람 숲 사람이 조화롭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여지없이 무너진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풍수다.
한강은 용산과 마포를 지나면서 서강(西江)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서강은 잠두봉을 감돌아 서해로 힘차게 내닫는다.
서강이 감싸고 도는 잠두봉은 인체에 비교하면 목구멍에 해당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원래는 누에가 머리를 쳐든 형상이라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잠두봉은 강북강변도로와 지하철 2호선이 합정동쪽에서 십자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강변 동쪽에 있다.
북한산의 한 지맥이 보현동–형제봉–백악–인왕산–무악–와우산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작은 구릉 줄기가 한강변에 이르러, 절벽으로 이루어진 표고 30m의 잠두봉을 형성하고 있다.
옛 양화진(楊花津)의 동쪽인 것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던 잠두봉이 끔찍하게도 절두산(切頭山)으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 산에서 목이 잘려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끊을 절(切) 머리 두(頭)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종 3년 1866년 병인(丙寅)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대규모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병인년인 1866년 초에 시작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까지인 7년간 벌어진다.
더 나아가 이후 1879년까지 천주교의 순교자가 생겨난 때까지이다.
1866년 병인년 당시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 등 약 6천여명을 처형하였다.
병인박해는 단순히 병인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당시 제국주의 침탈의 전형적인 수법이자 빌미로 활용된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는 기독교와 군대 그리고 상인들이 전략적 무기로 활용된 것이다.
조선말기의 천주교 박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활용된 것이다.
병인박해는 서양 세력의 조선 침입에 대한 위정자들의 위기의식에서 발단된 것이다.
당시 조선 주변정세는,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다.
러시아는 남하정책으로 두만강 국경지대를 수시로 침범하고 있었다. 혼란의 시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