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불교와 힌두교의 공통적 세계관, 인생관인 윤회와 해탈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고, 특히 윤회 사상을 유일신 삼대 종교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유일회적 인생관이 지닌 여러 가지 난점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인생에 여러 기회를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윤회 사상을 수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윤회 사상을 수용하지 않지만, 사실 비공식적으로 수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 윤회 사상은 유일신 신앙과 철저히 모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상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이를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이라는 취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불교 사상을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떻게 불교 사상을 수용하고 배울 것인가, 동시에 불교에는 무엇이 부족한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불교의 역사적 전개와 기초
불교는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입니다.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장구한 역사를 통해 다양한 사상과 분파들이 생겨났으며, 문화권마다 다른 특색 있는 불교를 전개했습니다. 불교를 너무 일률적으로 혹은 획일적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불자들은 불교의 역사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불교를 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불교가 우리 자신의 유구한 종교전통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도 있지만, 불교의 사상적, 역사적, 문화적 다양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 불교는 불교의 한 현상, 한 형태일 뿐입니다. 학문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 불자들이 세계 불교를 깊이 연구하거나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여러 형태로 발전해온 종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불교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분들도 있겠지만, 문외한인 분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선 불교 전체의 윤곽을 잡기 위해 기본 상식 몇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불교에는 3가지 기본적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이른바 불교를 창시한 불, 즉 부처님(Buddha), 그가 깨달은 진리를 설한 그의 가르침(Dharma), 그리고 부처님의 뒤를 좇아 그 가르침을 준행하는 스님들의 공동체인 승가(Sangha)라는 불, 법, 승 三寶(triratna)입니다. 어떤 형태의 불교를 막론하고 이 셋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삼보사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있다고 하여 불보사찰이라 일컬어지는 양산 통도사, 국보인 팔만대장경 경판을 소장하고 있는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 그리고 예부터, 특히 고려시대에 수많은 명승들을 배출했다 하여 승보사찰로 알려진 순천 송광사입니다.
전 세계 불자들은 이 삼보를 정신적 의지처, 귀의처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법회 때마다 삼보에 귀의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스리랑카, 태국 등 동남아 불교 국가에서는 불자들이 합장하고서 ꡒ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ꡓ(Buddham saranam gacchami) 등을 합송함으로 부처님께 대한 신심을 표합니다. 일종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있는데, 이른바 삼장(tripitaka)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법들을 담은 경장,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모아 놓은 율장, 그리고 부처님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더 상세히 부연 설명한 논서들을 모은 논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논장은 부처님 자신의 말씀은 아니고 후세 사람들의 저술입니다. 나머지 둘은 물론 부처님 자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불교에는 크게 두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이른바 소승(Hinayana)불교로서 현재까지 동남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Mahayana)불교로서,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 티베트의 지배적 불교전통입니다. 그런데 히나야나라는 말은 대승에서 폄하해 일컫는 말이어서 상좌부(Theravada) 불교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역사적으로 소승 불교에 있었던 여러 부파들이 다 사라지고 상좌부만 남았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가 소승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를 극복된 불교라고 하여 깔보는 경향이 있는 데 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본래적 사상은 소승불교 경전들에 담겨 있습니다. 소승과 대승은 삼장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삼장 가운데서 율장은 대,소승 공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의 스님들도 소승 계율을 대체로 그대로 지킨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경장과 논장은 매우 다릅니다.
소승 경장은 5부(Nikaya) 경전이라 불리는데 원전은 팔리(Pali)어로 되어 있습니다. 한역으로는 아함부라 불리는데 4부로 되어 있습니다. 대승 경장은 반야경전들, 법화경, 유마경, 화엄경 등 수많은 경전들이 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대승경전을 부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정신적인 의미에서 ꡐ불설ꡑ(佛說)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논장도 역시 대,소승이 다릅니다. 소승 상좌부 논장은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대승 논장은 중론, 유식론, 대승기신론 등 엄청난 분량의 논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전은 대개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으나, 원전이 소실된 경우에는 한역이나 티베트어역이 있습니다.
상좌불교의 경율론 삼장은 모두 팔리어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역사적 붇다의 가르침을 알려면 반드시 이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대승보다 부처님 자신의 말씀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도 거의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ꡐ소승ꡑ이라 하여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대승불교의 경율론 삼장은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씌어졌는데, 원전이 소실된 경우 주로 한역, 티베트어 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예 중국 스님들이나 원효 대사와 같은 우리나라 스님의 저술도 대승논장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한역경전들을 전부 수집해서 80,000개 이상의 목판에 새긴 대장경 경판을 가리키며, 대승, 소승 경전들을 총망라하고 있어 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2회에 걸쳐 먼저 상좌부(소승) 전통을 중심으로 붇다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그 그리스도교적 의미도 성찰해 보겠습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서, 우선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에 대해서 말씀드린 후 그의 교설을 소개하겠습니다.
2. 두 영적 혁명가: 붇다와 예수
부처님과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영적 혁명을 일으킨 이들입니다. 이 혁명의 여파, 파장이 지금까지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미약하게, 때로는 순수하게, 때로는 변질되어 오늘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불자들, 승가와 교회에 미치고 있습니다. 사회적 혁명, 정치적 혁명 이전에 인간 존재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들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세계를 바꿀 것인가 나 자신을 바꿀 것인가라고 물으면, 이 두 길이 배타적 선택의 대상은 아니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후자의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먼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한다든지, 사회제도 탓만 하는 것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접근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 인식이지만 그래도 종교에 따라 강조점이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면 유교도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 하여 수기를 근본으로 삼지만, 그래도 사회 질서와 제도를 못지않게 중요시합니다. 유교는 상당히 사회 정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유교에서 생각했던 사회질서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잘 맞지 않는 것이 유교가 외면당하는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유대교, 이슬람도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무시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율법에 근거한 사회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잘못된 사회질서, 경제 질서에 돌립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탐욕을 고발하지만, 그래도 문제의 해결책은 제도의 개혁에서 찾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가르침이 없는 게 아니긴 하지만 인간존재 자체의 변화, 그의 삶의 태도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제시한 열반의 길이나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 나라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회제도나 프로그램으로 실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반과 하느님 나라는 초월적 이상으로서, 그 앞에서는 우리는 항시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 세상의 어떤 사회 제도도 열반과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완전히 구현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둘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영구히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월적 이상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 종교는 어떤 구체적인 사회건설의 프로그램이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종교는 유교나 힌두교, 유대교나 이슬람에 비해 사회성이 약한 종교, 그리고 인간의 내면만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종교로 보입니다. 하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이 초월적 성격이 두 종교로 하여금 어느 특정한 사회, 문화적 질서에 밀착되거나 절대화하지 않도록 탄력성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현실을 개혁하도록 하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열반의 비전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 지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 역사적 예수, 역사적 붇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뚜렷한 역사적 인물에 의해 시작된 종교입니다. 종교에는 창시자 없는 종교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뚜렷한 역사적 존재에 의해 시작되었고, 창시자에 의해 이미 그 종교의 기본 유형과 방향이 결정된 종교입니다. 인간 싯다르타(Siddharta)와 인간 예수(Jesus)입니다. 붇다(Buddha, 佛陀)와 그리스도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타이틀, 당시에 이미 존재했던 호칭들입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입니다.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한 자에 주어지는 타이틀로서, 그리스도는 당시 민중의 기대, 구원의 갈망에 부응한 ꡐ메시아ꡑ라는 뜻이며, 붇다는 각자(覺者),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정신을 차려서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본 자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Sakyamuni), 여래(如來, Tathagata) 등도 모두 칭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이 그러한 호칭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맹목적인 숭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 싯다르타, 인간 예수 혹은 역사적 붇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너무나 오래 이 인간 예수의 모습이 신화와 도그마에 의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신격화되고 절대화된 천상의 그리스도 신앙만이 그리스도교를 지배해 왔기 때문에, 인간 예수를 망각했을 뿐 아니라 거론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 혹은 불신앙으로 터부시 되어왔습니다. 하지만 근대 역사의식과 역사학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성서 연구가 도입되면서부터 오랜 신학적 투쟁 끝에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원점부터 재검토하고 새롭게 조명하는 커다란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예수가 왜 그토록 위대한 존재인지, 왜 그가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고백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앵무새처럼 맹목적으로, 주술적으로 예수 이름만 부르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구체적인 인간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신격화된 그리스도만 남게 됩니다. ꡒ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ꡓ라는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메시지에서 주어가 쏙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한국 교회의 최대 문제는 예수는 모르고 그리스도만 아는 것입니다. 최근 개봉되어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일으키고 있는〈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근본적 문제는 그 폭력성이나 반 유대주의가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의미를 묻지 않고 고통만을 가학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건 예수가 어떤 분이고 또 무엇을 했기에 그런 고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인데, 영화는 고통 자체만을 지독하게 부각시켜 보여주기 대문입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처음부터 부처님을 한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물론 부처님은 위대한 인간이요 스승이고, 또한 예수님처럼 사후에 신비화되고, 초월적 존재로 형이상학화 되었지만 인간으로 간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그가 태어나자마자 ꡒ천상천하 유아독존ꡓ(aggo ham asmi lokassa)이라고 말했다는데, 이는 사실적 진리는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말도 못하는 간난아이가 그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ꡒ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ꡓ, ꡒ나는 세상의 빛이다.ꡓ, ꡒ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ꡓ, ꡒ나는 생명의 떡이다.ꡓ라고 말씀했다지만, 성서학자들은 그것을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역사적 인물 석가모니불과 예수님이 그런 자화자찬 혹은 좀 심하게 말해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불자들에 의해 한 인간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존경받고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삶과 가르침은 지금도 전 세계 불자들에게 생생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역사적 예수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지 않으면 현대인으로서 예수를 제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한 인간, 스승, 지혜의 교사였다는데 이의를 달 불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신의 아들도 아니고 신의 대변자도 아니었으며 오직 한 인간으로서 자기가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만을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오직 그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단해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종류의 권위도 내세우지 않은 겸손한 스승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전통적인 성스러운 사제계급인 바라문 출신이 아니었기에 계급적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돌아가실 때에도 나는 다른 모든 유한한 것들처럼 사라지는 존재이니까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법, 즉 진리를 의지하여 정진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오직 인간의 합리성과 경험에 근거하여 판단할 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ꡐ발견자ꡑ일 뿐이지 그 자체가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간 예수도 그랬는데, 교회가 그를 너무 높인 나머지 진리 그 자체,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 혹은 하느님 자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여하튼 부처님이 깨닫고 전한 법(法, Dharma)은 부처가 세상에 태어나든 안 태어나든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와 인생의 법도요 철칙입니다. 부처는 단지 그것을 깨달아 안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믿거나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이 진리를 따르도록 촉구하신 분입니다.
4. 불교 : 출가 수행자 중심의 종교
불교는 이런 점에서 무신론적 종교,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자력 종교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불교는 신이든 인간이든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구세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 같은 차원에서의 구세주(savior)는 아닙니다. 불교는 누구나 자기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부처님을 무척 존경하고 숭앙하지만 그는 구세주는 아닙니다. 적어도 부처님 자신의 가르침에 관한 한, 불교는 이런 면에서는 약한 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종교입니다. 불교는 본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신이나 구세주, 혹은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 줄 각종 주술이나 의례들(예컨대, 제사, 예배, 성례전, 결혼식, 성년식, 장례식 등 각종 통과의례 등)이 없는 종교였습니다. 나중에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런 것들이 생겨나기는 했습니다만, 불교는 본래부터 신도들을 돌보는 사제(priest)라는 것이 없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철저히 수행승(monk)의 종교입니다. 후대에 더해진 기복적이거나 주술적인 의례들은 본래적 불교에서는 부차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 불교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복적, 주술적인 면에서 불교는 그리스도교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시험 잘 보고, 취직 잘 되기 위해 비는 것에서 ꡐ전지전능한ꡑ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의 막강한 파워를 어떻게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웃음) 하지만 기복적 마음을 없애고, 나만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없애는 데는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앞서는 면이 있습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업자득의 종교로서,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과 수도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재가자와 출가자의 확연한 구별, 즉 이중구조가 불교에는 필연적이었습니다. 스님들의 공동체인 승가(sangha)는 엄밀한 의미에서 출가, 재가를 구분하지 않는 교회(church)와는 다릅니다. 부처는 출가자들만의 수도단체인 승가를 창설하였지 모든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회를 창설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재가자들과 출가승들에게 따로 설법을 했습니다. 차원이 다른 설법을 했다는 말입니다. 재가자들에게는 주로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설법과 현세와 내세의 행복에 대해서 설법하셨고, 출가자들에게는 출세간적 해탈의 길, 완전 무욕의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성직자들과 일반 신도들에게 이중적인 도덕적 요구를 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개신교는 이것을 깨고 만인사제직을 주장한 것이지요.
불교계에서 이 출가,재가의 구별 내지 이중구조가 깨진 단 하나의 예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일본불교뿐입니다. 일본은 13세기 카마쿠라 시대에, 말법(末法, 末世)사상이 풍미하면서 출가수행의 길이 너무 어렵고 절망적이라고 해서 은총의 불교로, 자력수행이 아니라 타력신앙의 종교로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승려도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대처승 제도가 생겼으며, 우리나라에도 일제강점기 때 들어와서 대처승이 생겨나 오늘날 태고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계종은 비구승단입니다.
여하튼 불교 전체로 보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분명합니다. 재가자는 종교적 이등시민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 출가하면 됩니다. 현세에서 못하면 내세에서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 구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육수준이 높아진 현대세계에서는 세계 불교계에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많이 약화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제는 재가신도들도 불경을 직접 읽고 스님들보다 불교에 대하여 더 깊이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또 각종 명상과 수행에 참여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불교는 무신론인가?
그러면 불교가 근본적으로 부처님을 구세주로 믿는 종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믿는 종교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인생을 어디에 정초하려는 종교입니까? 불교는 오직 진리 하나만을 믿고 붙잡는 종교, 철저히 진리 중심의 종교입니다. 진리, 즉 부처님이 깨달은 우주와 인생의 영원한 법도인 다르마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의지처요 기반입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의지하여 사는 종교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법당에서 예불할 때, 불자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불상이라는 물체에 절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2500년 전에 돌아가신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부활신앙에 따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통교하지만 불교에서는 본래 살아계신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추앙을 하는 정도지 살아계신 하느님께 비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영원한 진리이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불은 그것을 우리 무지몽매한 중생에게 깨우쳐 주신 분을 기리는 정도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불교를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ꡐ자력ꡑ 종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진리에 의존하는 종교이지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결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며, 진리가 없다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법의 존재는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인생이 혼돈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일정한 법도와 법칙, 질서가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종교입니다. 단순한 무신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도를 닦아야 구원이 가능하지만, 내가 구원이 가능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은 결코 자명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감사해야 할 사실입니다.
서양에서는 ꡐ무신론ꡑ 하면 회의주의, 비관론, 무엇보다도 인생의 궁극적 의미 추구를 포기한 허무주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최후로 객기를 부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다, 허무주의를 그대로 안고 살자, 이제 신이 죽었으니 내가 초인이 되어서 신 노릇하면 될 것 아닌가 라는 식입니다. 불교는 결코 이런 의미의 무신론이 아닙니다. 불교는 니체적 광기나 객기, 맹목적 의지의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미 존재하는 우주의 철리(哲理)를 조용히 관조하여 거기에 순응하며 의미 있게 살려는 냉철하고 지성적인, 그리고 겸손한 종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불교인들 스스로가 이런 면에서 자기 종교의 성격을 깊게 인식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스로 무신론이라고 공언하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불교 좀 공부했다는 사람은 그리스도교를 염두에 두면서 불교는 무신론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여기에는 서구 불교학자들의 영향이 큽니다. 서구에서 하느님 신앙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구 학자들이 대안적으로 불교에 심취하면서 창조나 최후 심판의 교리가 없는 불교를 무신론이라 단언했으며, 불자들도 이를 맹종하거나 혹은 호교론적 동기에서, 즉 서구의 무신론적 대세를 알고 스스로 무신론의 기치를 내걸고 그리스도교의 대안적 종교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이는 불행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불교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이 법의 존재, 즉 우주와 인생에 일정한 조화와 법칙이 있어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불교를 ꡐ자력ꡑ 종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앞에 겸손할 때, 종교에서 ꡐ자력ꡑ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지, 나 자신의 힘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불교에서는 이 ꡐ나ꡑ라는 것이 허망한 것으로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고 질서가 있고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어서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불교가 긍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생을 진리에 따라 의미있게 살면서, 나아가서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구원의 메시지로, 즉 ꡐ복음ꡑ으로 전파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불교가 인생고를 너무 강조한다고 하여 흔히 비관주의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교는 이런 면에서 낙관주의입니다.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다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다고 선포합니다. 우주와 인생은 알지 못할 수수께끼도 아니고 이해 못할 우연과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질서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세계라는 사실은 결코 당연시 될 성질의 사실이 아니라 신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진리이며,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 삶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좀 더 시야를 확대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 우선 이 세계에는 물리적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비입니다. 이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가 있어서 예측 가능한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존재하기에 물리학이나 자연과학이 가능하고 우리의 생존 자체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뉴턴 같은 고전 물리학자도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리적 법칙과 질서는 당연시 여길 것이 아니며 우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원자, 전자 등 미립자의 세계는 끊임없이 맹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운동의 결과로서 이처럼 조화 있고 아름다운 세계가 가능한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유하기를, 수십만 개의 알파벳 글자를 만들어 통 속에 집어놓고 마구 흔든 다음 확 뿌렸을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되는 확률보다, 맹목적인 것처럼 움직이는 미립자의 운동이 질서 있는 세계를 산출할 확률이 더 적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질서가 있는 놀라운 세계이기에, 우리 같은 인간도 출현하여 이러한 질서를 감상하고 감탄하며, 지금 이렇게 이러한 문제를 놓고 생각도 하는 것 아닙니까?
2) 또 세계에는 물리적 인과관계와 질서뿐만 아니라 확고한 도덕적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든 종교들은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깃들어 있는 질서요 철칙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의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들이 상이한 이해를 하고 있지만, 그런 도덕 질서가 객관적으로 사물 자체에 존재한다는 도덕적 실재론을 의심하는 종교는 제가 아는 한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시간에 저는 윤회세계를 지배하는 업보의 법칙을 논하면서 이미 이 점을 언급했지만, 이 세상이 선과 악에 따라 응분의 보상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물리적 인과관계를 넘어서 도덕적 행위가 물리적으로 상응하는 보상을 초래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무신론자들은 결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도록 하는 신을, 우주의 어떤 도덕적 힘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가 아주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린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과학은 우주와 인생에 도덕적 법칙, 도덕적 인관응보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과학적 진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과학자가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믿는 불자나 신앙인이 있을지 모르나, 업보를 과학적 진리로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직관이고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도덕적 법칙과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당연시할 사실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주어진 우연도 아닐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 힘을 가진 우주의 근원적 실재에 의해 우주와 인생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이 모든 유일신 종교, 심지어 도덕적 하늘(天)을 믿는 유교의 사상입니다.
3) 조선조 우리 선조들의 사상을 지배한 성리학에서는 우주 만물과 인간을 설명하는데, 理와 氣 두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왜 이 두 개념이 필요합니까? 기 하나만으로,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자들, 현대 유학자들은 기에 많이 주목하지만, 기가 맹목적 움직임을 하는 에너지라면(물질), 도대체 어떻게 우주만물에 질서가 가능한지 그 신비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기에 일정한 운동의 방향과 질서를 잡아주는 리가 있어야 만족한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 하나만으로는, 즉 유물론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일원론은 불교사상과 비슷하게, 우주의 조화와 질서, 아름다움과 신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지 자명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이미 그런 것으로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더 따져 묻지 않습니다.
4)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우주와 인생의 철리(哲理)입니다. 우주와 인생은 우연이나 혼돈이 아니며 무의미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법칙과 이치가 존재해서, 그것을 파악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 자체를 하느님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주어진 이 영원불변의 법을 깨닫고 거기에 따라 수행하는 불교를 단순히 자력 종교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경박한 생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법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그 신비에 대하여 오히려 경외감을 느끼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진리가 있기 때문에 발견했지 없는 진리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비진리보다 우선하고, 참이 거짓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에 따라 살려는 사람은 누구든 큰 의미에서 유신론자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ꡒ진리가 하느님이다.ꡓ라고 했던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이 아름답기는 하나, 한 가지 맹점이 있는데, 우주 만물에 내재하는 법칙과 질서와 조화의 원인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동양적 자연주의의 허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굳이 하느님이라는 초자연적 실재를 상정하여 자연의 궁극적 원인으로 파악하여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초자연의 엄격한 구별은 지양되어야 할 과거 그리스도교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세계가 무질서와 혼돈 대신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성립되고 또 물어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도대체 이 세계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이 있는가라는 존재의 신비에 대한 라디칼한 질문도 제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중에 불교의 연기(緣起)사상을 논할 때도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불교의 연기론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모든 것을 파악하지만, 수직적 관계, 사물의 존재의 기원이나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불교를 좋아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불교 사상만으로는 만족 못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강연을 듣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왜 제가 불교로 개종하지 않는지를 물었는데, 그 대답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나는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교 사상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신관이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불교는 조잡하고 유치한 신관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만물에 법칙, 질서, 조화와 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러한 우주와 인생의 철리를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지혜와 지성, 그리스 사람들이 로고스(logos)라 부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한없이 신비스러운 사실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능력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함부로 자력을 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무엇이든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the given)은 다 ꡐ은총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은총의 주인공을 하느님이라 부르든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ꡐ자연ꡑ, 즉 문자 그대로 ꡐ저절로 그렇다ꡑ,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라고만 너무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ꡐ자연ꡑ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게으른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서구 사상, 그리스 철학이든 그리스도교 형이상학에서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 ꡐ아르헤ꡑ(arche)라는 것, 혹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초자연적 원인까지 추구해 들어가서 신을 상정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한계(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에)를 인정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 궁극적입니다. 그 이상의 이른바 ꡐ초자연적ꡑ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에서도 결국 리 중의 리인 태극 같은 것을 만물의 궁극적 원인 내지 원리로 설정해서 세상만물을 설명하려 했으나, 태극을 ꡐ초자연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불교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ꡐ초자연ꡑ(supernatural)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창조주 개념을 떠나서는 이해 안 되는 개념입니다. 피조물을 지은, 피조물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초자연이라고 불렀으며, 그런 궁극적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을 서양에서는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불러서 거의 유물론이나 무신론과 동일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양의 자연주의를 그런 서양의 무신론적 자연주의와 혼동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전혀 종류가 다릅니다. 동양적 자연주의에는 창조주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깊은 영성, 종교성이 있는 반면, 서양의 자연주의는 신을 부정하는 맥락에서 나왔기 때문에 단순히 무신론, 유물론,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흘러 영성이나 종교와는 아예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것이 서양의 근본적인 종교적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환경위기의 사상적 뿌리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동양의 자연주의를 무신론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동양에는 무신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무신론은 역설적으로 바로 하느님과 세상, 창조주와 피조물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서양 그리스도교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창조주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피조물로만 설명하다 보니 무신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주어진 은총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 자연인 한 은총이며 신비입니다. 이 점을 불교인들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주의 질서와 조화, 일정한 법칙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탐구하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든 (과학자든 예술가든 철학자든 부처님이든)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결코 회의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처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부처님의 사상, 종교, 철학은 약한 자들, 위로를 원하는 자들, 신이든 구세주든 다른 누군가 있어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력하고 냉정한 종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불교도 부처님 이후 역시 대중들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여 인도의 다양한 대중적 신앙을 흡수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는 불보살에 대한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스스로 대중들의 현세적 욕구와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인정했으므로, 재가자들에게는 힌두교나 각종 토착신앙을 그대로 허락했습니다. 적어도 묵인했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그런 예를 보였습니다. 유골(사리) 신앙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재가자들에게만 허용했습니다. 부처님은 대중신앙이나 토착신앙을 무지한 짓으로, ꡐ우상숭배ꡑ로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다신신앙이나 신령숭배에 관한 한 불교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다만, 우주의 궁극적 원인이요 주재자인 인격적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부인합니다. 유일신 신앙과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배치됩니다. 어떻든, 불교도 재가자들에 관한 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힌두교 신앙 혹은 각종 토착적 신앙과 공존 내지 습합되어 존재해 왔으며,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의 토착 무속 신앙인 본(Bon)이라는 신앙과 공존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무속신앙이나 토속신앙 (우리나라의 절이 산신각 등 각종 신앙을 수용하듯이), 그리고 유교, 도교 등과 공존해 온 것입니다.
붇다와 예수는 한 역사적 존재 이상입니다. 붇다와 예수의 삶은 만인이 본받아야 할 보편적 전범이며 영원한 원형(eternal archetype)입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작용해 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야기는 수많은 인간을 감화하고 변화시키는 힘이었으며 예수님의 이야기도 물론 복음서를 통해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는 사찰에 팔상도(八相圖)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혹은 팔상전이라는 건물도 있습니다. 강도솔상, 탁태상, 출생상, 출가상, 항마상, 성도상, 전법륜상, 입열반상이라 불리며 부처님의 생애의 중요한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6. 붇다와 예수의 공통점
붇다와 예수는 대조적 삶을 사셨으면서도 공통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1) 두 분 다 가정을 버리고 유랑자, 떠돌이 생활을 했고(출가사문 혹은 떠돌이 예언자)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2) 철저히 독신, 무소유, 무욕의 삶을 살면서 오직 열반과 하느님 나라라는 초월적 가치, 구원의 세계, 실재를 위해 헌신한 삶을 사셨습니다.
3) 두 분 다 절대적 평화주의자로서 증오와 폭력을 반대했으며, 무차별적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고 실행한 자였습니다.
4) 두 분 다 지혜의 교사로서 사람들의 탐욕과 권력의 허상, 허위의식과 환상을 깨우치고 인생의 실상을 보게 한 자들입니다. 둘 다 비유의 명수로서 초월적 구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비유로써, 짤막한 경구로 설명한 지혜의 명 교사였습니다.
5) 두 분 다 어떤 기존 종교계에서 어떤 공식적 직분을 가지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가였으며, 대중적 언어, 속어를 사용하여 누구에게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6) 무엇보다도 그들의 권위는 어떤 학습이나 교육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체험과 거기서부터 오는 강한 카리스마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7) 두 분 다 이론가나 철학자가 아니라 대중적 실천가였으며, 어떤 비밀스러운 교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린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8) 두 분 다 마음의 회개, 전향, 깨달음을 강조했으며 내면의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보았고, 사회 질서나 제도, 규범이나 규율, 혹은 외양적 행동양식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처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9) 마지막으로, 두 분 다 당시 종교전통을 개혁한 분들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교의 전통,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각기 열반과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초월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기성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존재들입니다.
이런 점들만 보더라도 두 스승에게 상당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의 삶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분은 귀족 출신이었으며 다른 한 분은 농민(아니면 목수)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차이는 한 분이 예언자(prophet) 같은 존재였고 다른 한 분은 출가 사문(sramana), 즉 출가 수도자였다는 데서 옵니다. 예언자의 드라마틱한 비극적 삶과 현자의 평온한 삶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비극적 운명은 강대국 사이에서 항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끝없는 고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급박한 정치사회적 상황에 기인했으며, 이에 비해 부처님의 평화로운 삶은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당시 인도 사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이라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갠지스 강 유역의 비옥한 자연환경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하튼 부처님과 예수님의 죽음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분은 80이 되도록 장수하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 반면, 다른 한 분은 30을 얼마 안 넘기고 십자가의 극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평온한 열반상과 십자가상이 이를 잘 말해주지요.
그러나 출가사문과 예언자의 삶을 너무 대조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뛰어난 지혜의 교사였습니다. 특히 복음서에 포함되어 있는 그의 어록(Q 자료)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 예수 연구는 지혜로운 인생의 교사로서의 예수님 모습을 많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세주 예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너무 숭상한 나머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인생의 참 모습, 참 된 길을 가르쳐주시던 지혜의 교사 예수님의 지혜와 통찰, 가르침과 사상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삶과 가르침 전체의 자연스러운 결과, 완결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 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사랑의 행동이 너무 과격하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샀고, 인간과 인생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번득이는 통찰과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그의 지혜의 말씀이 인간의 허위의식과 환상을 여지없이 깨우쳤기 때문에 미움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의 원천은 그가 '아빠'라고 부른 그의 단순하고 친밀한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왔으며,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넓은 마음을 깊이 인식하는 데서 왔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이고 전복적인 지혜는 이로부터 왔습니다. 부처님의 경우는 깊은 수행과 명상을 통해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여실히 자각하는 데서 왔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과의 직접적 대면을, 부처님은 인생의 실상, 진리와의 적나라한 대면을 통해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분은 우리를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하고 진리와 직접 대면하게 하여 인생의 실상을 깨우쳐 주고 우리들의 허위의식과 환상을 깨뜨렸습니다. 뭔가 집착하고, 뭐를 만들고, 나라는 자아를 벽으로 둘러싸 방비하려는 원초적 이기심, 자기중심성의 거짓 안전을 깨뜨린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빠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분이었고, 부처님은 무상한 세계에서 욕망에 집착하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도 깨달음, 자각, 각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혜안(慧眼)에 못지않게 예수님의 영안(靈眼)도 중요합니다.
성서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 어두움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바른 인식과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지요. 교회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말씀이지만, 마태 6: 22-23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물론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 눈,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빛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며,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전 존재,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안이 없는 자는 어둡고 미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각성을 촉구하는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를 담고 있는 법구경의 말씀과 비교하면서 보겠습니다.
1)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인생의 토대인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고, 무상, 무아임을 모르는 무지와 탐욕의 삶을 경고하는 부처님의 지혜와 같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지 아니면 돈을 사랑하던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법구경에도 "하나는 지상의 재물을 추구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열반을 추구하는 길이다. 부처를 따르는 자들은 이것을 생각하고, 명예를 위해 애쓰지 말고 자유를 위해 애 쓸지어다"(DP 5:75) 라는 말이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법구경에도 어리석은 자는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아들들이다.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이런 식으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괴롭힌다. 그는 자기 자신의 소유주도 아니거늘, 어떻게 자기 아들들과 자기 자신의 소유주이겠는가?"(5:62)
4) 형제의 작은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 눈의 대들보를 보라는 말씀과 같이, "다른 사람의 허물들을 생각하지 말라, 그들이 한 것이나 하지 않은 일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의 죄를 생각하라, 내가 한 것이나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DP 4:50).
5) 원수를 어떻게 대할까, 악을 어떻게, 분노를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사하게, 부처님은 "노여움을 평화로움으로 극복하라, 악을 선으로 극복하라. 비열한 자를 관대함으로 극복하라,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를 참으로써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DP 17:223). "그가 나를 모욕했다, 그가 나를 해쳤다. 그가 나를 망하게 했다, 그가 나의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미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미움은 미움에 의해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원한 법칙이다."(DP 1:3,5)
6) 불안, 근심, 걱정, 특히 있지도 않은 미래의 걱정을 사서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을 보라,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오늘의 걱정은 오늘에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도 "과거를 찾지 말라, 미래에 너 자신을 잃지 말라.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