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인생론으로 본 박넝쿨의 교훈”이라는 제목입니다. 기원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중엽에 활동하던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요나서를 통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고 그것이 싫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 만나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회개하고 다시 구사일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외쳐 니느웨 사람들이 듣고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회개한 것을 보고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요나였습니다. 자기는 니느웨가 심판 받기를 바라고 외쳤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깨닫고 모두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이 앗수르라는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얼마나 악한 나라입니까? 그러기에 요나는 이 나라가 아주 멸망 받길 원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통분한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취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의 교훈을 통하여 요나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치십니다. 너는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사라진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늘 어찌 이 큰 성읍 니느웨의 백성들을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박넝쿨에서 우리 인생론을 봅니다.
1. 무가치한 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랬습니다. 여기 박넝쿨이 무엇인가 비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6절을 보면 요나가 이 박넝쿨을 보고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나무 그늘 밑에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막힌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사막에서 박넝쿨의 그늘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서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락과 물건과 육체가 다 이 박넝쿨과 같습니다. 있다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취하려고 사력을 다하며 그것을 최고의 행복이요 전부처럼 여기고 그래서 물질 명예 권세 쾌락을 붙잡으려고 좇아 달려갑니다. 인생의 목적이 세상의 것인 양 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사람을 살해하고 친족을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가치관의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덴마크에 있는 큰 상점에 도둑이 침입했는데 이상한 것은 상점의 어떤 것도 가져가지 않았답니다. 아침에 점원이 문을 열었을 때 모든 상품은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도둑들은 그 상점의 모든 물건의 가격표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수천 달러 다이아몬드 목걸이에는 2달러의 가격표가 붙어있었고, 수십 달러 가죽 신발에는 50센트의 가격표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센트에 불과한 연필의 가격은 75달러나 되었고, 아기의 딸랑이 장난감에는 5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있었습니다. 도둑들은 어떤 것도 훔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둑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훔쳐 갔습니다. 그들은 상품의 본질적인 가치를 훔쳐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지금 이 세상은 가치관이 심히 혼란된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가치가 없는지 모르고 너무나 일시적이고 무가치한 것을 위해 일생을 보내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요나서는 무가치한 것을 갈망하는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세상의 기쁨을 상실할 인생의 모습입니다.
7절에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좋던 박넝쿨이 이튿날 일어나 보니 시든 것입니다. 벌레가 박넝쿨의 밑동을 다 잘라버린 것입니다. 벌레들 보면 참 얄밉습니다. 잎을 먹을 만큼만 먹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벌레들이 작물의 순을 잘라먹거나 아래 밑동부분을 잘라먹습니다.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하게 하거나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낙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드라이브로 비유하면 10대는 그 속도감이 시속 10마일입니다. 20대는 20마일입니다. 이때는 시간이 더디 가서 언제 커서 어른이 될까 그게 걱정입니다. 그러나 30대에는 시속 30마일, 40대는 40마일, 50대는 50마일 제법 빠른 속도로 갑니다. 그러나 60대는 60마일 70마일 80마일 90마일 100마일, 그래서 10년 지나가는 것은 어제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90:10에 고백하기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날아간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도 전도서 12장에서 노년기를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라고 말하면서 인생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육체적 정신적 노쇠),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폭풍우 즉 각종 슬픈 일을 경험함),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기력이 딸려 손발이 떨리는 현상),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허리나 다리의 힘을 쓰지 못함),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이가 빠짐),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눈이 어두워짐),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식욕이 없어짐),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청력이 쇠해짐),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신경이 민감해짐),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발성기관이 변함),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숨이 가파짐),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여행을 두려워함),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머리가 은색으로 변함),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기력이 쇠해짐), 원욕이 그치리니(본능의 욕구도 소멸됨)” 했습니다. 이게 우리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3. 육체의 최후를 맞이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8절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여기 뜨거운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 대단한 열기를 가지고 있어서 숨쉬기까지도 곤란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 동풍이 불어 그나마 남은 넝쿨마저도 다 말려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늙고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40:6-8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날이 옵니다. 야고보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했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하루의 날에 비유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나는 것이 탄생이요, 상쾌한 아침은 짧은 청년기를 맞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영원한 내세를 보지 못해서 그렇지 현세적으로만 본다면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습니다.
인생에 대한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나그네 한 사람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코끼리 한 마리가 나그네를 밟아 죽일 듯한 기세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달아나다 다행히 우물을 발견하고는 우물로 숨는데 다행히 우물은 비어 있었고 마침 우물 안으로 칡넝쿨이 한줄기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재빨리 넝쿨에 매달려 우물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넝쿨에 매달린 채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가만 보니까 검은 쥐와 흰 쥐가 넝쿨을 갉아먹어 그 넝쿨조차 곧 끊어질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또 보니 설상가상으로 우물 안에는 독사 네 마리가 사방에서 나그네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고, 밑바닥에는 독룡이 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우물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가만있자니 독사에 물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꿀방울이 나그네의 입술에 똑똑 떨어집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그 달콤한 꿀물에 혼이 팔려 지금까지 닥쳤던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을 잊고 꿀물만을 빨고 있었습니다.
이게 인생의 모습입니다. 쫓아오는 코끼리는 세월입니다. 흰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입니다. 독사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꿀방울은 세상의 일락과 쾌락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을 다 상실할 날이 오는 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것이 전부인 양 달콤한 쾌락만을 위해 세상 것을 목적 삼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성경은 박넝쿨의 교훈에서 우리 인생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인생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고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퓐? 어떤 일이 있어도 무가치한 것을 추구하다 실망하는 그런 인생,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불쌍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날로날로 새롭고 보배로운 새 생명 속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소망스러운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