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설명하기가 부족한 곳.....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그곳, 계림을 다녀왔습니다.
여기에 그 기록을 남기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계림은 중국 남부지역에 위치한
廣西壯族自治區의 동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마치 미국을 향해 눈을 부릅뜬 한 마리의 수탁 모양의
모습인데.......
흔히 계림을 이러한 수탉 아랫배 속에 들어있는 타원형의 계란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수탉의 뱃속에 들어있는 계림이 사시사철 뜨거울수 밖에 없는거 아니냐고
우스개 소리로 말하곤 한다고 한다.
(실지로 계림 시내를 거닐다 보면 안내 표시판에 이처럼 수탉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지도를 볼 수 있다.)
이곳 광서장족자치구는 漢族을 비롯하여 壯族, 瑤族, 苗族, 동족, 모로족, 毛南族,
回族, 京族(베트남족 조상), 彛族, 水族, 흘로족등 11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1년 평균기온은 17 ∼ 23도로서 1월중 가장 추운 겨울에도 7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곳이다. 또한 연중 평균 강우량이 1900㎜로 아열대성 습윤한 계절풍기후이다.
계림은 광서자치구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古代에는 百越지역에
속해 있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계수나무 숲이라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수많은 계수나무가 심어져
있는 도시로 유명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진안 마이산 모양의 낮고 작은
10만여개의 산봉우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또한 리강의 고기잡는 새 가마우찌를 빼놓을 수 없으며,
古都의 모습답게 곳곳의 기암괴석위에 새겨진 수많은 石刻으로 유명하여
옛부터 이곳을 "桂林碑海"라 부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지역의 특산물로는 고추장, 두부, 三花酒가 있다.
桂林山水甲天下란 계림 산수가 천하 제일이라는 의미이고,
山靑水秀洞奇石美란 산은 푸르고 물은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기이한 동굴들이
많을 뿐만아니라 바위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의미로서 이여덟글자가 곧 계림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표현한 말이라 하겠다.
또한 첩체산 동굴 입구에 새겨져 있던 '願作桂林人, 不願作神仙'이란 뜻은 계림에서 살아
가는 사람이 될 망정 계림을 떠난 다른곳의 신선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서 계림을
표현한 적합한 글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하루 일정별로 내가 본 계림과 중국인, 중국인의 생활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여행해 보기로 합니다.
8월 12일 밤 10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중국 남방항공소속 CZ3030 항공기가 3시간의 비행끝에 드디어 계림에 도착하였다. 공항 출국대를 지나 청사를 빠져 나오자 마자 사방의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桂林'이라는 빨간 네온 싸인만이 한눈에 가득 들어오고, 순간적으로 이곳이 아열대 지방이란 사실을 금방 느낄수 있을 정도로 고온 다습한 모습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작년 추석의 북경 여행에 이은 두번째 중국 방문이기에 비록 맨처음 중국땅을 밟았을때의 그러한 환희와 흥분은 느낄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중국땅이란 사실에 설레이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리산님을 비롯한 23명의 우리 일행은 박차남이라는 조선족 여성 안내인의 안내를 받으며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곳 계림비행장은 개장한지 2년여밖에 되지 않았기에 중국에서도 가장 최신식 비행장이란 말과 함께 계림의 지리와 역사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계림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평균기온이 28도, 강우량이 1900㎜로서 11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고, 10만여개의 산봉우리가 있다는등....
그리고 이곳 계림에는 우리와 동족인 200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11개의 소수민족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어도 1,000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어야 소수민족으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함)
40여분을 고속도로와 이강이 흐르는 계림 시내를 가로질러 우리일행은 밤 11시 30분경 桂林觀光酒店에 도착하였고 각자의 방을 배정받자 마자 여장을 풀었다.
허기도 채울겸해서 12시 20분경 1층 로비에 다시 모인 일행은 늦은시간이라 호텔밖에는 요기할 만한 장소가 없다는 종업원의 말에 속아 호텔내에 있는 간이주점에서 맥주겸 케익, 샌드위치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각자 소개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23명의 첫 번째 공식적인 대면의 장소가 마련된 셈이다. 자기 소개가 끝나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러 일들을 화제 삼기도 하며 나이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언니 아우가 정해지고 노총각, 노처녀가 탄로 나면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가고 3박 4일간의 여행이 매우 재미있으리라는 예견속에 1시간 가량을 그곳에 머무른 후 내일을 위해 각자의 침실로 되돌아 간다.
계림에서의 첫날밤에 미련이 남은 나를 비롯한 몇몇은 울창한 계수나무 가로수가 가로등에 훤히 드러나보이는 호텔앞 거리를 배회하다보니 호텔 바로 옆에 간단히 요기 할 수 있는 포장마차 형식의 길거리 시장에서 그때까지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호텔종업원의 철저한 직업의식에 쓴웃음을 지으며 구멍가게에 들러 간단한 간식거리몇개를 집어들고, 난생 처음 한근에 2원 50전 하는 망과라는 과일 두근을 사들고서 호텔로 돌아와 계림의 첫날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8월 13일 새벽....
역시 낯설은 지역인지라 5시도 채 안되어 눈이 뜨여지더니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였다. 날이 밝아 창문을 열어제치니 어젯밤엔
볼 수 없었던 수백, 수천개의 작은 산봉우리들이 저멀리 한없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모닝콜이 울리고 잠자는 열웅이를 일깨운 후 대충 짐을 정리해 놓고
1층식당에서 첫 아침을 먹는다.
부페식 식단에는 빵에서부터 중국 음식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피곤한 탓인지 특이한 입맛을 느낄새도 없이 대충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친다. 이곳 쌀은 말 그대로 입으로 불면 날아갈 듯한 푸석푸석한 모습에다
딱딱하기까지하여 아침 식사로는 매우 부적합하다는 생각과 멋모르고 마파두부를
한입 가득 넣은 최성우씨는 마치 한국의 젓갈을 한입 가득 넣었을 때 느끼는 짠맛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계림의 특산물인 이곳 두부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두부가 아니라 한국의 젓갈을 조금씩 먹듯이 젓가락으로
떼어먹어야 했었는데.....
어젯저녁 차안에서 안내원으로부터 이곳 두부를 먹을때에는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 두부가 그 두부인줄 어찌 알았으랴? (^_^)
식사를 마친후 우리 일행은 아침 8시경에 버스에 몸을 실고 첫 관광길에 나섰다.
버스에 올라보니 어제 우리를 안내했던 박차남씨는 보이지 않고 대신 南씨성의
새로운 안내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스로 南양이라고 소개한 이 안내원은
어제밤 우리를 안내했던 박차남씨가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교체되었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아리산님으로부터 교체되게된 진짜 이유를 들을수 있었다.
높은 건물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은 계림시내의 계수나무 가로수들을 지나치며
마치 숫탉이 암탉을 뒤쫒는 듯한 형상의 鬪鷄山, 코끼리코 형상의 象鼻山을
지나가며 첫 관광지 伏波山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제일 높은 산이라고 해야
고작 200여 미터 밖에 안되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 굳이 산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산도 아니지만 산이 온통 석회암의 바위로 되어 있고 90도 가까이 깍아지를듯한
바위산인지라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곳 계림에는 10만여개의 산봉우리가 있으나 사람들이 오를수 있는 산이야 고작
3개밖에 되지 않는다 한다. 이곳 복파산이 그중 하나로서 맨 마지막날 오르게되는
疊彩山, 그리고 이번에 올라보지 못한 獨秀峰이 그것들로 사람들이 오를수 있는
유일한 산들이라 한다.
복파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복파산 바로 아래에 리강이 흐르고 있고 지하에는
리강으로 통하는 還珠동굴이 있는데 동굴 벽면에 양각된 당송시대의 불상을 비롯하여
옛 文人들이 이곳 복파산에서 유유자적 했음직한 발자취들이 엿보이고, 바위에 새겨진
각종 서체의 싯귀를 비롯한 명문들이 벽면에 가득하다. 복파장군이 단칼에 내리친
칼솜씨를 볼 수 있는 밑기중이 잘려나간 돌나무 기둥옆에는 이곳 주민들이 10여 미터
아래의 리강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고, 바로 뒷면 벽에는 당나라
불상과 송나라 불상이 확연히 구분되는 불상들이 바위에 양각되어 있다. 옛 선인들의
숨결을 가슴깊이 새긴후 동굴 밖으로 나와 지상계단을 통해 복파산 정상에 오르자
이곳이 계림이구나 할 정도의 아름다운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우 두, 세평 남짓한
정상에는 우리 일행이외에도 대만, 홍콩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겨우 겨우 어렵게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밑으로 내려오니 종이공예 가위솜씨가 아주 훌륭한 재주꾼
아저씨가 10원(한국돈 약 1,300원)을 받고 관광객의 얼굴모습을 색종이에 오리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마켓팅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바로 한국 관광객 얼굴 옆
에 가위를 대고 다짜고짜 그사람 얼굴 모양의 색종이를 오리면서
"10원, 한국돈 1,000원"을 외쳐된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첫눈에 우리가
한국 관광객이란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인 관광에게는 일본말로 대만
관광객에게는 중국어로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율곡선생(천원권 지폐)은 이곳에서의 인기가 상당함을 실감할 수 있었고,
이후 대부분의 관광지역에서 "한국돈 천원, 한국돈 이천원"하는 소리를 계속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한국돈 천원"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나도 중국을 여행할때에는 반드시 빳빳한 천원짜리 한국돈 2, 3만원정도를 소지하고 나갈 생각이다.)
복파산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아침에 지나쳐왔던 상비산으로 향했다. 큰 길에서
10여분을 걸어들어가야 하는데 도중에 잘 가꾸어진 넓다란 잔디밭을 지나치다 보면
강아지만한 작은 원숭이를 손에 든 아저씨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인민폐 5원을 받고
원숭이를 사진촬영 모델용으로 빌려주기에 바쁘다. 강건너 상비산을 배경으로 원숭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라는 얘기인데 대만, 홍콩 사람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이원숭이는
아주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주인이 알려주는 포즈를 훌륭하게 연출해 낼줄 안다.
우리일행도 여럿이 이원숭이와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원숭이를 손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으면서 두려움에 호들갑을 떨던 메이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계림의 대표적인 관광지역이라 할 수있는 상비산은 마치 코끼리가 리강의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해서 상비산이라 하는데 상비산 앞을 흐르는 리강의 맑은
모습에 놀랄수 밖에 없었다. 비록 계림이 중국의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도시를 흐르는
강물이 이정도로 깨끗하다는 사실에 부러움 절로 나오고 이러한 맑은 물이 앞으로도
영원히 흐르기를 바랄뿐이다.
이곳 상비산은 계림을 소개하는 관관책자에 반드시 등장하는 대표적인 계림의 산이다.
우리일행은 시간관계상 직접 코끼리코를 만지보지는 못하고 강건너에서 기념촬영으로
대신하고 陽朔으로 떠나기 위해 관광차에 올랐다.
계림에서 양삭까지의 거리는 대략 1시간 40분 거리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리강은 계림에서 양삭을 거쳐 심강, 西江을 지나 우리가 흔히 부르는 珠江을
통해 광동만까지 흘러간다. 양삭은 縣級 행정도시로서 地級 행정도시인
계림시에 비해 작고 조용한 시골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시골
면소재지 정도의 소읍이다. 양삭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우리 일행은 전날밤
박차남 안내원으로부터 들었던 계림의 역사와 특징들을 南양으로부터 다시
듣게된다. 안내원의 말처럼 한번 눈감았다 뜨고나면 거짓말처럼 천여개의
산봉우리가 휙하고 지나간다. 우리나라 2차선 국도와 비슷한 도로변에
이제 막 이모작이 시작된, 한 두뼘정도 크기로 벼이삭이 자라고 있는
농촌의 풍경들이 지나가고, 어느 농촌마을엔 마치 우리나라 담양에서 본듯한
수많은 죽세공품이 진열되어있는 죽세공 상점들도 지나쳐간다.
고만고만한 모습들의 산봉우리를 지나치고 일행들 하나 둘씩 지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거리가 떨어진 안내원 南양이 차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행에게 노래
한곡조를 부탁하고.....
남상원씨의 '소양강처녀'를 시작으로 시작되는 우리일행의 노래 솜씨는 '노래방
곡조'에 익숙한 탓인지라 노래가사를 기억하지 못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노래
를 부르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가운데 오직 나이가 가장 어린 초등학교 4학년
'영식'이 만이 '바둑이 방울'을 완벽하게 불러내어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되고.....
어제밤 사놓았던 망과를 잘라서 한조각씩 돌리는데 맛이 달콤하고 독특한 향이 특이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장난기 어린 차돌은 입을 벌리고 낮잠에 곯아떨어진 윤기,
장국영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고......
12시 40분경...
1시간 30분을 넘게 달려 양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치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터를 연상케 하는 골목들을 지나쳐 리강의 관광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선착장에 가는 도중에도 이곳 시골 할머니들이 '10원, 한국돈 천원'을 외쳐대는데
어느 할머니는 포도송이 같이 주렁주렁 과일이 달린 두 개의 가지가 손에 들려있
고, 어느할머니는 우리나라 엽전 모양의 둥그런 기념품이 두 손에 들려있다.
이미 차안에서 안내양으로부터 가급적 이곳 물건들을 사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터
라 우리 일행은 아무 대꾸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친다.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에 도착하니 선착장뒤 커다란 바위위에 黃云이라는 낙관
이 찍힌 가로 3, 4미터, 높이 2. 3미터의 '陽朔'이라는 커다란 붉은 글씨 두글자가
쓰여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우리일행도 기념촬영
을 마친후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 1층에는 식사가 가능한 5~60석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고 2층겸 갑판에는
리강을 유람하기에 알맞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빨리
도착하였기에 20여분을 기다린후 2, 30 여명의 대만 관관객과 함께 리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선상유람이 시작되었다.
출발하자마자 10여가지의 중국 음식이 나오는데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데다 예정보
다 약간 늦은 점심인지라 나와 열웅이 아리산님 가족, 남상원씨가 함게 앉은 우리 식탁
에는 밥만 세그릇(쌀밥만 별도로 나오는 매우 큰 대접)을 비우고 아리산님이 마련
한 과일로 후식을 마친후 모두 갑판위로 올라간다. 강폭이 한강의 절반정도인 리
강위로 수많은 관광 유람선이 오가고 있고 유람선위에서 웃옷을 벗어제낀체 썬팅을 즐기는 듯한 유럽인 남녀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강줄기 양옆으로 수많은 산
봉우리들이 연이어 있고 강에서 고기잡는 어부들 모습도 보인다.
쾌청한 맑은 날씨속에서 우리들 눈에 비치는 산봉우리의 모습도 가지가지이다.
올록볼록 마치 여인네의 앞가슴 모습같은 부드러운 봉우리가(차돌 생각) 있는가
하면, 건장한 사나이의 팔뚝에 불끈 솟아오른 이두박근 삼두박근 같은 힘찬모습의
봉우리도(칭저우 생각) 시야에 들어온다. 또 어느곳엔 들쑥날쑥 제멋대로 자란 잇
빨처럼 반드시 교정이 필요한 치아모양의 산봉우리(남상원씨 생각)등......
여러가지 모양의 봉우리들이 리강 양옆으로 쭈욱 나열되어 있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계림의 산봉우리는 비가 그친후 안개가 피어나면서 햇빛이
비춰질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날이면 마치 산봉우리 사이에서 금방
이라도 신선이 나타날 것만 같은 신비로운 모습이라고 한다.
특히 이곳의 고기 잡는 새 '가마우찌'도 가끔씩 눈에 들어오는데 가마우찌는 이른
새벽이나 석양무렵에 고기를 잡기 때문에 우리가 유람하는 시각에는 고기잡는 모습
을 볼수 없었다. 또한 강위에는 많은 물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의 물소는
한국의 황소만큼이나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며,
물소가 들녘에서 일할때는 다른 잡풀을 뜯어먹으면서도 사람이 심어놓은 곡식은
절대로 입을 대지 않기 때문에 어느 소수민족은 물소를 매우 신성시하여 결혼을 할
때는 지금처럼 현대화된 시대에도(설령 자가용이 있다해도) 물소를 타고 시집을 간다고 한다.
리강 곳곳에 선상가옥이 눈에 띄는데 이들은 거의 365일을 배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고기잡이로 살아간다고 한다. 가마우찌도 이들 선상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르고 있을터이다....
또한 리강에 물소떼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오리들이 떼를 지어 거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30여분 리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유람선이 U턴을 하여 돌아오는 길에는 이곳 소수민족인 장족 처녀의 구애장면을 보게된다. 장족의 풍습에 의하면 매년 음력 3월 3일에 처녀와 총각이 모여서 줄을 지어 서로간에 노래를 부르며 접근하는데....
처녀쪽에서 맘에 드는 총각을 보면 몇가닥 줄이 달린 채색공을 그남자를 향해
던지게 되는데 이때 공을 던진 처녀가 맘에들지 않으면 남자측에서는 채색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여자가 맘에 들면 공에 달린 줄을 매듭지어 여자에게 되던진후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서 처녀쪽 부모에게 결혼 허락을 득하기 위해
처녀집에서 3년간 농사일을 공짜로 돌봐주어야 하는데......
여자쪽 부모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 약혼은 곧 파혼에 이르게되고 파혼 당한 남자는 다음해 3월 3일에 또다른 여자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렇게 때문에 장족은 평생 장가못가고 홀로사는 남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곳에서 어느 장족처녀를 태운 탄 배가 우리를 향해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는데 마침
우리일행중 남상원씨가 그 채색공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남상원씨에게 금년 에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듯...)
채색공을 받은 관광객은 장족처녀가 긴장대를 내밀면 기념으로 10원 정도의 돈을
장대에 넣어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갑판위 또는 갑판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가며 1시간여의 선상유람을 마치고 맨처음 배를탓던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이때쯤해서 내가 가지고 간 카메라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고.....
혹시 건전지에 이상이 있을까해서 길거리에서 건전지를 사가지고 교체하는 바람에
우리일행을 길거리에서 10분간 기다리게 하는 우를 범하면서....
차를 타지않고 양옆 상점들이 나열되어 있는 시장골목같은 골목길을 10여분 걸어서
3시 30분경 우리가 오늘밤 묵게될 '百樂來度假飯店(PARADISE RESORT HOTEL)에 도착
하여 여장을 풀었다.
호텔에 들어서자 마자 샤워를 한다. 오늘 벌써 세 번째 하는 샤워다. 이곳은 지금
대낮의 온도가 30도를 오르내리는 아열대 지역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한번, 아침식사후 호텔을 출발하기전 또 한번, 그리고 지금 또 다시한번.
1시간여를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한후 4시 40분경 모두들 1층에모여 다시금 관광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2인용 삼륜차를 타고 하이킹에 나선다. 마치 영화에서 본듯한 2차대전 당
시 독일병정들이 타고 다니던 모양의 군용오토바이처럼 옆에 두세사람이 앉을 수 있
는 의자가 달린, 출고된지 상당히 오래됨직한 삼륜차량이다.
우리일행을 태운 11대의 삼륜차 일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도로 양옆 산봉우리
사이로 논농사가 잘 발달된 국도를 10여분 정도 달리니 古榕樹라는 1,400여년 된 나무
가 나온다.
이곳도 관광지중의 하나로 당연히 입장료를 내어야만 관광이 가능한 곳
이다. 고용수는 나이 못지않게 매우 덩치가 큰나무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위로 나
무줄기가 자라나면서 사방으로 나무가지가 퍼져 나가는데 나무 몸무게를 견디지 못
하면 스스로 나무줄기가 땅을 향해 뿌리를 내려 나무가지를 지탱해준다는 것이다.
고용수 줄기마다 뿌리가 한가닭씩 땅위로 솟아올라 있는듯한 모습이다. 멀리에는 마
치 처녀가 머리를 빗질하는 모습의 산봉우리도 보이고,,..,
고용수를 향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며 청개구리바위(청와암)라는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또한 고용수 주위의 넓은 잔디밭에는 상비산에서 보았던 20여마리의 모델용 원숭이들이 눈에 띄는데, 원숭이의 주인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다. 원숭이와 더불어 올빼미,
공작등의 동물들이 5원에 사진용 모델로 제공된다.
이곳에서 10여분을 머무른뒤 다시 삼륜차를 타고 월량산까지 가서 되돌아왔다.
도로밑에서 바라본 월량산은 200여미터의 산봉우리 정상에 하늘의 빈공간을 향해 달
모양의 커다란 굴이 뚫어져 있는데 이곳을 다녀간 '별산'에 의하면 사람이 걸어서
동굴가까이까지 오를수 있다고 한다.
이곳 월량산은 상비산처럼 계림을 소개하는 책자에 반드시 등장하는 관광명소로서
산밑에서 바라본 달모양의 둥글고 커다란 바위굴이 매우 신기하였다.
삼륜차 관광의 목적은 고용수 관람이나 월량산 관람보다는 삼륜차 승차 자체에서 더
욱재미를 느낄 수있다. 삼륜차를 타고 농촌거리를 달리는 기쁨은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우 흥미로운 관광이다.
돌아오는길에 운전수에게 물어보니 하루수입이200여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중에서
50원을 세금으로 내는데 이곳에서 중국돈으로 하루수입 150원은 굉장한 수입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야마다' 상표가 부착된 삼륜차의 가격은 요즈음에
40,000여원 하는데 자기는 십여년전에 20,000원에 구입한 차량이라고 한다.
도로를 달리다보면 삼륜차에서 나오는 소음 자체가 마치 관광상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옆사람과의 대화가 잘 안될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이다.
이렇게해서 6시경에 다시 호텔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또한번의 샤워를 마치고 7시
저녁식사시간까지 자유 시간을 이용해 길거리 쇼핑에 나섰다. 길양옆으로 수많은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쇼핑하는 모습이보이는데
나는 음반가게에 들러 한장에 15원(한국돈 2,000원 정도)하는 장학우, 주화건의
노래룰 열웅이는 렙음악 CD 20여개를 무더기로 사가지고 나오고 나중에 티엔님에게
도 음반가게를 소개해 주었는데....
내생각에 CD가격이 매우 싸다고 생각했음에도 다음날 계림에서는 똑같은 CD를 10원
에 살 수 있었다. 저녁 7시에 호텔내 식당에서 중식으로 저녁을 마친 우리 일행은
8시에 쇼핑겸 한잔 곁들이기 위해 조금전 우리가 거닐었던 낭만의 거리에 다시 들어
섰다. 길양옆의 가게들은 대부분 허름한 2,3층 건물들이다.
개인적으로 이곳 양삭에서의 하룻밤이야말로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아마 이번 여행에 참여했던 모든사람들이 같은 생각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열웅이가 콘텍렌즈를 갈아끼우기 위해 시간을 지체한 탓에 다른 일행보다 늦게 쇼핑길에 나선 나는 호텔 정문앞의 수많은 노점식당을 지나쳐 조금전 쇼핑에 나섰던 골목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커다란 그림부채, 동양화등을 팔고 있는 가게며, 수백년이 흘렀음직한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을 아이쇼핑하며 지나가자 어느새 파란눈에 노란머리의 수많은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선술집형 가게앞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시끌벅적한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사이 골목 곳곳에서 지폐 바구니를 옆에둔 노인이 만도린 비슷한 악기를
켜고 앉아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나도모르게 이국의 밤거리에 흠뻑 취하고 만다. 조금전에 들렀던 음반가게
에서는 티엔님, 깜돌이 일행이 씨디를 고르고 있고 나도 옆에서 한마디거들며,
'減價'를 부탁해보지만 어림없다.
음반가게에서 나오자 마자 칭저우 일행하고 마주치고....
함께 아리산님과 차돌일행이 기다리고 있을만한 곳으로 거닐고 있는데 어느 낯선 여
자 꼬마아이가 자기 키만한 통기타를 옆에 메고 30여개의 노래가 적힌 노래판을 들
이밀며 지정된 세곡을 불러줄테니 10원(한국돈 1,300원 정도)을 달란다. 관광지마다
어린아이들이 작은 손에 과일등을 들고서 "10원, 한국돈 1,000원"을 외치는 소리를
귀아프게들었던 터라 처음에는 귀찮은 아이쯤으로 여기고 자리를 뜰려하니, 응석부
리는 표정하며 웃는 모습이 깜찍하기도 하거니와 가엾기도 하여 노래판을 보니
'朋友'를 제외하곤 내가 아는 노래가 별로 없다.
해서....'花心'하고 '情網''을 부를줄 아느냐 넌즈시 물어보니 부를줄 안단다.
그러면 이세곡을 부르면 10원을 주겠노라 하니 장소가 길거리라 자기가 알고 있는
호프집에서 술한잔 하며 앉아있으면 노래를 불러주겠노라 하길래 껄걸 웃으며 그냥
가겠노라 하였더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부르겠단다. 내심 집요한 꼬마애의 상술에
감탄을 하며 부르기를 허락하니, '花心'하고 '情網''은 부를줄 모르니까 다른곡을
지정해달란다.....
참으로 영특한 아이다. 꼬마아이는 알지못하는 노래를 부를수 있다고 하여 자기가
원하는 술집으로 유인하려 거짓말한게 아니었던가?...^^
주위에 있던 칭저우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고.....
코드를 집지도 않은채 그저 기타줄만 튕겨대며 '朋友와 '心太軟', 칭저우가 지정
한 노래한곡을 부르는데... 막연히 기타줄만 튕겨대는 모습하며 바싹마른 키에 노래
부를 때 입을 뾰족히 내놓으며 유행가를 부르는 8살짜리 꼬마아이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길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춰지고 주위의 아이들이 모여 합창까지 하면서 골목
양옆에서 음료수나 술을 마시던 시선들이 우리쪽으로 몰려든다. 노래가 끝나고 10원
을 주자 '시에시에'를 연발하며 손을 흔들며 돌아간다. 20여미터를 걷다보니 차돌,
아리산님 일행이 음료수와 차를 마시고 있는 가게에 도착하였다. 자리가 비좁아 우
리일행이 모두 앉지를 못하고 10여명의 일행이 다른 가게를 찾아 발길을 돌리고,
늦게 도착한 나와 열웅이는 파인에플 쥬스 한잔을 시켜놓고서 이국의 밤거리에
도취되어간다.
골목 양쪽에는 우리와 비슷한 일행들이 차를 마시거나, 맥주를 곁들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부분이 유럽인들인 이들이 휴양삼아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인데.....
아리산님에 의하면 이곳이 베트남하고 가까운지라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시절 유럽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던 데서 이러한 관광지가 형성되었을것이란
얘기를 들려준다.
누군가 이곳이 중국땅 이라기보다는 뉴욕의 차이나운 같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린다.
오늘낮에 양삭에서 몇사람의 서양인을 보기는 했어도 이처럼 많은 유럽인들이 이곳에
모여 있을지는 정말 몰랐다. 이곳 양삭의 수많은 삼륜차 운전수들이 하루에 200원
이상의 수입을 올릴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아리산님의 말에 의하면은 이곳엔 많은 자전거 대여점이 있는데 외국인들이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양삭의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고 한다. 이곳 양삭이야말로 조용한
분위기를 찾는 서양인들의 취향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이국의 풍경에 취해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1시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간
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다른 일행을 찾기 위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골목길을 되돌아 가는데....
조금전 여자아이가 노래를 불렀던 부근에 樂得餐廳(불어를 음역한 이름인데 불어 이
름을 기억할수 없음)이라는 대형 음식점 앞 광장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는 우리
일행과 마주쳤다. 이곳에 먼저와있던 칭저우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 꼬마아이가 가자고 했던 술집이란다.
그 꼬마아이는 칭저우를 보자마자 왜 그 멋있는 오빠는 오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는
말에 다시한번 조금전의 상황을 생각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졸지에 20여명으로 인원이 늘어나자 종업원이 싱글벙글하며 주위에 있던 빈 탁자와
의자들을 길게 연결하여 자리를 잡아준다. 인원을 점검해보니 조금전 날아 다니는 바퀴벌레에 놀라 호텔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오던 메이런만 보이지 않고 22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쇼핑하며 물건 샀던 이야기,
계림의 절경을 비롯하여 양삭의 분위기를 화제로 삼으면서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어디에선가 그 꼬마아이의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또 한명의 고객을 섭외한 모양
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예의 그 꼬마주인공이 등장하고.....
나타나자 마자 '멋쟁이 아저씨(shuai de bo bo)'를 찾으며 또한곡의 노래를 청하
기를 바라는데, 이번에는 차돌이가 '멋쟁이 아저씨' 역할을 대신 한다.
다시또 세곡의 노래를 듣게되는데 광장에 모여있던 유럽인들의 시선을 다시한번
집중하게 하고 우리 일행은 노래소리에 맞춰 박수로 리듬을 맞춰준다.
꼬마아이는 우리일행에 많은인기를 받으며 기념촬영을 끝으로 식당안에 들어가는데,
들어가자 마자 바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우리 일행들은 그아이의 하루수입이
얼마일까에 관심이 모여진다.
樂得餐廳 식당뒤편으로 구름속에 가려진 어슴프레한 달빛에 희마하게 드러나보이는
산봉우리 하나가 더욱더 운치를 더해주면서 양삭에서의 하룻밤이 저물어간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나를 비롯하여 피곤한 사람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머지 일행은 계속하여 광장호프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8월 14일 월요일....
冠岩洞屈을 관람하기 위해 양삭의 파라다이스 호텔을 출발하였다.
어제밤, 밤하늘의 달빛을 가린 먹구름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니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계림에 온 후 처음으로 비를 맞고있다.
오늘은 첫날 묵었던 계림관관호텔에서 숙박을 해야하기 때문에
모든 짐꾸러미를 차에 싣고 관암동굴로 향한다.
관암동굴은 계림시에서 얼마되지 않은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 양삭에서 두시간 가량을 자동차로 이동하여야 한다.
가는길도 멀고 관암동굴의 관람객이 많은 관계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조식을 끝낸후 최대한 빨리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나와 열웅이가 맨 마지막에 탑승하게 되었다.
정확히 8시에 비가 내리는 호텔 정문을 나선 우리 일행은 버스안에서
안내양으로부터 관암동굴에 대한 역사를 듣게된다.
관암동굴은 종유석 자연 동굴로서 92년부터 95년까지 약 3억원
(한국화폐 약 330억원)을 들여 관광지로 개발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개발을 완료하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것을 대만의 한독지가의 도움으로
98년도에 개발이 완료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암동굴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리강과 연결된 맨아래층은 노를저어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나룻배들이 드나들고 2층에는 관광열차가 드나들며 3층에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곳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굴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더하는
가운데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뒤로하며 비가 내리는 국도를 달려간다.
아열대 지방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흔히 말로만 들었던 스콜성인지...
소낙비가 내리는 중간중간에 가끔씩 햇빛이 비치기도 하고.....
엄청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도로변에는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 다니는 아낙네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주민들은 자전거나 오타바이, 삼륜차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우리나라 시골 국도에서 흔히 경운기를 볼 수 있듯이 이곳 국도에는
많은 농업용 삼륜차들이 지나다닌다.
관암동굴에 다다를즈음에 채석작업을 하기위해 작은산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봉우리를 가르키며 나는 안내양에게 앞으로 계림의 산봉우리를
소개할 때 99,999개로 소개하라는 농담에 모든사람들이 한번 웃어보고.....
비가 내리는 계림천하를 구경삼아 관암동굴에 거의 다다르자 고갯길이라
부르기엔 조금 어색한 언덕배기를 올라설 즈음 어느 촌로가 물소와 염소떼를
앞세우며 걸어가는 바람에 자동차가 속력을 내지 못하고 서서히 기어가고 있다.
촌로의 양보로 짐승들이 길 한쪽으로 비켜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용감한
관광버스는 소리만 요란할뿐 속도는 조금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않는다.
한국의 시골길에서 느껴보던 정취 이상으로 농촌의 여유로운 모습에 흥이 돋는다.
부슬부슬 비가내리는 가운데 한가로운 촌로의 모습에서 한층 정겨움이더해진다.
고갯길을 내려서자마자 계림의 평지치고는 비교적 깊은 산골인 이곳에 상당히
많은 숫자의 가옥이 움집해 있는 산골마을이 나오고, 리강을 낀 골목어귀를 돌아
선 자리에 자동차가 멈추서자 관암동굴로 걸어가기 위해 모두들 차에서 내린다.
어느새 빗줄기가 약해진 가운데, 자동차가 멈춰서는 순간 할머니, 어린아이들이 차를
향해 달려온다. 여러모양의 과일, 엽전, 기념품, 우산등이 손에손에 들려있다.
그들은 우리일행이 한국사람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10원, 한국돈 1,000원" 한국말 소리가 합창하듯 들려온다.
그들의 상업정신은 매우 투철하다. 우리일행이 거들떠 보지 않아도 우리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가며 끝까지 따라온다. 순간 저멀리에서 어께에 웬 가마를 멘
가마꾼들이 헐레벌떡 떼를 지어 달려온다.
이곳에서 관암동굴까지는 걸어서 30여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앞뒤에서
두사람이 대나무로 만든 가마를 메고 돈을받고 가마위에 사람을 싫어나르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중국인들의 상술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는데....
여러 가지 궁핍한 가운데서 나름대로의 돈벌이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 그러한
모습들로 비쳐졌겟지만, 장사를 통해 그들의 돈버는 상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가지 궁리를 통해 돈벌이가 될만한 것은 결코 놓치지 않는 그들의
습관에 한편으로 존경심마저 일어난다.
저멀리에서 서로가 경쟁을 하듯 어떤이는 한사람이 그 무거운 가마를 메고
달려오고 어느팀은 두사람이 앞뒤에서 가마를 메고 발을 맞춰가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데, 마치 어린시절 초등학교 가을운동회때 번외경기로 어른들이 어린이
손을 잡고 달리기 경주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리강의 강언덕을 따라 10여분을 걸어가니 길다란 나무판자를 엮어만든
출렁다리가 나오고 예의 그 가마꾼들은 여기까지 손님을 모셔다 놓고
되돌아간다. 아마 조금전 우리를 향해 달려왔던 가마꾼들도 여기에서
손님을 내려 주고 우리와 함께 내렸던 일행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던 것이다.
동굴길 중간중간에 간이 점포들이 눈에 띄는데 물건들이라야 과일
두세 종류하며 우산, 음료수등 조금은 초라한 모습이 대부분인대다 상인들이 모두
조금은 처량한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다. 이들 할머니들도 '한국돈 1,000원' 이라는
발음은 매우 정확하다.
이곳 관암동굴이 개장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 할머니, 어린아이들의
한국인을 식별하는 능력하며 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든다. 물론 이들은 일본인 관광객을 보면 일본말을 구사할 것이다.
출렁다리를 건너기전에 이곳의 소수민족 옷차림의 어여쁜 아가씨 두사람이
다리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나는 이사람들이 당연히 계림 관광공사
정도에서 나온 관암동굴 안내양으로 생각하여 열웅이에게 같이 서서 사진을
찍으라 권하였더니 친절하게도 열웅이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서 공작깃털
모양으로 치마를 옆으로 펼치면서 매우 아름다운 자세로 기념촬영을 하도록
도와준다. 사진을 찍고나니 10원을 달라며 손을 벌린다.
이곳에선 도대체 공짜가 없다.
출렁다리를 건너니 동굴로 향한 철길이 놓여있다. 안내양이 비록 철길이라 표현은
하였지만 우리나라 놀이공원에 있는 관광열차용 레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넓다란 잔디밭에 조랑말들이 있는걸로 보아 가마뿐이 아니라
조랑말을 태워주고 일정한 장소까지 이동시켜 주고 돈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넓다란 잔디밭에 이르면 관암동굴로가는 두갈래 길이 나온다.
하나는 산을 넘어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하나는 대나무로 엮어만든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방법이다. 당연히 배를 타고 건너가는길이 훨씬시간이 절약된다.
아리산님이 별도로 배삯을 지불해 준다기에 큰기대를 갖고 배가 타는 곳에
이르러보니.........
세상에 우리가 건녀야할 강폭이 채 10미터도 안되보인다. 만일 우리나라
관광지에 이런 곳이 있다면 당연히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다니기에 편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국인들은 이곳을 이용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대나무배에는 의자가 네게 놓여있고 그위에 뱃사공 한사람이 서있는데
이 뱃사공이 긴 대나무 장대를 물속에넣고 두 번만 내저으면 곧바로 건너편에
도착해 버린다. 물론 배도 하나고 뱃사공도 한사람이다. 차례차례 건너면서 미리
건넌 일행이 다음 일행을 향해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통나무배를 타고 리강을 유람할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면서 리강의 대형 관광유람선
여러척이 정착되어 있는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이곳 선착장에서 관람동굴까지 거의 90도 가까운 직선거리 약 100여미터 계단을
올라야만 관암동굴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 관암동굴은 자동차뿐만아니라 계림시
방향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기도하는 모양이다. 동굴 입구에 이르니 수십은 족히
넘은 수백명의 관관객이 줄을 서있다. 이곳까지 오는도중 2시간 가까이 화장실을
찾지못했던 우리 일행은 10여미터 위에 있는 동굴 출구쪽에 마련된 화장실에
다녀오는 바람에 앞서 줄지어 있던 우리일행이 들어가지 못하고 화장실에 간 일행을
기다리는데 홍콩 관광객을 인솔하는 듯한 여자안내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누군가가 우리 일행이 한국관광객이라고 하는데도 한국사람이면 한국사람이지 왜
다른사람도 못들어가게 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름다. 동굴안의 사정을 모르는
나는 몇십명의 최소단위 인원이 되기를 기다리는줄 알았는데 그 고약한 중국인 안내인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우리가 뭘 잘못하고 인는줄 알게되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곳의 관광안내원들은 뭐든 빨리빨리해서 시간을 줄이는게
본인들에게 유리하므로 항상 관광객을 재촉한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여기서는 우리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여유가 있다. 나역시 여유만만하게
그 고얀녀를 쳐다보며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장실에 갔던
5,6명의 우리 일행이 쥐구멍(^^)을 통해 우리 일행과 같이 동굴에 입장하자마자 어마
어마하게 큰 자연동굴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고수동굴은 가보지
않았어도 제주도의 만장굴이나 사굴정도는 관람해보았던 터인지라 제주도의
천연동굴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어마어마한 크기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안내양의 말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는 이보다 더큰 자연동굴이 두 개가 더있는데
아직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八仙像이라 이름붙여진 종유석에 오색 조명등이 설치되어 한결 더 아름답게
비춰지도록 조명시설을 해놓았다. 마치 내가 소용녀의 고묘나 절정유곡의
석굴에 들어온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중간쯤에 이르면 마치 소용녀의 침상과 같은
옥돌침대 모양의 넓다란 바위를 볼수 있었다.
다시한번 소설영웅문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동굴 깊이 들어갈수록 분위기에 걸맞는 조명시설들로 인해 신비로움이 더하고
어느곳에 이르면 어두컴컴한 가운데 깊은 낭떠러지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곳을
지나치자니 오싹하는 기분에 더위가 싹 가시는듯한 느낌이다.
마치 눈이 내리는듯한 모습의 '嫩雪岩'도 보이고 한참을 걸어 청룡열차
타는곳에 이르렀다. 중간에서 소수민족 아가씨 일행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우리보다 더 늦게 들어왔던 그 '고얀녀' 일행이 먼저 열차를 타게되자
우리 南양은 매우 속상한 모습이고 느긋하기만 한 의지의 우리 한국관광객 일행은
다음열차를 기다려 나무배 타러 가기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관광열차로 채 5분도 안걸려 도착한 우리는 통나무배를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입구에는 生命之花라 이름붙여진 지름이 3, 4미터는 됨직한 아름드리 종유석
기둥이 서있는데 기둥 둘레는 마치 꽃이 피어있는 모양이다. 예의 그 '고얀녀'
일행중 몰지각한 사람이 기둥위에 뛰어올라 기념사진을 찍는다.
관광메너 좋기로 소문난(^^) 한국관광객중에는 그러한 몰지각한 사람을 볼 수 없다.
돌계단을 타고 2, 30여미터를 내려가니 수십대의 나무로 만든 나룻배가 물위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배하나에 6명정도의 인원이 탈수 있는데 아리산님은 배를
타고나서 절대로 배밖으로 손을 내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강줄기 사이사이로
벽위에서 자란 종유석들이 수도없이 널려있기 때문에 손을 다칠 것을 염려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또 그 고얀녀 일행의 줄이 우리를 사이에 두고 두동강 난 것을 보고 마음씨
착한 우리 한국관광객 일행은 뒤쳐진 홍콩 관광객들을 앞세워준다. 관광객들중
한둘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고얀녀'는
그들을 재촉하기에만 바쁘다. 배를타고 동굴의 종유석사이를 헤쳐나가는 스릴은 오직
이곳에서만 느낄수 있는 기쁨이다.
나무배 안쪽에는 한사람당 한개씩 가질수 있도록 탄광촌에서나 봄직한
손전등이 달려있다. 어두컴컴한 동굴을 손전등을 비춰가며 관광하는 것이다.
반대편에서 오는 배에서 비춰지는 불빛 또한 장관이다. 칠흑같은 동굴안에
쉬지않고 수십대의 나룻배들이 노를 저어가며 오가는 것이다.
나는 종유석이 자라난 좁디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노를 저어가며 빠져나가는
뱃사공의 손기술에 내심 감탄하고 있다. 때로는 중간중간에 배들이 다닐수 있도록
종유석 줄기를 자른 흔적도 보이기도 하지만 천연동굴에 이러한 수로가 있다는
사실이 밑기지 않는다.
어느곳에 이르면 겨우 한대밖에 빠져나갈수 없는 공간밖에 없는데도 반대편에서
오는 뱃사공과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중간에 멈춰서는 법 없이 그 빠른 속도로
서로서로 비켜지나가는데 정말 솜씨 좋은 사공들이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마치 코뿔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한 바위를 지나 엘리베이타를
타기위해 계단위로 올라오는데 속된말로 장난이 아니게 밀려있다. 여기서 안내양
이 말하기를 엘리베이터를 탈려면 2, 30분을 기다려야 하고 아니면 계단을 타고
위로 나갈수 있다고 한다. 이에 우리는 옐리베이터를 타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위 천장을 쳐다보니 엘리베이터 꼭때기 옆에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리산님 얘기로는 어느 촌부가 저구멍을 통해 이곳 관암동굴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참으로 희한한 건 구천척이 10년간 갖혀지냈던 절정유곡
석굴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밑에 흐르는 리강이 곧 악어담으로 비쳐지고
지하에서 곧바로 솟아오른 엘리베이터는 구천척의 생명을 연장해준 대추나무임에
틀림없다. 저높은 곳에 뚫려있는 작은 공간으로 양과는 대추나무 껍질을 이어서
구천척과 구천척의 딸을 업고 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소설가 김용의 상상력이 참으로
대단할뿐 아니라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신비스런 자연동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저 놀라울뿐이다.
2시간여의 관암동굴 관광을 마치고 높이가 족히 4, 50여미터는 됨직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동굴에서 빠져나오니 밖은 아직도 부슬 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동굴밖에
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관광버스로의 이동명령을 받은 나는 무심코 앞서가는 티엔
님을 따라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산밑에 도착해보니 티엔님과 나, 열웅이, 깜돌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우리팀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
에 우리 일행은 다시또 동굴을 향해 100여미터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도중에 차돌이 비를 맞으며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안내양을 대신하여 험한 인상을 찌뿌리고 있다.
이곳에 올때는 뗏목을 타고 오기위해 리강을 따라 왔지만 가는길은 산허리를 돌
아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젠장헐... 진즉 얘기를 했어야지... 힘들여 내려왔는데...)
동굴 출구에서 바로 산허리를 끼고 도는 길이 있었는데 뒤쳐진 티엔님 이하 우리 일
행이 다른 관광객의 꼬리만 보고 따라가다가 결국 밑에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재차 동굴입구까지 올라서니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최승동씨 얼굴이 보이는
데....최승동씨가 비를 피하기 위해 천리안 중동 깃발을 목에 감고 걷는 모습에 지
나가던 중국인들이 슈퍼맨(갑자기 중국어가 생각나지 않음...) 같다며 웃고 지나간다.
깜돌이, 현주등은 그래도 준비성이 투철하여 우산을 준비해 왔건만 나는 그저 오
는비 다 맞아가며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중간중간에서 우산장수
할머니가 '10원, 한국돈 2,000원'하고 소리치며 다가온다.
우산을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조금전에 '한국돈 1,000원'하던 기억에
1,000원짜리 한 장을 드리내미니 안된다고 하면서 두장을 달라한다. 나는 서투른 중국어 솜
씨로 조금전에 1,000원에 팔던데 왜 갑자기 2,000이냐 하였더니 누가 그렇게 팔았
냐며 멀지감치 떨어진 다른 우산 장수 할머니를 향해 삿대질을 해댄다. 우산사는걸
포기하고 되도록 비를 덜맞기 위해 가능하면 나무숲을 지나치며 걸어간다. 거의 산허리를 벗어날 무렵 저만치서 우리의 희망 안내양 南양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까지
의 우리를 안내해 오던 南양이 모습이 아니다. 약속시간보다 30여분이 늦었다며 소
리를 내지르며 흥분하는데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다행이 이곳이 중국이고
같은 조선족이기에 우리 일행이 묵묵히 듣고 참았던 것이지, 만약 한국 관광지였었
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선족이 아닌 한족 안내원만 되었어도 참지 못하고 한국인의
기질을 발휘했을 것이다. (관광메너 좋은 우리 한국관광객이었으니 망정이지...^^)
우리가 지나쳤던 넓다란 잔디밭에 이르러서 할수 없이 10원을 주고 우산을 하나
마련하였다. (바보같이....아까 산위에서 샀으면 그나마 비를 덜 맞았을텐데....)
그런데 우산을 펴자마자 우산이 반대로 펴지면서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돈 1,300원
짜리 우산에 거는 기대도 없었지만 거의 일회용 우산이다. 이 우산을 보자 몇 달
전 서울지하철에서 3,000원짜리 우산을 샀던 생각이 떠오른다. 매번 우산을 자주 잃
어버린 습관때문에 값싼 우산을 마련하려고 지하철에서 덥썩 두 개를 사가지고 집에
가서 보니 이곳에서 산 중국산 품질하고 거의 동급 수준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우산
도 중국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건너왔던 출렁다리를 건너 리강언덕길의 중간쯤에 이르자 또다시 한패거리의
꼬마 상인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사람이 한사람씩 맡아서 손에
들고 있는 과일을 사줄 것을 요구한다. 아침에 자동차에서 내릴때에는 그저 '10원,
한국돈 1,000원'만 외치던 아이들이 이제는 거의 울음섞인 소리로 애원한다. 이제
는 그들 입에서 한국어로 '아저씨', '사주세요'라는 말까지 튀어나온다.
사지 않는다고 하거나 거들떠 보지 않아도 관광버스 있는 곳까지 거의 100여미터를
처량한 말투로 집요하게 과일을 팔아줄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이곳을 찾았던 나이
지긋하신 한국관광객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가련한 표정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정이 많은 한국인들의 심정을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중국을 소개하는 관광가이드북에 이러한 아이들을 가엾게 여기
고 억지로 물건을 팔아줄 필요는 없다라고 소개받았던터라 관광버스 있는곳까지 집
요하게 따라붙는 여자아이에게 계속해서 '不要'를 외쳐됐다. 우리 일행중 내가 제
일 먼저 버스에 도착하고....
도착해보니 기다림에 지친탓인지 기사아저씨가 차안에서 시동을 걸어놓은체 잠을 자고 있다.
이곳에서 4, 50분을 달려 오후 2시경에 복파산 부근의 대우호텔을 지나쳐 무슨大飯店
이란 상호가 붙은 어느 호텔 중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계림박물관 관광길에 나섰다
.
박물관에 들어서니 이곳에 근무하는 20살이 채 안되보이는 조선족 아가씨가 우리
를 안내한다. 이가씨가 박물관내에 있는 이곳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소개하는데 마치
북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조선족 박물관 가이드는 어머니가 북한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방송에서 봄직한 가냘프고 억센 억양에서 나오는 약간은 북한사투리가 섞인듯한 목소리가 특이하다.
이곳 박물관에는 리강에서 보았던 壯族 처녀총각이 일령횡대로 늘어서서 단체로 구
애를 하는 장면을 본뜬 실물크기의 인형들도 보이고, 검정옷과 흰옷을 입은 瑤族인
형도 보인다. 특이한건 요족은 검정바지를 입는 요족과 흰바지를 입는 요족이 있는
데, 검정바지 요족은 평생동안 검정색으로 된 바지나 치마만 입고, 흰바지를 입는 요
족은 평생동안 흰바지나 하얀 치마만 입고 산다 한다.
바로 옆에는 苗族의 생활상도 보이는데 특이한점은 묘족총각이 처녀에게 프로포즈할
때는 맘에드는 아가씨의 발등을 살짝밟는다고 한다. 그런후 여자쪽에서 남자가 맘
에들면 다시 남자의 발을 밟는데, 이때 상대편 남자가 매우 맘에들면 남자의 발을
사정없이 세게 밟는다고 한다. 밟는 세기에 따라서 좋아하는 감정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함부로 여자의 발을 밟지말라고 南양이 농담조로 한마디 한다.
이를 듣고난 차돌과 칭저우는 도대체 요족이 사는 동네가 어디냐고 물어오고, 칭저우는 아예 상대가밟기 편하도록 발등을 아예 드러내놓고 다니겠다 하니..
급하긴 매우 급한모양이다. ^^
특히 이곳의 소수민족중 모로족은 아직도 모계사회가 존재하는 곳으로서 여자 한사
람이 여러명의 남자를 거느리며 산다고 한다. 때문에 아이를 낳더라도 아버지가 누
구인지 알수없다고 하는데....오히려 이곳 모로족의 생활수준이나 문화수준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다 한다.(여성의 우월성인가?...^^) 또 어느 소수민족은
자기 민족이 아니면 이민족과의 결혼을 불허하기 때문에 근친결혼이 성행하여,
근친결혼의 폐해인 열성유전자로 인해 질병이 많거나 수명이 짧아 인구가 많이 감
소되어 지금은 거의 2,000여명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박물관의 조선족 안내양을 따라 민속품 가게
에 들어가게 된다. 나는 이곳에서 조선족 아가씨가 木紋石 찻잔 설명에 열변을 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광객들에게 이곳 박물관을 보여주는 가장큰 이유는 바로 관광
품 판매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또 우리 일행중 많은 사람들이 이곳
에서 우황청심환, 西瓜廂들을 샀는데, 이곳 박물관에서 시꽈샹을 샀던 나는 한국
에 돌아와서 칭저우로부터 광주 비행장 면세점에서는 이곳의 1/3가격에 팔고 있더라
는 말을 듣고 얼마나 억울해 했는지 모른다. 좌우지간 이곳에선 관광안내양이 데리고 다니면서 안내해주는 쇼핑물이 다른곳에 비해 상당히 비싼것만은 틀림없는거 같다.
물론 품질은 믿을만한 것이긴 하겠지만.....
4시경에 박물관을 나선 우리는 중국의 傳統茶道를 가르쳐 준다는 어느 찻집에 들러
보이茶, 桂花王茶 등의 차만드는 법, 차마시는 법 등을 듣고 아래층에서 한두개 차나, 전통과자등을 손에 사들고 나왔다.
5시경에 桂林觀光酒店(Guilin Plaza) 도착하여 10층에 있는 정해진 방에 각각 여장
을 풀고서 1시간여의 휴식을 취한후 저녁식사겸 민속공연 관람을 위해 저녁 6시 30
분경 少年宮이라 이름붙여진 어느극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시간여동안 맥주한
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마친후 소수민족들이 직접 출연한 전통 민속춤, 전통결혼
의식등을 두시간여에 걸쳐 공연을 관람하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남상원씨는 장족의
처녀총각들이 던져주는 채색공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번여행에서 두 개의 채색공을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올해에는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 보다.
저녁 9시 30분경 극장을 나선 우리 일행은 오늘 여행의 하일라이트라 할수 있는 발
안마(足按摩)를 받기위해 '桂林第五醫院' 으로 향했다. 발안마는 원래 이번여행코
스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을 이곳의 발안마가 유명하다 하여 안내양에게 요청하여
안마를 받기로 한 것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사설 발안마 업소가 있는데 우리가 도착
한 '桂林第五醫院' 즉 계림제5병원은 국립병원내에 있는 안마소로서 안마를 의료행
위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안마시술소하고는 근본적
으로 차이가 있다.)
23명의 인원이 들어서자 조용하던 안마소가 일시에 시끄러워진다. 요금은 중국돈
130원, 미화 15불이다. 방하나에 3,4명 많은곳은 7.8명이 들어갈수 있는 칸막이
방에 침대형 의자에 누워있으니 20살 안팍의 젊은 여자셋이 들어온다. 우리방에는
나와 열웅이 그리고 아리산님 세사람이 누워있다. 세수대야에 뜨거운 물이 들어온다
. 아마 한약이 들어간 물이 아닌가 싶어진다. 바지를 무릎위에까지 올리고서 먼저
발을 깨끗이 닦는다. 발을 닦는데 그냥 닦는 것이 아니다. 온갖 정성이 담겨있다.
중간중간에 발바닥을 안마해주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열손가락을 사용해서 발바닥 구석구석을 주물러준다. 간
지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발바닥뿐만이 아니라 무릎하며 장단지도 안마를 해
준다. 땀을 뻘뻘흘리며 계속해서 1시간을 안마해주는데 그들의 손마디마디에 정성
이 가득 담겨있다. 안마를 받으며 물어보니 이곳엔 안마수업을 받고 있는 훈련생들
을 포함해서 약 200여명의 안마사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처럼 많은 사
람이 온다고 해도 하루에 한사람 정도밖에 안마를 할수 없다고 한다. 200여명의 안
마사들이 골고루 연습하고 혜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들의 천진난만하게 웃는모습에서 현재의 직업에 매우 큰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바로 옆방에서도 한국남자의 음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우리말고도 다른 한국인 일행이 안마를 받고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시간여의 정성
스런 안마를 받고 일어서니 발부분이 시원해지면서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모두들
특이한 체험을 하였다는신기함과 만족감에 모두들 환하게 웃는모습으로 각자의 방
에서 나온다. 밖에 나와 발안마를 받는 느낌과 종업원들의 표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도중 모두들 10원씩의 팁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15불속에 당연히
그들의 팁이 들어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작년에 여기서 이미 한차례 경험을 하신 아리산님이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그냥 나왔었는데, 이곳에 들어오기전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안내양이 종업원들에게 10원씩의 팁을 주라고 햇던 모양이다.
나와 열웅이는 부랴부랴 1달러씩을 손에 들고 조금전의 종업원들을 찾고 있는데 이
미 아리산님이 어떻게 알고서 그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건네주고서야 미안함을 떨쳐낼수 있었다. 안마소를 나온 우리일행은
일정에따라 리강 강변에 위치한 야시장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야시장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할수없이 호텔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계림에서의 마지막밤을
그대로 보낼수 없다는 생각에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한곡 하기위해 나와 차돌 칭저우, 쿨이 호텔 2층에 마련된 가라오케에 들어섰다.
룸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이미 두세팀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홀에
서 그냥 앉이 있기로 하여 맥주와 안주를 시켜놓고 홍콩관관객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박수로 응답해주면서 우리들도 돌아가며 몇곡씩 노래를 불렀다. 이곳에는 한국노
래도 몇곡 있었는데 거의가 '아리랑', '한오백년' 수준이다. 그중에 그래도 '아침이
슬'과 '석별'이라는 노래가 최신곡이라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월량대표아적심' '
첨밀밀' '화심' '풍우무조'등의 중국노래와 함께 두곡의 한국노래를 부르므로서 우
리가 한국사람이란 사실을 홀에 있는 손님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미 늦은 시간
이라 직원들이 퇴근해야 된다는 말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서 새벽 1시경에 방을 나
오니 그때서야 어디서 이곳의 친구들하고 한잔하고 들어온다며 아리산님이 호텔 정
문에 들어선다.
나는 쿨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여향이를 전화로 불러내어 다섯이서 길거리 포
장마차에서 한잔하기 위해 길거리 의자에 앉았다. 피곤한 상태에서 가라오케에서
주량이상으로 마셔된 알콜덕분에 나는 정신없이 길거리 탁자에 쓰러져 잠이들었다.
도저히 견딜수 없었던 나는 네사람을 남겨둔체 혼자서 숙소로 들어와 잠이들었다.
8월 15일 마지막날....
아침 6시에 기상을 한다.
어젯밤 새벽 2시가 되어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시장을 구경하고 싶어 일찍
일어난 것이다. 작년 북경 여행에서의 새벽시장을 잊지못한 나는 이곳 계림에서도
새벽시장이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서민문화를 다시한번 체험하
기 위해 잠에 곯아 떨어진 열웅이를 일깨워 호텔을 나서는데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
가 내린다.
비가 내려서인지 새벽시장이 열리지 않았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곳 길거
리에는 새벽시장과 함께 많은사람들이 카셋트 음악에 맞춰 우슈나 쿵후같은 무술을
연마하거나 안무동작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이곳 중국인들은 건강관리에 꽤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하나의
취미생활로 쿵후를 연마하는 것인지...
비가내리는 가운데에서도 큰건물의 처마밑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웃옷을 벗어던
진체 나름대로 무술동작을 하면서 체력단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호텔에 들어서니 차돌과 칭저우가 떠날 채비를 하여 로비에 내려와 있다. 차돌과 칭
저우, 호랑이님, 미미....네사람은 비행기 좌석이 여의치 않아서 계림에서 광주로
갔다가,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되기 때문에 나머지 일행보다 먼
저 출발하는 것이다.
어젯밤에 차돌과 아리산님 칭저우, 여인향 네사람은 호텔앞 길거리시장에서
한잔하고서 택시를 타고 리강 강가에 있는 커피숖에서 커피한잔씩 한다음
새벽 4시 가까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한다.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들이다. 다른 사
람들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시각이지만 나와 열웅이는 차돌일행과 함께
먼저 아침을 먹고 네사람을 배웅하고서 9시까지 여유를 가지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비가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짐을 관광버스에 싣고 마지막 일정에 따라 칠성
공원으로 향하였다. 계림시내에 위치한 七星公園은 단체관광객들보다는 연인들끼
리의 데이트코스에 더욱 적합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칠성공원에 들어서면 마치
낙타처럼 보이는 산봉우리가 보이고 연꽃이 활짝 핀 작은 연못이 나온다. 수석 전시
관에는 보통의 수석과 함께 관암동굴에서 따옴직한 해괴망측한 갖가지 모습의 종유
석들도 전시되어 있다. 3, 40분을 이곳에서 머무른 일행은 10시 30분경 첩채산에
도착하였다. 첩채산에 도착하니 이제 더 이상 가랑비가 내리지 않는다.
疊綵山(疊彩山이라고도 함)은 돌무늬가 첩첩이 쌓여있는 모습이라 해서 첩채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첩채산도 이곳 계림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오를수 있는
봉우리 세개중의 하나이다. 之字 모양의 돌계단과 각종 나비가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을 통해 20여 미터를 올라가면 작은 동굴이 나오는데...
이곳 동굴을 통해서 정상까지 올라갈수 있는 것이다.
동굴 정면 윗부분에는 1963년 낙관이 찍힌 어느유명인사의 바위에 음각된 疊綵山이
라는 커다란 붉은글씨가 눈에 들어오고, 바로 우측에는 1964년 낙관이 찍힌 어느
문인의 "願作桂林人 不願作神仙"(계림에 사는 사람이 될망정 신선이 되고싶지않다)
이라는 역시 붉은색의 바위에 세로로 음각된 글귀가 보인다.
안내양에 따르면 동굴안에 나한상이 있는데....처녀, 총각이 나한상을 만지면 애인
이 생기고 결혼한 사람이 나한상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바위 동굴안에 들어서니 왼편으로 어느시기에 만들어진 조각품인지 바위에 양각된
작은불상 서너개가 보이고 불상 좌우로는 어느시대 작품인지 알수 없지만 수많은
문학작품성 글귀들이 돌위에 새겨져 있는데 탁본 흔적으로 인해 글씨 해독이 불가
능할 정도로 새까만 먹물이 묻어있다.
오른쪽엔 안내양이 말했던 나한상이 팔을베고 배꼽을 드러내놓은체 누워있는데
수 많은 사람들의 손자국을 보여주듯이 나한상 표면이 반들반들하다. 어느 벽면은
마치 종이부채에서 본듯한 멋들어진 난초그림이 새겨진 측면에 사오백자는 족히 넘
을듯한 초서체 글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생각같아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어느시대의 작품인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중국어나 중문학 실력도 부족할뿐아니라
모두들 관광객 일행들 뿐이니 자연 물어볼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홍콩이나
대만 관광객을 이끌고온 안내양은 몇가지 그림이나 서문을 보면서 열심히 설명을 해
주는데 알아들을수가 없다. 동굴을 벗어나는 마지막즈음에는 사람 실물보다 조금 큰
석불좌상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석불상을 향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
이곳 첩채산의 바위에 새겨진 수만은 碑文을 보고서야 왜 "桂林碑海"라는 말이 나오
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굴을 지나 돌계단을 통해 정상에 올라보니 안개와 구름 사이사이로 작은 산봉우리
들이 드러나보인다. 바로 앞에는 이틀전 올랐던 복파산도 보이고....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온다.(아쉽게도 나는 카메로 고장으로 인해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한장도 뽑지 못했음)
내려오면서 우리 일행은 예쁜 수공예 손가방을 비롯한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사게
되고, 나는 하나에 5원달라는 채색공을 깍고 깍아서 10원(1,300원)에 5개를 사들었
다. 조금은 조잡하기는 하지만 수공예품인지라 나름대로의 정성이 담겨져 있어 보인
다. 조금 이른시간인 12시에 점심을 먹은 우리일행은 아리산님과 안내양의 의견에
따라 일정에 없었던 노적암 동굴을 관람하기 위해 차량을 움직이는데.....
노적암 관광을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할 필요없이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시내쇼
핑이나 하자는 나와 여인향의 제안에 따라 노적암 가는 도중 작은 골목에서 차량을
되돌려 우리나라 합작호텔인 대우호텔부근에 하차하여 길거리 쇼핑에 나섰다.
나와 열웅이는 우리나라 재래식 시장과 같은 이곳 계림의 골목시장을 쇼핑하는데 첫
날 맛보았던 망과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과일인지라 집에 사가지고
갈 요량으로 리어카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할머니한테 값을 물어보니 한근에 2원
이라고 한다. 첫날 한근에 2원 50전에 샀던 기억이 있던지라 두근만 달라하였더니
4개를 올려놓는다. 값이 얼마냐 물으니 4근이라하면서 8원을 달라고한다. 나는 값을
깍는 재미에 6원에 사겠다고 하였더니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물론 내가 한국사람이
라는 것을 알고 있을터이다.
나는 지갑에서 5원짜리와 1원자리 지폐를 꺼내놓고 자리를 뜨니까 할머니가 쫓아오며
2원을 더달라고 소리친다. 나와 열웅이는 옆에서 다른 중국인들이 보고있는 가운데
웃으며 빠른 걸을걸이로 도망치니 그할머니 역시 웃으면서 더 이상 쫓아오지 앉는다.
괜히 미안한감도 없지 않았으나 이곳 중국에서는, 특히 이런 골목시장에서는 가급적
물건을 깍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던터라 재미를 가지고 물건값을 깍아
보았던 것이다.
망과를 손에 들고서 CD가게 안으로 들어갔더니 컴퓨터 CD를 파는곳이다.
얼핏 가게안에 있는 TV를 쳐다보니 한국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순간 나와 열웅이
는 신기한 눈빛으로 웃음을 주고 받는다. 이곳에서 열웅이가 좋아하는 CD를 몇 개
사들고 주인한테 음반가게 위치를 물어 찾아간다. 5, 60미터를 걸어서 음반가게에
들어서니 이미 깜돌, 티엔님 일행이 CD를 고르고 있다. 나는 양삭에서 구입하지 못
했던 주화건 노래를 몇개 집어들고, 되돌아 오는길에 한가게에서 200원 부르는 여
행용 가방을 60원에 사들고 차에 올랐다. 모두들 흐뭇한 표정들이다. 노적암을 가지
않고 이곳에서 쇼핑을 하기를 잘했다는 표정들이다.
우리일행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3시 30분경에 계림비행장에 도착하여 출국수
속을 마친후 5시 40분에 중국남방항공기에 탑승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 30분이다. 서울에 도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무덥기
는 계림과 별차이가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이곳 서울의 날씨
도 금년들어 가장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공항 입국대를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고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동안 다져졌던 우정을 뒤로한체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며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