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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지혜의 원천
유대인 가운데 유독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된 까닭 중 하나가 바로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습관을 길러 준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해낼 수 있는 비결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씨앗이 곧 질문인 셈이다.
- 본문 ‘노벨상을 받도록 하는 질문’ 중에서 -
라과디아 판사의 명판결
뉴욕에 가면 「헨리 라과디아」라고 하는 시장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다. 그 당시는 시장은 판사를 겸할 수 있어서 라과디아시장도 뉴욕의 야간 판사 일을 보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밤,남의 물건을 훔친 죄로 한 노인이 라과디아판사 앞에 서게 되었다. 판사는 의례적으로 물었다.
“무엇을 훔쳤습니까?”
노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판사는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왜 훔쳤습니까?”
노인은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답하였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말을 끝마친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신은 집도 없고 자식도 없으며, 그리고 며칠째 굶주렸다는 등을 상세하게 호소하듯 말하였다.
잠시 후, 라과디아판사는 엄숙히 판결을 내렸다.
“할아버지, 법은 법입니다. 제겐 법을 법대로 집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 10불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죄를 짓게 만든 저를 비롯해 이 뉴욕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10불, 그리고 이 재판정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5불씩 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발상
천재적인 수학자 독일의 가우스(1777~1855)는 어려서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1에서 100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되느냐는 문제를 냈다. 선생님은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는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연습장에 1+2=3, 3+3=6, 6+4=10 등 덧셈 계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가우스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다 했어요.”
자기 일에 골몰했던 선생님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우스의 연습장을 보니 정확히 5,050이라는 숫자가 적혀져 있었다.
“너 이런 문제가 나올 줄 알고 미리 집에서 계산해 봤니? 그런데 계산한 흔적은 없잖아?”
“아닌데요, 선생님. 방금 계산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할 수 있었니? 선생님도 그렇게 빨리는 못 하는데…….”
가우스는 자신이 계산한 방법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첫 숫자 1과 끝 숫자 100을 더하며 101이 됩니다. 두 번째 숫자 2와 99를 더해도 101이 됩니다. 3과 98도 101, 4와 97도 101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101은 모두 50번이 됩니다. 그러면101× 50은 5,050이 되는 것입니다.”
가웃은아주 간단하고 독창적인 계산법을 알아내었던 것이었다. 가우스의 계산법을 본 선생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수학 공식이 바로 유명한 등차합의 공식이다.
그리스의 이상한 동상
그리스의 시라쿠사 거리는 이상한 동상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다.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많은 관광객은 동상을 보고 처음에는 모두가 웃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밑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보고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감명을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동상의 앞머리는 검은 머리숱이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발에는 날개까지 달린 이상한 형태의 동물상이었다.
그런데, 동상의 아래에는 그리스어와 영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함은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요,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것은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니라.」
그리고는 맨 아랫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니라.」
기회는 앞에서는 크게 잘 보이지만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속도 또한 눈 깜짝할 만큼 빠르다. 그래서 기회의 포착은 바로 그 사람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것이므로 평소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통찰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모차르트의 코
위대한 인물이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국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모차르트(1756~1791)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어느 날, 모차르트는 아무도 칠 수 없는 피아노의 화음을 쳐 보이겠다고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 화음의 악보를 오선지에 그렸다.
그 악보는 오른손과 왼손을 다 동원하고도 하나가 모자라는 11개의 건반을 동시에 눌러야 하는 악보로 사람들이 도저히 칠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러자 친구들이 비웃었다.
“이걸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자 모차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분명히 할 수 있어.”
모차르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열 손가락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면서 나머지 검은 건반 하나를 그의 코로 살짝 눌러주었다. 이렇게 하여 11개의 건반을 동시에 누르면서 멋지게 연주하였다.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중한 일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픈 인생은 더욱 중요한것을 한 번 해 보겠다는 의지가 아닐는지…….
두 개의 다른 텔렉스
두 사람의 세일즈맨이 신발을 수출하기 위해서 현지 실사를 하려고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기가 막힐 일이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가 신발을 신지 않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발을 수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민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두 사람은 다른 나라도 돌아다녀 보기로 하였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두 사람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본사에 다음과 같은 텔렉스를 보냈다. 한 사람의 텔렉스 내용은 당연히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가능성 0%, 전원 맨발, 신발 수출 불가」
아프리카 사람들은 맨발로 살고 있었고, 그들은 신발을 사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신발 수출은 불가능하다고 본 이 사람의 생각은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텔렉스 내용은 전혀 달랐다.
「가능성 100%, 전원 맨발, 신발 수출 가능」
정말로 엄청난 시각의 차라고 할 수 있었다. 같은 사실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사물을 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시각이 있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의미한다. 이렇듯 같은 사실을 두고 사람들의 판단은 사뭇 다를 수 있으나 우리는 긍정적인 시각을 갖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묻는 방법의 차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의 교육적 요소가 있다. 첫째는 탈무드이다. 5천 년에 걸친 유대인의지적 자산이 농축된 책이다. 둘째는 랍비이다. 유대인의지혜로운 선생을 의미한다. 셋째는 어머니이다. 유대인의교육은 가정에서 출발하고 그 가르침은 어머니에게서 나온것이다.
어느 날, 유대인학생들 사이에 《탈무드》를 공부할 때 담배를 피워도 괜찮은지, 아니면 안 되는지가 화두가 되었다. 한 학생이 랍비에게 물었다.
“랍비님, 탈무드를 공부할 때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그러자 랍비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돼.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런! 자네는 묻는 방법이 잘못되었네. 그럼 이번에는 내가 가서 한 번여쭤볼게.”
그는 랍비에게로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랍비님,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탈무드를 읽어야겠지요?”
그러자 랍비는 미소를 띠면서 대답하였다.
“물론, 그래야 하고말고!”
어떻게 묻느냐의 방법에 따라 여러 상황의 답이 나온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묻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도 그 사람의 자산이다.
미켈란젤로와 보틀 도
이탈리아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이며 건축가, 시인이기도 한 미켈란젤로(1475~1564)에게는 보틀 도 지오바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보톨 도의 문하생이 되고자 그를 찾아갔었다. 보틀 도는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금방 알아보고는 그에게 물었다.
“훌륭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하였다.
“저의 재능과 기술을 더욱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틀 도는 아무런 대답 없이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시내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처음에 간 곳은 술집이었다. 술집 문 앞에 아름다운 여인상 조각이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커다란 천사상이 조각된 성당 앞이었다.
두 곳을 보고 온 보틀 도는 미켈란젤로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두 곳의 조각을 모두 보았느니라. 두 곳의 조각을 각각 어떻게 보았느냐?”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스승님, 술집 앞의 여인상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요, 성당의 천사상은 신비로울 정도로 거룩하였습니다.”
보틀 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술집 앞의 여인상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결국 술집을 위해 작품을 조각한 셈이요, 성당 앞의 천사상은 신의 영광을찬양하기 위해서 세워진 작품이란다. 너는 앞으로 너의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이길 바라느냐?”
공자의 아들 교육
세계의 4대 성인인 고대 중국의 공자(BC 551~BC 479)에게는 진항이란 제자가 있었다. 그는 공부하면서도 늘궁금한 것이 있었다. 스승인 공자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틀림없이 자기들을 가르칠 때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가르칠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어느 날, 진항은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아버님으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고 있겠지?”
그러나 그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언젠가 뜰에 서서 계실 때 그 옆을 지나가는데 저를 부르시더니, ‘시를 아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아직배우지 않았다고 했더니 시를 모르면 남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시를 공부했지요.”
진행이다시 물었다.
“시를 익힌 뒤에는 다른 것을 더 배우지 않았나?”
백어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예를 아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배우지못하였다고 했더니 예를 배우지 못하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공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별도의 특별 교육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다른 아버지들이 다 그랬듯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식이 스스로 익히고 깨우치도록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한 젊은 작가가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에 태어났으며, 그도 역시 나폴레옹과 같은 훌륭한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점차 황제가 되려고 하자, 젊은 작가는 누구보다 반대하였고 나중에는 괘씸죄에 걸려 작은 외딴 섬에서 19년이나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오로지 문학에만 몰두하였다. 그때 그는 한 편의 소설을 썼고, 그 원고를 파리에 있는 출판사 대표에게 보냈다.
그런데 망명지의 특성상 바깥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관계로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작품이 출간되었는지? 출간되었다면 반응은 어떠한지? 등 모든 것이 무척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어 출판사 대표에게 편지를 썼다. 물음표《 ? 》하나만 달랑 적어 보낸 것이었다.
얼마 후, 출판사 대표로부터 그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답장에는 느낌표 《 !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다. 출판사 대표의 답장인 《 ! 》의 뜻은 너무 훌륭하오! 너무 잘 팔리오! 정말 축하하오! 라는 함축된 말이었을 것이다.
그 작가가 바로 빅토르 위고(1802~ 1885)였으며, 출판사 대표는 허스트 사장이었다. 그때 출간된 소설이 「레미제라블」로 우리에게는「장발장」으로 더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고 그때 주고받은 편지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편지였다고하니, 불후의 명작 뒤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나 보다.
어느 기자의 재치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국경에 있는 우수파야타(해발 3832m) 고개에는 예수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안데스의 예수상(7m)’이라고 불리는 이 청동상은 양국의 국경 분쟁이 평화롭게 타결된 것을 기념하여 1904년에 제작되어 세워졌다.
동상은 그 후, 100년 동안 양국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며, 굳건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착공되던 당시에는 동상의 방향을 두고 한바탕의 소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형과 여러 가지 조건들을 따지다 보니 동상이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쪽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칠레 국민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예수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저들에게만 예수의 축복이임하라는 거야?”
칠레 국민의 원성이 커지자, 양국 간의 화해 분위기는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난국을 해결한 것은 다름 아닌 어느 기자의 재치 있는 기사 한 줄이었다. 예수상을 취재하던 기자는 기사 끝에 예수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풀이하였다.
「예수상이 아르헨티나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은 아직도 그 나라를 더 많이 돌봐줘야 할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사를 본 칠레 국민은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새롭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해법, 그것도 몇 줄의 문장으로 제시한 기자의 재치로 양국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운명은 내 손안에
어느 절에 지혜로운 스님이 살았다.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거침없는 말솜씨로 남을 감동하게 했다. 어느 날 장난꾸러기 소년이 손에 작은 새 한 마리를 잡아 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이 새가 죽은 건가요? 아니면 살아 있는 건가요?”
만일 스님이 살았다고 하면 목 졸라서 죽여 버리고, 죽었다고 하면 날려 보내면 스님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그 새의 생사는 네 손에 달렸지, 내 입에 달린 그것이 아니란다.”
장난꾸러기 소년은 새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스님은 어떻게 이토록 지혜로우신가요?”
그러자 스님이 대답하였다.
“얘야, 나도 매일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지혜가 생기기 시작하더구나. 너는나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 같구나.”
그러나 아이는 슬픈 기색을 보이며 말하였다.
“어머니께서 점을 보셨는데 제 운명은 엉망이래요.”
스님은 잠깐 침묵하더니 아이의 손을 당겨 잡았다.
“얘야, 네 손금을 좀 보여주렴. 이것은 감정선, 저건 사업 선, 이건 생명선이란다. 자, 이제는 주먹을 꼭 쥐어 보렴.”
아이는 주먹을 꼭 쥐고 스님을 바라보았다.
“얘야, 네 감정선, 사업선, 생명선이 어디 있는고?”
“바로 제 손안에 있지요.”
“그렇지, 바로 네 운명은 네 손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네 운명을 포기하지 말아라!”
두 여인
어느 날, 두 여인이 하느님을 찾아갔다. 한 여인은 울면서 하느님께 자기 잘못을 고백하였다.
“저는 배가 너무 고파 옆집의 쌀을 훔쳤어요.”
그러자 다른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친구가 하느님을 찾아뵙기에 부끄럽다고 해서 함께 따라왔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잘못을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잘못을 지었다고 고백한 여인에게 큰 돌을 하나 집어 오라고 하고,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는 여인에게는 조약돌을 여러 개 집어 오라고 했다. 두 여인은 하느님이 시키신 대로 돌을 주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돌을 제자리로 갖다 놓으라고 했다. 잘못을 저지른 여인은 큰 돌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말한 여인은 여러 개의 조약돌의 위치를 모두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하느님은 말씀하였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 중에서 큰 잘못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생활 속에서 짓는 작은 잘못은 잘못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어 쉽게 잊는 법이니라.”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생활 태도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길일 것이다.
사물의 가치를 보는 눈
‘낡은 벼루조차도 먹을 가는 도구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라는 당송 8대가 이며, 유명한 정치가인 구양수(1007~1072)의 시 《낡은 벼루》처럼 사물과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하겠다.
고대 중국 북송 8대 황제 휘종(1082~1135)은 사물의 가치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그중에서도 예술품에 관한 관심은매우 컸다. 한 번은 그가 나라 안팎의 유명한 화공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독특한 그림 문제를 냈다.
「깊은 산중에 옛 절이 감추어져 있는 그림을 그려라」라는 주제를 제시하며, 특히 감추어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고 간곡히 주문하였다.
많은 화공이 머리를 싸매고 골머리를 앓다가 희미하게 작은 절을 그려 넣거나 절과 탑을 함께 그리는 식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유독 한 화공의 작품에는 절이 없었다. 대신 깊은 산 속 계곡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 동자 스님만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을 본 휘종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다른 화공들은 절과 탑에 집착했으나 이 화공은 물을 길어 가는 동자 스님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근처에 절이 있음을 짐작게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뜻이나 가치를 제대로 찾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니발 장군과 동전
고대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니발(BC 247~BC 183) 장군은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1) 때 로마군에 대항해 카르타고군을 지휘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서 로마로 침공할 때 아군보다 열 배나 많은 적군과 싸우게 되었다.
싸움터로 가는 도중, 한니발 장군은 갑자기 기도원으로 들어가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나오면서 그의 손에 동전 한 닢을 들고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난 기도를 마쳤다. 내 기도는 틀림없이 영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이 동전을 던져 영험을 시험코자 한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승리할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패배할 것이다.”
장군은 비상한 표정으로 동전을 하늘 높이 던졌다. 병사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동전을 주시하였다. 앞면인 것이었다.
“와! 앞면이다! 앞면이다! 우리가 이긴다.!”
함성과 함께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승리를 확신한 그들은 용감히 적을 무찔렀다. 승리를 자축하는 잔치에서 한 부하 장수가 장군에게 말했다.
“운명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저희보다 열 배나 넘는 적을 이렇게 이기다니 말입니다.”
한니발 장군은 웃으며 말하였다.
“싸움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상대편 적군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라네.”
그러면서 그의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가 던진 동전은 앞면과 뒷면 모두가 똑같은 그림이었다.
외눈 임금의 초상화
옛날에 외눈을 가진 임금님이 자기가 죽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고 싶어 전국에 이름난 화가들을 모두 모았다. 하지만 임금님은 한쪽 눈이 없으므로 화가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화가는 임금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두 눈을 모두 가진 모습을 그렸고, 다른 화가들은 솔직하게 외눈을 가진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초상화를 살펴보던 임금님은 두 눈을 모두 그린 초상화는 자신의 거짓된 모습이라 싫었고, 실제의 모습으로 그린 초상화는 너무나 보기 흉해서 싫었다.
임금님은 언짢은 표정으로 이렇게 푸념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들만 모두 불러 모았건만 내 마음에 드는 초상화 하나 제대로 못 그리다니…….”
그때였다. 젊은 화가가 조심스럽게 임금 앞으로 다가와 그가 그린 초상화를 내밀었다. 임금은 초상화를 들여다보면서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감탄하며 말하였다.
“음, 그래. 바로 이 그림이야!”
젊은 화가는 어떻게 그렸을까? 그가 그린 초상화는 한쪽 눈에 인자한 미소를 담은 임금님의 옆모습이었다.
청어잡이
영국의 북해는 세계의 4대 어장으로 청어잡이가 특히 유명하다. 오래전부터 그곳의 어부들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산 채로 운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잡은 청어는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거의 다 죽어서 번번이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시설과 운송 수단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어부만은 청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가져와서 큰돈을 벌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 비결이 궁금해서 은근히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어부는 차분히 대답하였다.
“비결이랄 게 뭐 있는가? 난 그저 청어가 들어있는 통에 청어를 잡아먹는 고기 한 마리를 집어넣었지. 그렇게 하면, 몇 마리는 잡아먹히겠지만 다른 수백 마리의 청어는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을 다니거든. 그러니 그놈들이 런던에 도착해서도 싱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위의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을 싱싱한 삶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조명해 주는 이야기이다. 다 죽어 가는 것 같은 삶이 아닌, 활기차게 살아 있는 삶을 위해서는 우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하는 어떤 동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삶의 목표가 없거나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싱싱한 삶도 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손쉬운 목표나 소박한 꿈이라도 세워 차근차근 이루며 사는 것이 활기찬 인생일 것이다.
철조망의 탄생
미국의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조셉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목장에서 양이 울타리 넘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을 하였다. 당시 목장의 울타리는 철사를 빨랫줄 모양으로 연결하게 했거나 말뚝을 박은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어느 날, 아들 조셉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양들이 철사로 친 담을 넘어 근처의 밭을 쑥밭으로 만들어요. 철사에 가시를 붙이면 양들이 뛰어넘을 수 없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의 착상에 재미를 느끼고 이튿날 목장으로 갔다. 미리 준비한 짧은 철사를 담 여기저기에 붙여놓았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시철사, 즉 철조망이 탄생하였다.
철조망이 처음에는 담을 치는 데만 사용되었으나, 점차 도난 방지용이나, 군대의 방어용으로 쓰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됐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사용된 철조망은 전쟁에 사용된 포탄보다 몇 배나 많았다고 하였다.
조셉 부자가 17년 동안 벌어들인 수익금은 11명의 공인회계사가 일 년이 걸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한낱 시골 마을의 조그마한 대장간에서 이렇게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가시 달린 철사, 즉 철조망이라는 간단한 신제품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었다.
피카소의 무명 시절
세계적인 미술가 피카소(1881~1973)도 무명의 시절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실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초라한 화가였다. 몇 해 동안 그림을 한 장도 팔지 못한 채 그는 파리 시내를 방황하였다. 당시 화랑에서는 널리 이름이 알려진 화가들의 그림만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작품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피카소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대학생 몇 명을 고용하여 화랑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시켰다.
“여기 혹시 피카소의 그림이 있습니까?”
그리고 때로는 이런 질문도 하도록 하였다.
“이곳 말고 피카소의 그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화랑의 주인들에게 피카소라는 이름 세자를 널리 알리려는 의도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 화랑에서 피카소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하지만 은밀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피카소는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않았다. 화랑 주인들은 그의 명성만 들었을 뿐 작품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관심이 극에 달했을 때 피카소의 그림이 화랑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림은 모두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피카소를 배경과 시대를 잘 만난 행운아라고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서 행운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홍보해 성공을 이룩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생각의 전환
1891년,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에서제럴드 필립스 형제가 설립한 필립스는 필라멘트 램프 생산 회사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1939년에 이 회사에서 세계 최초로 전기면도기를 개발하여 출시할 당시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면도기 하면 남성들만 쓰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긴다. 그러나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면도기 사는 돈에는 인색한 것이 남성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게다가 전기면도기는 습식면도기보다 비싸므로 남성들은 더더욱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이런 고민에 깊은 빠진 필립스는 회사 사원들을 상대로 판매의 좋은 방안을 공모코자 하였다. 그런데 한 영업 사원의 응모 내용을 보고, 필립스 사장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기면도기 판매 대상의 주 고객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하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즉, 여성 고객의 구매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평소에 인색한 여성들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아버지의 선물 구매에는쉽게 지갑을 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결과 현재 필립스 전기면도기의 61%가 남성의 선물용으로 여성들에게 팔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 세계 전기면도기 시장의 47%를 차지하는 필립스의 성공 비결은 바로 ‘생각의 전환’, 즉 ‘역발상’에서 출발하였다. 필립스는 이런 발상의 전환으로 전기면도기뿐만 아니라 각종 가전제품에서 세계적인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유머의 효과
미화 10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 있다. 런던에서 최신 인쇄 기술을 배운 그가 필라델피아로 건너와 인쇄업에 막 뛰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과감하게 사업을 추진하던 그의 열정은 기존 인쇄업자들을 긴장하게 했고, 마침내 그들은 서로 단합하여 시 정부와의 계약에서 그를 따돌리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그는 그 지역의 인쇄업자들을 사무실로 초대하였다. 탁자 위에 이상한 수프를 한 접시씩 내놓았다. 인쇄업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머뭇거리자, 그는 먼저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초대받은 손님들도 한 입씩 떠 넣었으나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수프란 말이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태연히 대답하였다.
“톱밥 수프입니다. 요즘 제가 형편이 좋지 못해 톱밥으로 연명하고 있지요. 저도 먹고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조금씩 양해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유머에 인쇄업자들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그를 인쇄업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 기초위원인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마디의 유머가상대방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데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노벨상을 받도록 한 질문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1898~1988)라는 물리학자가 있었다. 유대인으로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원자시계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공으로 194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지금 자동차 내비게이션을이용해 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학자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핵의 자기 공명 기술을 개발해 냈을 때 일이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박사님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까? 혹시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사람들은 그가 어떤 비결을 말할지 궁금하며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때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오늘 공부 시간에는 선생님께 무슨 질문했니?’그것이 바로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비결입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니?’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니?’라는 흔한 질문보다는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라는 구체적인 답변을 필요로하는 질문을 통해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유대인 가운데 유독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된 까닭 중 하나가 바로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습관을 길러 준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해낼 수 있는 비결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씨앗이 곧 질문인 셈이다.
웰링턴 장군과 소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1769~1821)에게 승리를 거둔 세계적인 영국의 명장 웰링턴(1769~1852). 장군은 어느 날 여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여우 사냥을 나갔다. 여우를 발견한 장군은 잽싸게 달렸다. 그런데여우는 도망가다 그만 담장을 높이 쌓은 농장으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장군이 탄 말은 담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웰링턴은 말머리를 돌려서 농장의 앞문으로 갔다. 앞문을 통하지 않고는 농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장 앞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앞문을 지키는 한 소년이 그를 가로막았다.
“얘야, 어서 문 열어라! 여우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아버지의 분부입니다. 절대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소년의 완강한 태도에 웰링턴 장군이 소리를 질렀다.
“이놈! 나는 웰링턴 원수이다. 그래도 문을 못 열겠느냐?”
눈이 휘둥그레진 소년은 대뜸 큰절하였으나 그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각하! 아버지께서는 남의 농장을 사냥터로 삼는 사람들 때문에 담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런데 각하와 같으신 분이 농민의 속사정을 알아주시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렇구나. 내 오늘 비록 여우는 놓쳤으나 너로 인하여 귀한 교훈을 얻었구나.”
웰링턴은 흐뭇하게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조용히 떠났다.
가야의 얼을 연주하던 악기
일찍이 고산 윤선도가 ‘우연히 가야금을 열어 한 번 타보니, 냉랭한 열두 줄이 내는 소리가 홀연히 높은 신선의 마음 자취를 보는 것 같다’라고 한 가야금에는 이런 유례가 있다.
음악을 무척 좋아하던 가야의 가실왕은 나라의 악기가 없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중 궁중의 악사로 있는 우륵이 음악에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당부했다.
“쟁이나 비파는 모두 중국 악기가 아닌가. 나라마다 그 나라의 말이 있고 소리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대가 가야에 맞는 악기를 만들 수는 있겠는가?”
이에 우륵은 몸통을 오동나무로 하고, 그 위에 열두 줄을 올리고 기러기발 모양의 괘를 괴어 줄의 소리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줄을 퉁기면서, 왼손 각 손가락으로 기러기발 바깥쪽을 눌렀다 놓았다 하면 줄이 떨려 소리가 나도록 했다.
가실왕은 이 악기를 나라의 이름을 딴 ‘가야’와 현악기의 옛말인 ‘고’를 붙여 ‘가얏고’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가야금’은 한자음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얏고’였다. 우륵은 가야의 여러 곳을 다니며, 가얏고에 맞는 열두 곡을 작곡했고, 왕은 이 곡을 가야국의 음악으로 삼았다.
가야가 신라에 망한 후 우연히 우륵의 연주 소리를 들은 진흥왕은 가얏고의 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얏고를 온 신라에서 즐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생각의 틀
어느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가 입사 지원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어떤 방법이든 열흘 동안 스님들에게 나무 빗을 가장 많이 판 사람을 영업부장으로 뽑는다고 하였다.
스님에게 빗을 팔라는 황당한 제안에 마지막까지 시험에 응한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열흘 뒤, 흩어졌던 세 사람이 회사로 돌아왔다. 인사 담당자가 첫 번째 지원자에게 얼마나 팔았는지 물었다.
“열흘 동안 산속 절에서 헤매는데 바위에 앉아 두피를 긁고 있는 스님을만나 재빨리 빗을 내밀었죠. 스님은 빗으로 두피를 긁어보더니 시원하다면서 한 자루를 사더군요.”
이번에는 인사 담당자가 두 번째 지원자를 쳐다봤다.
“저는 유명한 고찰을 찾아갔지요. 절을 찾는 참배객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다 엉켜 버렸더군요. 그래서 저는 주지 스님에게 ‘이나무 빗을 문밖에 비치하면 참배객들이 머리를 단정히 빗고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죠. 그 산에는 절 이 두 열 곳이나 되어 열 자루를 팔게 되었지요.”
마지막 세 번째 지원자에게도 몇 자루를 팔았는지 물었다.
“천 자루 팔았습니다.”
인사 담당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많이 팔았죠?”
“저는 신자들이 많은 절을 찾아가 주지 스님을 만나 ‘신자들이 더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찾기 위해서 기념할 만한 답례품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져온 이 나무 빗에 적선소(積善梳, 선을 쌓는 빗)라는 글자를 새겨 스님이 직접 답례품으로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그 자리에서 나무 빗 천 자루를 사셨습니다.”
남의 능력을 인정하라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BC 685~643 재위)이라는 뛰어난 군주가 있었다. 그는 뛰어난 인재를 얻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하루는 허름한 차림의 선비가 찾아와 자신을 써 달라고 졸랐다.
환공이 물었다.
“그댄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선비가 대답하였다.
“구구단을 잘 외웁니다.”
환공은 어이가 없어 화를 내었다.
“뭐라고, 날 놀리는가?”
그러자 선비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맞습니다. 제 능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공께서 인재를 구하려고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환공께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계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찮은 재주지만 구구단 외우기를 잘하는 저를 인정해 주신다면 앞으로 저보다 훨씬 유능한 인재가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환공은 선비를 자기 사람으로 거두어 주었다. 과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환공은 이런 인재들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제후들 사이의 동맹을 체결하여 맹주로서의 위신을 세워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왕이 될 수 있었다.
백낙천과 도림선사
중국 당송 8대 문장가 중 백낙천(772~846)은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정치가였다. 그가 항주 땅 자사로 부임한 후 늘 자신의 뛰어난 학문과 지혜를 과신한 나머지, 학문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 골탕을 먹이고는 우월감을 즐겼다.
항주 땅에는 부처님으로 추앙받는 도림선사가 있었다. 하루는 백낙천이 수행원들을 잔뜩 거느리고 도림선사를 찾아갔다. 도림선사 역시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사찰 경내의 큰 고목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새집처럼 작은 평상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좌선하곤 하였다.
“어떤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까?”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외다.”
선사의 단순한 대답을 듣자, 백낙천은 소리 높여 웃었다.
“소문에 스님께서 고승이라고 해서 귀한 시간을 쪼개 찾아 왔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소이다. 그런 이야기는 서당에다니는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오.”
도림선사가 엄숙한 어조로 말하였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외다."
이 말이 백낙천의 가슴을 아프게 쳤다. 지행일치(知行一致), 즉 ‘아는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 단순한 진리를 도림선사는 백낙천에게 다시 일깨워 준 것이다. 그 후, 그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버리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며, 후대에 크게 이름을 떨친 훌륭한 시를 많이 지었다.
속기용 노트를 든 청년
미국 철강업계의 거물인 찰스 슈왑 회장의 자가용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한 철강공장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슈왑 회장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속기용 노트를 든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자신은 총무과에 소속된 속기사인데 혹시 편지나 전보를 보내실지 몰라 급하게 왔노라고 말하였다.
슈왑 회장은 청년을 찬찬히 바라보며 물었다.
“나에게 가보라고 시킨 사람이 누군가?”
청년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이곳으로 도착하신다는 전보를 보고 혹시라도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슈왑 회장은 다시 물었다.
“그런가? 지금 당장은 자네가 할 일이 없네, 그런데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청년이 “윌리엄스”라고 대답하자 회장은 그의 이름을 주의 깊게 기억하려고 하였다.
그날 밤, 뉴욕을 향하는 슈왑 회장 자가용 비행기 안에는 낮에 보았던 청년이 회장 곁에 있었다. 그를 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수년간 열심히 일하였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슈왑 회장의 철강회사 계열사 중 하나인 제약회사의 사장이 된 입지적인 인물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다른 판단력과 통찰력, 그리고 용기는 곧 성공의 열쇠가 되는가 보다.
흡족하게 하는 말솜씨
한 이발사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젊은 도제 하나를 들였다. 1년 동안 기술을 열심히 익힌 젊은 도제는 드디어 첫 번째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배운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첫 번째 손님의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거울을 본 손님은 투덜거렸다.
“머리가 너무 길지 않나요?”
초보 이발사가 아무런 답변도 못 하자 그를 가르쳤던 스승 이발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손님같이 중후하신 분은 머리가 너무 짧은 것보다 긴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걸요.”
그 말을 들은 손님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다. 두 번째 손님이 왔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말했다.
“너무 짧게 자른 것 아닌가요?”
초보 이발사가 역시 아무런 대꾸를 못 하니, 옆에 있던 스승 이발사가 다시 거들며 나섰다.
“손님같이 지성적으로 보이는 분은 긴 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훨씬 잘 어울리신답니다.”
이번에도 손님은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손님이 왔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머리 모양은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막상 돈을 낼 때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 것 같군.”
그러자 이번에도 스승 이발사가 나섰다.
“머리 모양은 그분의 인상입니다. 손님같이 성공하신 분의 머리는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다듬어야 하지요.”
절대 떨어지지 않은 사과
몇 해 전 가을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 아오모리현의 농민들은 한탄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 지방을 휩쓸고 간 태풍으로 일 년 내내 애써서 키운 사과가 90% 정도나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과 재배를 많이 하는 고장인지라 그 지역 경제적 타격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의에 빠진 농민들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이 괜찮다며 농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연구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다.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에 특별한 이름의 상표를 붙여서 팔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은 사과’
이 기발한 발상은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보통 사과보다 10배 이상의 비싼 가격으로 내놓아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그 사과는 특히 시험 준비를 앞둔 수험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단지. ‘떨어지지 않은 사과’라는 이름 덕에 너도나도 그 사과를 구하기 위해 아우성치며, 나중에는 없어서 못 팔정도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한 사람의 뛰어난 아이디어로 땅에 떨어진 90%의 사과보다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에 주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 인기몰이한 ‘행운의 사과’의 시초가 되었다.
코카콜라병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멋진 아이디어 하나가 크게 성공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미래의 정보화 사회에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한 청년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그는 도시로 나가 신문 배달, 구두닦이, 철공소 심부름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다 유리병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1960년대, 그 당시 미국에서는 코카콜라가 새로 나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래서 코카콜라 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코카콜라병의 모형을 현상 모집을 하였다.
첫째, 모양이 예쁘고,
둘째,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으며,
셋째, 보기보다 양이 적게 담기는 병.
청년은 이 소식을 듣고 새로운 코카콜라병을 만들려고 6개월이나 연구를 거듭했기만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자 친구와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여자 친구는 허리가 잘록한 주름치마를 입고 나왔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청년은 지금과 같은 코카콜라병을 창안해 공모한 결과 최우수로 선정되었다.
그가 바로 번 루프이었다. 그는 그 후, 고향에 돌아가 유리 제품 공장을 경영하였다.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하며 공장을 경영하여 회사를 크게 키웠다고 한다.
부산 유엔 묘지와 정주영 회장
1952년 정주영(1917~2001) 회장에게 참으로 기발한 공사 제의가 들어왔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겨울이고 유엔군 묘지는 한창 조성 중이라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곳을 6ㆍ25 한국전에 참전한 각국 유엔 사절들이 내한해서 참배할 계획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8군 사령부는 정주영 회장이라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맡긴 것이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의를 받고 참배 날짜까지는 불과 한 주일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난감한 정주영 회장의 기지가 발휘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미군이 요구하는 것은 잔디가 아니다, 파란 풀이면 된다. 그렇다면 참배객이 둘러보는 동안 파란 풀만 눈에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정주영은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 회장은 아이디어 경비를 포함해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돈이 문제가 아닌 미8군 측은 당장 계약을 체결하였고, 모든 것을 정 회장에게 일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계약을 맺자마자 정 회장은 트럭 30대를 끌어모아 낙동강 둔치의 보리밭으로 갔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하게 남아 있는 건 보리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정 회장은 주변에 있는 보리밭의 보리를 몽땅 구매하여흙과 함께 보리를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를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크게 뜨고 감탄했다고 한다.
자동차 심사위원
프랑스의 작가 루이 페레스트는 어느 날 한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인 대회일 것이라고 짐작한 그는 장소가 휴양지인지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대회장을 향하였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루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인들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아름다운 자동차를 뽑는 대회였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근사한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루이는 마땅한 심사기준이 없어 고심하였다.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렇게 말하였다.
“겉모습은 모두 훌륭하군요. 자, 이제 내부를 볼까요? 모두 자동차 보닛을 열어 주십시오.”
느닷없는 요청에 차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근사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가 지저분한 차가 대부분이었다. 루이는 순위를 아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사에 불만을 품은 자동차 주인들이 몰려와 거세게 항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모터까지 심사 대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그러자 루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재치 있게 대답하자, 자동차 대회에 참가하였던 사람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시오. 미인 대회를 열면서 참가자들에게 목욕하고 오라고 합니까? 기본적인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갈고 닦지 않은 보석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에 변화라는 사람이 초산(楚山)에서 옥 덩어리를 얻었다. 겉보기에는 돌 같았지만 진귀한 옥의 원석이 틀림없었다. 그는 여(麗)왕에게 옥 덩어리를 선물했고, 여왕은 옥장이에게 이를 감정케 했다.
“이것은 돌입니다.”
여왕은 자신을 우롱했다고 생각해 변화의 왼발 발꿈치를 잘랐다. 시간이 흘러 여왕이 죽고 아들 무왕이 즉위했다. 변화는 그것을 다시 무왕에게 선물했다. 무왕도 옥장이에게 이를 감정하게 했으나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것은 돌입니다.”
화가 난 무왕 역시 그의 다른 쪽의 발꿈치를 잘랐다. 그 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였다. 변화는 초산 아래에서 3일 밤낮으로 울었다. 문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변화를 불렀다.
“천하에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우는가?”
“형벌을 받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품 평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오며, 곧은 선비를 사기꾼이라 부 르니, 이것이 더욱 애통하고 슬퍼하나이다.”
문왕은 옥 덩어리를 갈고 닦도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돌처럼 보이던 옥 덩어리는 마침내 그 진목면을 드러냈다. 후에 이 옥은 15개 성(城)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고, 진시황은 자기의 옥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갈고 닦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법인가 보다.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1951년 영국령 북아일랜드에 브루어리 양조회사를 경영하던 한 백작이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 남동쪽 웩스포드에 위치한 슬레이니 강변에서 새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골든 플로버’라는 물새가 워낙 빠르다고한 마리도 사냥하지 못하고 동행했던 친구들에게 망신만 당하였다.
그는 친구들과 ‘골든 플로버’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새인지에 관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질문들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책을 제작한다면 상당히 유용할 그거로 생각하고,런던의 리서치 센터(기록광으로 이름난 ‘노리스’와 ‘로스 맥휘터’ 쌍둥이 형제가 운영)에 출판을 의뢰했다.
그 후, 쌍둥이 형제는 한 해 동안 부지런히 조사하여 마침내 1955년 8월 27일, 총 198페이지에 달하는 최초의 《기네스북》을 완성하였다. 그 책의 이름은 자신의 양조회사의 이름을 따서 《기네스북 오브 월드 레코드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라 하였다. 그가 바로 기네스 백작의 4대손인 휴 비버(1890~1967) 경이다.
이 책에는 사진과 그림을 곁들여 세계 최고 기록들만 담아 초판에 5만 부를찍었으나 한 달 만에 매진되었고, 그 해 베스트셀러 톱을 차지했다. 최근까지도 영국 내 도서관에서 가장 잘 분실되는 책도 《기네스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골든 플로버’ 새에 관한 기록은 빠졌다고 한다.
갈매기의 꿈
미국의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글귀로 유명한 우화 소설 《갈매기의 꿈》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작가인 리차드 바크(1936~ )라는 사람이 있었다.
갈매기의 무리 중에 조나단이라는 갈매기가 있었다. 그 갈매기는 나는 법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진실을 추구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그런 조나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나단은 할 수 없이 갈매기 무리에서 추방당하고 혼자 나는 기술을 연습하다가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갈매기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새로운 형제들과 함께 수없이 나는 방법을 체득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나는 방법들을 다른 갈매기들에게도 전해주면서 단지 먹고 생존하는 그것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전해주러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추방당하고 말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진실한 존재 의미에 대한 그의 꿈은 이어져 나간다는 줄거리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이런 시사점을 주었다.
「배움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고, 삶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요, 가르침이란 우리가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깨우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늘 배우고, 살면서,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변함없는 가치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저명한 문학 교수인 레이먼드 위버에게 한 학생이 찾아 왔다. 그 학생은 독서량이 대단하다고 소문난 위버 교수가 과연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지 한 번 알아볼 속셈이었다.
학생은 위버 교수에게 책 한 권을 내밀며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이 책을 읽으셨는지 궁금해요.”
위버 교수는 잠시 살펴보고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직 읽지 못했네.”
그러자 학생이 정색하며 다시 말했다.
“아니, 이 베스트셀러를 안 읽으셨단 말이에요? 나온 지 3개월이나 지났다고요.”
잠시 뒤 위버 교수는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학생에게 보여주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단테의 《신곡》을 읽었나?”
학생은 머뭇거리며 아직 읽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위버 교수는 차분히 말했다.
“나는 나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책을 못 읽었지만 자네는 600년도 넘은 책을 읽지 않았군.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그에못지않게 중요하다네.”
강의실에서 수강하는 노교수
베를린 대학의 자연지리학 강의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젊고 활기찬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 유독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한 사람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앉은 노신사는 교수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적었다. 그런 노신사를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한 학생이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연지리학의 대가이신 박사님이 아닙니까?박사님께서 이런 기초적인 강의를 들으시다니요?”
그러자 박사는 혹시라도 수업에 방해가 될까 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공부하는 중이라네.”
그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훔볼트(1769~1859) 박사였다. 그는 자연지리학뿐만 아니라 언어학과 철학에서도 한 학맥을 이룬 대가이기도 하였다.
독일 정부는 나중에 동독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공산당 서기장의 관저를 부수고 그곳에 그의 이름을 따서 훔볼트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을 졸업한 학생 중에는 아인슈타인, 카를 마르크스 등 3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대가가 아닐는지…….
사막의 진주
낙타를 타고 사막을 다니며 보석을 파는 상인 두 사람이 같은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경쟁자로 여기고 있던 터였다. 상인 한 사람이 실수하는 척하면서 커다란 진주를 하나 떨어뜨렸다. 진주는 다른 상인 앞으로 굴러갔다. 상대방은 진주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하였다.
“매우 크고 광택이 아름다운 좋은 진주이군요.”
진주의 주인은 자랑스럽게 진주를 받아 들었다. 그때 진주를 돌려준 상인이 말하였다.
“사실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진주들과 비교하면 가장 작은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때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 행인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한때는 보석상이었소. 어느 날 사막에서 큰 돌풍을 만나 동료들과 흩어져 고립되고 말았지요.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마실 물이랑 먹을 것이 떨어져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헤어나기 위해 모든 짐을 끌어내 샅샅이 뒤지니 마침내작은 자루 하나를 발견하였지요. 거기에 가득 든 것은 진주였다오. 두 분은 그때의 실망감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는 진주가 무척 값진 보석이지만 사막에서 조난을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보석을 갖기 위해 애쓴다. 심지어 소중한 관계를 깨뜨리면서 보석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나면 진주도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같은 뜻이라도 말하기 나름
중국의 어느 왕이 하루는 잠자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의 이가 모조리 빠지는 꿈이었다. 왕은 너무 찜찜하여 신하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신하들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 아무도 꿈을 풀이하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장안에서 유명한 해몽가들을 불러 꿈을 풀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얼마 후, 장안의 내로라하는 해몽가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 해몽가가 왕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전하! 흉조입니다. 전하의 가족들 모두가 전하보다 먼저 세상을 뜰 징조입니다.”
이 말에 왕은 크게 노하여 즉시 그를 감옥에 처넣어 버렸다. 마침 다른 해몽가가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말하였다.
“전하! 정말 좋은 징조십니다. 전하께서 전하의 가족들 가운데 가장오래 사신다는 뜻입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이 해몽가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다. 나중에 대신들은 그에게 엄밀히 물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앞서 감옥에 간 해몽가의 풀이와 다를 바가 없지않소. 그런데 이렇게 대접이 다를 수가 있나요?”
그러자 상금을 받은 해몽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와 저의 해몽은 모두 같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답니다.”
별을 본 사람
미국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다. 남편은 전쟁 중에 사막 근처의 육군훈련소에 배속되었다. 그녀 역시 사막 근처의 오두막집에 살았다.
그곳은 섭씨 46도의 무더위로 견디기 어려웠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음식에 섞이기 일쑤였다. 그녀는 몹시 괴로웠다. 이웃 사람이라곤 멕시코 사람과 인디언뿐이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님께 편지로 이렇게 호소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므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곳보다는 차라리 형무소가 낫겠습니다.”
편지를 받아 본 아버지는 단 두 줄의 회답을 보내왔다.
“두 사나이가 형무소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흙탕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이 두 줄의 글이 그녀를 작가로 만드는 주춧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녀는 현재의 상태에서 항상 좋은 것만을 찾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곳에서 그녀는 반짝이는 별을 찾았고, 그것을 소재로 쓴 소설이 유명한 《빛나는 성벽》이었다. 그녀가 바로 영국의 여류 소설가 델마 톰슨이다.
그녀는 유명 작가가 된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자신이 만든 감옥의 창을 통해서 내 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괴짜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69~BC 399)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남루한 옷차림의 젊은 거지가 교실로 들어와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겠다고 우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지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
안티스테네스는 사뭇 점잖고 단호한 태도로 그 젊은 거지에게 나가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지는 막무가내였다.
“저들이 나를 거지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개처럼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철학 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안티스테네스가 다시 한번 나가 달라고 말했지만, 거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거지의 고집으로 그는 학교에 머무를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개 같은 철학자’라 불렀다. 사실 그 거지의 용모 자체가 워낙 더러워 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관습과 편견을 조롱하며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곤 했다. 이 젊은 거지가 바로 고대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BC 412~BC 323)였다.
사실 디오게네스와 안티스테네스, 그리고 소크라테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안티스테네스는 스승 소크라테스 보다 몇 발자국 더 나아갔고, 디오게네스는 역시 스승 안티스테네스 보다 몇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한다.
베토벤의 형제
독일의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1770~1827)에겐 투기에 성공하여 큰 재산을 모은 크리스토프라는 동생이 있었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된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 동생에게 돈을 빌릴 일이 생겼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냉정한 편지를 보내왔다.
「형님!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있는 힘을 다해 살지 않으면 헤쳐가기 여간 힘든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형님은 지금까지 하신 일로 보아 형님 혼자 가까스로 먹고살기에도 어렵게 보입니다. 형님이 지금처럼 궁색한 형편이 된 것도 오로지 형님 자신의 책임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형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형님의 가난은 오로지 형님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세요. 동생이며, 많은 토지의 소유자 크리스토프 빈 베토벤 드림」
동생의 편지를 읽은 베토벤은 이렇게 답장을 썼다.
「나도 너의 도움은 이제 필요 없다. 그리고 너의 설교도 필요 없다.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 루트비히 빈 베토벤」
베토벤은 토지의 많음을 자랑하는 동생에게 자신은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는 답장을 보냄으로써 통쾌하게 복수를 하였다. 베토벤의 한 방의 무기는 바로 자신의 두뇌인 셈이다.
테레사 수녀와 수사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빈민의 성녀라고 일컫는 마더 테레사(1910∼1997)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 일이었다. 호주의 한 젊은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수사가 테레사에게 그녀의 수행원이 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 수사는 훌륭한 테레사 수녀를 매우 가까이서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보고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줄곧 그녀 가까이에 있었으나, 말 한마디 건넬 기회가 없었다. 테레사 수녀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그녀가 뉴기니로 떠나게 되었다. 수사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수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뉴기니로 가는 저의 여비를 제가 부담한다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말씀을 나누며 배울 수 있겠습니까?”
테레사 수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물었다.
“뉴기니로 갈 항공료를 낼 만한 돈을 갖고 있어요?”
“예, 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다시 이렇게 주문하였다.
“그러면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세요.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놈이 무엇인고?
어느 해 겨울 수덕사의 큰스님이 인사를 드리러 오는 젊은 학승을 다짜고짜 주장자로 한 대 내리치는 것이었다. “아야!” 소리를 지르자 큰스님은 “무엇이 아프냐?”고 물었다. “스님께서 때리셨으니 머리가 아프지요.” 그러자 다시 한번 주장자가 날아왔다. 스님은 또 물었다.
“아픈 놈이 무엇인고?”
그날 밤, 큰스님이 학승을 불러 물었다.
“아까 내가 주장자로 때렸을 때 어디가 아팠는가?”
“머리가 아팠습니다.”
“아픈 곳은 머리인데 어찌 입에서 소리를 지르지?”
학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큰스님이 말하였다.
“매 맞지 않고 아프지도 않은 입을 시켜 소리를 내게 한 놈이 어떤 놈인지 생각해 보아라.”
그 뒤부터 학승은 군불을 지필 때도, 법당을 청소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큰스님은 그를 볼 때마다 주장자로 머리를 탁탁 내리치며 말하였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그놈.어머니가 보고 싶은 그놈.그놈이 무엇인지 찾아보아라.”
어느새 수덕사의 자락이 붉게 물들 무렵 큰스님이 다시 물었다. 학승은 그놈이 아마 “마음”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마음이란 놈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분명히 있기는 한데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주장자를 어깨 위로 맨 큰스님이 한참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른 먹은 중보다 네가 공부를 잘했구나!”
아이디어를 격려하라
1990년대 말, 미국의 어느 디자인 회사의 직원들은 한동안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만 골라서 찾아다녔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면 마치 스토커처럼 아이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주로 아이들이 양치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로 손잡이를 잡고 양치질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회사로 돌아간 디자이너들은 고민 끝에 끈끈한 고무를 사용해 굵은 손잡이의 칫솔을 디자인하게 되었다. 바로 오랄 B 칫솔. 이것을 디자인한 아이디오(IDEO)는 현재 세계 최고의 산업 디자인 회사로 꼽힌다.
아이디오가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디어가 디자인 회사의 생명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디오는 그들만의 기발한 회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먼데이 모닝 미팅’이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직원들과 외부 초청 인사들까지 모두 백 명 이상이 함께하는 이 회의에서 참석자 모두는 마룻바닥에 커다란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그저 수다나 떨면 딱 좋은 자세로앉아서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미팅에서는 엉뚱한 아이디어라고 왕따 당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도리어 엉뚱한 아이디어가 최고의 자산이었다. 오랄 B 칫솔을 비롯한 컴퓨터의 애플 마우스, 나이키의 스포츠 선글라스 등이 모두 아이디오의 작품이다.
아인슈타인의 연구실
과학의 거인이라 불릴 만큼 세계 역사에서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1879~1955)에게 기자가 찾아 왔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기자는 그의 연구실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내 실험실은 별로 보여 드릴 게 없는데…….”
아인슈타인의 그런 말에도 기자는 간곡했다. 세계적인 과학자의 연구실이 아주 굉장하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첨단 과학 장비들로 가득 찬 연구실을 상상하면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기자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과학 장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옆에 있던 휴지통을 가리켰다.
“바로 저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기자에게 아인슈타인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상생활 중 머릿속에 뭔가 떠오를 때면 그때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만년필로 메모하고 골똘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연구를 위해 따로 잘 차려진 연구실이 필요하지 않지요.단지 내겐 그것을 적고 계산할 수 있는 만년필과 필요 없는 메모지를 버릴 수 있는 휴지통만 있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깨어 있는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려는 마음과 의지이지요.”
나라를 구한 뛰어난 협상
고려 성종 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때 고려의 서희(942~998) 장군이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소손녕 장군과 담판을 지으러 나섰다. 그러나 누구도 서희 장군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란군이 자진 철군하고 더욱이 고구려 옛 땅이었던 압록강 주변의 강동 6주까지 되돌려 주었다.
소손녕과 마주 앉은 서희 장군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정벌해 광대한 중국을 차지하고 싶으나 섣불리 쳐들어갔다가는 친송 외교를 펴는 고려의 기습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서희 장군은 거란의 고민을 꿰뚫어 보고 「송나라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겠다.」라는 협상 카드를 내놓았다. 사실 거란은 송나라와 총력전을 앞둔 상황에서 굳이 고려와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소손녕이 협상을 마치고 북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 서희 장군은 그의 말고삐를 잡았고 또다시 설득시켰다.
“지금 고려 조정에는 친송파가 득세하고 있어 돌아가서 임금과 강경파를 설득하는 것이 큰 문제이니, 옛 고구려의 영토인 강동 6주를 되돌려준다면 누구도 이번 협상을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600여 년이 흐른 뒤, 조선 인조 때 만주족을 일으킨 청 태종이 조선에 명나라와의 단교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불행히도 서희 장군과 같이 뛰어난 협상가가 없었던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병마에 휘말리고 말았다.
감동의 15초
39세로 스칸디나비아항공의 사장으로 취임한 얀 칼슨은 한 해에 천만 명이나 되는 승객들이 자기 회사의 종업원들과 다섯 번 정도씩 접촉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 번의 면담 시간은 15초였다. 이렇게 짧은 순간들이 결국 스칸디나비아항공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사원들에게 ‘감동의 15초’에 대해 교육을 시행했다. 고객과의 면담이 시작되는 예약 업무에서 임원의 업무까지 종합적으로 이어졌다. 15초 동안 스스로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의 일이다. 한 고객이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항공권을 호텔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았다. 담당 직원은 즉시 임시 항공권을 준비해 고객을 안심시킨 뒤, 호텔에 연락해서 항공권을 찾아와 탑승객에게 전달하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손님, 호텔에 두고 온 항공권을 가져왔습니다. 앞으로 즐겁고 유쾌한여행이 되기를 빕니다.”
항공권을 되찾은 승객은 얼마나 감격하고 놀랐겠는가! 물론 이처럼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교육의 덕분이었으며, 인상적인 경험을 한 고객이 주위 사람들에게 스칸디나비아항공을 격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항공사는 유럽의 최고의 고객 우선 항공사로 거듭 태어났다고 한다.
데이 마케팅
연중 어느 날은 목적을 가진 이벤트의 날이 있다. 2월 14일, 3월 14일은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듯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고, 4월 14일은 블랙데이라고 해서 자장면을 먹는 날이다. 5월 14일은 장미꽃을 선물하는 로즈 데이,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라고 한다.
이렇듯 특정한 날짜를 두고 기업에서 마케팅하는 것을 ‘데이 마케팅(Day Marketing)’이라고 한다. 데이 마케팅은 제과업체나 장미를 파는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동 통신사에서도 자사 상품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어느 특정한 날에 제휴 맺은 외식업체를 이용할 경우 더 많은 할인을 주기도 한다. 이런 데이 마케팅의 목적은 바로 수요 창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데이 마케팅은 우리 조상들도 즐겨 썼다. 바로 복날이 대표적이다. 요즘도 복날이면 회사나 상가 근처에 있는 삼계탕집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1년에 3번 있는 복날(초ㆍ중ㆍ말복), 삼계탕집과 보신탕집은 말 그대로 데이 마케팅에 의한 특수를 누린다.
그러나 데이 마케팅이 소비자 만족을 저하하는 경우도 많다. 우선 데이 마케팅으로 인해 특정한 날에 특정한 상품을 구매하려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면, 소비자는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수요가 증가하는데 공급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 마케팅은 소비자에게는 부담이 증가한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데이 마케팅에 무방비로 현혹되지 말고, 건전한 소비를 생활화하여야 한다.
에밀리 뒤 샤틀레의 일생
18세기경 프랑스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여류 과학자에 밀리 뒤 샤틀레(1706~1749)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 당시 대다수의 프랑스 여성들은 결혼증명서에 자기 이름도 못쓰던 시절이었으나 샤틀레는 당시에 베르길리우스나 뉴턴이 쓴 책을 번역할 만큼 최고의 인텔리였다.
독학으로 익힌 수학 실력으로 귀족 부인들과 도박해 딴 돈의 절반으로 책을 사서 공부하기도 하였고, 빛의 성질을 간파해 사진술과 적외선 발견의 초석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에너지 보존 법칙을 연구하고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여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책 읽는 여성을 금기시하던 18세기 풍토에서 그녀의 자질을 충분히 인정받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학구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성들과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에밀리는 결혼 후 파리의 사교계로 뛰어들어 지적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계몽주의자 볼테르(1694~1778)와 10여 년간 연인 사이로 지내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도 하였다.
때로는 남성들과 칼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외딴 섬에 실험실을 꾸려 과학 연구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번역한 뉴턴의 라틴어 저서 《프린키피아》는 프랑스어 번역판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두려움과 맞서기
중국 노나라의 현인 안희가 그의 스승 공자를 찾아갔다.
“스승님, 얼마 전 노 젓는 솜씨가 뛰어난 사공을 보았습니다. 그의노 젓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지요. 그 비법이 궁금해서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비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선문답 같은 소리만 했습니다.”
가만히 안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자가 물었다.
“선문답 같은 소리라! 그래 사공이 뭐라고 하더냐?”
“사공이 저에게 헤엄칠 줄 아느냐고 물었지요. 헤엄을 칠 줄 안다면 쉽게 노를 젓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했죠. 또 잠수할 수 있냐고물었습니다. 잠수를 할 수 있다면 노를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더라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하이었습니다. 스승님, 도대체 헤엄치는 것과 잠수하는 것이 노를 잘 젓는 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그러자 공자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에 관한 문제이다. 만약 헤엄을 잘 치거나 잠수를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젓는걸 배운다고 해도 그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배가 뒤집히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속 두려움이 배움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안회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이 없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공이 말하는 노를 잘 젓는 비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일 것이다.
생각하는 동물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철학자를 찾아와서 물었다.
“학자님,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
철학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 사람이지.”
어느 날 젊은이가 다시 찾아 왔다. 이번에는 닭을 한 마리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질문을 했다.
“학자님, 이놈도 두 발로 걸어 다니는데, 그러면 이 닭도 사람입니까?”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날개가 없는 동물이다.”
그 말을 듣고 젊은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다음 날, 젊은이는 고릴라를 데려왔다.
“학자님, 이놈은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날개도 없는데, 그러면 고릴라도 사람입니까?”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람이란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날개가 없으며, 또 털도 없는 동물이다.”
젊은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다음 날 젊은이는 고릴라의 털을 면도칼로 빡빡 밀어 가지고 다시 왔다.
“학자님, 이놈은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날개가 없으며, 또 털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놈이 사람입니까? “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참 영리하군. 이제 내가 사람이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지. 사람이란 바로 자네처럼 생각하는 동물이라네.”
기념비와 우물
어떤 두 사람의 여행자가 사막을 힘겹게 횡단하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포기 없고,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을 피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마침내 횡단하였다.
여행을 마친 뒤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정말 힘겨운 일해 내었으니 기념이 될 만한 것을 하나 남기면 어떨까?”
나머지 한 사람은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는 각자 무엇을 남길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하였다.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참아가며 사막을 여행한 기념을 남기기 위해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그것이 좋지않을까?”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의견은 달랐다.
“그래? 기념비도 좋지만, 사막에 물이 없어 우리가 무척 고생하였으니 다른여행객을 위해 우물을 파면 어떨까?”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두 사람은 기념비와 우물을 다 만들기로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기념비는 모래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우물은 오늘까지 여전히 사막을 찾는 여행객의 마른 목을 축여 주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 환공(BC 685∼BC 643)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진 신하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이복동생인 규를 몰아냈으나, 규의 옛 신하인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환공은 지혜로운 관중의 도움으로 제후들과 종종 동맹을 맺으며 신뢰를 얻어 나라를 튼튼하게 다진 임금이었다.
환공이 고죽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일이었다. 출전할 때는 봄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되었다. 주위 풍경이 많이 바뀐 나머지 환공과 군사들은 길을 잃고 말았다. 모두 지쳐있을 때 부하 장수인 관중이 말했다.
“이럴 때는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공 일행은 늙은 말의 고삐를 풀어 길을 찾게 하고,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간신히 길을 찾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먹을 물도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산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다들 주저앉아 낙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신하 습봉이 나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개미집 아래 여덟 자를 파면 반드시 물이 있다는 말을 들들이었습니다. 개미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습봉의 말을 따라 개미집을 찾아 땅을 팠더니 역시 물을 구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이에 적합한 해결책을 내놓는 부하들 덕분에 환공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디오게네스의 침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BC 412~323)는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괴짜였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그야말로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디오게네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다.
어느 날, 동네의 벼락부자가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벼락부자의 집은 졸부답게 입구부터 온통 값비싼 대리석으로 번쩍거렸다. 벼락부자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디오게네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벼락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 철학자의 어이없는 행동에 놀라 당황하는 벼락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당신의 집과 정원은 정말로 훌륭하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집에서 침을 뱉을 곳이란 자네 얼굴밖에 없다네.거만과 탐욕으로 가득한 자네 얼굴이 곧 쓰레기통이니까.”
좋은 옷을 자랑하는 사람은 옷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고,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돈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가?
소크라테스는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디오게네스는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自足)의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통나무 속에서 밥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소신을 위해 목숨을 걸진 않더라도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케아가의 창업자 캠프라드
스웨덴의 어느 마을에 장사에는 남다른 재주를 가진 학생이 있었다. 그는 직업학교에 다닐때부터 허리띠, 지갑 등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작은 회사를 세울 정도의 돈도 모았으며, 직업학교를 마치고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경영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제품을 확보해 광고하고, 적정 마진을 붙여 고객에게 판다는 상업학교의 수업을 듣고는 배운 것을 직접 실험해 보기 위해 파리로 가서 만년필 500개를 주문했다. 그는 신문에 만년필 판매 광고를 작게 내어 물건을 모두 팔 수 있었다.
만년필 장사로 재미를 보자 이번에는 스위스에서 라이터를 수입해 팔기로 했다. 지금까지 소품만 팔던 그는 어느 날 팔걸이 없는 의자를 통신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 상품이 크게 히트해서 온가족이 나서서 그의 일을 도와야만 했다.
그는 불과 열일곱 살에 이케아라는 가구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가 바로 이 회사를 세계 최대의 가구 회사로 키운 이케아(IKEA)의 창업자인 잉그라블 캄프라드 회장이다.
캄프라드 회장은 우선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해 제품의 홍보와 판매 방식을 개선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카탈로그라는 것을 개발하여 제품을 홍보하였다. 물건값을 낮추는 통신 판매 전략을 내놓았다. 이런 전략은 그 당시로는 혁명적이었다. 조립형 가구 제품의 출현도 바로 그의 아이디어였다.
카네기의 후계자
철강 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는 지성을 겸비한 기업가로 세계 기업인의 표상이었다. 그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즐긴 사람이기 하였다.
하루는 카네기의 저택에 겨우 초등학교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정원 청소부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청소하여야 하는 정원뿐만 아니라 공장 안까지 최선을 다해 깨끗이 청소하였다.
그것을 보아온 카네기는 그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여 사무원으로 근무하도록 한 다음 나중에 자신의 비서로 일하게 하였다. 그는 카네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필하였다.
카네기가 일이 바빠 늦게 퇴근하거나 밤을 새울 때도 늘 옆에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이라는 조직 문화로는 그런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카네기에게 후계자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직원 중에는 명문대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로 넘쳤다. 공학 박사, 경영학 박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카네기의 최후 결정은 그들이 아니었다. 카네기의 후계자는 일용직으로 들어와 비서로 발탁된 초등학교 학력의 ‘찰스 쉬브’였다.
세계가 다 놀랐다. 그러나 쉬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카네기의 몸처럼, 카네기의 그림자처럼 일했을 뿐이다.”
로시니의 재치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조아키로 안토니오 로시니(1792~1868)는 칸타타, 피아노곡, 관현악곡, 가곡 등 여러 방면에 탁월한 작곡가였다. 그는 1810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어음》으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6년 뒤 로마에서 공연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 당일,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유독 맨 앞줄의 가운데 두 좌석만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 공연을 시작하려는 찰라, 젊은 남자 두 명이 들어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공연은 보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는 이내 코까지 골며 자는 것이었다.
이를 본 로시니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연에는 관심이 없는 두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나중에 평소 로시니를 맞수로 생각하던 오페라 작곡가의 사주로 공연을 방해하러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로시니는 직접 쓴 편지와 초대권 두 장을 그들에게 보냈다.
「이 초대권을 받아 제 공연에 와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공연이 가장 잘 보이는 좌석으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의자가 편안해 주무시기도 좋을 것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제가직접 깨워드리겠습니다. 로시니 올림」
화를 내기는커녕 재치 있는 행동으로 옹졸함을 일깨워 준 로시니에게 작곡가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유치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루이 16세 왕비 앙투아네트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는 프랑스 혁명 직전 빵을 달라는 민중들의 분노에 찬 요구에 그렇게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 말을 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루이 16세의 할아버지 루이 14세의 부인인 마리 테레즈가 한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한 것으로 오해받을 만큼 그녀는 당시 프랑스 인민들의 증오 표적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녀의 너무나 사치스럽고 무절제한 생활이 알려지면서 인민의 증오하고 있던앙시앙 레짐(구 집권 체제)의 상징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일개 왕비의 사치와 방탕이 프랑스 혁명이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많았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리지아의 막내 공주로 태어나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남편인 루이 16세와 함께 튀를리궁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공모해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793년 10월에 단두대에서 참수됐다.
한 사람의 지나친 사치와 낭비가 한 나라의 혁명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은 비운의 왕비로 종말을 고하기까지 하였다.
재치와 여유
아일랜드 출신의 저명한 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1856~1950)가 쓴 극본 《무기와 사람》이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될 때의 일이다. 공연이 끝나자 공연을 참관하였던 관객들이 환호하며 조지 버드나 쇼를 무대에 오르게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화를 내면 큰소리를 외쳤다.
“이봐! 쇼. 당신 극본은 정말 못 봐주겠군. 누가 이런 엉터리 연극을보겠어? 당장 집어치워요!”
관중들은 당황한 채 쇼와 남자의 얼굴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관객 모두는 쇼가 남자에게 뭐라고 반박할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쇼는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참 잘 보셨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정말 형편없는 극 본이죠. 그런데 우리 둘이 반대한들 이 많은 관객을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안타깝지만 공연을 중지시키기는 힘들 것 같네요.”
쇼의 재치 있는 말에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곧 떠나갈듯한 박수 소리로 가득 메웠다. 하루는 버나드 쇼를 열렬히 사모했던 무용가 이사 도라 던컨이 이런 제의를 하였다.
“당신과 제가 결혼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당신의 지성과 저의 미모를 타고날 거예요. 그러니 우리 결혼해요.'
청혼을 들은 쇼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 못생긴 얼굴에 당신의 텅 빈 머리가 될지도 모르지요.”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
할리우드의 영화배우이면서도 아프리카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 봉사활동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와 훤칠한 키, 그리고 잘록한 허리이며, 어느 한 군데라도 나무랄 데가 없는 미녀이면서도 마음씨 또한 비단 같아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아 왔다.
그녀가 바로 《영혼은 그대 곁에》, 《뜨거운 포옹》, 《전쟁과 평화》, 《로마의 휴일》 등에서 열연하여 세기의 연인으로 사랑받던 오드리 헵번(1929~1993)이다.
그러나 비록 아름다운 모습은 가고 없지만, 그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친지들에게 남긴 이 이야기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조용히 울리고 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빛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네 몫의 음식을 배고픈 사 남들에게나누어 주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여라.」
사람들은 누구는 아름다운 입술과 사랑스러운 눈빛, 아름다운 몸매, 그리고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자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천상의 목소리에 담긴 비밀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가 음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한 해 수십 차례의 공연을 하다 보니 목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공연을 앞두고 근처 호텔에서 목이 아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느 방에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왜 아무도 아이를 달래지 않는 걸까? 아이의 부모는 뭘 하는 거지? 쉬지 않고 몇 시간을 울어대는데…….’
파바로티는 신경이 곤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두 시간만 노래를 불러도 목이 아파 견딜 수 없을 지경인데 몇 시간째 울고 있는 저 아이의 목소리는 왜 저렇게 생생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조금 전까지의 짜증은 잊은 채 아이의 울음소리에귀를 기울였다. 곰곰이 한참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기가 목으로 운다면 목이 쉬어서 울지 못할 터인데. 그렇다면 아랫배의 힘? 그래, 나도 노래를 부를 때 아랫배의 힘을 이용한다면 목을 보호할 수 있을 거야.’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한 파바로티는 날이 새자마자 단전에 힘을 모아 소리 내는 연습을 하였다. 아랫배에 힘을 주면 더욱 풍성하고 깊은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파바로티는 무리한 공연 스케줄에도 목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오래도록 독보적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햇 포도로 만든 포도주
와인(wine)은 포도주의 영어식 표현으로 과일만으로 발효시킨 과일주를 부르는 말이다. 와인은 크게 발효 방법에 따라 화이트, 로제, 레드, 블레쉬 등으로 분류한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미하는 레드 와인을 성체성사에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와인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은 제품으로 통하며, 숙성 기간이 짧은 것은 품질이 낮은 것으로 여겨진다.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은 프랑스 보졸레 지방에서 누보 와인 축제가 열린다. 전 세계 포도주 애호가들은 보졸레 누보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11월만 되면 마음 설레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와인은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를 기해 전 세계에서 동시 판매를 시작하는 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년도 안 된 와인인 보졸레 누보가 나왔을 때였다. 숙성 기간이 짧아 팔리지 않을 것 같은데, 예상을 깨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그 요인은 바로 ‘햇 포도로 만들었다’는 점을 부각한 데있었다. 숙성 기간이 짧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햇 포도로 만들었다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1년도 안 된 포도로 만든 포도주’라 하면 품질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햇 포도로 만든 포도주’라고 하면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보졸레 누보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그런 단점을 강점으로 승화시켜 시장 공략에 크게 성공했다.
뉴욕판 봉이 김선달
미국 뉴욕의 청년들이 상품의 디자인과 포장과의 상관관계를 비교하는 토론을 하였다. 많은 청년은 상품의 디자인이 중요하지 포장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 청년의 주장은 달랐다. 그것을 증명하여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생각 끝에 모든 사람이 다 버리는 쓰레기를 근사한 포장 용기에 담아 팔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곧바로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Garbage of New York City’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인터넷 판매를 시작하였다.
누가 쓰레기를 돈을 주고 사겠느냐고 코웃음 치던 친구들은 그 결과에 놀라고 말았다.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복권, 지하철 승차권, 브로드웨이 입장권, 종이컵, 영수증, 사탕 봉지 그리고 담배꽁초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으며 순식간에 팔려나갔다.그런 쓰레기들은 포장 용기의 중요성을 증명하기 위한 그 청년의 원래 목적을 뛰어넘었다.
포장 용기에 담은 쓰레기에는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뉴욕 이야기와 뉴욕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뉴욕의 쓰레기는 예술품에 버금가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10년 동안 사업은 승승장구하여 미국 전역과 세계 30여 개국에 뉴욕의 쓰레기는 운송비를 포함하여 50~100달러라는 만만찮은 가격으로 하루에 무려 100만 상자나 팔릴 정도였다. 그가 바로 경영의 귀재 저스틴 기그낵(Gignac)이다.
유대인의 지혜
유대인의지혜가 담겨있는 《탈무드》라는 책이 있다. 탈무드는「위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탈무드를 일명 「바다」라고도 부른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유대인이정착하여 사는 마을에 한 소년이 랍비를 찾아 왔다. 랍비란 유대교의승려로서 유대인들에게는교사이고 재판관이며, 어버이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래서 랍비란 「현명하고 지혜로운 민족의 큰 스승」이라는 뜻이 있다.
소년은 랍비에게 물었다.
“만일 갓난애가 두 개의 머리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 아이를 두 사람으로 세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으로 세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머리가 둘이 있더라도 몸뚱이가 하나면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은 머리가 둘이니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랍비는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였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다른 한쪽 머리에서 비명을 지른다면 한 사람일 것이고, 만일 다른 한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두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이 말을 질문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으로만 듣지 말고 그 말이 주는 의미, 즉 냉철한 사고력과 생활의 지혜를 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