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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상계(族譜上系) 족보는 한 종족의 역사이자 생활사인 동시에 혈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으로서 동족여부와 소목의 서열 및 촌수 분별에 지극히 필요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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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숭조의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 합니다. 그러나 족보가 후대 종친들의 화합과 돈목을 기해야 함에도 오히려 분열과 갈등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합리적이고 옳은 것이라도 통일된 족보는 좀 더 시간이 걸릴지언정 제족 간에 동의와 합의가 전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지금까지 발간된 파보와 족보를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씨족의 중요한 사료로 보존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후세에 드러나는 사료를 근거로 해서 끊임없이 보완하고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대로 계속 발전되어 나갈 것 입니다. 사직공파(司直公派) 족보역사(族譜歷史)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의 성씨제도 (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 씨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1000여년전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씨족사(氏族史)가 곧 민족사(民族史)요 따라서 한국사(韓國史)의 기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족사(氏族史)가 족보문화(族譜文化)를 통하여 잘보전 되어 전수되고 있는 실정이며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족보문화가 발달된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단연 우리나라가 으뜸으로서 민족문화 의 우수한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족보의 발행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선초기인 세종 5년 (1423년)의 문화 류씨 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부터 간행되기 시작했고, 그 후 1476년(성종 7년)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형태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족보로는 문화 류씨, 두번째는 1562년(명종 17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嘉靖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 초기만 해도 사대부 문중을 제외 하고는 성씨(姓氏)가 없는 백성이 허다하였으나 11대 문종 때에 이르러 성씨가 없는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고치면서 중인(衆人)도 성씨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뒤 유교의 영향으로 숭조사상(崇祖思想)이 고양되고 뿌리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되더니 조선 성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족보가 사대부 집안에서부터 발간되기 시작 하였습니다.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의 성화보가 진귀본(珍貴本)으로 서울대학교내의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하문(河門)의 경태보는 권씨가의 성화보(成化譜)보다 25년이나 앞서고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1451년에 문효공 선조께서 편찬 하였으나 후손들이 불민하여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고 현재 그 서문만이 진양지에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1451년 신미보(辛未譜) 시보(始譜)이래 155년만인 1606년에 모헌(慕軒)선생이 만력보를 발간하면서 20여 차례의 수보(修譜)가 있었으나 어느 것이나 지역이나 계파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하씨(河氏) 문중 전체를 수록한 대동보가 없었는데, 1984년에 비로소 사직공(司直公) 전계파(全系派)를 한 데 모은 대동보를 발간하게 되는 경사가 있었으나 그 때만 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여 자료와 정보의 수집에 애로가 많아 편집위원들의 정성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족보의 내용에 계대(系代)와 서차(序次)가 맞지 않은 부분이 많고, 탈오자(脫誤字)가 많아 종인(宗人)들의 불평, 불만이 많았을 뿐 아니라 도처에 누보자(漏譜者)가 속출하여 부득이 대동보(大同譜)를 완벽하게 보완수보(補完修譜)키로 총회의 결의를 거쳐 만 3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이제 과거 1000년에 걸친 우리 하씨(河氏)의 발상(發祥)과 선조들의 족절을 담은 행장(行狀)을 모아 체제와 내용이 갖추어진 『二千(丙辰)年譜』를 발간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