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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업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떠러지는 오동닙은 누구의 발자최임닛가
지리한 장마끗헤 서풍에몰녀가는 무서은검은구름의 터진틈으로 언뜻언뜻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얼골임닛가
꼿도업는 깁흔나무에 푸른이끼를거처서 옛탑위의 고요한하늘을 슬치는하늘은 알수없는향긔는 누구의입김임닛가
근원은 알지도못할곳에서나서 돌뿌리를울니고 가늘게흐르는 적은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노래임닛가
련꼿가튼발꿈치로 갓이업는바다를밟고 옥가튼손으로 끗업는하늘을만지면서 떠러지는날을 곱게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시임닛가
타고남은재가 다시기름이됨니다 그칠줄모르고타는 나의가슴은 누구의밤을지키는 약한등불임닛가
한 용운의 시집에서 님이 문자 그대로의 님이나 불교적인 님이 아니라 상실된 국권을 의미하며 한 용운은 국권상실을 연인의 죽음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이다.
그러나 한 용운이 역사적인 님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의 시가 불교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용운의 모든 시는 불교적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교적 세계관은 그가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 개입될 뿐이지 직접적으로 시의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군말>과 <독자에게>에서 한 용운은 자신이 시를 쓰는 동기를 <해저문벌판에서 도러가는길을일코 헤매는 어린羊이 긔루어서 이詩를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때 해저문 벌판은 국권 상실로 빛과 광명을 잃은 우리 나라를 의미하며 어린 양은 국권상실로 어둠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는 민족 구성원 전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 용운의 시집 구성 동기는 국권상실로 고통받는 민족을 인도하고 그들 스스로 빛과 광명을 찾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방법으로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체험인 남녀간의 사랑을 매개로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 용운의 시들은 어떤 점에서 불교적인가? 이미 말한 것처럼 한 용운의 시는 국권 상실로 절망 속에 빠진 민족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불교적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국권 상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그의 입장은 철저하게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시 <님의 침묵>은 물론 그의 시집 전체의 구성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불교적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가장 기본을 이루는 세계관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색이란 형체가 있는 것을, 공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논리는 세계를 보는 두가지 방식을 설정하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킨다는 점에서 불교의 통일사관의 중심이 되는 세계관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를 보는 한가지 방식은 물질적인 것, 즉 색에 집착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물질적인 것의 추구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도덕이나 윤리 기타 물질적이 아닌 가치는 전혀 중요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이들은 물질적인 이익과 욕망의 추구에 온 인생을 탕진하게 된다. 이것은 세계를 한쪽에서만 보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보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 반대편에 물질적인 것은 변화유전하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물질적인 것은 버리고 오직 보이지 않는 진리의 탐구에만 매달리는 삶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세계를 한쪽 면만 보는 것이지 전체적으로 보는 입장이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두 부류의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고 세계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 바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논리이다.
즉 색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형체가 있는 것이 곧 형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공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구절이 바로 공즉시색의 논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색도 공도 공도 아닌 그 경계를 넘는 것이다. 색과 공은 모두 사물을 부분적으로 보는 인간의 망집에 의해 태어난 것일 뿐이다. 불교에서 모든 법은 자성이 비었고 인연이 모이면 생겨나고 흩어지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색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있다, 없다, 더럽다, 깨끗하다, 살았다, 죽었다, 너, 나와 같은 분별이 생겨나며 그로 인해 절망하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을 때 그것은 인연에 의해 생멸하며 존재하는 양식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로 존재하느냐 -로 존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공에 집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또다른 분별심의 결과일 뿐이다. 즉 색은 변화유전하기 때문에 공허하고 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은 자성이 비었고 인연에 의해 생기할 뿐인 것이다.
앞서 한 용운이 국권상실로 고통받는 민족을 인도하기 위해 시집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한 용운에게 있어서 국권상실이라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물질에 집착 국권의 상실을 국가의 영원한 죽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한 부류요, 또 하나는 물질적인 것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에 국권의 있고 없음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허무주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시집이 정확히 이 두부류를 상대로 씌어지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우선 한 용운의 시집은 국권 상실을 국가의 죽음으로 생각,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국가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색즉시공의 논리로 국권의 죽음을 부정함으로써 절망과 어둠 속에서 민족은 인도하려고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님의 침묵>이나 그의 또 다른 대표시 <알 수 없어요> 등 많은 시들은 모두 그런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들은 님의 죽음이 물질적인 부재일 뿐 영원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재의 형태로, 즉 공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권의 죽음을 부정하고 국가의 존재를 입증하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님의 침묵>이나 <알 수 없어요> 등의 시들이 시집 허두에 배치된 것은 국가의 죽음을 인정할 때 국권의 회복은 다시는 꿈꿀 수 없으며 죽음에 대한 부정으로부터만이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다는 한 용운의 시집 구성 의도를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없어요>는 님의 침묵과 마찬가지로 연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집 구성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이 시는 단순한 연시가 아니라 국가의 죽음을 노래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시의 화자는 오동닙=발자최, 푸른 하늘=얼골, 향기=입김, 작은 시내=노래, 저녁놀=시라는 은유적 인식을 통해 물질적으로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은유의 전항은 공통적으로 물질적인 원인이 없는 데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원인이 없는 데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원인이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어떤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연 현상 가운데서 물질적으로 지각되지 않지만 현상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통해 물질적으로 지각되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의 존재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통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 즉 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준다.
나뭇잎은 바람이 불어야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 인식방법이다. 따라서 바람이 없다면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 데도 오동닙은 엄연히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고 있다. 바람이 없다고 해서 오동닙이 떨어지는 현상을 부정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것을 넘어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나뭇잎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원인이 있어서 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뭇잎을 떨어지게 하는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동닙은 떨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화자에게 느껴지는 발자최 소리는 그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화자는 물질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발자최의 주인공이 없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잔잔한 마음에 파문을 던지는 발자최 소리는 누구의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님이 죽어서 아주 없어졌다면 발자최 소리도 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님은 물질적으로 죽었지만 다른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발자최 소리는 나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오동닙을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마음에 파문을 던지는 발자최 소리는 님이 물질적이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닌가.
다음 연도 마찬가지다. 장마철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절망감에 싸이게 된다. 그러나 잠시 후 바람이 구름을 흩어 놓았을 때 하늘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구름 뒤쪽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님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름 뒤에 가려진 하늘처럼 언뜻 언뜻 가슴에 떠오르는 얼골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이 일시적으로 구름에 가린 것처럼 님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3연에서 화자는 향기를 들어 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꽃도 없는 나무에서 향기가 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다. 따라서 향기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그러나 향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일 뿐이다. 4연 역시 마찬가지다. 시냇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발원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시냇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냇물의 발원지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님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님이 없다면 귓가를 울리는 님의 노래, 님의 시는 무엇이란 말인가. 님은 죽어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만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태양과 님을 비유하여 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해가 서산에 지면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태양이 사라졌다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태양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태양은 산 이 쪽에 존재하다가 산 저쪽에 존재할 뿐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태양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저녁놀이다. 태양이 아주 사라져 없어졌다면 저녁놀은 생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님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님이 부재한다면 가슴을 울리는 님의 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행에서 5행까지의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과 발견은 6행에서 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님의 등불이 되어 님이 부재하는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자 하는 소명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화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하고 있는 데 재가 기름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은 역설이다. 물질적으로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될 수는 없지만 가슴 속에서는 가능하다. 앞의 5행에서 화자는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님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며 여전히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망감으로 까맣게 타버린 가슴을 님에 대한 사랑의 불길로 활활 태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 또한 님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가슴은 그칠 줄 모르고 타는 것이며 화자는 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님이 부재하는 어두운 공간을 님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님의 작은 등불이 될 것을 맹세하고 있다.
<알 수 없어요> 역시 <님의 침묵>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는 연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집 구조와 관련시킬 때 이 시는 국권의 죽음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색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국권의 상실은 곧 국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나라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그 절망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라가 없는 데 살아서 무엇하느냐고 자결하는 것도 한용운에게 있어서는 국권상실로 인한 절망의 한 형태일 뿐이다. 또한 나라가 없는데 아무렇게나 살면 어떤가라고 생각하여 현실과 타협하거나 문을 닫아걸고 외부 세계와 절연한 상태로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행위들은 나라가 없어졌다는 절망으로 인한 행위들이며 그것은 국권을 회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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