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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시편27장14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곤경에 빠진 마음을 다잡으며 생활하고 있는 나는, 인천가톨릭대학교 부설 교리신학원생인 동기생들과 2월 졸업을 앞두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일본의 교회와 성지를 방문하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됩니다.
작년에 교리신학원 선배님들이 일본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될 때 무척 부러워하며 내게도 그런 시간들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해왔었는데 막상 성지순례를 앞두고 설레임과 기쁜 마음보다는 오히려 곤경에 빠진 마음으로 인해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의 삶을 회상하게 되고 아직까지도 잘 알 수 없는 신학과 교리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삶, 졸업 후의 진로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교리신학원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협조와 격려 그리고 위안을 얻으며 지나온 세월들이 성령께서 함께 하신 특별한 은총의 나날들이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마음을 싣고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11월5일 새벽 5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302번 버스를 타고 몇몇의 동기생들과 함께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6시쯤, 많은 친구들이 이미 도착하여 우리를 반겨줍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여행에 대한 설레임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기생들을 보니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이 비로써 느껴졌습니다.
아침8시, 일본을 향한 비행기가 이륙하여 한 시간여를 날아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대기 중이던 히라도 버스에 오른 시간이 10시30분쯤이었습니다.
마침내 일본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에 도착한 것입니다.
지리상으로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43년 만에 첫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세상구경을 하고 싶은 어릴 적부터의 소망을 두려움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불혹이 넘어서야 두 번째로 세상구경에 나서게 된 일본입니다.
2시간여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보이는 일본의 풍경은 깨끗하고 평화로워보였습니다.
예전의 우리나라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는 농가의 풍경들, 기와지붕과 슬레이트지붕의 가옥들, 그러나 결코 소란스러워 보이지 않는 거리의 모습들이 우리와는 다른 정돈되고 안정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주교좌성당인 우라카미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로 성당에도 원폭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라카미성당은 1903년 동양최대규모의 성당으로 탄생되었으나 1945년 8월9일 원자폭탄의 투하로 인해 그때 당시의 성전은 파괴되고 1959년에 새로 지은 현재의 모습인 성전으로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대성전문이 닫혀있어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입구의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와 원장신부님의 설명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되었으나 파괴된 성상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당시의 절박한 모습들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라카미성당을 향하는 길목에 나가이다카시 박사가 거처하던 집을 지나쳤는데 그분은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의 주인공으로써 원폭투하 당시에 부인을 잃고 자신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많은 분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훌륭한 분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을 읽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오기 전에 성지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온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비로써 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보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일본의 가을이 나의 어두운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 주었으면 하고 바래보았습니다.
다음은 오우라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오우라성당은 26성인 순교지를 향해 1864년 프랑스인 선교사 프티쟌신부에 의해 건립된 성당으로 195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신자들의 신앙이 이어져 내려와 2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3명의 여신자들이 프티쟌 신부를 만나 로마교황청에서 보낸 사람인지, 독신인지, 성모님을 모셔왔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가톨릭 신부이며 신자임을 서로 확인한 만남을 통해 일본에 가톨릭신자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부흥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콜베신부님의 유품기념 전시관도 있었는데, 1930년 4월 성모신심을 전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오셔서 ‘성모 기사’를 출간하고 많은 선교활동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일본26성인의 순교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령에 따라 신부들과 수사들 그리고 평신도 20명이 처형된 곳으로, 그들은 1862년 로마교황에 의해 성인명단에 올랐으며, 1962년 순교자들의 명복을 비는 니시쟈카교회와 일본26성인 기념관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순교지에 도착하니 26성인의 조각상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중에는 어린 소년 세 명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려 칼에 찔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일본26성인 기념관에서는 마침 신부님이 나오셔서 안내를 해주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교의 관음보살상 모양으로 마리아상을 만들어 신앙을 지켜온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후미에’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는 가톨릭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예수상과 성모상을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것으로 신자일 경우 차마 밟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행한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통해 그때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성인 26인의 명단이 적힌 안내장에는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이 나에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한다.
고 적혀있는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숙연해집니다.
우리는 26순교성인 기념성당에서 일본에서의 첫 미사를 드렸습니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 온갖 번민과 고난을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감사한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념성당 입구에서 도시의 모습이 보이는데 커다란 불상이 있는 사원도 보이고 성당과 사원사이에는 묘지가 자리하고 있어 삶과 죽음이 바로 공존됨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3일간의 여행 중에 묘지가 주택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비라성당에서는 성당 옆에 바로 묘지가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평화로웠습니다.
삶과 죽음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거리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인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가르침을 되새기며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음날 방문할 운젠(雲仙)의 지옥 순례지를 위해 운젠시로 향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차로 2시간여 거리에 있는 운젠시의 운젠 국립공원에 운젠지옥(雲仙地獄)이라는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곳에서 가톨릭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내일의 일정을 위해 휴식을 취했습니다.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라 하여 온천욕을 즐겼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순교한 조상들로 인해 오히려 나는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분들의 피와 생명으로 이루어진 곳을 방문하면서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희망을 갖게 되고 또한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함께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 까닭입니다.
6일 아침 8시 운젠 지옥 순례지에 올랐습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온천 수증기와 유황냄새로 가득하였습니다.
냄새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박해가 심하던 시절에 처형장의 역할을 했던 곳,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산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와 기념비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한 묵주기도5단과 마음의 나눔뿐이었습니다.
아픔을 간직한 붉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 운젠 국립공원을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이곳까지 이끌어주신 지인들을 위해 선물을 사기 위해, 1571년 나가사키개항 이후 포르투칼 상인들이 스페인의 카스테라를 가져와서 발전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카스테라 판매장과 백화점에 안내되어 쇼핑을 했습니다.
시간에 쫓겨 예정된 몇 군데를 들르지 못하고 다비라 순교 성당에 안내되어 일본에서의 두 번째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1월7일, 16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아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16년 전 스페파노를 갖고 백일기도를 드리던 기억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힘겹게 태어난 아들이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람에 감사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인상적인 다비라성당은 멀리에 있는 숨어서 사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힘겨운 생활을 이겨나가게 하기위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조개껍질을 태워 건물을 지은 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히라도의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자유 시간을 갖고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자유 시간에 언니들 몇 분과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다 바람이 너무도 거세어 내려가지 못하고 다른 곳을 찾다가 전망대를 발견하고 그곳에 올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성당을 바라보며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히라도대교와 옛 영주가 살았다는 성과 하비에르성당 등 야경이 멋지게 펼쳐진 밤이였습니다.
참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섬입니다.
간담회시간에는 교리신학원에서의 2년 동안의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삶을 실토하는 동기생들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가련하고 마음이 가난한자들을 교리신학원에 초대하여, 생명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의 믿음을 기르고 새롭게 하시어 힘을 얻어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도 가련하여 이곳까지 오도록 이끄시어 믿음을 새롭게 하고 힘을 얻어 굳건한 믿음으로 남은 생을 살아나가도록 초대하셨음을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인 11월7일 아침, 이틀 동안의 비는 멎고 맑게 게인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성지순례를 잘 마감하도록 축복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에 도착하였으나 신부님과 약속 착오로 인해 성당외관만 둘러보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1550년 히라도를 방문한 하비에르를 기념하면서 이름 부쳐진 성당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가톨릭 전해진지 400년이 넘었는데,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불편한 교통상황에도 여러 나라에서 일본에 들어와 교회가 발전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박해가 심해져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히모사시성당에 도착하여 <오! 구원의 십자가여 주님을 찬미하라>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몇 주 전, 배우자가 생일선물로 받아온 십자가의 길 성물을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는 까닭에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몸소 사랑을 보여주시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분을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오고 애잔해집니다.
크고도 높고도 깊고 넓은 사랑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살아가고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다비라 순교성당에서 들러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하여 오후 3시15분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준비하여 무사히 잘 다녀오도록 애쓰고 힘을 모은 우리들이 대견합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마음으로만 담아 오고 싶었습니다.
사진도 찍지 않고 글도 쓰지 않겠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게 실려 다니고 싶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 간 카메라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고 가이드의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기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문예부는 기록으로 남기라고 전해들은 문예부장님의 부탁과 요안나님이 글을 잘 써서 카페에 올려달라고 하시는 말씀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또 수산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글을 쓰려하겠느냐며 내게 부탁하십니다.
제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글이 이제는 책임감으로 지워지다니, 어느 사이에 내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런 심정을 전해들은 마리아님께서도 글쟁이가 글을 안 쓰면 어떻게 하냐고 하시며 격려해주십니다.
한편으로는 부족한 사람을 믿어주는 분들이 고맙게 생각됩니다.
성지순례 기간 중에 독서와 복음 말씀에서 은사에 대해 하신 말씀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의 은사를 잘 써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심을 보면서 아마도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은사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쓰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써야한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써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위해 순명하며 사시는 분들을 보면서 제 자신도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에서입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성지순례를 마치며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4장7절의 말씀을 되새기며 나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고백으로 생을 마감해야함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가야함을 결심해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