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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 <최명숙 목사>
새해 원단(元旦)의 아침빛은 해마다 서광(瑞光)으로 밝아옵니다.
그 빛은 너무 투명하여 X광선처럼 우리들의 삶을 투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삶 속에 더 깊이 투사하여 들어오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염원으로 그렇게 새해는 밝아옵니다.
밝아오는 한 해의 빛의 둘레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복 받기를, 복 주기를, 복이 있기를, 복이 가득하기를, 나아가서 복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1년 365일 수많은 바람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연초에 ‘복’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시켜 기원하는 걸 보면 ‘복’이라는 말은 가장 짧은 말속에 가장 많은 온갖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온갖 좋은 것들의 엑기스가 ‘복’이 되어 우리들 삶 속에 들어와 새해에는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복’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복에 대한 개념이 지성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샤마니즘적인 개념으로 느껴졌습니다.
복! 하면 먼저 할머니의 속 고쟁이에 달려있던 복 주머니에서부터 삼원색으로 조각조각 만들어진 베겟모가 연상되었고 ‘복스럽다’는 말은 촌스럽고 둔하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 같아서 이름에 ‘복’자가 들어가면 얼마나 촌스럽게 생각됐던지 ‘멋’과는 상반되는 의미로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른 후, 성경을 통해 복을 만나면서부터 복에 대한 개념이 새로워졌습니다.
복이란 문제도 많고 바람도 많은 우리들 인생사 가운데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하는 광범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며 이 복을 받는 유일한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복을 빈다는 의미인 축복(祝福)이란 말이 엉뚱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란 말 대신으로 둔갑을 해서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성경에는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축복하는 장면은 나와도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인 야훼는 누구에게 복을 비는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또 그 복의 대상은 유일한 사람이며 복 받은 사람으로 인하여서 복의 영향이 자식을 비롯하여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牛羊)의 새끼와 심지어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까지도 복을 받으며 복 받은 사람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대적들이 물러가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신28:4-8) 야곱으로 인하여서 라반이 복을 받고(창30:27) 요셉으로 인하여서 보디발이 복을 받고, 나아가 애굽과 바로가 복을 받는 것을 봅니다.(창39:5, 47:)
복 받은 백성은 광야에서도 만나를 먹는 기적을 체험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갔어도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는 그 땅에서 쫓겨났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여건으로 인하여 내가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받으면 여건도 변하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든 복 받은 사람이 있는 바로 그 곳은 복지가 되는 것처럼(신28:7) 저주받은 사람이 있는 곳은 고토(苦土)가 되는 것입니다.(신28:16)
성경에는 복 있는 자에 대한 말씀이 나올 때면 반드시 앞서 그에 대한 조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신28:1)
그것은 그분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행하므로 사람 된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사람은 복의 씨앗을 가진 자요, 이런 사람의 삶에서 싹이 튼 복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植物)이 빛을 받기 위해 향일성이 되는 것처럼 복을 받으려면 복의 근원이신 그분을 향해야 하는 이치는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행여 다른 것을 복 인줄로 착각하여 그분의 뜻을 거역하고 그것을 추구할 때는 복을 놓치고 마는 안타까운 사실을 우리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통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복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인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오늘도 내가 누리는 복은 항상 평안하고, 따뜻하고, 넉넉함이요, 부드러운 깃털 속의 포근함 같은 감사요, 기쁨입니다.
꽃도 시들고 잎도 저버려 앙상해져 버린 초라한 나무에 하늘의 은총처럼 눈이 내리면 빛깔도 모양도 볼품없던 나무들이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그 모습은 잎과 꽃으로 열심히 장식하였던 여름날의 전성기와도 비교할 수 없도록 눈이 부십니다.
눈 오는 날 눈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는 천상의 모습이요 보는 이로 하여금 피안(彼岸)의 세계를 경험하는 기쁨을 줍니다.
구부러지고 비틀린 부분이나 굴곡이 생긴 부분에 눈이 내리면 오히려 더욱 멋진 그분만이 창조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은총을 받은 자의 삶은 그 약점으로 인해 더 아름다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습니다. 반전(反戰)되는 그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약함이 더욱 더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나타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복인가요?
새해에는 나도 저렇듯 부시게 신선한 영혼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쓰는 이 겨울 편지가 눈꽃나무처럼 신선한 영혼의 설레임으로 전해져 복을 받는 은총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스러질 듯 눈부신 피안의 눈빛은 그 신선함을 염원처럼 품어 안은 내 가슴에서 녹고 있습니다.
- 2002년 1월에 - .
존재의 의미
날마다 당신을 만나 내가 있는 여기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별이 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고 사랑으로 인하여 역사는 시작됩니다. 오늘도 여기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나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늙음으로 인하여 젊음이 빛을 발하듯이 젊음으로 인하여 노인은 그 존경과 무게를 더하게 되며 남성으로 인해 여성이 여성다워지고 여성으로 인해 남성이 남성다워집니다.
장애인으로 인해 비장애인의 건강이 소중하고 비장애인으로 인해 장애인은 소중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를 서로가 인식할 수 있음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입니다.
예수의 지상 명령도 ‘화목’이며 ‘화평케 하는 자’의 기본자세란 모든 이들을 통하여 그 존재의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꽃이 피어나는 모습도,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구름이 피어나는 것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이며 나비의 날갯짓이나 비가 오고 비안개가 하얗게 감싸는 날이나 눈이 내리는 날도 아름답듯이 사람이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지만 결혼한 지 불과 3개월 밖에 되지 않는 신현기, 김진하 부부에게는 이미 봄이 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신랑은 인물이 살아나며 체중이 9킬로가 늘고 신부는 삽살강아지처럼 짧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생글거리며 다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제 구랑구부(舊郞舊婦)가 되어버린 조용철, 심지선 부부 사이에서 새싹처럼 피어나는 민영이는 잔병치레는 좀 하지만 그런대로 무럭무럭 잘 자라 이제는 걸음마를 한다고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가다가 다리가 아프면 쪼그리고 앉았다가 다시 걸어가는 양이 나비의 날갯짓보다도 앙징맞고 귀엽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권사님 내외분은 추운 겨울에도 조금이라도 햇살이 나고 바람이 잠잠하면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시면서도 말다툼을 종종하시는지 할머니 권사님은 할아버지 때문에 기도생활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십니다.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하여 당신 성격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한 부분을 성품이 유순한 할머니가 대신해서 흡족하게 해주지 못하는 점이 불만인 것 같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공동체가족 경건회에서 대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권사는 몸이나 마음이나 어디 한군데 야무진 데가 없이 물크덩하니 물렁감 같이 생겼으니....” 라고 기도를 해서 웃음을 겨우 참았는데 그 다음날에 할머니권사님이 기도를 할 때는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임중호권사 입에서 나쁜 소리 좀 안 나오게 입에다가 쟉꾸 좀 잠가 주시옵소서 ....” 하는 바람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솔직하고 천진스런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근본적으로 양면성을 가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반면에 추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맑은 물줄기를 타고 흐른다면 아름답지만 그렇지 않으면 악할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습니다.
밖에서 침입하는 균이나 바이러스 외에도 우리 몸 이곳저곳에는 여러 가지 균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 몸이 건강하고 균형을 유지할 때는 그 균들이 숨을 죽이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가 몸이 약해지고 균형이 깨지게 되면 “내 세상이구나!”하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 선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는 악이 어떤 가능성으로 잠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개의 지체를 언급하면서 오히려 탁한 줄기를 향하려는 육신을 의식하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사망의 몸’임을 고백합니다.(롬7:)
송구영신(送舊迎新)도 지나 이즈음은 다시 송신영구(送新迎舊)로 돌아갈 때이지만 지금 우리는 한줄기 맑은 물줄기를 붙잡고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하여 계속 기도할 일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이지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의 자연도 그 사역을 다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 된 우리가 그런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참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은 여건과 조건을 초월함을 나는 동물들의 사랑과 증오의 모습에서 보았습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뱀도 독(毒)을 뿜어 상대를 죽이지만 오히려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는 그 이빨로 새끼를 부드럽게 안아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여건은 뱀입니까? 맹수입니까? 그리고 그 여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천지를 감싸고 있는 뿌연 비안개 속에 겨울은 응고된 그리움처럼 녹아내리고 오늘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도 당신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 2002년 2월의 편지 - .
갈매기는 날고 있을 때가 아름답다
동해에는 솟는 해가 장관이라면 서해에는 지는 해가 장관입니다. 그런 서해를 끼고 살면서도 지는 해를 수년 전에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다에 가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맑은 날이 거의 없기 때문이며 맑은 날에도 바다 쪽으로는 유난히 구름이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바닷바람에 날리고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좋은 날 보기를 사모하며 사는 세상살이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구름 낀 날이 없을 수야 없지만 맑은 날도 있고 또 맑은 날들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이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그분은 우리 지체들 모두를 교회를 밝히는 소중한 빛들로 사용하십니다.
늘 웃는 얼굴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조용철 성도는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가족 아침 경건회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지난밤에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단잠을 주시고 좋은 아침, 좋은 사람들과 경건회로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생활 속에서 지혜를 일깨워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권사님이 계시며,
출입할 때 반드시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내게 인사하는 습관을 갖게 해주신 박철호 형님이 계시고,
한 손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김진하 자매님이 있고,
나의 언행을 냉철한 판단으로 말해주는 아내가 있고,
사랑스런 딸이 있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 )
외에도 교회 운영의 일익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고 있는 집사님들의 아름다운 모습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더 고마운 것은 예배 때마다 설교를 은혜롭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 중에서도 열왕기상을 연구하는 시간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는 솔로몬의 사람들을 복되다(왕상10:8)고 한 것처럼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자신들을 복되게 생각한다’는 김집사님이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다”(시119:103)는 다윗의 표현을 실감한다는 유집사님 등은 내게 더할 수 없는 보람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이 퇴색하거나 변질될 때 결국 잘못된 단언이나 평가를 한 데 대한 책임감과 실망이 수치심에까지 이르면서 앞으로는 누구에 대해서든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무난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던 어느 날, 시린 겨울바다에서 갈매기를 보았습니다.
바다를 모두 안을 듯이 날개를 펴고 나는 갈매기 외에도 날개를 접고 있는 갈매기도 보았는데 깃털이나 머리 모양에 빛깔도 없고 볼품도 없는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갈매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습니다.
아, 갈매기도 날개를 접을 때가 있었습니다. 갈매기는 24시간 날지 않아도 아름답듯이 갈
매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날개를 접은 모습도 사랑할 것입니다.
내일 시들어버릴 꽃이라도 오늘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의 두려움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비겁함입니다.
오늘 날씨가 맑다고 해서 내일도 맑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비록 오늘은 흐리더라도 내일은 맑아질 수 있는 일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는 그분의 말씀처럼 오늘의 아름다움이 변질될까 두려워 염려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그리하여 오늘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지요.
살아가노라면 순간순간마다 일몰의 바다에 서리는 구름처럼 내 마음에도 구름이 서릴 때가 있습니다.
새벽녘이면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이 공감되어 깊은 눈물을 쏟을 때도 있고, 심지어 오래된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만큼 지난날 우리의 가난함이 손끝으로부터 느껴집니다.
무심코 길가에 진열된 수공예품을 구경하다가 ‘베트남’이나 ‘챠이나’ 등이 쓰인 글자를 볼 때면 수출품 쉐터를 팔이 아프도록 뜨개질하던 가난했던 이웃들의 모습이 생각나 멀리서 실려와 싼값에 팔리는 공예품을 하나 사다 놓고 볼 때마다 숙연해집니다.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는 구름도 있듯이 내 일몰의 바다에도 때로는 태양의 찬연함을 가리우는 구름이 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태양이 있음을 믿듯이 갈매기가 날개를 접고 있어도 날개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그릴 때 사람들은 갈매기가 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래도 갈매기는 날고 있을 때가 아름답습니다.
- 2002년 3월의 편지 - .
울
<동물원에 갇힌 곰이 있었습니다. 울에 갇혀서 편안하게 사는 곰은 그야말로 상팔자였습니다. 울 밖에 사람들이 언제나 모인 것도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곰에게 참새가 놀러 와서 지친 몸으로 먹이통에서 먹이를 먹습니다.
곰이 물었습니다. “넌 집이 없니?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아?” “네, 우리는 울이 없어요, 아무도 우리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답니다.” “쯧쯧 안됐구나”그러면서 곰은 거만하게 말을 계속합니다.
“하긴... 누가 네 그 작은 몸뚱이에 신경을 써주겠니?” 참새는 그동안에도 열심히 먹이를 먹었습니다. 이제는 배가 부릅니다. “고마와요, 곰 아저씨” 참새는 인사를 하고 포르르 날아 올랐습니다.
참새는 곰의 울을 벗어나 푸른 하늘로 날아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이 없는 대신 우리에게는 하늘이 있답니다.”> - ‘이현주의 토막 이야기’ 中 -
이 이야기를 읽노라면 덩치가 커다란 곰은 작은 세계를 사는 반면에 작은 참새는 무한대의 세계를 사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보는 사람 눈에 따라서 나는 여러 가지 모습이 됩니다.
생각을 직선적으로 표현하시는 할아버지 권사님은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목사님 몸에 혹시라도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생길까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오니 부디 건강하도록 지켜주시옵소서,
만일 목사님이 어떻게 되신다면 우리는 목자 잃은 양이 되어....” 여기에서 보여 지는 나는 내가 보기에도 금방 스러지는 이슬이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할 정도로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목사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살아가실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마는... ”
아니, 날마다 은혜의 단비를 감지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데 이게 웬말인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다가 순간 숙연한 마음이 되어 세상 재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나를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애가 없는 건강한 몸으로 마음대로 활동하며 이따금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 있지요.
거기까지 헤아려 주시는 할아버지 권사님의 마음이 가슴이 찡~하도록 고마웠습니다.
할아버지 권사님에게는 늙고 병들 때까지 저토록 정성으로 받들어 주는 할머니 권사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외에도 쌍쌍이 짝을 지어 살아가는 공동체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도 훈훈해집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칫 낙심하기 쉬운 여건에 있는 서요한 목사님에게도 착하고 아름다운 사모님이 있기에 위로를 받는 모습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애틋합니다.
만일 모두가 혼자 살아가고 있다면 힘들기도 할뿐더러 얼마나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겠습니까?
가파른 사역의 여정에서 눈에 보이는 ‘울’도 없이 지치고 고독할 때 나는 “....주께서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33:12)라고 모세처럼 기도했고, 그분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3:14)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그분은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줄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느끼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사실적인 체험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라고 했던 욥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8순을 넘기신 김용은 목사님은 “하나님 아버지,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평생 불편한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최목사님을....” 이렇게 기도하실 때 아, 그 노(老)목사님이 보시는 나는 하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요, 행복한 존재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선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요8:29)
눈에 보이는 ‘울’인 보호막이 없을지라도 하늘 보호막이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볼 줄 아는 삶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서 보호했고, 다니엘을 굶주린 사자로부터 보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영(靈)으로만 느낄 수 있기에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하며 그러지 못할 때는 식물(植物)에 물을 주지 않은 것처럼 심령이 바삭 바삭 마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야말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영적인 피부로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기도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 쉬면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쉬는 ‘숨’입니다.
어항에 넣어 기르는 청 거북이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곤두박질을 하며 놀다가도 꼭 한 번씩 물위로 올라와 몸을 말립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눈을 또렷이 뜨고 고개를 모로 꼬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명상하는 철학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이유는 거북이는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울’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울’도 있습니다.
‘이 땅의 울’도 좋지만 ‘하늘 울’은 무한대의 자유요, 온전함입니다.
‘봄’이라는 말이 ‘보다(see)'에서 유래되었다면 봄은 숨어있던 생명을 보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었노라고 외치는 환호성이요, 맘껏 자태를 뽐내는 향연입니다.
’하늘 울‘을 사모하며 산다고 하면서도 때로 눈에 보이는 울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했던 도마(요20:25)의 모습은 오늘도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봄은 또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 2002. 4월 - .
엄마, 사랑해요!
어머니, 저는 지금 이곳에서 새벽이면 푸른빛으로, 저녁이면 노을빛으로 붉게 물드는 창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로 오늘은 대숲도 젖어 댓잎마다 물방울을 떨구고, 이제 막 작은 봉오리들을 뽑아 올리고 있는 장미나무는 젖은 5월의 바람에 환희처럼, 전율처럼 이파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곳 기도원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그리고 나무들과 바람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처음 휴가를 시작했을 때, 좋은 내 집 놔두고 뭐 하러 답답한 데 가서 오래 있느냐? 면서 가서 며칠만 있어 보면 금방 오고 싶어질 것이라는 등 은근히 만류를 하시더니 이번에는 잘 쉬고 오라고 하시는 모습에서 저에 대한 이해의 폭이 한결 넓어지신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니, 그렇습니다. 휴가라고 해야 움직일 수 없는 제 여건에서는 낯선 방안에 갇혀 오히려 더 답답하고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건강한 여건이라면 지난겨울, 홍원 항에 가서 본 것처럼 출렁이는 바다와 갈매기, 들고나는 어선들, 낮은 담에다가 그물을 걸쳐놓은 집들,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있는 바다마을에서 휴가 기간 동안 민박을 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어머니, 한줄기 빗방울을 가지고도 우주의 숨결을 느끼겠노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때로는 이렇게 모든 것을 피부로 직접 부딪쳐보고 싶을 때도 있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또 마음이 아프시겠죠? 그러나 어머니, 그것은 그냥 그 순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뿐, 이제 저는 어릴 때처럼 세상을 향한 갈망도, 목 메이는 서러움도, 시리도록 처절한 외로움도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내 삶의 자리인 ‘여기’에서 해가 뜨고 별이 지는 역사가 있음을 깨달은 때문이지요.
그것은 제가 육신의 나이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나이도 아울러 든 증거일 것입니다.
어머니, 어릴 적 어머니가 붕어를 다루실 때 붕어의 뱃속에서 보았던 부레가 생각납니다.
작은 붕어의 뱃속에 신기하게도 풍선같이 생긴 두 개의 방울이 위아래에 나란히 달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붕어는 그 부레로 올라갈 때는 위쪽을 부풀리고, 내려갈 때는 아래쪽을 부풀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상하로 오르내릴 때 부레로 조종하는 붕어의 신체구조처럼 우리도 위엣 것을 사모할 때 신비의 사람 바울처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찬연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죠?
어머니, 저도 늘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롭게 살고 싶습니다.
어머니,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삶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당신을 어머니로만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져 무심했던 때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여인으로 보았을 때 당신의 삶은 안쓰러운 삶이요, 한편으로는 위대한 인고(忍苦)의 삶이었습니다.
어머니, 여자의 삶이란 희생의 아픔, 그 자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남자를 반려자로 받아들이는 것도 살을 찢는 아픔으로 시작하여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며,
한 생명을 몸 안에 잉태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것도 역시 살을 찢는 아픔으로 시작되는 희생의 삶이 아닌가요?
그 가운데서 얻어지는 작은 기쁨들이 행복이라면 여자의 행복이란 얼마나 안쓰럽고도 가련한 행복인가요?
그러면서도 힘에 겹도록 몸과 마음으로 어려움을 겪어 오신 어머니!
어머니, 외조모님께서 49세 때 어머니를 막내로 낳으셔서 어릴 때부터 부모가 젊은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하셨죠?
그 외조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가끔씩 벽 쪽으로 돌아누워 소리를 죽여 우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언젠가 제게도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러나 아직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가슴이 저려옵니다.
늘 마음은 있어도 쑥스러워 손 한번 잡아드리지도, 안아드리지도 못하지만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지금도 제가 매월 쓰는 글을 돋보기를 쓰고 몇 번씩 읽고 소감을 말해주시는 어머니, 오늘 이 편지를 통해서 그동안 드리지 못한 감사를 드립니다.
어머니, 그 견디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인내력으로 아버지와 끝까지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가정을 지키시면서 저희 5남매를 낳아 이렇게 잘 키워주신 어머니,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당신이 곁에 계시는 기쁨으로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 2002. 5월 - .
‘여기’가 천국 ‘지금’이 행복
맑은 날이면 은가루로 쏟아지는 햇살이 있어 행복하고, 젖은 날이면 솔산을 뿌옇게 감싸는 비안개가 가슴을 적셔주어 행복합니다.
공동체 가족들의 밝은 모습과 새순처럼 탐스럽게 자라는 민영이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안기는 아침인사가 하루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 홈페이지 http:// www.bedesda.com 에는 성도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행복을 뻐꾸기처럼 노래하므로 나를 울린 심지선 집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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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긁어주는 여자
어젯밤에도 긁었다. 내 신랑은 수시로, 특히 밤에 등 긁어주기를 요구한다. 손톱이 없는 내 신랑을 위해 등긁이를 준비해 두지만 항상 내가 긁어 주기를 원한다.
힘이 없는 내 손이지만 그래도 시원한가 보다. 등이 가려우면 유난히도 몸부림을 치기에 한밤중에도 일어나 등을 긁어 준다.
졸릴 때는 짜증도 나지만 너무 착한 내 신랑에게 짜증을 낼 수 없다. 손톱이 없어 시원하게 긁을 수 없을 때 본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하면 더더욱 시원하게 긁어주고 싶다.
내 신랑의 등을 긁어 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손톱이 없이 태어난 그이는 마음에도 손톱이 없어서 생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가 보구나...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남에게 그리고 착한 내 신랑에게 내 마음의 손톱으로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귀한 손톱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살았음을 회개한다. 그리고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평생 그이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오래오래 그이 곁에 있고 싶다.
내게 많은 사랑과 도움과 가르침을 주는 그이에게 나도 무언가 되고 싶다.
등 긁어주는 아내.. 마음까지도 시원하게 해주는 아내, 등을 긁고 있노라면 스르르 잠이 드는 착한 내 신랑을 보면서 주님께 감사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을 내 신랑으로 주셔서, 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큰 은혜를 주시나, 손톱의 일부가 없는 우리 딸도 아빠를 닮아서 착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이가 내 등을 긁어줄 때가 가장 시원하다. 나는 내 신랑의 손톱 없는 손에 길들여졌나 보다.
내 마음도 그이처럼 착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고 투명하게 길들여지기를 기도한다.
내 삶의 기쁨과 감사 중 하나는 사랑하는 그이, 고마운 그이를 위해서 손톱을 깎을 때 짧게 깎질 않고 조금 길게 깎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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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또 한 쌍의 부부인 신현기, 김진하 커플, 생일 선물을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아내에게 “나한테는 네가 가장 큰 선물이야” 라는 멋진 사랑의 멘트를 했다는 신랑 신현기 형제, 비록 정신지체 3급이라지만 한 마디 말로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남편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똑똑한 남편인지 모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진돗개 아롱이(♀)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오동나무에서 보랏빛 초롱꽃이 떨어지고 뻐꾸기 소리가 또렷해질 무렵, 아직도 우리가 강아지라고 부르던 아롱이는 새끼를 낳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지난 해 여름, 부안 진서를 지나다가 동행이 이끄는 대로 전원에 위치한 토속 별미 음식점 ‘신사와 호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년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호박이고, 아저씨가 ’신사‘ 라서 음식점 이름을 그렇게 지었노라 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당에 있는 예쁜 진돗개 강아지를 보고 한 마리 사겠다고 했더니 그냥 선물로 드리겠노라는 주인아저씨(역시...신사!)의 호의로 이제 겨우 젖을 뗀 아롱이를 얻어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 아롱이가 지난 3월에 조용철 집사의 표현대로 음양의 이치(?)를 깨달아 하얀 진돗개 다롱이(♂)와 짝짓기를 하더니 5월에 구슬같은 새끼를 6마리나 낳은 것입니다.
아직도 강아지처럼 폴짝거리는 철없는 아롱이가 어미 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지만 한 마리도 실수하지 않고 여섯 마리를 일일이 핥아주며 알뜰하게 기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아롱이의 모습이 부러워 자기도 아기 갖기를 기도를 했다는 진하자매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결혼 6개월 만에 입덧을 시작했습니다.
공동체 가족들은 틈틈이 부업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오리엔탈 정밀에 가서 바퀴 달린 손수레를 돌돌 거리며 작업물품을 가져다가 일을 합니다. 이렇게 작업을 해서 돈을 받으면 가끔씩 피자나 통닭으로 기분 좋게 한 턱 쓰기도 합니다.
새로 공동체 가족이 된 김정미 자매는 지금도 방문을 열어 놓은 채 열심히 작업 중입니다. 여기 와서 영양 보충하며 지낸다는 본인의 말대로 얼굴이 밝아지고 뽀얗게 피는 것 같아 보기가 좋습니다.
물이 창일(漲溢)한 앞 논에서 황소개구리가 우는 저녁, 장미는 장미로, 수선화는 수선화로 피는, 꽃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로 되어 가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여기’가 천국이고 ‘지금’이 행복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 2002. 6월 - .
소 유
월드컵 축구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여름이 일찍 시작된 것 같습니다. 스포츠에는 문외한(門外漢)인 나도 이번에는 열심히 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열렬히 박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뛰는 선수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이운재나 독일의 칸 같은 골키퍼들이 들어오는 공을 통쾌하게 받아 내거나 차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만 놓쳤을 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공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세 살 적 구루병으로 인한 팔, 다리 왜소(矮小)증은 멀리 있는 것이나 높은 곳에 미치지 못하는 외에도 손 자체가 작기 때문에 특히 공을 가지고 놀 때에도 손에 쥘 수가 없어 늘 놓치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신체적인 약점은 공이나 물건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잡지 못하고 놓쳐야만 했습니다.
젊은 날의 꿈도 낭만도 사랑도 잡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한(恨)은 오랜 동안 가슴에 앙금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잡지 못하고 놓치기만 하면서 살아온 나는 지금 은 목회를 하면서도 성도를 잡지 못하는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에는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던 아픔이었지만 지금은 신비(神秘)를 체험한 당당한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지금처럼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실 때에나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에 과일이나 과자 등을 먹게 되는데 그런 것들은 어머니께서 일단 간수를 했다가 하루에 두 번 씩 일정한 분량으로 똑같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때까지 참지 못하는 우리들은 어머니에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서로 쟁투를 하면서 불법(?)으로 미리 가져다가 먹곤 했습니다.
나도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불법을 행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때문이었고, 둘째, 건강한 형제들과 쟁탈전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마치 애늙은이처럼 초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쟁탈전이 유익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다보면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몰수하셔서 이미 누가 얼마만큼 먹었는지도 정확하게 계산에 넣어 똑같이 공평하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때야 나는 비로소 보너스로 칭찬까지 들으면서 당당하게 내 몫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릴 적 그렇게 공평하신 부모님 밑에서 한번도 실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은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시98:9)의 은혜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받아 누리는 은혜를 당신에게 말 할 수 없음은 그것은 헤아릴 수 있는 제한된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산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헤아리고 계산하는 마음은 자칫 자만(自滿)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나라가 부강해지자 인구 조사를 하여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파악하여서 과시하므로 스스로 만족을 얻고자 했을 때 요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문과 백성을 얼마든지 더 발전하게 하실 터인데 당신은 어찌 군사적인 힘을 자랑하려고 하느냐(삼하24:3)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계가 보이는 불안한 소유가 아닌 우리는 이미 마련된 충만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가 쥐었던 손을 펼 때 시작됩니다. 손을 펴서 손에 쥔 것을 놓을 때 손바닥에 느껴지는 신비로운 우주의 기운이여, 이미 우주의 모든 것들과 내가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는 그 순간에 온 우주는 나의 것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어느 날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또 셋째가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었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자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눅20:34-35)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천국은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인가가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지만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그냥 ‘그 여자’ 라는 것입니다. 그 여자로서 존중되고 그 여자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여자가 그 여자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을 누구의 아내로만 알려고 했기에 세상이 복잡해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결혼생활에 문제를 안은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쯤 ‘소유‘라는 안경을 벗고 그 여자를 ’그 여자‘로, 그 남자를 ’그 남자‘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낮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채소밭을 가꾸고, 해가 질 무렵이면 밭에서 오이, 고추, 가지 등을 따는 공동체 가족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밭의 작물들은 솎아주고, 따 줘도 계속해서 다시 돋아 나오고 여물어 가며 먹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 이유는 뿌리 채 뽑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살도록 해주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도 뿌리 채 뽑아내는 죽음의 소유에서 벗어나 그 존재 자체로 살아가게 한다면, 그렇게 사랑해 준다면 나름대로 아름다운 신비의 역사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 2002. 7월 - .
자 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에 한 차례 홍역을 치뤘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목을 움직이기가 불편하다 싶더니 몇 시간 지나자 목 왼쪽 신경 줄을 칼로 끊는 것 같은 심한 통증에 정신이 아찔하면서 나도 모르게 비명과 눈물이 나왔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는 상황은 성격이 급한 내게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차라리 옥중에서 칼을 쓰고 있는 춘향이의 고통이 이 보다 나을 것 같았습니다.
7월 첫 주일이던 그 날, 굳어진 자세로 엎드린 채 차들이 들어오는 소리와 이층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발소리들을 듣고 있는 기분은 처참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비로소 주일예배를 한 번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던 지난 15년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나의 불편함은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며칠 동안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여자들도 가볍고 편한 차림으로 임하게 되는데 아무리 긴 머리라도 건강하고 긴 팔로 살짝 비틀어서 정수리까지 올려 핀으로 고정을 시키면 뒷목덜미가 시원하게 정리되고,
가벼운 티와 반바지에다가 맨발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 쉬는 시간에는 뛰고 비틀고 뒹굴며 함께 몸을 풀며 자유롭게 임하지만 나는 무더운 날씨에 머리를 시원스럽게 틀어 올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한복이나 긴치마로 발끝까지 길게 가리고 그래도 발이 보일까봐 양말을 신어야합니다.
그리고 힘들게 휠체어에 오르고 내리는 등 움직일 때에도 힘든 것을 느끼기보다는 자칫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실수를 하게 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해야합니다.
그럴 때면 나는 궁금해집니다. 저들은 지금 그 건강함과 자유로움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를, 진초록 여름 숲을 푸른 물이 들도록 오를 때나, 푸른 바다를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닐 때, 그들은 그 눈부신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자유란 주어졌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까닭에 차라리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추구합니다.
젊음이 지나간 후에야 그것이 찬연한 빛으로 의식되고, 건강을 잃었을 때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이 참으로 꽃봉오리였음을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누리지 못함은 부자유요, 누릴 수 있음이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행복임을, 여기가 천국임을 아는 사람은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알(卵)속의 병아리는 자라서 나와야 자유로워집니다. 번데기처럼 불편하고 답답한 내 겉 사람인 ‘몸나’ 속에서 자란 내 속 사람인 ‘얼나’가 성숙하고 변화되어 부자유한 ‘몸나’의 여건을 나비처럼 넘나들므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분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공동체 가족들 외에도 많은 생명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름을 산산이 부스러뜨릴 것처럼 울어대는 매미, 햇살에 전율처럼 잎새를 반짝이며 떠는 나무들, 여름 숲에서 갖가지 소리로 아양을 떠는 새들의 소리, 한 줄기 비가 지나가고 나면 즐거운 비행을 시작하는 수많은 잠자리 떼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까이서 마음을 끄는 안쓰러운 생명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밥을 가지고 와 주기만을 기다리는 진돗개 강아지 한 쌍,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들리는 자갈 움직이는 소리가 날 때면 아니나 다를까 어항의 거북이들이 유리벽에다 배를 대고 이쪽을 향해 서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감쪽같이 숨어버리면서도 나를 보고 모여드는 행동은 겨자씨만한 눈을 가진 이들의 신기한 의식입니다.
묶인 채 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 유리벽에 갇힌 채 주인을 알아보고 소리는 내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거북이,
나는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배가 고픈지, 아니면 어디가 아픈지 말 못하는 미물(微物)들이기에 마음이 더 쓰입니다.
그렇게 안쓰러운 생명을 돌보다보면 나를 살피시는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자유’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속되고 가벼운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에집트에서 종노릇하던 히브리인들이 추구했던 자유는 광야로 나가 살더라도 하나님께 경배하며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출7:16, 8:1)
그러한 ‘자유’를 위해 그들은 에집트의 막강한 권력과 대항하며 출애굽의 사건인 Exodus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본래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그것도 사자나 곰이 양의 새끼를 움켜갈 때에는 목숨을 걸고 구해 올 정도로 양들을 사랑했던 양치기였습니다.(삼상17:34-35)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자였다면 새끼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가진 그였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향해 온몸을 던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삼상17:45)
이러한 다윗에게 그분의 사랑이 목자의 사랑으로 다가온 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을 느낄 수 있음입니다.
바로 그 사랑 안에서 그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온전한 자유의 삶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
- 2002. 8월 - .
가 온
앞이 안 보이는 하얀 안개 속에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고 있는 평화로운 아침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생각할 때면 청동빛 단아한 분위기와 함께 가을과 같이 차갑고 맑은 기운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 숨어있는 번뜩이는 날카로움과 독설(毒舌), 그러나 바르고 맑은 시각과 예리한 직관으로 당신은 나에게 늘 좋은 상담역이 되어 주었습니다.
내가 쓰는 글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를 해주기도 하는 한편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기도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당신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수년 전 그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전화를 했더니 당신은 일을 마치고 꼭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도 맘이 안 놓여 차를 가지고 근처까지 마중을 나와서 나를 직접 업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반겨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항상 평화로운 미소로 누구에게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모님은 저녁식사 준비를 하면서 사실은 김치찌개하고 평범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식사 중에 내 전화를 받으시더니 식사를 중단하고 내가 온다고 찬을 준비해서 저녁 준비를 다시 하라고 했다면서
사모님의 특기인 해물, 두부, 버섯 등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선물로 들어왔다는 제주 옥돔을 양념을 해서 구워놓는 등 정성을 다하여 저녁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날, 그 사랑과 정성어린 마음이 담긴 저녁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편한 나의 여건을 늘 염두에 두고 언젠가는 갑자기 서해 일몰(日沒)을 보여주겠다고 격포로 데리고 가서 전망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처음 보여주었던 그 일몰의 장관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곤고함을 짐작하고 차편과 함께 휠체어 역할을 해줄 봉사자까지 마련해서 영성 프로그램에 보내주었지요?
그 때 그 지리산 속 수북한 낙엽 위에는 감이 저절로 떨어져 곶감이 되어있었고, 산소와 같은 영성프로에 참여하면서 일행과 함께 낙엽 위에서 주워 먹었던 차갑고 달디단 곶감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생각해 보면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내게 많은 위로와 사랑을 주셨습니다.
나의 여건을 깊이 헤아려주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를 할 때마다 ‘지구의 보석’이라는 찬사까지 아끼지 않지만 내가 아직도 여린 탓인지 가끔은 당신의 직선적인 말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당신에게서 나 자신을 보게 되고, 나 역시 부드러운 성격이 아닌 직선적인 성격으로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목사님, 이번 태풍과 폭우로 김해에서는 방파제가 무너졌다는데 그 이유가 내(川)를 곡선(曲線)이 아닌 직선(直線)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직류(直流)로 세게 흐르는 급류를 둑이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듯이 나의 진심을 아는 이들이 이해를 해준다 하더라도 혹 상처를 받지 않을지 몰라 모든 인간관계에 오해가 없기를 삼가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사업이나, 직장이나, 가정 등 모든 일들이 잘되고 좋은 일이 생길 때는 가슴이 뿌듯하게 기쁘지만 일이 잘 안되거나 병으로 고생을 하게 될 때는 모두가 능력 없는 내 탓인 것만 같아 죄 지은 자의 심정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마음 같아서는 모두 한번 씩 안아주고 싶지만 막상 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분은 아실 것을 믿기에 그렇게 답답한 것만은 아니랍니다.
요즘 열리는 총리서리 후보청문회를 보노라면 나라의 중책을 맡을 후보로 선정된 사람이 마치 취조를 받는 것 같은 모습도 민망할 뿐더러 적어도 후보로 뽑힌 인물이 무슨 비리 의혹이 있어서 청문회를 열어야 하는 건지 정치에는 문외한(門外漢)인 내게는 이해가 안 됩니다.
사전 검증으로 도덕성에 의혹이 있어 후보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청문회를 열기 이전에 탈락시키든가 본인이 스스로 물러나는 편이 깔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교육자나 언론인이나 기업인 등으로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능력을 발휘하여 인정을 얻게 되면 당연히 권력을 향해 가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가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모두가 한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권력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이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 삶의 자리야말로 성경이 계속 기록되고 있는 자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삶이란 엄숙한 것이지요.
목사님,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산 속에 흙과 통나무로 지은 도예원, 조용한 음악과 녹차의 향기가 은은한 곳에서 오랜만에 흙으로 구워낸 작품들을 감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불로 연단 받은 정도에 따라 토기(土器)와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로 나누어지듯 많은 시련과 연단을 이겨낸 인생이야말로 보석처럼 값진 인생이라는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가을에는 꼭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지어준 호(號)처럼 가장 바른 중심에서 전체를 바르게 하는 ‘가온’의 자세로 영혼의 현(鉉)을 조율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2002. 9월 - .
오 해
이제는 일상 속에서 내게 더 이상 특별한 느낌이 아닌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 전화를 하거나 방문한 사람들은 으레 나에게 ”사모님이시죠?“ 하는 말을 해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꼭 밝혀야 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그냥 애매한 웃음으로 지나칩니다.
그동안 그들이 살아온 경험 속에서 목사라는 이미지가 이미 남성으로 각인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찬양제 행사를 가졌을 때,
어릴 적부터 내가 딸로 여겨온 지선이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선배 언니가 감동을 받고 심지선 집사에게 ”만일 내가 오늘 안 왔더라면 지선이 널 계속 의심할 뻔했다“고 했다는데 들어보니 기가 막힌 사연이었습니다.
지선이는 이따금씩 내게 와서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다가 자고 가기도 했는데 그 선배 언니가 ”지선이 너 지난번에 집에 없던데 어디 갔었니?“ ”응~ 교회 가서 자고 왔어“ ”......왜?“ ”교회에 목사님 혼자 계시니까 가끔 가서 자고 와“ ”목사님 결혼 안 하셨어?“ ”응~ 우리 목사님은 결혼 안 하시고 혼자 사셔“ ”혼자 사시는데 네가 가서 자?“ ”그럼~ 나는 자주 목사님하고 같이 자~“ ”.....???“
이런 대화가 있은 후로 그 언니는 ‘쟤는 목사님하고 얼마나 친하면 다 큰 여자애가 결혼도 안 한 총각 목사님한테 가서 자고 다니나?’ 하면서 궁금해 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찬양제 행사에 와서 나를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남성으로 의식되었던 목사님이 전혀 뜻밖에도 여성 목사님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에 남모르게 가지고 있던 석연치 않았던 의문점도 동시에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숙연해졌습니다.
그 선배 언니가 만일 자기 생각대로 쉽게 판단을 하고 단정을 짓고 더 나아가 좋지 않은 소문을 내거나 욕을 했더라면,
그렇게 경솔한 행동을 했더라면 어쩌면 지금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웃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성급한 오해나 단정은 삶을 힘들게 하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되고 그게 자신이 일이 아니더라도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TV 드라마에서도 누군가 중상모략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거나 애매하게 누명을 쓰는 내용이 나오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집니다.
그리고 시청자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는 그런 극본을 쓰는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디선가 읽게 된 토막 이야기는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온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도인(道人)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마을에 사는 총각과 처녀가 서로 좋아하다가 아무 준비도 없이 그만 아기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겁이 난 총각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처녀는 부모에게 무섭게 추궁을 당하다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 마을의 그 존경받는 도인이 아기의 아빠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부모는 그 도인을 찾아가 온갖 욕을 다하고 침을 뱉으며 아기를 던져줬고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아기와 함께 그 모욕을 다 받았습니다.
또 그를 존경하던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돌팔매질까지 당해가면서 혼자 아이를 길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너덧 살이 되자 멀리 도망을 갔던 아이의 아빠가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와 결혼 승낙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그는 그동안 정성껏 기른 아이를 그들에게 돌려줬습니다.
그 후로 그 마을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게 되었고, 오래토록 그의 거룩한 인품이 널리 전해져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해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늘 존재해왔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도, 광야에서도, 배가 고플 때에도, 목이 마를 때에도 야훼가 자기들을 광야에서 매장지도 없이 죽이려는 것이라고 오해했으며(출17:3, 민21:5, 신1:27) 모세는 그 때마다 가만히 기다려 그분이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지켜보라고 했습니다.(출14:14)
사실은 그러한 모든 과정들이 그분의 은혜를, 능력을,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였건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고난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단풍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할 때 그 선명도가 더 해지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무일수록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게 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고 했던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이 고난이 장차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 어떤 단풍으로 물들게 될지 가만히 기다려 볼 일입니다. - 2002. 10 - .
껍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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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벗는 아이>
작성자 : 최정숙 작성일 : 2002/10/22 10:35
엄마! 를 부르며 허물하나 벗고/아빠! 를 부르며 허물하나 벗고/슈퍼에 혼자 가며 허물하나 벗고/놀이터에 혼자 가며 허물하나 벗고/받아쓰기를 하며 허물하나 벗고/알림장을 적으며 허물하나 벗고/친구이름 한, 둘 기억하며 허물하나 벗고/이제는 엄마와 떨어져 혼자서 씩씩하게 학교에 가는 걸로 허물을 벗어 던지는 우리 남기!/하나하나의 허물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힘이 들까?/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허물을 벗으면서/나에게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선물하는 우리 아이!/언젠가는 우리 남기를 짓누르고 있는/무거운 허물을 모두 모두 벗어 던지고,/밝은 세상을 향하여/아름다운 날개 짓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모습을 바라보며/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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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인 남기는 오늘 처음 혼자 학교에 갔습니다.
애초부터 혼자 갈려고 나섰던 게 아니라 매일 남기를 데리고 다니는 같은 반 아이가 오늘은 웬일인지 먼저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를 차를 피해 건너면서 그동안 아이들과 다니던 길이 아닌 가로수 보도블록을 택해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입학하고 나서 한 학기 내내 엄마와 손잡고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벚꽃이 떨어지던 그 길을 엄마와 서로 쫓고 쫓기면서 웃고 장난하며 다니던 길에 오늘은 꽃잎 대신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길을 남기는 가방을 멘 채로 학교를 향해 의젓하게 걸어갔습니다.
남기를 데리고 가는 아이가 먼저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고 혼비백산 달려 나온 엄마는 의젓하게 혼자 가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 대견스러워 계속 미행(?)을 하다가 남기가 가로수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울컥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버린 아이, 무엇이든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 아이, 저 혼자만의 세계 속에 웅크리고 숨어서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과 표정을 짓는 아이,
그 보이지 않는 문을 부수고 벽을 헐기 위해 엄마는 지난 5년 동안 아이한테 매달렸습니다.
모두들 부러워하는 직장을 자원 사퇴할 때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결단이었습니다.
무엇이 엄마에게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며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이었습니까?
건강한 몸, 반듯하게 잘 생긴 용모, 어느 것 하나 빠진 것 없이 보이는 아이,
그러나 아무리 치장을 하고 사랑스럽게 감싸주어도 밖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엄마의 가슴에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 되어 터져 나오는 통곡을 속울음으로 삼키게 했습니다.
세상에 내놓기가 늘 불안한 아이!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상한 자신의 가슴속에 새가 알을 품듯 품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껍질을 하나씩 벗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로 인해 아이의 인지가 자라면서 아이를 덮고 있는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비치는 빛입니다.
그 빛으로 엄마의 가슴은 상처가 아물고 조금씩 새 살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아이의 껍질이 벗겨지는 만큼씩 새 살이 되고 있습니다.
동, 식물을 포함해서 껍질이 없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땅 속에 들어간 씨앗은 껍질이 벗겨져야 만이 싹이 나옵니다. 꽃이 피려면 봉오리가 터져야 합니다.
파충(爬蟲)류나 조류(鳥類)는 알(卵)이 깨어져야 새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곤충도 번데기에서 껍질을 뚫고 나와야 날개를 단 완성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폐증세를 가진 경우만이 아니라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껍질을 벗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생후 8일이 지나면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약속의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맹세의 흔적은 몸에 가졌지만 끝내 마음의 껍질을 벗지 못하고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앞에 둔 모세는 그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몸에 남긴 칼자국이 아니라 양심을 가르고 심장을 꿰뚫는 영혼의 솟구침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지(認知)만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천상의 ‘눈뜸’입니다.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과거의 믿음의 흔적보다는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 속에 성령의 칼자국을 가진 사람이며 날마다 할례의 피 흘림을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껍질에만 싸여 하늘을 인지하지 못하는 영적인 폐쇄증세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을 하면서도 교리라는 손거울로 한정된 부분에만 매여 탁 트인 하늘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아이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을 벗어나 빛나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늘 찬송가를 부르고 듣기를 좋아하는 아이, 한 주간 내내 교회 주일학교만을 기다리는 아이, 기도하기를 잃지 않는 아이,
어쩌면 이 아이는 이미 껍질을 벗고 누구보다도 더 멀리 하늘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2002. 11 - .
성(聖)과 속(俗)
‘흑백(黑白) 대비 - 빛은 먼지의 반사로 빛이 됩니다./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오직 자기 영광(흡수)으로만 삼으면/밤(夜)같은 검정 색이 되고,/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다만 하나님 영광으로 돌려 드리면(반사)/대낮 같은 밝고 거룩한 흰색이 됩니다.’
민들레 책방에서 출간된 화가 김병화 이콘집을 보면 많은 말 대신 한 장의 단순한 그림으로 하는 설교가 참으로 신선합니다.
이러한 흑백의 대비는 흰 종이 한 장과 검은 종이 한 장으로 성(聖)과 속(俗)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성경에서 표현되고 있는 ‘흰옷(계3:4,5)’이라든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계7:13,14)’했다는 말들과 함께 거룩함을 흰색으로 표현한 이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겨울이면 계절 행사로 치르는 자작시 낭송회 ‘겨울마음 모으기’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해마다 행복한 부담으로 옵니다.
‘시(詩)’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거리감과 함께 감당하기가 겁이나 차라리 뒤풀이로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나 주변역할을 하므로 부담을 덜어보려는 모습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해 두해 하다 보니 자신은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속속 ‘겨울마음 모으기’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쑥스러워 하면서 어쩌면 자신은 평생 시 한 줄 쓰지 못할 종류의 사람으로 굳게 믿고 있던 최정숙 집사와 심지선 집사는 작년 제 4회 ‘겨울마음 모으기’에서 가슴 속 깊은 언어를 내놓음으로 그만 죄중을 눈물바다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시라는 형식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고, 시라는 틀에 꼭 맞지는 않지만 진솔한 언어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음은 형식만을 갖춘 시보다 얼마나 더 소중합니까,
그렇게 풀어내면서, 그렇게 공감하면서 가슴에 뭉쳐 굳어져 가는 사연들이 응혈(凝血)이 풀리듯 풀어지면서 답답했던 마음들이 시원해지고 슬픔이라고 괴로움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삶들이 꽃처럼 행복처럼 피어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시는 누구의 가슴에나 있지만 어떤 가슴에는 죽은 시로, 어떤 가슴에는 살아있는 시로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할렐루야!’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의 빛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도 반영을 하지만 때로는 홍해를 건넌 모세처럼(출1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던 다윗처럼(시23:) 그렇게 노래함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온전히 다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한꺼번에 내놓으려는 욕심 때문에 입구가 막히는 수도 있습니다.
빛을 반영한다 해도 100%를 반영하여 우리 자신이 빛 자체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빛은 그분(시27:1)이시기에 세례요한도 자신을 빛이라 하지 않고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노라(요8:12)’고 했습니다.
태양을 반영하는 달이 밝으면 얼마나 밝겠습니까? 구름에 가린 태양은 달보다도 희미한 모습일 때가 있지만 보름달이 비치는 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세상은 밝습니다.
그래서 흐려도 해는 해요, 밝아도 달은 달이지요. 그처럼 우리는 그분을 반영하는 빛이며 그 빛 받아 우리의 옷이 씻겨 희게 되었다(계7:14)는 것은 흰 색소로 인함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색소가 없이 닦여진 투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꼬레지오(correggio)가 그린 ‘노뜨(Notte)’라는 그림에는 아기 예수의 몸이 빛을 내뿜는 투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 빛을 받아 투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북극의 곰이 흰 이유는 얼음과 같은 이치로 털에 있는 미세한 기포가 투명하여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聖)과 속(俗)은 같은 여건에서의 다른 모습입니다. 빛을 반영하는 것은 성(聖)이요, 그렇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침몰시키면 속(俗)이지요.
오늘 우리는 무엇입니까? 먼지도 빛을 반사하여 세상을 밝히는데 나의 투명도는 반사기능을 제대로 하므로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존재로 살고 있는가요?
아니면 오히려 모든 빛들을 빨아들여 어둠 속으로 침식시켜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블랙 홀(black hole)은 천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중력에 지나치게 짓눌리게 되면 ‘나’라는 존재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거울 앞에서 머릿결을 헤집을 때면 흰 머리카락이 한 올씩 보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씩 흰색으로 변해 가는 때는 탁한 육신의 감각이 소멸되어가고, 투명한 영혼의 사람이 되어 가는 때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겨울이면 눈이 부시도록 하얀빛으로 우리에게 기쁨의 환호와 동시에 영혼의 숙연함을 주는 눈(雪)!! 손을 대면 사르르 녹아서 스러져버리는 투명함으로 지순(至純)의 빛을 발하는 눈처럼 오늘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우리의 삶도 그런 투명함으로 성화(聖化)되어 가고 있는가요?
* 다음 2003년 1월의 편지는 백지로 보내겠습니다. 그 때는 그 공백에 당신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2002. 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