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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착하고 충성된 종 원문보기 글쓴이: 온누리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11시 분당 기쁜우리교회에서
초교파 목회자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광주 안디옥교회 박영우 목사님의 설교에 이어
한기총 송춘길 목사님의 경과보고 시간으로 이어졌는데,
그동안 WCC반대 운동을 이끄는 준비위원장으로서 힘들었던 과정들로 인하여
목이 메여 계속 마이크를 붙들지 못하고 고신대 김경철 교수에게 넘겼습니다.
김경철 교수께서 그동안의 총회반대 활동과 반대연대에 대해 격려하시며
짤막하게나마 WCC의 실체에 대해 밝히는 귀한 동영상입니다.
*바아르 선언문 (Baar Statement)
1990.1.9.~15.까지 스위스 취리히 근처 바아르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하나의 완성된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바아르 선언문이다.
"우리만 믿음의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
Christians may not behave as if we were the only people of faith"
"세상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들도 지혜와 영감에 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공헌을 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It is evident the various religious traditions of the world have much to contribute in wisdom and inspiration towards solving these problems."
바아르선언문은 기독론에 있어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함(Christology and Religious Plurality)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선언문이다.
WCC 종교다원주의 명백한 증거! 바아르선언문(1990)
1990년 1월 스위스 취리히 근교 작은 마을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 산하 소위원회는 4년간 “네 이웃의 신앙과 나의 신앙 -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한 신학적 발견들”이라는 주제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였다.
여기에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신학자들이 동참하고 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WCC는 사실상 불교 등 모든 동양권의 종교를 포함한 일체의 종교가 하나님의 한 사역에 불과하며, 문화화 역사, 지역, 언어만 다르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것이라는 종교다원주의를 절대화시켰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발표한 ‘ 비 그리스도 교인에 관한 선언’ ‘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과 맞먹는다. 하여간 모든 선언은 결국 하나님의 품속이라는 것이며 이를 ‘종교다원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1. 서론
2. 종교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
3. 종교 전통 속의 애매성
4. 기독론과 종교다원주의
5. 성령과 종교다원주의
6. 종교 간의 대화 : 신학적 전망으로 구성돼 있다.
신학적 종교 다원주의로서 모든 진리는 하나로서 표현만 상이하며
모든 종교가 다 하나님의 사역이라 주장한다.
1. 서론
1971년 아디스아바바에서 회동하였던 중앙위원회가, 대화란 “모든 교회가 함께 걸어가야 할 장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천명한 이후,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는 WCC주요사업의 일환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WCC 총회 이후 이공동의 장정은 주로 “공동체 내의 대화”로 인식되어져 오고 있다.
이는 우리 기독교인들과 생활의 터전을 함께하고 있는 타 종교인들과 대화의 장을 트는 것을 뜻하며, 이로써 평화와 정의,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공동체 내에서 복잡한 공동의 문제들에 대면하는 우리들은 유아론적인 신앙만을 고집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해 간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 전통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대한 영감과 지혜를 함께 나눌 수 있음은 자명하다.
‘대화를 위한 지침’에서 명문화되어 있듯이 우리들은 공동체 내에서의 대화의 중요성을 꾸준히 확인해왔다.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지침을 잠깐 상기해 보자 :
‘대화의 장을 열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타인에게 개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용기와 깊은 소명감을 요하는 결단인 것이다’ (중앙위원회 킹스턴 자메이카 1979)
우리는 대화의 실천에서 유래하는 제반 신학적 물음들의 긴박성을 인지하고 각별한 관심을 표명해 왔다. ‘지침’이 제안하듯이 “타 종교인들과 신실한 ‘공동체 속의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활동 역사에 이들 이웃이 차지하는 위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들은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과 같은 삶의 터전을 공유하지만 다른 길(타종교)을 걷고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삶의 역정이 하나님의 섭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를 고민하는 행위이다” (지침P11)
타 종교와의 대화는 다양한 종교의 전통들이 한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종교 간의 대화가 타종교인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시사를 함축함은 자명하다.
타종교인들과의 만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신학자들은 시시때때로 종교적 다원성의 문제를 안고 씨름해왔던 것이다.
초창기(1910년 에딘버러)부터 현대 기독교의 에큐메칼 운동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타 종교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이해를 교감하게 되었으며, 더 적절한 종교신학의 형성을 위한 “공동의 장정”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은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신학이 계속 부재한다면, 타종교인들의 신앙적 삶속에서 확인되는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이해하거나 적절히 전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종교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
종교다원성에 대한 우리의신학적 이해는 태초부터 만물가운데 임재하여 활동하시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출발한다. 성서는 그 분이 모든 나라와 민족의 하나님이며 그 사랑과 은혜가 전 인류를 포용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컨대 노아와의 계약은 모든 피조물과의 계약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고유한 지혜와 이해의 전통에 따라 각 나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정의는 명실 공히 땅 끝까지 미친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체 피조물에 편재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들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해 왔으며, 그 만남을 고유한 방식으로 증언해 오고 있다. 구원, 완전성, 깨달음, 인도 그리고 휴식과 해방을 추구하고 발전한 신앙적 역정은 이 증언들 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증언들에 지극히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며, 모든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항존 해 있었음을 자각한다.
기독교인인 우리의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구원의 사역에 언제나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응력을 제한할 수 없다”(CWME. 산 안토니오1989).
타 종교인들을 이웃으로 하는 우리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들을 인정”하는 포용을 근거로 해야한다.(CWME. 산 안토니오1989).
우리는 종교전통의 다원성을, 하나님께서 각 나라와 민족과 관계하시는 다양한 방식의 결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다양성과 풍성함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종교적 모색과 발전 가운데 함께하셨음을 인정하며, 그들의 가르침 속에 지혜와 진리가 있고 그들의 삶속에 사랑과 경건이 있는 이상, 이는 우리 가운데 발견되는 지혜, 통찰, 지식, 이해, 사랑, 경건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들이 정의와 해방을 위해 우리와 협력하고 고민할 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종교의 다원성 속에 현존하시는 만유의 주로서 하나님을 신앙한다면, 그분의 구원 사역이 어느 특정한 대륙. 문화. 민족에 국한된다는 편협한 사고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여러 민족과 나라가 보존해 온 각기 고유한 종교적 증언들을 무시하는 처사는, 인류의 아버지요 만유의 주라는 서 메시지를 결국 부인하는 결과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과 예측 불가능한 장소에서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부를 깨닫고,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세계전도회선언)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종교 다원성의 전 영역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종교다원성은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고전 15-18)때를 대망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과 이웃을 더 깊게 만날 수 있는 호기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타 종교인들에게 주신 지혜와 사랑과 힘”(뉴델리 보고서1961)을 새롭고 더 원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께서 타 종교인들의 삶속에서 우리는 만나실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 (CWME보고서, 산 안토니오 1928)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증언할 수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3. 종교 전통 속의 애매성
종교 전통 속에 있는 지혜. 사랑. 동정심 그리고 영적인 통찰 등의 긍정적인 면모 이면에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이 공존해 있음은 슬프지만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흔히 종교가 다양한 방식으로 압제와 소외의 체제를 지지해 왔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실상부하게 정당한 종교신학이라면 , 인간의 사악한 죄, 그리고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고 영적인 통찰에 불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진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지혜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4. 기독론과 종교다원주의
다른 종교의 길을 걸어온 이웃들의 삶속에서 선과 진리와 경건함을 보고 경청한 우리는, ‘대화를 위한 지침’(1979)에서 제기된 문제 -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속의 활동과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사역을 통한 특수한 구속의 활동에 대한 문제제기를 매우 진지하게 해야 만 한다(23절)
우리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향한 명시적, 인격적 위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전체 인류 가족을 결정적인 결속과 제약 안에서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모든 피조물과 인류 역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활동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그 초점에 이르고 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 그의 선포, 그리고 치유와 봉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자신의 영역을 정초하신다.
이일은 어느 특정한 문화와 공동체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았던 예수의 손길과 태도는 이를 입증한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영과 진리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을 수용하였으며(마8:5-11), 예수는 시리아 - 페니키아 계통의 가난한 여인의 신앙을 보시고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였다(마 15:21-28)
예수의 지상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 일면 제한된 것처럼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지만(cf. 마 10:23).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유월절 신비를 통해서 이 제한은 초극된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역사에 내재한 보편적 차원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 구원의 신비는 그 완결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중계되고 매개된다. 자신들을 영적으로 권면하고 계도하는 종교적 전통에 따라 신성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교회 밖에 있으며, 이들에게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예수 사건은 우리를 위하여 역사에 드러난 가장 분명한 구원의 징표일 것이다(딤전2:4)
5. 성령과 종교다원주의
우리는 이 문제를 숙고함에 있어서 창조. 육성. 도전. 갱신. 보전의 사역을 맡아 땅위에 운행하시는 성령과 그 활동에 특히 관심을 가져왔다.
마치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요 3:8) 우리의 정의와 규정, 그리고 제한을 넘어서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인위적으로 구속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 가운데 현존 하시는 성령의 “경륜”에 찬탄하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게 된다.
인간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운행하시는 성령의 자유로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이루어 내며 지구의 표면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 그리고 진리와 평화와 정의를 희구하는 인류를 격려하시고 그 가운데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는 확인하다.
사람.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그리고 자기절제에 속한 모든 것은 실로 성령의 선물로서 인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갈5:22-23 cf . 롬 14:17)
그러므로 ‘지침’(1979)속에 주어진 질문, 즉 “교회 밖에 성령의 사역을 통해 활동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며 유익한가?”(23절)에 우리는 긍정적인 답변을 선택할 것이다.
타 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타 종교의 선함과 진리를 해석하고 “우리와 다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영역을 통해서다.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지혜와 모든 판별과 함께 더욱더 풍성해 지는 것이다”(빌 1:9-10)
예수와 성서의 해석자이신 성령(요 14:20)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기존의 종교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성숙함에 따라 새로운 지혜와 통찰을 거듭 밝혀 주실 것이다.
6. 종교 간의 대화 : 신학적 전망
우리는 타 종교인들의 세계 속에 현현하는 구원의 신비를 인식함으로써 종교 간의 대화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정비 할 수 있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종교적 확신까지도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성취하시고 또 성취하실 일들을 존경하는 자세는 이제 무엇보다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차로인 셈이다. 우리는 개방적인 정신으로 대화에 임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확신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타 종교인들로부터 배울 자세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대화는 쌍방의 지평을 넓혀주면서, 각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더 깊은 회심으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타 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를 통해서 신앙적인 삶의 깊이를 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장황하게 부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타 종교인들과 협력하는 태도야 말로 진리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더 깊게 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소명의식 가운데에서 종교 간의 대하를 통하여 기존 신학의 방법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화적 신학과 인간 해방의 실천을 통해 진정한 "신학의장). 즉 신학 작업의 원천과 근거가 형성될 것을 믿는다.
종교 다원주의와 대화적 실천의 도전은, 기독교 신앙의 신선한 이해, 새로운 질문들, 그리고 더 나은 표현을 규명해 가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의 한 부분이다.
글퍼온곳 : 다음블로그-주님 오시는 발자국소리 / 엘샤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