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자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제는 알렉산더 병사가 있는 막사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명령을 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 그렇다면 자네 이름을 바꾸던가 아니면 자네의 생활 태도를 바꾸도록 하게!" 우리에게도 병사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즉, 이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자칭 그리스도인은 아니신지요?
□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막 16:17) 전도팀이 어떤 마을에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그 마을에 있는 토착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말했다. " 만일 우리에게 예수 신을 전하고 싶다면 예수가 우리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 전도팀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 마을 사람들을 다 모이라고 해라. 하나님과 너희 신 중에 누가 더 센가를 보게 될 것이다. " 라고 말했다. 그래서 1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제사장이 무리 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전도팀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 갈보리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에 의지해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은 떠나갈지어다! " 전도팀의 기도에 갑자기 토착신 제사장의 우두머리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 여러 선생님들, 나는 여러분의 신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 갑작스런 변화에 궁금해진 마을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 나는 우리 신의 제사장입니다. 늘 신들과 대화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떠나라고 명령할 때 이곳에 모였던 가장 센 귀신부터 가장 작은 귀신까지 '예수가 이 마을 사람들을 원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라고 하며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 라고 대답했다.
□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자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처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이 섞인 호칭이었다.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을 받는 중 그 기회를 이용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아그립바 왕은 깜짝 놀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바울을 책망하고 있다.왕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라벨이 붙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침을 뱉듯이 외면해버렸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가르키는 별명이다.원래 이 이름은 그리 명예스러운 내용으로 불리운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안디옥 신자들은 그들에게 붙여진 부끄러운 별명을 받아 오히려 놀라운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빛나고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우리에게 좋은 영적 유산을 전해줬다.그 결과 마침내 주후 313년에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게 됐다.오늘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 재미있는 이름 어느 여인이 아들을 낳고 목사님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고민하다가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는 생각이 나서 발할발(發) 빛광(光) 자를 써서 발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느 집에 아들만 넷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섯째에 딸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귀한 여자라는 뜻으로 귀녀(貴女)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이 방씨였습니다. 그녀가 은행에 가서 기다리다가 “방귀녀씨”라고 부르면 주변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한 은행만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요청한 은행입니다.
우리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예수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 시작은 희망의 또다른 이름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는 인생의 말년에 암과 투병했다. 그는 항상 새출발의 정신으로 인생을 살았다. 암과 투병하면서도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았다. 험프리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역경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극일 뿐이다. 역경은 '약간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는 문제'일 뿐이다. 사람들은 예배때 축도만을 기다린다. 예배가 시작될 때 가슴 설레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나는 아직 한번도 고별연설을 한 적이 없다". 새 출발은 항상 장엄하다. 새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창공을 날 때가 아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도 아니다. 새가 창공을 날기 위해 깃을 활짝 펼 때가 가장 아름답다. 돛단배가 먼바다에 출항하기 위해 돛을 활짝 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새출발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시작은 희망의 또다른 이름! 부활하신 주님의 첫 말씀은 "왜 울고 있는가?"였다. 이것은 책망이 아니다. 격려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다.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새출발의 선언이다.
□ 높으신이름 인도의 개척 선교사였던 스코트 목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척 선교지를 향하여 가다가 적의를 품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었읍니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늘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켜면서 원주민들의 언어로 찬송을 하기 시작했읍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그 앞에 무릎 꿇고서 면류관 드리세. 금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목사는 잠시 후면 다가 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찬양을 계속했읍니다. 그러나 3절이 다 끝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눈을 떠보니 그를 겨누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읍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받으실 그 높으신 이름이 누구인지 말해 달라고 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그 리스도께로 인도했읍니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은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 막 9: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 눅 10:33~3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요 13:13~15.
18세기에 독일에서 훌륭한 목회를 했던 진 프레드릭 오버린 목사가 모처럼 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고,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마차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오버린 목사를 발견하고는 마차에 태워 인근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버린 목사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신은 목사님이시죠 ?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시나요 ? 저는 목사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실 때까지 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귀다 툼으로 얼룩져 있는 이 시대에 한겨울의 모닥불과도 같은 사람 ! 당신도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 '에스텔'이라는 이름의 엄마 교회학교에서 소풍을 갔는데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잃어버렸다. 그 어머니는 미친 듯이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어린아이가 "에스텔! 에스텔!"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발견해 내고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서 두 팔로 끌어 안았다. "왜 엄마라고 부리지 않고 '에스텔'이라고 엄마의 이름을 불렀지?"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렇다. 그곳은 엄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라고 부 른다면 수많은 어머니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의 이름을 불러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 역시 개인적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만남이 되어지지 않는다.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 좋은 이름 서울 어느 교회의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대심방을 하게 되었다. 한 가정을 찾아갔더니 달동네 단간방에서 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최집사라는 사람인데 부인과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과 함께였다. 담임목사는 심방록에 가족의 이름을 적었다. "... 큰 아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고야입니다." "작은 아들의 이름은?" "고다입니다." 담임목사는 이름이 이상해서 물었다. "아이들의 이름이 어찌 이렇습니까?" "이름이 아주 좋은데 왜 그러십니까?" 최집사가 되물었다. "고야, 고다가 무엇이 좋단 말입니까?" "이름에 성을 붙여서 불러 보세요. 목사님!"
□ 교회이름-목회비전, 교회 신앙고백 표현 장로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어떤 것일까. 또 요즈음 가장 인기있는 이름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들과 함께 최근 만사운동의 영향으로 교회개척의 열기가 새롭게 가열 되면서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살펴보면 그 이름을 통해 달라지는 교회의 개척의 양상과 목회자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 변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장로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이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이름이다. 1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새문안, 남대문, 연동, 부산진, 서교동교회 등은 모두 그 이름으로부터 지역성이 강조된 교회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 교회 명칭의 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어 도시지역보다는 농어 촌지역 등 보수성이 강한 지역에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국 노회 가운데 도시와 농어촌 지역이 고르게 분포해 있는 서울노회의 경우를 보면 농촌지역에 위치한 46개의 교회 모두는 예외없이 지명만 들어도 소재지를 알 수 있을만큼 지명과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는 반면 도시지역의 경우에는 일부 교회가 지역명과 무관한 이름을 갖고는 있으나 그 비율도 40퍼센트 에 못미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 대부분은 「교회명=지역」이라는 전통성에 기초해 오늘날도 교단이나 지 역에 관계없이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교회의 이름에 적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변해가는 이름의 추세 그러나 이러한 전통과 함께 점차 지역과 무관한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교단 분열과 함께 70년대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게 됐다는 점이다. 성장과 발전 분립의 순환속에 필연히 동일한 지역내에도 여러 개의 타 교단 교회나 같은 교단의 교회가 설립되면서 새롭게 출발하게 될 때는 이미 기존지역의 명칭을 사용하는 교회와의 구별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가장 손쉽게 채택된 방법들은 지명과 함께「중앙」이나 「제일」등의 부가명칭을 첨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후발교회이면서도 「새」 「신」이라는 첨가어뿐 아니라, 「제일」이나 「중앙」과 같이 의미상 차이가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마저 생겨나게 됐다. 둘째는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들이 갖고 있는 참신성과 시대정신의 반영등을 들 수 있다. 개척교회들은 대부분 그 이름에서부터 변화를 시도해 지역명칭과 같이 「주어진」교회의 명칭을 수용하는 대신에 목회적 비전이나 교회의 신앙고백 등을 아름다운 성서적 어감과 신앙적 용어들로 표현한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인데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이미 지역명칭을 사용하는 교회들이 포화상태에 이른것도 한 요인이 됐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본 교단 총회에서 발행한 96년도 교회주소록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특징은 앞서 지적한 지명을 사용한 예라 할 수 있지만 명칭은 대광(24개) 벧엘 영광 성광(23개) 등으로 나타나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중에는 교회의 사명인 「빛」을 담고 있는 교회의 이름이 셋 이나 되는 것도 한 특징으로 꼽을만 하다.
■ 새로운 변화 이러한 변화는 결국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를 중심으로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지명이나 혹은 「반석」「신성」「벧엘」등 명사 위주의 교회 명칭에서 형용사 혹은 부사적인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교회의 이름은 그 자페로 하나의 신앙고백적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됐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의 교회」「~(하)는 교회」등을 들 수 있는데 선호되는 이름으로는 주님의 기쁨의 나눔의 만민의 믿음의 교회와 아름다운 참된 복된 교회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땅끝까지 사랑하는 서로사랑 한알의 밀교회 등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징은 시대 정신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이름을 가진 교회들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가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부각됨에 따라 최근 개척되는 교회 가운데는 늘푸른 작은 나무교회 등이 있으며 물댄동산교회의 경우는 동명의 교회가 세 곳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개척돼 97년도 교회주소록에 처음 수록된 포항노회「푸른마을교회」 (이상은목사 시무)의 경우는 아름다움과 함께 목회적 비전을 엿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한데 동 교회의 이 목사는 교회 이름의 배경에 대해 『「푸른」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마을」은 개인위 주의 생활에서 공동체성 회복하자는 시대적 정신을 담고 있다』면서 『앞으로 교회 이름에도 조금 가벼운 경향은 있지만 순수국어가 사용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 만사운동의 영향도 이밖에도 최근 본 교단 총회가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 온 만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기념교회 개척운동이 확산돼 가면서 이에 따라 교회 이름에도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고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지명과 기성교회 명칭을 덧붙힌 이름으로 경주충신 고양자양 태백연동 광주충신 동부광성 일산 명성교회 등으로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교회들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의 형태는 이미 영락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사용하던 것으로 최근들어 이러한 경향이 확산되는 데 대해서는 긍정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 총회전도부장 유의웅목사(도림교회 시무)는 『개척교회에 있어 개척을 지원한 교회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것은 지역교회와의 유대감의 고조뿐 아니라 목회적 경험의 전수 등 후속적 지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지적하는 이들은 이미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시무)가 「미래 사회와 미래교회」제하의 저서에서 지적한 바 있는 21세기 교회의 특성 중 하나인 「개교회 주의 퇴조」의 부정적인 면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회 개척도 교회의 독자성보다는 체인식의 교회 개척을 부추기게 될 것으로 우려하며 최근의 기념교회들에 붙여지는 교회의 명칭을 그 예로 지적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본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은 「개교회」로 존재한다고 볼 수 는 없다. 이미 노회 산하의 지교회로 설립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명칭을 통해 굳이 특정교회와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총회 노회 교회로 이뤄진 교단적 유기성과 별도의 관계를 중복 설정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소중한 이름 「교회」 그 지역의 세워진 교회가 지역적 대표성을 갖고 이름에서부터 지역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교회 그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이름은 분명 우리 교회가 지닌 소중한 전통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듣기에 아름답고 소중한 의미를 가진 교회 이름을 갖는 것은 결코 소홀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이 이땅에서 환영받고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이름이 「교회」가 「교회」로서 기본적인 이름에 걸맞는 사명을 다할 때일 것이다.
□ 이름을 불러주면 (정겨움(다정함),고부간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불화하다는 것은 우리 가정이 안고 있는 고금의 고질이다. 따라서 그 고질을 해소하는 지혜도 적지 않았다. 시집가는 딸에게 가르치는 내훈(內訓)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시집가서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릴 때는 반드시 어머님이란 말을 말머리나 말끝에 꼭 붙이라는 것도 그 해소책가운데 하나였다. 이를테면 `장에 다녀오겠습니다' 할 때 `어머님 장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할 때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님.'한다. 인간적 내밀성(內密性)을 그 한 마디 말로 반복자극함으로써 불화를 증발시킬 수 있음을 우리 선조들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측에서도 그렇다. 며늘아기란 말을 말머리나 말끝에 붙여 말하면 된다. `며늘아가, 장은 내가 보아오마' `설거지는 내가 하마. 며늘아가... '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딸이름 부르듯이 며늘아기의 이름을 불러주면 더욱 정답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적 지위나 권력이나 권위를 떠나 인간적 접근을 뜻하기 때문이다. 징기즈칸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리더십의 비결 가운데 하나로는 그가 거느린 장졸들을 계급이나 직책으로 부르질 않고 반드시 이름을 알아 불렀다는 것을 들고 있다. 흥부가 놀부집에 양식 얻으러 갔다가 죽도록 얻어맞아 걷지도 못하고 돌아나오는데 놀부를 부를 때 형님이라 부르지 말고 놀부형님이라고 불렀던들 덜 얻어맞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든다. 박놀부의 누이동생이 있었다면 미스박보다 박놀순양이나 박놀순씨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한결 정답다. 군대나 단체나 기업체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명령체계에 의한 타율적 통솔이 아닌 인간적 체계에 의한 자율적 인화 측면에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지금 일선 직장에서 여사원들이 미스박(朴), 미스김(金)... 하는 미스 호칭 거부 풍조가 일고 있다 한다. 한 보험회사의 조사에 의하면 여사원들은 88 %가 미스로 호칭되고 있다 하고 미스로 부르면 대답않기로 한 회사도 있고, 커피나 점심을 사는 벌금 물리기를 하는 회사도 있다 한다. 미스 호칭의 거부는 바로 이름으로 불려 인격적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인간선언이요, 이유있는 반항이랄 수 있다. 이름을 불려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꼬옥 들어맞는 한국적 인간관계나 한국적 리더십 정립에도 십상인 것이다.
□ 주의 이름을 부른 자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사도행전 2장 21절에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인가 영어에는 "Ask for mercy from the lord shall have it and saved"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하는 뜻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가. 그것은 첫재로 예배하는 일이요, 둘째로 감사하는 일이요, 세째로 봉사하는 일이요, 네째로 주안에서 소망을 갖는 일이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Brand new person inside"라는 뜻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표(향기)가 있어야 한다. 생활과 일거수 일투족이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해야한다. 밀레라는 화가는 처음에는 여자의 나체를 그려서 그것을 팔아 생활을 했다. 예수를 잘 믿는 그의 딸들이 항의하고 나섰다. 그런 덕스럽지 못한 돈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밀레는 화구를 들고 집을 나와 버렸다. 자기도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다. 어느 시골 논길을 가다가 저녁해가 지게 되었다. 논에서 일하던 부부가 멀리 지평선에서 들리는 교회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일손을 놓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그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는 "만종"이라는 제목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림은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주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주의 이름을 가슴속에 아로새겨 살아가자.
□ 관심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 내가 간호학 수업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 수업시간에 퀴즈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세심한 학생이었는데, 시험지를 대강 훑어보고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제가 우리 학교에서 청소하는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이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청소하는 여자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였으며 나이는 50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마지막 문제를 답할 수 없었고, 그 문제는 공란으로 해서 답안지를 제출했다. 수업이 끝나기 전 한 학생이 마지막 문제가 퀴즈점수에 포함되는 지를 물었다. 그러자 교수님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 분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단지 여러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미소를 짓고 인사하는 정도일 지라도, 그들은 모두 여러 분의 관심과 돌봄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교훈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후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 청소하는 그 여자의 이름이 도로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인도한다'고 말씀하신다(요10:3).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긴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Kathy Cooksey)
□ 예수 이름으로 미국의 「헨리 누엔(Henri Nouwen)」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명문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 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가서 봉사했다. 여기서 그는 정신박약자들 에게 용변 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세수를 돕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대학 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 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할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 길을 포기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말씀하고 몸소 행했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이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 이름 훼손 이집트 사람들은 진짜 이름인 큰 이름과 가짜 이름인 작은 이름 두 개씩 갖고 있으며, 작은 이름만을 부르고 큰 이름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한다. 버마와의 축구 대전을 중계할 때 선수들 이름에 온통 `몽'이 들어가 있어 몽-몽 개짖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것도 `몽'이라는 미혼자의 공통이름에 실명(實名)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콩고 어부들의 공통이름은 `무에레'로 밥을 많이 먹는 무에레, 아 내가 예쁜 무에레... 하는 식으로 식별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본명 실명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 아명(兒名)이 있고 자(字)가 있으며 불특정수(不特定數)의 호(號)가 있다. `애아버지', `애삼촌' 하는 식으로 아이 본위로 호칭하는 것도 실명 기피 풍습이다. 하물며 실명을 틀리게 써 훼손시킨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졌었다. 민비(閔妃)는 무척 사이가 나빴던 대원군(大阮君)을 정동(貞洞) 무당으로 하여금 저주(詛呪)케 하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 이시응(李矢應)'이라 이름을 틀리게 써붙여 놓고 화살을 쏘게 하고 있다. 대원군의 이름인 하응(昰應)의 `하(昰)'를 발음이 통하는 `昰는 夏의 옛 글자이기도 하지만 是의 본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矢)'로 훼손하고 있음을 본다. 원시적인 사고 방식으로 이름은 그 사람의 목숨이나 피 같은 생명의 일부요, 눈이나 이빨 같은 육체의 일부로 간주하였으며, 이름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해치려는 악마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되고 그 이름에 가한 훼손은 바로 생명이나 육체에 가한 훼손으로 동일시했다. 지금도 내 이름을 남이 틀리게 쓰면 꺼림칙한 주술(呪術)적 불쾌감이 드는 것도 이 원시적인 심성(心性)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이번 국회 의장단, 상임위원장 선거에서 이 이름 훼손이 무더기로 판치고 있음을 보았다. 이 훼손으로 의장단 선거에서만 무효표가 무려 58표에 이르고 있고, 상임위원장 선거에서는 한 사람이 20표까지 훼손을 당하고 있다. 장난기를 부리거나 고의적으로 무효표를 만든 것은 의사 표시일 수 있으나 그 양산된 무효표 가운데 적지않은 수가 무성의나 무지로 이름을 잘못 써 수백만 명의 민의를 휴지화(休紙化)시키고 있다. 성명 가운데 `채'를 `최'로, `중'을 `준'으로, `청'을 `천', `재'를 `제', `완'을 `원'으로 쓴 것 등이 고의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 훼손이 본인에게 준 득표 측면에서의 손실을 고사하고라도 민족이나 국가의 갈림길을 정하는 중대한 안건이 이 같은 무성의와 무지로 엉뚱하게 흐르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공 사랑이란 깊는다 와 같은 말이고 수선하다 와 같은 말이다. 모든 종류의 고독과 불행으로 아파서 홀로 죽어 가는 약한 사람을 고독 속에서 홀로 죽어가도록 놓아두지 않고 따스한 가슴으로 이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마치 구멍이 난 파이프에서 물이 터져 나올때 터진 부분을 이어 주고 막아 주면 새로 쓸 수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에게 단번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이 필요한 것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친구와 친구사이 연인과 연인사이 단번에 기적처럼 해결되는 구원은 없다. 우리에겐 단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면밀히 바라보고 그것들을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고 실밥을 뜯어내고 다시 조립하여 붕대로 감아 놓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이 있을 뿐이다.
□ 주 이름으로 받는 고난을 기뻐하다 '인도 성자' 라 불리는 썬다싱이 25살 나던 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일름(Ilom)이라는 지역에 들어가 시장에서 전도를 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랬듯이 복음을 전하는 도중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갖은 고문을 다 받게 되었다. 그러나 썬다싱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밤에는 날이 새도록 찬송을 불렀고, 낮에는 작은 창문을 통해 설교를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재판장이 그를 끌어내도록 하고는 판자위에다 발과 손목을 묶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장바닥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리고 승려들이 수십마리의 거머리를 썬다싱의 몸에 쏟아 부었다. 거머리는 썬다싱의 피를 빨아 살을 파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칠 정도로 비참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썬다싱은 찬송과 복음을 전하니 군중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렸다. 그곳에서도 썬다싱은 전도에 의해 믿게 된 지하 교인들에 의해 구조를 받게 되었다.
□ ‘삶’으로 얻어지는 이름 사람의 언행이 일치될 때, 그 언행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받게 될 영향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파괴적일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름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이름을 얻는 것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그들의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 결국 랍비를 찾아갔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랍비가 물었다. 부인이 먼저 말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랍비가 묻자 두 사람은 “두 분 다 요셉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랍비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시아버지는 말도둑이었고, 저의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 아이를 요셉이라고 부르시오. 그리고 나서 그 아이가 말도둑이 될지 혹은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보시오.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당신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 이름 없는 돌이 되어 요 12:24; 고후 5:14; 시 118:22; 사 28:16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재학중인 한 총명한 학생이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지원하자 그를 아끼는 어떤 교수가 이렇게 충고하였다. "자네는 일년이나 이년내에 죽게 될지도 모르네. 그것은 미친 짓이야."결국 그 젊은이는 아프리카의 오지로 뛰어든 지 일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는 스승에게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답장을 띄워보냈다. "저는 아프리카 선교사업이 마치 커다란 다리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량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땅속에 얼마나 많은 돌이 묻혀야 하는지를 교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게 아프리카의 땅 속에 묻히는 이름 없는 하나의 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아프리카의 땅 위에 벅음의 열매가 맺힐 것을 확신하면서."(S. 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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