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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제기 신라 통일기의 지식인들에게 ‘세계’는 당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가 거의 전부 - 세계 질서는 당이 중심되어 주변국들과 조공 ․ 책봉 통해 종속관계 형성 - 상호 독립국임을 전제로 하여 내정간섭은 無. 신라 지배층은 당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하고 문화를 수용 - 고유한 정치적 전통 지키는 데는 강한 보수성.
2> 당 중심 세계질서로의 편입 ① 7세기 신라의 대당외교 초기 고구려 ․ 백제의 안내로 중국 남북조에 사신 - 『양서』에 처음 등장. 5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 - 6세기 이후 고구려 및 백제와 대결양상 - 당이 백제 공격하면서 나당 양국 군사동맹이 성립 - 한반도 내 삼국의 각축에서 열세였던 신라가 생존을 위해 국제관계 활용하며 당 중심의 질서체계에 편입. ② 통일전쟁 이후의 나당관계 660년 당군의 원조로 백제멸망 - 당군의 사비성 주둔 및 663년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명명 - 군사력 대결로 백제 및 고구려 지역에서 당군 축출 -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에 당이 보복전 계획하며 양국 관계 회복.
3> ‘군자국’이라는 자부심 통일이후 지배체제 안정되면서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에 대한 현실적 요구 증가 - 국내 교육기관 정비 및 나당간 긴밀한 문화교류로 충족 - 당으로 유학, 국내에서 습득한 경전, 중국고전에 대한 신라인의 이해가 사고에 영향 - 중원을 중심으로 華夷觀 형성 - 신라인들 스스로 당의 藩國 인식, 당의 주변부 국가들 중 으뜸으로 자부 - 통일후 당, 신라 모두에 “신라=군사국” 인식 - 당을 종주국으로 생각하는 전제 확립.
4> 정치 전통의 고수와 개혁의 한계 신라 통일기의 나당간 교류는 인간의 직접 왕래를 통해 활발 - 宿衛 명분의 학생들은 유학을 포함한 당 문화 수용의 다리 역할 - 유학적 소양은 관료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 : 유학적 소양이 관료 진출의 일차적 기준은 아님 : 관료 진출의 일차적 기준은 골품 - 진골신분 아니면 국가 최고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함 - 신라 지배층은 당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지만 전통적 지배체제 속에서 누려온 특권유지의 범위 내에서 인정.
5> 나머지 문제 9세기 후반 지배체제의 붕괴 - 당 황제의 현실적 권위가 실추되었음에도 사신왕래 빈번 - 내부 통치 불안정을 보완 : 진골중심 지배체제 고수로 한계. 7세기 이래 신라는 당에 대해 사대의 예를 준수 - 국내의 정치제도, 군신관계는 제후국의 격식 아님 - 지방 유력자들은 당 중심 세계관에 영향 덜 받음. |
- 하일식, 「당 중심의 세계질서와 신라인의 자기인식」, 『역사와 현실』37,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