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華西學派의形成과 斥邪思想
일반적으로 학파의 형성은 講學을 통하여 후학을 양성함으로 가능해 진다. 화서학파들은 書社, 精舍, 書齋 등 강학소를 설치하고 강학을 통하여 사제관계를 성립시켰다. 이런 강학활동을 통해서 스승의 학문과 사상이 그 문인들에게 전수되고, 다시 그 제자들이 강학활동을 통하여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계속적으로 학문과 사상이 전수되어 학통이 이어지면서 화서학파는 조선말기 가장 방대한 척사학파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먼저 화서학파의 문인들을 살펴봄으로써 화서학파의 규모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화서학파의 척사사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척사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서 본인의 척사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2․1. 華西學派의 講學活動
(1) 金平黙과 그 門人들
重菴 金平黙(1819-1891)은 스승 화서가 서거한 후에 화서학파를 이끌어 가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화서의 문하생 대부분이 중암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중암은 1842년 화서문하에 들어온 후 1845년 3월에 양근 잠호의 유영오 집에 초빙되어 14세된 성재 유중교를 가르쳤다. 1846년(28세)에는 경기도 연천에 있는 臨章書院에서『兩賢傳心錄을 강론하였다. 임장서원에는 주자와 우암을 제향하고 있다. 양현전심록은 정조대왕이 명하여 편찬된 책으로 주자와 우암의 心法이 담겨져 있다. 중암의 스승 화서가 공자․주자․송자의 도통을 계승하였는데, 화서의 수제자 중암이 양현전심록을 강론하였음은 이러한 스승의 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암은 벼슬을 사양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사방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활동을 하였다. 성재 유중교가 1866년 가평군 설악면 독대곡에 개설한 大谷書堂과 1869년 개설한 漢浦書社에서 강학하였다. 중암은 춘천시 신동면 삼천리 삼마부락에 崔雲卿(1842-1926)이 개설한 龍潭書社에 초빙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그 후 그는 가평군 가평읍 경반리에 紫陽書社와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香山精舍에 초빙되어 강학을 실시하기도 했었다. 1881년 전라남도 지도로 유배를 갔을 때에도 모여드는 선비들을 가르쳐 김한섭․김봉식 부자 등 전남 영암지역의 화서연원을 배출하였다.
1886년(68세) 만년에는 경기도 포천군 백운산하에 雲潭精舍를 세우고 강학을 실시하였으며, 백운계곡 上溪에 居然臺를 쌓고 향음주례를 행하였다. 중암은 거처하는 방에 주자․우암․화서의 묵화상을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벽에 걸고 분향하고 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학할 때에도 제자들과 더불어 瞻拜하였다고 한다.
중암의 문인 340여 명은 중암이 임장서원, 한포서사, 대곡서당, 향산정사, 용담서사, 운담정사, 지도 등에서 배출한 인물들이다. 중암 김평묵이 강학활동을 통하여 양성해낸 주요 문인들은 모두 尊華攘夷論과 척사사상을 신봉하였고 나아가 이를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그 중에 후학을 양성한 주요 문인은 다음과 같다.
崔榮昇(1822-1896): 경기도 양주 출신, 후학양성
柳重敎(1832-1893): 서울 태평동 출신, 후학양성
李根元(1840-1918): 경기도 양평 출신, 후학양성
尹錫鳳(1842-1910) 경기도 양주 출신, 후학양성
柳麟錫(1842-1915):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崔雲卿(1842-1926)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柳重岳(1843-1909):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柳基一(1845-1904): 경기도 포천 출신, 후학양성
柳重龍(1845-1929):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洪在龜(1845-1898):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盧正燮(1849-1902): 경기도 개풍 출신, 후학양성
洪在文(1854-1946):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慶賢秀(1861-1928): 경기도 파주 출신, 후학양성
慶文秀(1865-1925): 경기도 파주 출신, 후학양성
李奎顯(1874-1951): 서울 ○○동 출신, 후학양성
(2) 柳重敎와 그 門人들
省齋 柳重敎(1832-1893)는 서울 대평동 출신으로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자잠이란 마을에 살았다. 설악면은 당시는 양근군 북면으로 화서의 벽계마을에서 약 20리가 된다. 화서가 평생동안 수시로 찾아 머물면서 공부하고 제자들과 강학하였던 高達菴(鵠菴)도 설악면에 위치한다. 蘗溪 사람들이 설악면 5일장을 보는 등 일일생활권에 속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자잠에 살고 있던 낙은 유구(1789-1870)는 역시 화서의 제자로 화서와는 5년 아래다. 낙은은 5세 된 아들(柳重敎)을 말에 태우고 화서문하에 왕래하며 공부시켰다. 그러다가 낙은은 벽계의 화서 舊宅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자제 등 친족을 머무르게 하면서 수십년간 화서를 사사하며 아침이면 반드시 절하고 존경을 표하도록 하였다. 성재는 화서와 중암 두 스승에게 배워서 그 도통을 계승한 화서학파의 핵심인물이었다.
낙은 유구는 설악면 울업(禹揖)에 禹揖書室을 열고 강학을 실시했다. 그 아들 성재 유중교는 화서의 고제로서 화서학파에서는 일반적으로 중암 김평묵의 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 성재는 화서의 강학방법을 계승하고 이를 講學儀禮로서 정밀하게 정비하여 학풍을 일으키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므로 화서→중암→성재로 이어지는 도통은 화서학파의 정론처럼 되어있다.
성재는 스승 화서가 서거한 다음해인 1869년(35세) 한포 남쪽 독대곡(도곡리)에 집과 밭을 사서 가평군 북면 화양동에 머물고 있는 중암 김평묵을 모셔다가 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1869년(38세)에 그는 설악면에 한포서사를 개설하고 중암을 모셔다가 經學과 禮學을 강론하는 강회를 열었다. 성재는 正堂을 ‘주일당’으로, 좌우 협실을 ‘博約室’과 ‘克復室’로 명명하여 敬의 수양론과 그 실천방법을 강학의 기준으로 삼았다. 1876년(45세)에 병자조약이 체결되자 가평으로 移居하여 玉溪九曲을 명명하고, 하면 승안리에 紫陽書社를 세워 주자․우암․화서의 유상을 모시고 문인들과 강학하였다. 유중악과 유인석도 이곳으로 옮겨왔고 중암도 근처 구곡리로 이사하게 되면서, 이 곳은 화서학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성재는 1882년(51세)에 춘성군 남면 가정리로 이거하여 柯亭書社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1886년 가정리를 떠나 충북 제천군 동량면 공전리로 이거하여 1893년 62세로 별세할 때까지 長潭書社를 개설하여 강학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양성된 유중교의 문인은 430여 명이다. 유중교가 강학활동을 통하여 양성해낸 주요 문인들은 모두 尊華攘夷論과 척사사상이 철저하였다. 그 중에 후학을 양성한 주요 문인은 다음과 같다.
申錫元( - ): 황해도 평산 출신, 후학양성
裵澣白(1838-1901): 함경도 영흥 출신, 후학양성
高錫魯(1840-1922): 황해도 벽성 출신, 후학양성
安鍾應(1845-1906): 경기도 지평 출신, 후학양성
兪鎭河(1846-1906): 경기도 고양 출신, 후학양성
李晉應(1847-1895):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兪致慶(1848-1910): 황해도 연백 출신, 후학양성
權一善(1852-1930): 강원도 홍천 출신, 후학양성
李昭應(1852-1930):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梁性煥(1854- ? ): 경기도 양평 출신, 후학양성
梁斗煥(1855-1921): 충청도 목천 사람, 후학양성
李晩應(1857-1938): 경기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朴冑淳(1858-1929): 충청도 충주 출신, 후학양성
柳台錫(1858-1933): 강원도 춘천 출신, 후학양성
鄭雲灝(1862-1930): 충청도 제천 출신, 후학양성
池源永(1872- ? ): 충청도 제천 출신, 후학양성
梁在薰(1877-1945): 경기도 양근 출신, 후학양성
金鼎業(1880- ? ): 평안도 안주 출신, 후학양성
(3) 朴文一과 그 門人들
雲菴 朴文一(1822-1894)은 1848년 27세 때에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田土 일부를 팔아 서울에서 朱子大全과 朱子語類를 사가지고 왔을 정도로 학문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다. 운암은 벽계에서 留學하면서 이준․김평묵․유중교․최익현 등 동문들과 교유하였다. 화서는 운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關西가 寂寞한 지 오래되었으니 그곳에 그대를 보내며 머물게 하여, 한 지역의 선비들이 古人의 爲己之學을 알게 하고, 千古 箕聖의 지방에 다시 禮讓의 풍속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화서의 이 말은 운암으로 하여금 관서로 돌아가 학풍을 일으키라는 권면이었다. 그는 화서로부터 학풍을 일으키라는 화서의 권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운암은 1846년 25세 때에 壇을 설치하고 혼자 향음주례를 매일 연습하였으며, 그 후 박천의 龍淵書院, 영변의 明道菴 등에서 강학을 실시하였다. 33세에는 畓洞書齋에 머물면서 후원에 단을 만들고 松茶로 주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 그는 淸溪書院에서도 강학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운암은 41세에 經義齋를 세웠는데, 사방에서 백여명이 넘는 생도들이 몰려들었다. 1878년 57세 때부터 正堂에 주자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하고 후에는 스승인 화서 이항로를 배향하였다. 1880년 59세에는 齋規를 짓고 매월 朔望에 생도들을 楡壇에 모이게 하고 차례에 따라 예배하고 재규를 읽어 爲學․持己․居家․接物의 방법을 알게 함으로써 독자적인 학풍을 이루어나갔다. 운암의 학풍이 명성을 얻고 조정에 알려지자 사헌부 지평이 제수되었고, 사방에서 제자들이 더욱 모여들었다. 그러므로 齋舍를 늘려 12재를 새로 개설하였다. 운암은 元齋 이외에 南齋․北齋․東齋․西齋․下南齋․東二齋․西二齋․東三齋․西三齋․狂聖齋․存省齋․鳳飛齋의 12재를 새로 열었다. 그리고 각 재에는 10명에서 30명까지 수용하여 강학하였다. 이리하여 지역의 仁孝와 禮讓의 풍속이 이루어지고, 학풍이 성대하니 감사 민병석은 각 읍에 存道齋를 설치하고 운암의 제자들을 파견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이로부터 박운암은 관서의 대학자로 명망을 얻게 된 것이다. 운암이 길러낸 門下生은 70여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수 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평안도 태천 지방의 주인공은 운암이요, 그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암의 제자가 70여명이라는 것은 상식이하의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운암이 별세한 후에 후학들은 雲谷正堂에 운암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지냈다. 운암 박문일이 강학활동을 통하여 양성해낸 주요 문인들은 모두 존화양이론과 척사사상이 철저하였다. 그 중에 후학을 양성한 주요 문인은 다음과 같다.
朴文五(1835-1899):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玄熙鳳(1847- ? ): 평안도 개천 출신, 후학양성
金源俊(1852-1913):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朴治翼(1855- ? ): 평안도 선천 출신, 후학양성
白三奎(1855-1920):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朴殷植(1859-1925): 황해도 황주 출신, 후학양성
趙秉準(1862-1931): 평안도 의주 출신, 후학양성
金宅西(1866-1936):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金東潤(1870-1930):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金斗運(1886-1951): 평안도 영변 출신, 후학양성
盧德濟( ? - ? ): 평안도 정주 출신, 후학양성
盧伯敬( ? - ? ): 평안도 태천 출신, 후학양성
(4) 崔益鉉과 그 門人들
勉菴 崔益鉉(1833-1906)은 화서의 고제자로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채리에서 崔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면암이 4살 때에 아버지를 따라 단양 금수산 골짜기로 이사를 갔다. 면암은 여기서 김기현에게 공부하다가 11세에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로 이사하여 집을 빌려 살게 되었다. 그래서 父子가 10.5리 되는 가까운 벽계로 가서 화서 이항로에게 수학할 수 있게 되었다. 면암은 22세에 포천 가채리 고향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면암은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이듬해에 명경과에 급제했다. 이때부터 그는 관계에 나아가 정사를 바르게 집행하는 데 노력하였다.
면암은 1899년 포천의 선비들과 鄕約을 설치하고 실시하였다. 1900년에는 가평군 朝宗巖에 가서 皇壇 제향에 참석하였다. 그 후 그는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으로 이거하였고, 그곳 정산향교에서 향음주례를 행하고 龜洞精舍에서 강학하여 후학을 배출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전북 군산 임피의 樂英堂에서 송병선이 여는 강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서서 윤석봉․김복한 등 호서지역 유학자들을 만나보았다. 한편 그는 경주의 郎山書堂에서 강학하였으며, 제주도와 흑산도 流配時에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흑산도에는 유림들이 단을 만들어 면암을 추모하였던 것이다.
면암은 1903년에는 스승 화서의 문집 간행, 舊宅 환퇴, 신도비 수립, 묘역정화 등 추모사업을 위하여 동문 등 전국 600여 유림들과 講修契를 조직하고 절목을 정하였다. 1905년에는 경기도 관찰사에 除授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그는 나라를 팔려는 賊臣들의 처형을 요구하다 왜군사령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포천으로 압송된다. 그 해 10월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이루어지자 그는 8도 士民에게 을사늑약을 성토하고 五賊을 처형할 것과 왜의 물건을 쓰지 말자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면암은 선비들의 뜻을 결집하기 위하여 사우들과 더불어 충청남도 논산의 궐리사에서 강학하고 모인 선비들과 맹세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아쉽게 이 일은 사전에 누설되어 왜병의 감시를 받게 되어 실패하였다.
1906년 면암은 태인의 임병찬의 동조를 얻어 거의를 추진하였다. 2월에 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가족들과 작별한 뒤에 태인의 무성서원으로 가서 문하생들과 강회를 실시하여 거의를 결의하고 각군에 격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 격문으로 인하여 의병대장 면암을 비롯한 장수들이 체포되었고, 그 중 면암 등 일부는 일본의 대마도에 구금되어 항거하다 거기서 면암은 餓死殉國하게 된다. 면암의 문인은 약 850여명을 넘는다. 면암의 문인들은 모두 尊華攘夷論과 척사사상이 철저하였다. 그 중에 후학을 양성한 주요 문인은 다음과 같다.
姜漢老( ? - ? ): 충청도 공주 출신, 후학양성
高石鎭(1856-1924): 전라도 고창 출신, 후학양성
高禮鎭(1875-1952): 전라도 고창 출신, 후학양성
郭漢紹(1882-1927): 충청도 연기 출신, 후학양성
金九鉉( ? - ? ): 전라도 고창 출신, 후학양성
朴奎鎭(1858- ? ): 전라도 화순 출신, 후학양성
朴琳相( ? - ? ): 전라도 무안 출신, 후학양성
裵楨基( ? - ? ): 전라도 무안 출신, 후학양성
白景寅(1874-1952): 전라도 보성 출신, 후학양성
沈相福( ? - ? ): 경상도 산청 출신, 후학양성
吳駿善(1851-1931): 전라도 광산 출신, 후학양성
尹兢周(1853- ? ): 경기도 양주 출신, 후학양성
林顯周(1858-1934): 전라도 구례 출신, 후학양성
李敎憲(1862- ? ): 충청도 부여 출신, 후학양성
蔡相悳(1862-1925): 황해도 벽성 출신, 후학양성
李基溫(1834-1886): 제주도 제주 출신, 후학양성
李道復(1862-1938): 전라도 진안 출신, 후학양성
李洙夏( ? - ? ): 전라도 장흥 출신, 후학양성
張鎭旭(1866- ? ): 전라도 순창 출신, 후학양성
鄭經源( ? - ? ): 전라도 함평 출신, 후학양성
丁大晛(1884-1958): 전라도 곡성 출신, 후학양성
趙泳善(1876-1932): 전라도 곡성 출신, 후학양성
崔基性(1863-1931): 전라도 영암 출신, 후학양성
崔柄善(1858- ? ): 경상도 하동 출신, 후학양성
崔永祚(1859- ? ): 경기도 포천 출신, 후학양성
河祐植(1875- ? ): 경상도 진주 출신, 후학양성
(5) 柳麟錫과 그 門人들
毅菴 柳麟錫(1842-1915)이 양자로 들어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잠강은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가깝고, 양근(양평) 벽계의 靑華精舍와는 20여리를 넘는 곳이다. 가평군 설악면은 화서학파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설악면 迷源書院은 조광조․김식․남언경․이제신․김육․김창흡 여섯 현인을 제향하고 있었다. 六賢은 도학을 공부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화서학파와 관계가 깊다. 미원은 행정구역상 양근이었는데, 배향한 육현 중에 남언경․이제신은 대대로 벽계구곡에 살았고 김창흡은 벽계에서 30년을 살았다.
그리고 설악면 禹揖書室은 낙은 유구가, 한포서사․대곡정사 등은 유중교․유인석 등이 개설한 서당이었다. 그러므로 미원서원은 화서학파 선비들이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대표적인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서의 부친 이회장은 迷源書院의 賜額을 건의했고, 서원이 철향된 후에 성재는 향인들과 더불어 壇을 설치하고 분향했다. 그 후에 이 壇에 화서․중암․성재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미원서원이 화서학파와 관계가 깊다는 것을 입증하여 준다고 하겠다. 의암은 1869년 27세에 미원천이 북한강으로 유입되는 잠강(自潛)에 省齋와 함께 漢浦書社를 세우고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876년에 병자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성재 유중교를 따라 가평으로 이거하여 玉溪九曲을 명명하고, 하면 승안리에 자양서사를 세워 朱子․尤菴․華西의 초화상을 모시고 문인들과 강학하였다. 1893년 제천 장담에서 성재가 별세한 뒤에는 성재를 대신해서 그 제자들을 이어받았다. 1895년에는 제천 장담서사에서 강습례와 향음례를 실시하였다.
의암은 1901년(60세) 2월 황해도 구월산의 淸聖廟에서 강습례를 행하고, 9월 개천의 崇華齋에서 강회를 실시하고, 1902년 숭화묘 설치하여 공자․기자․주자․우암․화서를 봉안하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봉행하였다. 그 해 5월 장세정․문봉기 초청으로 용천에 玉山齋를 설치하고 강회를 실시하였다. 1903년(63세)에 평산군 山斗齋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모시고 강회를 주관하였다. 그는 은률의 淸聖廟에서도 강회를 가졌다. 그밖에 용강의 向陽齋, 영변의 本立齋, 의주의 觀海齋, 용천의 主一齋, 덕천의 明德齋, 선천의 仁義齋, 태천의 三秀齋, 정주의 龜陰齋, 태천의 蒙養齋, 평원의 愛白齋, 단천의 聖學齋 등에서 講學活動을 하며 의암은 북한 지방에 화서학파를 양성해냈다. 이로써 박문일․박문오 형제의 문하연원들이 의암 문하에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의암 유인석이 길러낸 문하생은 약 710여명이다. 의암 유인석이 강학활동을 통하여 양성해낸 주요 문인들은 모두 尊華攘夷論과 斥邪思想이 철저하였다. 그 중에 후학을 양성한 주요 문인은 다음과 같다.
禹炳烈(1856-1929): 황해도 평산 출신, 후학양성
安光烈(1857- ? ): 황해도 평산 출신, 후학양성
張世靜(1859-1931): 평안도 용천 출신, 후학양성
安承禹(1865-1896): 경기도 양평 출신, 후학양성
李正奎(1865-1945): 충청도 제천 출신, 후학양성
玄學汝(1866-1937): 평안도 개천 출신, 후학양성
李相卨(1870-1917): 충청도 진천 출신, 후학양성
裵縉煥(1871-1939): 함경도 영흥 출신, 후학양성
姜達熙(1875-1934): 충청도 제천 출신, 후학양성
宋殷憲(1877-1946): 충청도 보은 출신, 후학양성
玄基璉(1878-1922): 평안도 개천 출신, 후학양성
金萬濟(1879-1920): 서울 종로 출신, 후학양성
鄭海文(1882-1947): 충청도 충주 출신, 후학양성
李範植(1888-1958): 충청도 홍주 출신, 후학양성
玄相允(1892- ? ): 평안도 정주 출신, 후학양성
이상 화서 문하생들 중 김평묵․유중교․박문일․최익현․유인석은 화서학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華西學派 分布現況
〔표-3〕 단위 :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