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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수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無憂手
자경문 (4)
畵虎畵皮難畵骨이요 知人知面不知心이라
화호화피난화골이요 지인지면부지심이라
이 저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하~! 삼 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니라.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니라.
백 년 동안 물질을 탐해봐야 그건 하루아침에 먼지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그 다음에 또 그 스님이 이어서 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어릴 때 저 듣고는 그냥 외워버렸어 내가. 글자는 몰랐는데 그냥 듣고 외웠어요.
畵虎畵皮難畵骨이요 知人知面不知心이라
화호화피난화골이요 지인지면부지심이라
사람이 호랑이를 그리는데 그 가죽을 그리지 뼈는 못 그린다 이거야. 난화골(難畵骨) 뼈 그리기는 어렵다. 화호화피(畵虎畵皮) 호랑이를 그리는데 가죽을 그리지 뼈 그리기는 어렵다 지인지면부지심(知人知面不知心)이라 사람을 아는데 그 얼굴을 알았지 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아주 얼마나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거든요. 그 뭐 별로 세상경험이 없는데도 저 이야기를 들으니까 참 옳은 말씀이다. 정말 뭐 어디 하늘에서 내려온 도인인가 싶더라고요. 그 스님도 아주 젊은 십대야 나도 십대고 아직 십대 초고 그런데 저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知人知面不知心이라. 꼭 명심해야 될 구절이지요. 사람 아는데 얼굴 알았지 그거 속마음 모르잖아요. 평생 같이 살고도 모른다는데 뭐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知人知面不知心이라. 그래서 저 구절까지 듣고는 내가 완전히 굳혀버렸어요. 그 자리에 앉아가지고. 아! 이제 기회만 이제 포착해서 난 이제 내 갈 길이 정해졌다라고 딱 그냥 그때 마음을 굳혔어요. 그런데 저렇게 해서 내 출가를 하게 한 그 스님인데 나중에 그 스님한테 내가 찾아갔어요. 승려가 돼 가지고 갔는데 나를 몰라봐 몰라보더라구요. 그 또 그 뒤에 한참 소식 들으니까 그 지역에서 지금도 살고 있어요. 조그마한 절 하나 해 가지고 살고 있는데 아주 여기 저 서울의 큰 스님 동생이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런 스님인데 그렇습니다. 뭐 저 한사람만 그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니라.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라.) 사문(寺門)에 들어가면은 대개 그 유사(有史)한 사찰 입구에는 이런 구절을 만날 수가 있지요. 간혹. 그렇습니다. 이 이런 말씀 한 마디에 사람을 그리 움직이게 하고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참 이 구절을 내가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나고 곁들여서 저 구절도 꼭 내가 곁들여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 참 이 야운 스님은 이 구절 하나만 세상에 남긴 것으로도 세상에 살다간 의미는 충분히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頌曰
三途苦本因何起오 只是多生貪愛情이로다.
삼도고본인하기오 지시다생탐애정이로다.
지옥아귀축생 三途의 苦의 근본은 무엇을 인해서 일어나는가? 지시다생탐애정(只是多生貪愛情)이로다. 다만 이 多生의 貪愛情이로다. 물건을 탐하고 애착한 그런 마음 그 점 때문이다. 지시할 때 이럴 때 是자는 『이것』『다만』『이』라고 흔히 그래 새기는데 『이』라고 새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다』라고 하는 뜻이 제일 많아요.
我佛衣盂生理足커늘
아불의우생리족커늘
우리 부처님께서 제정해주신 옷과 가사죠. 그담에 발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충분하다 이거야. 살아가는데 충분하다. 生理에 족하거늘
汝何蓄積長無明고
여하축적장무명고
뭐 할라고 재산을 쌓고, 쌓고 쌓아가지고 無明만 키우는가? 또 요즘 보면 능력 있는 스님들은 뭐 절도 여기 세우고 저기 세우고 온 곳에 그냥 한 너댓개씩 보통 그래 가지고 있는 스님들도 있고 그렇죠. 그 뭐 자기가 갖고있는 어떤 그 法을 널리 펴기 위한 그런 마음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힘 닿는데까지 그렇게 해야 되지만은 그렇게 뭐 뾰족하게 세상에 내놓을 만한 안목과 깨달음이 없으면은 그 뭐 별로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其三은 口無多言하고 身不輕動이어다.
기삼은 구무다언하고 신불경동이어다.
그 세 번째는 입으로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몸은 가벼이 움직이지 말지어다. 무자라고 해서 꼭 뭐 없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不자나 無자나 뭐 非자나 전부 부정사니까 뭐 『없다』『아니다』『말라』 이렇게 해석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없을 무자에 꼭 걸려서 없다라고 새길 필요 없어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입으로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그래해도 좋아요. 몸은 가벼이 움직이지 말지어다.
身不輕動則息亂成定이요
신불경동즉식난성정이요
신불경동즉(身不輕動則) 몸이 가벼이 움직이지 아니한다면은 식난성정(息亂成定)이요. 어지러움을 쉬고 산란함을 쉬고 선정이나 안정을 이루게 되고. 그렇죠. 일단은 몸이 안정이 되어야 기도가 되던, 뭐 참선이 되던, 간경이든, 무엇이든지 몸이 안정되고 봐야 선정삼매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口無多言則轉愚成慧니.
구무다언즉전우성혜니.
입에 많은 말을 하지 아니한즉은 어리석음을 바꿔가지고, 어리석음을 전환시켜가지고서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말에 「빈 양철」이란 말이 있지요. 「빈 양철」 시끄러운 사람치고 제대로 속 알찬 사람 없잖습니까? 정말 속이 알찬 사람들은 말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이렇게 좌중을 살펴보면은 그냥 드러나지요. 뭐 빈 양철은 아무리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말하고 싶어가지고. 그런데 속이 꽉 찬 사람은 반드시 한마디 끼어들 그런 입장인데도 끝내 참죠. 가만히 보면 참습니다. 참고 말 안해요. 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다’ 생각이 되면은 잘 하지를 않습니다.
實相은 離言이요, 眞理는 非動이니라.
실상은 이언이요, 진리는 비동이니라.
이 또 이제 유명한 이제 名句입니다. 實相은 離言이요, 眞理는 非動이라. (실상은 이언이요, 진리는 비동이라.) 이 자경문에 이렇게 좋은 구절이 많아요. 實相은 眞理를 떠났다. 진리나 실상이나 역시 이제 같은 뜻인데 말을 좀 바꾸어서 할 뿐입니다. 뭐 諸法實相이 됐던 또 모든 사건과 사물의 진실한 모습이 됐든 그게 다 眞理지요. 그것은 뭐 말로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걸로 될 일이 아니다. 이거에요. 진실은 진실대로 다 이미 보여주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實相은 말을 떠나있고 眞理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口是禍門이니 必可嚴守하고,
구시화문이니 필가엄수하고,
입이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문이다. 입을 통해서 災殃이 많이 생기죠. 口是禍門이니 必可嚴守하고 반드시 엄수(嚴守).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더하고
身乃災本이니
신내재본이니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근본이니
不應輕動이니라.
불응경동이니라.
꼭 가벼이 움직이지 말지어다. 말지니라.
또 예화로써
數飛之鳥는 忽有羅網之殃이요, 輕步之獸는 非無傷箭之禍니라.
삭비지조는 홀유라망지앙이요, 경보지수는 비무상전지화니라.
삭비지조 자주 삭(數)그래요. 숫자라고 할 때는 수라고 하지만은 여기서 자주 할 때는 삭이라고 그렇게 발음합니다. 요 또 뒤에 삭삭친(數數親)이라고 금방 또 나오는데 數飛之鳥. 자주 나는 새는 홀연히 그물에 걸릴 재앙이 있고, 그물을 쳐놨으니까 잡을려고. 그물에 걸릴 재앙이 있고. 경보지수는 가벼이 걸어다니는 짐승들은 傷箭之禍가 없지 않다. 화살에 상할 그런 재앙이 없지 않느니라. 非無傷箭之禍니라. 저 앞에 계초심학인문에도 있었지만은 괜히 쓸데없이 왔다갔다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문밖에도 나가지 말고 그러라고 했죠. 수행자는 당연히 그래야 되지요.
故로 世尊이 住雪山하사 六年을 坐不動하시고
고로 세존이 주설산하사 육년을 좌부동하시고
고로 세존이 주설산하사 육년을 좌부동하시고
그러기 때문에 세존께서 설산에 머무사 육년을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육년 고행했다고 이제 하는 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뭐 꼭 앉아서 坐不動한 것은 물론 아니지요. 많은 그 당시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정말 坐不動한 시간은 뭐 띄엄띄엄 있었을테고 또 최후의 일주일은 좌부동하시고 계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행의 어떤 그 마음 상태는 수행하는 마음상태는 정말 육년 좌부동하는 그런 상태였다고 우리가 이해를 해야겠지요.
達磨가 居少林하사 九歲를 黙無言하시니
달마가 거소림하사 구세를 묵무언하시니
달마대사가 소림굴(少林窟)에 거해서 九歲를 黙無言이라. 구년 동안 묵묵히 말이 없이 지냈다.
後來參禪者는 何不依古蹤이리요.
후래참선자는 하불의고종이리요.
後來參禪者는 뒤에 오는 참선하는 사람들은 어찌 옛 자취를 의지하지 아니하리오. 그것만 봐도 정말 뭔가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또 그렇게 자주 옮겨다니지도 말고, 좀 침착하게 무게있게 진득하게 좀 그렇게 살라는 것. 내용입니다.
頌曰
身心把定元無動하고 黙坐茅庵絶往來어다.
신심파정원무동하고 묵좌모암절왕래어다.
신심파정원무동(身心把定元無動)『하고』 해야 돼요. 『하며』아니고 묵좌모암절왕래(黙坐茅庵絶往來)어다. 신심파정원무동(身心把定元無動)하고 몸과 마음을 잡아 정해서, 잡아서 고정시켜서, 안정시켜서, 잡아 안정시켜서, 이 파정(把定)이란 낱말은 꼭 기억해 놔야 돼요. 파정순두(把定順頭)라해서 그 화두(話頭)를 딱 잡아서 고정시킨다. 안정시킨다. 그 선방에 들어가는 그 기둥에 보면은 두 구절이 이제 있는데 요 파정(把定)과 뭐죠? 방행(放行) 반대말이죠. 파정(把定)↔방행(放行). 방행은 자유롭게 걸어다니고 행하는 것을 놓을방(放) 행할행(行) 방행(放行) 놓아버린다. 확 다 놔버린다. 그런 뜻이고. 파정(把定)은 이제 話頭를 잘 챙긴다 그런 뜻입니다. 파정(把定)과 방행(放行)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살라는 그런 뜻으로 선방 기둥에는 요런게 이제 적혀있습니다. 신심파정원무동(身心把定元無動)하고 몸과 마음을 잡아 안정시키면은 원래 움직이지 아니하고, 묵좌모암절왕래(黙坐茅庵絶往來)어다. 묵묵히 모암 잔디풀로 엮은 그런 작은 암자 거기에 앉아서 왕래를 끊을지어다. 그 도연명도 귀거래사에 보면은 식교절류(息交絶遊)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청식교이절류(請息交以絶遊)라 식교 교류를 쉬어버린다. 뭐 친구만나고 아는 친척만나고 뭐 이렇게 거래하는거 다 쉬어버리고, 절류(絶遊)라 노는 것을 놀러다니는 것을 아예 다 끊어버린다. 뭔가 자기 일을 할 사람은 그래야지요. 절왕래(絶往來) 왕래를 끊을지어다.
寂寂寥寥無一事하니 但看心佛自歸依어다.
적적요요무일사하니 단간심불자귀의어다.
적적하고 고요하고 고요해서 아무일도 없으니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할지어다. 단간심불(但看心佛) 선사상이 아주 많이 배어있지요. 여기서 이제 후래참선자(後來參禪者)라는 말이라든지 또 처음에 조사공안상(祖師公案上)에 이 저 자경문은 한창 우리 조사선(祖師禪)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거의 휩쓸던 고려때 스님으로 이런 그 글 내용을 봐서 충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좀 분분해요 이 저 야운 스님이.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단간심불(但看心佛)은 다만 心佛을 觀해서, 마음의 부처를 잘 살펴서 스스로 귀의할 지어다. 心佛이라고 하는 말이나 저기 어디 심배일승고(心背一乘故)로 혹타악취즉극신극고(或墮惡趣則極辛極苦)로 一乘이라고 하는 문제 이런 것들이 바로 연관된 말인데 이런건 참 이야기를 참 충분히 해야 될 그런 입장입니다만은 그렇습니다.
其四는 但親善友언정
기사는 단친선우언정
그 네 번째는 다만 善友를 좋은 벗을 친히 할지언정
莫結邪朋이어다.
막결사붕이어다.
삿된벗을 맺지말라. 삿된 벗과 맺지를 말라.
鳥之將息에 必擇其林이요, 人之求學에 乃選師友니
조지장식에 필택기림이요, 인지구학에 내선사우니
새가 장차 쉴려고 하매 새가 날아다니다가 쉴려고 할 때, 필택기린이라. 반드시 그 숲을 선택을 하지요. 새도 하물며 쉴려고 할 때는 아무데나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人之求學에 乃選師友니 이것도 역시 명구중에 들어갑니다. 鳥之將息에 必擇其林이요, 人之求學에 乃選師友 여기까지가. 사람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학문을 구함에 있어서 이에 스승과 벗을 선택할지니라. 당연하지요. 새도 하물며 잠깐 쉬었다 가는데도 아무데나 앉지 않는데 사람이 공부할려고 하는데, 특히 佛法을 공부할려고 하는 그런 입장에 있어서 스승과 벗을 우리가 가리지 않고서야 그게 이루어질 리가 없지요. 생아자는 부모요 성아자는 붕우라. (生我者는 父母요, 成我者는 朋友라) 그런 말이 있지요.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지만은 나를 성취시킨 사람은, 나를 나 되게 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벗이라고 하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擇林木則其止也安하고
택림목즉기지야안하고
擇林木則 숲과 나무를 잘 선택한 즉은 其止也安하고 그 쉬는 것이 편안하고
選師友則其學也高니라.
선사우즉기학야고니라.
선사우즉(選師友則) 스승과 벗을 잘 선택을 한다면은 其學也高니라 그 공부가 높아진다. 아주 요즘은 책이 많고 또 다른 어떤 채널이 공부할 채널이 많지만은 옛날에는 정말 책이 없이 공부할 경우도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좋은 스승에게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스승에게 배워야 뭘 알게 되고. 또 그 스승에게 배우면은 그것밖에 달리 몰라요. 뭐 또 다른데 옮겨가서 다른 스승에게 배우고 무슨 이 과목은 이 강사에게 듣고 저 과목은 저 강사에게 듣고 그럴 처지가 아니었거든 옛날에는. 그런데 우리나라 강원에서 이런 말이 있어요. 좀 머리가 인제 좀 남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그 소견이 좀 남다른 사람들은 한 곳에서 그렇게 사실은 십오 년까지 강원생활 하는데도 불구하고 통방학인(通方學人)이란 말이 있어요. 통방학인(通方學人). 보통 옛날 강원생활은 8년, 십년, 십오 년까지 공부하는데 그런 생활을 거의 뭐 반평생을 다니면서 어려서 이제 출발해서 반평생을 다니면서 뭐 이 지역에서 가서 공부하고, 공부 뭐 이력 다 마쳐도 그 다른데 가서 또 방부들여가지고 또 새로 이제 초발심부터 또 새로 이제 공부하고 또 딴데가서 예를 들어서 경상도에서 공부하면 전라도에서 가서 또 경기도에 와서 저 북한쪽으로 올라가서 이렇게 가서 초발심자경문부터 이력을 몇 번을 공부하는 그런 학인도 있었다는 거에요. 그걸 이제 통방학인(通方學人)이라 그래요. 어느 지역에 매이지 않고 모든 지방에 다 통하는 그런 학인이다. 그 제일 무서워하는 거죠.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저런 사람들은. 견문이 넓고 같은 초발심자경문이라 하더라도 그 가르친 사람의 안목이 다 다를테니까 그 스승 따라서 이 이야기 듣고 저 이야기 듣고 그래서 견문이 넓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옛날부터 통방학인(通方學人)을 두려워했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選師友則其學也高니라. (선사우즉기학야고니라.)
故로 承事善友를
고로 승사선우를
좋은 벗 받들어 섬기기를, 승사(承事). 받들어 섬기다 이런 뜻입니다. 承事는 받들어 섬기다 섬길사字(事)에요. 받들어 섬기기를
如父母하며
여부모하며
부모를 받들어 섬기듯이 하며
遠離惡友를
원리악우를
악한 벗 멀리 여의기를
似寃家니라.
사원가니라.
원수 집과 같이 할지니라. 원수 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기 싫죠. 그렇게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아무보탬이 안 되는 그런 벗이라면은 원수처럼 그렇게 외면을 하고 살아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鶴無烏朋之計어니
학무오붕지계어니
학이라고 하는것은 烏朋之計 까마귀와 벗할 그런 계교(計巧)가 없다. 그런 계산이 없죠. 학이 무슨 까마귀하고 놀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鵬豈鷦友之謀리요.
붕기초우지모리요.
붕새 대붕새라고 해서 장자 소요유편(莊子 消遙遊編)에 보면, 날개를 펴면은 무려 삼천리나 펴지고 한번 그 바다를 치고 날아오르면 구만리 장천을 날은다. 우리 흔히 그런 말을 하지요. 구만리 장천을 날으는 아주 뭐 그건 이제 우리 마음이 제대로 수행이 돼서 툭 트이면은 그와같이 逍遙自在할 수 있는 그런 그 마음의 세계를 그 대붕새에다가 이제 그린건데 이건 이제 전설의 새지요. 붕새라는 것은. 그래 거기 이제 초자는 뱁새초 법새초 초면새 초잔데(鷦) 고런 그 짜그만한 그 새. 요 가지에서 저쪽가지로 요렇게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사는 고런 그 뱁새와 벗할 생각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출가한 사람으로서 특히 이제 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진정 佛法이 무엇인가 뜻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뭐 시시한 벗 저질적인 그런 생각이나하고 사는 그런 사람들하고 가까이할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는 단호해야 돼요. 아주 냉정해야 되고 단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松裏之葛은 直聳千尋이요
송리지갈은 직용천심이요
참 예도 참 간단간단하게 잘 들었지요. 저기 삭비지조는 홀유라망지앙(數飛之鳥는 忽有羅網之殃)이라고 했듯이 여긴 이제 송리지갈(松裏之葛)은 소나무 안에 있는 칡은 소나무밭에 있는 칡은 어떻습니까?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다보니까 직용천심(直聳千尋)이요. 천길을 뻗고 바로 곧 바로 천길을 뻗어올라가고 솟을 용자(聳) 천길을 솟아 올라가고
茅中之木은 未免三尺이니
모중지목은 미면삼척이니
이것도 이제 名句중에 들어갑니다.
松裏之葛은 直聳千尋이요, 茅中之木은 未免三尺이다.
송리지갈은 직용천심이요, 모중지목은 미면삼척이다.
그 잡풀 모라고 하는 것은 이건 보통 작은 잔디라기보다는 일년초 일년생 잡풀인 모(茅)字인데 그런 풀 속에 있는 나무는 三尺을 면치 못한다. 그래 시시한 벗들하고 사귀다보면은 결국 나도 시시한 사람이 되고 좀 더 훌륭한 사람을 가까이하다보면은 결국 보고 듣는 것이 자꾸 이제 좋은 내용들이고 발전적이 그런 내용들일테니까 저절로 자기도 견문이 넓고 정신적으로 성장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 예를 이렇게 송리지갈은 직용천심이요(松裏之葛은 直聳千尋이요). 뭐 꼭 그 그런 그 큰 나무가 없으면은 그 칡넝쿨이 어떻습니까? 땅으로 기죠. 땅으로 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큰 나무가 있으면은 저절로 큰나무타고 자기도 그렇게 높이 올라가는 거죠. 잡풀 속에 있는 나무는 三尺을 면치 못한다. 참 아주 그 비유가 아주 멋지지요.
無良小輩는 頻頻脫하고 得意高流는 數數親이어다.
무량소배는 빈빈탈하고 득의고류는 삭삭친이어다.
어질지 못한 작은 무리들은 빈빈탈(頻頻脫)하고 자주자주 벗어버리고 뭐 살다보면 이래저래 인연이 그 이렇게 맺어지지요. 맺어지더라도 자꾸자꾸 그거 떨쳐버려라 그거에요. 득의고류는 뜻을 얻은 높은 사람들은 삭삭친(數數親)이어다. 자주자주 친할지어다. 그래야 뭐 하나라도 배우죠. 배울게 없는 사람은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탄허스님 모시고 살 때 스님은 신문을 잘 안보셔 그래갖고 뭐 궁금한게 있으면 우리보고 물어 그 뭐 누가 어떻게 됐냐? 그 간단하게 딱 간단하게 묻고 간단하게 대답해 길게 설명하는거 싫어하셔 스님은 왜 신문을 안보십니까? 아 이 신문엔 道가 없잖아. 신문에 道가 (허허...) 그 道도 없는거 그거 오랫동안 보고 앉아있을게 뭐있냐 이거야. 세상 그 잡다한 그런 그 사건들 좋지 않은 이야기들만 잔뜩있는 거. 그거 뭐 보면서 시간보낼게 뭐 있느냐 이거야. 신문엔 道가 없잖아. 딱 이렇게. 간혹 도도 있는데.. 허허허 간혹이지만은 간혹 도도 있는데 그러나 그런 말씀 한 마디 속에 뭐 물론 矛盾이 없는건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 뜻을 우리가 잘 새긴다면 참 멋진 말씀이에요. 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죠.
頌曰
住止經行須善友하야
주지경행수선우하야
머물고 또 그치고 경행 다니고 하는데 善友를 구해서 수자는 이 수구한다 필요로한다 구할 수자(須)로 보면 좋습니다. 善友를 구해서 좋은 벗을 구해라. 어디가든지 또 어디에 살던지 어디 도반이 좋은 도반이 모인 그런 그 회중이라고하거든 얼른 찾아가고 또 좋은 선지식이 있다고해도 얼른 찾아가고 또 어떤 훌륭한 도반과 뭐 여행을 한다든지 만행을 한다든지 하면은 같이하라 이거에요.
그렇게 해서
身心決擇去荊塵이어다.
신심결택거형진이어다.
몸과 마음을 결택해서 잘 가려서 荊塵을 가시와 먼지를 제거할지어다. 떨어버려라. 우리 가만있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온갖 번뇌가 세세생생에 익힌 그 업 때문에 잔뜩 쌓여있지요. 그것이 다 荊塵입니다. 다 가시요 먼지지요. 가시는 찔리면 상처가 나지요. 먼지는 끼어있으면 거울이 어둡지요. 그와같이 우리의 그 법신과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그 때를 끼게하는 그런 일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자꾸 이제 멀리 제거하도록 하라.
荊塵掃盡에 通前路하면
형진소진에 통전로하면
가시와 먼지가 다 없어지매 전로가 앞길이 툭 터지면은 뭔가 수행자로서 또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도 닦는 사람으로서 자기나름대로 그 어떤 그 길이 열리는 거지요. 눈에 들어오겠죠. 좀 공부하면은 다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절로가 통하면은
寸步不離透祖關하리라.
촌보불이투조관하리라.
寸步도 옮기지 아니하고 조사관을 뚫으리라. 바로 이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말하자면은 조사관을 뚫게 된다. 조관이라고 전통 간화선의 정신이 배경에 깔려있습니다. 간화선은 그 화두를 터득해야만 화두를 말하자면 타파해야만 비로소 조사의 관문을 뚫는 것이고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비로소 한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그렇게 표현하거든요. 그래서 촌보불리투조관(寸步不離透祖關)하리라.
其五는 除三更外에 不許睡眠이어다.
기오는 제삼경외에 불허수면이어다.
그 다섯 번째는 三更을 제한 밖에 睡眠을 허락하지 말지어다. 이 三更이 뭐냐? 말이 참 그 많아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여섯 시간을 잡니다. 그러면은 삼경이 거기다 꼭 맞추면은 우리 생활에다 굳이 맞추면 세 경이 돼요. 일경이 두 시간이잖습니까. 一更이 두 시간인거요. 근데 그냥 우리가 일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 이렇게 했을때는 三更은 한 11시에서부터 한 시까지라구요. 밤11시부터 한시까지가 자시야. 이게 삼경이라구. 그 다음 세시까지가 사경, 다섯 시까지가 오경 아닙니까? 그 儒敎에서는 五更에 일어나야된다라 그러거든요. 오경에 닭이 울고 오경에 일어나야되는 걸로 그렇게 돼있습니다. 삼경은 그러면은 우리 셈하면 여섯 시간인데 세 경 동안 잔다는 뜻이냐? 뭐 그래서 이 삼경에 대한 이야기가 그 뭐 我田引水격으로 해석을 그렇게 떡 하는데 아닙니다. 이거는. 철저히 11시부터 1시까지입니다. 한시까지 두 시간 만 자라는 거에요. 두 시간만. 두 시간만 자라는 뜻입니다 이게. 그래야 돼요. 이게 우리가 뭐 따를 수 있느냐 없는냐 하는건 그건 별개의 문제예요. 이 스님은 최소한 그렇게 생활했으리라고 그렇게 믿어집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거는 해석할 길이 없어요. 정확하게 제대로 뭐 억지로 갖다붙이면 모를까. 그렇지않고는 이게 해석이 정상적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 三更. 삼경은 11시부터 1시까지. 그 동안 자고 그 외에는 睡眠을 허락지 말라. 정 졸릴 때 잠깐 그렇게 한 두 시간 아주 제대로 자고나면은 충분하다는 거지요. 그런 그 요즈음 뭐 과학적인 분석도 있습니다. 그 외의 잠은 꼭 필요한 잠이 아니라는 거지요.
첫댓글 實相離言 眞理非動
但看心佛 自歸依 _()()()_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