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유단자(단증은 면허증)가 되어 귀국후 도장을 개설하였던 인물이 청도관을 창설한 이원국 선생이다. 1926년 19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중,고를 거처 중앙대학 법학과를 수학하던중 쇼도관(松濤館)에서 후나고시(船越) 문하에서 무술을 전수받는다. 이때에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과 가라데를 배운다. 1944년9월 귀국후에 그는 송도관을 모방하여 "당수도청도관"이라고 명명하여 서울서대문구 옥천동에 최초로 관인도장을 개관하여 무술을 지도하였고 그후에 청도관은 도장을 천도교 교육관에서 도장을 운영하였다. 무덕관의 황기, 송무관의 노병직, 창무관의 윤병인, 지도관의 전장섭, 군 장성출신 최홍희가 청도관에서 유단자 증서를 받고 오도관을 창설하여 군인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하였고 박정희대통령과 불화하여 1973년 캐나다로 망명하여 1980년 아들 중화와 15명의 사범단을 대리고 월북하여 세계적인 조직인 세계태권도 연맹 결성하고 김일성의 대남적화전략책의 하나인 유력인사 월북포섭의 일환으로 천도교 교당에서 도장을 운영하며 의형제를 맺은 최덕신을 포섭하여 1983년월북하고 후에 오익제 교령도 월북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천도교 최덕신교령은 경영난에 시달려 간부들과 불화하여 자진사퇴하고 쉬고있는 때에 최덕신을 미국으로 유인하여 강제로 월북하였다는 내부 증언도 있다.
자료-1-오도관 약사.
1953년 9월, 제주도에 창설된 보병 제29사단(소위 익크 사단)의 사단장을 맡으면서 태권도 인생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당시 사단 마크를 직접 도안한 그는 강군(强軍)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청도관 출신의 남태희 중위와 한차교 하사를 불러 사범으로 임명하고 전 장병에게 무술(당수도)을 가르쳤다. 최홍희(崔泓熙)장군이 1954년 4월 1일 보병 제3군단 29사단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였다. 사범이었던 남태희를 비롯해 한차교(최홍희 처조카?) 백준기, 고재천, 김석규, 우종림,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청도관 출신으로 훗날 최홍희가 민간 도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버팀목이 돼 준다. 부사단장이었던 하갑청 장군과 함께 전 군을 교육 시킬 수 있는 사범 요원을 양성하고 체계적인 태권도를 완성하기위해 창헌유의 태권도를 고안하여 기본이 되는 24개의 형을 만드다.
(명칭제정 위원회)
오도관을 만들어 자신의 의지를 펼쳐나가던 최홍희는 1954년 9월 중순, 제1군 창설4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수도(唐手道) 시범을 선보였다.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남태희가 기왓장 13개를 겹쳐놓고 일격에 박살내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면서 ‘저것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태껸이야. 앞으로 전 군에 보급시켜야해’라고 했다”고 주장한다.다만 최홍희의 주장대로 “태껸이야”라고 말한 이 대통령의 한마디는 최홍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최홍희는 이때부터 당수도를 대신할만한 명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경무대에서 3차에 걸쳐 실시한 연무대회에 사범으로(동국대 재학생) 참석했던 이동엽 관장의 증언이다.
최홍희는 그의 오른팔과 다름이 없었던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편을 뒤적거리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태껸의 ‘태(跆)’자가 뛰고 차고 밟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수도니 하는 왜색 냄새보다는 주먹권(拳)자를 사용,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작명(作名)했다. <이호성, 「태권도 아메리칸드림 40년」참조>
1955년 4월 11일 사계의 조예있는 인사와 사학가 그리고 저명 인사들로 구성된 명칭 제정 위원회에서 제의된 여러가지 명칭중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 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이때부터 당수,공수,권법,택껸 등 구구각색으로 불리워오던 명칭을 '태권도'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참여자는 유하청,손덕성(청도관장), 최홍희 장군(3군관구 사령관), 이행근(합참의장), 조경구(국회 부의장), 정대천(국회의원), 한창환(정치신문사 사장), 장경록, 홍순록, 고광래, 현종명 이다.
자료-2- (엄운규국기원장과 서성원기자 인터뷰) "故 최홍희 총재의 무력에 대해 아십니까? 제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 청도관 명예4단증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그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최홍희씨는 29사단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군에 태권도를 보급한 공로가 매우 컸습니다. 그때 청도관 출신의 남태희씨가 최홍희씨 밑에 있으면서 '연락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최홍희씨가 청도관 단증이 필요하다고 전해와 명예4단을 수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2, 3단이었는데, 명예4단을 준 것은 그 분을 높게 예우한 것입니다.
- 故 최 총재와 청도관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습니까?
△ 최홍희씨가 2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태권도를 장병들에게 보급할 때, 군에 입대한 청도관 출신의 유단자들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교관으로 차출한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청도관과 가깝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 故 최 총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알기론, 그 분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유학가서 중앙대학에 재학할 당시 가라테를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장성이 돼서 자연스럽게 태권도를 군에 보급하는데 앞장섰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군에 태권도를 보급한 공로자입니다. 그러나 1973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입니다. (자료보완중)
첫댓글저는 청도관 출신이 아닙니다. 다만, 군복무시절(서기 1967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에 어떤 장교로부터 최홍희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전해 들은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 겨레의 무술에 대해서 남다른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불영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첫댓글 저는 청도관 출신이 아닙니다. 다만, 군복무시절(서기 1967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에 어떤 장교로부터 최홍희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전해 들은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 겨레의 무술에 대해서 남다른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불영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무주태권도 대회에 세계태권도 연맹 신임총재 와 최홍희장군의 부인 남춘희씨가 (남태희 중위와 한차교--한차교(최홍희 처조카 ? ) 참석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