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대국가형성 |
6대 태조왕 2C |
8대 고이왕 3C |
17대 내물왕 4C |
부자상속 |
9대 고국천왕 |
13대 근초고왕 |
19대 눌지왕 |
불교공인 |
17대 소수림왕 372년 |
15대 침류왕 384년 |
23대 법흥왕 535년 |
율령반포 |
소수림왕 |
8대 고이왕 |
법흥왕 |
역사편찬 |
26대 영양왕 이문진 신집5권 |
근초고왕 고흥 서기 |
24대 진흥왕 거칠부 국사 |
전성기 |
19대광개토왕 20대장수왕 5C |
13대 근초고왕 4C |
24대 진흥왕 6C |
나. 성장 과정
성읍(군장)국가 → |
연맹 왕국 → |
중앙집권적 영토 국가 |
부여 4출도, 고구려 나집단, 옥저, 동예 |
고조선, 초기 고구려, 부여, 삼한, 가야연맹 |
고구려, 백제, 신라 |
부족-부족 |
왕-부족 |
왕-귀족 |
2. 고구려의 성장과 백제의 흥기
가. 초기의 고구려
⑴ 고구려의 성립(B.C.37년 5월) : 주몽(朱蒙). 연호 다물(多勿, 옛 영토를 회복한다) 부여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오이, 마리, 협보 및 부분노, 부위압, 극제사
B.C. 36년 3월 15일 수도 눌현(눌현(訥見; 今 西豊縣, 지금의 常春(상춘:吉林省(길림성)의 長春(장춘))이며 朱家城(주가성))으로 이전
⑵ 발전 : 졸본 → 통구(국내성) 천도
⑶ 태조왕(2세기)
① 대외 팽창 : 옥저 정복, 만주 지방으로 세력 확대, 낙랑 압력
② 중앙 집권 체제로의 진전 : 계루부 고씨에 의한 왕위계승권 확립
⑷ 고국천왕(179~196) : 왕권의 강화와 통치체제의 중앙집권화 진전
① 5족을 5부(동서남북중)로 개편
②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
③ 연나부(掾那部, 絶奴部) 명림씨(明臨氏)에서 왕비를 맞는 관례
④ 미천왕 14년(313년) 낙랑군 축출하고 대동강유역 차지
나. 초기의 백제
⑴ 백제의 성립(B.C.18) : 온조(溫祚)북방 유이민과 한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召西奴(소서노)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로서 처음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⑵ 발전 : 마한의 소국→ 연맹 왕국으로 발전→ 마한을 대신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
⑶ 고이왕(3세기 중엽)
① 대외 팽창 :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
②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 마련 : 27년(260년) 6좌평 및 16관등 관제정비, 관리의 복색 제정, 29년(262년) 율령 반포
⑷ 근초고왕(346~375)
① 정복군주 : 24년 마한 차지, 26년(371)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 전사케함
② 현재의 경기, 충청 및 전라의 전부와 강원・황해의 일부 차지, 중국 서잔 남쪽 왜와 통교
③ 부자상속 왕위계승 확립, 진씨왕비 시대 시작
④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 「書記」 편찬 시킴
⑸ 침류왕 원년(384년) 불교수용
다. 초기의 신라
⑴ 신라의 성립(B.C. 57) : 박혁거세(朴赫居世) 토착 세력이 강하여 유이민 집단을 흡수, 동화
⑵ 발전 : 사로국에서 출발→ 박,석,김의 세부족 연맹→ 6부족 연맹체
6촌
방향 |
마을 |
촌장 |
동쪽 |
양산마을 |
알평 |
남족 |
고허마을 |
소벌도리 |
서쪽 |
대수마을 |
구례마 |
동남쪽 |
진지마을 |
지백호 |
동북쪽 |
가리마을 |
지타 |
더 동북쪽 |
고야마을 |
호진 |
⑶ 내물왕(4세기 후반)
① 대외 팽창 :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 확장
②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 확립, 마립간 왕호 사용
③ 왜구 격퇴 : 광개토대왕 도움(호우명 그릇)→ 고구려 간섭→ 배제 노력
라. 가야 연맹
⑴ 가야 연맹의 성립 : 2, 3세기경 김해의 구양국은 김수로를 주축으로 건국(42)하여 본가야로 발전
⑵ 본가야(금관가야) 연맹 : 영토 확장, 통치 조직 정비 →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세력 약화 → 신라에 병합(532, 법흥왕)
⑶ 대가야 연맹 : 미오야마국은 이진아시를 시조로 5세기 이후 고령 중심의 연맹 세력권 재편→ 중국 남조에 사신 파견, 신라,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 → 멸망(562, 진흥왕)
⑷ 한계 :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 →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 하지 못함
⑸ 경제적 번영 : 농경문화, 철생산과 중계 역(한 군현, 왜)
⑹ 문화
①유적 :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②유물 : 금동관, 철제 무기, 갑옷, 토기(일본 스에키에 영향)
▣ 가야(伽倻, 加倻)
금관가야(金官伽倻, 本伽倻, 가락국, 금관국, 김해) : 구야국(狗倻國)에서 본가야로 발전. 김수로(金首露). 3세기경 전기가야연맹의 맹주. 법흥왕 19년 532년 신라에 망함
대가야(大伽倻, 반파국, 고령) :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에서 대가야로 발전. 이진아시(伊珍阿豉). 5세기후반 가야연맹의 맹주. 진흥왕 23년 562년 異斯夫, 斯多含에 의해 신라에 망함. 豉 메주시, 된장시. 豆豉(두시) 鹽豉(염시)
성산가야(星山伽倻, 벽진국, 성주)
아라가야(阿羅伽倻, 안락국, 함안)
고령가야(古寧伽倻, 진주)
소가야(小伽倻, 고자국, 고성)
▣ 삼국시대의 음악
1. 고구려 : 왕산악(王山岳) 진(晋)의 7현금을 개량해 만든 현학금(玄鶴琴) 제작. 100곡
2. 백제 : 일본에 악공, 악사, 악기 전달
3. 신라 : 진흥왕이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한강유역 공격할 때 우륵(于勒)과 제자 이문(尼文)을 불러 음악을 시킴
백결선생(百結先生) : 자비왕때 대악(碓樂)
옥보고(옥보고) : 현악금의 대가.
4. 가야
우륵(于勒) : 가야금(伽倻琴, 加倻琴, 12현금). 계고(階古)(가야금) 법지(法知)(노래) 만덕(萬德)(춤)을 가르침
(2) 한국의 고대 사회
삼국의 관등
고구려(14) |
백제 |
신라 | ||||
관등(14) |
관등(16) |
복색 |
관등(17) |
골품 |
복색 | |
1 |
1.대대로(大對盧,莫離支) |
1.좌평(佐平) |
자색복(紫色) |
1.이벌찬(伊伐飡) |
진골 |
자의紫衣) |
2 |
2.태대형(太大兄) |
2.달솔(達率) |
2.이찬(伊伐飡, 伊尺湌) | |||
3 |
3.울절(鬱折, 主簿) |
3.은솔(恩率) |
3.잡찬(迊湌) | |||
4 |
4.태대사자(太大使者) |
4.덕솔(德率) |
4.파진찬(波珍飡) | |||
5 |
5.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5.한솔(간솔, 扞率) |
5.대아찬(大阿飡) | |||
6 |
6.대사자(大使者) |
6.나솔(奈率) |
6.아찬(阿飡) |
6두품 |
비의(緋衣) | |
7 |
7.대형(大兄) |
7.장덕(將德) |
비색(緋色) |
7.일길찬(一吉湌) | ||
8 |
8.수위사자(收位使者) |
8.시덕(施德) |
8.사찬(沙湌) | |||
9 |
9. 상위사자(上位使者) |
9.고덕(固德) |
9.급벌찬(級伐飡) | |||
10 |
10.소사자(小使者) |
10.계덕(季德) |
10.대내마(大奈麻) |
5두품 |
청의靑衣) | |
11 |
11.소형(小兄) |
11.대덕(對德) |
11.나마(奈麻) | |||
12 |
12.제형(諸兄) |
12.문독(文督) |
청색(靑色) |
12.대사(大舍,大知) |
4두품 |
황의黃衣) |
13 |
13. 선인(先人) |
13.무독(武督) |
13.사지(舍知) | |||
14 |
14. 자위(自位) |
14.좌군(佐軍) |
14.길사(吉士) | |||
15 |
15.진무(振武) |
15.대오(大烏) | ||||
16 |
16.극우(剋虞) |
16.소오(小烏) | ||||
17 |
17.조위(造位) |
10관등중 5관등
1.국상
2.상가
3.패자
4.우태
5.조의
백제
6좌평
1.내신좌평(內臣佐平) 왕명출납
2.내두좌평(內頭佐平) 재정
3.내법좌평(內法佐平) 의례
4.위사좌평(衛士좌평) 숙위, 경비
5.조정좌평(朝廷좌평) 형벌
6.병관좌평(兵官佐平) 국방
3. 고구려의 융성, 백제의 흥기 및 신라의 융성
가. 고대 사회의 성장
⑴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① 왕권의 강화 : 부족장(군장) 세력 통합, 지방관 파견, 군대 파견.
② 집권 체제 정비 : 정치 조직, 관료 체제, 신분 제도. 율령 체제
③ 사상 통일 : 불교 수용(중앙 집권 국가의 사상적 기반)
④ 영역 국가 : 활발한 정복 활동→영토 확장
⑵ 고대 사회로의 발전 ; 중국 세력에 대항하면서 성장,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발전
나. 초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
초기 고구려 |
초기 백제 |
초기 신라 |
가야연맹 | |
성립 |
부여계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토착인의 결합 ∙졸본(환도성, 동명왕, BC37)→정복활동, 통구천도(국내성,1세기경, 연맹체 형성) |
∙고구려계 유이민과 한강유역의 토착민의 결합 ∙마한소국(위성) →연맹왕국(백제)→마한을 대신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 |
토착 세력이 유이민을 흡수통합하여 건국(진한의 소국 사로국, 박 혁거세, B, C 57) ∙3부족연맹체(박, 석, 김)→6부족연맹체(사로 6촌) |
금관 가야 중심(2,3세기, 5세기 고구려, 신라 압력으로 약화)→대가야 중심(5세기 이후)→신라에 통합(금관가야 532년 법흥왕, 대가야 562년 진흥왕) ∙경제 : 농경 사회, 철 생산(화폐로 사용, 낙랑, 왜에 수출) ∙문화 : 가야 토기→일본 스에키(須惠器)에 영향 |
중앙집권국가의 발전 |
태조왕(2C) ∙정복 사업 : 옥저 복속, 낙랑 공격, 만주, 요동 지역으로 세력 확대(현도를 푸순으로 추방 ∙왕권의 성장 : 계루부 고씨 왕위의 세습 집권적 관료 조직 |
고이왕(3C 중엽)∙정복 사업 : 한강 유역 통합, 한군현과 대항(낙랑, 대방 공격) ∙통치 조직 정비 :관제 정비(6좌평, 16관등), 복색 제정(자, 비, 청), 율령 반포 |
내물마립간(4C 후반) ∙정복사업 :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 왜구 격퇴(400, 광개토대왕의 지원)∙왕권강화 : 김씨왕위 세습, 마립간(대수장 의미) 칭호사용 ∙체제정비 :고구려 간섭 배제, 제도개혁 ∙산업발전 : 농업생산력 증가, 산업발달(우역, 시장) |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함(연맹 단계 |
나. 고대의 정치적 발전
⑴ 중앙집권화의 진전
시기 |
고구려 |
백제 |
신라 |
일반화 |
2C |
태조 : 왕권 강화, 정복 활동, 집권 체제 정비 고국 천왕 : 왕위 부자 상속, 5부족제→5부제 |
고구려 중앙집권화 | ||
3C |
∙동천왕 : 오와 통교, 위 견제→위의 침입 |
고이왕 : 중앙 집권 체제 확립(율령, 관제, 복제, 한강 유역 통합 |
백제 중앙집권화 | |
4C |
∙미천왕 : 서안평 점령, 낙랑 축출 ∙소수림왕 :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 |
∙근초고왕 : 마한 복속, 요서, 산둥, 일본 진출 ∙침류왕 : 불교 공인 |
∙내물 마립간 : 왕권 강화(왕위세습, 마립간 칭호), 정복 활동(낙동강진출), 전진과 수교, 고구려의 도움 받음 |
∙백제 전성기 ∙고구려 : 중국과 대립(3-4C) |
5C |
∙광개토왕 : 요동, 만주진출, 신라파병, 왜구격퇴 ∙장수왕 : 남진정책(평양천도, 한강 유역 점령) |
∙비유왕: 나․제동맹 ∙고구려의 침략→한성 함락(개로왕) →웅진 ∙동성왕 : 결혼동맹 |
∙눌지왕 : 나․제 동맹(433) ∙소지왕 : 결혼 동맹 |
∙고구려 남하 정책 →나・제 동맹 ∙고구려 전성기(한반도, 만주의 대제국 건설) |
6C |
∙귀족사회의 내분, 한강유역 상실 |
∙무령왕 : 지방 통제 강화(22담로) ∙성왕 : 사비 천도, 체제 정비(22부, 5부 5방) |
∙지증왕 : 한화정책(왕, 신라), 우경, 시사 ∙법흥왕 : 율령, 불교 공인, 제도정비(병부, 상대등), 금관가야 정복 ∙진흥왕 : 정복 활동(한강 유역 점령, 대가야 정복, 함경 지방 진출), 화랑도 공인 |
∙신라의 팽창기 →나 제 동맹 결렬(554), 신라 고립 ∙백제 중흥기(무령왕-성왕) |
7C |
∙연개소문 집권 ∙여수전쟁 : 요서 선공→살수 대첩(612) ∙여・당전쟁 : 천리장성축조→안시성 전투(645) ∙멸망(668)→부흥운동(검모잠, 안승)→발해 건국(698) |
∙멸망(660) ∙부흥 운동 : 주류성, 임존성(복신, 도침, 풍) |
∙지증왕 : 한화정책(왕, 신라), 우경, 시사 ∙법흥왕 : 율령, 불교 공인, 제도정비(병부, 상대등), 금관가야 정복 ∙진흥왕 : 정복활동(한강 유역점령, 대가야정복, 함경지방 진출), 화랑도공인 |
∙고구려 대 중국 전쟁(7C 전반) ∙신라의 삼국 통일 |
⑵ 삼국 상호간의 항쟁과 대외 관계
① 삼국 상호간의 항쟁
1) 4세기까지 : 고구려, 백제의 대립 → 백제의 우세(해상 세력권 형성)
2) 제1기(5C) : 고구려의 주도권 장악
① 광개토대왕의 만주 지역 진출, 백제 공격
② 장수왕 : 남하정책[평양 천도, 한강 유역 점령, 남한강 진출(중원 고구려비, 장수왕, 5C말) → 나․제 동맹(433)]
3) 제2기(6C) : 신라의 영토 확장, 한강 유역 진출 : 한강 유역 확보(북한산비), 대 중국 교통로 확보 → 나․제동맹 결렬(554)
4) 제3기(7C) : 신라의 삼국 통일기(수․당과 연결, 여․제 동맹 ↔ 나․당 연합)
5) 삼국의 대외관계
가. 3세기 나. 4세기
고구려의 중국 백제 전성기, 백제 해외 진출(요서, 산둥, 규슈)
삼국 대립 이용(위 견제, 오와 수교 전진+고구려+신라 ⇔ 동진+백제+왜
다. 5세기 라. 6세기 마. 6세기말-7세기
고구려 남하 정책↔나.제동맹 신라 전성기 고구려 대 중국 전쟁
유연+고구려+북위
북조+고구려, 양+백제+왜 돌궐+고구려+백제+왜 (여.제 동맹)
∥ 신라 고립 수 . 당+신라
송 신라 삼국 통일
신라+백제+왜
5. 고려의 대중국 전쟁
가. 민족의 방파제 역할(백제, 신라 보호)
나. 7C 국제 정세 : 신라+수, 당 ⇔ 돌궐+고구려+백제+왜
다. 대수 전쟁 : 수의 남북조 통일→고구려와 대립→고구려의 요서 선공(돌궐과 연합, 598)→ 문제(598), 양제(612)의 침입→살수 대첩(612)
아. 대당 전쟁 : 당 태종의 침략 야욕, 연개소문의 강경책(천리 장성 축조 등)→당 태종 침입(645)→안시성 전투(645,연개소문, 양만춘)
⑶ 삼국통일
제2절 대외항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Ⅰ.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1. 고구려와 수의 전쟁
가. 수(隋)의 중국통일(581년)
수(隋) : 581~618 수도 장안(長安)
왕 |
재위 |
내용 |
1대 文帝(楊堅) |
581~604 |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위를 받고 진(陳) 멸하여 중국을 통일. 30만명의 천자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 |
2대 煬帝(梁廣) |
604~617 |
文帝(楊堅)의 2째 아들. 아버지와 형(梁勇)을 죽이고 호화궁정 축조(100만명동원), 유주 양자강 3천리 대운하(200만명 동원). 612년과 613년 고구려 침입. 宇文化及에게 시살(弑殺) |
3대 恭帝(梁侑) |
617~618 |
이연(李淵, 唐 高祖)에게 옹립되어 1년만에 폐위됨 |
나. 십자형 외교 : 고구려-돌궐-백제-왜 : 수-당
다. 여수전쟁
⑴ 수의 1차칩입(고구려의 선제공격) : 영양왕 9년(598년)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3만명의 기병(대장군 姜以式, 부장 乙支文德)으로 요서(북천성) 공격하자 수문제가 30만 천자군을 이끌고 침략했으나 중도에서 퇴각
⑵ 수의 2차 칩입 : 영양왕 23년(612년) 수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수군 : 내호아(來護兒) 수군(水軍) 좌익위대장군, 주법상(周法尙) 부총관)하여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자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로 수도 평양을 치러와서 살수(薩水, 淸川江)에서 乙支文德에게 패배함(2700명 생존)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준 것인데 북방의 강건한 기개가 돋보이는 명작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귀신같은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쟁에 이긴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Divine strategies exhaust the heavens,
Exquisite calculations probe the earth.
Battle won, your honor is already high,
Be content now and desist.
영역은 밀러(Michael J. Miller)가 한 것인데, <<Korean Poetry in Classical Chinese>> (Somyong Publishing, 1999)에서 인용했다. 위에 언급한 고구려의 큰 한 사람인 을지문덕의 5언고시는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에서 제목이 <유우중문(遺于仲文)>으로 되어 실려 있다.
⑶ 수의 3차 칩입 : 영양왕 24년(613년) 1월 100만대군 동원 실패
⑷ 수의 4차칩입 : 영양왕 25년(614년) 2월 수륙 양면에 걸친 공격을 감행했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향하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함으로써 철수했다.
비사성(卑沙城) : 동진 서기 410년에 지어진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의 다롄 만(大連灣) 북안(北岸) 다허상 산(大和尙山)에 있었던 고구려의 성.
2. 고구려와 당의 전쟁
가. 당의 등장과 연개소문
⑴ 당(唐, 618~907)의 건국과 고구려의 위협
⑵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축조 :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3년)부터 16년 간에 걸쳐 647년(보장왕 6년)에 완성된 북의 부여성부터 요동반도 비사성(卑沙城, 중국명大黑山山城)에 이르는 성.
⑴ 연개소문의 정변(보장왕 원년 642년 10월) :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200여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독재정치를 하고 대당강경책을 시행함
⑵ 당의 침입
보장왕 4년(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칩입하여 국경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邀東城)·백암성(白巖城), 비사성등 여러 성을 함락시켰으나 제1군 이세적이 이끄는 5만명이 안시성(安市城, 英城子. 성주 楊萬春. 조카 양수봉)만은 60일을 포위했으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말갈병 15만군을 이끌고 구원을 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당태종은 화살을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물러감
1차 : 645년 당나라가 10만 대군으로 공격 개시함.
2차 : 647년 음2월 [보장왕 6년 2월] 당나라의 침공 받음.
3차 : 648년 음1월 [보장왕 7년 1월] 당나라의 설만철(薛萬撤)이 해로로 침입함.
8차 : 654년 음10월 [보장왕 13년 10월] 신성(新城)에서 당나라 대파함.
9차 : 655년 음3월 [보장왕 14년 3월] 신라의 요청으로 당나라 군대의 공격 받음.
655년 음5월 [보장왕 14년 5월] 귀단수(貴湍水)에서 정명진, 소정방 군대를 남생이 격파함.
10차 : 658년 음6월 [보장왕 17년 6월] 당나라 군대와 요동에서 정명진 설인귀 군대와 전투함.
11차 : 659년 음11월 [보장왕 18년 11월] 온사문이 당나라 군대 설필하력과 요동에서 싸움.
12차 : 660년 음11월 [보장왕 19년 11월] 당나라가 공격하여 옴.
13차 : 661년 음8월 [보장왕 20년 8월] 당나라군이 평양성 포위함.
14차 : 661년 음11월 [보장왕 20년 4월] 당나라 군대의 공격 받음.
662년 음1월 [보장왕 21년 1월] 선도해의 사수로 방효태 전사하고 소정방(蘇定方) 27만명이 평양의 포위를 풀고 철수함.
666년 음6월 [보장왕 25년 6월] 남생 당나라로 달아남.
666년 음8월 [보장왕 25년 8월]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
666년 음8월 [보장왕 25년 8월] 당 고종이 이적을 요동도 행군총관 겸 안무대사
666년 음9월 [보장왕 25년 9월] 남생을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
666년 음12월 [문무왕 6년 12월] 당나라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
666년 [보장왕 25년] 태자 복남을 당나라에 보내 태산 제사에 참가
666년 [보장왕 25년] 남생이 막리지가 되자 남건과 남산이 반란
667년 음9월 [보장왕 26년 9월] 당나라 군대가 공격 시작, 남소성(南蘇城)
668년 음2월 [보장왕 27년 2월] 당나라 군대가 부여성(扶餘城)을 함락시킴.
668년 음9월 [보장왕 27년 9월] 보장왕 항복함. 보장왕을 비롯한 대신 등
Ⅱ.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1. 국제관계의 변화
554년 : 신라의 팽창으로 나․제동맹(432년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때 체결)
642년 여․제 동맹 결성(642)과 신라 고립(수, 당과 연결)
642년 8월 백제윤충 1만의 군으로 신라 대야성공격 함락(금일의 내응으로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소랑 사망) : 당항성, 대야성 등 40여성 함락하고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반환요구하여 여제의 신라 압박
648년 김춘추 문왕, 거연자, 온군해 등 호위병사 120명을 포함한 200명의 사절단 장안성에 가서 당태종과 나당 동맹
2. 백제의 멸망
가. 원인 : 655년 신라공격 30여성 함락
주색탐닉 : 무당 금화(김유신 내통자 壬子)
통치 질서 문란 :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 중국 월주(越州) 총독 부여윤충(扶餘允忠) 형제를 투옥, 죄평 흥수(興首) 고마미지로 귀양, 福信 파면
지배층의 사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성충(605? ~656).
윤충(允忠)의 형으로 부여(扶餘)씨라는 설이 유력하며 일명 정충(淨忠). 백제 16관등의 최고직인 좌평(佐平)에 까지 올랐다. 656년 좌평의 지위로 주색에 빠진 의자왕에 충언을 올리다 투옥된다. 옥중에서 28일간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간언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의자왕은 이 간언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결국 나라를 잃은 뒤 후회했다고 한다. 현재 부여에서는 성충과 비슷한 간언을 한 흥수(興首), 계백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셔지고 있다.삼국지, 신무장, 백제, 성충, 정충, 윤충
나. 나당 연합군의 침입
⑴ 나당연합군(18만명)
당나라 : 13만군.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 우장군 金仁問,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자 인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龎孝泰)
신라 : 5만 . 제1군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제2군 金庾信(선봉 김흠순(金欽殉. 반굴(盤屈)부) 1만, 좌익 김품일(金品日, 관창(官昌) 부) 1만, 우익 천존(天敎) 1만, 후군 金庾信 2만)
⑵ 신라 김유신의 황산벌 싸움 : 階伯과 아수라의 5천 결사대
⑶ 당군: 기벌포(금강 하류) 침입 : 제1진 의직(義直) 2만 결사대. 제2진 우소(于召), 제3진 자간(自簡), 제4진 무치(武治)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왕성의 목을 조여 갔다.
백강[白馬江] 입구를 지키던 남부여의 수군을 격파한 연합군의 함대들도 강을 따라 올라와 힘을 더하니 비록 의직(義直)의 2만 결사대가 언덕 위에 진을 쳐서 지형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끝없이 밀고 올라오는 나 당연합군 18만 대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최고 사령관인 윤충을 잃었다 해도 천하에 명성을 드날리던 남부여 신군(神軍)의 반격은 과연 용맹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이 결사전은 온종일 계속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전세는 서서히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의직군은 기력은 떨어져 갔으며, 화살도 떨어지고 창칼은 부러졌으나, 침략군들은 끝없이 공격해 왔다.백강의 푸른 물결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울 즈음, 온종일 미친 듯이 동분서주하며 남부여의 운명을 건져 보려고 사력을 다하던 노장 의직의 가슴에 침략군의 화살 4대가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그와 함께 남부여 결사대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⑷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과 義慈王과 태자 扶餘孝 항복(660년)
의자왕, 왕자들, 대신과 장군88명, 주민 12,807명 포로로 장안 압송
⑸ 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 설치 : 7주 관할
시비성과 웅진성은 유인원(劉仁願) 1만명, 신라왕자 인태, 사찬 일원, 금찬 길라 등 신라군 7000명과 함께 주둔
백제의 지방지배조직이던 5방(五方)을 기준으로 분할하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 등을 뽑아 소속 주현(州縣)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백제 저항군의 활동이 격렬하여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660년 9월에 왕문도(王文度)가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나 도착하자마자 급사하여 유인궤(劉仁軌)가 검교웅진도독에 임명되었다. 당나라는 664년에 웅진도독부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도독부를 폐지한 뒤 7주(동명(東明)·지심(支潯)·노산(魯山)·고사(古四)·사반(沙半)·대방(帶方)·분차(分嵯)) 51현을 설치했다. 신라가 백제의 옛 땅에 대해 집요한 공략을 하자 두려움을 느낀 부여융은 곧 당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유인원이 다시 파견되었지만, 당의 무력과 충돌하면서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점령을 완료한 신라는 671년 7월에 소부리주(所夫里州 : 부여)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임명하여 웅진도독부는 없어졌으나 명목상의 도독부는 667년에 만주의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부여융은 백제의 유민들을 결집했다.
3. 고구려 멸망
가. 배경
지배층의 분열, 국력 약화, 나․당 연합군의 침입 저지(연개소문)→ 지배층의 내분(657년 연개소문 사후)
나. 멸망
보장왕 20년 661년 4월 소정방이 이끄는 27만명 평양성 포위 선도해(先道解) 평양성 사수. 8월 남생이 이끄는 요수방위군 설필하력(契苾何力) 격파
보장왕 21년 662년 방효태(龐孝泰) 수군 패사시킴
보장왕 25년 666년 男生이 대막리지가 되자 男建과 南山이 반란을 일으키고 싸움에 패한 남생은 당나라로 도주 투항
男建이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장악하자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의 동생)는 3,543명(763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고안승과연정토를 따라 신라로 찾아든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산하면 23,100명이 넘는다)
보장왕 26년 667년 당나라 이적(李勣) 군대가 공격 시작, 신라 金庾信 호응
보장왕 27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고구려 보장왕 항복함.
연개소문의 가계
증조부 |
연광(淵廣) |
||||||
조부 |
연자유(淵子遊) |
||||||
부 |
연태조(淵太祚) |
||||||
본인 |
연개소문(淵蓋蘇文) |
연정토(淵淨土) | |||||
자 |
연남생(淵男生 634년~679년) |
연남건(淵男建) |
연남산(淵男産) |
||||
손 |
연헌충(淵獻忠) 남건, 남산에 피살 |
연헌성(淵獻誠) |
|||||
증손 |
연현은(淵玄隱) |
연현정(淵玄靜), |
연현일(淵玄逸) | ||||
현손 |
연비(淵毖) |
다.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
9개 도독부와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살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평양총독으로 임명했다.
Ⅲ.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1. 백제의 부흥운동
가. 복신의 진현성 탈환(661년)
나. 백제부흥(재건)운동
福信 재건 총사령관 |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
道琛 좌장군 |
10,000명.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봉수산성(鳳首山城).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
黑齒常之 |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
相如 |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
遲受信 |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
좌평 정무(正武) |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
달솔 여자긴(餘自進) |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
왕자 부여풍(扶餘豐) |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
다. 반목
내분으로 福信이 道琛을 죽이고 豐은 福信를 죽였다.
라. 부여 隆과 黑齒常之의 항복
마. 부흥운동 실패l;
2. 고구려의 부흥운동
가. 漢城(재령)
劍牟岑이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대동강) 남쪽으로 근거를 옮겨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았다. 사야도(史冶島:德積群島 중의 蘇爺島)에 가 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 문무왕은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삼았다. 그뒤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에 힘썼으나, 당의 장군 고간(高侃)이 대군을 끌고 쳐들어오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인 끝에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망명하자, 신라는 670년(문무왕 10)에 그를 금마저(金馬渚:익산)에 있게 하고 고구려 왕으로 봉했다. 신라가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 안승은 674년 신라로부터 다시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해졌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조카와 혼인했다. 683년(신문왕 3)에 신라의 신문왕은 그를 경주로 이주시켜 신라 관등의 제3등 소판(蘇判)을 주고 김씨 성을 내리는 한편 집과 토지를 주었다. 신라는 그를 금마저에서 격리시킨 뒤 그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684년 금마저에 남았던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신라의 관리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신라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기고 금마저를 금마군(金馬郡)으로 편제했다.
나. 오골성(烏骨城)
670년에도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연합하여 오골성 일대에서 당나라의 말갈군를 격파한 바 있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大祚榮 |
대진(大震). 발해(渤海)~926 |
Ⅳ. 신라의 삼국통일
1. 나당전젱
가. 여․제 유민과 연합 ↔ 당은 거란, 말갈과 연합
나.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백제-웅진 도독부 등 5 도독부, 신라-계림 도독부, 고구려-안동 도호부
다. 나당전쟁
문무왕 11년 671년 웅진 도독부 공격(所夫里州) 실치, 마전, 적성 전투
문문왕 15년 675년 매소성(買肖城) 전투
문무왕 16년 676년 기벌포(伎伐浦,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瓦草里, 기와풀 즉 기벌) 부근) 전투로 안동도호부 요동으로 축출
676년 통일 완성
2. 통일의 의의
가. 의의 : 자주성 회복, 민족 문화의 기틀 마련(삼국의 문화적 전통, 경제력 확충)
나. 한계 : 외세의 협조, 대동강 이남의 통일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통일 신라의 전제 왕권
1) 전제 왕권의 확립
① 무열계의 왕위 계승
② 중앙 집권 체제 정비(9주 5소경, 9서당, 10정, 14부 등)
9주(九州): 沙伐州(사벌주, 尙州), 歃良州(삽량주, 良州), 菁州(청주, 康州)/熊川州(웅천주, 熊州), 完山州(완산주, 全州), 武珍州(무진주, 武州)/漢山州(한산주, 漢州), 首若州(수약주, 朔州), 河西州(하서주, 溟州)
5소경(五小京) : 中原京(충주), 北原京(원주), 金官京(김해), 西原京(청주), 南原京(남원)
9서당(九誓幢)10정(十亭)
9서당(九誓幢)
진평왕 5년 583년 부터 시작하여 신문왕 7년 687년에 완성된 중앙군단
녹금서당(綠衿誓幢, 583) 자금서덩(紫衿) |
신라인 |
백금서당(白衿), 청금서당(靑衿, 687) |
백제인 |
황금서당(黃衿), 벽금서당(碧衿), 적금서당(赤衿) |
고구려인,보덕국성민(城民)군단2개 |
흑금서당(黑衿) |
말갈인 |
10정(十停, 삼천당(三千幢) : 통일신라의 9주(九州)에 각각 설치된 지방 군사조직.으로 한주(漢州)는 다른 주에 비해 관할구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감안되어 2개(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乃斤停))가 설치되었으므로 모두 10정이 되었다. 남천정(南川停, 이천), 골내근정(骨乃斤停, 여주), 음리화정(音里火停, 상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청양), 거사물정(居斯勿停, 남원), 삼량화정(參良火停, 달성), 소삼정(召參停, 함안),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나주), 벌력천정(伐力川停, 홍천), 이화혜정(伊火兮停, 청송).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에 10정이 설치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10정은 통일 이후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0정의 군관(軍官) 조직은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화척(火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군관조직이 갖는 특징으로는 군관들이 대체로 기병 중심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삼국시대 정의 군관조직에 비하여 격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것 등이 지적될 수 있다.
③ 유교 정치 이념의 도입 : 국학 설립(698)
④ 귀족 세력 약화(수상 : 상대등→집사부 시중), 귀족에 대한 숙청
2) 6두품의 진출 : 전제 왕권 뒷받침(집사부 시랑으로 등용), 학문, 종교 분야에서 활약
신라 하대 사회 : 전제 왕권의 약화
1) 내물계의 왕위 계승→무열계의 반란(김헌창의 난, 범문의 난)
2) 진골들의 왕위 쟁탈전→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
3) 골품 제도의 모순 : 중앙 귀족의 골품제 고집, 사치, 향락
4) 6두품의 반신라적 경향 : 골품제 비판(도당 유학생 중심), 최치원의 시무책 건의(10여조, 과거제, 유교 정치 이념 제시), 선종 개창
5) 지방 세력의 성장 : 호족, 해상, 군진 세력
6) 농민의 동요 : 진골 귀족의 사치, 향락 생활→과중한 수취→농민 반란(초적)
7) 호족 세력의 성장(성주, 장군 자처, 군 단위의 지방 지배, 반 독립적 상태, 군사, 행 정, 재정권 장악)
8) 선종의 유행(지방 호족 세력과 연결)
5교9산
宗派名 |
開創者 |
根本道場 | |
교종(5교) |
열반종(涅槃宗) |
무열왕 때 普德 |
전주 景福寺 |
계율종(戒律宗) |
선덕왕 때 慈裝律師 |
양산 通度寺 | |
법성종(法性宗 |
문무왕 때 元曉 |
경주 芬皇寺 | |
화엄종(華嚴宗) |
신문왕 때 義湘 |
영주 浮石寺 | |
법상종(法相宗) |
경덕왕 때 眞表律師 |
김제 金山寺 | |
선종(9산) |
가지산(伽智山)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寶林寺) |
실상산(實相山) |
홍척(洪陟, 洪直) |
남원 실상사(實相寺) | |
동리산(桐裡山) |
혜철(慧哲) |
곡성 대안사(大安寺) | |
사굴산(闍崛山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굴山寺) | |
성주산(聖住山) |
무염(無染 |
보령 성주사(聖住寺) | |
봉림산(鳳林山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鳳林寺) | |
사자산(獅子山) |
도윤(道允) |
영월 흥녕사(興寧寺, 현재 法興寺) | |
희양산(曦陽山)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鳳岩寺) | |
수미산(須彌山)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廣照寺) |
2. 발해의 성립
1) 건국
① 배경 : 요동 중심의 고구려 부흥 운동→ 당의 분열 정책(보장왕을 요동 도독에 임명, 친당적 소고구려국 세움)
② 대조영이 동모산을 중심으로 진(震) 건국(698, 남북국 시대)
③ 2원적 민족 구성 : 지배층-고구려인, 피지배층-말갈인
④ 고구려 계승 의식 :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국호 “고구려국” 사용
2) 발해의 발전
① 영토 확장(무왕, 8C초) : 만주, 연해주 차지, 당과 대립
② 체제 정비(문왕, 8C후) : 당과 친교, 중국 문화 수입, 상경 천도
③ 전성기(선왕, 9C) : 해동 성국 칭호, 지방 조직 정비(5경 15부 62주)
15府(都督) 62州(刺史) 縣(縣丞) 刺使史
5京
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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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동경성) |
黑龍江城 永安縣 牧丹江 渤海鎭 : 당 장안성 영향 |
동경용원부(혼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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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현덕부(돈화, 東牟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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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압록부(임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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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남해부(북청) |
④ 왕권의 전제화
독자적 연호 사용 : 인안, 대흥, 건흥 -중국과 대등함, 왕권의 강대함 표현
관료 조직 정비 : 당의 3성 6부제 도입 독자적 운영, 중정대
왕위 계승의 장자 상속제 확립
3) 대외 관계
① 당
초기(무왕 8C 전반) : 대립(당은 흑수부 말갈 이용 발해 견제)→ 장문휴는 산둥 지방 공격(당과 신라의 협공 격퇴)→발해관 설치
∙후기(문왕 친선, 8C 후반) : 친선
② 일본 : 우호적 관계(당, 신라의 협공 대비=국제적 고립 탈피) 동해 해로 개척(신라 견제 의미)
③ 신라 : 적대적[경우에 따라 문화적 우월 경쟁과 무역, 문화적 교류도 이루어짐(신 라도를 통해)]
④ 돌궐 : 당 견제 위해 우호 관계 유지
4)멸망 : 거란에 멸망(926), 고구려계 유민은 고려에 포섭
류득공의 발해고(渤海考)ᆞ이종휘의 동사(東史)ᆞ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ᆞ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ᆞ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ᆞ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ᆞ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등 조선 후기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적극 인식했다. 특히 발해고와 대동지지는 남북국 용어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