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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생적 사고 ‘브리콜라주’ - 잰 그루버(Jan Groover)
뉴욕 현대미술관에 갈 때 필자는 지하철을 타고 5번가의 역에서 내려 한블럭 정도 걷는다. 이 한블럭 사이의 53번지에 언제부터인가 흑인 걸인 노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걸인에게 흥미를 느꼈던 것은 그가 항상 노상에서 펼치고 있는 행동거지가 기묘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걸인은 소지품을 커다란 봉투에 가득 담아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배회한다. 봉투 속의 내용물은 대부분 추운 밤을 지내기 위한 누더기 옷들이다. 그러나 이 걸인이 지니고 있는 봉투 속의 알맹이는 옛날 잡지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인 옛날 잡지 속에서 마음에 들었던 사진 도판을 오려내서 노상에 펼쳐 놓고 있다. 검은 얼굴에 미소를 띤 모습은 마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 걸인은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펼쳐 놓은 사진에는 그 어떤 맥락도 없다. 그러나 이 광경은 자신의 내면을 찾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을 엿보는 듯해 가슴이 찔리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20여년 전에 본 어떤 영화 가운데 목에 기다랗게 늘어뜨린 가위로 옛날 잡지의 사진을 오려내는 일을 낙으로 삼고 있는 정신박약 부랑자를 다룬 것이 있었다.
1987년 「신디 셔면 회고전」이 7월부터 8월에 걸쳐서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현대미술관에서는 5월부터 6월에 걸쳐서 「잰 그루버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신디 셔먼은 1977년부터 <무제 영화 스틸>의 연작을 시작하고 있었고, 잰 그루버는 1975년부터 <무제(Untitled)>로 제목이 붙여진 연작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80년대에 커다란 조류를 형성한 구성사진의 선구적인 작업을 70년대 후반에 이미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사람이 87년에 회고전을 열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과 시대적으로 구성사진이 이 시기에 비등점에 도달하였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잰 그루버, 무제, 1975
필자가 재미있게 느꼈던 것은 그루버의 회고전이 열린 시기에 흑인 걸인이 출현해 미술관 근처에 노상에 사진을 늘어놓았던 점이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신병자인 결인은 다만 사진을 나열했을 뿐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분열병 환자 특유의, 과거나 미래를 갖지 않고 영원히 현재를 사는 자의 행위의 상징이라 한다면 시간적 연속성을 단절시켜 광경이나 정물을 등가화하고 있는 그루버의 작업도 분열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사회사상가, 학자)는 질 들뢰즈(G.Deleuze, 프랑스 구조주의자)와 펠릭스 가타리(F.Guattari, 프랑스 구조주의자)가 공동으로 집필한 난해하고 미로와 같은 저서『반(反) 외디푸스(L'Anti Oedipus)』에서 인용하여 문화를 ‘파라노 문화’와 ‘스키조 문화’라는 두개의 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파라노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먼저 앞서려고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사회이며, 스키조라는 것은 평소에 현재의 상황을 예민하고 탐색하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내거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상은 필자의 요약임으로 아사다 아키라의 본뜻과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분류를 패스티시로서 차출하려고 한다.
흑인 걸인은 진짜 분열증 환자이지만 그루버의 작품 전략은 분열형(스키조)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단언하면 포스트 모더니즘, 적어도 구성사진의 기본적 전략은 분열형인 것이다. 분열병 환자가 지닌 증상의 특징은 시간적 연속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현재를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경험은 강렬한 긴장감을 가지며 물질적이고 표층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재의 체험은 현실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비현실적인 감촉이다. 일상적인 사물은 마치 발광하는 진귀한 물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히 현재를 사는 하이퍼리얼(Hyperreel)한 체험은 분열병 환자만의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적 상황이 틀림없다. 잰 구러버는 이 분열형의 방법론에 의해 사진을 제작하고 있다.

잰 그루버, 무제, 1979 젠 그루버, 무제, 1979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잰 그루버 회고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해보자. 작품 총수는 90점, 전시장은 특별기획 전시실로 두 개의 방이 할당 되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개인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디렉터는 현대미술관의 사진 부문 큐레이터인 수잔 키스마릭(Susan Kismaric)이었다. 초기의 작품에서 최근의 작품까지 거의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루버는 1974년에 라이트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데뷔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녀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77년 풍경을 찍은 작품으로 컬러에 의한 3매 1조의 시리즈를 소나벤드 화랑에서 전시한 후부터이다. 풍경이라고 하지만 소위 풍경이 찍혀져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를 통과하는 대형 트럭의 뒷부분, 교외 주택의 일부분 등이 3매 1조로 제작되어 있다. 그것은 풍경이라기보다 광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그 제멋대로의 임의성, 이것이야말로 분열형의 영상을 추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임의성, 이것이야말로 분열형의 영상을 추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루버가 급진적인 사진가의 대표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78년 정물사진인 <무제> 시리즈를 발표한 이후부터이다. 그것은 부엌에 있는 스테인레스 싱크대에 접시, 포크, 나이프, 피망, 버섯, 그리고 집안의 화분이 내던져 있는 듯한 사진으로, 얼핏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 정물은 마치 분열병 환자가 체험하는 듯한 힘있는 긴장감을 갖고 접근해 온다. 제멋대로인 듯한 것은 일종의 함정으로, 모든 것이 사전에 계산된 것이다.
또 이들 시리즈는 향수의 몸부림이자 패스티쉬이기도 하다. 그녀가 인용한 것은 폴 스트랜드(Paul Strand)와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이라는 과거 사진가의 이미지인 것이다. 피망과 접시로 구성된 사진을 볼 때 우리들은 웨스톤의 <피망>이라고 하는 사진사의 대표적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루버는 이들 정물사진과 평행해 79년부터 81년에 걸쳐 인물의 부분에 접근한 작품을 촬영하고 있다. 대부분이 다리, 손, 얼굴을 클로즈업한 것으로, 한 시기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사진을 환기시킨다.

잰 그루버, 무제, 1983 (좌) 무제, 1985(중) 무제, 1985(우)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갖고 있는 것은 82년경부터 시작된 <정물수집 사진>이다. 테이블 위에 레몬, 바나나, 복숭아, 사과 등의 과일과 펜치, 식칼, 쿠키틀 등의 무기질 금속 그리고 잠자고 있는 고양이가 마치 ‘존재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라는 듯이 놓여져 있다. 수집된 정물들은 독립적이고 무관계하며 제각기 자신의 존재를 강렬히 주장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흑백의 백금 프린트로 완성되어, 흑과 백 그리고 무한의 회색 계조가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우선 1982년에 제작된 작품번호 <D 127>은 사물과 잠자는 고양이가 제각기 자기주장을 하고 있어 분열형 세계를 가시화시킨 걸출한 작품으로 탁월한 시점이 훌륭히 표출되어 있다. 분열형이라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 있어서는 문화의 형태를 지칭한다. 그것은 소비사회, 미디어 사회, 스펙터클 사회라 일컬어지는 현재의 사회상황과 호응한다. 분열형의 시점은 급진적인 사진가인 신디 셔먼에게 있어서는 영화와 포르토그래피로부터 인용, 바바라 크루거에게 있어서는 포스터의 인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천박한 이미지와 말을 역으로 취해 작품을 성립시켜 분열형 문화를 표출시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이에 반해 그루버의 제작의도는 시점 그 자체, 분열병 환자의 광경을 가시화시킨 것이다.
그루버의 회고전은 <정물수집 사진>으로 끝나지만 그 후 로버트 밀러 화랑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 도자기로 만든 병이 대상으로 선택되어져 있다. 이 사진들은 그때까지의 흑백세계로부터 확 바뀌어 컬러 작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루버는 여기에서도 패스티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 많지만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의 정물화로부터 차출된 것이다. 소수의 사진은 암시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큐비즘의 패스티시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1987년에 뉴 웨이브의 선구적인 작가들인 신디 셔먼과 잰 그루버의 회고전이 개최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셔먼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한가지는 구성사진이 확실히 비등점에 도달하였다는 점이고, 또 한가지는 다수의 추종자들과 서로 다른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제 2세대의 뉴 웨이브 사진가들은 그 표현이 과격하게 점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은 지금 약화되고 있다. 즉 사상적인 전략에 빠져있다.
필자는 그루버를 언급하면서 자의적으로 분열형 문화와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이 회고전의 디렉터인 수잔 키스마릭은 “그루버 작품의 드라마는, 그 사진속의 사실은 실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친밀하게 느껴왔던 것이며, 사진을 보는 것으로써 다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면 분열형의 필터를 통해서 일상을 본다고 하는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잰 그루버, 무제, 1987
필자는 지금까지 논해 온 작가들, 넓게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두 개의 전략적 특징인 패스티쉬와 분열형을,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의 개념에 통합시키면 그것은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프랑스 구조주의자)가 말한 브리콜라주(le bricolage;잔일하기, 짜맞추기)‘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필자가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참뜻을 정확히 헤아려 정확히 이 개념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패로디 또는 패스티쉬로서 인용하고자 할 뿐이다. 이제부터 많은 현대 사상가의 언어가 인용될 것이지만 그것을 모두 패스티쉬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 책 자체도 패스티쉬이다. 필자는 이 책을 패스티쉬의 짜깁기로 쓰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사회와 미개사회의 차이를 사회구조의 차이로 보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뜨거운 사회(la societe chaude;산업사회)’와 ‘차가운 사회(la societe froide;원시사회)’의 구별만이 있을 뿐이다. ‘뜨거운 사회’는 역사적 진보라는 테제(these)로 몰리는 사회이고, ‘차가운 사회’는 미개사회로 역사적 변화가 없는 정적이고 결정화(結晶化)된 조화의 사회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있어서 ‘차가운 사회’는 이미 잃어버린 유토피아이기도 하다. 그는 근대 과학주의로 상징되는 ‘재배(栽培)의 사고’에 대비시켜 ‘야생적 사고(野生的 思考, la pensee sauvage)'의 시스템을 논하고 있다. ’야생적 사고‘라는 것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정신에 열린 풍부하고 구체적인 시스템이다. 그는 이 ’야생적 사고‘의 시스템에 의해 신화를 규명하면서 ’브리콜라주‘로 불리는 비유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브리콜라주‘야말로 ’야생적 사고‘의 좌표축인 것이다.
브리콜뢰르(le bricoleur;잔일꾼)이라는 것은 전문가와는 달리 주위에 있는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신화적 사고’의 본성은 잡다한 요소로부터 되어 있고, 한없이 있다고는 해도 역시 한도가 있는 재료를 사용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신화적 사고는 이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변의 아무것도 아닌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지적인 솜씨가 뛰어난 작업(브리콜라주)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점에서 ‘브리콜라주’가 그런 것처럼, 지적인 면에서 신화적 사색이 생각지 못한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일도 있다. (『야생적 사고』에서,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김형효, 도서출판 인간사랑)참조) 이 ‘브리콜라주’를 독단적으로 바꾸어 요약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것의 단편을 모아 결국 문화의 부분집합으로 이야기시키는 것으로, 일종의 선명하고 강렬한 의미를 발광시키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자는 항상 한다고는 하더라도 부득불 그 앞에서 멈춰버린다. 바꿔 말하면 기술자가 개념을 사용해 작업을 행하는 데 비해 ‘브리콜뢰르’는 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 ‘브리콜라주’의 원리야말로 인용의 총체인 패스티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인 스펙터클 사회, 미디어 사회의 중요한 일상적 사고인 것이다. 즉 모든 구성사진가는 문화의 부분의 집합에 말을 거는 ‘브리콜뢰르’인 것이다. 또 ‘브리콜뢰르’가 항상 부분에 의해 창조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브리콜뢰르’는 분열형 사고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주제인 잰 그루버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녀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1983년경까지 과일을 여기저기 늘어놓고 찍은 작품들과 85년에 잠자는 고양이를 배치해 찍은 작품이다.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분열증 환자의 시선으로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브리콜뢰르’가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소재를 나열해 놓은 듯한 느낌을 감돌게 하는 듯하다. 불가사의한 감촉의 뛰어난 작품이다.
『현대사진의 전개』, 고쿠보 아키라, 김남진 역,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