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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의 사진약사
4. 예술사진(Art Photography);세기말의 열매맺지 못한 꽃(?)
기술에 지나지 않은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높이려 했던 예술사진가들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진표현의 폭을 넓히는 운동이 되었다. 그것은 사진을 다른 시각표현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전초적인 사건이었다.
신랄한 미술비평가로도 알려져 있던 시인 아를르 보들레르는 「1895년의 살롱」(Salon De 1895)속의 제1장 현대의 대중과 사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사진술이 일말의 기능으로 인해 예술에 추가사항으로서 채택된다면, 예술을 밀어내게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이나 사진 모두가 부패하게 될 것이다…이제는 사진이 본연의 의무로 되돌아가야 할 때다. 말하자면 예술과 과학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야 한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진은 ‘물질과학의 성과’에 지나지 않고, 그 정밀한 묘사력은 오히려 ‘가장 비물질적인, 가장 붙잡기 어려운 것을 느끼고 판단하는 능력’을 흐리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보들레를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사진관(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예술이 아니고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평은 그 후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보들레르 자신은 사진 그 자체를 특별히 싫어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다르나 에띠엔느 까르자(Etienne Carjat)가 촬영한 그의 점잖은 체 하는 사진은, 자의식이 넘치는 이 시인에게 있어서, 사진찍는 일을 오히려 즐거워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단지 그는 ‘과학과 예술의 심부름꾼’이 주인의 흉내를 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진가, 특히 사진을 새로운 가능성이 숨겨진 예술표현의 매체로서 확립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보들레르와 같은 지식인들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사진은 단지 사물을 정확히 기록하고 회화의 밑그림으로서 도움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가 사진가의 미의식의 표현이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예술사진이었다. 예술사진은 사진사(寫眞史)에 있어서는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다. 사진이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을 소홀히 하고 회화와 판화를 모방한 이류의 예술이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확실히 19세기 말에 출현한 회화적 사진(Pictorial photography)*③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작품에는 그 비난이 맞아 떨어지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여 년이 지난 현재에서 보면 예술사진이 사진의 표현력을 크게 확대하고 사진가의 내적 미의식과 이미지를 관련짓는 회로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말 할 수 있다. 적어도 당시의 예술사진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연초점(soft focus)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이미지는 어떤 종류의 필연성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이었다.
레일랜더에게서 시작되는 합성사진예술
사진의 예술화(藝術化)의 시도는 픽쳐레스크(picturesque)미학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던 탈보트의 <자연의 연필>이래 지속적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그것이 명확한 운동으로서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오스카 G.레일랜더(Oscar G. Rjlander 1813-75)와 헨리 피치 로빈스Henry Peach Robinson 1830-1901)이 네가합성에 의해 몽타쥬 예술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헨리 피치 로빈슨, <구성연습>, 1860 헨리 피치 로빈슨, <임종>, 1858
오스카 레일랜더,인생의 두 갈래 길, 1857
스웨덴 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던 레일랜더는 맨체스터에서 1857년에 개최된 전람회에 <인생의 두 갈래 길>(The Two Ways of Life)이라는 대작을 발표했다. 30장의 네가로 구성된 화면은, 유랑극단 단원이 연기한 인간의 타락과 도덕적 미덕을 나타낸 여러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알기쉬운 우의(Allegory)와 완벽한 몽타쥬 기술에 의해 그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일랜더에게 영향을 받아 합성사진*④을 만들기 시작한 로빈슨은, 이전에는 화가이자 판화출판업자였다. 1857년 레밍턴 스파(Leamington Spa)에 사진 스튜디오를 연 그는 합성사진 뿐만 아니라 풍경과 초상에도 뛰어난 테크닉을 발휘했다.s 1869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 「사진에서의 회화적 효과」(Pictorial Effect in Photography)는 예술사진의 교과서로서 가장 영향력이 큰 책 중에 하나였다.
1860년 이후가 되면 레일랜더나 로빈슨과 같은 프로사진가 뿐만 아니라, 사진을 취미로 하는 수준높은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적극적으로 예술사진을 지향하게 된다. 영국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 1815-75)과 옥스퍼드 수학교사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 1832-98)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마추어 예술사진가의 등장
세이론(스리랑카)에서 커피농장을 경영하던 찰스 H.카메론의 부인이었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은 영국으로 귀국한 후인 1863년 딸로부터 48세의 생일선물로 카메라를 받았다. 그것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쓰고 있다. “눈 앞에 나타난 미(美)라고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붙잡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만 이러한 동경은 마침내 충족되었습니다.”
카메론 부인은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의 포트레이트 촬영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속에는 시인인 테니슨, 철학자인 카알라일, 진화론의 다윈 등 저명인사들도 있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다소 연초점 분위기로(기술적인 결함 때문에 선명치 못한, 즉 blur라고 말하는 것도 있었지만) 찍은 그녀의 사진들은 그때까지의 초상사진의 상식을 깨뜨린 신선한 표현이었다. 중세와 신화시대의 이미지를 재현하려고 했던 우의적인 작품을 포함해서, 그녀의 사진은 당시의 라파엘로 전파*⑤의 그림과도 공통하는 미와 종교에의 낭만적인 동경을 가득 담고 있다.
루이스 캐롤은 1856년 카메라와 사진재료 일체를 구입하고, 사진취미에 빠져 들었다. 그가 열심히 촬영한 것은 아홉 살, 열 살짜f리 소녀의 포트레이트였다. 성적인 것이 극단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빅토리아 왕조 사회에서, 소녀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이 수학교사는 1880년에 돌연 사진을 그만두기까지 마치 소년이 곤충을 채집하는 것처럼 매우 많은 소녀들의 포트레이트를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편향된 취미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변하기 쉬운 ‘미’의 환영이 한순간에 정착된, 기묘한 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자연주의 사진의 제창
아마추어 예술사진가들의 작품은 카메론이나 캐롤과 같이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 정해진 제재를 진부한 수법으로 요리한 것이었다. 특히 합성사진을 이용한 작품은 이류의 풍속화와 역사화에서 구도를 차용한 것도 많았다. 이런 예술적 시대착오
(Anachronism)를 맹렬히 공격하고 ‘자연주의 사진’(Naturalistic Photography)을 부르짖은 사람이 피터 H.에머슨(Peter H. Emerson 1856-1936)이었다. 에머슨은 레일랜더와 로빈슨류의 합성사진을 만든 것이라고 해서 멀리하였고, 또한 사진의 과학성과 기록성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부정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자연에서 ‘심리적 즉 시각적 진실’을 발견하고, 정직하게 인화로 정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한다. 또 육안의 인상에 보다 접근하기 위해 화면의 일부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는 부드럽게 흐려지게 하는 방법을 제창했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여 발간한 사진 모음집이 「노포크 브로드의 생활과 풍경」(Life and Landscape on the Norfork Broads 1886)이었다.
프랑크 매도우 셔트클리프, Water Rats, 1886
클래런스 화이트, 과수원,1902
에머슨의 주장은 당시 가장 권위있는 사진단체였던 왕립사진협회(1853년 창설)의 젊은 회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92년 조지 데이비슨(George Davison), 알프레드 마스켈(Alfred Maskell)을 중심으로 사진협회의 회원 15명에 의해 새로운 단체가 결성되었다. 즉 ‘사진에 가능한 한 고도의 예술형식을 부여해 줄 것’을 목표로 ‘진실, 미, 상상(想像)’을 의마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의 고리를 상징으로 한 ‘더 링크드 링 브라더후드’(The Linked Ring Brotherhood)*⑥를 결성하였다.
‘링크드 링’의 결성과 그들이 일년에 한번 개최한 ‘살롱’이라 불리는 사진전에 의해 예술사진 운동은 정점에 달한다. 세기말에서 금세기초에 걸쳐 ‘링크드 링’에는 프레드릭 H. 에반스(Frederic H. Evans 1852-1943), 알렉산더 케일리(Alexander Keighley 1861-1947),프랑크 메도우 서트클리프(Frank Meadow Sutcliffe 1853-1943) 등의 중요한 사진가가 계속 참여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로베르 드마쉬(Robert Demachy 1859-1936), 콩스탕 퓌요(E.J.Constant Puyo 1857-1953), 오스트리아의 하인리히 퀸(Heinrich Kuhn 1866-1944), 미국의 프레드 홀랜드 데이(Fred Holand Day 1864-1933),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등이 가담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강해져 갔다. 링크드 링으로 대표되는 예술사진 운동은 사진에 있어서의 ‘분리파(Secesstionism)’*⑦라고도 불린다. 링크드 링과 전후해서 빈 카메라클럽(1891년), 파리 사진클럽(1894년)등의 새로운 단체가 계속 결성된다. 그들이 ‘분리’하려고 했던 것은 당시 사진계를 지배하고 있던 두 경향 즉, 과학의 응용술로서의 사진을 강조하는 견해와 아마추어의 급증에 따른 사진 인화(Print)의 질 저하에 대해서였다. ‘여러분은 셔터만 눌러 주십시오.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해 드립니다.(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선전문구로, 백장을 연속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코닥’카메라가 팔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술사진이 꽃피려 했던 1888년이었던 것이다.
마침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가 전개한 ‘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⑧이 공업화에 따른 조잡한 대량 생산품에 대항해서 수공예의 복권을 주장한 것처럼, 예술사진을 제작하던 사람들도 수공예품처럼 섬세하게 짜여진 프린트를 만들고 있었다. 중크롬산 고무인화법과 브롬오일법으로 제작된 그들의 작품에는 잃어버리려 했던 아름다움에 환상이 담아져 있는 듯이 보인다. 1902년 스티글리츠, 스타이켄, 거르트루드 케즈비어(Gertrude Kasebir), 알빈 랭던 코번(Albin Langton Coburn), 클래런스 화이트(Clarence White) 등에 의해 뉴욕에서 ‘사진 분리파(Photo-secesstion)가 결성된다. 분리파의 최후의 보루로서 등장한 그들의 활동은 공교롭게도 회화적 사진의 숨통을 끊어 근대사진(Modern Photography)에 의 길을 열게 한다. 스티글리츠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①:근대 합리주의는 사상, 과학, 정치체계와 모든 장면에서 일체의 잡음을 배제하고 일원론적인 질서와 체계의 확립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바타이유와 같은 현대 사상가들은 체계의 외부로 배제시킨 이 잡음에 강한 관심을 향하고 있다.
*②:메를로 퐁티의 설명에 따르면, 시각작용과 가시적 세계는 신체의 운동을 매개로 하여 서로 얽혀 있으며, 회화의 문제도 이러한 상호규정적 교류의 관계 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일상적 시각도 몸짓과 거의 마찬가지로 근원적인 표현
작용이며, 회화는 이와같은 시각의 기능을 그 연장선상에서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다. 화가의 눈은 독자적인 투시를 통해 범속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에 가시성을 부여하고, 또한 그가 본 것을 물(物) 자체가 그의 마음 속에 스스로를 묘사하듯이 화상에 투사한다. 거기에서는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묘사하는 것과 묘사되는 것을 판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신체의 기능과 직관되는 사물이 일체화되는 것이다. -「미학 사전」 논장 1988. 438~439쪽 참조.
*③:마르크 멜롱(Marc Melon)은 pictorial이란 용어는 이미지 또는 그림을 뜻하는 picture에서 비롯된 형용사로서, 회화를 뜻하는 painting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화적 사진, 그림같은 사진, 회화파라는 번역은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
다. - 「세계사진사」정진국역, 까치, 1993,165~166쪽 참조
*④:뉴홀(B.Newhall)은 combination Printing이란 용어를 사용한 반면에 로젠브럼(N.Rosenblem)은 Composite Photography란 용어를 사용했다.
*⑤:라파엘로 전파(PrePaphaelite Brothhood):18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운동. 당시의 아카데믹한 예술에 반항한 혁신운동으로서 라파엘로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작품에서 영감을 찾아내어 면밀하고 사실적인 수법을 다시 일으키고 진실과 자연의
영감을 중시하였다. 또 장식적인 요소의 필요성도 주장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운동도 이 사조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⑥:우애로 연결된 모임이라는 뜻으로 링크드 링(연결된 고리)으로 부르기도 한다.
*⑦:분리파 운동은 19세기 말엽 독일, 오스트리아 각지에서 일어난 회화, 건축 및 공예운동. 프랑스의 신인상주의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관료적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이념으로 하였다.
*⑧:19세기 말에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하여 영국에서 일어났던 공예 개량운동.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비약적인 진보에 따른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방식은 한편으론 노동이 현저히 분업화되고 생산 작업의 기쁨이 상실되어 조잡한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모리스는 이러한 기계 만능주의자가 결국은 생활 속의 미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우려에서 가구, 집기, 인쇄 등의 여러 분야에서 수공업이 지닌 아름다움을 회복시키고자 중세적 직인제도의 원리에 따른 공예개혁을 기도한다. 그러나 모리스의 운동은 기계가 지닌 뛰어난 가능성을 전혀 무시했다는 점에서 시대에 역행한 면도 없지 않다.
김남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