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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면(佛恩面)
238. 덕진동(德津洞518))
德津三月柳如絲삼월의 덕진은 수양버들 늘어졌고,
白首漁翁勸碧卮흰머리 난 늙은 어부는 술잔을 권하네.
鎭舘緣何多變革덕진 진관은 어떤 연유로 그리 많이 변했는가,
滿江水色似前時강 가득한 물빛은 예전과 똑 같은데.
○ 불은면(佛恩面)은 강화부 관아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덕진동(德津洞)은 예전에 진관(鎭關)이 있었다. 정사년(1677)에
허질(許秩)이 유수가 되었을 때에 창건하였으며 단암(丹岩) 민진원
(閔鎭遠)이 철폐시켰다. 그 후에 진이 있어서 첨사를 두기도 하고 별
장을 두기도 했으며 만호를 두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 어업을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농사를 짓기도 한다.
239. 대모산(大母山)
大母一鬟氣積元대모산 꼭대기에 원기(元氣)가 쌓여서,
諸峯羅立似兒孫여러 봉우리 늘어선 모습 자손인 듯 하여라.
昇平世世初更燧태평한 시절에는 초경 봉화 올렸으니,
玉燭光輝耀殿門옥등잔 불빛이 대궐문을 밝혔었네.
518) 불은면 덕성리 봉골 남쪽에 있다.
불은면(佛恩面) 253
○ 이 산에는 봉수가 있었다.
○ 강화부에는 봉수가 다섯 곳에 있었는데 진산(鎭山)봉수·망산
(望山)봉수·하음(河陰)봉수·남산(南山)봉수가 그것이다.
○ 예전에 태평할 때에 봉수는 초경의 밤에 반드시 전문(殿門)에
보고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240. 손돌목(孫石項)
孫石荒墳倚斷阿손돌의 황량한 무덤이 절벽 위에 있는데,
舟人指点酹而過뱃사람 그곳 가리키며 술 따르고 지나가네.
年年十月寒風至해마다 시월 되면 찬바람이 불어오니,
知是冤魂激激波원혼이 격렬하게 물결쳐서 그러는 것이려니.
○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왕이 몽고의 군대에 쫓겨서 배를 타
고 이곳을 지나다가 바다길이 구부러지고 막혀 전진할 수 없을 듯한
것을 보고는 사공이 왕을 속였다 생각하고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바닷가 산등성이에 묻혀있는데, 10월 20일이 되면 회오
리바람이 몰아치는데 대체로 손돌이 죽은 날이라고 한다. 그 아래를
배로 지나는 자들은 술을 붓고 간다.
241. 손장군(孫將軍*)
卉寇何年到窄梁오랑캐가 어느 해인가 착량에 들어와서,
許多戰艦夜烟光수많은 전함에서 밤에 불을 밝혔었네.
254 譯註 沁都紀行
可憐孫將隨流矢가련하다 손광유 장군 화살에 맞았으니,
滿岸丹楓落落霜강 언덕 단풍잎 지고 서리가 내렸도다.
○ 고려 신우 3년 정사년(1377)에 왜인(倭人)들이 밤중에 강화의
착량(窄梁) 침입하여 전선 50여 척을 불질렀고, 죽은 자들이 천여 명
이었다. 이때 만호 손광유(孫光裕)519)가 이곳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
아 죽었다. 착량은 손돌목(孫石項)이라고 하는데, 당시 규율을 지키
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 떼들이 마을마다 쓸고 지나갔다고 하였다.
왜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가 말하기를 ʻ적들이 두려워하는 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최 만호(崔萬戶)뿐ʼ이라고 하였다. 머리가 하얀 최
만호는 곧 최영(崔瑩) 장군이다.
242. 광성동(廣城洞520))
東風東望廣城墩동풍 맞으며 동쪽으로 광성돈을 바라보니,
殘堞危譙海雨昏허물어진 치첩과 높은 초루는 비에 젖어 밤을
맞네.
窃想堂堂魚節制당당했던 어재연 절제사를 생각하노니,
弟兄同日作忠魂형제가 같은 날에 충성 영혼 되셨네.
519) 손광유(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무신. 1376년(우왕 2) 밀직부사·해도상
원수(海道上元帥)를 겸임하였다가 1377년 만호(萬戶)가 되었다. 이때 왜적
이 밤에 착량(窄梁)에 들어와 많은 배가 불에 타고 죽은 사람도 대단히
많았는데, 이는 최영(崔瑩)이 '착량강 어귀에만 머물며 군대의 위엄을 보이
고 바다에 나가지 말라'고 한 지시를 어기고 착량을 떠나 술을 마시고 깊
은 잠이 들었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520) 불은면 넙성리 광성 마을이다.
불은면(佛恩面) 255
○ 황상 신미년(1871) 4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강화를 침입하였을
때에 병사(兵使) 어재연(魚在淵)이 강화부의 중군(中軍)으로서 광성보
를 지키며 힘써 전투하다가 죽었다.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洵[淳])
도521) 마침 군중에 와 있었는데 동시에 순절하였다.
243. 광성진(廣城津*)
春風來到廣城樓광성보 누각에 봄바람 불어오는데,
津吏迎吾指海洲나루지기 나를 맞으며 바다섬을 가리키네.
三兎三龍三蛇字묘시 진시 사시의 삼자시가 있으니,
知潮有信可行舟물때를 잘 알아야 배가 갈 수 있다네.
○ 효종 무술년(1658)에 유수 서원리(徐元履)가 광성진(廣城鎭)을
창설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조수에 따라 배가 다닐 수 있는데, 조수를 기다리는 시는 다음
과 같다. 삼토삼룡수(三兎三龍水) 삼사일마시(三蛇一馬時) 양삼원역이
(羊三猿亦二) 월흑부여사(月黑復如斯).
244. 신현동(新峴洞522))
新峴來聽韓友琴신현리에서 듣노라 친구 한씨의 거문고 소리,
521) 원문에는 어재순(魚在洵)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실록과 금석문 등 대부분
의 자료에 ʻ순(淳)ʼ으로 되어 있다.
522) 불은면 신현리이다.
256 譯註 沁都紀行
高山流水自然音높은 산 흐르는 물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였네.
挑燈半夜悠悠語등불 돋우며 한밤중까지 정담을 나누었으니,
四十年來共一心사십 년 이어 온 마음 맞는 친구였네.
○ 한씨(韓氏) 친구는 청주의 세족으로서 삼괴당의 후손이다. 나와
는 매우 친한 사이였으므로 밤새도록 정담을 나누었다.
245. 넙성동(芿城洞523))
具門世築芿城中구씨 가문 넙성리에 대를 이어 사는데,
現使今人想古風오늘날 우리에게 옛 풍모를 생각게 하네.
楣上紅旌兵判字문 이마의 정려 글씨 병조판서 쓰였으니,
海天星日貫貞忠바다 하늘 해와 별에 충정으로 통했네.
○ 능성 구씨인 구원일(具元一)524)은 강암공(江菴公)의 7대손이다.
병조참의를 지낸 구신충(具信忠)525)의 6세손이다. 호조의 낭관을 지
낸 구유관(具有寬)의 고손이다. 병자년 난리에 순절한 일은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 그 자손들은 문학을 세습하여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523) 불은면 넙성리이다.
524) 구원일(1582∼1637)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 병자호란 때 강
화좌부천총(江華左部千摠)으로서 휘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갑곶나루로 나아
갔으나,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싸울 뜻이 없음을 보고 항의하다 바다에
빠져 자결하였다.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525) 구신충(생몰년 미상) 1444년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15위로 합격하였다.
불은면(佛恩面) 257
246. 둔랑촌(芚浪村526)*)
芚浪村中朴列墻둔랑촌엔 박씨 담장이 열 지어 있는데,
勤耕餘暇對書床부지런히 밭을 갈고 시간 내어 책을 읽네.
指言銀杏峩峩樹높다란 은행나무 가리키며 하는 말,
傍植先公小舍廊작은 사랑방 옆에다가 선조가 심은 거라네.
○ 둔랑(芚浪)은 넙성(芿城)의 작은 지명이다. 주계 박씨(朱溪朴氏)
가 많이 살고 있으며 내가 일찍이 이곳을 지났는데 박씨 성을 가진
벗이 그 집 뒤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8대
조 할아버지인 판서공이 집 앞에 심은 나무이다.”라고 했다.
247. 오두동(鰲頭洞527))
一村花樹列成庄꽃나무로 동산 이룬 오두리 마을에선,
於讀於耕日月長글 읽기와 농사일로 세월을 보내네.
最愛此中丹桂籍그중에서 소중한 일은 과거에 급제한 일이니,
永承雨露放餘光나라 은혜 길이 이어 큰 빛을 발하리.
○ 오두동(鰲頭洞)에는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
나와 같이 영곡공(靈谷公)과 관란재공(觀瀾齋公)의 후손이다. 문중의
조카 고영중(高永中)528)이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526) 불은면 넙성리 북성 서쪽 마을이다. 일명 뒷낭.
527) 불은면 오두리 터진개 서북쪽 안산이 마을이다.
528) 고영중(1867년 출생) 본관은 제주(濟州), 1892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48
258 譯註 沁都紀行
정자(正字)가 되었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 영곡공은 이름이 고득종(高得宗)529)인데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
으며 문과에 합격하여 대종백·대제학까지 이르렀고, 효로써 정려문
을 내려받았다.
○ 관란재공은 이름이 고회(高晦)인데 은일(隱逸)로 시직(侍直)했
고, 학행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의 문
인이 되었다. 동춘당 선생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
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
248. 오두어화(鰲頭漁火)
碧鰲頭上白鷗翩오두리 푸른 하늘에 백구가 날아오르고,
漁火如星海色鮮고기잡이불 별처럼 빛나니 바다색이 선명하네.
認是權公開別墅권율 장군 세운 별장 있음을 알게 하니,
疎松晩翠舊堂前만취당 앞에는 큰 소나무가 서있네.
○ 도원수 권율(權慄)530)의 별장이 오두정(鰲頭亭)에 있었는데 그
당의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고 하였다.
○ 오두의 고기잡이불도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위로 합격하였다.
529) 고득종(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부(子
傅), 호는 영곡(靈谷). 1413년 효행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나간 후 예조참
의 동지중추원사·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30) 권율(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晚翠堂)·모악(暮嶽).
불은면(佛恩面) 259
249. 오두동 평양조씨(平壤趙氏)
馬峯東走更回頭마봉이 동쪽으로 흐르다 다시 머리를 돌린 곳에,
趙友居之起小樓조씨 친구 거기 살며 작은 누각 지었네.
松山檜谷承承業송산 회곡의 가업을 이어받아,
倚床531)先問野登秋상에 기대어 가을 수확 물어보네.
○ 송산(松山) 회곡(檜谷)의 후손인 평양조씨 조희봉(趙羲鳳) 형제
가 조카들과 함께 이곳에 살고 있다.
250. 사복포(司僕浦)
司僕浦中水漲橋사복포 가운데에 물넘이 다리가 있는데,
早移秧色漸抽苗일찍이 모를 내고 뽑아 심는 곳이라네.
靜聽農老勤勞語부지런히 일하는 농부 노인의 말 들어보니,
旱必懸橰澇守潮가물면 용두레 걸고 큰물 지면 조수 막아야 한
다네.
○ 사복포(司僕浦)에는 돌다리가 있다. 주민들이 항상 농사에 힘써
서 흉년을 면할 수가 있었다.
251. 능촌동(陵村洞)
芳花山下古楸連방화산 아래에는 조상 무덤들 나란하여,
531) 구창서발문본에는 ʻ床ʼ이 ʻ窓ʼ으로 되어 있다.
260 譯註 沁都紀行
省域三周更惕然세 차례 둘러보자 다시금 숙연해져.
寄語近塋諸益友선영 부근 벗들에게 말을 전하노니,
同心守護萬千年천만년 지나도록 같은 마음 지키세.
○ 방화산(芳花山)은 침령산(砧嶺山)이라고도 하는데 능촌의 뒤에
있으니 우리 집안의 선산이다. 동산인(同山人)은 모두 무덤 아래에
사는 벗인 능성 구씨(綾城具氏), 청주 한씨(淸州韓氏), 서산 송씨(瑞
山宋氏)이다.
252. 능촌(陵村)
銀杏樹前532)細柳涯은행나무 아래 버들 늘어진 물가에,
三韓章甫舊居家 한씨 성의 세 선비가 옛집에 살고 있네.
逢言前日同門誼 동창생의 우정을 만나서 얘기하는데,
薇雨書窓爛熳花서재 창밖 비 맞은 장미가 꽃을 만발 하였네.
○ 진사(進士) 한학수(韓學洙)533), 주사(主事) 한동수(韓東洙), 발해
(發解) 한영수(韓英洙)는 내 동문의 아들들이고, 또 같이 노닐던 문
인들이다. 그러므로 삼한(三韓)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였다고 말하였
으니 모두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들이다.
532) 구창서발문본에는 ʻ前ʼ이 ʻ下ʼ로 되어 있다.
533) 한학수(1874년 출생)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이습(而習)이다. 1894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95위로 합격하였다.
불은면(佛恩面) 261
253. 고잔동(高盞洞)
草堂村裡竹農家초당촌 안에 있는 죽농 선생 댁에서,
話舊談新日欲斜옛 이야기 요즘 이야기 하면서 해가 저물어가네.
早識眞工傳世世참된 공부 일찍 알아 대대로 전하니,
滿架書香摠是花서가에 가득한 책이 모두가 꽃이로세.
○ 능성 구씨는 강암공의 후손으로서 진사를 지낸 구심(具諶)은
효행으로써 천거되어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냈다. 그 아들 구창징
(具昌徵)534)은 40세에 학문을 시작해서 큰 선비가 되었으며 진사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그 동네 이름을 초당촌(草堂村)이라고 하였다. 그
7대손 죽농(竹農) 구연승(具然昇)은 나와는 매우 친한 친구이기에 서
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강암공은 이름이 구강(具綱)인데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한림18
걸, 대각을 지냈다.
254. 지천(芝川535))
芝川一曲向東流지천이 한 번 굽어 동쪽 향해 흐르는데,
羅列家基小洞幽작은 마을 그윽한 곳에 나씨 집들 모여 있네.
三十年前書榻上30년 전부터 있어온 책상 위에서,
慇懃月色訂前遊은근한 달빛이 옛날 교유 일깨워주네.
534) 구창징(1585년 출생) 본관은 능성(능성)이고 자는 덕형(德亨)이다.
535) 불은면 고릉리 고잔마을 지레이다.
262 譯註 沁都紀行
○ 지천(芝川)은 고잔동(高盞洞)의 작은 지명이다. 주사 나진국(羅
鎭國)과 정교 나홍교(羅鴻敎)는 나와 매우 친한 사이로서 오랫동안
같이 노닐던 가문의 사람들이다.
○ 내가 일찍이 30년 전에 한제수(韓霽洙)와 이곳에서 노닐었다.
255. 곶내동(串內洞536))
世世崔居串內洞곶내동에 대대로 살고 있는 최씨 가문,
童蒙敎授兩旌門동몽교수 그 집안에 정려문이 두 개 섰네.
朝耕暮讀承承業아침 밭갈이 저녁 독서가 대를 이은 가업이라,
勉使兒孫覺有源자손들에게 연원이 있음을 깨닫도록 면려한다네.
○ 곶내동(串內洞)은 작은 지명으로 조경리(朝耕里)이다. 최사과(崔
司果)의 가문이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고조, 5대조는 일찍이 효행
으로써 정려문을 내려받았다.
256. 두두촌(斗頭村*)
四月淸風返舊居4월의 맑은 바람 맞으며 옛집에 돌아오니,
終頭至尾摠如如머리(頭)부터 꼬리(尾)까지 모두가 한결같네.
倚窓坐讀江都賦창가에 기대 앉아 강도부를 읽다가,
呼覓楮毛更一書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다시 글을 쓰노라.
536) 불은면 고릉리 아침가리마을이다.
불은면(佛恩面) 263
○ 내가 두두촌(斗頭村)에서 시작하여 강화부의 산천과 고적을 관
람한 후에 다시 두두미(斗頭尾)로 돌아왔으므로 머리부터 꼬리까지였
다고 할 수가 있다. 닥나무(楮)와 털(毛)은 곧 종이와 붓을 말한다.
○ 강화는 경기지역에 있으면서 동서로는 40리요 남북으로는 70리
이고 둘레는 280리 107보이다.
○ 예전의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는데 고구려 때에 처음으로
군을 두었으니 혈구군(穴口郡)이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
口郡)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 신라 때에는 진을 두어서 혈구진(穴口
鎭)이라고 하였다. 고려 때에는 예전의 이름을 이어서 현을 만들었
다. 천도할 때 미쳐서는 강화를 심주(沁州)라고 하였는데 군을 두고
서 강도(江都), 심도(沁都)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 이후로는 인천
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며 또 부를 두어서 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우리 태종조 때에 부를 도호부로 승격시켰고 광해군 때에는 부윤으
로 승격시켰다. 인조 때에는 유수로 승격시켰고 숙종 때에는 진무영
을 두었으며 정조 때에는 통어영을 옮겨서 소속시켰으니 모두 유수
와 겸하였다. 그 뒤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하고 둔 것이 한결같
지 않다.
○ 이민서(李敏叙)의 강도부(江都賦)는 다음과 같다. “세 강이 모
이는 곳이며, 한성 입구의 요충지라네.(三江之會 京口之衝) 하류의
형승을 건너서, 외론 섬에 걸터앉았네.(跨下流之形勝 屹孤島之峙中)
두 도읍의 보필이고, 세 곳 당겨 만나네.(聯二都而作輔 控三方而通
漕) 미리미리 준비해서, 밤의 통곡 없게 하네.(宜未雨之綢繆 備暮夜
之惕號) 겹성 쌓아 웅거하니, 열성조의 교훈이라네.(設重防而據要 有
列聖之洪規) 명을 받은 이후에는, 요새 쌓고 군대 살피네.(余受命而
來牧 撫天險而視師) 못난 재주 부끄럽고, 평이한 계획 탄식하네.(愧
才能之不副 歎籌劃之無奇) 과거지사 한탄하며, 죽은 백성 통곡하네.
264 譯註 沁都紀行
(嗟往事之倉卒 痛百萬之魚肉) 저 오랑캐 벌할 것을, 조정에선 계획없
네.(彼竪子之何誅 亦廟謨之不立) 후일을 경계하자니, 화란 원인 어지
럽네.(孰毖後之是圖 迷禍敗之所因) 특별히 의지하련만, 이것 버리고
어찌하리?(欲憑依而負恃 又舍此而何適) 온고지신 하는 것이, 제승하
는 계책이라네.(或賤舊而貴新 非制勝之善經) 결정못해 흔들리니, 그
누가 결정하리?(徒擾攘而不決 孰內斷於冥冥) 보배를 버렸으니, 어떻
게 찾겠는가?(擲奇寶於道傍 更遑遑而焉索) 대책안이 원칙없어, 어떻
게 보완하리?(旣設備之無素 尙虛名而何益) 내 계획 못쓰지만, 책임
회피 두렵다네.(知吾謀之不用 恐不言之有責)”
○ 이정섭(李廷爕)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하는 안팎으로 관방
이 견고한데,(山河表裏壯關防) 유수부는 모든 섬의 중심이 된다네.(留
守權爲列島綱) 토양은 평평하고 탁트인 형세이고,(壤土平鋪開局勢) 백
성이 사는 집은 담장이 접하였네.(閭閻錯落接垣墻) 여러 지역 경작지
엔 벼나락이 자라고,(良田䆉稏東南畝) 연해의 어염으로 상인이 모여
드네.(沿海魚鹽大小商) 나라에서 여러 나무 심기를 바라니,(寄語邦侯
多種木) 못난 선비 말 못하지만 뜻만은 길다네.(腐儒言拙意還長)”
○ 신라 경덕왕 때에는 혈구(穴口)를 고쳐서 해구(海口)라고 하였
다. ○ 원성왕 때에는 혈구진(穴口鎭)을 두었다.
○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병을 피하기를 의논하였는데 최우
(崔瑀)가 왕을 도와 도읍을 옮겼다. ○ 20년(1233)에 외성(外城)을
쌓았다. ○ 21년(1234)에 여러 도의 병사들을 불러서 궁궐과 백사를
지었다. ○ 24년(1237)에는 승려들이 외성을 쌓았다. ○ 40년(1253)
에는 갑곶강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하였다. ○ 43년(1256)에는 몽고
병이 갑곶의 강 바깥에 이르러서 깃발을 크게 벌렸다. 민전에 말을
방목하였고 통진산(通津山)에 올라서 강도를 바라고 왔다. ○ 45년
불은면(佛恩面) 265
(1258)에 몽고군대가 갑곶의 강 바깥에 이르렀다. ○ 46년(1259)에는
몽고의 사자 주라는 자가 내외성을 모두 헐었다. ○ 원종 11년
(1270)에는 개경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
禧)가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렸다.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숨었다. ○
몽고의 장수 타리대(朶利대)는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재물을 약
탈하고 성 내의 인가를 불태웠다.
○ 충렬왕 16년(1290)에 거란병을 피하여 강화로 옮겼다. ○ 18년
(1292)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 공민왕 9년(1360)에 왜인이 와서
노략질을 하니 300여 명이 죽었고 쌀 4만 석을 약탈해갔다. ○ 14년
(1365)에 왜구가 와서 도둑질하였다. ○ 또 왜구가 왔다. ○ 16년
(1367) 왜인이 와서 약탈하였다. ○ 신우 2년(1376)에 왜인이 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 3년(1377)에 왜가 다시 와서 노략질을 하여 크
게 살육을 일삼았다. ○ 13년(1387)에 왜가 와서 노략질하였다.
○ 본조의 광해군 무오년(1618)에 북쪽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무찰
사 심돈(沈惇)을 파견하여 외성을 쌓고 별당을 지었으며 또 체찰사
이경전(李慶全), 우의정 조정(趙挺), 호조참판 권반(權盼)이 배를 타
고 바다를 순찰하여서 보장지라고 결정하였다.
○ 인조 5년 정묘년(1627)에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의 군대를 따
라 들어가 노략질하였으니 평산(平山)에 이르러 상이 강도로 행차하
였고 또 오랑캐와 화친을 맺었을 적에 환도하였다. ○ 14년 병자년
(1636)에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김경징(金慶徵)을 검
찰사로 삼고 이민구(李敏求)을 부사로 삼아 강도를 지키게 했고, 종
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숙의,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도
모두 들어왔다.
○ 상이 행차하여 숭례문에 이르렀는데 오랑캐가 서교(西郊)에 다
다라서 그 말을 옮겨서 행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한산성으로
266 譯註 沁都紀行
몽진하였는데 김경징 등은 그 험준함을 믿고 대비를 느슨히 하였다.
정축년(1637) 정월에 오랑캐가 물러나자 작은 배를 만들고 갑곶을
건넜다. 김경징 등이 겁을 먹고 달아났고 유수 장신(張紳)도 배를 타
고 도망갔다. 오랑캐가 부성(府城)에 들어오자 종묘와 사직이 몽진되
었으며 사녀들이 많이 죽임을 당했다. 빈궁 이하는 남한산성에 도달
하였고 마침내 성의 아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