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점면(艮岾面351))
150. 별립산(別立山)
別立山高石萬層별립산 높이 솟아 돌계단도 많구나,
盤龍蹲虎勢騰騰서린 용과 웅크린 호랑이가 뛰쳐 오르는 듯.
大海環從西北注큰 바다 감아 돌아 서북쪽에서 흘러드니,
應使遐夷不可升응당 변방 오랑캐는 오를 수가 없었네.
○ (해설문 없음)
151. 창교동(倉橋洞352))
倉橋洞在海西濱창교동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
李具書樓共是春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
因說閑中還有攪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
石工鹽賈往來頻석공과 소금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
○ 이 지역은 송계(松溪)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인 청해 이씨, 강
암공(江菴公)의 후손인 능성 구씨가 거주하고 있다. 땅의 모양이 산
을 등지고 바닷가에 임하고 있어, 바다에는 소금이 생산되고 산에는
돌을 뜨는 곳이 있으니, 석수(石手)들과 소금장수들이 빈번히 왕래
351) 현재 하점면에 편입되어 있다.
352) 하점면 창후리의 창교동이다. 창말, 사탯말, 샛말을 통틀어 일컫는다.
184 譯註 沁都紀行
하고 있다.
152. 강후동(江後洞353))
別立山前江後基별립산 앞쪽의 강후마을이 있는데,
隱居韓友老於斯숨어 사는 한씨 친구 여기서 늙어 가네.
侍堂侍墓平生孝사당 지키고 선영 지키며 평생토록 효도하니,
天地知之日月知하늘과 땅이 알고 해와 달도 안다네.
○ 서원(西原)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354)의 후손인 한정리(韓鼎
履)가 이 강후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효성이 남보다 뛰어나서 사
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나와는 특별히 우정이 도탑다.
153. 이현동(梨峴洞355))
梨峴來尋表弟家이현마을 이르러 외가 아우 찾아가서,
終霄情話海無涯밤새도록 정다운 얘기 끝이 없이 이어졌네.
紅蓮幾出三槐蔭삼괴정의 음덕으로 여러 사람 벼슬 꽃 피니,
一片江州處處花강화도 곳곳에 꽃동산이 생겼네.
353) 하점면 이강리의 강후동, 함촌말이다.
354) 한확(1403∼145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355) 하점면 이강3리 이현(梨峴, 배고개, 배우개 마을)이다.
간점면(艮岾面) 185
○ 이현(梨峴)은 한씨들이 대대로 사는 곳이다. 한경린(韓景麟)은
아우 한경갑(韓景甲)·한경곤(韓景鯤)과 함께 삼괴정(三槐亭)을 짓고
서 학문을 이루었다. 한경린은 문과에 급제하여356) 대간, 해주 판관
을 역임하였다. 아우 한경갑도 문과에 급제하여357) 충청도사를 지냈
으며 한경곤은 진사에 합격하였다. 삼괴정의 그 옛 터가 아직도 이
동네에 있으니 삼괴의 한씨들이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손자 한수검
(韓守儉)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한수온(韓守溫)과 한수겸(韓守謙)은
무과에 합격하여 진무공신이 되었고 한수공(韓守恭)은 무과에 합격하
여 첨정이 되었다. 그 후에 과거 합격자가 강화의 사방에서 많이 나
왔으니 한씨들은 모두 삼괴정 한경린의 후손들이다.
○ 나의 외사촌 한일석(韓一錫)은 자가 여집(女執)인데 이 종친으
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
154. 이현동 덕수이씨(德水李氏*)
柿林來訪李兄居감나무 숲 이씨 형이 사는 곳을 찾아가니,
三疊淸琴一架書삼첩의 거문고와 서가 가득 책이 있네.
簪紱曾投司憲府일찍이 사헌부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時從野老自怡如지금은 촌로 따라 유유자적 살고 있네.
○ 덕수 이씨인 이기영(李基永)은 자가 여방(汝邦)으로 택당(澤堂)
이식(李植)358)의 후손이다. 강화부의 분교관(分敎官) 이규신(李奎信)
356) 한경린은 1582년(선조 15) 식년시(式年試) 을과에 합격했다.<국조문과방목>
357) 한경갑은 1585년(선조 18)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합격했다.<국조문과방목>
358) 이식(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186 譯註 沁都紀行
의 종손(從孫)이다. 일찍이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때때로 이웃의 벗들을 따라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155. 삼거동(三巨洞359))
三巨洞中訪沈兄삼거리에 들어와서 심씨 형님 찾았는데,
從前文學大家聲종전엔 문학으로 대가 명성 있었다네.
靑衫白髮前司馬청삼 입고 백발을 한 사마(司馬)를 지내신분,
指導門庭幾後生그 집에서 가르친 후학들이 많다네.
○ 청송 심씨 청천군(靑川君)의 후손 충렬공(忠烈公) 심현(沈
誢)360)과 사촌동생 심숙(沈諔)은 병자호란 때에 의병장이 되어서 오
랑캐가 다다르자 강가로 달려 나가 전쟁하다가 죽어서 다시 돌아오
지 못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충성을 표창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그 후손들은 모두 이곳에
살고 있는데 모두 문학으로써 옛날부터 이름이 있었으며 그 중에 심
능철(沈能徹)361)은 갑오년(1894) 사마시에 합격하여 돈녕부 도정을
제수받았다.
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359) 하점면 신삼2리 삼거동, 서촌마을이다.
360) 심현(1568∼16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화(士和). 돈녕부 도정을 지
냈다.
361) 심능철(1874년 출생) 자는 통일(通一)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간점면(艮岾面) 187
156. 신성동(新成洞362))
新成洞有古人風신성동엔 옛 사람의 풍습이 있으니,
兩李門前一逕同두 분 이씨 정려문이 한길로 연결되네.
竊想當時忠孝烈당시의 충성 효열 가만히 생각해 보니,
炳然星日海天東동쪽 바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누나.
○ 이문위(李文偉)는 청해 이씨 청해백(靑海伯)의 후손이다. 강화
부의 부윤 이중로(李重老)363)의 아들이다. 인조 갑자년(1624)에 이괄
(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그의 아버지 이중로는 방어사로서 강음
(江陰)의 마탄(馬灘)에서 적과 대항하였는데 군대가 패하자 의리상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적장인 이수백(李守
白)364)은 평소 이중로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물속에서 그 시신
을 가져다가 목을 잘라다가 이괄에게 바쳐 공을 노렸다. 이괄이 패
하자 이괄의 머리를 가져다가 관군에게 보내고 이괄의 난이 평정되
자 조정에서는 그를 사형시켰다. 이문위는 그 아우 이문웅(李文雄)과
반드시 보복하려는 마음먹었다. 마침내 이수백을 큰길가 사람이 많
은 곳에서 목을 쳐서 그 목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와 죄를 청하였는
데, 상이 현명하게 여겨서 삼사에 특용하였고, 이름을 드러내어 충청
병마사까지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서 이문위의 어머니 정씨는 목릉
(穆陵 : 선조)의 재상 정언신(鄭彦信)의 딸이었다. 이중로가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에 미치자 몸소 전장을 돌아다니며 시신을 수습하고
상을 치렀는데 탈상을 하지 않으니 친척들이 모두 예를 넘어서는 것
362) 하점면 신삼1리 신성동, 동촌마을이다.
363) 이중로(1577∼162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364) 이수백(?∼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188 譯註 沁都紀行
을 의심하였다. 얼마 안 있어 두 아들이 이수백을 베니 정씨가 그것
을 듣고 통곡하면서 “아이들이 능히 그 일을 해냈구나.”라고 하고
는 수백의 머리를 가져다가 이중로의 영전에 고하고 제사상을 차렸
다. 이때까지 모두 11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능히 놀라고 탄복하였
다. 이문위가 죽자 그 제문을 하사하였는데 “일문의 충효는 고금에
보기 어렵구나. 주곤(州閫)을 지내면서 큰 실적이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 아들 이수(李脩)는 관직이 사평에 이르렀으며 이수의 아들은
이광도(李廣道)365)이다. 숙종 을유년(1705)에 진사가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세 임금을 섬겼으며 사간으로서 종성부사에 제수받았고 임
지에서 죽었다.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 연안 이씨는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366)의 아들인 충민공(忠
敏公) 이돈서(李敦敍)367)이다. 그 일이 충렬사의 주(註)에 보인다. 그
후손 교리 이중련(李重蓮)368)의 고손은 이의록(李義祿)인데 여기서
살고 있다.
365) 이광도(1673년 출생)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청해(靑海).
366) 이기설(1556∼162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367) 이돈서(1599∼1637)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륜
(子倫), 호는 만사(晚沙).
368) 이중련(1765년 출생) 본관은 연안(延安). 1790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
(丙科) 2위로 합격했다.
외가면(外可面) 189
외가면(外可面369))
157. 삼거동(三巨洞)
多雲里是外三街삼거리 바깥쪽에 다운리370)가 있는데,
安李分居碧樹崖안씨와 이씨가 푸른 숲 언덕에 나뉘어 사네.
堦下長坪連望月섬돌 아랜 망월 벌판 널따랗게 이어있고,
春耕夏耨養禾佳봄 밭 갈기와 여름 김매기로 벼를 잘도 길렀네.
○ 외가면(外可面) 삼거동(三巨洞)에는 강진 안씨(康津安氏),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많이 살고 있다.
158. 망월동(望月洞371))
望月洞開大野中망월동은 넓은 들판 가운데에 펼쳐있고,
烏橋春水鵲橋通까마귀다리 봄물은 까치다리로 통하네.
水秧旱播隨天氣비 오면 모내고 가물면 씨 뿌려 날씨를 따르지만,
穡事年年實有豊해마다 농사일은 풍년이 든다네.
○ 망월동(望月洞)의 서쪽 아래에는 오교(烏橋)가 있고 위로는 작
교(鵲橋)가 있으니 모두 큰 평야이다.
369) 외가면 전 지역은 1914년 하점면에 편입되었다.
370) 하점면 망월1리 다운리 마을이다.
371) 하점면 망월리이다. 마을이 벌판 가운데 있어서 달을 보기에 좋은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