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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번 게시물 시작] ==========================================================
소개자
암을 예방하기 위한 12개 조항
1. 균형잡힌 영양을 섭취할 것!(다채로운 식단 마련!)
2. 매일 변화있는 식생활을 할 것!(다양한 패턴!)
3. 과식은 피하고, 지방은 적게 먹을 것!(맛있는 음식도 적당히!)
4. 술은 가능한한 마시지 말 것!
5. 담배는 절대로 피우지 말 것!
6. 비타민과 섬유질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할 것!(풍부한 녹황색 채소!)
7. 짠 음식은 적게 먹고, 뜨거운 것은 식혀서 먹을 것!(위와 식도를 아끼자!)
8. 탄 음식은 피할 것!(돌연변이 조심!)
9. 곰팡이가 핀 음식에 주의할 것!(먹기전에 꼭 체크하기!)
10. 햇빛을 너무 많이 쬐지 말 것!(태양은 장난꾸러기!)
11. 적절하게 운동을 할 것!(좋은 땀 흘리자!)
12.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것!(기분도 깔끔하게!)
(S암연구센타)
#=== [7번 게시물 시작] ==========================================================
소개자
건강에 좋은 호두
호두가 악성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효과가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호두가 심혈관 질환과 연관이 있는 악성 콜레스테롤인 저밀도지단백(LDL)의 혈중농도를 감소시키는 작용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호두를 곁들인 보통식사와 저지방 식사를 했을 때는 혈중LDL이 각각 27%와7% 감소했다. 호두는 원래 칼로리가 높지만 이를 먹은 사람들은 전혀 체중이 늘어나지 않았다.
호두는 n-6와 n-3 다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이중 n-3 다불포화지방산은 혈전을 막고 심박동을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고 밝혀졌다.
#=== [8번 게시물 시작] ==========================================================
민고니
사라진 삼일절
언제부터인가 학교의 3월은 첫날이 없다. 우리의 새 학년도는 3월 2일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학교에는 삼일절이 없다. 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초년 시절의 새 학기는 '기미년 삼월 일일 저엉오'로 시작되었다. 교문이 보이는 네거리를 동무들과 무리 지어 지나노라면 벌써 학교 지붕 위 확성기에서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가 터져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은 어린 우리들이 운동장에 다 모일 때까지 삼일절 노래와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숨이 진 유관순 누나'의 이야기를 웅변으로 풀어 나갔다. 조회대 옆으로 나란히 서신 선생님들과 얼굴에 마른버짐 핀 코흘리개 우리들의 새 학년은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아진 날을 들어 새기며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신 '선열'과, 하나로 뭉친 '삼천만 동포'와 더불어 일단 시작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비록 왜 이 날이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속에 차오르는 뜨거운 무엇을 느끼며 새 학년도의 첫날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기념식은 우리가 '방구를 국시(국수)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무운(먹은) 것을 잘 소화시킨다'는 식으로 어려운 말 투성이의 '혁명고약'을 암기하기 시작한 이후 학교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교단에 있는 어느 누구도 나의 어릴 적 선생님들처럼 학생들과 더불어 삼월 첫날의 의미를 나누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겨레와 나라의 어제 오늘을 되새겨 볼 광복절은 여름 방학 속에 갇혀 있고 일제 강점 10년 만에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치열하게 전개한 반외세자주독립투쟁의 역사를 기릴 날은 아예 학사력에서 지워지고 없으니까. 이는 항일투쟁정신의 계승을 꺼린 세력들의 음모의 결과다. 잘 알다시피 그 세력은 해방 후 미군정의 비호 아래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이다. 민족사적 정통성이 취약한 이들로서는 항일투쟁사의 진실이 후손에게 교육되고 기억되는 것이 두려웠을 터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다. 저들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정부와 국회는 200억원의 예산을 이미 지원했고 기념사업회는 500억원의 국민 모금을 하여 올해 기어코 삽질을 한단다. 이 사업회는 기념관이 생기면 박정희 개발 모델을 흠모하는 제3세계의 자랑거리가 될 거라고 선전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1/3이 정신병력이 있다는 최근의 보도가 실감난다.
뒤죽박죽이다. 해방된 나라에서 독립투사와 그 자손은 헐벗고 외세에 빌붙은 친일파들은 여전히 떵떵 거린다. 이완용의 자손이 판결로 땅을 되찾고 미당 서정주의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우리 교과서에는 친일반민족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친일파가 세운 대학교는 설립자의 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작년 12월 친일사업가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
한 서울 광신학원 동문회의 결단은 돋보인다.) 재작년 한교총 등이 주도한 일본의 역사왜곡교과서에 항의하는 집회에서는 '울 밑에 선 봉선화야'를 엄숙하게 불렀단다. 역대 회장 중 친일파가 한둘이 아닌 단체이니 홍난파나 이광수나 최남선이나 그 분들의 눈에는 모두 민족 지도자로 보였으리라. 학생들이 밑줄 쳐가며 보는 한국 명시선에는 윤동주와 노천명 등이 같은 반열에 수록되어 있다.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삼일절이 학교에서 사라진 40년 동안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 앞에서 풀지 못한 숙제는 뒤로 미루어지는 법이다.
딴 나라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2차 대전 직후 부역자(collabo) 청산에 모범을 보여 우리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지난 1월 성탄절 방학을 끝내고 등교한 고등학생들에게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빅토르 위고를 일제히 가르치라는 교육부의 지침이 있었다. 위고는 19세기 혁명과 반동의 격동기 프랑스 사회에서 변혁의 노선을 걸어 권력의 탄압을 받았으나 역사는 그를 대문호의 반열에 올려 놓았으니 그를 가르치라는 정부나 그를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들이나 조국의 역사에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계승할 보편적인 가치를 당당하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나라의 교사와 학생들은 참 떳떳해 보인다.
사회적 가치기준이 엉망으로 꼬인 우리 나라의 교사들은 이런 세월을 무덤덤히 살고 있다. '돈 많이 버세요' 라는 새해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학년이 바뀌는 바쁜 와중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3월 1일을 하루의 휴일로 즐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입학식이다 새 업무분장이다 분주하게 돌아간다. 일년 365일 과다한 수업과 잡무와 학생들과 부대끼다 보면 우리 교사들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학생들의 삶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전교조가 제창한 올해의 참실 주제 '교사와 학생의 새로운 관계 정립'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자본운동의 일개 자원으로 여기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야심찬 <국가인적자원개발 기본계획>에도 가치교육의 영역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이 교사와 학생의 세계관과 가치관 인생관 등의 형성에 관계하는 행위라면 우리 학교의 한해 한해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라고 해서 우리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꺼삐딴 리'를 인생의 본으로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사회의 무질서와 도덕적 해이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역사 미청산 문제 앞에서 우리 교사들이 그 방도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동안 의미있는 시도는 교육계의 바깥에서 전개되고 있다. 작년 12월 2일 발족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이 그 하나다.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이 사업은 '제2의 반민특위' 운동으로 자임하고 있다. 이 사업은 반민특위 해체 50주년이 되는 3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만 명의 교수들이 지지 서명을 했다. 그러나 사업의 역사적 의미나 규모에 비추어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34만에 이르는 우리 교사들이 동참할 몫이 있을 것이다. 이 사업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다면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교육이 될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날, 삼일절의 진정한 복원과 더불어 분단된 우리 민족의 숙원인 해원과 상생의 시대가 비로소 그 문을 열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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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번 게시물 시작] ==========================================================
인가비
일제 만행 문건 새로 발견!!
3,1절을 기해 읽어보는 새로운 일제만행 문건(일부: 현재 번역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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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 장광영)가 지난 해에 공개한 아서 노블 선교사의 부인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의 육필 일기와 문건은 일제에 의한 교회 학살 사건 등 3.1 운동 당시의 진상을 상세하고 기록하고 있는 데다 고종 황제 관련 내용 등 미공개 자료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한국 근대사의 잊혀진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노블 여사의 일기는 특히 3.1운동 당시의 세세한 상황을 역사의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목격,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3.1 운동 당시의 진상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지난 1월 아펜젤러 2세의 딸이자 노블 선교사의 외손녀인 마가렛 하일러에 의해 전달된 2권의 문서와 자료집에는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교회 외에도 수원역(Suwon railroad station)에서 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사강리(Sakan-ni)와 인근 마을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음이 기록돼 있는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노블 문건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만 326채의 집이 불에 탔으며 39명이 사망하고 1600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일본 경찰이 발포하자 군중들이 일본경찰을 돌로 죽인 내용 등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언급돼 있다.
또 이번 노블 문건에는 고종 황제를 독살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배 사진이 실려 있는 등 미공개 자료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따라서 기감측이 발굴한 이번 문건들은 국사편찬위원회 등 정부 및 학계의 정확한 확인 과정을 거쳐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함으로써 한국 근대사의 잊혀진 부분들을 진실되게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노블 여사의 일기는 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위원인 김대구 권사가 미국 현지 여러 곳을 다니며 수집한 뒤 기감측과 비공개리에 번역 작업을 해왔다. 특히 지난 1월 아펜젤러 2세의 딸이자 노블 선교사의 외손녀인 마가렛 하일러에 의해 전달된 2권의 문서와 자료집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정확한 분석과 확인 작업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잊혀진 부분에 대한 복원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노블 일기 발췌록=
美 노블선교사가 목격한 日帝만행 일기 주요부분 발췌록
일제에 강제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고종은 결국 독살 당하고 독살 사건은 3·1만세운동을 촉발했다. 당시 미국 감리교 선교로 정동에 머물렀던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의 일기는 그 날의 민족 함성을 생생히 전달한다.
다음은 노블 선교사의 일기다.
◇1919년 3월1일=
오늘은 조선에서 위대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지속될지 누가 알겠는가. 오후 2시를 기하여 모든 학교, 중학교 이상의 학교가 일제 지배에 항거해 수업을 거부했고, 학생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손을 높이 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거리의 사람들도 합류했고 그 기운찬 외침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창문으로 긴 행렬이 모퉁이를 돌아 궁궐 담 주위를 행진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여학교 학생들도 행진했다.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이화학당 앞으로 가서 여학생들에게 나와 합류하라고 소리쳤다.
여학생들이 몰려나오자 월터양이 기모노 차림으로 나와 학당 정문을 걸어 잠그고 여학생들을 가로 막았으며, 아펜젤러씨와 테일러씨까지 나와서 막는 바람에 결국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몇몇 남학생은 거칠게 항의했으나 결국 거리로 돌아가 행진을 계속했다.
오전에는 고종황제가 일제의 사주로 살해된 것이란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 고종이 일제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전갈을 파리 강화회의에 전하려 했기 때문에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오후 2시쯤 거리는 온통 ‘기미독립선언서’란 전단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이제 독립이 됐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행복해 했다.
또 교회지도자들도 조선과 일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이 청원서(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오늘의 모든 시위는 기미독립선언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과 하와이, 미국 본토에서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오늘 시위를 보고 받게 될 것이다. 온 나라 백성들이 시위를 통해 이들 회의에 참석하는 조선 대표들을 밀어주면 이들이 우방 대표들에게 전하는 독립선언서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3월2일=
조선국가협의회(The National Society of Korea) 명의의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 방금 뛰어나가서 가져와 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오, 황제는 참담한 심경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황제께서 어째서 돌아 가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200만 명의 충성되고 한국을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황제께서 어떻게 죽음을 당하셨는데 설명하려고 한다”.최근 강화회의에서 13개 결의안이 채택됐고, 거기에는 세계 많은 나라의 자유가 걸려 있다.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회의에서 확인됐다.
일제는 조선과 일본이 함께 움직일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 원치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다음과 같은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고종황제는 격노해서 서명을 거부했고, 그러자 서명을 강요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두려워 고종황제를 독살하고 상궁을 죽였다….윤덕영과 호상학. 조선과 일본이 아름다운 관계에 있다고 선언한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귀국 대표 이완용 △사회대표 조충웅 △유림 및 사림 대표 김임식과 송병준 △황실 대표 임태영 △교육계 및 종교계 대표 신흥우”일본과 한국의 동등한 지위를 주창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조용히 품위 있게 수행했다.
33인의 대표가 서명했는데 장로교회 감리교회 조합교회의 목회자들과 불교 천주교의 지도자들까지 포함됐다. 이들 모두와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주도한 남학생들이 어제 구속됐다.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애국심을 전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황제는 (시내에서) 약 15㎞ 떨어진 새 능에 매장됐다.
◇3월3∼4일=
매일같이 거리에 전단이 뿌려진다. 초기에 뿌려진 전단에서는 폭력시위가 계획된 바 없으며 폭력행위가 한국의 독립을 늦출 수도 있으니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종류의 폭력도 사용하지 말아 줄 것을 당부하였다.
◇3월5일=
오늘 아침 9시 남대문 역에서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남학생과 여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들은 함께 새로운 독립의 노래를 불렀다. 다행히 거기서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았으나 행진을 해서 덕수궁 앞까지 오자 사람들이 나타나 몽둥이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경들도 바빠졌다. 많은 학생이 심하게 맞았다. 이화학당의 여학생 한 명이 등을 두들겨 맞자 비서인 김평률이 뛰어나가 (폭행하는)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 민간인(그 중에는 민간인 행세를 하는 일경일 수도 있다)들은 그를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머리를 내려쳤고, 주먹으로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목을 가격했다. 결국 그는 감옥으로 끌려갔다.
일경은 사람들을 잡아갈 때 손을 밧줄로 칭칭 동여맸다. 한 일경은 어느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돌리다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해럴드가 이를 목격했다. 이화학당의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을 막으려 무척 노력했지만 20명의 학생들이 빠져나갔다.
◇4월16일=
레이몬드 커티스 부영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씨,그 리고 테일러씨가 제암리로 가서 직접 학살의 현장을 확인했다. 그 마을은 남편 아서 노블의 수원구역 내에 있다. 그들은 얘기도 듣던 것보다 훨씬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시체뿐이었고, 타들어간 시체의 냄새는 속을 메슥거리게 할 정도였다. 곡식창고와 가축들도 같이 타버렸다.
일본 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남자들을 불러모았고, 사람들이 모이자 교회에 불을 질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태워 죽였다. 도망치려는 사람은 쏴죽였
다. 남편이 어찌 됐는지 알아보러 여자 두 사람이 교회로 오자(한 사람은 42세, 한 사람은 19세였다) 일본 군인들은 그들도 총으로 쏴죽였다. 나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이들에게 달려가 “나도 죽여라 이놈들아”라고 울부짖자 즉시 사살해버렸다.
◇4월19일=
영국 대리공사인 로이드씨는 사람들을 모아 불타버린 다른 마을로 갔다. 모두 수원의 남양지역에 있었다. 아서의 관할구역이었으므로 같이 가자고 했고, 스미스씨는 통역으로 갔다. 인터내셔널 뉴스 특파원인 테일러씨도 동행했다. 원래 그는 재판 참석차 평양에 갈 예정이었으나 미국공사 베르골즈씨가 평양보다는 학살현장으로 가서 보고 나중에 본국에 기사를 전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지에 가니 사람들은 겁이 나서 그런지 환자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돕다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까 겁에 질려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살해되고 있으나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로이드씨와 일행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근처에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마을 양쪽 끝의 몇 집을 빼고는 성한 집이 없었고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산으로 도망쳐 풀뿌리나 나무뿌리를 캐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서는 살해당한 우리 교단의 목사 아들을 보았는데, 그는 핏발 선 눈에 산발한 채 집과 시체의 잿더미 못을 파헤치고 있었다고 한다. 아서가 일본 군인들의 감시를 피해 교인 중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러 여자들에게 다가가자 어떤 여자가 교인 중 총에 맞거나 타죽은 사람들 11명의 이름을 적어줬다.
아서는 또 야산에 올라가 여자들을 몇 명 보았는데 그들은 그를 보고 도망쳤다고 한다. 무서워하지 말라며 부르자 반쯤 멈춰 섰는데, 군인이 근처에 있는 지부터 살펴봤다. 아서를 알아보고는 안심했으나 누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나 걱정부터 했다. 아서는 아무도 본 사람들이 없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급히 작별하면서 한 여자에게 10엔을 건넸다.
#=== [10번 게시물 시작] ==========================================================
소개자
심심풀이용: 미국의 대통령들(1)
=링컨과 케네디의 절묘한 공통점=
- 링컨은 1846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케네디는 1946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 링컨은 1860년 미국 대통령에 뽑혔고,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통령에 뽑혔다.
- 링컨(Lincoln)과 케네디(Kennedy)는 둘 다 알파벳 일곱 자로
되어있다. (글자수 세어보는 저 세밀함...)
- 둘 다 인권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으며,
- 둘 다 백악관 시절에 아이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 둘 다 금요일에 세상을 하직했으며,
- 둘 다 머리에 총을 맞았다.
(아직까진 그저 그런 평범한 내용이다. 그러나...)
- 링컨의 비서는 케네디라는 성을 가졌고,
케네디 비서의 성씨는... 링컨이었다.
- 둘 다 남부사람에 의해서 저격되었고,
- 남부출신 사람이 각각 두 사람의 다음 대통령이 되었다.
- 둘 다 후임 대통령 이름이 Johnson이었고,
- 링컨의 후임인 Andrew Johnson 대통령은 1808년에 태어났고,
케네디 후임인 Lyndon Johnson 대통령은 1908년에 태어났다.
(정말 절묘하다. 그렇지만 여기까진 아무것두 아니다)
- 링컨을 쏴죽인 John Wikes Booths는 1839년에 태어났고,
케네디 저격범 Lee Harvey Osward는 1939년에 태어났다.
- 두 살인자 모두 세 단어로 된 이름을 갖고 있고,
두 살인자 모두 이름이 알파벳 15글자이다.
(아까 대통령 이름 몇자인지 세어본 사람이 얘네들 이름두 셋을꺼다...)
- Booth는 극장에서 뛰쳐나와 창고에서 잡히고,
- Osward는 창고에서 나와 극장에서 잡혔다.
- Booth, Osward 둘 다 재판전에 저격당해서 죽었다.
그리고 경악할 만한 사실...
-링컨은 죽기 일주일전 Marylyn의 Monroe라는 데 있었고
-케네디는 죽기 일주일전 Marilyn Monroe와 있었다는거다
-이 사실들은 모두 사실로 확인 되었다....!
심심풀이용: 미국의 대통령들(2)
부시와 빈라덴이 전쟁을 하고 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부시와 빈라덴이 체스(서양장기라고도 하는...)를 두고 있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
서양인들은 누구나 스스름없이 쉽게 대답한다.
"당연히 빈라덴이 이길거라고...!"
왜 그런가고 물어보라! 대답은 간단하다!
'투름'을 둘씩이나 잃고하는 대국이니까...!
(-주: 투름=타워=동양장기에서 '차','포'에 해당하는 높은 건물)
요즘 서양에서 회자되고 있는 유머의 하나이다.
P.S.:
자녀들과 함께 풀어보시라(상식퀴즈):
-다음 중 전쟁과 관계없는 미국의 대통령은?
①링컨 ②윌슨 ③루즈벨트 ④트루만 ⑤아이젠하워
⑥케네디 ⑦죤슨 ⑧닉슨 ⑨부시(부) ⑩부시(자)
[참고자료]
*미국의 역대 대통령 명단:
01. G.와싱턴(-): 1789-1797(8)
02. J.아담스(F): 1797-1801(4)
03. T.제퍼슨(D-R): 1801-1809(8)
04. J.매디슨(D-R): 1809-1817(8)
05. J.먼로(D-R): 1817-1825(8)
06. J.Q.아담스(I-R): 1825-1829(4)
07. A.잭슨(D): 1829-1837(8)
08. M.반뷰렌(D): 1837-1841(4)
09. W.H.해리슨(W): 1841-1841(0:순직)
10. J.타일러(W): 1841-1845(4)
11. J.K.포(올)크(D): 1845-1849(4)
12. Z.테일러(W): 1849-1849(1:순직)
13. M.필모어(A): 1850-1853(3)
14. F.피어스(D): 1853-1857(4)
15. J.부캐넌(D): 1857-1861(4)
16. A.링컨(R): 1861-1866(5:암살)
17. A.죤슨(R): 1866-1869(3)
18. U.S.그랜트(R): 1869-1877(8)
19. R.B.헤이즈(R): 1877-1881(4)
20. J.A.가필드(R): 1881-1881(1:암살)
21. C.A.아더(R): 1881-1885(3)
22. G.클리블랜드(D): 1885-1889(4)
23. B.해리슨(R): 1889-1893(4)
24. G.클리블랜드(D): 1893-1897(4)
25. W.맥킨리(R): 1897-1901(4:암살)
26. T.루즈벨트(R): 1901-1909(8)
27. W.H.태프트(R): 1909-1913(4)
28. W.윌슨(D): 1913-1921(8)
29. W.G.하딩(R): 1921-1923(2:순직)
30. C.쿨리지(R): 1923-1929(6)
31. H.C.후버(R): 1929-1933(4)
32. F.D.루즈벨트(D): 1933-1945(12:순직)
33. H.S.트루만(D): 1945-1953(8)
34. D.D.아이젠하워(R): 1953-1961(8)
35. J.F.케네디(D): 1961-1963(3:암살)
36. L.B.죤슨(D): 1963-1969(5)
37. R.M.닉슨(R): 1969-1974(5:사직)
38. G.R.포드(R): 1974-1977(3)
39. J.카터(D): 1977-1981(4)
40. R.레이건(R): 1981-1989(8)
41. G.부쉬(R): 1989-1993(4)
42. B.클린튼(D): 1993-2001(8)
43. G.W.부쉬(R): 2001-(?)
심심풀이용: 미국의 대통령들(3)
미국 대통령들의 의식과 사상
현재 부시 대통령까지 미국 대통령은 43명 째이다. 모두 백인만의 대통령들이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무엇으로 보나... 누가 감히... 언제 감히... 흑인이나 황인이나 그 외 어떤 유색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볼 수 있겠는가... 수적으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모든 면으로 보나....... 더군다나 원래의 땅주인인 인디언들이야 잔존자체도 위태로운 지경이고...
그런데 이들 대통령들은 하나 같이 자유와 평등 뿐 아니라 평화를 주창하고 내세웠는데, 알고 보니 그들이 말하는 자유나 평등이나 평화는 백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백인위주의 그것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들의 의식 속에는 자기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사람, 즉 백인들만이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이야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특이한 짐승들이었고(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황인들은 흑인보다 못한 괴상하게 찌그러진 모양의 힘도 별로 없는 물건 쯤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실 동양인은 여러 면에서 흑인보다 더 인정을 못받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 예를 들어보자! 남달리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던 제퍼슨 대통령! 미국의 제 3대 대통령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는 미국인의 위대한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버지니아의 대 농장주로서 수많은 흑인노예를 부렸을 뿐 아니라, 흑인 첩을 거느리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부르짖어 미국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정착시킨 '자유와 평등'은 도대체 어떤 의미의 자유이며 평등이었단 말이던가?
제퍼슨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고백과 주장을 펼치면서도 흑인노예들을 부리는 자신의 행위에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짐승처럼 여기는 흑인 첩과 수간아닌 수간을 늘 행하며 살았다면,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 것인가?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 테지만,)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미국인을 대표하는 미 백인 대통령들의 자유와 평등과 평화에 대한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P.S. 반성해 보며...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개인이나 집단이나, 우리모두가 이기주의인 것을...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개인이나 집단이나, 힘이 곧 언제나 정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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